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53자
아트라하시스에서 사투를 벌였을 때, 나는 마지막 탈출 시퀀스를 또 한 명의 시로코에게 사용했다.
방주가 비명을 지르듯이 불에 타며 무너져가는 가운데, 또 하나의 나는 “학생들을… 잘 부탁합니다.” 라는 말을 남겼고, 나는 그 뜻에 부응했다… 그랬을 터였다.
붕괴에 휘말리던 순간 눈부신 빛이 나를 감쌌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 순간이 잠시였는지 영원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눈을 뜬 순간… 나는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귀환한 뒤로 1년 동안은 보잘것없는 현실에서 살아갔다. 혼자 작은 아파트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부정적인 뉴스만 잔뜩 틀어주는 TV를 배경음악 삼아 피곤하면 잠을 자고, 회사를 오가면서 다시 컵라면을 먹는 따분한 일상.
하지만 갑작스럽게 그 생활은 끝이 났다. 이 세계로 돌아온 지 딱 1년이 지난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또 다른 나를 위해 향을 피우는 게 일상이 되어, 감사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리고 있었던 그때― 또 다시 눈부신 빛이 온몸을 뒤덮었다.
또 한번 정신을 잃어 눈을 감고, 관찰할 수 없는 시간대를 지났을 때 소리가 들려왔다.
째깍… 째깍… 규칙적으로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 이 소리는 기억이 난다. 키보토스에서 생활했을 때 학생이 선물로 줬던 시계 소리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무언가에 온몸을 맡기고 있는 듯한 감각이 든다. 어딘가에 누워 있는 걸까?
조심스레 눈을 떴을 때 머리 한구석에 희미하게 기억으로 남아있던 천장이 보였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서 주변 상황을 알 수 없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고, 침대 위에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키보토스구나… 1년만이네.”
고요한 밤의 키보토스, 희미한 달빛과 밤하늘을 물들이는 짙은 푸른색이 지배하는 시간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서 매일 내 귀에 알람 소리를 울렸던 디지털 시계를 보니 시간이 7시 반을 넘었고 날짜가 많이 지나가 있었다.
원래 세계와 마찬가지로 키보토스에서도 1년의 시간이 흐른 모양이다. 이때 내 가슴에서는 시커먼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또 다른 나… 프레나파테스가 맡긴 소망을 등지고 말았다는 죄책감, 하지만 갑자기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게 되었으니 손쓸 방법이 없었다는 무력감,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몰려와 나도 모르게 내 가슴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아무리 슬퍼해 봤자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부터라도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가 내게 맡겼던 어른의 책임을… 다하자.
힘이 빠진 두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선다. 느슨해져 있는 넥타이를 조이고, 나를 다잡기 위해 꾹! 하고 양손으로 뺨을 누르며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1년 만에 돌아온 키보토스에서 그것도 한밤중에, 대체 뭘 할까…
“집무실, 그래. 집무실로 가자. 거기엔 뭔가 있을지도 몰라.”
학생들과 서류들이 활발하게 드나들었던 집무실, 그곳이라면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심한 이상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나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하기 위해 수면실을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뭐지…? 책상이나 컴퓨터는 이미 치워졌고 거의 아무것도 안 남아 있잖아. 눈에 띄는 물건이라면… 이건가.”
방 한가운데에 놓인 커다란 보관대, 그리고 그 주위를 둘러싸듯이 놓인 형형색색의 꽃들. 달빛을 가리지 않는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이 명패를 비추자 ‘샬레의 선생님 1주기 헌화대’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을 더듬어가며 전등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자 예전에 TV에서 보았던 유명인의 장례식 영상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화려한 헌화대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헌화대 중앙에는 언제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는 얼굴로 브이를 내밀고 있는 내 사진과 싯딤의 상자가 스탠드에 놓여 있었다.
“영정사진은 좀 더 진지한 사진을 골라야 되는 거 아냐…? 뭐 내가 원래 있던 세계랑은 상식이 다르니까 별 수 없나. 그나저나 그립네. 무슨 10년도 넘게 떨어져 있었던 것 같아. 싯딤의 상자도 남아있어서 다행이야… 응? 상자 옆에 있는 건 메시지 카드인가? 엄청 많네.”
그야말로 종이학 천 마리처럼 한 묶음으로 된 메시지 카드들이 장식되어 있었고, 그 카드 하나하나에 감사를 담은 글귀나 ‘줄곧 좋아했습니다’처럼 고백 같은 글귀들이 적혀있었는데, 그 중에는 물에 젖어 너덜너덜해진 카드도 있었다. 울면서 쓴 걸까. 귀여운 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카드를 쓰는 장면을 상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나도 나이를 먹었구나.
“자, 그럼 1년 만에 다시 시작해볼까요. 싯딤의 상자를 한번 가동해 보자… 오, 됐다. 오랜만이야 아로ㄴ우왁!?”
능숙하게 인증을 마치고 저 멀리 바닷가에 있는 버려진 교실 같은 곳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아로나의 이름을 부른 순간 내 배에 격한 통증이 밀려온다.
깜짝 놀라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두 명의 소녀가 내 배에 달라붙어 있었다.
“...”
“...”
“으음, 아로나, 양?”
“...어딜 가셨던 거예요.”
“어?”
“1년씩이나 어디에 계셨냐고 묻고 있잖아요!! 방주에서 선생님의 생체 반응이 사라졌을 때는 진짜… 진짜… 훌쩍…”
“아로나 선배 말대로입니다. 저는 또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었습니다. 구해드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훌쩍… 모든 걸 포기해버릴 뻔했어요…”
“둘 다 미안해. 얘기하자면 길어질 것 같은데… 들어줄래?”
“하나도 빼놓지 말고 말해주세요!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우와아아아앙!! 선샌니이이이! 사라계셔서 다해이에요오오!!”
“...이야기, 듣겠습니다. 전부 듣겠습니다. 그러니… 으으… 이제 아무 데도 가지, 말아주세요…”
“응, 그래… 정말 미안해. 아로나, 프라나…”
두 사람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방주가 떨어지던 순간 원래 살던 세계로 강제로 전이됐다는 것, 그리고 갑자기 이 키보토스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들은 새빨개진 눈을 하고서 진지하게 들어주었고, 일단 한번 설명이 끝나자마자 다시 내 품으로 뛰어드는 바람에 허리가 두동강이 날 것 같은 격통이 찾아왔다.
나는 그렇다 치고, 아로나와 프라나는 의심하는 기색 없이 믿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일이 있으셨군요. 아로나 선배, 이 일로 선생님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도 힘드셨을 거예요.”
“맞아요 프라나 쨩. 저기, 선생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괜찮으세요?”
“으, 응… 괜찮아, 괜찮아… 허리 때문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어버린다니, 완전 멋대가리 없잖아… 나는 어른이야… 참아야… 으윽!?”
파도가 밀려오듯이 통증이 두 번째, 세 번째 파도처럼 허리에 밀려든다.
결국 통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둘이서 나를 돌봐 주어야 했다. 아아, 나란 놈은 왜 이리 한심한지…
통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뒤에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눴다. 아로나의 말에 따르면 만약 이대로 “다녀왔습니다~!” 하면서 학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가는 틀림없이 나를 둘러싸고 온 키보토스가 전국시대로 돌입할 거라는데, 이런 늙어빠진 아저씨가 대체 뭐가 좋다는 건지.
하지만 이대로 계속 샬레에 머물러 있다가는 들키는 건 시간 문제다. 어떻게 하지… 우리 셋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있잖아 아로나. 내 집이 아직 남아있을까? 만약 남아있다면 비상용으로 남겨 둔 돈이랑 먹을 게 좀 있을 거야. 그걸 가지러 가자.”
“선생님 댁이요? 아직 남아있을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이동하죠? 여기서 꽤나 거리가 먼데요…”
“긍정. 아로나 선배의 의견은 타당합니다. 시간대를 감안하여 도보로 이동 중에 학생과 마주칠 확률을 계산… 모든 경로의 평균 확률이 90% 이상입니다.”
“후후후~. 어른을 얕보지 말라고. 이런 데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기서 사라지기 전에 몰래 바이크를 샀거든! 할리 데이비슨이라는 대형 바이크를!!”
“...그렇군요. 바이크로 이동 중에 학생과 마주칠 확률을 계산… 전 경로 5% 이하, 이 정도면 현실적입니다.”
“고마워 프라나. 가장 확률이 낮은 경로로 가자. 나갈 준비 좀 할 테니까 계산 좀 부탁해.”
“알겠습니다. 최저 확률 연산… 3%입니다. 문제 없습니다.”
“저 바이크는 처음 타 봐요! 기대되네요, 프라나 쨩!”
“부정. 아로나 선배, 소풍 가는 게 아니잖아요?”
그 뒤 나는 할리 데이비슨 군에 올라타 밤의 키보토스를 내달렸다. 부르릉! 심장을 울리는 폭발음이 듣기 좋다. 이 얼마나 멋진 엔진 소리인지. 도중에 집에 들러서 돈과 식량을 챙기고, 신호 대기까지 포함해서 지금까지 학생들과는 마주치지 않았다. 프라나의 계산은 완벽했다.
“으음, 이 정도 식량이면 이틀 정도밖에 못 버티겠네. 프라나, 이 근방에 학생들과 마주칠 확률이 가장 낮은 슈퍼가 어디야?”
“계산 중… 최저 확률이 3%인 1.5km 앞에 있는 슈퍼마켓입니다. 경로를 선택할까요?”
“아! 저기구나. 키보토스에 있을 때 자주 다녔는데~. 물건이 다양하거든!”
“...게헨나 자치구 끝자락에 있는 슈퍼가요?”
“응! 완벽하거든, 젤리 음료수 종류가 많아! 그 슈퍼에는 내가 좋아하는 제조사들이 다 모여있다고!!”
“...이 얼마나 슬픈 정보일까요…”
“프라나 쨩… 그 이상 말하지 마요…”
“...둘 다 뭔가 허무한 표정인데 왜 그래? 뭐 됐어. 슈퍼로 간다!”
차도 별로 없으니까 엔진 좀 울려볼까! 불쌍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과는 대조적으로 내심 들뜬 나는 살짝만 속도를 높여서 밤길을 말 그대로 폭주했다.
단골 슈퍼에 도착한 지 5분 정도 지나, 나는 매장 안에서 쇼핑을 하려고… 했는데 매장 입구에서 프라나에게 제지당했다.
“선생님, 맨얼굴을 드러낸 채로 매장에 들어가시는 건 권장하지 않습니다. 변장을 위해 이걸 사용해주세요.”
“으음… 선글라스? 프라나, 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가게에 들어가는 건 좋지 못한 행동이야. 점원한테 수상한 사람이라고 오해받거든…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어때? 어울려?”
“저, 저기… 애초에 선글라스만 가지고는 변장이 성립되지 않을 것 같은데요…”
“긍정. 아주 잘 어울립니다. 이대로 전자레인지를 여닫으면 호일이 더 많이 붙을 겁니다.”
“음… 칭찬해주는 거지…?”
프라나에게 받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매장 안을 돌아다닌다. 지나가던 쇼핑객들이 나를 본 순간 깜짝깜짝 놀라는 것 같은데… 역시 밤에 선글라스를 끼고 돌아다니는 녀석은 이상해 보이겠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나서 매장 안쪽으로 들어가자 1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열정적인 POP이 상징적인 젤리 음료 매대에 도착했다.
“경악. 냉장 설비 하나를 통째로 사용하고 있는 건가요? 양도 종류도 터무니없습니다.”
“선생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을 만도 하셨네요! 이렇게 많으니까 눈이 휘둥그레져요!”
“역시 여긴 굉장하지! …오오! 이 회사 거 신상품이 나왔네! 뭐 1년이나 지났으니까 당연히 나오겠지만… 근데 코코넛 밀크 맛이라… 맛있거나 맛없거나 둘 중 하나밖에 없는 맛이네. 도전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도 지금은 비상 상황이라 실패라도 하면 큰일이고. 지금은 그냥 안전하게 라무네 맛을…”
“어머? 선생님께서는 도전하지 않으시나요? 이 맛은 실로 미식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죠.”
“아하하, 음식에서만큼은 실패하면 안 되니까. 슈퍼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까 오늘은 포기하고…… 으앗!?”
아무런 위화감 없이, 마치 계속 옆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에 섞여 들어온 여성은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한눈에 봐도 매끈거리는 은색 긴머리, 루비처럼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 그리고 박쥐 같은 날개에 탄력 있는 꼬리. 예전에 보던 게헨나 학원 교복이 아니라 검은색 바탕 심플한 티셔츠를 착용하고 아래는 핫팬츠를 입고 있다. 상당히 노출이 많고 과격한 옷차림이지만 반듯한 얼굴에서 넘쳐흐르는 기품이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 설마 하루나야!? 분위기가 엄청 어른스러워서 순간 누군지 못 알아봤어!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쿠로다테 하루나, 게헨나 학원 미식연구회의 리더 격인 존재로 아가씨 같은 우아한 인상을 주지만 그 속내는 진정한 테러리스트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점을 폭파시키는 탓에 히나가 고생했지…
“그보다… 제게 뭔가 하셔야 하는 말씀이 있지 않으신가요? 1년 동안이나 죽음을 가장해서 그늘에 숨어있던 멍청이는 이제 이런 것조차 모르게 되셨나요?”
“어, 하루나…?”
슬쩍 내 왼팔에 자기 팔을 감는 하루나가 불길하게 미소를 짓는다. 눈빛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고, 등 뒤로 불타오르는 패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장소에서 할 이야기가 아니겠네요. 저희 집으로 안내할게요. 아무리 바보같은 당신이라 해도 알고 계시겠지만… 도망치기라도 하시면… 찌릿.”
“네, 네엡! 절대로 안 그러겠습니다아!!”
“좋아요♪ 그럼 시간도 아까우니 가 볼까요.”
꽃이 피듯이 환하게 웃음 짓는 하루나. 아까부터 말투가 너무 거칠어. 엄청난 신변의 위협이 느껴져서 거스를 수 없다.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한 채 나는 슈퍼를 떠났다. 바이크가 있는 곳까지 이동할 때까지 하루나는 계속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돌아와서 깜짝 놀랐는데, 하루나의 이동수단은 내 할리 데이비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자아이가 타기에는 너무 큰 오프로드 바이크였다. 그렇게 나는 잠시 그녀의 뒤를 쫓아가게 되었다.
15분 정도 이동해서 나는 하루나가 살고 있다는 아파트에 도착했다. 겉모습은 암갈색으로 된 외관이라 칙칙한 인상을 주지만 내부는 차분한 분위기였고 자동 잠금장치도 있어서 안과 밖의 간극이 아주 큰 건물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그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드키를 꽂고 현관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복도와 가장 안쪽에 있는 불투명한 유리 문이었다. 시점을 좌우로 옮기자 샛길처럼 입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아차, 남의 집을 너무 들여다보면 실례가 되니 이쯤에서 그만두자.
그리고 그때. 불투명한 유리 문 너머에서 쿵쿵거리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루나! 잠깐 쇼핑하러 간다더니 1시간이나 걸리고, 뭐 하다 왔어!? 밥 다 식잖… 아…”
쾅! 하고 힘차게 문을 열더니 나온 사람은 귀여운 병아리가 프린트된 앞치마를 두른 후우카였다. 쉬는 날 한정인지 삼각 천이 아니라 고무줄 하나로 머리를 묶어 포니테일을 한 후우카의 아주 보기 드문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한편 후우카는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동공과 입이 확 커지더니 얼어붙었다. 얼굴 전체가 ‘놀람’을 표현하고 있었다.
“후우카 양, 다녀왔어요. 슈퍼에서 유령을 주워 왔답니다.”
“아하하… 나는 안 죽었지만 말야. 그, 오랜만이야, 후우카.”
“무… 무…”
“그럼 멍청이 씨? 왜 죽었어야 할 당신이 여기 있는 거지요? 그 가게와는 달리 방해할 사람은 없으니, 확실하게 설명해 주셔야겠어요.”
“하루나!? 그렇게 세게 팔 잡지 마!! 이러쿵저러쿵 요래조래 된 거야!”
“흠… 그럼 정리하자면 당신은 갑자기 원래 살던 세계로 보내졌다가 1년 뒤에 다시 키보토스로 보내졌다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의 이름을 빌린 가짜… 는 아니었네요. 저도 후우카 양도 잘 기억하고 계시고요.”
“잠깐만 있어 봐!!”
갑자기 목소리를 높이는 후우카 때문에 현관에 침묵이 찾아왔다. 우리가 놀라서 굳어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녀는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와 내 품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어요.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을 줄 알았어요… 훌쩍… 이거 꿈은… 아니죠…? …항상, 보고 싶었어요…”
“후우카…”
“...치사해요, 후우카 양. 당신이 울어버리면… 저, 도… 참을 수, 없는 걸요… 선생님… 살아 계셔서… 저는… 정말, 기쁘답니다…”
목소리가 떨리는 하루나가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껴안았다. 내 가슴이 꾹 조여오는 느낌. 아아, 이 귀여운 학생들을 울리고 말았구나. 나는 참 한심한 인간이다.
“둘 다 슬퍼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다시 한번 말할게. 다녀왔어. 후우카, 하루나.”
두 사람의 허리에 손을 얹고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는지 두 사람은 언어를 만들어낼 힘을 잃어버리고 그저 울기만 할 뿐이었다.
안정을 되찾은 후우카와 하루나, 그리고 그녀들에게 양 옆으로 둘러싸인 나. 현관 앞에서 있던 일이 끝난 뒤 일단은 밥을 먹자는 후우카의 제안에 하루나가 내 팔을 잡아당기는 모양새로 나는 내 의사에 관계없이 함께하게 되었다.
유리문 안쪽으로는 거실이 펼쳐지고 오른쪽에는 테이블과 의자 4개, 왼쪽에는 소파와 TV가 배치되어 있어 생활감이 느껴진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자 랩에 싸인 요리들이 접시에 담겨져 있었는데 연어 소금구이, 코마츠나 조림, 버섯을 넣은 된장국… 거진 1년만에 정갈한 요리를 보는 것 같다.
전자레인지가 일을 마치는 동안 멍하니 돌아가는 접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후우카 양, 아까 전에 은근슬쩍 고백을 하셨는데요, 홧김에 그러셨나요? 아니면…”
“엣!? 그건 그… 그게… 저… ///”
“하루나, 후우카는 분명 교사로서 좋아한다고 했을 거야. 오랜만에 만났으니까 스킨십이 좀 과해졌을 뿐이지, 이런 아저씨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
“하…”
“정말… 당신은 1년이 지나도 선생님이네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후우카와, 턱을 괴고서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쓴웃음을 짓는 하루나. 내가 뭐 이상한 말이라도 했나…?
곧이어 띵♪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따끈따끈하게 데워진 맛있어 보이는 밥들이 테이블 위에 펼쳐진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죽은 눈이던 후우카는 음식이 차곡차곡 쌓여나가자 점차 웃는 얼굴로 변했다.
“자, 선생님. 많이 드세요♪”
“완전 맛있겠다! 그럼 얼른… 음! 맛있어! 역시 후우카는 좋은 신부가 될 거야!”
“하아아…”
“어!? 왜 그래…? 칭찬한 건데…”
또 다시 후우카가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요리를 구체적으로 칭찬해 줬으면 했던 걸까…?
그 뒤로는 요리를 중심으로 후우카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처음에는 아까 전처럼 죽은 눈을 뜨고 있었지만 나중에는 웃는 얼굴이 되었다. 하루나도 우리의 대화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그녀가 만든 요리를 음미했다.
접시에 담긴 요리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식후에 차를 마시면서 한가롭게 앉아있었더니 하루나가 입을 연다.
“그런데 선생님, 이 다음에 묵으실 곳은 있나요? 사정을 들어보니 샬레에 머무르실 수는 없겠는데요.”
“그렇지… 공표하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한데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살아있었어요~ 그런 소릴 해봤자 아무도 안 믿을 거고, 악성 루머랍시고 신고당해서 감옥에 갇히게 되겠지…”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선생님의 신병을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 감옥이 아니라 누군가의 방에 갇히게 되실 거라고요!”
“이제 이런 대화도 지겹네요… 그런 당신에게 제안, 아니. 결정된 사항이 있답니다. 오늘은 제 집에서 묵고 가세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도망치려 하신다면… 찌릿.”
“...하아. 어디 갈 데도 없고, 오늘만큼은 하루나의 제안을 받아들일까. 거절하고 이동해봐야 할리 데이비슨 군 연료비가 만만치 않기도 하고 움직이지 못하게 되면 큰일이지. 그럼, 후우카도 괜찮겠어?”
“네, 네에! 선생님이라면 대환영이에요♪ 그럼 마침 목욕물도 데워 놨으니까 먼저 씻고 오세요! 갈아입을 옷은… 여자 옷밖에 없어서 이번에는 하루나 핫팬츠로 참아 주시겠어요?”
“물론 상관은 없는데… 하루나한테 미안하네, 그 핫팬츠 버려야 할 테니까…”
“저는 신경 쓰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튼 목욕을 즐기고 오세요♪”
“그래? 하루나는 참 착하네. 그럼 욕실 좀 쓸게, 고마워.”
“천천히 다녀오세요!”
“......선생님, 가셨네요. 후우카 양, 괜히 묻는 것 같지만 각오는 되셨나요?”
“...응. 1년 전에 선생님이 사라지셨을 때부터 결심했으니까. 뭔가 기적 같은 일이 생겨서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하겠다고.”
“우후후… 그럼 오늘 밤은 만찬회로 할까요♡”
후우카가 해준 맛있는 밥을 즐기고 욕실까지 빌려 최고의 밤을 보낸 나.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게 이렇게 가슴이 따뜻해지는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뼈저리게 드는 가운데 맞이한 취침 시간.
상황은 매우 나쁘다. 처음에는 바닥에서 자려 했는데 웃음기 없는 눈으로 넘치는 패기를 발산하는 하루나, 팔짱을 껴고서 그녀 못지 않게 저 화났어요 아우라를 뿜어내는 후우카에게 무언의 압력을 받아서 침대를 빌리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막상 잠을 자려고 불을 끄려 했더니 두 사람도 침대로 들어온 것이다.
왼쪽에는 후우카, 오른쪽에는 하루나가 자리를 잡은 그 광경은 마치 부모가 아이 둘을 양옆에 두고 잠자리에 드는 구도 같았다. 하지만 이건 나에게는 위기 상황이었는데 사실 키보토스로 오기 한 달 전부터 일이 바쁘다 보니 제때 빼지 못하고 있었다. 학생과 함께 잠을 잔다는, 문제가 될 만한 모습인데 1년이 지나자 두 사람도 성장해서 약간 어른스러운 색기가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안 돼, 멈춰라 나! 상대는 학생이야. 절대 유혹에 넘어가면 안 돼! 그래, 머릿속으로 검은 양복을 세어보자… 검은 양복이 하나, 검은 양복이 둘, 다 죽어가는 검은 양복이 셋…
“...선생님? 주무세요?”
“꺄앗…!?”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불어와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 버렸다.
“우후후… 귀여운 목소리네요. 그런 목소리를 들으니… 참을 수가 없겠네요♡”
“잠깐만, 하루나 양!? 셔츠는 왜 위로 올리시는 거죠!? 앗… /// 아니, 어딜 만지는 거야!”
“꼬리가 이렇게 편리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랍니다… 어머♡ 선생님의 여기, 아주 단단하고 뜨거워요… 후훗, 그럼 입으로 이 부풀어오른 콩을 맛볼게요…♡ 음.”
“으으… 동시에는 좀… /// 아니, 떨어져 봐…!”
하반신에서는 느껴본 적도 없는, 비유하자면 뱀 한 마리가 내 주니어를 감싸면서 윤기가 흐르는 마찰감을 보내오는 것처럼… 그와 동시에 반응해서 불룩 솟아나온 심지를 그녀의 긴 혀가 돌리듯이 핥아 왔고, 가끔씩 살짝 깨물어준다.
(우왓… 하루나 능숙해…! 움직이는 건 좀 어색한 느낌인데 내가 반응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공격하잖아! 이러다가 모드에 들어가버려… 맞아! 후우카! 그 애는 이런 거 싫어할 것 같으니까 도와줄 거야!”
“후, 후우카! 도와ㅈ…으읍!?”
실낱같은 희망은 곧 쾌감으로 바뀌었다. 후우카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 입술에 느껴지는 뜨겁고 부드러운 촉감, 곧 입맞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까… 으읍, 츄, 읍!? 후우카, 그만… 으읍… 음…///”
청초의 화신 후우카의 공격은 파괴력이 절륜했고, 나의 이성은 급속히 녹아내린다.
그 뒤, 두 사람의 공세에 나는 옴짝달싹 못한 채… 굴복하고 말았다.
하루나는 행위 한 번이 길었지만 그 한 번으로 끝났다. 하지만 후우카는 의외로 대식가라서 온몸의 모든 성감대란 성감대를 전부 먹어치워 버렸다…
후일담
“선생님~? 빨래 좀 개어 주실래요?”
“넵.”
그날 밤으로부터 한 달이 지나… 나는 완전히 이 집에 눌러앉아 버렸다.
아직도 키보토스에서 나는 죽은 것으로 되어 있고, 샬레에서 싯딤의 상자와 내 물건들이 사라진 것에 관해서는 도난 사건으로 처리된 모양이었다.
나는 밖에 나갈 수가 없기 때문에 집에서 요리를 뺀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지금도 이렇게 후우카한테 빨래를 받아서… 아아, 당연하다는 듯이 속옷이 섞여 있네.
뭐, 그렇겠지? 그 뒤로 거의 매일 해대고 있고,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가는 내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됐지만.
내가 골치아파하고 있는데 삐이, 하고 인터폰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온 모양이다. 주방에서 들려오는 후우카의 목소리.
“아, 선생님, 하루나 택배예요! 문 앞에 놓고 가는 거라 선생님께서 가지러 가셔도 괜찮으니까 부탁드려요!”
“오케이. 잠시만 기다려.”
나는 일단 빨래를 바구니에 넣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 성인 남자 한 명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놓여있었다.
“우왓, 커… 후우카~! 미안해, 좀 도와줘~!”
후우카가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근데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택배기사인가? 뭐, 그런 것보다 일단 짐을 옮겨야 한다.
“으헤~. 히나 쨩 미안해~. 도와달라 해서. 오늘 배송할 게 좀 많아서~.”
“상관없어. 나도 휴일이라 한가했고 호시노한테 힘이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도울게… 이따가 선생님 묘소에 다녀올까 하는데 어때? 1주기에는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으니까…”
“물론 괜찮지~. 나도 못 갔거든. 하아~. 선생이 떠난 지도 벌써 1년이나 지났구나~. 진짜 순식간이네~. 처음 한 달은 아주 힘들었단 말이지~. 다들 혈안이 돼서는 선생 행방을 쫓아다녔는데 방주? 가 추락한 지점에서 태블릿이랑 불에 탄 정장 잔해가 발견됐을 때는… 쿨럭, 쿨럭. 미안해. 기침이 좀 나오네.”
“...억지로 떠올릴 필요는 없어. 나도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우리에게 미래를 남겨 줬어. 선생님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자. 분명 그 사람은 하늘 위에서…”
“영차… 우와, 역시 무겁네… 후우카, 끝에 잡아!”
“하, 하루나 녀석 대체 뭘 산 거지…? 선생님? 갈게요? 하나, 둘…! 무거… 워.”
“건강하게 잘 있… 을…”
“음~ 왜 그래, 히나 쨩? 뒤에 누구 있어? 나 참~. 마지막 짐은 놓고 가는 택배니까 그냥 문 앞에 놔 두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그냥… 놔… 둬….”
끝.
원래 단편이었다가 현재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는 소설임. 혹시나 다음화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어서 해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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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주세요 핫산사마
더 가져와....아니, 더 가져와가 아니야. 다 가져왓!!!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