
그것은 아직 그녀가 아비도스의 신입생이던 시절의 이야기다.
얼마 전 오디세이아의 호화 유람선에서 일하다 돌아온 그녀의 선배, 유메가 어색해 보일 정도로 즐거운 티를 내며 자신이 배 위에서 본 것을 떠들어댔었다.
카지노의 화려한 조명, 쉴 틈 없이 오고 가는 칩, 수천수만 개의 금화들, 보석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술과 음료들, 그리고 토끼, 토끼, 토끼.
“그러다가 말이야~ 세상에 있지! 이~따만한 고래가 유람선의 바로 옆을 헤엄쳐 지나갔어! 나는 처음엔 무슨 잠수함인 줄 알았다니까?”
양팔을 최대한 넓게 벌려 그녀 나름의 최선의 묘사를 하는 유메, 호시노의 예리한 눈은 그녀의 드러난 목과 손목의 붉은 자국들을 포착했으나 애써 모른척하며 그 어색한 자랑에 대꾸해주었다.
“…저 실례지만, 고래라는 게 뭡니까?”
“어머, 우리 호시노쨩은 고래를 본 적이 없었구나? 하긴~ 나도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 실제로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우웅… 어떻게 설명한다?”
유메는 아랫입술에 손가락을 댄 채 잠시 고민하다 다시금 양팔을 넓게 벌렸다. 특징이랄 게 그것밖엔 없는 건가? 타카나시 호시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래는 이~따만하게 커~!”
“그건 아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무지무지 귀여워! 아, 호시노쨩 만큼은 아니지만.”
“…잠수함이랑 착각할만한 크기인데 귀엽다고요? 그건 그냥 바다괴수인 게 아닌지…?”
“아~니라니까! 아이참, 안되겠다. 차라리 선배가 수족관 데려가서 한번 보여주는 게 낫겠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하십쇼. 아까부터 말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크기로 수족관엔 도대체 어떻게 들어갑니까?”
“아 그런가? 우웅… 생각해보니까 정말 수족관에선 못 볼지도….”
그렇게 말하며 유메는 다시 아까 같은 자세로 고민에 잠겼다.
이 사람은 늘 이렇다. 엉뚱한 소리나 늘어놓고는 대꾸하면 했던 말을 또 반복한다. 그러니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대화가 나아가질 못하고 늘 제자리다.
그래,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의 아비도스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호시노쨩도 고래를 본 순간 알게 될 거야! 고래야말로 모든 물고기들의 우두머리고 바다의 왕이라고! 그런 품격을 가진 생물인 걸!”
“우두머리… 품격, 입니까.”
“그래! 그 위엄있는 풍채를 보면 호시노쨩도 입이 떡 벌어질 걸? 자연스럽게 그만 경외감이 들더라고! 앗, 지금 어려운 말 썼다.”
“…맞습니다, 선배. 우두머리라면 마땅한 품격과 위엄을 갖춰야지요. 보는 것만으로도 그만 그 머리를 조아리고 싶어질 만큼 말입니다.”
호시노는 결국 참지 못했다. 이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내다니.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못 본 척, 모른 척 해주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에? 저, 저기 호시노쨩? 화났어?”
“당신은 아비도스의 학생회장입니다. 그런데, 그런데도 당신은 그렇게 바보 같고, 헤실헤실 웃기나하고…! 대체 당신의 어디에 품격이 있고 위엄이 있는 겁니까? 이번엔 또 누구한테 맞고 온 건데요? 어느 학교의 어떤 새끼입니까!?”
“아, 아니야 호시노쨩! 이건 그냥 내가 칠칠치 못해서 그만…. 호시노쨩 제발 화 풀어. 선배는 바보라서 호시노쨩이 왜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응?”
“크윽…!”
호시노는 울먹거리는 유메의 얼굴을 보자 그만 참지 못하고 부실을 뛰쳐나가고 말았다.
이렇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탓하려던 게 아니라 대신 화내주려는 거였는데.
가장 힘든 건 당신이었을 텐데, 나는 또 그 마음에 의미 없는 못질만 분풀이하듯 해버리고 말았다.
바보는 나다. 타카나시 호시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타카나시 호시노는 여전히 고래가 어떤 생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감히 추측컨대―
‘그토록 거대하다면 감히 누구도 건들지도 가두지도 못하겠지.’
‘아비도스라는 새장 속의 우리와는 아득히 먼 존재겠지.’
사막의 어린 매가 상상하기에 바다의 왕은 그런 존재였다.
***
세상 어떤 끈끈한 인연이라도 첫 만남은 오직 우연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호시노와 고래에게도 물론 적용되는 이야기였다.
호시노는 헬멧단 놈들이 유달리 잠잠해졌다 싶어 그 이유를 조사하던 와중, 그들이 카이저 인더스트리의 아케이드 센터에 들락거린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조용하고 민폐가 아닌 취미를 갖게 된 거라면 좋겠지만, 하필 그런 수상한 놈들이 엮였다니… 안 그래도 바쁜데 귀찮은 일만 안 생기면 좋겠군.’
호시노는 그렇게 생각하며 평소 찾을 이유가 없던 골목을 순찰 루트에 추가하며 궁시렁댔다.
골목길에 들어서자 어렵지 않게 헬멧단의 조무래기들을 찾을 수 있었다. 솔직히 그 동안 녀석들이 주로 나타났던 활동 시간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그녀였으나 이토록 쉽게 발견하다니 운이 좋다고 생각하였다.
“너희 여기서 뭐하고 있냐?”
“으헉? 타,타카나시 호시노!?”
“뭐, 뭐하긴? 그냥 건전하게 게임만 즐기고 있었을 뿐이라고? 봐! 여긴 오락실이잖아?”
“……꼴을 보니 제법 오래 있던 것 같은데. 너희 보스가 뭐라고 안하냐? 아무리 규칙이 느슨한 조직이라곤 해도 너흰 마켓 가드랑 계약도 했잖아. 이 정도로 자유 시간을 줄 리는 없을 텐데?”
“아니 뭐야? 이젠 아무 것도 안했는데 그냥 수상하다는 이유만으로 시비를 걸겠다는 거냐?”
“…자, 잘 생각해봐, 우린 지금 아비도스의 지역 경제 활성화와 발전에 이바지하고 있는 거라고. 우리가 찾아와서 이 골목도 이렇게 활성화 됐잖아. 너도 아비도스가 정말 유령도시가 되는 걸 바라는 건 아닐 거 아니야, 응?”
이때의 호시노는 이미 그 악명이 자자하였으나 그럼에도 그 무뢰배 헬멧단이 이토록 설설 기는 것은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가 이를 수상하게 여겨 끈질기게 추궁하자 헬멧단 조무래기들은 자포자기한 듯 덤벼들었고, 간단히 제압하자 웬 장난감 동전 같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그랬던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 장난감을 블랙마켓의 교환센터에 가져가면 엔으로 바꿔준다고?”
“빌어먹을, 그렇다니까! 다 알려줬잖아! 이제 그만 풀어줘!!”
“너희는 내가 아주 등신으로 보이나보구나?”
―철컥
“아니아니아니아니!!! 진짜라고!! 왜 안 믿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신용이 없나?”
“우리 너무 당연한 소리는 하지 말자.”
“데리고 가보면 알 거 아니야! 우리가 직접 보여줄게!”
“후, 그러시든가. 앞장 서.”
‘뻔한 작전이군. 이대로 이 녀석들을 따라가면 곧 이놈들의 무리가 몰려들어 에워싸겠지. 차라리 잘 됐어. 안내해준다면 나야 고맙지. 이참에 그냥 얼씬도 못하게 때려 부숴주자.’
호시노는 그런 생각을 품고 기습에 대비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 아비도스의 자치구를 지나 블랙마켓의 으슥한 길목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녀가 고대하던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정말로 가게에 들어가 동전을 건넸고, 가게의 주인장은 별다른 대꾸도 없이, 마치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그들에게 어마어마한 양의 지폐를 건네주었다.
상식이 붕괴되는 광경이었다.
“이게, 대체…?”
“봤지!? 우린 그냥 돈 벌려고 오락실에서 하루 종일 죽치고 있었을 뿐이야! 이것도 보스 명령이었다고!”
“아니 거기까지 말해줄 필요는….”
‘……나를 속이기 위한 연기? 아니 아니야, 기습적인 순찰이었고 녀석들에게 대응할 시간 같은 건 없었어. 연락을 주고받는 모습도 보지 못했고. 게다가 이 가게는 헬멧단과는, 아니 적어도 이 녀석들과는 연이 없어 보이고 딱히 저 동전만 교환해주는 것도 아닌 모양이야.
…그럼 정말로 고작 게임을 해서 딴 경품으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건가?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니, 아니지. 볼 것도 없이 그냥 불법 도박 같은 거잖아. 아비도스 자치구에 그런 가게가 들어서다니….”
“어허, 도박이라니! 카이저 인더스트리처럼 신뢰로 먹고 사는 기업이 도박장 따위를 세웠다고 말하려는 셈이냐? <청계천 이야기>는 순도 100% 실력겜이라고!
이건 순전히 내 실력으로 딴 거야! 나 정도의 동체시력과 순발력이 없다면 결코 황금 고래는 잡을 수 없지! 너는 내가 정당한 노력으로 얻어낸 것을 부당하게 갈취해간 거라고! 이 도둑! 납치범! 은행 강도!”
“아니, 암만 그래도 고래는 그냥 운이지….”
“너 아까부터 자꾸 뭐야? 대체 누구 편인 건데!?”
“실력, 동체시력, 순발력, …잠깐, 고래라고?”
“그, 고래라는 걸 잡으면 아까 전에 우리가 건넨 황금 코인을 경품으로 받을 수 있는데 그걸 이 가게에서 돈으로 사주는 거야. 딱히 불법적인 것도 수상한 것도 아니라고. 트리니티의 아가씨들은 그 웃기게 생긴 새 인형에 수십만엔 씩 꼬라박고 그러잖아? 여기도 컬렉션 용도로 그런 걸 구매하는 가게인 거지”
“그런… 건가?”
걸리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치엔 들어맞는다. 아니, 단순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뿐인지도 몰랐다.
‘혹시 나라도?’
동체시력, 순발력. 모두 호시노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능력이었다. 그녀는 호루스. 신성한 매의 눈은 결코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다.
호시노에겐 이런 헬멧단 조무래기 따위보단 훨씬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게다가 카이저에게서 뜯어낸 돈으로 카이저에게 진 빚을 갚는다니. 퍽이나 유쾌한 이야기군.’
생각하면 할수록 게임으로 돈을 번다는 건 매력적인 선택지로 느껴졌다. 일단 한번 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때려치우면 그만이다. 호시노는 그렇게 하면 문제없으리라 여겼다.
그녀는 드물게도 헬멧단을 혼쭐내지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가벼운 걸음걸이로 아비도스 자치구로 돌아갔다.
***
‘또… 허탕인가.’
호시노는 어느새 아케이드 센터의 터줏대감이 되어있었다. 그녀의 악명은 여전했기에 오락실을 찾는 헬멧단의 발길이 뜸해졌지만 그만큼 그녀가 가게의 매상을 책임져줬기에 주인장도 별 불만을 내비치진 않았다.
‘딱 한판만, 딱 한판만 더.’
그녀는 스스로도 이렇게까지 이 별 볼일 없고 지루하기만 한 게임에 푹 빠지리라곤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3달 전의 그녀가 이 미래를 미리 보았다면 틀림없이 개꿈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고래만 잡는다면, 그러면 적어도 그간의 손실은 전부 만회할 수 있어.’
호시노는 게임을 못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니, 따지자면 입문자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놀라운 실력자라 할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게이머 UzQueen만은 그녀를 겉멋만 든 애송이라며 폄훼하였으나 많은 이들이 첫 플레이부터 모든 미션 아이템을 쓸어 담는 그녀의 실력에 내심 감탄하였다.
단지, <청계천 이야기>에선 게임을 잘하는 것이 곧 돈을 잘 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고래의 출현 조건은 최소 10회 이상의 연달은 실패, 그리고 제한 시간 5분 미만… 지금이다!’
그녀는 처음 몇 주간은 몇 번이고 베스트 스코어를 갱신하며 승승장구하였으나 정작 벌어들인 돈은 많지 않았다. 단순히 투입한 돈보다 약간 덜 벌거나 더 버는 정도의 공수래공수거. 블랙마켓의 교환점 주인은 푼돈이나 바꾸러 오는 그녀를 성가신 사람 취급했다.
결국 이 이상 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낭비라 여긴 그녀가 게임을 관두려 했을 때, 가게 주인이 그녀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해주었다.
“꼭 게임을 잘해야지만 많이 딸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실력 없는 사람들한텐 너무 불공정한 처사지 않나. 몇 번이고 실패하더라도… 딱 한방에, 일발역전이야말로 훨씬 낭만적이지 않나? 그 게임은 낭만을 아는 사람이 만들었다고.”
영리한 그녀는 곧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깨달았다. 의도적으로 실패를 반복하여 그날 처음으로, 그녀는 영롱한 금색으로 빛나는 고래를 보았고, 그만 그 자태에 매료되고 말았다.
‘멋지다….’
사실 따지자면 조악한 폴리곤에 싸구려 색감을 가진 엉성한 고래였기에 진짜 게이머라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시노에게 게임이란 그 자그마한 파란 슬롯머신의 세계가 전부였다. 시끄럽기만 한 피라냐, 무식한 식인 대게, 음탕한 문어. 고래에겐 그들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품위가 있었고 기나긴 세월 동안 사냥꾼으로 살아온 맹금의 원초적 욕망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가상의 고래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의도적으로 실패를 반복해야한 탓에 게임이 집어삼키는 돈은 수배로 불어났으며, 본전을 찾을 확률은 급격히 떨어져 0에 수렴하게 되었다.
호시노에겐 상관없었다. 고래만 잡는다면 그 수십 배의 금액을 한 번에 상환 받을 수 있을 테니까.
‘이번에는, 이번에는 분명…!’
…어쩌면 호시노의 목적은 돈 같은 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눈앞을 가로막은 모래폭풍, 미래를 가로막은 빚더미.
나아갈 길은 보이질 않고 죽어라 다리를 움직여도 간신히 제자리걸음.
지쳐 쓰러질 것 같아 물 한 모금 마실 틈에 그새를 참아주지 않고 악화되어 가는 현실.
그게 아비도스의 일상이었다.
타카나시 호시노에게 고래는 난생 처음으로 가져본 ‘기대’였다.
‘저 녀석만 잡으면 많은 게 바뀔 거야….’
슬롯머신을 돌릴 때 그녀의 눈은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몹시도 흐렸다. 어차피 집중할 필요도 없다. 이때부턴 제 때 버튼을 누른다고 제 때 멈추지도 않는다. 그러니 무의미하다.
대신 그녀의 눈은 다른 것을 보았다.
‘황금 고래를 잡으면, 유메 선배랑 같이 바다에 놀러가자. 그리고 진짜 고래를 찾는 거야. 그런 다음 아비도스에 바닷물을 끌어와 호수를 만들고 고래를 데려와서 아비도스의 명물로 만들자. 그러면 고래를 보러 키보토스 각지에서 신입생들이 모여들 테고 아비도스는 다시 말로만 듣던 예전처럼…’
삐―삐익!!!
“아….”
또 실패하고 말았다. 호시노는 자연스럽게 다음 게임을 플레이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어라…?”
그리고 자신에게 더는 남은 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그래 그랬었지. 오늘 가져온 돈이 그녀에게 마지막 남은 돈이었다. 무아지경이 되어 그것마저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그녀에게 서서히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어떡하지.’
슬롯머신은 매 플레이마다 막대한 금액을 요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녀 수중의 돈만으로도 수백 판은 돌릴 수 있을 만큼. 그러다보니 그녀는 금새 게임에 중독되었고, 가랑비에 옷 젖듯 모든 돈을 써버리고 만 것이다.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그녀는 그 냉혹한 현실과 그녀의 무절제함을 깨닫고 게임을 그만두었을 것이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아직 고래를 잡지 못했다. 그건 이제 집착을 넘어 그녀가 내일을 맞이할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포기하라고?
‘…동아리실에, 아직 카이저에 보내지 않은 지폐들이 남아있었지.’
따서 더 큰 금액으로 돌려놓으면 된다.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호시노는 아비도스 고등학교 동아리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방문한 것은 아니었다. 유메가 걱정하지 않도록 매일 아침 일찍, 방명록은 남기고 갔었다.
‘비밀번호는 0102….’
찰칵―
지폐가 들어있는 금고는 간단하게도 열렸다. 그녀는 정말 보안 의식이 눈꼽만큼도 없는 비밀번호라고 생각했다. 어쩌다가 저런 단순한 숫자로 설정한 걸까?
‘대충 스무 번 정도인가.’
이런 건 관성이 중요하다. 빠르게 계산을 마친 그녀가 돈을 들고 부실을 나가려던 찰나 그녀는 숨을 헉 삼키며 굳어버리고 말았다.
“호시노쨩…?”
“선배… 아니 저, 이건…!”
동아리실의 입구에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호시노를 바라보는 유메가 서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호시노의 가슴 속에 죄책감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이 한 일은 빼도 박도 못할 도둑질이다. 그 사실을 유메 선배의 얼굴을 보기 전까진 깨닫지 조차 못했다.
무슨 매도를 들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퇴학당한다 해도 달게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아, 그런데 나마저 없으면… 유메 선배는 정말 외톨이가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호시노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협박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혼자 아비도스를 살리는 건 절대 무리일 테니 너는 이 비열한 도둑을 끝까지 데려갈 수밖에 없다고?
“호시노!”
―와락!
호시노가 그런 끔찍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자니 유메는 곧장 그녀에게 안겨들었다.
“서, 선배?”
“대체 어디 갔었어…! 걱정 했잖아…!”
유메는 호시노를 끌어안고 흐르는 강처럼 눈물을 흘려댔다. 마치 호시노의 범행은 보지도 못했다는 듯이. 그녀를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는 듯이.
그 무한한 신뢰를 마주하자 호시노의 죄책감이 폭발했다. 살아생전 이토록 부끄럽고 미안했던 적은 없었다.
“미안해요 선배! 흑, 정말, 정말로 미안해요!”
메마른 사막 한복판의 아비도스 고등학교. 그 자그마한 동아리실에서 두 사람의 눈물만이 비처럼 펑펑 쏟아졌다.
그녀는 다음날부터 더는 게임센터에 찾아가지 않았다. 미련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단순히 돈이 없었다.
‘고래 따위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던 거야.’
애초에 스크린이란 어항 속에 갇힌 한낮 빛무리 따위가 진짜 고래일리는 없었다. 그걸 너무도 늦게 깨달아버렸다.
고래를 잡아 가두겠다니 어처구니없는 꿈이었다. 자신처럼 작고 무능한 새가 그토록 거대하고 위대한 바다의 왕을 어찌 붙잡겠는가?
호시노는 기대를 품어선 안되는 소녀였다.
어느 여름의 고래는 그렇게 소녀의 가슴 속에 한 줌의 교훈만을 남긴 채 푸르른 바다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
“으헤~ 선생. 이 고래는 선생이 받아줬으면 좋겠어.”
타카나시 호시노는 이젠 고래를 이해했다. 고래는 몸집은 크지만 그뿐인 생물이었다.
고래는 힘은 세지만 몹시 여렸고, 목소리는 크지만 혼자선 아무것도 못했으며, 늘 당당한 척 허세나 부리지만 조금도 자유롭진 않았다.
보라, 공간만 충분하다면 저렇게 수족관에도 가둬둘 수 있지 않은가? 게다가 놈은 그런 주제에 무척이나 행복해보였다. 저런 걸 왕이라고 동경했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을 지키기보단 남에게 지켜져야 하는 생물이라고나 할까. 참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한심하고 웃긴 녀석이었다.
……그럼에도 왜인지 든든하고, 그럼에도 왜인지 사랑스러운, 그런 모순적인 생물.
‘그러니 나는 고래. 당신도 고래.’
타카나시 호시노는 더는 고래를 동경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동경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 자는 명명백백 광인이다.
그러나―
‘…정말 사랑해, 선생.’
자신을 사랑하는 것 정도는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타카나시 호시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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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박중독 아죠씨 소재가 너무 맘에 들어서 함 써봄
댓글 34
호시노는 개추펀치

오 글 맛있네
이런 필력으로 한 학생의 인생을 도박의 늪으로 가라앉히다니..
와... 진짜 글 엄청 잘 쓴다 ㄷㄷ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