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오후의 샬레 집무실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공기 청정기가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음과, 창틈으로 스며든 늦오후의 햇살이 먼지 입자들을 태우며 부유하는 풍경만이 그곳에 존재했다.
키보토스의 중심이자 혼란의 방파제인 샬레의 수장, 선생님은 지금 검은 가죽 소파도, 침실의 침대도 아닌 딱딱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서 의식을 잃은 듯 잠들어 있었다.
숨 막힐 듯한 서류 더미가 머리맡에 위태롭게 쌓여 있었고, 식어버린 커피에서는 더 이상 김이 오르지 않았다.
그것은 휴식이라기보다는 방전(放電)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리고, 금일의 당번을 수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찾은 우라와 하나코는 그 적막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녀는 입가에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 있었다.
평소라면
"어머, 선생님. 이런 무방비한 모습이라니, 여고생에게 덮쳐달라고 유혹하시는 건가요?"
같은 농담을 던지며 잠든 사람의 뺨을 찌르거나 짓궂은 낙서를 했을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하나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분홍색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미동도 없이 멈춰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선생님의 자는 얼굴이 아니라, 선생님의 팔꿈치 아래에 깔려 반쯤 밀려 나온 두툼한 검은색 바인더에 고정되어 있었다.
평범한 결재 서류가 아니었다.
샬레의 행정 문서는 보통 흰색이나 파란색 파일을 쓴다.
검은색, 그것도 붉은색 씰이 붙은 파일은 본 적이 없었다.
하나코의 본능, 트리니티의 수뇌부조차 두려워했던 그 천재적인 직감이 경고음을 울렸다.
'보지 마. 저건 판도라의 상자야.'
하지만 호기심은 고양이만 죽이는 것이 아니다.
하나코는 소리 없이 숨을 들이켰다.
발소리를 죽인 채 책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선생님의 소매 깃을 스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그 검은 바인더를 아주 천천히 빼냈다.
묵직했다.
종이의 무게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의미의 무게인 것처럼 손목이 시큰거렸다.
표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이, 고딕체로 몇 줄이 적혀 있었다.
[샬레 행정권 이양 및 비상시 대응 프로토콜 - 코드명: OMEGA]
[작성자: 샬레 고문 교사]
[개봉 조건: 작성자의 생물학적 활동 영구 정지 혹은 의식 불명 72시간 경과 시]
"……오메가?"
오메가(Ω).
그리스 문자의 마지막.
끝, 그리고 종결.
그 코드명보다 더 섬뜩한 것은 그 밑에 적힌 '개봉 조건'이었다.
'작성자의 생물학적 활동 영구 정지'
그녀는 문장을 곱씹었다.
'사망'이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마치 기계의 고장을 명시하듯 적힌 그 무미건조한 표현이, 역설적으로 선생님이 자신의 죽음을 얼마나 철저하게 '예정된 행정 절차'로 취급하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이 사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든 부서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사라진 후, 남겨질 아이들이 겪을 혼란을 막기 위해 자신의 시신 위에서 작동할 시스템을 미리 설계해 둔 것이다.
하나코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평소의 '바보 같고 야한 아이'의 가면이 순식간에 벗겨져 나갔다.
그 자리에는 차갑고 예리한 지성만이 남았다.
그녀는 첫 장을 넘겼다.
"……하."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감탄이 아니라 기가 막힘에 가까웠다.
문서의 서두는 감상 따위는 철저히 배제된, 건조하고 냉혹한 법률 용어와 행정 절차로 빽빽했다.
하나코의 눈이 서류의 상단,
[일반 원칙] 항목을 훑어 내려갔다.
[제1조: 유권 해석 및 발동 조건]
1. 본 프로토콜은 작성자(이하 '고문 교사')의 생물학적 사망이 확인되거나, 뇌사 및 이에 준하는 의식 불명 상태가 72시간 이상 지속될 경우 즉각 발동된다.
2. 발동 시점으로부터 연방수사동아리 샬레(SCHALE)의 모든 전권은 정지되며, 키보토스 전역에 선포된 '초법적 권한'은 아래의 절차에 따라 단계적으로 해제 또는 이양된다.
[제4조: 생텀 타워 제어권 및 데이터 소거]
1. 고문 교사의 생체 신호 정지 확인 즉시, 싯딤의 상자 내 모든 개인적 기록 및 비인가 외부 통신 채널은 영구 삭제한다.
2. 총학생회 행정 절차법 제7조에 의거, 생텀 타워 제어권은 총학생회 수석 행정관(나나가미 린)에게 한시적으로 위임된다.
이는 특정 개인의 권력 독점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집무실의 공기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졌다.
선생님은 자신의 부재가 가져올 권력의 공백뿐만 아니라, 그 공백을 채우려는 자들의 욕망까지 계산에 넣고 있었다.
하지만 서류에서 가장 강조된 [제12조] 항목을 마주한 순간, 그녀의 숨결은 실제로 가빠지기 시작했다.
[제12조: 작성자 사후 신체 처리 및 유해 관리에 관한 건]
1. 작성자의 사체(死體)는 '신비' 혹은 '공포'의 촉매로 악용될 소지가 다분하므로, 발견 즉시 가장 인접한 비공개 특수 처리반에 의해 검안 절차를 생략하고 즉각 소각(Cremation)한다.
2. 어떠한 형태의 장례 절차나 기념비 건립도 금지한다. 작성자의 유골은 특정할 수 없는 위치에 산골(散骨)하며, 이를 통해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감정적 전염(Emotional Contagion)이 발생하는 것을 차단한다.
3. 사후 48시간 이내에 작성자의 모든 집기 및 개인 소지품은 소각 처리하며, 샬레 내 거주 구역은 즉시 방역 후 폐쇄한다.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계획이 아니야. 자신이 죽은 뒤 남겨질 우리들이 무너지지 않게 하기 위한 계획….'
아니, 그것보다 더 잔인한 계획이었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키보토스에서 없었던 셈 치겠다는, 소름 끼칠 정도의 결벽적 배려.
하나코는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를 높였다.
린 행정관에게 보내는 각 학원별 자원 배분 가이드라인, 발키리 경찰학교의 비상 계엄 배치 동선, 심지어는 게헨나와 트리니티의 무력 충돌을 막기 위해 준비된 '게헨나 선도부와 트리니티 정의실현부의 동시 무력화' 방안 까지 적혀 있었다.
더 나아가 '검은 양복과의 밀약 파기 조건' 같은 알기 힘든 내용까지, 선생님의 평소 모습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사람은 잠들기 직전까지, 자신의 죽음 이후를 계산하고 있었던 것인가.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그 따뜻한 얼굴 뒤에서, 이렇게나 차가운 안식을 스스로 조각하고 있었단 말인가.
"……너무하세요, 선생님."
마침내 프로토콜의 마지막 섹션, [Appendix: 학생 개별 메시지]에 이르렀을 때,
수 많은 편지 봉투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봉투마다 낯익은 학원의 로고들이 박혀 있었다.
아비도스, 밀레니엄, 게헨나, 백귀야행…. 그리고, 성스러운 문양의 트리니티.
하나코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여기서부터는 인쇄된 활자가 아니었다.
선생님의 필체로, 꾹꾹 눌러쓴 육필 원고들이 빼곡하게 철해져 있었다.
그것은 유서(遺書)였다.
하나코는 홀린 듯 트리니티의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다시 얇은 봉투들이 빼곡했다.
티파티, 시스터후드, 정의실현부…. 그리고 가장 안쪽, 조금은 꼬깃꼬깃해진 봉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보충수업부 여러분에게]
하나코의 헤일로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봉투 안에는 네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아즈사, 히후미, 코하루. 그리고 하나코.
그녀의 손가락이 허공을 방황했으나, 결국 보충수업부의 편지지를 집어 들었다.
익숙한,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정갈하게 눌러 쓴 선생님의 글씨체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아즈사에게]
「아즈사,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건 내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뜻이겠지.
미안해.
하지만 기억해 줘.
너는 살인 병기도, 헛된 모든 것의 증명도 아니야.
너는 꽃을 사랑하고, 인형을 좋아하고, 친구를 위해 화낼 줄 아는 평범한 소녀야.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차갑겠지만, 네가 배운 따뜻함으로 널 지킬 수 있을 거야.
넌 이미 답을 알고 있으니까.」
[히후미에게]
「나의 평범하고도 특별한 리더, 히후미.
내가 없으면 누가 페로로님의 굿즈 줄을 대신 서 줄까 걱정되네.
후후, 농담이야.
히후미, 너는 스스로를 평범하다고 말하지만, 너의 그 평범함이 우리 모두를 구원했어.
앞으로 어떤 어둠이 닥쳐와도, 너는 너 자신이기를 포기하지 마.
너의 빛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닿고 있으니까.」
[코하루에게]
「코하루, 울고 있니?
울지 마.
네가 정의실현부의 엘리트가 되는 걸 못 보고 가서 조금 아쉽네.
너의 정의는 올바라.
가끔은 융통성이 없어서 손해를 보기도 하겠지만, 그 서투름이 너의 가장 큰 무기야.
네가 입버릇처럼 외치던 '사형!'이라는 말.
사실은 그게 타인을 단죄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는 너만의 서툰 애정 표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어.
야한 걸 싫어한다고 화를 내는 것도, 사실은 그만큼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마음을 지키고 싶어서겠지.
그 목소리가 더 이상 내게는 닿지 않더라도, 네가 옳다고 믿는 길을 걸어가렴.
부디 너의 그 따뜻한 분홍빛 날개가 꺾이지 않기를.
네가 걷는 길이 언제나 당당하기를.」
하나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비릿한 철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총알 한 발에, 혹은 무너지는 건물 잔해에 깔려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그 공포를 매일 밤 씹어 삼키며, 남겨질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이 모든 말을 미리 적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하나코에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했다.
어떤 말이 적혀 있을까.
'너는 사실 똑똑하니까 잘해낼 거야'?
아니면
'더 이상 야한 장난은 치지 마'?
예상되는 훈계나 격려를 떠올리며 그녀는 종이를 넘겼다.
하지만 그곳에 적힌 문장은, 하나코의 예상을 배신하다 못해 산산조각 냈다.
「하나코.」
「이 글을 읽으면서, 너는 지금 화를 내고 있겠지?
'이 바보 같은 어른이, 결국 제멋대로 떠나버렸네'
라며 차가운 눈으로 분석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쓰고 있는 그 답답한 가면들, 내가 없으면 조금은 벗기 편해질까?
아니면 나라는 관객이 사라졌으니 더 두꺼운 가면을 쓰게 될까.
나는 그게 걱정이야.」
「하나코, 너는 누구보다 넓은 시야를 가졌지.
남들이 보지 못하는 흐름을 보고, 듣지 못하는 이면을 듣지.
그래서 너는 외로웠을 거야.
이해받지 못한다는 건, 아니, 이해받는 것조차 경계해야 한다는 건 지독한 형벌이니까.」
「티파티의 정치도, 시스터후드의 견제도, 그 모든 기대와 압박도… 내가 다 막아주고 싶었는데. 결국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종이 위, 잉크가 살짝 번진 자국이 있었다. 펜을 멈추고 고민한 흔적.
「하지만 하나. 이거 하나만은 명령이 아니라 부탁으로 남길게.」
「세상이 너에게 천재를 원하든, 광대를 원하든, 혹은 성녀를 원하든… 너는 그냥 '우라와 하나코'로 살아줘.
시험을 망쳐도 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어도 되고, 정말로 야한 책을 보며 킬킬거려도 돼.」
「너의 지성이 너를 옭아매는 사슬이 되지 않기를. 나의 죽음이 너에게 또 다른 계산식이 되지 않기를.」
「부디, 행복해져라. 내 소중한 공범자님.」
"……."
하나코는 문서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구겨지는 종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정말이지."
그녀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표정은 웃고 있었다.
아니, 웃으려고 필사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눈가에서 뜨거운 것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턱끝으로 떨어졌다.
"사람을… 어디까지 바보 취급하는 건가요, 당신은."
그녀는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어른들은 멍청하고, 세상은 시시하며,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돌아간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엎드려 자는 무방비한 남자는, 그녀의 머리 꼭대기 위에서 그녀의 영혼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자신이 죽은 뒤의 세상에서조차, 하나코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는 이 미련하고 거대한 사랑 앞에서, 그녀의 천재성은 아무런 방어기제가 되지 못했다.
하나코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 검은 바인더를 덮었다.
그리고 그것을 원래 있던 자리, 선생님의 팔꿈치 밑으로 밀어 넣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녀는 의자를 끌어와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았다.
턱을 괴고, 곤히 잠든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밑, 건조해진 피부, 그리고 얕게 오르내리는 등.
"선생님."
그녀가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도, 연기된 광기도 없었다.
오직 한 명의 소녀로서의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
"이 유서는, 아주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손을 뻗어,
선생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제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요."
"당신이 우려하는 그 '비상시' 따위, 제 계산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게 할 테니까."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며 교무실을 붉게 물들였다.
하나코는 젖은 눈으로 미소 지었다.
그것은 그녀가 지금까지 보여준 어떤 가면보다도 아름답고, 동시에 서글픈 다짐이었다.
"그러니 안심하고 주무세요.
…나의 미련하고도 사랑스러운 공범자님♡."
샬레의 오후는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아까와는 달랐다.
그것은 누군가의 의지와 각오로 채워진, 단단하고 묵직한 평온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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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야기가 참 맛있거든요
아우 필력 맛있다 무덤덤하게 들어있는 은유들이 너무 마음에 드네 글 자주 써줘
더없냐고 근데 하나코가 눈치 빨라서 제일 먼저 발견할거같긴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