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액션 #미네 #아케미 #히후미
원본 by zizi
원제 Amicitia sal vitae.
(우정은 인생의 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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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9>
<1>
트리니티 종합학원 인근의 대로변.
아이들 앞에서 장난감 상자를 뒤엎은 듯한 대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키보토스에서 장난감이란 곧 총을 의미하며, 그것도 제대로 된 탄환이 발사되는 파괴력을 갖춘 물건이라는 점이다.
거리와 사람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탄흔이 가득한 아름다운-불과 몇 분 전까지는-화단을 등진 채, 구호기사단 단원이 정의실현부로부터 온 통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네! 네! 알겠습니다!” 근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대원이 진압방패가 특징적인 실루엣을 향해 소리쳤다.
“미네 단장님! 거리 반대편의 소동은 스케반들을 노리고 쳐들어온 폭주족들인 모양입니다!
지금 정의실현부가 대처 중이지만, 이쪽으로 지원을 보낼 여력은 없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눈을 감고 후우, 숨을 내뱉는다.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방법이었습니다만, 어쩔 수 없군요.”
자리에서 일어나며 장갑이 삐걱 소리를 낼 정도로 방패와 총을 강하게 움켜쥔다.
“제가 앞으로 나가 스케반의 리더와 담판을 짓겠습니다. 여러분은 뒤를 따라오도록 하세요.”
“하지만 단장님!”
무전병이 말릴 틈도 없이, 미네는 아름다운 맹금류의 날개를 번뜩이며 총격전의 한복판으로 날아 들어갔다.
총탄이 교차하는 완충지대에 돌연 나타난 거물의 모습에 스케반들은 당황한다.
“저 미네를 쓰러뜨리면 이름값이 치솟겠지!”라며 앞장섰던 호리호리한 마스크는 총탄에 쓰러졌고,
“정면에서 들이받다니 배짱 한번 좋네!”라며 가로막았던 거구의 개틀링 사수는 진압방패에 튕겨 나갔으며,
“탄환만 떨어지면 저 단장이라 해도……!”라며 엄폐물에서 튀어나온 포니테일 소녀는 투척된 샷건 총신에 이어 공수 격투로 너덜너덜해졌다.
단장이 지나간 자리에는 시체가 쌓인다.
미네가 부수고 기사단이 고친다.
그 말을 체현하듯 무법의 돌진에 스케반들의 전선에 균열이 생긴 순간, 미네는 다리에 힘을 모았다.
그리고 장애물을 걷어차듯 단숨에 도약하여 스케반 진영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늑대가.”
스케반들이 주춤거리는 가운데, 그 중심에서 장대한 중기관총을 가볍게 어깨에 메고 있던 거구가 유연하게 일어섰다.
“찾아오셨나 보네요.”
“당신이 리더입니까?”
미네는 방패를 다시 고쳐 잡았다.
“여기는 트리니티 종합학원 교구 내입니다. 불량배들끼리의 항쟁이라면 다른 곳에서 하십시오.”
“…소녀, 쿠리하마 가문의 아케미라고 하옵니다.”
“예……?” 미네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진압 방패를 지면에 꽂은 뒤 자세를 바로잡았다.
“결례를 범했군요. 저는 구호기사단 단장, 아오모리 미네입니다. 자랑할 만한 가문 이름은 아닙니다만.”
“우후후. 조금은 즐길 수 있겠군요.” 잔디에 충분한 쿠션감이 있는지 확인하더니 중기관총을 지면에 던져 버린다.
“카를레스 군!”
아케미의 기합이 담긴 외침에 미네는 영문을 모르면서도 몸을 사렸지만…….
아케미의 목소리에 응답하듯 그녀의 특공복 안에서 스르륵 나타난 것은 하늘다람쥐.
커다란 검은 눈을 깜빡거리며 부드러워 보이는 다리를 움직여 아케미의 어깨에 달라붙더니, 코를 킁킁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미네는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빨려 들어가 버렸다, 그 눈동자에.
“조금 위험하니까 저쪽 나무에 가 있으렴.”
“귀여워…….”
“예?”
“앗……!”
수치심으로 붉어진 얼굴을 싸움터에서 숙일 수도 없는 미네와, 놀란 표정을 온화한 미소로 바꾼 아케미 사이에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돈다.
주위의 스케반들이나 미네를 쫓아온 대원들은 그녀들의 분위기에 눌려 총을 내리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단단하게 압축된 근육과 골량을 가진 다리가 즈윽 들려 올라오더니 미네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뎌졌다.
“아오모리 미네 씨.”
“…네.”
시선을 예리하게 가다듬는 미네.
여유로운 웃음으로 눈꼬리를 내리는 아케미.
그리고 가만히 무언가를 응시하다가 이따금 눈을 깜빡이는 카를레스 군.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2>
“옳지, 옳지.”
마스크를 내리고 심호흡을 했다.
“음, 작은 파츠도 단단히 붙었네. 백화 현상도 없고 쓰기 편한 순접이야.”
나는 핸드볼보다 조금 작은 정도 크기의 페로로를 손안에서 굴리며, 방금 접착한 파츠가 떨어지지는 않는지 우선 확인했다.
옆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히후미도 후우, 숨을 내쉬며 눈을 반짝였다.
“대단해요, 선생님!” 기뻐하는 그녀에게 페로로를 건네주었다.
“와아…크고 중량감도 있어서…지금 이대로도 무척 귀여워요…. 정말 채색까지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당연하지! 나도 오랜만에 키트를 만져서 즐거우니까, 이왕 하는 거 끝까지 돕게 해줘.”
그녀에게서 건네받은 페로로를 구르지 않도록 쿠션 위에 올려두었다.
색 분할을 위해 아직 붙이지 않은 세밀한 파츠들을 담은 트레이도 조심스레 떨어지지 않을 만한 곳으로 옮겼다.
“그보다 말이야, 이대로면 달걀귀신 상태라고?”
“페로로 님은 페로로 님이시니까, 달걀귀신이라도 귀여우세요.”
“…그래?”
그렇다.
지금 히후미에게 제작 의뢰를 받아 페로로, 엄밀히는 극장판에서 잠깐 등장했을 뿐인 ‘스페이스 페로로질라’라는 가라지 키트를 만들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입체화되지 않은 모양이라, 당일 판권을 얻어 개인이 매매하는 즉매회에서 구해왔다고 한다.
정말 페로로 일만 엮이면 히후미는 결단력이 좋다니까….
엄청나게 크고 조형도 확실한 게, 이거 분명히 비쌌을 거다.
상쾌한 햇살이 비쳐 드는 집무실에서 새하얗고 얼굴도 없는 페로로 피규어를 둘러싸고 히후미와 즐거운 의논을 나눈다.
색은 견본대로 하면 될지,
마음만 먹으면 새로운 디테일도 추가할 수 있는데 어떻게 할지,
눈이나 무늬 같은 건 부속 데칼을 쓸지 아니면 내 붓질의 기세에 맡길지,
웨더링은 넣을지 말지,
마무리는 무광으로 할지 아니면 아주 번쩍번쩍하게 광을 낼지.
제안할 때마다 기쁜 듯 눈을 감고 완성품을 상상하는 히후미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나도 왠지 즐거워졌다.
그러던 중, 집무실 입구 쪽에서 노크 소리가 세 번 들렸다.
말을 멈춘 히후미와 시선을 교환한 뒤, 나는 들어오라고 대답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실례하겠사와요.”
먼저 들린 것은 미네의 목소리. 하지만 또 다른 한 명은…?
책상에서 입구 쪽을 올려다보는 우리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평복 차림의 미네와,
캐주얼한 모닝 드레스 같은 우아한 복장에 챙이 넓은 모자…….
그 아래로 무시무시한 어깨너비와 근육을 뽐내는 미네보다도 머리 하나둘은 더 큰 소녀였다.
선글라스를 끼고는 있지만 이 분위기와 박력, 기억이 난다.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아리우스 스쿼드 아이들과 함께 달려 나갔던 어느 여름날…….
특공복 차림의 소녀와 계단을 내려와 책상 옆에 서는 고상한 소녀의 모습이 완벽하게 겹친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더니 눈을 약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어요, 선생님.” 자연스러운 인사임에도 어딘가 기세에 눌린다.
“소녀는 쿠리하마 가문의 아케미라고 하옵니다. 편하게 아케미라고 불러주시면 기쁘겠어요.”
“반가워, 아케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악수를 나눴다.
“나는 샬레의 선생님! 그리고 이쪽은….”
“트, 트리니티 종합학원 2학년, 보충수업부의 아지타니 히후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처음 뵙겠어요, 히후미 씨.” 아케미는 히후미와도 악수를 나누었다.
“교정국을 탈옥한 몸으로 귀한 분 앞에 선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시길.”
“교정국을!?”
“그런 모양이네. 음…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붙잡거나 발키리 경찰학교에 신고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송구해하지 마.”
내 말에 어딘가 안도한 듯 얼굴을 마주 보는 미네와 아케미.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니, 내가 여기 오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들은 꽤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그런 관찰을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미네는 이쪽으로 한 걸음 내딛더니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실은 오늘, 선생님과 히후미 씨께 부탁이 있어 샬레에 찾아왔습니다.”
“나와.”
“저, 말인가요?”
슬쩍 히후미의 얼굴을 살폈지만, 전혀 짐작 가는 바가 없다는 듯 멍한 표정이다.
“네. 두 분께밖에 부탁드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 진지한 얼굴, 날카롭고 명확한 어조에 나와 히후미는 자세를 바로잡고 그녀들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뭐든 말해봐.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아니, 할 수 없는 일이라도 다 함께 힘을 합치면 분명히 이뤄낼 수 있을 거야.”
“네. 저도 전력을 다해 노력할게요.”
<3>
“이야~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어 긴장했는데.”
넥타이를 살짝 늦추고 단추를 하나 풀며 후우, 숨을 내쉰다.
“전장에서 만나 귀여운 것으로 의기투합이라니. 그대로 외출 약속까지 잡고 말이야, 좋네……. 청춘이야…….”
“처, 청춘인 걸까요…….”
그 말에 움츠러들려던 미네의 등을 커다란 손바닥이 철썩, 하고 질타.
내가 맞았다면 저 멀리 날아갔을 텐데…….
“정말이지. 틈만 나면 금방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나요?”
“맞아요! 귀여운 건 귀여운 거예요! 그걸로 된 거라고요! 게다가.”
나는 히후미의 말에 이끌리듯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상당히 눈에 띄는 그룹인 우리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지나쳐 가는 사람들.
휴일의 들뜬 분위기로 북적이는 백화점 내 행사장에는 페로로와 웨이브 캣의 모습이 그려진 커다란 간판이 걸려 있었다.
“웨이브 캣의 신상품 이벤트에 안내해달라고 하시다니, 정말 멋져요!
미네 씨도 아케미 씨도 모모프렌즈를 정말 좋아하시는군요!”
“아니, 좋아하느냐고 물으신다면, 그게…….”라며 얼굴을 붉히고 눈을 내리깔려던 미네였으나, 아케미가 팔꿈치로 쿡 찌르자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 아니요, 네, 그렇죠. 정말 좋아, 합니다. 귀엽다고 생각해서 줄곧 신경 쓰였거든요.”
“저는 그저 따라올 생각이었는데, 네, 귀엽긴 하더군요, 모모프렌즈.”
간판 아래쪽에서 나눠주는 정리권을 받으려 꼼지락거리며 움직이는 줄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스마트폰으로 웨이브 캣 굿즈 사진을 미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히후미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는 아케미 쪽을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모모프렌즈 가이드를 히후미에게 부탁하고 싶은 마음은 잘 알겠는데, 왜 나까지?”
“다름 아닌 소녀의 존재 때문이어요.”
“…탈옥수라서?”
“네. 저 스스로는 그 직함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미네 씨에겐 구호기사단 단장으로서의 입장이 있으니까요.
불량 학생, 그것도 교정국을 탈옥한 자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체면이 말이 아니지 않겠어요?”
아케미는 선글라스 위치를 고치며, 히후미의 기세에 눌린 미네를 힐끗 쳐다보았다.
“선생님이 계셔 주신다면 만에 하나 오해를 받더라도 화근이 남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허락 없이 당신의 입장을 이용한 무례함, 대체 어떻게 사죄드려야 할지. 책임이라면…….”
“에이, 괜찮아 괜찮아! 나는 학생들에게 이용당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니까.”
“우후후, 소문대로의 분이시군요.”
“헤헤. 좋은 소문이길 빌어야겠네.”
스케반이라는 점 외에는 그녀가 교정국에 처박힐 요소를 찾기 힘들 만큼 온화하고 배려 깊은 대화를 즐기고 있자니,
휴일의 소란을 뚫고 둔탁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역시 키보토스라고 해야 할까, 사람들은 잠시 반응했을 뿐 다시 각자의 행동으로 돌아갔다.
행사장 내에서 다 처리하지 못해 계단까지 늘어선 줄 중간쯤에 있는 덕분에 아래층 행사장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였지만,
총성이 들리고 한참이 지나도 특별한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밖에서 들린 총성이었나? 아니, 그러기엔 꽤 가까웠던 것 같은데…….
즐거운 듯 신상품을 고르는 미네와 히후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아케미에게 살짝 귓속말을 건넸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런 것…같습니다만…….”
아케미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무섭게,
스태프 통로로 이어지는 문이 세차게 열리더니 둥근 머리의 수트 차림 날씬한 로봇과 포메라니안 얼굴을 한 수인이 허둥지둥 뛰어나왔다.
“헤, 헬멧단 아이들에게!” 포메 씨가 숨을 몰아쉬며 외치자 주위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트럭을 하이재킹당했습니다!”
미간을 찌푸린 아케미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날씬한 로봇이 팔을 크게 휘두르며 행사장으로 달려왔다.
“모모프렌즈 신상품 발표 이벤트는 중단입니다! 중단이에요!”
그 말에 아래층 인파로부터 파도 같은 웅성거림이 밀려왔다.
“백야드에 있던 굿즈 재고를 전부 도둑맞았습니다!”
순식간에 청중 사이에서 “뭐라고!?” 하는 비난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로봇 씨에게 달려들어 따지는 사람들까지 나타났다.
아니, 그분에게 따져봤자 소용없을 텐데…….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모모톡을 실행하고, 샬레에서 발키리 경찰학교로 직통 연결되는 계정으로 신고를 마친 뒤,
눈빛이 날카로워진 미네, 여유를 잃지 않은 아케미, 그리고 입을 삐죽이며 미간을 찌푸린 히후미를 혼란의 소용돌이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저분들도 신고는 하겠지만, 일단 발키리에 신고는 넣어뒀어.
조금 아쉽지만 웨이브 캣 굿즈는 나중에 다시…….”
“분명히 되팔이들이에요!” 내 말을 가로막듯 히후미가 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다른 굿즈 때도 똑같은 일이 있었거든요!”
“되팔이?” “……되팔이?”
미네와 아케미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히후미는 스마트폰을 능숙하게 조작해 경매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핑키 파카 인형이 신품으로 보이는 비닐에 싸인 채, 도저히 정가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가격으로 출품되어 있었다.
“하하~” 나는 히후미의 스마트폰을 스크롤해 보았다. 비슷한 상품들만 즐비했다.
“…이번처럼 훔쳐서 시장에 물건이 풀리지 않게 만든 다음, 경매로 비싸게 판다는 거군.”
“그렇군요…저도 뉴스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그때는 집단으로 매점매석해서 시장 가격을 끌어올리는 수법이었는데.”
“…스케반 두목으로 말씀드리자면, 그렇게 돈을 벌다가 불량 학생이 ‘밑천 없는’ 돈벌이로 전락하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어요.”
무언가 생각났는지 쓴 벌레를 씹은 듯한 표정이 된다. “그게 저 헬멧단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거기서 대화가 끊기고, 우리 사이에 가시 돋친 침묵이 흘렀다.
트리니티 자치구 내의 고상한 백화점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확대된 혼돈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 하나.
“히후미처럼 정말로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아이들이라니.”
스마트폰 위에서 춤추는 핑키 파카의 수만 엔짜리 가격표를 멍하니 바라본다. “…어른으로서 적절한 표현은 아니지만, 짜증 나네.”
“네! 이런 일은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발키리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건가요!”
“체포했다, 훈방했다는 보도는 자주 나오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런 아이들’ 입장에선 익숙해진 일이랄까, 각오한 일이랄까…사라지지 않더라고요, 아하하…….”
나와 미네, 히후미의 말을 우아한 자태로 묵묵히 듣고 있던 아케미는 등에 멘 거대한 총에서 뻗어 나온 사슬을 꽉 움켜쥐었다.
“우후후. 그럼 이야기는 정리된 것 같군요.”
“응? 뭐가?”
“서운해요, 선생님. 키보토스에서 남에게 얕보였을 때 할 일은 단 하나뿐이죠.”
빠득 소리가 날 정도로 힘이 들어간 주먹. 팔뚝 위로 불거진 무시무시하게 굵은 혈관.
“짭새가 억제력이 되지 못한다면, 주먹으로 훈육해 드려야 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내가 아니라 미네와 히후미였다.
“그렇군요.” 말하면서 총의 레버를 조용히 전후로 당긴다. “타인의 아픔을 모르는 것 또한 병. 구호해 드립시다.”
“미네 씨와 아케미 씨가 모처럼 관심을 가지고 여기까지 와 주셨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페로로 가방 속에 쑤셔 넣은 손에 쥐어진 것은 언제 적 것인지 모를 복면. “웨이브 캣 씨를 도와주러 가요!”
세 사람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에 안 드는 놈들을 박살 내겠다’는 말을 들은 나는
모두의 번뜩이기 시작한 눈동자를 차례로 살핀 뒤 한숨을 내쉬며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렇네……. 뭐, 개인적으로도 따끔하게 맛을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칸나와의 톡창을 열어 샬레에서도 대응하겠다는 내용을 입력한다. “다 같이 해버릴까.”
<4>
나른한 오후의 트리니티 자치구역.
호위로 보이는 오토바이와 지프차를 거느리고, 간선도로를 따라 게헨나 방면으로 전속력으로 달리는 커다란 트레일러가 한 대 있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은 자들은 검은 헬멧과 붉은 헬멧.
그녀들은 김칫국부터 마시는 중이었다.
컨테이너에 가득 실린 ‘전리품’을 팔아치운 뒤의 일로 대화의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번에 저쪽 제조사에서 새로운 기능 달린 거 나오잖아? 우리 그룹 헬멧 그걸로 통일하자!”
“그거 좋은데! 그보다,”
견인 중인 컨테이너를 돌아본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아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 광경이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을 거 아냐! 총도 세트로 각인 넣은 걸로 맞출까?”
“그것도 좋네!”
풀페이스 헬멧을 쓰고 있어도 전해지는 그 실실 웃는 낯짝.
그녀들은 꺄르륵거리며 아직 손에 쥐지도 않은 밑천으로 무엇을 살지 궁리하는 데만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그때, 후방에서 경적 소리가 짧게 세 번 울렸다.
동료들과 미리 정해둔 신호.
문제 발생이다.
조수석의 붉은 헬멧이 안전벨트를 풀고 창문을 열어 머리를 내밀며 후방을 확인했다.
운전석의 검은 헬멧도 스마트 미러를 조작해 동료들의 지프가 비치도록 조정했다.
“뭐야?” 뒤에서의 총격을 피하려는 것인지, 시간을 벌려는 것인지, 동료들의 지프와 오토바이가 미러 속에서 차선을 이리저리 바꾸고 있었다.
“추격자인가?”
“그 백화점, 경비원은 있어도 용병은 고용 안 했잖아? 발키리인가?”
붉은 헬멧은 총 슬링을 단단히 조이고 창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잠깐 위로 올라갈게. 뭐 보이면 보고한다.”
그녀는 익숙한 몸놀림으로 트레일러 헤드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튕겨 나가지 않도록 신발의 접지력을 느끼며 자세를 잡고 후방을 살폈다.
수십 미터 후방, 다른 차들에게 막대한 민폐를 끼치며 3차선을 꽉 채워 지그재그로 달리는 2인용 오토바이 세 대와 지프 두 대.
가끔 총을 쏘고 있는 듯하지만…….
그때, 소형 트럭 한 대가 방금 자신들이 올라온 언덕 너머에서 슬그머니 나타나자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소형 트럭의 짐칸.
소형 트럭보다 훨씬 거대한 체구, 소형 트럭보다 긴 총신, 자신들의 총 따위는 장난감으로 느껴지는 발사음.
오토바이 부대는 전도되고, 지프는 순식간에 폭발하며 화염에 휩싸였다.
붉은 헬멧은 그 모습이 낯익었다.
아니, 불량 학생 중에서 ‘그 모습’을 모르는 자는 어디 구석에 박혀있던 뜨내기뿐이리라.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위험해!”
그녀는 허둥지둥 트레일러 헤드로 돌아왔다.
그 당황하는 모습에 놀란 것은 폭발 화염을 스마트 미러로 똑똑히 목격한 검은 헬멧이었다.
“위험한 건 알겠으니까 무슨 일인지나 말해! 저거 뭐야!?”
“쿠리하마 아케미야!”
“뭐어!?” 스마트 미러를 들여다본다.
작은 차체를 진동시키며 추격해 오는 소형 트럭이 저 멀리 후방에 보인다. “잘못 본 거 아냐?”
“버터플라이 트리거 달린 중기관총을 손으로 들고 쏘는 2미터 넘는 녀석이 둘 셋이나 있을 리 없잖아!
특공복은 안 입었지만, 절대 잘못 본 게 아냐!”
<5>
“아케미 씨! 스톱! 스톱이에요! 호위는 전멸했습니다!”
“어머? 이제 막 재미있어지려던 참이었는데 말이죠.”
최대한으로 웅웅거리며 돌아가는 소형 트럭의 가냘픈 엔진 소리 사이로, 적재함에 탄 두 사람의 대화가 분명하게 들려왔다.
뭐랄까, 음량이 아니라 음압 같은 것이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느껴진다.
“어, 엄청난 소리였어…….” 우연히 헤드레스트 뒤쪽 창문으로 굴러 들어온 탄피를 쥐었다.
“이렇게 커다란 탄환을 쓰는 총을 그렇게 쏠 수 있는 거구나…….”
탄피만으로도 내 손바닥 크기를 훌쩍 넘는다.
히카리와 노조미의 포탑에서 자르르 쏟아지던 것들이 이 정도 크기였던가?
“이야~, 아하하…….” 훌륭한 드라이빙 테크닉을 선보이고 있는 히후미는 복면 너머로 곤란한 듯 눈꼬리가 처진 눈을 내비치고 있다.
“저 중기관총을 트라이포드 없이, 그것도 들고 쏘는 사람은 처음 봤어요…….
그뿐인가요, 연사를 하는데도 이 정도 명중률이라니. 반동을 완벽하게 제어하고 계시다니, 정말 대단해요.”
“그건, 네, 정말로요. 옆에서 지켜봤지만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아니, 그 단련된 육체가 엄청난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만…….”
“어머, 과찬이어요. 그렇게 칭찬해 주시다니 기쁘네요.”
학생 세 명이 ‘총기를 다루는 자’로서 대화의 꽃을 피우는 것을 곁눈질하며,
나는 아로나와 프라나가 싯딤의 상자에 표시해 주는 네비게이션 시스템과 씨름한다.
이 자동차 전용도로는 게헨나를 향해 곧게 뻗어 있다.
가능하다면 트리니티 구역 내에서 처리하고 싶지만, 이런 직선로라면 이 소형 트럭으로 거리를 좁히기는 쉽지 않다……. 으음…….
나의 고뇌가 전해졌는지, 대화를 마무리한 미네가 뒤쪽에서 말을 걸어왔다.
“…역시 컨테이너를 무사히 확보하는 건 어려울까요?”
“타이어를 쏴볼까도 생각했는데…….”
“그, 안 돼요! 전복이라도 되면 웨이브 캣 씨가…….
게다가 백화점 쪽 분들 말씀으로는 신상품뿐만 아니라 창고에 있던 모모프렌즈 굿즈를 닥치는 대로 컨테이너에 쑤셔 넣고 달아났다면서요.”
“하지만 이대로라면 따라잡을 수 없어.
게헨나 선도부에 협력을 요청할 수도 있겠지만, 저 트레일러를 멈출 수 있을지는 미지수고.”
“어떻게든 나란히 달리기만 해준다면, 제가 저쪽으로 옮겨타서 멈추게 할 수도 있습니다만…….”
“미네, 그런 액션 영화 같은 소릴…….”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으려던 그때, 아케미가 밖에서 쾅쾅 소형 트럭의 천장을 두드렸다.
“그걸로 가시죠.”
히후미와 미네가 차례로 눈을 마주친다.
“그거라니요?”
아케미는 내 질문에 창문 쪽으로 팔을 쑥 뻗어오더니, 싯딤의 상자에 표시된 지도를 가리켰다.
“여기 도로를 빠져나가는 갓길이 있습니다.
소녀가 총을 쏴서 그쪽으로 내려가도록 유도하겠어요.”
아케미가 손가락으로 갓길을 따라가자, 그 끝은 크게 휘어져 도로 밑을 통과하는 형태였다.
“트레일러가 갓길로 들어서면 조금 앞쪽에 차를 세워 주시어요. 소녀가.”
아케미가 슬쩍 미네를 보았다. “미네 씨를 붕 던져드리겠사옵니다.”
“붕!?” “미네 씨를 던진다고요?!”
경악하는 목소리가 겹쳐진 나와 히후미를 제쳐두고, 미네만은 잠시 침묵한 뒤 딱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알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6>
“아, 아아아악, 위험해!!!!”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쏟아지는 탄환에 사이드미러가 날아가고, 검은 헬멧은 창문에 머리를 짓찧으면서도 필사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젠장! 역시 쿠리하마 아케미잖아!”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말했잖아!”
조수석 밖으로 몸을 내민 채 뒤따라오는 소형 트럭에 닥치는 대로 총알을 퍼붓던 붉은 헬멧이 소리쳤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치명타가 되지는 못했다.
“저 방패 든 녀석은 또 뭐야…. 소형 트럭 범퍼 가드 위에 서서 어떻게 저렇게 흔들림이 없냐고….”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복면을 쓴 운전수,
줄곧 태블릿 같은 것만 뚫어지게 보며 얼굴 한번 들지 않는 조수석의 인물,
범상치 않은 체간으로 범퍼 가드 위에서 승객과 차를 지키는 방패잡이,
그리고 적재함에서 50구경을 퍼부어대는 모자와 선글라스로 변장은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쿠리하마 아케미인 거구….
저 역겨운 개조 세일러복을 입은 스케반 놈들도 아닌데 대체 정체가 뭐냐고, 이 녀석들은.
붉은 헬멧은 차 안으로 몸을 집어넣기 직전 뒤를 힐끗 보고는 등골에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식은땀을 감추려는 듯 시트 깊숙이 몸을 묻고 심호흡하며 탄창을 교체하던 그녀는,
차량이 지나치게 길가 쪽으로 붙어 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달려도 괜찮은 거야?”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여기밖에 달릴 곳이 없다고!”
검은 헬멧은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더니 스마트 미러를 쾅쾅 두드렸다.
“저 방패잡이가 조수석 쪽에 서 있어서 그런지 이쪽으로는 총을 못 쏘는 모양이야.
상대가 정직하게 차선을 지키며 따라오고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이대로 갓길로 달리면 측면 도로를 통해 국도로 빠질 수 있어.
시간은 걸리겠지만 국도를 통해 게헨나로 간다.”
검은 헬멧이 마치 희망이라도 찾은 듯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며, 붉은 헬멧의 머릿속을 스치는 것은 그 기묘한 일행의 모습이었다.
그 위압감.
무엇보다 차선은 꼬박꼬박 지키면서도 가속 페달은 망설임 없이 끝까지 밟고 있는 복면,
그 녀석이 뿜어내는 예사롭지 않은 오라는 장난이 아니었다.
만약 저 녀석이 타는 차가 저런 몇 년 전 모델인지도 모를 소형 트럭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따라잡혔을 것이다.
…국도로 내려가려면 당연히 속도를 줄여야 한다. 저 복면 앞에서 말이다.
“저, 저기.” 총을 쥔 손에 땀이 밴다. “그냥 이대로 직진하면 안 될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니 엄청난 횡방향 중력 가속도가 몸을 뒤흔들기가 무섭게, 한 번 페인트를 썼던 거대한 차체는 급격히 핸들을 꺾으며 갓길로 빨려 들어갔다.
<7>
그녀에게는 예감이 있었다.
어딘가 어수룩하고 익살스러운 분위기의 이 선생님은 학생을 위해서라면 마지막까지 전력을 다해 서포트해 줄 것이라는 예감.
그녀에게는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다.
아지타니 히후미라는 트리니티 학생이 사랑스러운 외모나 부드럽고 온후한 성격과는 달리 할 때는 확실히 해내는 여자라는 확신.
그녀는 신뢰하고 있었다.
그때 그 자리, 자신의 앞으로 날아 들어왔던 담력과 강인함, 그리고 체면과 나잇대에 걸맞은 내면 사이에서 고민하는 가련한 소녀성.
자신이 독보적으로 귀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귀여움은 곧 강함이다.
타인을 귀엽다고 여길 줄 아는 것은 강자의 증거.
무엇보다, 카를레스 군을 귀엽다고 말하는 인간 중에 나쁜 녀석은 없다.
재앙의 여우도 샬레에 드나든다고 하지 않는가.
최근에는 헬멧단의 분파 헤드인 코마카제 러브도 샬레에 눌러앉아 있다고 한다.
바깥세상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해변에서의 일도 체육관에서의 만남도, 일반인들과 접하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우후후…샬레와 연합을 맺는 것도 스케반에게 있어 좋은 미래일지도 모르겠어요.”
아케미의 중얼거림이 들렸는지, 들렸다 한들 내용은 알아듣지 못했겠지만.
조수석의 선생님이 슬쩍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선생님은 미소 지으며 태블릿을 조작하고는, 어설픈 윙크와 함께 엄지를 치켜세웠다.
“갑니다!”
선생님 옆에서 히후미가 신호를 보낸다.
능숙한 시프트 워크와 핸들 조작으로, 낡은 소형 트럭이 각 부위에서 비명을 내지르며 드리프트 준비에 들어간다.
“아케미 씨!”
범퍼 가드 위에서 미네가 방패를 던져준다.
아케미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좁은 적재함 위에서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야구 타자처럼 자세를 잡았다.
미네의 시선.
의심이나 사양 따위는 조금도 없는 그 눈빛.
선생님과 히후미의 응원 소리.
구면인 사이라도 이 정도로 소리 높여 신뢰를 입으로 내뱉는 일은 흔치 않을 터였다.
아아, 정말로,
“사랑스러운 분들이어요.”
소형 트럭의 지붕을 딛고 도약해, 미네가 겨누고 있는 실드 안으로 뛰어든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니어요!”
말 그대로 통나무 같은 팔과 다리에 혈관이 솟구치며 힘이 들어간다.
“자! 가십시오!”
“맡겨주세요!”
드리프트의 회전력을 이용해 아케미는 전신전령을 다해 투석기처럼 미네를 투척했다.
한계를 넘어선 소형 트럭의 엔진이 내뿜는 연기,
접지력도 없으면서 필사적으로 버틴 작은 타이어가 타는 냄새에 휩싸인 채,
트럭에서 굴러떨어진 두 사람과 소중한 방패를 닦으며 적재함에서 뛰어내린 한 사람.
그녀들이 자동차 도로의 가드레일에 매달려 지켜보는 저 멀리 아래에서는 미네가 올라탄 트레일러의 속도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8>
“…트리니티와…의 경계에서…에 의해 확보…된 헬멧단…혐의를…하고 있으며……”
뉴스의 볼륨을 높이며 커피에 설탕을 넣었다.
“놀 돈이 필요해서 저질렀다. 후회는 없다, 라고 진술했으며,
발키리 경찰학교에는 일부 모모프렌즈 팬들로부터 엄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져……”
“히후미랑 아즈사, 복면 쓰고 플래카드 든 채로 행진하고 있었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살짝 달콤해진 커피를 머금었다.
업무도 어느 정도 일단락된 오후의 온기 속에서 그 향기와 달콤함이 지친 몸을 치유해 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문득 고개를 들자, 집무실 문을 열고 이로하가 나른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계세요? 계시는군요.”
미간을 찌푸린 채 구석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그대로 스르르 자세가 무너지며 2인용 소파를 다 차지하고 드러누웠다.
“공간 좀 빌릴게요.”
나는 커피 머신에 허브티 캡슐을 넣고 스위치를 눌렀다.
“오늘도 꽤 지쳐 보이네.”
“네, 뭐, 늘 그렇듯 그런 이유입니다.
마코토 선배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는데, 오늘은 상대해 줄 에너지가 없어서 후다닥 도망쳐 나왔거든요.”
어딘지 일부러 연출한 듯한 피곤한 기색의 이로하와 두어 마디 대화를 나눌 무렵, ‘칙─’ 하고 차가 다 되었음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정체를 알아차렸는지 이로하가 척추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그녀에게 눈짓을 보내고, “뜨거우니까 조심해”라며 허브의 향긋한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녀는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천천히 차를 머금었다.
나는 그녀의 옆으로 1인용 소파를 끌어와 앉으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부드러운 시트에 온몸의 마디마디에서 느껴지던 피로가 흡수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로하는 가방에서 꺼낸 소설책과 스마트폰을 탁자 위에 올려두더니, 휴게실 이용 현황이 적힌 화이트보드를 힐끗 쳐다봤다.
“휴게실, 사용 중이네요.”
“응, 오후 내내 당번인 아이에게 빌려줬거든. 이로하도 쓰고 싶었어?”
“아뇨, 딱히요.”
그녀는 허브티의 향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가, 장난스럽게 미소 지으며 이쪽으로 시선을 흘렸다.
“선생님이 여기에 계신다면, 저도 여기가 좋습니다.”
“또 그런 소릴 한다니까.”
웃으며 스마트폰을 조작해 집무실 문을 잠갔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도 이제 막 쉬려던 참이었으니, 같이 느긋하게 있자고.”
“후후후…선생님을 타락시키는 데 성공했네요.”
“역시 대단한 솜씨십니다, 전차장님.”
가방에서 다과를 꺼내며 만족스러운 듯 웃어 보이는 이로하에게 미소로 화답하다가, 문득 휴게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즐겁게 보내고 있으려나……?’
“왜 그러세요?”
“아니, 혼잣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로하의 초콜릿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것보다 나도 하나만 줘!”
“네, 상관없어요. 나중에 제 부탁을 뭐든 들어주신다면, 말이죠.”
“…초콜릿 하나치고는 대가가 너무 큰데…….”
<9>
샬레는 평일이든 휴일이든 관계없이 학생에게는 언제나 문이 열려 있다.
학교 그 자체의 자립성과 자치권이 높은 키보토스에서는 학교 사이의 인연과 갈등이 끊이지 않지만,
샬레에서는 서로 밀치고 때리고 쏘는 종류의 일은-아예 없는 것은 아니나-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다들 적당히 눈치를 보며 교류를 나눈다.
요컨대, 학생이라면 샬레에 누가 있더라도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기, 이번에 획득한 전리품입니다!”
안쪽에서 문을 잠근 휴게실 안, 세명의 학생이 탁자 하나를 둘러싸고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옆으로 나란히 서면 보기 좋게 키 순서가 될 법한 들쑥날쑥한 3인조.
전원 눈에 띈다면 눈에 띄는 인물들이었지만,
선생님이 앞장서준 덕분에 ‘뭐, 사람이 모이는 곳이니 저런 부류도 있겠지’라며 다들 대수롭지 않게 넘겨준 덕에 무사히 도달할 수 있었다.
“전리품, 인가요?” 예전과 달리 구호기사단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는 미네는 턱에 손을 얹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히후미 씨라면 그럴 리 없다고 믿습니다만, 설마 컨테이너의 상품을 슬쩍 한 것은……”
“어머, 소녀는 그런 히후미 씨라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답니다.” 입가를 가린 채 특공복 차림의 아케미가 까르르 웃었다.
“그 복면, 제법 잘 어울렸으니까요.”
“아, 안 그랬어요! 괜찮습니다!”
히후미는 당황한 듯 커다란 비닐봉지에 빵빵하게 채워져 있던 물건들을 탁자 위에 조심스레 꺼내놓았다. “답례라며 백화점 분께서 주신 거예요!”
오후 내내 샬레의 휴게실을 통째로 빌렸다는 특별함 때문일까.
탁자 위 가득 펼쳐진 광경에, 평소 타인에게 다소 초월적인 인상을 주곤 하던 미네와 아케미로부터 나이대에 걸맞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
노력하는 학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선생님이 머리를 짜내어 조달한 테이블 위를 빈틈없이 메운 것은 수많은 ‘웨이브캣’ 굿즈들이었다.
“이, 이것은……!” 미네는 인형 머리와 꼬리가 달린 웨이브캣 머플러 타월을 집어 들고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행사장 한정판 아니었나요?!”
“맞아요! 선생님을 통해서 그때 활약해준 학생들에게 전해달라고 하셨대요!”
어딘지 부끄러운 듯 뺨을 붉히며 머플러 타월에 얼굴을 묻는 미네와,
손잡이 부분이 이상하게 길고 부드러워서 실용성이라곤 전혀 없는 볼펜을 진지한 눈빛으로 관찰하는 히후미를 잠시 지켜보던 아케미는,
몸통 부분이 슬링으로 된 웨이브캣 미니 파우치를 집어 들었다.
‘물건’보다는 ‘캐릭터’를 내세우는 대량 생산품치고는 제법 튼튼해 보였다.
파우치를 열어본다.
스마트폰과 지갑 정도라면 여유 있게 들어갈 만한 크기.
안감은 보드라운 타월지였다.
히후미처럼 페로로 배낭을 중심으로 코디를 한다면 모를까, 자신이 즐겨 입는 옷차림에 어울리는 물건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라면…….
여전히 굿즈 검수에 여념이 없는 히후미와 미네의 옆에서, 아케미는 특공복 자락 너머로 ‘카를레스 군’을 살며시 불렀다.
그는 몸을 유연하게 뒤틀며 아케미의 커다란 손바닥 위로 올라왔고, 그녀가 이끄는 대로 미니 파우치 속으로 스르르 이동했다.
빳빳하면서도 폭신한 안감에 몸을 비벼대며 빙글빙글 몸을 꼬던 카를레스 군은
한동안 신기한 듯 주변을 둘러보다가 파우치 입구에 턱을 괸 채 자리를 잡았다.
웨이브캣의 얼빠진 얼굴 위에 겹쳐진 카를레스 군의 느긋하게 풀어진 얼굴.
흠, 이것은 가히 ‘귀여움의 폭력’이라 할 만했다.
자신의 냄새를 묻히기 위해 몸을 타월지에 부비대는 몸짓은, 보는 사람에게 세금을 징수해도 될 정도였다.
아케미가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자,
“…앗!” 하고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아케미의 손길을 훔쳐보던 히후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카를레스 군과 아케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귀, 귀여워요! 하늘다람쥐인가요?”
순수한 그녀이기에 더욱 가슴에 와닿는, 천진한 감탄사.
“오늘도 같이 왔군요. 후후, 여전히 커다란 눈이 사랑스럽네요.”
체면을 차려야 하는 남들 앞에서의 그녀와는 다른, 아주 편안한 목소리였기에 전해지는 진심 어린 애정.
“후후……” 아케미는 미소 지으며 카를레스 군을 그녀들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카를레스 군, 소개해 드릴게요. 이쪽은 제 친구인……”
여학생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샬레의 어느 평범한 평일 오후.
아무래도 평범하지 않은 이들의 귀여운 밀의는 앞으로도 한참 동안 계속될 것 같다.
Fin.
댓글 6

미네 아케미 히후미는 진짜 근본없어서 재밌네ㅋㅋㅋ
아케미 나오는거라 소설이여도 읽어보는데 히후미 왜 1학년으로 표기되냐....
헉ㅋㅋ 다행히(?) 원작 찐빠군요..
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