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늦은 밤, 샬레에서 - [이치카] 항상 귀찮은…… 아니, 그렇게까지 귀찮지도 않나? (Late Nights at Schale - [Ichika] Ever Bothersome, But... Not Such a Bother?)
-----
샬레에서 일할 때 가장 안 좋은 점을 꼽자면, 잠들 겨를도 없이 일을 해야 하는 필요성과 그냥 쓰러져서 다음날 아침으로 넘어가고 싶은 바람이 쉼 없이 부딪힌다는 점이야. 이런 시간에는 누구도 부를 수 없어. 학생들은 자야 할 시간이고 ("할"에 방점을 찍어서), 총학생회에서는 당신을 도와주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이 없을 거고……. 뭐, 그 정도밖에 생각이 안 나네. 게마트리아? 카야? 당신도 그 정도까지 떨어지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부터가 지금 큰일 났다는 방증이 아닐까.
가끔씩은 포기하고 학생들이 잘 지내고 있는지 불러 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몰라. 세리나? 노도카? 미카? 이즈나? 선택지야 많지만, 어느 선택지나 당신에게는 피하고 싶은 최후의 보루야. 아아, 누군가가 당신의 마음 속 애원을 듣고 구하러 와 준다면…….
전부 다 바보같은 생각이지. 당신은 또 다시 찾아온 긴 밤을 외로이 지새울 각오를 다져.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들기는 동안 분침은 째깍째깍 멈추지 않고, 당신을 찾아오는 동료도 없어. 평소와 똑같은 샬레야. 그리고——
부우웅.
아니…… 그렇지도 않은가? 당신은 모모톡 알림으로 환히 불이 들어온 태블릿을 확인해.
[이치카] 선생님~? 지금 일 하고 계심까?
어떤 키보토스 녀석이 이 늦은 시간에 문자를 보내는 거야?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이 껄끄럽다는 건 아니지만…….
이치카? 이 시간까지 안 자고 무슨 일이야?
[이치카] 으음……. 그냥, 뭐. 심심해서 그렇슴다. 선생님은 요즘 어떠심까? 또 일에 파묻혀 계심까?
당연하지. 마지막으로 일에 파묻히지 않고 자정을 넘겨본 게 언제인지 당신도 기억 못 하는데. 이치카에게 혹시 필요한 게 있는지 물어.
[이치카] 에……. 그냥 좀 쉬려고 함다.
그럴 때를 두고 잠을 잘 시간이라고 한단다, 이치카. 잘 자.
이렇게 칼 같이 거절하는 게 학생들한테 도움이 되는 건 아니지만, 선생으로서 좋은 습관을 길러 주어야 하는 입장이니까. 붕붕 울리는 태블릿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저은 당신은 다시 일로 돌아와.
당연하게도 얼마 안 가서 잠기운이 돌아와서는 딱 하룻밤만 일을 내팽개치자고 속삭여. 봐봐, 딱 하루잖아? 일이 그렇게나 많은 것도 아니라고.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면 애초에 (몇 날 며칠인지 누가 알겠냐마는) 밤을 새지도 않았겠지. 당신만의 의무가 아니고, 당신만의 책임도 아니야…… 아니, 뭐, 당신만의 의무이고 책임일 수는 있는데, 그것도 당신의 강철같은 신념 덕분에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지.
똑똑.
무슨 소리지? 당신의 의지를 깨부수려고 다가오는 우유부단의 유령인가?
똑똑똑.
뭐야……. 그냥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구나.
이 시간에?
당신은 책상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걸어가지만, 문에 손이 닿기도 전에 문이 열려. 검은 옷을 입은 인영이 팔짱을 끼고 당신을 내려다보네. (대단해, 문을 열려면 팔짱을 풀어야 했을텐데.) "선생님, 나오는 데 너무 오래 걸리시는 거 아님까?"
여긴 왜 왔니, 이치카?
이치카는 팔짱을 풀고 씨익 웃더니 사무실 안으로 들어와. 그러고서 근처 소파로 가더니 풀썩 앉아 버려. "샬레보다 쉬기 좋은 곳은 없슴다. 분위기도 신선하고, 선생님도 같이 계셔주시지 않슴까."
당신은 문을 닫고 책상으로 돌아와 하던 일을 마저 시작해.
보다시피 일이 좀 많거든. 이치카와 많이 어울려주지는 못 하는데.
이치카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소파 위로는 까딱까딱 흔들리는 머리가 보여. "치이." 이치카 머리가 소파 아래로 사라지더니 콧노래가 잠시 멈춰. 결국 지루해서 잠들어버렸구나, 그렇게 생각한 당신은 일을 계속해. 곁에 이치카가 있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몰라. 그렇지 않더라도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
"선생님……."
아니…… 그렇지도 않네.
"심심해요……."
이 학생은 또 누구야? 당신도 이치카와 알고 지낸지 꽤 됐지만, 저기 소파에 누운 학생이 이치카일 리 없어. 한번 확인해봐도 되지 않을까…….
책상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해. 이치카의 두 눈은 꼬옥 닫혀 있는데…… 다른 점은 하나도 모르겠네. 몇 초 정도 얼굴을 바라보지만, 여기 있는 이치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모르겠어. 계속 빤히 바라보면서 반응을 살펴보지만 이치카의 천진한 얼굴에서는 아무 정보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아. 당신은 업무로 돌아가려고 발을 떼.
"선생님……?"
움직이던 발이 멈춰. 설마…… 설마 당신이 몸을 돌리기까지 기다렸다가 반응을 보인 건 아니겠지? 다시 이치카를 향해볼까 고민을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 장난꾸러기(이로하)를 많이 봐 왔잖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해. 결국 유혹을 뿌리치고 책상으로 돌아와.
"저기……. 선생님?"
당신은 마음의 준비를 해.
"심심해요……." 이치카의 머리가 소파 너머로 빼꼼 올라와. 거기다 고개를 돌려 당신을 빤히 바라봐. "선생님, 피곤해 보이는데 잠시 쉬면서 뭐라도 하지 않을래요?"
벼룩시장에 들락거리는 동안 그 양 머리 전차장이라도 만나서 노하우를 배워 왔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이건…… 이치카의 진화형인가?!
갑작스러운 공격에 정신이 어지럽지만 당신도 이 정도 함정에 걸릴 정도로 약하지는 않아. 이치카도 당신이 업무를 끝내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잖아?
맞아, 이치카도 당신이 일을 마저 끝내야 한다는 것쯤은 아주 잘 알고 있을 터……. 그러면 이치카의 행동은 나를 생각해서 그랬다는 이야기일까? 과로로 쓰러지기 일보직전인 건 맞잖아. 그러면 당신도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
방금 저런 궤변을 진짜로 믿어버린 걸까, 그렇게 고민하던 당신은 일단 접어두고 일로 돌아오기로 해. 시간이 지날수록 시선 너머에서 꼼질꼼질 움직이는 이치카가 눈에 밟히지만 말이야. 어찌나 신경이 쓰이는지, 타자 속도가 느려지는 게 귀에 들릴 정도. 끝내 타자 속도는 느려지다 못해 멈춰 버려. 이치카를 무시할 수가 없네. 당신은 책상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 지금이야말로 미루고 미뤄왔던 바람을 좀 쐬고 와야 할 시간일까?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려와.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것보다 호기심이 대부분이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이치카가 소파에서 떨어져서 두 발로 일어나고 있어. "선생님, 어디 가세요? 간다면 저한테도 말씀해주셔야……."
당신은 문을 열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아직 바람을 쐴 만한 곳은 아니야. 그런 곳까지 나가려면 수십 층은 더 내려가야 하겠지. 그래도 사무실 안을 감돌던 정체불명의 공기보다는 나아.
몇 초 뒤, 당신이 뒤로한 문을 이치카가 여는 소리가 들려. "서언새앵니임~?"
알고 보면 지금 뒤에 있는 인물이 이치카가 아닐 확률도 0은 아니야. 그 확률이 당신이 뒤를 돌아봐야 할 정도로 높지는 않지만. 당신은 복도를 걸어 내려가고, 이치카(아마도)의 발걸음도 몇 보 뒤에서 당신을 따라와.
투명한 유리창은 지금이 얼마나 늦은 시간인지 또 일깨워주지만, 업무 종료와 당신 사이는 평소보다도 손이 많이 가는 학생 하나가 가로막고 있어. 손이 많이 가는 학생 하나 무시하는 것쯤이야 쉽지만, 여기 있는 평소보다도 손이 많이 가는 학생은 평소보다도 평소같지가 않아. 거기다 이런 한밤중에 이런 아이를 상대하는 것도 당신에게는 평소 일이 아니지.
당신은 달을 올려다보고서는 마음의 준비를 해. 이제부터는 키보토스가 통째로 증발했을 뻔한 일 이후로 가장 힘든 싸움이 될 거야. 학생 대 당신의 싸움이지. 뒤를 돌아봐. 이치카는 당신 앞에 서 있어. 평소와 같은, 평범한, 평소와 다르지 않은 미소를 입가에 올리고서 말이야. "안녕하심까, 선생님."
안녕, 이치카.
"어떻게, 오늘 밤은 잘 보내고 계심까?"
어어……. 이건 방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눴던 "이치카"가 아닌데. 오히려 평소에 알고 지내던 이치카의 모습이야. 왜 이렇게 태도가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치카를 지나서 사무실로 향하니 이치카도 당신 뒤를 따라오는 게 들려.
별로. 일이 아직도 산더미야.
"그 기분 잘 암다. 쉬고 싶을 뿐인데 일에 시달리고 있다니, 힘들죠, 그거."
그 말을 곱씹으며 사무실 문을 열어. 공감해주는 건 좋지만, 방금 전까지 이치카가 보인 행동에 이 아이의 목적이 무얼까 의심이 들어.
"저도 배운 방법인데, 쉬고 싶을 때 아주 잠깐만 쉬면 좋슴다. 잠시만 쉬면 되는 일인데 일이 끝날 때까지 천국같은 휴식을 못 즐긴다고 생각하면 안 되지 않슴까?"
그럼 그렇지. 그 쪽 방향으로 이야기가 흘러갈 줄 알았어. 그래도 이치카의 말을 듣는 데 죄책감은 조금 덜어진 것 같아. 뭐가 되었든 말이 되는 논리를 들고 나왔으니 한 번 쯤은 이치카의 말을 들어도……. 거기다 이치카는 항상 당신에게 도움을 주는 아이였잖아? 이기적인 마음으로 당신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당신에게 제안을 할 때는 당신을 제일 먼저 생각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모르지는 않아.
거기다 이치카의 말을 따르고 싶다는 바람이 당신의 생각을 그 쪽으로 비틀고 있는 것도 당신은 알고 있어. 근데 그게 뭐가 나빠? 누구든지 가끔은 쉬어 주어야 하는 거잖아.
책상 앞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마음을 정해. 이치카는 책상 맞은편으로 다가와 당신의 결정을 기다려. 자신의 제안이 당신 머릿속에 계속 박혀있었다는 걸 안다는 듯이 말이야.
좋아, 이치카. 같이 좀 쉬자, 네가 말했듯이.
이치카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뼉을 탁 쳐. "좋슴다! 즐거운 휴식 시간이었죠? 선생님께서 조금이라도 쉴 수 있어서 다행임다." 그 후 쏜살같이 문 쪽으로 달려가. "이제 조금 괜찮아지지 않았슴까? 복도 산책, 재밌었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이치카의 유혹을 뿌리치려는 행동이 결국은 이치카의 승리로 돌아갔네. 어쩌면 그건 당신의 승리를 위한 것일지도 몰라. 당신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봐. 잠시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있었을 뿐인데, 확실히 조금 눈이 편안한 것 같아.
이치카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 인사를 하며 업무를 다시 보기 시작하니, 문이 다시 열리고 이치카가 커피 두 잔이 올려진 쟁반을 가지고 들어와. "이런 심야에도 선생님과 보내면 재밌을 줄 알고 있었슴다. 선생님께는 뭔가 특별한 무언가가 있나 봄다. 그쵸?" 이치카는 후훗 웃음을 흘리고 당신 책상에 쟁반을 내려놓아. "뭐, 저는 입을 닫을 타이밍을 못 재는 것 같지만 말임다." 이치카는 뒤를 돌아 다시 소파 너머로 사라져. "저는 여기 있겠슴다, 선생님.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불러 주심 됨다. 오늘은 제가 선생님을 충분히 귀찮게 해 드렸으니 그걸 갚아 드리려면 이거 말곤 없으니까요."
당신은 커피 한 잔을 가져와 입에다 대. 예상대로 뜨거워. 하지만 팔방미인인(아니면 그런 비슷한 무언가인) 이치카답게 혀가 데일 정도는 아니야. 그런 상냥한 행동(과 약간의 휴식)에 당신의 일은 일사천리로 줄어들어. 어떻게든 당신과 당신 손에 들린 커피는 서류더미를 하나씩 해치워 나가고, 이치카도 당신을 건드리지 않아. 업무가 마무리되고 책상을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정리한 당신은 이치카를 확인해. 곤히 잠들어 있네. 뭐……. 애초에 당신이 그러라고 했으니까.
당신은 근처에서 담요를 집어서 이치카를 잘 덮어 주고, 다른 소파를 찾아 누워서 곧바로 곯아떨어져. 이게 피로의 힘인가?
이치카가 옳았던 것 같아. 잠깐 틈새를 준 덕분에 오늘 밤은 평소보다 수월하게 일을 했던 것 같아. 아주 잠깐 쉬기만 하면 됐었네.
이제 이치카를 이렇게 만든 배후한테 한 마디라도 해 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