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반복재생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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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눈을 뜬다. 정확히는 '뜨려고'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불 꺼진 한밤중의 창고처럼,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속의 동굴처럼, 그저 답답할 정도의 암흑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밝은 대낮에 잠시 눈을 감을 때 느껴지는 은은한 빛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손으로 두 눈을 가리는 것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암흑만이 '보인다'.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인다. 허공을 가르는 듯한 느낌이 이질적이었다. 만화나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침대에서 일어난 주인공이 자기 손을 들어 움직이며 생존을 확인하는 일 따위는, 아무리 생각해도 할 수 없을 것만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손을 조금 더 움직여, 제 손으로 주먹을 쥐어보고, 무언가를 으깨듯이 손가락과 손바닥을 마구 비벼본다. 뽀득거리며 살갗이 비벼지는 소리, 그리고 선명하게 느껴지는 감촉이 '어쨌든 손은 움직인다' 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일어나셨나요, 선생님."
평소와 같이 부드럽지만 기운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목소리.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학생이 스미 세리나임을 알아차리는 데에는 그닥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기-"
선생이 말을 멈춘다.
자신의 눈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점은 자신이 정신을 차리자마자 직감했고, 놀라우리만치 신속하고 냉정하게 확신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전후사정은 지금 자신의 곁에 있을 세리나에게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귀로 들려온 이질감이었다. 몸 전체를 감싸듯 엄습해오는 공포감. 차라리 말이라도 아예 나오지 않았다면 나았겠지. 그렇다면 시체나 다름없는 자신의 신세를 체감하고 체념하면 될 뿐이었으니까.
쓰잘데기없는 희망이라던가, 일말의 가능성이라던가, 그 쪽이 더 끔찍했다.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고, 그 목구멍에서 넘어오는 쓰라린 통증이, 차라리 말을 못 하는 게 나을 지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목을 찢는 듯한 수준까지는 아니었다만, 종이에 손가락을 베는 듯한, 닫히는 문틈에 손을 찌이는 듯한 그런 사소하면서도 짜증나는 고통. 그 고통을 참아가며 말을 해야만 했다.
"목은 조금씩 나아질거에요. 세나 씨와 어떻게든 했으니까......이틀 정도면 목의 통증은 거의-"
"-아니, 그거 말고."
세리나의 말을 끊었다. 사실 따지자면, 말이 나오는 시점부터 목은 그닥 중요치 않게 됐다. 잔뜩 쉬어있는 목소리로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아무리 체념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자신이 더 이상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전후사정은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만 덜 답답할 테니까. 그래야만 억지로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까.
"......앞이 안 보여."
아마 세리나는 상상치도 못할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에게조차 보이기 싫다는 듯 무언가를 간신히 억누르는 그녀의 얼굴은, 아마 굉장히 가슴아프겠지. 항상 밝은 얼굴로 사람들을 돌봐왔을 그녀에겐 잔혹한 일이 되겠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피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일 터이다.
"...폭탄 테러를 당하셨어요. 샬레 사무실에서."
세리나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는다. 우중충한 현실이 그녀를 마음껏 짓누르고 있었다.
"선생님 앞으로 배송된 택배 박스가 폭탄이었어요. 열면 터지는 방식이었고, 옆에 있던 코유키 씨와 유우카 씨는 그나마 나았지만, 선생님께선......"
세리나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지만, 선생 자신이 그 때의 상황을 떠올리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래, 기억났다. 당번인 유우카를 따라 코유키가 당당하게 놀러왔었고, 아침부터 배송된 택배 박스를 코유키가 반짝이는 눈빛으로 궁금해했고, 좀 이따 뜯자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며 코유키가 택배를 뜯었고, 그리고......
아, 하는 외마디의 탄식을, 선생이 내뱉었다.
"...그 아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두 사람의 안위를 물었다.
"유우카 씨는 조금 떨어져 계셨기에, 파편들에 의한 가벼운 찰과상. 코유키 씨는 박스를 연 장본인이지만 다발한 1도 화상들과 부분적 외상들로 경상 수준. 둘 다 운이 좋았어요."
둘 다 많이 다치지는 않았나. 선생이 짧고 가벼운 한숨을 내쉰다. 자신은 제법 만신창이가 된 듯했지만, 그렇게 된 건 자신 혼자였던 모양이다.
"......선생님께선, 다발한 3도 화상과 심각한 외상. 저와 게헨나의 세나 씨가 급하게 수술을 진행하긴 했는데......살아계신 게 기적이에요."
아마 아로나가 지켜주지 않았을까, 선생이 생각한다. 천운으로, 선생은 코유키를 말리려던 그 때 무의식적으로 싯딤의 상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짧은 찰나의 시간에, 슈퍼 아로나는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죽음을 막았을 것이다.
"피부 이식과 안면재건술은 성공. 목의 내외상은 치유 중. 나머지 상처 부위의 신경 회복도 성공. 다 좋았는데......분명 다 좋았는데......"
실패했구나, 눈은.
"......안면 쪽으로 날아든 파편들 중 위치가 안 좋은 것들이 있어서......시신경이, 완전히 손상됐어요. 어떻게든, 해 보려고 했는데......"
폭탄이 코 앞에서 터졌는데 완전실명 정도로 끝났다면 나름 싸게 친 거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해나간다.
뒤늦게서야 덮쳐오는 절망감이 끔찍할만큼 무겁다. 앞으로 두 번 다시 무언가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실감되질 않는다. 그 어떤 이야기보다 무섭고 그 어떤 모습보다 끔찍하다. 차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이 엄습해온다.
......그것은 세리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사람이 이 모양이 되어버렸다는 것. 의학에 몸담았음에도 그 사람을 완치시킬 수 없다는 것. 시신경의 완전손상은 분명 그 어느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것임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게 끊없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매순간 선생 곁에 붙어 있었다면? 막을 수 없었다면, 사고 직후 곧바로 응급처치에 나섰다면? 1초라도 더 빨리 손을 쓸 수 있었다면? 하다못해 도움을 청하는 것이 1초라도, 아니, 단 찰나의 순간만큼이라도 빨랐다면?
"...의식을 잃으신 동안 엔지니어부와도 이야기해봤어요. 의안이라도 달아서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느냐고. 그렇지만......그렇지만......"
"-그것도 안되는구나."
세리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걸 볼 수 없음에도, 주변을 덮친 무거운 침묵에 선생은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그걸 왜 세리나가 사과하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선생이 손을 뻗는다. 이윽고 손 끝으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과, 그 끝에 닿는 자그마한 물기. 세리나는 자신을 자책하며 울고 있는 모양이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선생은 자신의 본분을 다해야 했다. 자신은 어른이고, 자신의 것이 아닌 잘못을 빌며 울어버리는 아이가 있다면, 그는 그것을 막아야 한다.
"...세리나 덕분에 이렇게 살아있잖니.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두 번 다시 죄송하다는 말 하지 말아주렴. 그게 선생님을 도와주는 거란다."
손 끝의 감촉이 움직인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고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세나도, 밖에 있니?"
"......네."
"세나에게도 고맙다고 해야지. 미안하지만 세나 잠깐만 불러줄래?"
네, 라며, 세리나가 대답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감정을 억누르는 그 목소리는 가만히 듣고 있기 어려웠다. 그녀의 발소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선생 자신도 어딘가에 던져져버린 돌멩이가 되어버리는 느낌이었다.
자신은 키보토스의 학생들과는 다른 외부인. 모든 이들이 총기를 마치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과는 달리, 눈먼 총탄 한 발로 생명이 좌지우지되는 허약한 존재. 그렇기에 여기저기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자신에게 학생들은 진심어린 충고와 우려를 표했고, 그 자신도 나름 주의한답시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다.
폭탄 테러. 정상적인 방법으로 그를 해코지하는 것이 불가능이라 판단한 누군가가, 은밀하고 화려하게 그를 해치기 위해 사용한 수단. 그런 수준의 일은 없을 거라고, 설마설마했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지금 이렇게 간신히 목숨만을 부지한 채로 살아남았다.
심지어, 자신의 곁에 있던 학생들마저도 위험을 겪었다. 그녀들이라면 그런 폭탄에 직격당한다 한들 목숨을 잃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그의 학생들도 위험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무섭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그 감정을, 칠흑과도 같이 캄캄한 어딘가에서 느꼈다.
자신의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각오는 이미 되어 있다. 그런 각오가 없었다면 결단코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다. 허나, 선택의 대가로 학생들을 잃게 된다면? 고통과는 함께 해선 안 되는 학생들에게 고통이 닥치게 된다면?
'키보토스의 교사' 라는 직책에, '키보토스의 어른' 이라는 책임에 빠져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가? 자신의 안일한 책임감에 빠져 학생들을 위험한 곳으로 밀친 것은 아닌가?
나는, 선생으로서 부족한 게 아닌가?
"......실례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안된다. 듣기만 해도 위태로운 세나의 목소리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이끌었다.
"...세나구나. 이 쪽으로 오겠니?"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진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의 발소리만 듣고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그녀가 얼마나 자책하고 있는지.
세나의 발소리가 이윽고 바로 옆에서 멈춘다.
-위태로운 세나를,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
"......선생님."
히무로 세나는 이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현실이 싫다.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의 쓰라린 숨소리가 싫었고,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수많은 피부조각의 그 얼굴이 싫었고, 붕대로 칭칭 감싸진 그의 눈가가 싫었다.
그의 발치 쓰레기통에 들어있는 수많은 수액 포장지들이 싫었고, 몇 번 갈아입혔음에도 검붉게 얼룩진 그 환자복이 싫었다.
그렇게 해서야 그를 살릴 수 있었던 자신이 싫었다.
"......선생님께서 어떤 모습인지, 알고 계십니까?"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이질적인 질감의 그 어색한 생기가, 제 것이 아닌 그 거짓된 피부가 고개를 저었다.
"...에덴 조약 때, 선생님께서 총상을 입으셨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분명 두 번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던 기억이었죠. 일부러 그 때 일을 언급하지 않으면서......필사적으로 살아왔습니다."
수없이 많은 부상자들을 치료해왔다. 총기로 인해 가벼운 상처를 입은 부상자들을 볼 때마다 선생이 떠올랐다. 복부에서 피를 쏟아내며 죽어가던 그 모습은 악몽이었다. 절대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를 필사적으로 살려낸 세나 본인이라 하더라도, 그건 성취감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그건 악몽이요, 저주고, 트라우마다. 두 번 다시 선생에게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될 일이었다.
그런 일이 기어코 다시 한 번 벌어졌을 뿐이다.
"......이번에 숱하게 그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 때가 더 나았습니다. 선생님을 죽게 하지 않겠다며 매달렸던 그 때가 더 나았습니다."
그 때도, 이번에도, 히무로 세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악착같이 메스를 잡았다.
유일하게 달랐던 건, 그녀의 머릿속이었다.
"...이번엔, 제발 선생님을 살려달라고, 그렇게 애원하다시피 했으니까요."
의사로서 신에게 기도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기력하며 간절한 것인가. 자신의 손이지만, 그 손을 신에게 의지해 수술을 집도하는 것. 세나는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다. 끊임없는 가르침. 선배들과 교수자들로부터 질릴 만큼 들었던 순간들.
결단코 그런 순간은 없을 것이라고, 의학에 몸담는 순간부터 해왔을 결심이었다. 기어코 자신에게 맡겨진 부상자들을 죽게 두지 않겠다고, 자신의 힘으로 반드시 그들을 구하겠다고 결심하고 맹세했다.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도 선생을 주인공으로. 제발 그를 앗아가지 말아달라고, 제발 그를 살려달라고, 수술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빌고 빌고 또 빌었다. 그것이 비참한 일이라고 되뇌이고 되뇌었던 히무로 세나 자신이 직접 기도하고 기도했다. 신이 눈 앞에 있다면 그 앞에 엎드려서 애걸복걸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로 바랬다.
......선생은 살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히나 부장이 종종 농담을 던지곤 했습니다. 맨날 시체 타령하는 사람이, 정작 진짜 시체를 본 적은 없다고."
머릿속에서, 거진 다 죽어가던 선생의 모습이 떠나가질 않는다. 눈을 감아도, 불을 꺼도, 손으로 눈을 가려도, 자신의 머리를 때리고 또 때려도.
그는 시체나 다름없었다.
"......쓸데없는 소리가 길었습니다. 선생님의 몸상태는 그 정도입니다."
기적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그렇게 환자의 상태에 대한 통보를 마무리한다.
"앞은......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겁니다."
"고마워."
눈을 붕대로 감싼 환자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건 세나에게 있어 너무나도 뼈아프고 가슴저린 고문이었다.
"......감사를 표하지 마십시오. 저는 선생님을 만신창이로 만들었습니다."
"세나가 아니었으면 죽었겠지. 고마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이 감사는 받을 수 없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이렇게 되느니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할 거라고 여겼다. 제 손으로 살린 환자가 그런 생각을 품을거라 여긴 자신은 돌팔이다. 가짜다. 죽지 못해 살려놓은 불구자다.
"그 부탁은 안돼. 난 세나에게 감사를 표해야 해."
"......제발, 선생님. 전 선생님에게 감사받아선 안되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눈도, 피부도, 팔다리도 다 제가 그렇게 억지로 만들어놓은 겁니다. 선생님을 잃고 싶지 않다고, 제가 떼를 쓴 결과물입니다. 그러니까......"
선생에겐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받았다. 그런 선생을 이렇게 어거지로 살려놨다. 세나 스스로가 이건 살아있는게 아니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는 만신창이다. 말이 좋아 피부 이식이요, 안면재건이지, 닥치는대로 온갖 피부와 세포 조직을 붙이고 이식해 껍데기를 만들어놨다. 이걸 살렸다고는 볼 수 없다고,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자책하고 힐난했다. 차라리 선생이 자신을 원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억지를 부리는 자신을 질책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발,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잔뜩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는 선생에게 그렇게 애원했다.
세나의 그 울먹이는 간절함은 선생의 가슴에도 사무쳤다. 뭔가를 끄집어내고 싶은 듯한 답답함과 먹먹함이 몸 안을 마구 때리는 듯 괴로웠다. 보이지 않는 앞처럼,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화도 났다.
언제나 침착하고 냉정한 세나가, 그녀 자신을 끊임없이 힐난하며 울먹이고 절망한다. 그 정도로 자신의 몸이 만신창이라는 것도 실감난다. 그런 자신을 기어코 살려낸 그녀가 경이로우면서도 안타깝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감정들이 밀려와,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무기력한 자신을 휩쓸어댄다.
짜증난다. 허망하다. 고통스럽다. 슬프다. 괴롭다. 안쓰럽다. 불안하다. 막막하다. 울고싶다. 절망스럽다. 화가 난다. 후회된다.
아프다.
"......죄송합니다......저는, 저는......이 이상은......할 수가......없었......!"
세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고, 선생은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그 누구도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 그 어느 날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 *
세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한숨이었는데, 내뱉고 나니 짧고 둔탁한 외마디 탄식이 되어버렸다. 병실 문 앞에 주저앉은 그 두 다리는, 그 탄식을 이겨내기엔 너무나도 허약했다.
히무로 세나가 수술할 때 보였던 눈빛은, 그 눈빛은 간절함이었다.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듯한 그 눈빛은, 반드시 해내야한다는 결의보단, 간절히 무언가를 비는 듯한 안쓰러운 절박함이었다.
그 절박함은 아마도 선생의 목숨을 향한 기도였을 것이다. 단 한 번도 그런 눈빛을 하지 않았을 그녀가 그럴 정도로, 그 수술은 간절하고 위험했다.
......세리나 자신은, 끊임없이 자신을 저주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세리나' 라고 끊임없이 강조했다. 선생이 필요로 한다면 항상 그의 곁에 있었다. 약간 꺼림칙한 방법을 써서라도, 세리나 자신은 위태로운 선생을 지키고 싶었다.
정작 그런 선생이 정말로 죽음의 문턱에 있었을 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두 번이나.
외과수술 쪽은 세나가 전문가라고 할 지라도, 세리나는 그저 그 옆에서 그런 그녀를 보조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세나가 간절히 기도했다손 하지만, 세리나 자신은 그런 기도하는 이를 돕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간단한 치료라면 몰라도, 그런 거대한 수술에 손을 댔다간 사태가 악화될지도 모를 터였다.
그렇다면 뭐가 구호기사단이고 뭐가 의료인인가. 정작 소중한 이가 치명상을 입었을 때 손을 쓸 수가 없는데.
(......모르겠어. 다 필요없어.)
끔찍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반쯤 넝마조각이 된 얼굴과, 이대로 진짜 죽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출혈량. 세나에게 연락해 앰뷸런스를 부르고, 가까운 의료기관으로 급행하고, 그녀를 도와 수술실에 들어가던 매 순간순간이 고통의 연속이었다.
......이젠 모르겠어. 뭐가 어찌되더라도 좋아.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세리나 역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였다.
"----세리나 씨!!! 선생님, 선생님은......!"
세리나가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다.
하야세 유우카. 우시오 노아. 그리고 쿠로사키 코유키. 그녀들이 어떻게?
"......아, 유우카 씨. 여긴 어떻게...?"
"세리나 씨가 모모톡 보냈잖아요! 선생님 깨어나셨다고!!"
숨을 고르는 유우카의 일갈에 세리나의 얼굴이 벙 찐다. 그제서야 기억났다. 세나를 병실로 들여보낸 뒤, 일면식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선생이 깨어났다는 내용의 모모톡을 보내고 주저앉아버렸지.
......어라. 왜 그랬더라. 자신의 속마음도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자신도 정상은 아니라고, 세리나가 자신에게 조소를 보낸다.
"...맞아요. 선생님이 깨어나셨어요."
"어, 어어, 어떻게 됐죠? 몸 상태는요?!"
세리나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이번에도 한숨이었던 것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탄식이 된다.
세 사람의 가슴을 후벼팔 정도의 탄식을 뒤로 한 채, 세리나는 메말라버린 목소리로 선생의 비보를 전한다.
"......두 번 다시는, 앞을 보지 못 하실 것 같아요."
"무슨, 무슨 그런......"
유우카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떨리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그저 거칠어진 숨소리만이 섞여 있었다.
유우카가 다음 마디를 내뱉을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기 시작한다. 그녀 역시 이 상황을 받아들이긴 어려운 것이리라.
"그럴, 그럴 리가 없어요.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세나 씨랑 세리나 씨는 최고의 의사잖아요!! 어떻게든......어떻게든---"
"---의사 아니에요, 저."
세리나의 조소 섞인 웃음 소리가 유우카의 말을 툭 끊어버렸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차갑게, 세리나는 모든 것을 비관했다.
"......치, 소중한 선생님도 못 지킨 제가, 의사는 무슨......구호는 또 뭐고......"
"아니, 아니, 아니...그게 무슨 소리에요. 우린 세리나 씨랑 세나 씨 말고 믿을 사람이 없다구요?! 제발 똑바로 좀 말해요, 사람 불안하게 만들지 말고!!!"
유우카는 답답한 지 언성을 높인다. 세리나의 처음 보는 그런 모습에 화도 나고, 이 모든 거짓말같은 일들이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아 덜컥 겁도 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더욱 이성잃은 사람마냥 목청을 높이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목소리가 작아지는 그 순간, 이 세상 어디에서도 겪어보지 못한 공포가 자신을 덮쳐버릴 것 같아서.
자신이 당번일 때 선생이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평생 자신을 괴롭힐 현실이 진짜 사실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안돼요. 전 더 이상은......"
"뭔데요, 그 태도!!! 평소랑 다르잖아요!!! 제발 어떻게든...어떻게든...!!!"
"유우카 쨩, 제발 그만! 세리나 씨도 지금은......!"
유우카가 공포로 점차 이성을 잃어가고, 이윽고는 세리나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세우고, 그런 유우카를 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뜯어말리려 달려든다.
"놔 봐, 노아!!! 세리나 씨, 세리나 씨 아니면 선생님은 진짜......두 번 다시는, 두 번 다시는......!"
"그만 해요!! 세리나 씨도 최선을 다했어요!! 유우카 쨩이 이러면 저도 힘들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발---"
"할 수 있잖아, 세리나 씨?! 제발!!! 할 수 있다고 말해!!! 지금까지 잘 해왔잖아?! 응?! 응?!"
"유우카 쨩, 부탁이야, 제발!! 제발 그만!!!"
코유키는 이 모든 현실이 한 편의 영화같았다. 병실을 배경으로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간호사. 울부짖으며 그런 간호사의 멱살을 잡는 선배 유우카. 그런 유우카를 처음 보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뜯어 말리는 노아.
이 모든 것들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흘러간다.
자신이 그 상자를 열었다. 모든 일의 시작은 자기 자신이다.
자신이 상자를 열지 않았다면 선생이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하다못해 상자를 선생이 다가오기 전에 열었다면, 선생이 이렇게 크게 다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생을 놀리는 데에 정신팔리지 않고 순수하게 그 상자에 대한 호기심에 넘어갔다면, 그저 자신만 약간 다치고 마는 수준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냐, 아냐......이건, 이건......"
......자신 때문에?
"...아,"
코유키가 스르륵, 넘어지다시피 주저앉아버린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저 때문에, 저 때문에......제가, 제가 그 상자를......죄송해요......"
자신 때문에, 선생이 두 눈을 잃었다?
자신 때문에, 선생이 두 번 다시는 앞을 볼 수 없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가만히 있는게, 도와드리는, 건데, 죄송, 죄송해요......죄송해요......!"
코유키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차마 병실 문으로 달려들지 못하고, 그 옆의 벽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들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세리나의 멱살을 잡던 유우카도, 힘이 빠져 그대로 흔들거리던 세리나도, 유우카를 필사적으로 뜯어말리던 노아도, 문득 정신이 들어 코유키 쪽을 바라보면, 그녀는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미친듯이 벽으로 달려들고 있었고, 두 손이 시뻘개질 정도로 벽을 내려치고 있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코유키, 뭐 하는 거야--!!!"
"죄송해요!!! 저 때문에 선생님이!!!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코유키는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유우카도, 세리나도 그제서야 코유키를 벽에서 떼어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오직 노아만이, 그 자리 그대로 얼어붙어버렸다.
"......어? 어어, 아......어?"
이성을 잃고 달려들던 유우카도, 모든 걸 잃어버린 듯 죽은 눈을 하던 세리나도, 뭔가에 홀린 듯 절규하던 코유키도, 모두 노아의 기억에 너무나도 강렬하고 선명하게 기록된다.
그 기록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쓰라려서, 스스로의 눈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선명하게, 그동안의 세 사람에 대해 남아있던 것들을 덮어씌워버렸다.
그리고 병실 문의 창문 너머로 힐끗 보였던 선생의 모습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너무나도 확실하게 기억에 남아버렸다.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선생과는 달리, 이 모든 것들을 빠짐없이 기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겹쳐 보였다.
......이 모든 것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아, 아아악......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아가 절규한다. 자신의 머릿속에 새겨지는 기억들 중, 그 어느 것도 이것보다 강렬하지 않았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기억들이 아주 많지만, 이 모든 기억들 앞에 지금 이 순간이 그려져버렸다.
수천 페이지나 되는 책의 커버처럼, 그 무엇보다 강렬하게 남을 기억이, 이 따위의 끔찍한 기억이라는 것을, 노아 그녀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겨낼 수가 없다. 이딴 비참하고 처참한 현실을.
유우카가 코유키를 세리나에게 맡기고, 자신은 노아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감싼다.
저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눈물에는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제어할 수 없게 폭주하는 기계같은 이 상황에 대한 막연한 공포도, 당번으로서 선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고통도, 연모하는 이의 처참한 꼴에 대한 서러움도 모두 들어 있었다.
...아마 그 어느 누구라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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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평소처럼 단편으로 쓰려고 했는데 여러 학생들 써 보고 싶어서 일단 1편으로 올림
아무리 생각해도 피폐 쓰는게 제일 재밌는 것 같다
요새 일이 바빠서 글 쓸 시간이 많이 안 나긴 하는데 그래도 짬짬이 한번 써볼게
브금 내가 되게 좋아하는 브금임
해답도 없이 밑도끝도 없이 내려가는 피폐 상황에 되게 어울리더라
아마 이번 이야기 공통브금으로 써도 될 것 같음
소재 추천 언제나 받고 있으니까 많이 해줘
내가 적당히 꼴리는대로 고쳐서 능력껏 써볼게
댓글 62




개맛있다 제발 더 써줘 더 많이 써줘

이야 그냥 너무 맛있어요 미식입니다 담편도 기대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