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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바노그의 토끼 2장 스포일러
깡~ 하는 소리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새하얀 그것이 붕 뜨고――천천히 호를 그린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고요했고 내 귀에는 아무것도 닿지 않는다.
나는 그것에 손을 뻗는다. 닿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을 텐데, 그렇더라도, 손을 뻗는다.
소매가 걷힌다. 중력을 따라 땀이 떨어진다. 젖은 속옷이 끈적끈적한 피부에 달라붙어 기분 나쁘다.
번뜩이는 빛을 차단할 수조차 없어서 나는 눈을 감았다. 시야에서 사라진다. 하지만 눈꺼풀에 달라붙은 듯한 강한 빛이 홍채를 태웠다.
서서히 다가서는 듯한 열이 내 전신을 몰아세운다.
――그것은 열기와도 같은 저주의 기억. 주박 같은 시간이 나를 지금도 그 과거에 묶어 놓고 놓지 않는다.
내던진 팔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내 행방도 전혀 알 수 없게 되고, 어둡디 어두운 어딘가에 나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이 어딘지 모르기에――두려워서.
순간 모든 걸 잃어버린 것처럼 차가워졌고.
손가락 끝이 얼어붙듯이, 등뼈가 꺾이듯이, 내 신경을 얼린다.
아아――또.
나는 닿지 못했던 것이다. 그 감각만으로 모든 걸 알기에는 충분했다.
🌕
쇠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곧 그것은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라는 걸 알고 순간 몸을 움츠렸다.
캉, 캉 리듬감 있는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이윽고 멈춘다. 내 창살 앞에서 그는 걸음을 멈췄다.
"......여어."
"무슨 용무인가요? ......선생님."
"춥지 않을까 해서. 차입물이야."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감옥 틈으로 뭔가를 밀어넣었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캔커피 같았다.
"커피 좋아해?"
"......"
"난 좋아해. 쓴 건 잘 못 먹지만."
칙, 캔을 따는 소리. 그는 즉시 그것을 기울여 꿀꺽꿀꺽 목을 울리며 삼켰다.
".......무슨 속셈인가요?"
"속셈이라니. 그러니까 차입물이야."
"――하, 웃기지 마세요. 아니...... 웃으러 온 거, 아닌가요?"
"......"
"바보 같은 여자라고. 천치 같은 여자라고. 웃으러 온 거 아닌가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뭔가 납득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시간은 충분했던 모양이네."
"뭐가 말인가요?"
"자벌적이 되기에는――충분한 시간이었던 거 같아."
자벌적. 그런걸까. 나는 자신을 탓하고 있는 걸까.
――아니, 그럴리 없다. 자신을 탓하지는 않는다.
남들이 나를 비난하기 때문에,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도 그게 이치라고 삼키고 있을 뿐이다.
"......여기는 춥네."
"지하니까요. 모포 정도라면 있습니다만...... 쓰시겠습니까?"
"아냐, 괜찮아. 아까까지 조금 뛰어서."
"런닝인가요? 좋은 신분이시네요."
"몸을 단련해 두지 않으면 만일의 경우에 움직일 수 없으니까."
"......"
"카야는――――취미 같은 거, 없어?"
"없습니다."
"퉁명스럽네. 취미, 정말 없어?"
"......장기와 체스예요. 그리고 커피."
"그거 맛없네. 더 맛있어 보이는 커피를 골라올 걸 그랬어."
"캔인 시점에서 맛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창살의 틈 사이로 그에게 캔커피를 되던졌다.
나를 놀리는 듯한 목소리. 아는지 모르는지, 일부러 나에게 캔커피를 건네는 것 같은 수수한 괴롭힘. 이를 의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상당한 인간이다.
게다가, 굳이 입을 대지 않아도 맛 정도는 가늠할 수 있다. 이런 물건, 내가 평소에 마시던 것에 비하면 흙탕물이나 다름없다.
――애초에 그의 선물에 손을 대는 건 내 프라이드가 용납치 않는다.
......나에게 되던져져 그는 화를 낼까. 아니면 평소처럼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타이를까.
어쨌든 기분이 나쁜 건 변함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그를 봤다.
"――오, 나이스 피칭."
하지만 그는 예상외로――즐거운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째서 즐거워하지?
전혀 의미를 모르겠다.
"잘도 그 틈새로 던졌네."
"......그 정도는, 누구라도 할 수 있어요."
"못한다니까. 역시 카야구나."
"――――큭."
화가 나서――나는 강하게, 쇠창살에 주먹을 내리쳤다.
"――이런 게!"
"......"
"이런 게 시라누이 카야를 말해주기라도 한다고? 초인의 자격이라도 된다고!?"
"......그렇다면, 무엇이 초인의 자격이지?"
"......윽, 그건......!"
"그건?"
"뭐든지 할 수 있고, 부하를 거느리고, 업무를 해낼 수 있고, 어떤 일도 실수 없이 소화하고, 연습 따위는 하지 않아도 당연한 것처럼 일을 원활히 처리하는. 그리고 무엇보다도――신뢰받는. 모든 것을 가지려하고, 가진 사람. 그게 초인이죠."
"그런 사람은 없어. 이 지구상의 어디에도."
"있었어요. 이 지구상의, 이 곳에."
"......"
세게, 너무 꽉 쥐고 있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창살이 뒤틀려 있다.
그럼에도――이 장소에서 나를 데리고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뒤틀림이 아주 조금 비참해 보여서――나는 손을 뗐다.
"......비웃으러 온 게 아니라면 뭐하러 오셨나요. 설마, 제게 커피를 주려고 온 건 아니겠죠."
"혼자 있는 것도 쓸쓸할까봐."
"쓸쓸해? 제가? ――하, 웃기지 마세요. 초인인 제가 이 정도로 굴복하기라도 한다고 보시나요?"
"――그렇지만, 넌 초인이 아니잖아?"
"......읏."
설마, 설마.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 말문이 막혀 버렸다.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
그런 생각은――마치, 선생님만은, 나를 인정해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서――
매달리고 있는 것 같아서――
"......읏."
마음속에서부터 기분이 나빴다.
"카야."
"뭔가요."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시끄러워요!"
철그렁, 쇠창살이 세게 흔들렸다.
그래도 그의 시선은 나를 떠나지 않는다.
그게 너무 기분나빠서 구역질이 난다.
눈길을 돌린다. 어쨌든 그와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나는 벽을 보았다.
"시끄러워요――, 어째서 당신은 그렇게, 꿰뚫어 본 것처럼――!"
"꿰뚫어보진 않았어. 그리고, 내가 카야에 대해서, 대체 얼마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 하핫, 그래요.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지.
그 말을 어째서인지 할 수 없어서,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장난치는 남자. 내 신경을 일부러 건드려서 가지고 노는 건가.
"......읏."
아니, 그런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의도치 않게 마주친 눈이 그것을 여유롭게 말해주고 있다.
이 사람은 그저 악의같은 건 품지 않고, 오직 나와 이야기 하기 위해서 여기 서 있는 것이다.
그 정도는 안다. 아니, 하지만, 그렇기에――나는 이렇게나 화가 난 거겠지.
"어째서......"
"......"
"어째서, 당신은――"
"......"
"......――윽, 뭔가, 말해보세요! 바보 같은 여자라고 웃어보세요! 어리석은 여자라고 깔보시라구요! 아니면 비참한 여자라고 동정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당신은, 왜, 어째서!"
"카야."
"큭――"
"나는 카야를 바보로 만들려고 온 것도, 깔보려고 온 것도, 동정할 생각으로 온 것도 아니야."
"그럼 뭐하러 온 건가요!"
"아까도 말했잖아. 그저, 카야가 쓸쓸할까봐, 굳이 말하자면 동정일지 모르지만――그래도 카야를 힐난할 생각은 없어."
".....윽."
"그리고, 카야는 그런 거 싫어할 테니까. 그러니 정말로...... 조금,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
내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구슬려진 것 같은, 혹은 믿을 수 없는 걸 만나 버린 것 같은, 그런 상실감.지금까지의 과거가 무너져가는 듯한 망각과도 같은 붕괴.
정말로――그저 내 말을 들으러?
"그걸로, 선생님에게 무슨 메리트가 있나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네."
"......큭."
믿을 수 없는 남자. 무슨 강력한 이유가 아니라면 교정국에 수용된 나 따위를 만나러 올 필요는 없을 텐데.
게다가――나는 선생님을 깎아내리려 했던 것이다. 그런 나를 상대로――어째서 굳이.
"......"
"......커피."
"어?"
"역시 주세요. 질 낮은 원두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죠."
".......예이예이."
"그리고――"
"――"
"――혀가 건조해져서. 그뿐이니까."
🌕
두서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나는 예전의 일을 말하려 했다. 어째서 그것을 화제로 삼으려 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나는 누군가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런 화제라는 건 누구에게나 있으며,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안고 있는 충동이라 생각했고, 그렇기에 억누를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분별력이 흐트러졌을때 선생님에게 털어놓으려고 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전혀 움직이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내 입은 유려하게 움직였다.
오래전, 총학생회에서 친선경기를 하게 되었다. 어디까지나 학생으로서 스포츠맨십에 따라 친목을 다지기 위해 총학생회 내에서 팀을 이뤄 야구를 하기로 했던 것이다.
"......카야는 어디였어?"
"피처입니다."
"그렇겠지. 아까 투구...... 투캔? 은 훌륭했어."
"연습했으니까요."
연습. 그래. 나는 엄청나게 연습했다. 학생회 임원 전원이 지켜보는 마운드에서 망신을 당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적팀에는 그녀도 있었으니.
총학생회장. 그녀를 앞에 두고 무릎 꿇게 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밤에,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연습했습니다."
"카야는, 뭐든지 빈틈없이 해내는 이미지였는데...... 노력하고 있었구나."
"뭔가요. 그 말투는. 사람을 마치――완벽 초인처럼."
심야까지 계속 공을 던졌다. 인터넷으로 폼을 조사해서 깔끔하게 던질 수 있게 되기까지 며칠이 걸렸다. 아무래도 나는 요령이 없는 여자였던 모양이라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걸렸다.
"솔직히, 이겼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학생회장은 그 와중에도 변함없이 매일의 업무를 해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다는 건."
"엉망으로 졌어요. 그런 사람이 완벽 초인이라는 거겠죠."
그녀는 아주 쉽게, 내 공을 쳐 올린 것이다. 강한 타격. 그것은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
"――거기서부터는, 그다지 기억나지 않아요. 기억나는 건 제가 그녀에게 흙조차 묻히지 못했다는 것뿐."
"......"
"그런데, 신기하게도 납득이 가더라고요. 마음속 어딘가에서 저는 회장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걸 찬찬히 보며...... 납득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죠."
지금도 그 광경은 악몽처럼, 혹은 희망처럼 떠올릴 수 있다.
떠오르는 타구, 거기에 손을 뻗으며, 마치 태양에 가까워지는 이카로스처럼.
나는 그날, 아픔과 함께 현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카야는, 그렇게 되려고 했어?"
"――그렇지만, 분하잖아요."
"......"
"용서할 수 없잖아요. 그 사람은 타고난 거 같고, 뭐든 해내고, 연습하지 않아도 홈런을 치고, 삼자삼진으로 막고, 그런데 저는, 죽을 만큼 노력해도 홈런 맞고 범퇴예요. 그런 건...... 속상하잖아요...... 참을 수 없잖아요.....!"
어째서 그녀는 그렇고, 나는 그렇지 않을까.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니까?
――그런 말로, 나는 죽는 건가?
"그래서 증명하고 싶었어요. 초인은 될 수 있는 거라고. 되고 싶다면, 노력하면――될 수 있다고."
"......하지만, 아니었어?"
"결과가 그렇게 말해주죠. 저는 능력도 없고, 인망도 없고, 재능도 없었다. 있는 건 단지 야심뿐. 그것마저도 썩어버린 지금에 와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비참한 말로만이, 내 몸에 달라붙어 있을 뿐이다.
꼴사납게 생겨나서, 꼴사납게 사라졌다. 지금은 지하에서 혼자 중얼거리는 것밖에 할 수 없는 한심한 한 마리 짐승일 뿐이다.
"있지, 카야."
"......."
"지금부터 너에게 심한 말을 할 거야. 가슴을 찌르는 듯한 아픔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도, 믿고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어."
그렇게 서론을 꺼내는 그가 실헝서 나는 눈을 마주쳐 주었다. 시선이 교차했지만, 그는 조금의 겁도 내지 않는다.
――아름다운 눈동자를, 하고 있다. 솔직히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넌 틀렸어."
"......큭."
"하지만 그렇잖아. 누구나 자신에게 없는 걸 찾으니까. 빈 구멍을 메우려고 몸부림치는 게 인생인 걸.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구멍은 메워지지 않아. 그도 그럴게...... 그건 자신에게 없으니까."
찌르는 듯한, 상정 이상의 통증이 왔다.
그런 건 알고 있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가 틀렸다는 것 따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고 싶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틀렸다 해도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너는, 너무 혼자서만 가려고 하는 거야."
"......"
"뭐든지 혼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뭐든지 자기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해. 틀렸다고 해도 누군가 바로잡아 줄 거라고 생각해. 모두가 알아서 따라와 등을 밀어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그런 우수한 사람은, 초인이라고 해도 존재하지 않아."
"――큭, 그렇다면, 회장은.......!"
"나는 회장을 모르지만...... 그래도, 정말 그런 사람이었어?"
".......윽."
"타인을 믿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고, 그래서 틀린다해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고, 곤란할 때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있어. 굼뜨다고 남을 깔보는 사람을 누가 초인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그런 사람, 초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창살 너머로, 나에게 건네주었다.
순간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것을 받는다.
......손수건이었다.
"오늘은 카야와 얘기해서 다행이야. 다음에 또 올게."
"......서, 선생님."
"무슨 일이야?"
"당신은――――어째서......"
"......"
"어째서, 저에게 화내고, 벌 주려 하지 않나요!?"
그는 나의 통곡을 듣고――그러나 발길을 돌려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지금 당장 답이 필요해서, 나는 얼굴을 창살에 밀어붙이듯 그의 등을 쫓는다.
보이는 건 크고 흰 정장뿐. 하지만 그는 작게, 정말 작게――등을 굽히고 한마디 흘렸다.
"――하지만 너, 사실 이미 자벌이 끝났잖아."
"――――――――큭."
캉, 캉. 왔을 때와 다르지 않게 그는 걸어간다.
점점 시야에서 희미해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발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똑, 액체가 떨어지는 작은 소리가 나고서야 손수건을 건네준 의도를 알아차렸다.
🌕
일주일 후, 조건부――즉, 샬레에서의 봉사활동――로 나는 가석방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선생님이 협상을 해 준 모양이고, 몇 가지 비판도 나온 것 같지만――FOX 소대에 며칠 뒤처지는 모양새로 나는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대로 샬레로 직행하게 되어, 집에 갈 틈도 없이 나는 업무로 몰아세워졌다. 긴 엘리베이터를 견디자 곧바로 선생님이 일하는 방에 도착했다.
"여, 카야. 기다리고 있었어."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커피 내리는 법을 몰라서 말야. 평소에는 스틱이지만 모처럼이니 그라인더부터 샀거든. 봐주지 않을래?"
"......"
아무렇지도 않은 듯――다른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웃음이 터져나오는 걸 참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 그 전에 물어볼 게 있어요. 어째서 저를 샬레로?"
"그렇지 않으면 다른 아이들이 납득하지 못할 거 같아서. 특별 대우인 셈이지."
"저 같은 걸 위해서요?"
"응. 카야를 위해서."
"......"
아주 조금이지만 기쁘게 생각한 자신을 마음속으로 때리고 억지로 평정심을 되찾는다.
――어째서 내가 아주 조금 선생님에게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기뻐해야 하는가.
그의 옆까지 걸어가서 커피를 내린다. 아무래도 정말 새것같고, 먼지 하나 묻지 않았다.
"내리면서 들어줬으면 하는데, 오늘 사무처리는 대충 끝나서 외근 정도만 남았어."
"따라가면 되는 건가요?"
"여기서 기다려도 되는데...... 어떻게 할래?"
"아뇨, 가겠습니다."
적어도 조금이라도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야겠지. 선생님이 밖을 돌아다니는 가운데 혼자 실내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봉사기간이 늘어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커피 마시면 갈까. 아....... 맞다."
"? 무슨 일 있나요?"
"설탕, 조금만 넣어줘."
뭐가 커피는 좋아해, 야.
이 거짓말쟁이.
🌕
밖에 나오자 오랜만의 공기는 조금이지만 상쾌해 내 폐를 채워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 계속 축축한 실내에서 지내서인지, 아니면 좋은 커피를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인지.
어느쪽이든――나는 선생님에게 달라붙는 듯한 모습으로 밖에 나왔다.
"어디를 도는 건가요?"
"정하지 않았어."
"......"
적당한 남자.
"애초에 어째서 선생님이 순찰 같은 걸? 사건이 터지면 바로 알 수 있지 않나요."
"응. 하지만, 밖에 있으면 그만큼 빨리 도착할 수도 있고...... 이렇게 걷다 보면 의외로 학생들의 일상을 알 수 있어서 즐겁거든."
"시간視姦이 취미?"
"말이 너무해."
내 가시돋친 말을 개의치 않고 그는 정처없이 돌아다닌다. 나도 어쩐지 모르게 금붕어 똥처럼 뒤를 따라다닌다.
――이렇게 보는 키보토스는 왠지 신선하고, 조금 의외였다.
늘 사건만 일어나는 곳이라 좀 더 퇴폐적일 거라 생각했다. 금방 여러 장소에서 총격과 분쟁이 잇따라 치안 같은건 괴멸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고, 왠지 반짝이는 공기로 가득해서――――조금은 슬픈 기분이 들었다.
"......"
어째서 슬퍼져야 하는 걸까. 어째서 평화로운 키보토스를 보며 내가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안심해야 한다. 키보토스가 이렇게 돌아가는 걸 보고 나는 안도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는 정반대로 내 마음은 한 걸음마다 가라앉았다.
"오늘은 평화롭네."
"......그러네요. 세상은 평온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
"마치 일어나길 바라는 듯한 말투잖아."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래도......."
"카야가 대표에서 내려왔는데 평화로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큭, 시끄러워요!"
까악, 하고 까마귀가 날았다.
나에게 겁먹은 듯이――공포를 느낀 듯이. 그만큼 큰 소리를 내버렸다.
"어째서 그렇게 저에게 다가서는 건가요? 즐거우신가요, 제가 이렇게 흐트러지는 걸 보고!"
"즐겁거나 하지 않아."
"그럼 어째서――"
"하지만 너무, 괴로워 보여서."
"......큭."
"어쩌면, 나와 카야는 닮은 구석이 있을지도. 어째서인지 너를 잘 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
"――하, 제가 당신과 닮았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저는 저입니다. 당신 같은 게 아니야.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알 수 있을 리가 없어――――!"
"하지만, 그렇지?"
"――――"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표에서 내려오고, 키보토스는 평화롭고, 그걸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다?
전혀 아니야. 그럴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왜냐하면 나는 키보토스를 평화롭게 만들기 위해 린 대행을 끌어내렸으니까. 내가 내려와 평화로워진다면 그 이상 바라는 건 없다.
――――그럴 터다. 그럴 터, 인데......
"이 세상에 초인이란 없어. 그건, 카야가 제일 잘 알텐데. 낙원을 증명할 수 없는 것처럼......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시끄러워요......"
"나는 르상티망*을 안고 있는 카야가 언젠가 폭발하지 않을까 걱정일 뿐이야."
*원한. 유한. 증오. 약자의 강자에 대한 복수심으로 울적한 심리 상태.
"시끄러워요......!"
"카야."
"시끄러워요!"
힘껏, 나는 선생님을 밀쳤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잘못된 건 세계 쪽이다. 이렇게 꼬이고 뒤틀린 세상이 나쁘다.
――그러니 나는 나쁘지 않다.
"아야야......"
엉덩방아를 찧고 선생님은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대로 편히 앉아 나를 본다.
"시끄러워요――당신, 정말로, 정말 싫어요!"
"괜찮아. 싫어해도. 좋아해주지 않아도."
"어째서 저를 신경 쓰는 거죠? 18번인 박애주의인가요!? 아니면 선생님이니까 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그럼 됐어요, 그러지 않아도! 어차피 저는 저인 채 그대로니까요! 내버려 두세요!"
"――――그럴 수 없어."
"어째서!"
"......왜냐하면, 카야가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걸 보면 왠지 나까지 아픈 기분이 드니까."
――영문을 모르겠다.
내가 나를 상처 주고 있어? 그럴 리가 없어. 나는 나다. 아무것도 아닌.
그러니 만일 내가 상처 받는다 해도 선생님이 상처 받을 리가 없다.
"그러니 이건, 내 이기심이야. 네가 상처받는 걸 보고 있을 수 없어. 어째서냐 하면 내가 싫으니까. 선생님이라든가 어른이라든가 하는 건 상관없이...... 카야."
"......읏."
"나는 그저, 네가 울고,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힘껏 베개를 벽에 던졌다. 퍽 소리가 나고 그대로 땅에 떨어진다. 의미도 없이. 나는 어째서인지 떨어지는 베개를 보며 초조함이 커져갔다.
그 뒤, 별다른 일도 일어나지 않고 날도 저물어 나는 몇 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작은 독채, 초인이 살기에는 조금 콤팩트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쿵 하고 벽을 때렸다. 살갗이 까져서 피가 흐른다. 통증은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슴 속이 엉망진창이었다. 생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의미를 알 수 없고, 머리에 피가 솟구쳐 견딜 수 없어 나는 다시 한 번 벽에 주먹을 내리쳤다.
아주 조금, 살이 찢어졌다. 벽에 새빨간 피가 묻어서 조금이지만 머리가 차가워졌다.
.......아프다. 따끔거리며 피부에 스치는 듯한 통증이 점차 저려오고, 통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 아...... 하――하――――아."
호흡도 완전히 잊고 있엇다. 폐에 찬 공기가 드나들며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침을 삼킨다. 혀가 메말라 들러붙어있다. 그래도 누군가에게 말할 일은 없으니 문제는 없지만.
침대까지 걸어가 창가로 눈을 돌렸다.
――그런 것, 알고 있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걸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나는 분명 잘못을 저질렀을 거다. 나는 분명 실패했을 거다. 나는 분명 뒤틀려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인정해 버리면 지금까지의 시라누이 카야라는 여자의 삶에 낙인이 찍히는 것 같아, 그것이 참을 수 없이 싫다.
프라이드를 품은 채 익사하는 것과 같다. 비대해진 자존심이 발목을 잡아 나는 산소조차 마시지 못하는 것이다. 그대로 질식해서 죽어버리면 될텐데.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그런 건 알고 있다.
무엇을 실패해 버렸는가. 그런 건 알고 있다.
어째서 뒤틀려 버렸는가. 그런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단지 그걸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보지 않은 채 뚜껑을 덮고 상자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익사해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는, 선생님은, 나보고 웃으라 한다.
말 같지 않은 소리다. 농담이라도 웃을 수 없어. 진심으로 말하는 거라면 더더욱.
비웃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내 인생은 마치 광대 같고 실패를 원인으로 손가락질 받으며 물에 빠질 뿐이다.
걷잡을 수 없는 사고가 소용돌이치며 머리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이대로 메말라 사라져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래도 목은 마르고 배는 고프다.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자신이 꼴사납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되어 견딜 수 없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을텐데. 아니면 운석이라도 떨어져 의식이 사라지면 좋을 텐데. 눈을 감으면 그대로 깨어나지 않고 숨을 거두면 좋을 텐데.
그럼에도 내 사고에서 자살의 말은 나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건 두려우니까. 죽고 싶지 않으니까. 자신의 연속성이 끊길까봐 두려우니까.
그렇게나 과거의 낙인에 가위눌리면서, 그래도 버릴 수가 없다. 어설픈 여자.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니까.
호흡이 떨린다. 메스꺼움이 느껴진다. 이대로 토해버리면 얼마나 편할까. 하지만 위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고 눈물도 흐르지 않는다.
――그때였다. 돌연히 챙강하고 격한 소리가 났다.
나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린다. 무엇인가 방에 던져졌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그 정체를 눈치채고 있었다.
――타오르는 도선에 굵고 긴 갈색 막대가 줄지어 있다.
다이너마이트? 어째서 우리 집에? 창문을 깨고 던졌어?
사고가 따라가지 못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대로 묘사되어 있었고, 나는 뒤늦게 모든 것을 이해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내 방에 폭탄을 던졌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막 기폭하려 하고 있다.
뇌리에 떠오르는 말은――틀릴 수 없는 한 단어.
죽음.
이것이 있으면 나는 죽을 수 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걸로 죽을 수 있다. 몸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으니까, 죽을 수 있어. 죽는 거다.
나는 그 폭탄과 사랑에라도 빠져들듯 눈을 크게 뜨고 빤히 바라보다가, 이어서 마른 혀를 억지로 움직였다.
"싫어어어어어어――――!!!!!!"
"――――싫어, 죽고싶지 않아! 왜!? 왜!? 어째서!?"
"싫어! 죄송해요! 죄송해요!!!"
싫어, 도와줘, 누가.
――――죽고 싶지 않아.
꼴불견으로 생에 매달렸다.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내 소원은 깨졌다.
도와주세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혀가 엉키고, 덜컥 이로 깨물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뇌수가 냉정해졌지만 다음 순간 도선이 사라졌다.
――――타닥타닥타닥!
"......읏."
"..............."
".................................."
꽉 이를 깨물고 담요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픔따윈 없었고, 뜨거움도 없었고, 나는 아직 살아있는것 같았다.
".......아, 에.......?"
감은 눈을 뜨고 보면――――아무것도 없다.
잘못 봤다. 다이너마이트 같은 게 아니다. 그저 폭죽이다. 그게 터졌을 뿐이다.
――쿵, 쿵 심장이 뛴다. 혈액이 돌고 몸이 깨어나고 있다.
웃기지마. 장난도 도가 지나쳐.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입을 움직일 수 없다.
무서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혀가 떨리고 둔하다. 손가락 끝이 저리다.
"휘유! 꼴불견인 비명 녹음 완료!"
"테러리스트는 키보토스에서 나가라!!!"
"너같은 건 필요 없어! 뭐가 공포에 의한 지배냐!"
"네가 겁쟁이일 뿐이잖아, 쿠소빗치가!"
"시라누이 카야는 키보토스에서 나가라!"
"나가라!"
"인근 주민을 얕보지마!"
"――우왓, 위험해, 발키리야! 도망간다!"
"움직임이 너무 빠르잖아! 엉터리라는 소문은!?"
"소문은 소문일 뿐이구나......어이, 빨리 짐 싸!"
"잠깐만 삼각대가 안 접혀!"
"어째서 녹음하는 데 삼각대를 편거야!?"
쿵쾅대는 소리가 집 밖에서 들리고――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들은 사라져 있었다.
🌕
"카야, 들어갈게."
그 소리가 나서 갑자기 잠에서 깼다.
"......"
나는 담요를 두른 채 다리를 접어 움츠러든 채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곧 문이 소리를 내며 시원스레 그의 침입을 허락했다.
"――카야!?"
그는 깨진 창문으로 눈을 돌리더니 곧바로 나에게 달려왔다.
".......제가 했어요."
"창문을 깼어? 카야가?"
"그래요. 짜증나서요."
"그럼 왜 실내에 파편이 떨어져 있지?"
"......."
"폭죽의 잔해....... 누군가 던져 넣었구나."
그는 천천히 나에게 다가온다. 그만해. 오지마.
――이런 나를 보지 마.
"카야."
"오지 마세요."
"......카야."
"나를 부르지마! 얼굴도 보기 싫어! 나가라고!"
콰직, 유리 밟는 소리. 거리낌 없이, 선생님은 억지로 나에게 다가온다.
"그만해, 오지마――!"
"――――시끄러워, 날 봐!"
"......"
그는 담요째 내 몸을 껴안았다. 꼬옥, 누군가의 살결이 느껴지면서 조금 표정이 무너져 버린다.
깨닫지 못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알지 못하게, 속이고 있었는데.
――그의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하는, 블루 마운틴이었다.
"뭘 참고 있는 거야."
"참아......? 이 내가.......?"
"카야는 지금 울어도 돼! 울부짖어도 괜찮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다면 내가 숨겨줄 테니까! 울지 못하는 어른이 되려 하지 마!"
"......"
"울지 못하는 어른만큼 괴로운 건 없어...... 그러니 카야는, 그렇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고. 괴로워야 할 때 괴로워하고. 그렇지 않으면 정말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없으니까."
강하게, 그의 몸이 밀착된다.
......시끄러운 사람. 다물어줬으면. 그런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울면 안 된다. 지금 울어버리면 나는 모든 걸 인정하게 되니까.
이 눈물은 실패의 증거나 다름없다. 그러니, 그런 걸, 흘려 보낼 수는――
"......카야."
"......"
"나를 싫어해도 좋아. 그러니....... 적어도, 네가 편하게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지 내가 보게 해줘.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 같은 건 할 수 없으니까."
"아――――으......."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아니면 내 비명이었는지도.
사람은 이토록 쉽게 흐트러지는 걸까. 그만큼이나 단단히 묶어 다시는 풀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는 얼마나 쉽게 그걸 풀어버리는 걸까.
그렇다면――그렇구나. 납득했어.
"저, 저, 저는......"
입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어떻게든, 어떻게든 그에게 전달하려고.
나는 꼴사납게 입술을 움직였다.
"주, 죽는 게 아닐까하고...... 살해당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응. 무서웠지."
"누가, 도와줬으면 해서. 하지만, 저 같은 건,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으니까......"
"있어. 내가 있어."
".....그때, 생각했어요. 도움을 청하려고, 필사적으로, 꼴불견으로 울부짖으면서...... 떠올랐어요."
".....무엇이?"
"선생님의, 얼굴이――"
"――――"
"어째서 선생님이야. 선생님 같은 사람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바보같고 바보같아서, 의미를 알 수 없어서...... 한심하고, 비참해서......"
"......."
"......하지만, 선생님이 꼬옥 해줘서, 굉장히, 안심해 버려서. 그게 용서할 수 없어서. 가슴속에 여러가지 것들이 터져버릴 거 같아서......"
"그렇구나."
"어째서 이런 거, 말해버리는 걸까. 나......"
".......괜찮아. 다 들어줄 테니까. 조금씩 얘기해줘."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더욱 강하게 나를 껴안았다. 담요를 벗고 나도 그의 몸에 안겼다.
왠지 그게 제일 안심이 됐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
사각사각, 원두를 간다. 좋은 향기가 코를 간질여 기분이 좋아진다.
이 순간은 참을 수 없다. 가장 향기가 좋을 때를 독차지할 수 있으니, 더욱 참을 수 없다.
바란다면, 이루고자 한다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행복. 그렇기에 나 같은 인간에도 평등하게 이 행복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만약. 바란다 해도, 이루려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행복이 있다면?
"......"
나는 그날과 마찬가지로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 그럼에도 계속 손을 뻗을 수 밖에 없는 걸까.
분명 그렇겠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계속 바라는 것에 나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소원이라는 것은 이루어지고 나서야 만족하기 때문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을 계속 바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만약 그 소원을 이루려고 한다면――분명.
그것은, 이 세상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겠지.
"선생님, 커피요."
"오, 고마워."
"설탕은 두 개면 됐죠."
"완벽해. 도움이 되네."
툭 선생님의 테이블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나도 다른 한 손의 커피를 내 테이블에 놓고 작업으로 돌아왔다.
내 집에서 작은 사건이 있고 며칠이 지났다. 주모자는 깔끔하게 발키리에 붙잡혀 지금은 교정국행. 아마 금방 나올테니 이미 학교에 다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다.
내 비명을 녹음했다는 데이터는 SNS에서 꽤 화제가 됐다는 모양이다. 그토록 당당하게 사람들 앞에 선 내가 꼴사납게 목숨 구걸까지 했으니. 결과적으로 나는 밖에 제대로 나갈 수 없게 됐고, 집 위치도 간단하게 퍼져 버려――지금은 거의 샬레에서 나오는 일이 없어져 버렸다.
애초에 나를 숨겨주겠다고 한 건 선생님이다. 적어도 세간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봉사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봐주겠다고 단언하며――사용하지 않던 개인실에 내 방을 배정해주었다.
어차피 집에서도 있을 곳이 없었으니, 그나마 혼자만의 장소를 마련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샬레 안이라면 폭죽이나 폭탄이 던져지는 일도 없을 테고.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선생님의 일을 도와――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선생님."
"무슨 일이야?"
"......해주세요."
".....에? 뭘?"
시치미떼듯이, 그는 말한다. 장난치는 것 같아서 초조해진다. 하지만 분명 내 목소리가 작아서 못 들은 거겠지. 그런 건 모르겠다. 이 정도는 알아들었으면 좋겠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런 선생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는 되풀이한다.
"꼬옥, 해주세요......"
"――네네......."
의자에서 일어나 선생님은 팔을 벌렸다. 아무 생각 없이 나는 그의 몸에 달려들었다.
조금 단단한, 남성스러운 살집. 옷에 밴 그의 냄새.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몸.
팔이 등을 감싸고 그대로 꼭 껴안는다.
――이러고 있으면 나는 분명 나인 채로 있을 수 있다. 흐트러지지 않은 채, 깨지지 않은 채, 가라앉은 채로 있을 수 있다.
그의 냄새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신다. 아주 조금 달콤한 냄새. 그의 냄새가 아니다. 내것도 아니다. 분명 내가 모르는 여자 냄새다.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허그하는 성격이겠지. 분명 호의를 품고 있고, 나보다 훨씬 좋아하고, 사랑하는 학생이기도 하겠지. 나 같은 게 아니더라도 선생님에게는 좋아하는 상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선생님밖에 없다.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것은 나를 싫어하니까.
그를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호의를 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선생님도 그런 건 알고 있으면서 나에게 몸을 맡기고 있는 걸거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허그로만 안심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와의 포옹은 따뜻하고, 안심되고, 내가 나인 모양 그대로 있을 수 있어서 진정된다. 항상 이러고 있지 않으면 나는 사라지고 만다. 윤곽이 희미해져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채 옅게 가라앉아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공기조차도 나를 거부하고 결국 숨도 쉬지 못한 채 나는 죽는다. 그런 이미지가, 비전이, 가끔 내 등을 차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선생님의 냄새라면, 나는 분명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반경 30cm가 채 안 되는 작은 공간에서만 나는 살아있을 수 있다. 어항 같은 거처라 해도 그게 내 울고 웃을 수 있는 상한선이다.
"......선생님."
"왜?"
"오늘, 선생님 침대에서 자도 될까요?"
"응석받이네."
"시끄러워요. 그래서 괜찮나요?"
"좋아."
아무렇지도 않게 그는 말했다. 여자와의 동침이다. 아무리 나를 그런 대상으로 보고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더 당황하는 게 어떨까.
......아니, 아닌가. 단순히 익숙할 뿐인가. 여자랑 자는 게 처음이 아닐 뿐이겠지.
그런 행위를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나는 안심하고 잠들고 싶을 뿐이다. 그가 곁에 없으면 만족스럽게 잠조차 잘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여자다.
――그렇지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어. 남의 시선이나 의견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남자와 베개를 같이하는 여자라는 말을 듣든 상관없다. 설령 선생님이 몸을 요구한다 해도, 나는 분명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추워질 거 같으니 담요를 바꿔야겠네."
"냉증이라 그렇게 해주시면 살겠네요."
"응. 지금도 꽤 차갑고."
"......"
서로 끌어안으며 우리는 말을 주고받는다. 의미 같은 건 없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가 대답해주기만 하면 왠지 내가 살아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아 조금은 편안했다.
분명 오늘은 푹 잘 수 있겠지. 그러면 무조건 내일이 온다. 이대로 멈춰 버렸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해도, 어떻게 해도, 어떻게 발버둥쳐도 내일은 제멋대로 온다.
"있지, 카야.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게 있어?"
"없어요."
"꿈이 없네."
"이룰 수 없는 꿈을 바라는 건 헛된 일이에요."
"......그래. 그럼 이룰 수 있을 만한 꿈은 없어?"
"없어요."
"그럼 찾아보자. 하고 싶은 일."
"......"
"인간의 평균 수명은 80년 정도. 근데 80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겐 너무 긴 거 같아. 그러니...... 모처럼이니까, 뭔가 찾는 건 어떨까?"
"그렇다면――――선생님."
"오, 뭔가 하고 싶은 거 찾았어?"
"네, 선생님."
"......?"
"선생님이 찾아주세요."
"어째서 내가."
"그거면 되니까. 그걸로 충분하니까요."
".......응석받이녀석."
"시끄러워요."
소설모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rojectmx&no=2463136
원본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20104021
초인이 아니라 쵸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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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개추


묵직하네
야사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