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L #드라마 #데카가키 #??
원본 by zizi
=========================
<1> ~ <6>
<1>
어느 날 일과 시작 전.
코를 찌르는 시너 냄새가 감도는 샬레의 집무실에서 나는 한 소녀를 뒤에서 안듯이 감싸고는 그 손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손 떼도 될까요…?”
“응, 이제 괜찮아.”
“으으…하지만…역시…….”
“불안하지? 그 마음 알아.
하지만 나도 애용하는 순접이니까, 분명 잘 붙어 있을 거야.”
“…그렇다면…….”
작은 손이 파르르 떨리면서도 기세 좋게 키트에서 떨어졌다.
“에잇!”
다행히도 접착제가 발린 얇고 작은 부품은 제자리에 딱 버티고 섰다.
눈앞의 창백하리만치 하얀 소녀는 불안한 듯 여러 각도에서 그것—
밀레니엄 학생이 영상 기록을 토대로 만들어 준 게부라의 레진 키트—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부품이 처지거나 떨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망울이 어찌나 반짝이던지.
“선생님! 보세요!”
“후후, 잘했어.”
아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반대쪽 손으로 설명서를 눈앞까지 들어 올렸다.
“어디 보자……. 다음은 어디부터 조립해 볼까…….
큰 부품이랑 가동 부위는 황동선을 박고 싶은데…….
으음, 3D 프린터로 통째로 뽑아버리면 세밀한 디테일이 뭉개지니까 그 아이들 성격상 그렇게는 안 만들 줄 알았어.
설마 레진 키트로 내놓을 줄이야……. 고민되네.”
“저는 그, 기, 기뻐요.
지금까지 선생님이랑 같이 세척도 하고 사포질도 해왔지만, 몸통의 작은 부품 하나하나조차 정말 게부라 짱같아요…….”
아직 머리의 극히 일부분밖에 완성되지 않은 게부라를 들어 올리며 행복해하는 아인을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후후, 그러게. 좋아! 계속 힘내서 예쁘게 완성하고 멋지게 장식하자!”
“네!”
그렇게 한참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윽……. 또 이러고 계셨어요? 이 냄새는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요.”
짐짓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책상까지 다가온 오르는 얇은 입술 사이로 혀를 쏙 내밀며 작은 세 개의 눈을 더욱 가늘게 떴다.
“아인은 그렇다 쳐도 선생님은 괴롭지 않으세요?”
“이 취미도 오래돼서 이제 익숙해졌어. 그래도 불쾌한 건 마찬가지지만.”
“굳이 불쾌한 짓을 사서 하면서 기뻐하다니, 바보 같아.”
“후후…바보 같은 게 바로 인간이지…….”
싫어하는 소프를 끌어당겨 나는 억지로 어깨동무를 했다.
“여기 있는 동안 바보 같은 짓이 뭔지 듬뿍 가르쳐 줄게.
이 바보 대표가 직접 말이야.”
수줍어하는 아인과 투덜대면서도 싫지 않은 기색인 오르까지 함께 끌어안았다.
소프의 입에서 나오는 불평도 애교로 들릴 만큼 익숙해졌다.
내 품 안에서 와아아, 꺄아아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에게서 오히려 기운을 얻는다.
강철 대륙에서의 나날이 끝나고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녀들은 잠시 말쿠트와 함께 밀레니엄에 머물렀지만,
헤일로가 없다는 점과 여러 경험을 쌓게 해주고 싶다는 의견에 따라 같은 헤일로 없는 동지이자 격무로 이곳저곳을 누비는 내가 돌보게 되었다.
돌본다고는 해도 제 앞가림은 스스로 해온 세 아이다.
수발을 든다기보다는 키보토스에서의 역할과 전망을 이곳에서 찾게 해주려는 생각으로 데리고 있다.
지금도 소프와 오르는 각각 도서실 개관 준비와 텃밭 상태의 확인을 다녀온 참이었다.
아인도 방금까지 내 권한을 빌려 아로나, 프라나와 함께 샬레의 보안 체크와 경보 로그를 확인해 주었다.
작업이 일찍 끝나는 바람에 작은 게부라가 너무나 신경 쓰였던 아인의 희망대로 짬을 내어 조립을 진행했을 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세 사람이 내 품에서 빠져나갔다.
유리 벽 너머로 아침 햇살이 부서지는 거대 도시를 등지고, 반듯한 자세로 나를 바라본다.
벽시계를 슬쩍 확인하고 나도 자세를 바로잡았다.
“좋아! 그럼! 오늘도 하루 잘 부탁해!”
“네! 선생님, 잘 부탁드립니다!”
“…알았어.”
“네네. 잘 부탁드려요, 선생님.”
<2>
“이게?”
“응, 이게.”
“이거?”
“이거지.”
나는 알 듯 말 듯한 대화를 우타하와 나누며 운동 부족인 목이 뻐근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쩍 벌린 채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움직, 이나요?”
시야 밖 아래쪽에서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슬쩍 내리니 아인 역시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이것’을 보고 있었다.
“움직이고말고.”
우타하는 인자한 미소를 아인에게 지어 보이고는 ‘이것’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부원들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 신호에 히비키와 코토리가 척 손을 들더니, 둘이 ‘이것’의 머리 부분을 조금 만졌다.
눈에 불이 들어오고 머리가 번쩍 들렸다.
“발키리 경찰학교에서 해석 의뢰가 들어왔던 건데, 자세히 조사하기도 전에 사건이 해결됐나 보더라고.
증거품으로 보관하기에도 덩치가 너무 커서 처치 곤란이라기에 인수를 신청해서 가져왔지.”
우타하가 캐터필러를 콩콩 두드렸다.
“원래 완성도는 형편없었어.
디자인은 둘째 치고, 거대 로봇으로서는 리오 회장의 아방가르드 군 발치에도 못 미치지.
현금 수송 차량을 습격하려고 만들었다는데, 시골길을 느릿느릿 달리고 있다가 붙잡혔다더군.”
“악어 머리 거대 로봇…멋있어요…….”
아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눈앞의 로봇을 올려다보았다.
넓고 높은 엔지니어부 격납고 한구석에 자리 잡은 것은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로봇이었다.
풀사이즈 SUV만한 하반신에는 노출된 캐터필러가 달렸고, 그 위에는 뭉툭하고 땅딸막한 몸체가 얹혀 있었다.
어깨에 직접 화기가 장착되어 있었고, 캐터필러와 몸체 하부에는 매직 핸드 같은 매니퓰레이터 4개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그리고 우리 꼬맹이가 감동했듯이 머리에는 커다란 악어 머리가 달려 있었다.
“악어 머리는 우리가 마음대로 붙인 거야. 마침 남는 게 있어서.”
“…남는 게 있는지는 둘째 치고, 악어 머리가 이렇게 컸었나?”
“후후, 뭐, 여러 사정이 있어서.”
우타하는 어깨에 올라탄 채인 두 사람에게 다시 손을 들었다.
“어이! 시작해!”
“알겠습니다!” 코토리가 등 뒤로 돌아갔다. “그럼 부탁드려요!”
“어, 저기…저, 정말 하는 건가요?”
엔지니어부 부원이 아닌 아이의 목소리가 로봇 몸체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나보다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아인이었다.
“방금 목소리… 유즈?”
“아아, 역시 조종은 익숙한 사람에게 맡기고 싶어서 말이야.”
“제, 제가 익숙하다니, 그런…….”
“어라? 이 목소리가 들린다는 건 집음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겠네.”
“네, 네…….”
평소처럼 자신 없는 유즈의 목소리가 들린 뒤, 악어 머리가 정확히 이쪽을 향했다.
“아인, 오랜…만이네.”
“오랜만이에요, 에헤헤.”
악어 로봇에게 작게 손을 흔드는 아인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자니, 우타하가 아인과 눈높이를 맞추듯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괜찮다면 한번 타보겠니?”
“네…!?”
주춤주춤 주변을 살피면서도 아인의 뺨은 발그레해져서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기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우타하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엔지니어부 1학년들도 눈짓을 주고받으며 어깨에서 내려왔다.
“총에 탄환은 넣지 않았고, 가연성 연료도 쓰지 않았어요.
헤일로가 없어도 안심하고 탈 수 있답니다!”
“응. 콕핏에는 에어백이랑 구급 키트도 완비했어. 원한다면 다음번엔 파일럿 슈트도 맞춰줄게.”
홍수처럼 쏟아지는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도 아인은 다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크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 아이들이 괜찮다고 하면 괜찮을 거야. 안심하고 다녀오렴.”
아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해괴망측한 기능이 수두룩할 텐데 지금은 얌전한 걸 보니…….”
엔지니어부 아이들이 슬쩍 눈을 피했다.
“분명 조율을 잘 해 뒀나 봐.”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듯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있던 아인은 마침내 백점 만점짜리 미소를 지어 보였고,
코토리와 히비키의 손에 이끌려 악어 로봇을 향해 달려갔다.
“히비키 짱, 코토리 짱.”
악어 머리가 세 사람의 움직임을 쫓았다.
“내가 따로 조작해야 할 건 없어?”
“아직 랜딩 포즈는 안 넣었으니까 괜찮아.”
“…히비키 짱, 랜딩 포즈가 뭐야?”
“설명해 드리죠! 랜딩 포즈란…….”
“아, 저기! 파일럿이 타고 내리기 위한 자세, 맞죠!”
“오오! 아인 씨! 벌써 과정을 이수하셨다니, 장래가 유망하군요!”
다 같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아인을 도와 로봇 위로 올라가는 1학년들의 모습에 우타하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조금 내성적이지만 호기심이 왕성해서 훌륭하네, 저 아이는.
무엇보다 로봇과 괴수를 좋아한다니.”
우타하가 입을 가리고 큭큭 즐거운 듯 웃었다.
“말쿠트와 마찬가지로 밀레니엄 체질이야.”
“거대 로봇이랑 괴수는 인류 공통의 로망이니까.”
그러다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동글동글한 탱크 하나.
“응원 로봇 같은 거는 말고.”
“아니, 그건, 그…응원은, 할 수 있었잖아?”
“그랬던가?”
“그랬어.”
“그게 로망이었나?”
“그것만큼은 양보 못 해. 로망이라고.”
우타하와 서로 마주 보며 웃고 있자니 악어 로봇에 변화가 생겼다.
아인을 콕핏에 태운 코토리와 히비키가 밖으로 나와 이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세웠다.
“부장님, 시트 사이즈가 아인한테 딱 맞아요.”
“예전에 몰래 3D 스캔해두길 잘했네요!”
“몰래?”
“몰래…….”
“로망?”
“로망…을 위해서였어.”
“후후, 아인을 위해서 신경 써줘서 고마워.”
“…정면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쑥스럽네.”
내려온 1학년들과 함께 얼굴을 붉힌 우타하를 둘러싸고 있자니, 악어 로봇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매니퓰레이터가 빙글빙글 돌고 어깨의 총구가 겁먹은 신병처럼 이곳저곳을 향했다.
“아인 짱, 이 컨트롤러들…아! 저번에 했던 격투 게임 기억나?”
“기, 기억나요……. 유즈가 너무 강해서 케이랑 아리스랑 같이 엉망진창으로 당했었죠…….”
“아, 아하하…….”
“하지만 다음에는 꼭 이길 거예요……!”
“…응, 기대하고 있을게! …자, 그럼 격투 게임을 한다는 느낌으로…”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대화에 맞춰 신나게 움직이는 악어 로봇을 바라보며, 나는 엔지니어부 아이들과 함께 미소 지었다.
‘어느새 이렇게 친구가 많이 생겼구나.’
가끔은 인생 선배 흉내를 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3>
석조 복도에 깔린 카펫 위를 소리 나지 않게, 하지만 가능한 한 빠르게 걸었다.
오른손에 든 바구니에는 커다란 가죽 장정의 프랑스식 제본 도서가 다섯 권 정도 담겨 있었다.
책의 무게 때문에 팔을 파고드는 바구니 손잡이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시선만은 똑바로 들어서 서가 번호를 확인했다.
“선생님, 여기.”
몇 걸음 앞서 걷던 소프가 서가를 가리켰다.
“확인.”
숨을 몰아쉬며 서가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간 나는 이가 빠진 듯 비어 있는 틈을 찾아 바구니 속의 책을 끼워 넣었다.
“어디 보자…이 기호는…….”
고민하고 있자니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소프가 능숙하게 책의 순서를 맞췄다.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자 어딘지 기쁜 듯 미소 짓는 것도 잠시,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삐죽이더니 홱 고개를 돌려 우이가 있는 곳으로 먼저 돌아가 버렸다.
내가 고서관 담화실로 돌아왔을 때, 소프는 이미 자리에 앉아 시미코, 우이와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아, 선생님!”
시미코가 손에 든 컵을 빈 좌석 앞으로 밀어주었다.
“수고하셨어요. 카모마일 티예요! 드세요.”
“항상 감사합니다.”
웃으며 격려해 주는 도서관의 두 요정과는 대조적으로, 약간 못마땅한 듯한 소프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선생님, 늦어.”
“아니, 이건 소프가 대단한 거야.”
“분류법 정도는 한 번 들으면 알 수 있잖아?”
“알 수…있으려나…….”
나는 의자에 앉아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이것이… 젊음인가…….”
짐짓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눈썹을 내리며 쓴웃음을 짓는 시미코와 미소 짓는 우이가 보였다.
소프 역시 어이없다는 듯, 그러면서도 즐겁게 웃어 보였다.
그대로 다 함께 한가롭게 대화를 나누며 고서관의 평온한 시간에 몸을 맡겼다.
이곳은 서가가 없어 작은 채광창으로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고, 그 온기는 내 눈꺼풀을 무겁게 만들었다.
시미코와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소프가 내 소매를 꾹 잡아당겼다.
그녀를 쳐다보니 불안한 듯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니 우이가 소프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화의 중심은 나와 시미코였고 우이는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걸려던 찰나,
우이는 나와 소프, 그리고 우리의 이상 기류를 눈치챈 시미코의 시선에 깜짝 놀란 듯 어색하게 홍차를 들이켰다.
“죄송해요. 잠시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내가 뭐 잘못했어……?”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 머뭇거리다 우이가 입을 열었다.
“…아인 씨, 소프 씨, 오르 씨, 다들 얼굴에 특징적인 기구를 달고 계시네요?”
귀에 달린 기구를 소프가 누르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건…그…우리가 결함품이라서…….”
“아, 아뇨, 그렇게까지 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
우이가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저희에겐 예부터 스스로를 경계하는 이런 말이 있어요.
‘악한 것을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행하지도 마라’.
신화나 전승에 등장하는 금기와 비슷하달까요.
백귀야행에서는 말장난으로 ‘세 마리 원숭이’나 ‘네 마리 원숭이’라고 부르죠.”
“세 마리 원숭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 있어.”
“네. 이렇게요.”
시미코가 눈을 가리기에 나는 입을 가려 보였다.
“손으로 눈, 귀, 입을 가리고 있는 조각상이지?”
그런 우리를 봐서일까, 소프는 다시 한번 자신의 귀 근처에 손을 얹었다.
“네, 맞아요.
여러분은 그 금기를 연상시키는 기구를 착용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모두 한결같이 그것을 아끼고 있죠.”
“금기? 아낀다?”
평화로운 오후, 고서관 특유의 한적하고 느긋한 공기가 감도는 가운데 우이가 지닌 지식과 식견의 언어들이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그저 가만히 우이의 입술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물론 내 곁에 앉은 자그마한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프의 표정에서 불안한 그림자는 깨끗이 걷혀 있었고, 흥미진진하다는 눈빛으로 우이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인 씨는 입을 구속 마스크 같은 것으로 덮고 있지만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오르 씨는 두터운 밴드로 눈을 가리고 있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는 것을 좋아하죠.
말쿠트 씨가 밀레니엄에 적을 두었던 것을 생각하면, 손을 감추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걸 좋아하지 않나 싶고요.”
우이는 우리의 시선이 어딘지 모르게 멋쩍은 듯 몸을 살짝 뒤척이면서도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소프 씨, 당신은 새로운 지식을 귀담아듣고 마음속에 받아들이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좋아하느냐고…물어보면…….”
소프는 쑥스러운 듯 목덜미에 슬그머니 손을 얹었다.
“…네차흐 위에서도, 보거나, 듣거나 하기는, 했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렇네. 정말로.”
나는 턱에 손을 괴고 강철 대륙에서의 나날을 되짚어 보았다.
“우리 문화라고 해야 할까…….
최신 인터넷 유행어나 밈 같은 것도 잘 알고 있잖아.
통신으로 대화 나눌 때는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그, 그 얘기는 이제 됐잖아! 얼른 잊어버려!”
“소프 씨는 암기력이 뛰어난 건 물론이고,
평소에 ‘인간들은 이렇게 말하지?’ 하면서 배운 단어나 지식을 실생활에서 열심히 활용하는 모습도 자주 보았는걸요.
실은 속으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답니다.”
“그런 건 딱히…….”
나와 시미코가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자 소프는 쑥스러움에 몸을 잔뜩 움츠렸지만,
입꼬리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뺨은 기쁜 듯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까지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전해 들은 정보만 머릿속에 가득 채워두고 정작 손끝에는 경험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귀동냥만 늘었다.’라고 깎아내리곤 하지만,
당신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훌륭합니다.”
우이는 소프의 안색을 살피며 자세를 똑바로 고쳤다.
“…즉, 당신들은 모두 금기의 표식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행동은 반대로 행하고 있어요.
아름다운 것을 보고, 듣고, 말하며, 행동하죠. 그 점이 무척이나 흥미롭달까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우이가 웬일인지 혼자 부끄러워하며 몸을 꼼지락거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괜찮으시다면…….”
우이는 테이블 위에 A5 용지 크기만 한 가죽 장정 노트 한 권을 슬며시 꺼내놓았다.
“도서위원장으로서, 당신이 지닌 탐구적인 자세에 경의를 표하는 의미로 준비했습니다.
부디 이 선물을 받아주셨으면 해요.”
소프는 내밀어진 노트를 두 손으로 천천히 받아 들었다.
그 눈동자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듯했다.
“책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나온 자투리 가죽과 종이로 직접 만든 서적이에요.
백지 상태의 책이랍니다.
소중하게 사용해 주신다면 기쁘겠지만, 어떻게 쓰실지는 당신의 자유예요.
‘듣지 말라’는 당신의 금기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내…마음대로…….”
“저, 저기! 실은 저도 드릴 선물이 있어요!”
소프가 우이의 수제 노트 표지를 막 들추어보려던 찰나, 시미코가 그 앞에 오래된 책 한 권을 슥 들이밀었다.
“짜잔, 키보토스의 백과사전이랍니다!
개정판이 새로 나오면서 도서관 대출 목록에서 제외된 책인데, 괜찮으시다면 소프 씨가 유용하게 써 주셨으면 해서요!”
“백과사전…….”
소프는 시선을 들어 우이와 시미코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렇게 좋은 걸…정말 내가 받아도 되는 거야……?”
“그럼요.”
“물론이죠!”
소프가 슬며시 내 쪽을 쳐다보았다.
우이와 시미코는 그저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소프의 작은 손에는 가죽 노트와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백과사전이 꼭 쥐여 있었다.
나는 내 옷을 주섬주섬 뒤적이며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둘은 이렇게 멋진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나는 빈손이야…….”
“그런 의미로 쳐다본 거 아니라고!”
석양을 향해 지프를 몰고 돌아가는 길.
선글라스 아래로 눈을 가늘게 뜨며 나는 콧노래를 섞어 운전하고 있었다.
“선생님.”
“응?”
덜컹거리지 않게 더블 클러치를 밟으며 기어를 바꿨다.
선글라스 틈새로 곁눈질하며 조수석을 보니, 딱딱한 서스펜션이 엉덩이를 때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프는 백과사전을 읽고 있었다.
“아비도스 사막… 가본 적…있어?”
머릿속으로 백과사전을 떠올렸다. ‘A’로 시작….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있지~. 나한테는 추억이 많은 곳이야~.”
“그럼, 아비도스 모래 축제는 가본 적 있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다 찢어진 포스터.
“…아니, 없어. 이제 그 오아시스도 축제도 사라진 모양이라서…….”
“…그렇구나.”
“하지만 말이야, 소프.”
빨간불에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아 차를 세웠다.
“너희가 새롭게 시작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새롭게, 시작한다…….”
소프의 옆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번졌다. “우리끼리… 후후…….”
신호가 바뀔 때까지 그녀는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갔다.
그게 무엇인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 아주 멋진 일일 것이다.
<4>
오르의 세 번째 눈이 귀찮다는 듯 찌푸려지면서도 나를 똑바로 포착하고 있었다.
“선생님.”
“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쪽 좀 보세요.”
“아니…본다고 뭐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오르의 작은 손이 재킷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보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니까요. 빨리 좀 도와주세요.”
“도와줄 필요가 있을까?”
“후후, 귀엽네.”
나구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킷이 더 세게 당겨졌다.
“…나구사 언니라고 불러도 돼.”
“안 불러요! 좀 떨어지세요!”
백허그를 하듯 나구사에게 붙잡힌 오르가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려 바둥거렸다.
“제 언니는 말쿠트 언니뿐이라고요!”
“그래? 아쉽네. 머리카락도 하얗고 피부도 뽀얗고, 미소녀인 나와 판박이라고 생각했는데…….”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나구사의 품에서 탈출한 오르는 내 옆으로 후다닥 달려와 소곤거렸다.
“…선생님,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하네요.”
“아아, 뭐, 원래 저런 아이니까……. 실제로 예쁘기도 하고.”
내 말에 세 번째 눈을 가늘게 뜨고 우웨엑 혀를 내미는 오르와 우리의 속닥거림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구사의 대비가 묘하게 흥미로웠다.
오늘은 다음 축제를 앞두고 북적이는 백귀야행 거리를 시찰해달라는 니야의 의뢰—
아마도 망량즈를 견제하려는 목적—를 받고, 모처럼이라 오르와 함께 왔다.
와봤자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라서 백화요란의 순찰에 동행하기로 했는데…….
“저기, 앞머리 한번 내려보지 않을래?”
“안 내려요!”
나구사가 오르에게 비정상적일 정도로 꽂혀버린 탓에 순찰 속도가 도무지 나질 않았다.
지금은 학교 근처를 옹기종기 모여 산책하는 꼴이 되었다.
뭐, 생각보다 평화롭기도 하고, 아까 망량즈 아이들이 다 같이 간식을 사 먹는 걸 봤으니 괜찮겠다 싶었다.
그런 기분인 건 나뿐만이 아닌 듯 왼손은 나구사를 경계하는 오르에게, 오른손은 오르와 친해지려는 나구사에게 붙잡힌 채 거리를 걷는다.
친구들과 수다 떨며 걷는 학생들,
상점가 사람들의 인사 소리,
나구사가 가져온 닭꼬치를 우물거리는 오르의 옆모습에 미소 지으며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딱히 보려고 본 건 아니지만 포목점 처마 위로 커다란 벚나무가 보였다.
거리는 떨어져 있어도 마을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 거목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며 우뚝 서 있었다.
“…아름다운 벚나무인데 아깝네요.”
내 시선을 쫓아 오르가 중얼거렸다.
“뿌리 근처까지 사람들의 삶이 침범해 있어서 풍경이 어수선해요.”
“저 신목은 우리 생활의 일부니까, 나는 좋아해, 사람과 벚꽃이 어우러진 풍경.”
“자연은 자연 그대로일 때가 더 아름답지 않나요?”
“후후, 그것도 맞는 말이야. 하지만 우린 벚꽃과 공생하는 길을 택했지.”
나구사가 걸음을 멈추고 벚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신목…벚꽃은 병해충에 약해서 말이야.
백귀야행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벚꽃을 돌보는 가문이나 벚꽃을 연구하는 가문이 있어.
귀여운 후배 중에도 벚꽃을 모시는 가문 아이가 있고.”
“…그걸 공생이라고 하나요? 벚꽃은 사람들에게서 뭘 받는데요?”
조금 심술궂은 말투였지만 오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으음…우리를 받아들여 주고 있다고 할까?”
“받아들인다…….”
오르는 세 번째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는 나구사와 벚꽃을 번갈아 보았다.
“…벚꽃에게 거부권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자연은 강해.
만약 우리가 방해라면…진작에 무슨 일이 일어났겠지? 대설원처럼.”
“만약, 만약에요.
이 벚나무가 ‘무슨 일’을 저질러서 당신들을 여기서 쫓아낸다면? 베어버릴 건가요?”
“아니. 베지 않아. 그저 지금까지 받아들여 준 것에 감사하며 이곳을 떠날 뿐이야.”
나구사는 멍하니 있는 오르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쓰다듬었다.
“반대로 말하자면…너희도 계속 여기 있어도 돼.
헤일로가 있든 없든, 키보토스에 대단한 일을 저질렀든 아니든 그런 건 상관없어.
신목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듯 우리도 너희를 환영해.
언젠가 너도 이 백귀야행의 풍경을 좋아하게 됐으면 좋겠어.”
그 말만 남기고 그녀는 과일 사탕 깃발을 보더니 “아!” 하고 웃으며 달려가 버렸다.
“…희한한 사람이네요.”
“후후, 그래도 멋진 아이잖아?”
“평가는 일단 보류할게요. 그리고 희한한 사람에는 선생님도 포함되니까요.”
“에이, 너무해!”
“소프가 이럴 때 뭐라고 하던데…유유상종이라고 하던가요?
이상한 선생님 곁에는 이상한 학생이 모이는 법이에요.”
큭큭거리며 즐거운 듯, 심술궂게 웃는 오르에게 짐짓 삐친 척을 하고 있자니, 평소보다 두 단계는 더 들뜬 미소를 띤 나구사가 돌아왔다.
손에는 크고 작은 과일 사탕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나구사는 그 사탕 뭉치를 오르에게 쑥 내밀었다.
“맛있어. 괜찮으면 먹어봐.”
너무 많아 당황하면서도 딸기 사탕을 집어 든 오르를 싱글벙글 바라보았다.
“…나구사 선배라고 불러도 돼.”
“안 부른다니까요!”
딸기처럼 볼을 붉히며 오르가 나를 돌아보았다.
“선생님! 역시 이 사람 이상해요!”
“아, 아하하~… 그게, 괜찮으면 좀 맞춰주렴……”.
<5>
오르가 넋을 잃고 유리 벽 너머로 펼쳐진 D.U. 거리를 만화경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조리개를 바삐 움직이며 만화경 속 거리를 눈에 담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 그녀를 보며 아인과 소프가 안달복달하고 있었다.
“저, 저, 저도, 저도 보여주세요!”
“…너무 혼자 독차지하면 선생님한테 이를 거야.”
“독차지라니요, 이건 제가 ‘보수’로 받은 물건인데요.”
그렇다. 저 만화경은 보수다.
나구사와 함께 순찰한 보수이자, 나구사를 ‘나구사 선배’라고 부른 보수.
비즈나 유리 조각이 든 ‘안’을 즐기는 게 아니라, 안의 거울에 풍경을 비춰 ‘밖’을 즐기는 방식의 만화경이다.
반나절을 함께 돌아다닌 덕분인지 나구사의 안목도 꽤 탁월했다.
만화경 하나를 두고 투닥거리는 작은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나로서는 그 즐거움을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조금 더 지켜보다가 양보하지 않을 기세면, 소프의 말이 아니더라도 오르를 조금 타일러 봐야겠다.
그렇게 마음먹고 커피를 더 따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야 끝, 담화 공간의 소파에서 세 사람이 몸을 맞댄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응? 방금까지 저기서…뭐, 됐나.
나는 담요를 한 장 집어 들고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어라? 어라라?”
시야가 어두워졌다.
잔해 더미.
몸을 맞대고 있는 아인, 소프, 오르.
그녀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강했더라면, 내게 힘이 있었더라면 이런 미래가 있었을지 모른다.
“…!”
벌떡 일어났다. 담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거친 숨소리.
마치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폐가 부풀고 수축하는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선명하다.
심장 박동이 갈비뼈 안쪽을 격렬하게 두드린다.
“무슨 일인가요, 선생님?”
목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올리니 책상에서 일어나 케이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이 위치 관계.
나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던 건가.
투명하리만치 하얀 피부가 눈앞까지 다가왔고, 붉은 눈동자가 날카롭지만 부드럽게 나를 꿰뚫었다.
“악몽이라도 꾸었습니까?”
케이가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겁에 질린 얼굴로 깨어날 거라면 낮잠을 자는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꿈을, 꾼 것 같아.”
“한계를 넘긴 피로를 방치하니까 그런 꿈을 꾸는 겁니다. 앞으로는 건강 관리에도 신경을 좀 쓰세요.”
“악몽은 아니었던 것 같아. 분명 더 따뜻하고…….”
“그럼 그런 표정을 짓지 마세요.”
“미안해, 케이.”
눈앞이 어지럽다. 속이 울렁거린다. 현실감이 없다.
그런 와중에 나는 그저 케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오직 그녀만이 변치 않고 그곳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안, 해.”
“…네?”
“…….”
“뭐가 말입니까?”
“강철, 대륙에서…….”
입 밖으로 새어 나온 혼잣말에 케이의 표정이 험악해진다.
“지켜, 지켜주지 못해서, 겨우 친구가 될 수 있었는데…….”
“선생님.”
“너희에게 슬픈 기억을…….”
“선생님.”
“미안…….”
“도대체 당신이 뭔데 그러시는 건가요, 선생님.”
옷깃이 붙잡혔다.
“그날, 그곳에서 모두가 ‘무언가’를 얻고, ‘무언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살아가기로 결의하며 돌아온 거예요.”
케이의 얼굴에 붉은 기가 감돈다.
“그날의 경험은 우리 자신의 것입니다.
당신이라 해도 그것들을 빼앗을 수는 없어요.
그날, 그곳에서 맛보았던 분노, 슬픔, 후회, 무력감, 그럼에도 앞을 향하기 위한 용기, 행동, 전부, 전부 제 것입니다……!
당신 때문이었던 것도 아니고, 당신이 우리 대신 짊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사과라니, 절대 용서 못 해요!”
케이의 목소리가, 거친 숨소리가 아직 꿈결을 헤매던 내 뇌리에 깊게 울려 퍼진다.
그 순간 시야가 선명해졌다.
온몸에 피가 돌고, 손발의 감각도, 스스로 생각하고 있다는 감각도 서서히 돌아온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미안해.”
“아직도 그 소리인가요?”
“아, 아니야. 한심한 소리 해서 미안하다는 뜻이야. 그리고 고마워, 덕분에 완전히 정신이 들었어.”
케이는 손을 떼더니, 툭툭 가볍게 내 옷매무새를 정리해 주었다.
“…근래 상당히 피곤해 보이신다고 생각은 했습니다만, 역시 아직…….”
몸을 일으키려 하자 케이가 부축해 준다.
“너무 자신을 탓하지 마세요.”
“면목 없네……. 케이 선생님.”
“‘짱’도 모자라서 또 이상한 호칭 붙이지 마세요.”
내가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자, 그녀의 표정도 이내 부드러워졌다.
“자, 잡담은 여기까지입니다.
모처럼 권해드린 낮잠도 제대로 못 자는 선생님께는 일을 잔뜩 시킬 테니까요. 우선 세수부터 하고 오세요.”
“알겠습니다!”
무릎을 탁 치며 힘차게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고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은 케이는 슬리퍼를 끌며 집무실의 커피 머신으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나서 뭐부터 손을 댈까 생각하며 샤워실로 향하던 길, 문득 내 책상 위로 눈길이 멈췄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노을빛에 젖은 책상 위에 작은 위화감이 느껴졌다.
“응?”
발걸음을 멈추고 방향을 틀어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건……?”
커피 머신 앞에 있던 케이가 이쪽을 돌아본다.
“왜 그러시죠?”
“이거, 케이가 둔 거야?”
“네?”
나는 ‘그것들’을 손에 들었다.
작은 로봇 피규어와 하트 모양으로 접힌 종이, 그리고 마른 나무가 서 있는 스노볼 같은 장식품.
에스프레소가 다 내려졌음을 알리는 소리도 뒤로한 채, 케이가 곁으로 다가왔다.
“아니요, 제가 둔 게 아닙니다. 애초에 이런 건 방금 까지만 해도…….”
케이가 피규어와 스노볼을 손에 들었다.
“…설마 게부라? 어디서 이런 걸……. 그리고 이건…….”
스노볼을 찰랑찰랑 흔들자, 바닥에 쌓여 있던 분홍색 가루가 휘날리며 마른 나무가 만개한 벚꽃으로 변했다.
“백귀야행의 기념품인가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케이를 곁눈질하며 하트 모양 종이를 펼쳐 보았다.
내가 어릴 때에는 이런 모양으로 접은 편지를 돌리는 게 유행이었기에 펼치는 건 익숙했다.
찢어지거나 구김이 가지 않게 조심스레 펼치니, 생각보다 커다란 A5 크기 정도의 직사각형 종이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어딘가 서툰 글씨로 몇 마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선생님의 숙제…어, 나? 축제란, 아비도스 모래 축제, 바비큐, 신목제, 등불 축제, 노점, 제례, 트리니티 학원제…….”
뒷면을 보았다. 백지였다.
“뭘까……. 아이디어 노트?
일단 축제에 관해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 내려간 것 같은데……. 내 숙제라니…무슨 소릴까……?”
“이름까지 지목되어 있는데 정말 기억에 없으신 건가요?”
“없는 것…같아.”
다시 종이를 하트 모양으로 접고, 케이의 손에서 피규어를 건네받았다.
“이거 게부라잖아?
아무리 그래도 시중에 이런 물건이 있을 리 없지.
누군가 만들어 준 거라면 당연히 기억하고 있을 텐데…….
벚꽃 기념품은 백귀야행 거려나?
이것도 노점에서 본 적은 있을지 몰라도 사거나 받은 적은 없고…….”
케이와 시선이 마주쳤다.
노을빛 속에서 그녀의 하얀 피부가 살짝 붉게 물들어 있다.
아무런 아이디어도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 듯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우리 둘은 동시에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수수께끼의 물건들을 다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그것들은 분명 이질적이어야 마땅한데도, 이상하리만큼 그 자리에 잘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어쩐지.”
“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치, 왠지 말이야.”
나와 케이는 살며시 몸을 맞대었다.
“네, 어쩐지.”
케이가 쿡쿡 웃었다.
“이것들을 두고 간 분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네요.”
<6>
“와아! 대단해요! 만화경!”
“인간은 참 재미있는 걸 생각해 내네요. 뭐, 이 정도라면 즐겨줄 만하군요.”
“만화경. 벚꽃 장식. 딸기 사탕. 닭꼬치…….”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세 명의 작은 아이들이 사막을 걷는다.
그 앞에 오아시스는 없고, 마을도 없으며, 바다도 강도 없다.
어딘가를 목표로 한 걸음도 아니다.
하지만 그 끝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 보였다.
그림자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세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며 달려온다.
도중에 몇 번인가 “히잉!” 하고 아인과 꼭 닮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 활기차게 달려온다.
“모두, 다녀왔니~!”
소녀는 숨을 헐떡이며 세 아이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었다.
“어땠어? 즐거웠니?”
“즐거웠냐고 물으신다면…….”
소프는 쑥스러운 듯 시선을 피했고,
“즐거웠어요!”
아인은 씩씩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뭐, 나쁘지는 않았어요.
그날 들었던 ‘그 말’이 진심이었다는 건 아주 잘 알았습니다.
말쿠트 언니 말고는 이상한 학생들뿐이었지만요.”
오르가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참 이상한 학생이네요.
우리를 위해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선생님한테 직접 부탁받은 건가요?”
쿠치나시 유메는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으음……. 사실 내가 여기에 온 건 선생님이 키보토스에 오시기 전이라서 말이야. 만난 적은 없어.”
아인의 손을 잡으며 유메가 언덕 너머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괜찮다면, 너희가 어떤 시간을 보내고 왔는지 들려주지 않을래?”
“저는 밀레니엄에서 유즈랑 로봇을…….”
“트리니티에서 도서부장님이…….”
“들어보세요. 백귀야행에서 말도 안 되는 녀석한테 찍혀서…….”
모두가 동시에 말을 시작했다가, 동시에 말을 멈췄다.
네 사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시간은 넉넉하니까 한 명씩 차례대로 들려줄래?”
“그럼, 아까부터 계속 메모하고 있는 소프부터 할까요?”
“으…이건 딱히 그런 걸 메모하는 게 아니라서…….”
“그럼 메모하고 있는 내용을 알려주렴!”
“그렇게 말해도……. 그게, 다 같이 축제…아비도스 모래 축제 같은 걸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어! 아비도스 모래 축제?!”
“깜짝이야……. 혹시 알고 있어?”
“당연하지, 사실 나도 아비도스 모래 축제를…….”
처음의 화제도 잊은 채, 네 사람은 ‘미래’의 축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메가 아비도스에 대해 이야기하고,
소프가 백과사전의 지식으로 전망을 말하고,
아인은 친구들과 함께 돌 수 있는 노점을,
오르는 불꽃놀이가 잘 보이는 풍경을 이야기하며 모래길을 나아간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
해가 지지 않는데도 덥지 않고, 그렇다고 바람도 불지 않는 모래 벌판.
네 개의 발자국이 서로 겹쳤다 떨어졌다를 반복하며 언덕과 하늘의 경계선까지 이어져 있다.
누구에게 짓밟히지도, 무엇에 지워지지도 않는다.
그저 평온한 정적과 함께 그곳에 영원히 머물러 있을 뿐.
Fin.
댓글 7


이런시발...새벽에 왜 이런 글을보게된걸까 눈물난다
if물인가 하고 흐믓하게보고있었는데ㅜㅜ
울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