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L #비즈니스 #스바루 #미네
원본 by 雷下せんせ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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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7>
<1>
아리우스 분교.
한때 세계를 증오하고 키보토스를 불태우려 했던 과격 단체.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다.
황폐한 땅에서 아리우스의 학생들도 마침내 웃음꽃을 활짝 피우게 되었다.
라고, 카케하시 스바루는 이 학교를 소개하고 싶었다.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온갖 건축물은 낡아 빠졌다.
벽은 허물어졌고, 비가 새며, 창유리는 깨져 나간 지 오래다.
이 정도로 끝나는 건물은 그나마 고급 축에 든다.
뼈대와 부서진 바닥뿐인, 지붕조차 없는 공간을 집이라 부르는 실정이다.
파괴만을 목적으로 했던 아리우스에게 수리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도 땅을 일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일구는 법을 배우지도, 허락받지도 못했다는 것이 맞겠지만.
덕분에 농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가래나 괭이를 쥐어본들, 언제쯤 수확할 수 있을지 기약조차 없다.
물은 간신히 구하고 있다.
하지만 상수도 시설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우물 비슷한 것이 몇 군데 있을 뿐이다.
어른이 사라진 뒤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도르래와 양동이로 길어 올리는 구식이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아리우스는 다시 일어서려 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부족하다.
밖으로 나가 돈을 벌어와도 그 돈은 식료품값으로 고스란히 빠져나간다.
외화를 벌어도 저축할 수 없는 구조다.
스바루 본인만 해도 소지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하모니카와 악보 몇 장이 전부다.
바닥에 숫자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는 스바루.
지금까지는 사격 제원에만 사용했던 계산 능력을 이제는 회계 업무에 쏟아붓고 있다.
하지만 아끼고 또 아껴야(즉, 극악무도한 어른이 군림하던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생활 수준을 유지해야) 겨우 수지타산이 맞을까 말까 한 수준이다.
교사는 정말 최소한의 수리만 겨우 끝냈을 뿐이다.
자립은 그야말로 꿈속의 꿈이다.
“교복 건도 있지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혼잣말.
교복.
키보토스의 학생들에게 있어 자신의 소속을 명확히 드러내는 의복.
그 교복을 쇄신하겠다는 것이 임시 학생회장 하카리 아츠코가 야심 차게 밀어붙이는 정책이다.
지금까지의 아리우스에서 탈피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새 교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는 하고 있다.
하지만 돈이 없다.
무심코 단말기에 손을 뻗으려다 멈칫한다.
무의식중에 선생에게 모모톡을 보낼 뻔했다.
그 어른은 학생의 부탁을 외면하지 않는다.
돈 문제라 해도 길을 찾아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자립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리우스의 앞날을 생각한다면 의존할 지팡이를 찾을 게 아니라, 제 두 다리로 서기 위한 근육을 길러야 한다.
“그 근육을 단련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 고민입니까?”
“히익!?”
너무 집중한 나머지 등 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기척을 냈는데도 대답이 없으셔서 가까이 다가갔더니 혼잣말이 들리더군요.”
정중한 말투와 우아한 몸짓.
사과를 건넨 소녀는 아오모리 미네,
구호기사단의 단장이다.
그녀는 자선 사업을 위해 부원들을 데리고 아리우스에 자주 얼굴을 비추곤 한다.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귀 끝이 붉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뇨…저야말로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아리우스를 활기차게 만드는 것은 곧 여러분에 대한 구호로 이어지는 법.
훌륭한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스바루 씨, 우선 당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죠. 텐트로 가실까요?”
오늘 구호기사단의 목적은 아리우스에서 생활하는 학생들의 건강검진이다.
건강에 문제가 없는지 정기적으로 신체 수치를 측정하는 이벤트.
특히 스바루는 지난 소동 당시 큰 고초를 겪었던 인물이다.
스바루의 건강은 각별한 관심사였다.
“네, 알겠습니다. 지금 가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마신 뒤 텐트로 향한다.
아리우스 전체가 다시 앞을 바라보게 된 계기가 된 그 동란.
미네의 활극을 직접 목격한 뒤로 스바루는 그녀의 말만큼은 고분고분 듣게 되었다.
단적으로 말해 얻어맞고 싶지 않다.
“우선 이 검사복으로 갈아입어 주세요.
저 커튼 뒤가 탈의 공간입니다.
속옷을 제외한 모든 옷을 벗고 검사복을 착용해 주시면 됩니다.”
아마도 입에 배었을 상투적인 문구를 척척, 그러면서도 정중하고 듣기 편하게 설명하며 검사복이 든 가방을 내민다.
말투나 몸짓이 너무나도 정중한 탓에, 사람을 진심으로 때려눕히는 그 이면이 강하게 느껴져 스바루의 몸은 도리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검사복으로 갈아입은 뒤로는 미지의 체험이 계속되었다.
키를 재기 위해 뒤꿈치를 맞춘다거나,
몸무게나 시력이라는 개념의 측정.
굳이 혈액이라는 불결한 것을 소독까지 해가며 바늘로 뽑아내기도 했다.
소리가 나면 버튼을 누르는 검사는 대체 왜 필요한 걸까.
검사복을 걷어 올리고 가슴이나 등에 정체불명의 금속을 갖다 대는 행위는 또 무슨 의미란 말인가.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 한마디가 귓가에 들려오자 겨우 온몸의 힘이 빠졌다.
그제야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익숙하지 않은 일이라 고생 많으셨죠. 검사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아뇨. 저희야말로 예전에 그렇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아리우스에 대한 원조 정말 감사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구호가 필요한 곳에 구호를’이 저희의 이념입니다.
여러분께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이들의 건강 상태는 좀 좋아진 것 같나요?”
“네. 다들 체중이 늘고 있습니다.
너무 마르면 면역력, 집중력, 체력 저하로 이어지죠.
물론 살찌는 것도 주의해야 하지만, 우선은 이대로 체중을 늘려 튼튼한 몸을 만들어 가도록 합시다.”
스바루는 진지하게 경청한다.
후배들은 스바루의 보물이다.
그녀들에 관한 일이라면 거북한 상대라도 긴장하고 있을 여유 따위 없다.
진지하게, 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다.
“다만, 다들 수면 부족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생활 습관이나 급격한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영향을 주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조금은 릴랙스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줄 필요가 있겠습니다.”
경청하고 있기에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있었다.
아오모리 미네의 시선.
스코프 너머로 대상을 노려보는 저격수 같은 눈빛.
진지하게, 구멍이 뚫릴 정도로 빤히 쳐다보고 있다.
“적절한 운동도 숙면에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운동은 오히려 강도가 너무 높아 보이는군요.
훈련의 중요성을 부정하진 않겠지만, 건강을 생각한다면 휴식 시간이나 휴일을 조금 더 늘릴 필요가 있습니다.”
“저기.”
도저히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그렇게 잡아먹을 듯이 응시하고 있어서야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왜…아까부터 제 가슴을 보고 계시는 건가요?”
“…그렇게 많이 봤나요?”
“네…아주…….”
“…아뇨…그럴 리가 없을 텐데…….”
“…….”
“…….”
결국 미네는 항복했다.
강철 같던 얼굴에 그런 표정이 떠올랐다. 귀가 새빨갛다.
“사실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설마 했던 역질문.
영문을 몰라 당혹스러웠지만, 그 아오모리 미네가 부끄러워할 정도의 질문이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네,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거라면요.”
“…아리우스 여러분의 속옷은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네?”
“실례가 이만저만이 아닌 질문이 되겠습니다만, 여러분은 건강에 신경 쓰지 않고 격렬한 운동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가슴의 형태가 무척 아름답습니다. 예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예요.”
“…하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속옷 이야기로 이어지는 거죠?”
“가슴의 형태 유지에는 생활 습관뿐만 아니라 속옷의 영향도 큽니다.
특히 착용하고 있는 속옷이 몸에 잘 맞는지가 중요하죠.
아리우스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속옷은 공통된 디자인인 듯하니 학교 지정품으로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개개인의 몸에 맞는 속옷을 준비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일 텐데 어떻게 조달하고 계신 건지 해서요.”
미지의 조우라고 해도 좋으리라.
아리우스와 외부 세계의 문화 충돌이라 불러야 할까.
말뜻은 이해가 가는데, 의미를 모르겠다.
“…말씀하시는 의미를 잘 모르겠네요. 트리니티는 속옷을 어떻게 조달하는데요?”
“기본적으로 각자가 가게에 가서 몸에 맞는 것을 사서 입습니다.”
“사서 입는 건가요? 직접 만드는 게 아니라?”
스바루의 순수한 의문이 미네를 크게 경악시켰다.
눈을 크게 치켜뜨며 믿을 수 없다는 기색으로 스바루를 빤히 쳐다본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텐트 밖으로 나갔던 미네는 몇 분 뒤 돌아왔다.
손에는 검사복이 들어있던 것과는 다른 가방이 들려 있었다.
“이건 제 속옷입니다.”
미네가 가방에서 꺼낸 그것을 보고, 이번에는 스바루가 경악했다.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했지만,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이게…? 드레스가 아니라요?”
사치스러울 정도로 널따란 천.
미네의 인상과 어울리는 푸른 빛의 그것은 스바루의 머리보다도 커 보였다.
그리고 표면을 수놓은 수많은 레이스.
무슨 지지대라도 들어있는 건지 중력을 거스르듯 컵 모양을 유지하는 유지력.
아리우스의 수수한 검은색 단색 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스바루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속옷…소위 말하는 브래지어입니다.”
스바루 안의 상식이 마침내 완전히 무너져 내리려 했다.
가려져 보이지 않는 곳.
움직이는 데 방해되는 가슴을 억누르기 위한 의복에 바깥세상에서는 이 정도의 사치를 쏟아붓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내일 먹을 것을 걱정하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충격에 트리니티를 향한 증오가 다시 불붙으려 했으나, 어떻게든 억눌렀다.
우선은 인식의 격차를 메워야 한다.
“음…그러니까…아무래도 저희와 그쪽은 속옷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크게 다른 모양이네요.
우선 그 부분부터 맞춰보도록 하죠.”
<2>
“외부의 속옷 사정은 대충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제 제가 대답할 차례군요.”
미네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빛내며 귀를 기울였다.
이런 귀여운 표정도 지을 줄 아나 싶어 당혹감이 앞섰지만, 일단 설명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리우스에서는 속옷을 사는 일이 없습니다.
애초에 시장이 없다는 게 정확하겠지만요.
그렇다고 학교에서 지급되는 것도 아닙니다.
착용자에게 천과 실이 지급되면, 그걸 바탕으로 각자가 치수 측정부터 바느질까지 직접 합니다.
디자인이 비슷한 건 다들 검은색 천만 받기 때문이고요.”
“과연…일종의 오더메이드군요. 하지만 재봉틀을 본 적이 없는데, 설마 손바느질인가요?”
“재봉틀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바늘을 손에 쥐고 꿰매는 걸 손바느질이라 한다면 그렇습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미네가 눈을 크게 떴다.
믿기 힘든 사실을 연달아 접하는 것은 스바루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자작이라면 형판도 처음부터 제작하시겠군요. 경험이 없으면 무척 어려울 텐데, 어떻게 만드시는 건가요?”
형판. 옷의 설계도다.
시판되는 티셔츠처럼 대부분의 사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건 쉽다.
그냥 크게 만들면 그만이다.
하지만 개인의 몸에 딱 맞는 것을 만들려면 매우 어렵다.
움직이기 편하고 착용감을 높이려면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
“상급생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틀이 있어요.
하급생은 체형이 비슷한 상급생에게 배우죠.
거기서 자기 몸에 딱 맞게 미세 조정을 해서 자기 것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걸 다시 하급생에게 전해주는 거예요.”
“전통적이군요.”
“전통이라고 하면 전통…일지도 모르겠지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아리우스 학생 중에서 의복 제작에 인력을 할애할 여유가 없었을 뿐이죠.
짬 날 때 얼른 해치우라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을걸요.”
“속옷에 와이어가 없는 것도 전통인가요?”
와이어.
가슴 하부 곡선을 따라 들어가는 수지 코팅된 금속 심지.
모양을 잡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강한 압박감의 원인이 되기도 하여 이를 꺼려 와이어가 없는 속옷을 입는 학생도 많다.
“우선 속옷 와이어라는 걸 방금 처음 알았습니다.
아리우스 속옷에는 와이어를 넣지 않아요.
…아마 와이어에 쓸 자원은 다른 곳에 쓰이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되면 의문이 남습니다.
논 와이어는 압박이 적어 편안하지만, 그만큼 유지력이 떨어지죠.
그 상태로 아리우스 여러분처럼 강도 높은 운동을 하면 통증이나, 최종적으로는 가슴의 형태가 망가지는 결과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제가 진단한 바로는 그런 경향이 전혀 없었습니다.”
와이어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통증에 관한 이야기는 스바루도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장애물을 뛰어넘거나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면 통증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가슴이라는 건 단순히 무겁다.
아무리 얇고 작아도, 아무리 가벼워도 무거운 법이다.
이것이 상하좌우로 날뛰면 가슴과 몸통을 잇는 인대가 당겨져 통증이 된다.
미네의 말에 따르면 그 인대가 상하면서 가슴이 처지는 등 형태가 망가진다고 한다.
그런 폭주를 억제하기 위해 속옷이 있다는 건 스바루도 알고 있었다.
자신보다 큰 것을 가슴에 달고 있는 미네라면 더더욱 필요한 물건이리라.
하지만 그럼에도 스바루가 보기엔 미네의 주장이 과장되게 느껴졌다.
아리우스에서 그런 통증을 호소하는 학생은 기억에 없다.
있다고 해도 가슴이 부풀기 시작할 무렵에 속옷을 입지 않았거나, 성장에 따라 사이즈가 맞지 않게 된 학생들뿐이다.
의문이 생기면 직접 해보면 된다.
이것저것 혼자 고민하는 건 자신의 나쁜 버릇이라고 배운 참이니까.
“직접 입어보실래요? 아리우스식 속옷?”
“오더메이드잖아요? 아리우스 여러분께 부담이 된다면…….”
“상관없어요. 미네 씨랑 체형이 비슷한 학생이 아리우스에 있거든요.
한가할 테니 걔한테 시키겠습니다.
치수만 재면 금방 완성될 거예요.
다만, 당신이 평소에 입는 것 같은 귀여운 건 기대하지 마세요.”
“단기간에 그렇게 금방 만들어진다고요?”
이번에는 미네가 굳어버렸다.
단장조차 자신처럼 굳을 때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 우습게 느껴졌다.
“자, 일어나세요. 줄자 좀 빌릴게요. 커튼 뒤에서 속옷만 남기고 다 벗으세요.”
<3>
츠치나가 히요리가 만든 속옷을 입은 미네는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떨고 있었다.
고양감이다.
“압박감이 거의 없는데 논 와이어보다…아니, 와이어가 있는 것과 동등한 유지력이 느껴져요.
괴롭지 않은데, 점프를 해도……!”
그 자리에서 미네가 몇 번이고 폴짝 뛰어오르다 멈춘다.
그녀의 얼굴에는 만연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굉장해요! 스바루 씨, 이 속옷은 훌륭합니다!
통증이나 압박감,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에요!
가슴의 흔들림도, 어깨의 부담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적어요!”
어떤 신비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밀레니엄의 과학력으로도 증명할 수 없지 않을까.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 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미네는 마음속 깊이 경탄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더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잡는 미네. 크라우칭 스타트 자세다.
“하? 미네 씨!? 대체 뭘 하려고…….”
스바루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상반신을 드러낸 상태나 다름없는 미네가 달려 나갔다.
텐트를 빠져나가 아리우스의 황야로 떠났다.
여기저기서 “단장님!? 그 차림으로 구호를 가시는 건가요!?” “미, 미, 미네다―!” 하는 비명이 들려온다.
은인이라지만 저 사람을 아리우스에 가까이 두는 건 역시 좋지 않은 게 아닐까 후회할 때쯤, 미네가 텐트로 돌아왔다.
온몸이 땀방울로 빛나고 있었다.
아리우스 학생들의 고행에 의한 흙냄새와는 다른 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왠지 설탕 과자 같은 달콤한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스바루 씨, 정말 대단해요!
달리든 날든 구호하든, 정말 가슴이 얌전하게 있어 줘요!
그러면서도 통기성도 좋아서 답답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네요!”
미네가 스바루에게 달려와 두 손을 꽉 움켜쥔다.
감동이 그대로 근력으로 변환된 것인지, 붙잡힌 스바루의 뼈가 비명을 지른다.
“기…기뻐해 주시니 다행이네요. 아…일단 손 좀 놓아주실래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례를.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 이 속옷은 훌륭합니다. 아리우스의 보물이에요.”
“과장이 심하시네요. 흔해 빠진 거예요. 특별할 것도 없다고요.”
“아니요, 이건 틀림없는 보물입니다!”
미네가 씩씩거리며 콧김을 뿜는다.
한번 폭주하면 손쓸 수 없는 인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본다.
아리우스가 자랑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에덴 조약 이후 무너져 버렸다.
그런 와중에 외부인이 아무런 대가 없이 칭찬해 주는 아리우스의 전통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스바루에게도 기쁜 일이었다.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역시 과장이라니까요.
가난한 아리우스에 물질적으로 존재하는 건 밖에도 다 있을 거예요.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라고요. …귀엽지도 않고.”
“…아직 인식의 괴리가 있는 모양이군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트리니티로 와주세요.”
“…네?”
<4>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스바루는 트리니티에 와 있었다. 옆에는 미네, 눈앞에는 가게.
“…이 가게는 드레스를 취급하는 곳인가요?”
“당연히 속옷을 취급하고 있습니다. 란제리 숍이라고 불리는 곳이죠.”
어안이 벙벙해져 말이 막혔다.
예전에 미네가 보여주었던 속옷과 같은 계열의 물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한두 개라면 받아들였겠지만, 탄환만큼이나 많이 있는 광경을 목격하자 뇌가 정지해 버렸다.
“확실히 일반적인 물건과 비교하면 장식이 귀여운 것이 많고 가격도 조금 나갑니다.
하지만 결코 드문 가게는 아니에요.
자, 스바루 씨는 여기서 몇 가지 시착을 해보도록 하죠.”
“저를 트리니티로 부른 이유가 이거였어요!?
시착이라니…무리! 무리예요!
더러워지면 어떡해요!
그렇게 되면 사야 할 텐데 전 돈도 없다고요!”
“목욕이나 샤워는 오늘 아침에 하셨죠?”
“그거랑 이거랑은 이야기가 다르죠! 위생 관념이 아리우스랑 그쪽이랑 같을 리가 없잖아요!”
덧붙여 말하자면, 스바루가 오늘 아침에 한 것은 목욕도 샤워도 아닌 냉수마찰이다.
연료는 말할 것도 없고 비누조차 귀중품이다.
물로만 몸을 씻어내고 때를 어떻게든 문질러서 벗겨내고 있을 뿐이다.
애초에 물이 너무 차갑고 춥기 때문에 자주 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되면 제가 지불하겠습니다. 무리하게 부탁해서 모셔온 거니까요.”
무리한 부탁이라는 자각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순순히 포기하기로 했다.
이 사람이 달리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는 건 몇 번의 만남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스바루는 길들여진 고양이처럼 끌려가듯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설마…이 정도일 줄이야…….”
문화 충격.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았다.
트리니티에서는 보기 드문 카페 안의 개인실 테이블에 조용히 스바루의 눈물 몇 방울이 떨어졌다.
속옷을 몇 종류 갈아입어 보고 나서야 알았다.
와이어가 든 속옷은 괴롭다.사이즈를 조금 키워봐도 압박감은 여전했다.
무엇보다 덥다.
디자인이 귀엽다는 점 외에는 아리우스식을 능가하는 장점을 느낄 수 없었다.
스포츠용이라고 이름 붙은 것들도 몇 가지 시도해 보았다.
여기에는 레이스 같은 장식이나 와이어가 없다.
확실히 압박감은 아리우스식과 비슷했지만, 가슴을 받쳐주는 힘이 약해서 가슴 전체가 배꼽 쪽으로 처지는 느낌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않았다.
점원이 “손님 같은 사이즈라면 두세 장 겹쳐 입으시는 분들도 계세요”라고 말했을 때는 제정신인가 의심했다.
“이제 이해하신 모양이군요. 이거, 드릴게요.”
미네가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종이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스바루가 입어보았던 속옷 몇 벌이 들어있었다.
착용감은 좋아할 수 없었지만, 내심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것들이다.
미네가 그 사실을 꿰뚫어 보고 어느새 계산까지 마친 상태였다.
“…감사합니다.”
평소라면 적선이라도 받는 듯한 기분에 딱 잘라 거절했을 스바루였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었다.
오랜만에 바깥세상과의 격차를 뼈저리게 느낀 탓도 있었지만, 눈앞의 학생에게 인형 취급을 당한 것도 피로의 원인 중 하나였다.
귀여운 걸 너무 좋아하잖아, 이 화약 냄새 풀풀 풍기는 여자는.
“바깥 사람들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불안함을 주는 물건을 몸에 걸치고 있었군요.”
“우리에게는 이것이 당연합니다. 모두 불만은 있지만, 이 이상의 대안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기하네요.
아리우스식은 여기 스포츠용과 구조상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기계를 썼느냐, 손바느질이냐의 차이 정도겠죠.
그런데도 이렇게까지 착용감에서 차이가 나다니.”
“그 점에 대해서라면 짐작가는 바가 있습니다. 여기, 샘플로 사두었던 스포츠용 속옷입니다.”
종이봉투가 하나 더 나오더니, 그 안에서 미네가 말한 대로 스포츠용 속옷이 나타났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무미건조한 회색 일색의 물건이었다.
“잠, 잠깐만요! 아무리 개별실이라지만 이런 곳에서 속옷이라니요!”
상식에 어두운 스바루라 해도 속옷이 불특정 다수에게 보일 수 있는 장소에 있다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인식은 있었고, 실제로도 창피했다.
“문제없습니다.
이곳은 트리니티의 고위층들이 비밀 회담을 위해 자주 이용하는 찻집입니다.
이곳에서의 일은 완전히 비닉됩니다. …저에게도 수치심은 있으니까요.”
또 갭이다. 미네의 귀 끝이 살짝 붉다.
강철과 화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던 구호 머신은 요 며칠 새 소녀 같은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왜 최근 들어 이렇게 뇌에 과부하를 주는 일들만 일어나는 걸까.
분명 아리우스 학생회 스쿼드와 선생 때문일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이들에게 억지로 떠넘김으로써, 스바루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계속하죠. 이쪽이 아리우스의 것입니다.”
트리니티 대표 회색 속옷 옆에 놓인 아리우스 대표 검은색 속옷.
형상에 미세한 차이는 있지만, 역시 별다른 점은 없다.
아리우스 전통의 패턴이 바깥과 비교해 딱히 뛰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이밀어지는 것 같아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달라 보이지 않는데요.”
“아니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미네가 각각의 손으로 속옷을 하나씩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드물게 맨손이었다.
“아리우스의 원단은 제가 아는 그 어떤 천연 섬유나 화학 섬유와도 닮지 않았어요.
직조 방식도…이건 대체 뭘까요?
촉감은 매끄러우면서도 광택이 있습니다.
통기성이 좋으면서도 차갑지 않아요.
얼핏 늘어나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이 있는데, 피부를 감싸면 답답하지 않을 정도로 신축성이 있어요.
그리고 부드러워서 거칠거칠하지 않죠.
얇고 가벼운데도 피부가 비칠 정도는 아니에요.
패턴도 이 원단의 특징을 살리려 노력한 것 같아요.
어깨의 부담을 줄이고, 가슴을 누르면서도 너무 압박하지 않도록…역시 이 속옷에는 아리우스의 전통이 담겨 있습니다.
스바루 씨는 흔해 빠진 것이라 말씀하시지만, 제가 보기엔 아리우스의 보물입니다.
네, 틀림없어요. 쌓아온 열의와 애정이 여기서 느껴지거든요.”
내심 이 말은 무척 기뻤다.
밖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아리우스의 문화는 거의 전무하다.
싸우는 법밖에 모르는 학교 안에서 싸움 이외의 가치를 인정받은 경험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들뜬 기분이 된 것은 후배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샬레에서 과자를 입 한가득 먹었을 때 이후 처음일 것이다.
선생의 시선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때는 정말 행복했다.
그렇게 단맛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할 즈음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말 그렇게 특별한 게 아니에요. 그 원단은 아리우스에서 가장 흔한 물질입니다.”
“아니요, 그렇게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듭니다.
괜찮으시다면 재료를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재료요? 고치, 그러니까 벌레가 뱉어내는 실이에요.
실을 뽑는 김에 삶아진 벌레는 먹으면 허기를 달랠 수 있어서 고마웠죠. 맛있지는 않지만요.”
“그것은…누에인가요?”
“맞아요, 누에예요. 일단 이름이 있는데…아마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였을 거예요.”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
“학명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정식 명칭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사람이 먹지 못하는 잡초도 제법 잘 먹어주고, 실도 꽤 뽑아줍니다.
그 실이 원료예요.
저희 제복에도 쓰고 있고, 피부에 닿는 곳은 주변의 먹지 못하는 나무나 풀을 달인 염료로 검게 물들입니다.
…미네 씨, 아까부터 왜 그러시죠?”
“아니요…조금 놀라서…….”
얼굴을 보니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틈틈이 입에 대던 찻잔은 그대로 놓여 있었다.
이렇게까지 조용해진 미네의 모습이 신선하긴 했지만, 그 신선함은 점차 불안으로 변해갔다.
내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건가.
미네라는 여자는 화약고다.
무엇을 불씨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긴장감에 스바루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거 참…우리끼리만 나누는 비밀 대화로 끝내서는 안 될 것 같군요.”
<5>
이날 스바루와 미네의 회동(후일 역사서에는 ‘아리우스 속옷 담화’라는 이름으로 기록된다)을 기점으로 사태는 급격한 발전을 맞이했다.
키보토스는 현재 전례 없는 아리우스식 속옷 붐이다.
그 착용감을 맛보기 위해, 가슴 크기를 불문하고 온갖 학생들이 아리우스로 몰려들었다.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
밀레니엄에 의한 다각도 조사 결과, 이 누에는 신종으로 판명되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누에 실과 성질이 크게 다르다…고 스바루는 전해 들었지만, 어떻게 다른지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게 된 사실은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의 실이 아리우스식 착용감에 없어서는 안 될 핵심이라는 점이다.
사육이 쉬운 누에라고 생각했지만, 외부에서는 금방 쇠약해졌고 연구용으로 반출된 개체들은 모두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죽었다.
이 사실은 외부 학생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지만, 동시에 아리우스에서만 생산할 수 있는 특산품이라는 증거가 되었다.
실의 희소성과 아리우스식 속옷의 높은 유용성.
미네는 티파티와 아리우스 학생회 스쿼드의 회담 자리를 마련했다.
양측 합의 후, 적절한 기관의 심사를 거쳐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와 그 실로 만든 관련 제품 ‘아리우스 원단’은 트리니티 문화재로 등록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 내외에 아리우스 원단의 존재와 그 특별함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겉보기에는 아리우스가 활성화될 좋은 기회처럼 보이는 이 붐.
스바루는 이 열기 앞에서 매일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카타콤 입구에서 경비 중에 나온 푸념이었다.
스바루가 지휘하는 니코메디아 트룹에는 예전과는 다른 번거로운 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후배들끼리 벌이는 아리우스식 대화를 말리는 게 대부분이었다.
가끔 아리우스에서 이름을 날려보겠다고 밖에서 찾아오는 불량배들을 쫓아내는 정도였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지금은 아리우스식 속옷을 찾아 쇄도하는 외부 학생들을 통제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되어버렸다.
아리우스 분교에 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카타콤을 통과해야 한다.
아무리 경로를 정비해도, 미로 같은 카타콤에서 조난당하는 학생은 한둘이 아니었다.
이 조난자들의 구조나, 애초에 조난당하지 않도록 안내하는 일을 니코메디아 트룹이 맡게 된 것이다.
외부 학생 전원의 속옷을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리우스에서는 모든 것을 손바느질로 제작해야 한다.
애초에 개개인의 치수를 측정해 몸에 딱 맞는 것을 만드는 것이 아리우스식이다.
능숙한 학생들을 아무리 긁어모아도, 공정을 생각하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원단의 생산량이 가장 큰 병목 현상이 되었다.
내부 수요를 충족할 정도라면 넉넉했겠지만, 외부의 뜨거운 수요와 비교하면 턱없이 부족한 생산량이었다.
늘리고 싶어도 생물로부터 얻는 생산품은 공급을 급격히 늘릴 수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생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늘어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린다.
설령 늘릴 수 있다 해도 아리우스의 빈약한 환경에서는 개체 수를 유지할 수 없다.
자신들이 먹을 것조차 부족한 판에 누에에게 줄 먹이를 늘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람과 문제가 늘어나면 다툼도 늘어난다.
입수 곤란해진 아리우스 속옷의 구매 기회를 둘러싸고 분쟁이 빈번해졌다.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니코메디아 트룹은 분주히 뛰어다닌다.
아리우스 속옷 산업은 외화 획득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그 이상의 부담이 되고 있음은 누가 봐도 명백했다.
아리우스에서 회동이 있었다.
차라리 카타콤을 봉쇄해서 손님을 받지 말자는 제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과거의 아리우스로 되돌아가는 꼴이다.
악의만 없다면 출입하는 학생을 제한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사회 경험이 부족한 머리를 아무리 맞대봐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문제를 해결로 이끈 것은, 밖에서 밀린 일(건설 아르바이트)을 겨우 마무리하고 돌아온 총무 겸 부회장 조마에 사오리였다.
그녀의 “그럼 아리우스 밖에 가게를 차리자”라는 한마디는 그야말로 신의 계시였다.
성전에 기록된 “빛이 있으라”라는 말과 다름없었다.
<6>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아리우스의 바깥쪽, 트리니티 상점가의 한 구석.
벽돌로 지어진 건물 안에서 스바루가 안고 있는 고민이다.
아리우스 속옷 판매 수익과 사오리가 벌어온 마지막 월급을 쏟아부어 빌린 건물.
전기, 수도, 가스, 전화, 조명, 계산기, 책상, 의자, 종이, 펜, 창문, 지붕, 벽, 바닥, 문.
아리우스에는 없는 희귀품을 완비한 아름다운 건물이다.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이곳을 빌리기 위해 온갖 수지 타산을 맞춰준 삐딱한 회계 아마시노 미사키에게는 고개를 들 수 없다.
가급적 잔소리를 좀 줄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곳은 아리우스 속옷을 원하는 학생들의 창구가 된다.
오직 이곳에서만 타 학교 학생의 치수를 재고, 아리우스 속옷을 전달한다.
예약제기 때문에 아리우스 속옷은 실질적으로 완전 수주 생산제가 되었다.
제작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아리우스의 기술력도 향상되어, 단순한 프릴부터 직접 짠 레이스로 속옷을 장식하는 옵션까지 제공하게 되었다.
요즘 배운 표현을 빌리자면, 이 가게는 ‘럭셔리 란제리 숍’이다.
당연히 이 가게에서 접객을 하는 것은 아리우스 학생들이다.
사회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한 총무 겸 부회장 사오리는 매우 흡족해했다.
접객은 아리우스 내부에서 희망자를 모집해 시프트를 짜서 진행한다.
오늘은 스바루가 접객하는 날이다.
평소처럼 새로 제작할 학생의 치수를 재고 예약금을 받는다.
물건을 받으러 온 학생에게 남은 잔금을 받고 상품을 건넨다.
“저기…점원 언니…어때요?”
그리고 이것도 평소와 다름없는 스바루의 고민거리.
스바루를 목적으로 온 손님들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폐점 후에도 만나려 드는 것이다.
(그녀들이 어떻게 스바루의 접객일을 파악하는지는 미스터리다.)
“저…저희 가게에서는 그런 서비스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지 말고…네?”
후배들의 순수한 초대라면 모를까,
얼굴과 이름과 쓰리 사이즈와 전화번호밖에 모르는 트리니티 학생들의 흑심 가득한 요구에는 응하고 싶지 않다.
“스바루 씨가 만들어 준 이걸 입은 모습…보고 싶지 않나요?”
얼굴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치켜뜬 눈으로 다가오는 고객.
스바루가 제작한 속옷이 든 종이봉투를 일부러 자신의 가슴팍에 갖다 댄다.
이것이 선생이 남몰래 고민하던 ‘섹슈얼 해리스먼트’인가.
(선생은 학생을 홀리는 가해자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대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스바루는 표정만큼은 미소를 유지하려 애썼다.
하지만 달콤한 향수 냄새가 콧속에 눌어붙어 고통스럽다.
제발 누가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
긴장감을 한층 더 고조시킨 것은 건물 안에 울려 퍼지는 벨 소리였다.
다음 고객이 방문했다는 신호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
저 가게는 속옷뿐만 아니라 풍속까지 다루고 있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어렵사리 쌓아 올린 아리우스에 대한 신용과 호감도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저기…그러니까요…….”
벨 소리가 요란하게 계속 울린다.
호출이라기보다 경고를 위해 울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실례합니다, 아오모리 미네입니다. 안에 계신가요?”
똑똑히 밖에서 들려왔다.
“미네? …구호기사단 단장?! 다음 예약 손님이?!”
이 목소리는 스바루가 아니라, 눈앞의 발정 난 아기 고양이 고객의 것이었다.
그 이름이 나오자마자 고객의 그렇게 붉던 얼굴이 무서울 정도로 창백해졌다.
그 안색은 예전에 아리우스에서 물 한 모금 허용되지 않은 상태로 20일간 서바이벌 훈련을 했을 때를 떠올리게 한다.
쿵, 쿵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린다.
전기식 인터폰뿐만 아니라 고풍스러운 도어 노커가 남아 있었다.
그것으로 몇 번 두드린 모양이다.
처음에는 크면서도 품위 있게, 하지만 세 번, 네 번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 압박감이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네! 죄송합니다만 그대로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 목소리는 스바루 씨인가요?”
“네! 네, 스바루입니다! 이제 곧 준비가 끝나니까 정말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문 너머의 기다리는 사람에게 말을 걸면서, 눈앞의 소녀를 손짓해 뒷문으로 유도한다.
“아무튼 돌아가 주세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서둘러, 상처 입히지 않을 정도의 최대한의 힘으로 밀어냈다.
근본적인 해결은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자리를 수습하는 데는 성공했다.
“무척 절박한 목소리가 들리기에 구호가 필요한 상황일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미네에게 등 뒤에서 말을 걸린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아직 들여보내지도 않았는데 그녀가 왜 가게 안, 그것도 스바루의 바로 옆에 있는 걸까.
그녀의 가늠할 수 없는 행동력이 그저 두려울 뿐이다.
“왜 그녀를 뒷문으로 내보낸 거죠?”
“…부끄러움이 많은 고객님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란제리 숍을 이용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적지 않으니까요.”
“실례했습니다. 제가 또 앞서나간 모양이군요.”
미네의 태도가 돌변해 의자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얌전해졌다.
어떻게든 오해였다는 것을 이해시킨 모양이다.
그런데 방금 ‘또’라고 했나, 이 여자.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저희 가게에?”
“예약했습니다. 정식으로 속옷을 맞추고 싶어서요.”
“…아. 그렇군요. 저희 가게는 그런 곳이었죠.
새삼스럽지만, 당신의 담당을 맡게 된 카케하시 스바루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예를 갖춘다.
얄미운 총무 겸 부회장 사오리에게 주입받은 딱딱한 인사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미네도 응하며 의자에서 일어나 스커트 자락을 잡고 인사한다.
여전히 몸가짐 하나하나가 정말 아름답다.
이 정도의 기품을 가진 사람은 트리니티에서도 드물 것이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는다.
아리우스에서는 사치품이었던 백지와 펜을 꺼내 책상에 펼친다.
“원하시는 사항을 말씀해 주세요.
예전과 달리 디자인이나 색상도 다양해졌습니다.
원피스 타입처럼 큰 물건은 재료 생산 사정상 어렵지만, 웬만한 요구 사항은 들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든든하군요. …그래서…그게…….”
갑자기 우물쭈물하기 시작하는 미네.
“…사실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발치에 둔 가방에서 노트 한 권이 나왔다.
원래는 얇았을 그것은 온갖 메모지를 끼워 넣은 탓인지, 속이 꽉 찬 샌드위치처럼 팡팡하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아마 무척 먹기 힘들 것이다.
이건 노트니까 펼쳐서 보기만 하면 되지만.
“이건…뭔가요?”
“…안을 확인해 주세요.”
“실례하겠습니다.”
건네받은 노트를 펼쳤다. 압권이었다.
외부 학생들의 속옷을 몇 번 만들어봤다고 우쭐해 있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어느 페이지 하나 빈틈없이 그려진 방대한 스케치들. 블라우스, 재킷, 슬랙스, 스커트, 원피스, 드레스, 기타 등등…….
모든 디자인에 풍성하게 들어간 프릴이나 실루엣에서 소녀스러운 취향이 물씬 느껴졌다.
자신들에게는 없는 발상이 가득 담긴 성전과도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정말로 보여주고 싶었을 페이지가 나타났다.
“…직접 디자인하신 건가요?”
“네. 제가 스케치했습니다.”
“이걸? 전부 다요?”
“…너무 놀리지 말아 주세요. 그 노트는 제 것이고, 전부 제가 디자인한 것들입니다.”
그곳은 온통 ‘귀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곱 가지 색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형형색색의 속옷 스케치들.
하나같이 부드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 리본과 프릴이 사용되었다.
아름답다기보다 사랑스럽다는 말이 어울리는 것들이었다.
“정말 엄청나네요.”
“엄…엄청나다니요?!”
불안한 듯 스바루를 바라보는 미네.
이쪽의 반응을 갈구하면서도 그 반응이 어떠할지 예상하지 못해 몹시 겁을 먹은 듯한 표정이었다.
‘분명 내가 선생님께 시험 결과를 알려줬을 때 이런 표정이었겠지’ 하는 생각에 그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정말로, 진심으로 당신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는 거니까요.
이렇게 귀여운 디자인, 저로서는 도저히 떠올릴 수 없어요.”
미네는 원래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반짝이다가, 자신이 들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참으로 바쁜 사람이다.
“오늘은 이것들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게…제 사이즈가 되면 이런 디자인의 속옷은 찾아보기 힘들거든요.
수수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어른스러운 것들뿐이라 양극단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역시 ‘귀엽다’는 선택지도 갖고 싶어서요.”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시작하기에는 납기 면에서 무리가 있으니, 이 스케치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부터 조율해서 만들어 보죠.
미네 씨의 말을 빌리자면…이건 ‘트리니티의 보물’이니까요.”
말이야 쉽지, 실천은 또 다른 문제였다.
스바루의 제작 작업은 난항을 겪었다.
아무리 얇은 아리우스 원단이라 해도, 장식을 덧대다 보면 옷의 실루엣에 영향이 가기 마련이다.
아마도 가슴이 커서 부해 보이는 걸 싫어했던 미네는 몸의 라인이 드러나는 옷을 선호했다.
속옷 장식의 양을 조금이라도 잘못 조절하면 옷 위로 그 존재감이 드러나게 된다.
미네가 생각하는 귀여움을 스바루가 경험으로 익힌 허용 범위 내에서 충족시켜야만 했다.
이리저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니 그날의 예약 시간은 금세 끝나버렸다.
어쩌면 좋겠냐며 미네가 곤란해하자 스바루가 말을 건넸다.
예약이 없어도 그 찻집에서 만나 이야기하자고. 지난번엔 홍차도 과자도 입에 대지 못했으니까.
면식이 있는 사이긴 해도 엄연히 손님과 점원 관계라며 미네는 거절했지만, 어느샌가 두 번, 세 번 찻집에서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덧 미네와 스바루는 하나의 궁극적인 속옷을 만들고 싶다는 일념으로 뭉쳐 있었다.
미네가 스케치를 그리면 스바루가 자투리 천이나 종이로 작은 샘플을 만든다.
그걸 보며 다시 토론이 시작된다.
겨드랑이 쪽 너비가, 컵의 넓이가, 프릴 폭이, 레이스 배치가.
차라리 스티치로 포인트를 줄까?
세탁하기 불편해진다.
이건 안 귀엽다.
이래서는 움직이기 힘들다.
아니, 이건 감수할 수밖에 없다.
스바루 입장에서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요청 사항을 파악해서 최대한 그대로 만들어 주기만 하면 그만이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돈을 벌 수 있고, 아리우스의 살림은 나아진다.
그럼에도 그러지 않았던 건 상대가 미네였기 때문이다.
툭하면 구호랍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골치 아픈 여자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아리우스의 보물을 찾아내 준 사람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리우스는 여전히 푼돈 벌이 알바와 위험한 용병 일로 근근이 입에 풀칠이나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만의 정체성을 확립해 주었다. 한마디로 은인인 셈이다.
은인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은 아리우스 안이나 밖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게 완성된 속옷은 스바루와 미네 모두가 만족하는, 귀여움이 형상화된 결과물이었다.
아리우스 속옷 특유의 착용감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겉옷의 실루엣을 방해하지 않는다.
옷을 한 꺼풀 벗기면, 그 아래에는 귀여움이 넘쳐흐른다.
미네의 양해를 얻어 디자인을 조금 간소화한 모델을 생산하기로 했다.
아리우스 속옷 최초의 기성품 모델.
사이즈가 크면서도 귀여운 것이 특징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아리우스 이미지를 바꾸는 기폭제가 되었다.
소문에 따르면 정의실현부의 부부장이 이 모델을 애용하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아리우스 분교는 전투력뿐만 아니라 양재 기술로 먹고살 길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전기가 들어오고 기계도 도입할 수 있었다.
바늘을 부러뜨리는 사고가 꽤 잦았지만, 덕분에 옷 한 벌을 만드는 수고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
학생들과 아리우스 카타콤 누에의 식량도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배의 2할 정도만 채우던 생활이었는데, 최근에는 전원이 4할까지는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스바루는 이제 습관이 된 미네와의 찻자리에서 말을 꺼냈다.
“친구로서 부탁이 하나 있어요. 저희의 새로운 교복 디자인을 함께 고민해 주시지 않겠어요?”
<7>
이오모리 미네가 현재 아리우스 분교 교복 디자인의 원형을 만들었고,
아리우스 임시 학생회가 이를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몇 번의 세부적인 변경을 거쳤지만, 아리우스 분교의 교복은 현재까지도 인기가 높다.
그 증거로 ‘키보토스 교복 인기 랭킹’에서 항상 상위권에 위치하며, 최근에는 4년 연속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자신만의 개조 교복을 입는 것이 일상화된 키보토스에서 범용 교복이 이토록 인기를 끄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키보토스 의복 혁명을 일으킨 학원의 시작은 두 소녀의 기묘한 우정이었다.
그녀들과 당시 아리우스 임시 학생회가 남긴 교복, 그리고 선배가 후배의 교복을 직접 지어주는 문화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분명 그녀들의 우정처럼 오래도록 지속될 문화가 되리라.
- 『세일러복과 어설트 라이플: 아리우스의 오늘을 만든 용병과 구호』 중에서 발췌.
“그런데 미네 씨는 왜 그렇게 귀여운 걸 좋아하게 된 거예요?”
“별 계기는 없습니다. 그냥 귀여운 게 좋을 뿐이에요.”
“그렇다고 속옷까지 그렇게 프릴을 잔뜩 달아요?
제가 만들어 놓고 할 소리는 아니지만, 아무도 안 보는데 그렇게 수고를 들일 정도는 아니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몸에 걸치는 건 기분을 고양시켜 주니까요.
게다가 저희 활동은 총알이 빗발치고 불꽃이 튀는 일이 잦잖아요.
혹시나 선…제삼자에게 보일 수도 있을 테고요. 그렇다면 가장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법 아니겠어요?”
“…방금 선생님이라고 하려 했나요?”
이 이후의 대화는 어떤 서적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찻집에서의 비밀은 찻집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 법이니까.
Fin.
댓글 19
존나길어서 포기했던 물건인데 갓맙다
미네개귀여웡
이런식의 이야기도 만들수 있네
또또 트리니티 못된 버릇 못버리고 아리우스꺼인데 트리니티 문화재로 등록하고 있어
ㄹㅇㅋㅋ
ㄹㅇㅋㅋㅋㅋㅋㅋ
귀엽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