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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루 선배......"
미약하게 떨리는 목소리.
하야세 유우카의 눈길 끝에 있는 그 사람.
미카모 네루는 문을 열어젖힌 바로 그 자리에 서서, 선생을 바라보는 그대로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휠체어로 옮겨 앉은 선생.
착잡한 표정으로 그를 돕던 유우카와 노아.
이동편 호출을 위해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들던 린.
네루의 눈동자에 담긴 그 순간은, 제 자신의 입을 일순간 다물어버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
외마디 탄식에 가까운 한숨.
고약하기까지 한 그 장면이, 기분나쁜 몰래카메라로 느껴진다.
"......이게 니가 말한 그 상황이냐?"
분노를 간신히 꾹꾹 눌러담아,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한 목소리.
시선을 선생에게 고정한 채로, 네루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휠체어가 없으면 움직이지도 못해?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가는 것조차 버거운 거냐?"
"...네루 선배, 일단 진정을-"
"-진정? 하, 진정. 진정하라는 말이지? 지금 이걸 보고?"
일단 상황을 가라앉혀보려던 유우카의 말은...아무래도 전혀 효과가 없던 모양이다.
"뭔데? 대체 뭐길래 선생이 이렇게 된 건데? 아니, 그건 둘째치고, 니들은 내가 이걸 왜 이딴 식으로 알게 했냐?"
선생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
그거야 전화로 아주 대충이나마 전해 들었다.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생겼으리란 것은 금방 유추할 수 있었다.
미카모 네루가 진정 화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선배야 작전 중이었으니까, 소식을 당장 전하기가 힘들어서--"
"--니들이라면 작전 중이었어도 얼마든지 연락할 수 있었겠지. 아니면 복귀하고 나서 곧바로 전말을 파악하게끔 준비할 수 있었거나. 근데도 니들은 아무 것도 안 했지. 니네 꼬맹이가 니 휴대폰을 열어보지 않았다면, 나는 선생이 이렇게 된 것도 모르고 깡통이랑 오락실 갈 생각만 할 뻔했는데? 멍청이같이?"
배신감.
지금 미카모 네루를 휘감고 있는 단 하나의 감정.
같은 학교의 선후배 관계이면서, 세미나의 회계와 C&C의 부장이기에 얼굴도 자주 맞대고, 처리하기 껄끄러운 일들마저도 순순히 해치워주며, 나름 꽤 살갑게 이야기하는, 그러한 제 자신과 유우카의 관계는 나름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어려운 일은 나름대로 상담도 해 줄 수 있다고 여겼는데, 정작 그녀는 선생과 관련된 중대한 일을 언질조차 주지 않았다.
당장 죽고 사는 걸 떠나, 선생이 휠체어 신세가 됐다는 걸 이딴 식으로 알고 싶지는 않았다.
이런저런 일이 있다고.
선배들도 힘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그렇게 언질이라도, 하다못해 복귀한 자신들이 바로 소식을 접할 수 있게라도 해 줬다면.
단지 그것 뿐이었어도 좋았다.
이런 충격적인 모습을 이딴 식으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누구 하나 죽여버리겠다며 길길이 날뛰지 않고 있는 것이, 미카모 네루가 얼마나 초인적인 절제력을 갖고 있는가 증명하는 꼴이었다.
"그만해. 선생님 앞에서 보일 모습은 아냐."
소라사키 히나는, 슬며시 분노를 드러내는 네루에게 자중을 권한다.
"뭐야, 게헨나냐? 잠깐 빠져 있어. 말 안 끝났으니까."
"...뭐?"
히나의 미간이 움찔거리는 건 아무 상관 없다는 듯, 네루는 간단히 일갈하더니 다시금 유우카와 노아 쪽을 바라본다.
"게헨나 선도부장도 아는 걸 정작 나한테는 말도 안 했다는 거구만. 같은 학교가 맞긴 한 건지 몰라?"
"......네루 선배, 그건 그러니까--"
"--선생이 저 꼴이 된 것도 성질뻗치는데, 난 그 이상으로 니들한테 배신감이 든다고. 어떤 사정이 있었건간에, 니들은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 않냐? 니들이 사람 새끼들이라면, 내가 선생이 저 꼴이 된 것도 모르고 히히덕거리지는 않게 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 그건--"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네루 씨."
네루의 분노에 덤덤한 어투로 끼어든 건 나나가미 린이었다.
"...총학생회냐? 넌 뭘 알고는 그런 말을 하는거냐?"
"글쎄요, 모릅니다. 당신에게 선생님이 어떤 존재이기에 이렇게까지 격분하는지."
"그럼 잠자코 빠져 있지? 지금 난 이 상황이--"
"--하지만,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린은 다시 한 번 네루의 말허리를 끊었다.
"......뭐?"
"한 가지는 분명히 압니다. 이렇게 화만 낸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걸, 당신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요."
지당한 말이었다.
당장 여기서 배신감 운운하며 울분을 토해봤자, 눈 앞에 닥쳐 온 이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건 네루 자신 역시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야. 하나만 물어보자."
헌데, 그렇게 이성적으로만 행동할 수 있다면, 그게 사람이겠는가.
"너는 저걸 언제 알았냐?"
네루가 턱 끝으로 선생 쪽을 가리키며 묻는다.
"한...3일 되었을까요? 저도 이 일의 전말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까요."
"...전말. 그래, 전말이라."
네루가 돌연 피식 실소했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그 어이없는 웃음에, 이 곳의 모두가 긴장 반 의아함 반으로 네루의 얼굴을 쳐다본다.
"...내가 지금 들은 정보는 선생이 죽을 거라는 단 한마디고, 내가 지금 눈으로 본 건 휠체어에 앉은 선생이다. 우리 학교 학생회라는 놈들은 나한테 이 일의 전말도 얘기 안 해 줬고. 댁이 전말을 깨닫고 3일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뭐하고 했는지 몰라도, 나는 지금 댁의 3일간을 한 번에 압축해서 느끼고 있다고. 이해되냐?"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선생이 불구가 되었다는, 죽게 될 거라는 소식은 처음 듣는 이에겐 기분나쁜 농담처럼 들릴만한, 쉬이 믿기 힘든 소식이었다.
린도, 유우카도, 노아도.
선생이 휠체어에 앉기 전부터 그 조짐을 깨닫고, 설명을 듣고, 불안이라는 이름의 대비가 되었기에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히나도, 호시노도.
비록 휠체어에 앉은 선생을 마주하게 되었지만, '비상대책위원회' 라는 무게감에 몸을 싣고 린의 설명을 들었기에, 제 나름대로 상황을 납득해나갈 준비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네루만은 예외였다.
선생에게 조짐이 찾아오고, 변고가 있으리란 공지가 뜨고, 정말 다리부터 망가져버리고, 그 대책을 논의하는 과정까지.
자의던 타의던, 네루는 그 어느 순간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심지어 자신의 학생회 간부, 그것도 자신의 임무를 의뢰하는 후배에게 듣게 된 말은 '선생이 죽을 것이다' 라는 단 한 마디.
"진정 좋아하네. 야, 내가 니들 하수인이냐? 이러라면 이러고 저러라면 저러게? 적어도 니들이 나한테 지켜야 하는 예의라는 게 있는 거 아니야? 다짜고짜 선생이 죽는다더니, 여기 와서 그 한 마디 했다고 진정하고 얘기를 들어봐라? 사과가 먼저 아니냐?"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겠지.
유우카도, 노아도,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닐 것이라고.
저들도 필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머리는 이해할지라도, 가슴이 납득하지 못 할 뿐.
"......선생에게도 실망했어. 엄청."
네루는 선생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떤 사정인지 들어봐야 알겠고, 내가 이 소식을 몰랐던 걸 알았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선생이라면 이런 일은 미리 알려줄 거라고 생각했어. 심지어 쟤가 나랑 통화한 그 이후라도 연락해 줄 거라고 믿었어. 이건......이건 너무 한 거 아니야?"
배신감. 서운함.
언성이 높아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름에도, 그 목소리 한가득 묻어나오는 감정.
네루는 선생을 향해, 이제껏 토해낸 적 없던 감정을 뱉어내고 있었다.
"...응. 미안, 네루. 그치만 이건--"
"--알아. 안다고.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말.
아니, 어쩌면 지금은 듣기 싫은 말.
"선생이 날 빼놓으려고 했다는 게 아니란 거 알아. 내가 여기서 이렇게 쫑알거려봐야 아무 의미 없다는 것도 알아."
그리고 네루는 다시 한 번 유우카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 끝에는 노아도, 린도, 히나와 호시노도 담겨 있었다.
"니들이 무언가 해 보려 한다는 것도 알아. 선생이 바라는 것도 있겠고, 니들 나름대로 대책을 뽑아내고 있겠지. 그러니까......이건, 그...뭐냐, 그거야. 투정이라던지 항의라던지. 내가 그동안 니들한테 한 적 없던 투덜거림이라고."
"네루 선배......"
유우카가 미안함 반, 안타까움 반인 눈동자로 네루를 바라본다.
C&C 부장, 아니, 미카모 네루가 여지껏 단 한 번도 내뱉어 본 적 없는 깊은 분노를 내뱉고 있다는 게, 제 자신의 가슴을 인정사정없이 후벼파는 느낌이었다.
"나 강한 거 맞아. 근접전으로는 따라 올 놈이 없어. 생각도 깊진 못해서 무작정 돌격이야.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말이다."
네루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라고 이런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잖냐."
나이. 직책. 선입견.
그 어떤 것도, 그 사람의 감정을 도매금할 잣대는 되지 못하는 법이다.
차오르던 분노가, 수증기처럼 피어올라 사라져버린다.
거품을 내며 끓어오르던 냄비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처럼, 허무할 정도로 김이 빠져버리고 말아, 한 마디의 넋두리를 끝으로 진이 다 빠져버린 모양이다.
"......하. 모르겠다. 지금 들을 기분이 못 되네."
네루는 그렇게 말하며, 더 따져물을 생각도 없어졌다는 듯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래도 선생의 경위에 대해 얘기는 들어봐야 하지 않아? 미카모 네루."
소라사키 히나가 넌지시 말을 던진다.
선생 앞에서 추태를 보인다는 것이 심히 꺼려지는 참이었으나, 네루가 내뱉었던 말에서 그녀의 상황을 어느 정도 엿봤던 모양이다.
차오르는 그녀의 분노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기에, 히나 나름의 중재안을 펼쳐보인 것이겠지.
"당신이 어떤 마음인지도 알겠어. 그래도 상황이 상황이니까, 직접 들어보고 판단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
"그 판단이 지금 안 돼! 안 듣겠다는 건 아니지만, 나도 내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댁들이 어떤 말을 하는지는 알겠으니까, 오해는 하지 말라고."
보기보다 모멸차지 못해서, '내가 이만큼 화가 났다' 라며 뒤집어엎지도 못하고, '그래도 무슨 사정이 있긴 했겠지' 따위의 생각을 품고 마는 것이었다.
허나 자신이 정상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 할 정도로 화가 났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기에, 머리를 식힐 시간 또한 필요했다.
선생의 사정도, 일의 전후사정도, 유우카의 입장도.
그 모든 것들을 듣긴 해야 했으나, 지금 들어봤자 제대로 된 판단이 어려울 거란 생각이었다.
"...머리 좀 식히고 전화할게. 그 때는 받아라."
"응. 미안해......선배."
"......하아. 됐다."
들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힘빠진 발걸음으로, 네루는 천천히 방을 떠나고 말았다.
방에 남은 사람들이 한동안 아무 말도 꺼내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선생님께, 이 질문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나나가미 린이 침묵을 깨며 선생을 바라본다.
"...이 사실, 공표는 언제 하실 겁니까?"
어찌 보면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었다.
비대위에 참석할 정도로 명망있는 인물들 뿐만이 아닌, 수많은 평범한 학생들도 선생을 아끼고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미카모 네루가 보였던 그 강렬한 감정들을, 그 학생들이라고 가지지 않을 리는 없었으니까.
"...해야지. 너무 늦게 공표했다간 오히려 혼란만 찾아올 테니."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시기를 최대한 앞당겨야 할 겁니다. 각 학원들 역시 상황을 보고 움직여야 할 테니까요."
"...그건 총학생회장 대행의 말이 맞아."
옆에 있던 히나도 린의 말에 동의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뒤집어지는게 게헨나의 일상이거늘, '선생의 죽음' 이라는 대사건이 촉박하게 공표된다면......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픈 모양이었다.
"우리가 공표 안 한다고 해도, 소문 금방 퍼져서 아는 건 시간 문제일걸?"
"네. 호시노 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소문이 날 겁니다. 그러느니, 저희 쪽에서 먼저 공표를 해 버리는 게 향후의 대응에 있어 수월할 테죠."
호시노의 의견에 린이 동의한다.
어쨌든 선생은 키보토스의 최중요 인물이고 여기저기 엮인 것도 많으니만큼, 그의 변고가 금방 퍼져나갈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랄까...대행은, 생각보다 침착하구나."
"......네?"
유우카의 중얼거림에, 린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 그냥. 난 지금도 머리가 아픈데, 대행은 이것저것 잘도 신경쓰는구나 싶어서."
"......칭찬으로 알아듣겠습니다. 착잡한 건 착잡한 거고, 어쨌든 저희는 책임질 직무가 있는 사람들이니까요. 할 일은 해야지 않습니까."
린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언제나 행정업무 해결하기에도 정신없고, 총학생회장과는 180도 다르게 각 자치구의 일은 자치구에서 알아서 하라며 털어버리던 모습과 잘 매치되지 않는 모양인지, 유우카는 그런 그녀를 영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게~ 이 정도로 강단있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호시노의 말에 히나 역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 그녀가 색채 침공과 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썩 신뢰받지 못해온 것은, 총학생회장 실종 이후 총학생회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남아 있었던 탓이겠지.
모두의 그러한 눈빛을 뒤로 한 채, 나나가미 린이 선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제 자신의 질문에 대한 응답 촉구였고, 그것을 곧 나머지 학생들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결정권자인 선생을 향해 시선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공표할 수는 없어. 적어도......앞으로의 일을 계획할 청사진이 필요해."
선생이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일 회의 자리가 끝나면 공표할 생각이야."
"......내일......"
타카나시 호시노는, 덜컥 선고된 공표일을 중얼거리며 복기한다.
내일.
어찌 보면 24시간도 남지 않은, 지금 당장.
"어쨌든 내일 회의에서 앞으로의 청사진을 어느 정도는 그려놓아야 해. 오늘은 운 좋게도 몸이 괜찮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으니까. 의논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잖아?"
"길어지더라도, 내일의 회의는 어느 정도 성과를 내지 않으면 안되겠네요."
휠체어 뒤쪽의 우시오 노아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본격적인 실무와 현안이 논의될 터인 만큼, 생각보다 지지부진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선생은 내일까지는 어떻게든 한 걸음을 더 내딛고자 하는 모양이다.
"......린. 미안한데, 교통편은 준비됐을까?"
"아아, 네. 방금 샬레 앞에 도착했다는 모양입니다."
선생의 물음에 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번번히 미안해. 공표하기 전까지는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공표하고 나면 어떻게든 다닐 테니까, 조금만 고생해 줘."
"저희야...오히려 선생님이 교통편을 요청하시는 쪽이 더 낫습니다. 아무래도 그게 훨씬 안전한 측면이 있으니..."
린이 제 나름의 아쉬움을 표해보이나, 선생의 고집을 꺾기 쉽지 않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트리니티 측에서도 준비하겠다는 답변이 왔으니, 결정되시면 곧바로 출발하실 수 있습니다."
"응. 늦어서 좋을 것도 없으니, 출발해볼까."
선생이 살그머니 웃어주었다. 어쨌든 노아를 대신해 트리니티까지 동행할 그녀였으니, 너무 마음을 무겁게 만들 것까지는 없었다.
"...나도 돌아가볼게, 선생님."
자신의 휴대폰을 슬쩍 확인했던 히나도 복귀 의사를 밝힌다.
"선생님도 일이 있는 모양이고, 나도 예상치 못한 연락이 와서 말이야."
"그럼 나도 돌아가볼까~ 어쨌든 선생을 만나봤으니 목적은 이뤘잖아?"
네루도 가 버리고, 선생도 간다고 하고, 히나도 돌아간다고 하고.
아무래도, 호시노 역시 이만 빠져주는 쪽이 좋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우리도 돌아가죠, 유우카 쨩. 선생님과는 트리니티 쪽 만나는 겸 대행이 동행한다는 모양이니까..."
"......그러자. 우리도 여러모로 할 게 많아."
유우카와 노아도, 이 참에 돌아가서 이것저것 해결하려는 것이겠지. 아침부터 이어졌던 샬레 회동이 오후나 되어서야 마무리되는 꼴이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선생님. 대행,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 줘. 바로 넘어갈테니까."
"네. 특이사항이 생기면 연락드리죠."
유우카 뿐만이 아니었다.
이 곳에 있는 모두가, 성치 않은 몸으로 꼭 트리니티를 가 봐야겠다는 그를 염려하고 있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해도, 그 눈빛에서 걱정을 지울 수 없다는 건...구태여 이야기할 필요 없으리라.
선생은 그런 그녀들에게 애써 미소지어보고는, 짧디막한 숨고르기와 함께 린을 올려다본다.
"그럼 갈까, 린 쨩."
"......네. 모시겠습니다."
* *
"......이상해요!"
돌연 터진 아지타니 히후미의 단말마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시모에 코하루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까, 까까,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아, 죄송해요.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닌데......"
정말 생각조차 못 할 정도로 고심에 빠져있던 것인지, 히후미는 진심어린 미안한 얼굴로 코하루에게 사과한다.
이렇게까지 기죽을 필요는 없는데?
덕분에 오히려 머쓱해진 쪽은 코하루였다.
"...왜? 뭐가 이상하길래 그래?"
얼른 주제를 바꿔버리는 게 낫겠다 싶었는지, 단말마의 원인을 묻는 쪽을 고른다.
"그......선생님 때문에요."
"선생님...?"
뜬금없이 꺼내어진 그 이름에, 코하루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선생님이 왜?"
"사실 저, 어제 샬레 당번이었거든요."
"어제?"
히후미가 나지막히 털어놓은 그 사실에, 코하루가 문득 드는 위화감을 가득 품은 채 반문했다.
"어제면...히후미, 우리랑 하루종일 부실에 같이 있었잖아. 샬레 안 갔어?"
"안 갔다고 할까...못 갔다고 할까..."
"못 갔다고?"
이야기하면 할 수록 늘어나는 의문점에, 코하루의 미간이 저도 모르게 찌푸려졌다.
"네...뭐라고 할까, 샬레의 사정으로 당분간 당번 지정을 중단한다고 연락받았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싶어서 그냥 부실에 있던 건데......"
"...뭐야, 갑자기?"
"선생님도 특별한 사정이 있었겠지. 원래 작전이라는 것도 사소한 하나만으로도 변동이 가해지는 법이야. 샬레라고 계획대로만 된다는 법은 없어."
새로 산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시라스 아즈사가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히후미는 나기사의 총애를 받고 있잖아. 최고위 간부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낫지 않겠어?"
"나기사 님이요? 아우우......그게 또 말인데요..."
"......이미 물어봤구나."
최고 상층부에게 직접 물어보라는, 아즈사 나름대로 반쯤 농담이랍시고 던진 말.
허나 히후미는 이미 그 방책을 실행에 옮겼던 모양이고, 아즈사는 그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웠던 듯하다.
...뭐, 미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의 코하루로 보면, 그 쪽 생각이라고 딱히 다른 건 아닐 것이다.
"나기사 님이 그것도 포함해서 오늘 다과회하자고 부르셨어서 가려고 했는데......급한 일이 생겼다고 뒤로 미루자고 하셔서요......"
"급한 일......?"
티파티의 높으신 분이 히후미를 부른다는 건 이제 이상한 일 축에도 못 끼는 것인지, 코하루는 다른 어느 말도 아닌 '급한 일' 에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음, 확실히 이상하네. 당번 지정도 중단이고, 무언가 말하려던 고위 관료는 급히 그 자리를 피하고. 어떤 작당을 모의하고 있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어."
"아즈사는 왜 맨날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잔뜩 분위기를 잡는 아즈사를, 코하루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말 그대로일 수도 있잖아! 선생님도 바쁜 일이 있어서 당번을 잠시 중지시켰을 수도 있고, 히후미를 부른 높으신 분도 뭔가 일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고! 그, 그냥 그런 거 아냐?"
"어머나......하지만 코하루 쨩, 선생님의 일이 바빠진다면 오히려 당번이 필요한 게 아닐까요?"
짐짓 듣고만 있던 우라와 하나코가, 코하루의 귓가에 아주 가까이 대고 제 의견을 속삭인다.
속삭인다고 하기에는 너무 컸던 목소리와 제 귀를 간지럽히는 뜨뜻미지근한 온기에, 시모에 코하루는 이번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뭐, 뭐야?! 쓸데없이 귀에다 바람 불지 말라고! 평범하게 말할 수는 없는 거야?!"
"후훗, 죄송해요. 코하루 쨩 반응이 너무 귀여워서 무심코."
"무심코?!"
코하루가 어이없어하며 발끈하자, 더 이상은 '먹이' 를 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인지, 하나코가 제 시선을 히후미 쪽으로 돌려버렸다.
"히후미 쨩. 선생님으로부터 무슨 연락이 있었나요?"
"아, 아니...그런 건 없었어요."
"나기사 씨는 뭐라 말하면서 약속을 파하셨나요?"
"급히 만나 뵐 손님이 있어서, 심히 아쉽지만 다과회는 다음을 기약하자고....."
히후미의 설명에, 하나코가 잠시 생각에 빠져든다.
당번의 일시 중지.
이에 대해 연락조차 없는 선생.
사람을 불러내더니 돌연 약속을 취소하는 호스트.
급하게 만나야 할 손님.
그런 하나코를 뒤로 한 채, 히후미는 곤란하다는 듯 멋쩍게 웃어버렸고, 아즈사는 히후미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서 어제부터 히후미 기분이 별로였나보구나."
"...네? 제가 기분이 좀 그렇다고 아즈사 쨩한테 말했었나요?"
"아니. 그냥 티가 엄청 났어. 굿즈샵 가자고 했는데도 시큰둥했었으니까."
"아하하......"
자기 자신도 모르게 그런 티를 냈던 모양이다.
어째 오늘 아즈사가 들고 온 인형이 낮설더라니, 어제 혼자 가서 사 온 참인가보다.
"아무튼......나기사 님이 아니면 어떤 분에게 물어봐야할까 싶어서요. 선생님께 직접 연락드리기엔 또 바쁘신 것 같고......"
"무슨 일이 있으신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나름 코하루를 놀리는 데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우라와 하나코 역시도, 선생이 샬레 당번을 중단시켰다는 점이 썩 신경쓰이는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샬레 당번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잘 아는 사람이기에, 불러서 단순 정리만 시킬지언정 당번 자체를 만류하는 사람도 아니다.
( ...선생님도 뜻을 굽힐 만큼 심각한 문제가 생겼거나, 아니면......선생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중지시켰다? )
그렇다면 '샬레 사정' 이라는 두루뭉술한 사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할 것이다. 단순히 뭉뚱그릴 정도로 심각한 지장이 생겼다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거나.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했다면, 누가?
샬레와 선생을 뒤로 한 채 그런 조치를 할 만한 이라면, 대체 누가?
( ...총학생회? 아니, 총학생회에게 그럴 정치적인 입지 따위는... )
속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트리니티에 득시글거리는 독사들이나 할 법한 생각인지라 심히 껄끄럽지만, 지금 총학생회의 정치적 입지를 생각한다면 샬레 당번을 중단시키는 건 말도 안 되는 자충수였다.
( 그러면......린 씨가? )
수석행정관 나나가미 린.
색채 침공과 그 이후의 수습 과정에서 보였던, 의외일 정도의 추진력.
모든 입지가 증발해버린 총학생회 내에서 그나마 무언가를 하려 들기 충분한 지위와 능력.
그리고......선생 없이 비대위를 소집하기도 했던 전적.
( 선생님의 동의를 받았나? 그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이득을 위해? )
두 가지 경우의 수.
선생이 당번 중지를 동의했거나, 선생의 동의 없이 밀어붙였거나.
허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린의 독단적인 결정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위치에서 어떤 생각을 품었더라도, 순식간에 불어닥칠 역풍을 고려조차 할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동의를 받았다면......
"----코 쨩! 하나코 쨩? 괜찮아요?"
"어, 어?! 아, 미안해요, 히후미 쨩. 잠시 생각을 좀 하느라......뭐라고 말하셨나요?"
아무래도 곰곰히 생각해본다는 것이 과해, 옆에서 히후미가 부르는 것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즈사 쨩이, 나기사 님을 찾아오는 손님이 선생님 아니냐고 하네요?"
"......네?"
하나코가 순간 벙찐 얼굴로 아즈사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시라스 아즈사는 히후미의 말에 한 치 거짓도 없다는 듯, 의문스러울 정도로 당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즈사 쨩, 그건 무슨--"
"히후미가 당번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면서? 나기사도 히후미와의 약속을 미뤘고. 그러면 온다는 손님이 선생님인 거 아니야?"
근거도 없고 논리도 없는, 말 그대로 '카더라'.
헌데, 아즈사의 그 뜬금없는 말이, 놀라울 정도로 뇌리에 박혀버리는 느낌.
"아하하......그렇다면 더욱 더 낄 수가 없네요."
"응. 워낙 바쁜 두 사람이니까. 히후미가 참는 수밖에 없겠어."
그래.
그렇다면 일의 아구가 맞는 측면이 있다.
모종의 사유로 샬레 당번의 중지를 권유받은 선생이 그에 동의하고, 그 일에 대해 논의하고자 트리니티를 방문하고자 연락했으며, 급하게 연락받은 나기사는 오매불망 기다리던 히후미와의 다과회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라고 하면, 조금은 말이 되니까.
우라와 하나코가 조심스럽게 생각을 정리한다.
"하나코, 너 또 이상한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지?"
"......어머나, 후후, 코하루 쨩이 말하는 이상한 생각이란 게 대체 뭘까요? 나기사 씨와 선생님이, 아무도 보지 않는 티파티 발코니에서--"
"--거, 거기까지이!! 진짜 안 돼!! 사형이야!! 가석방 없는 종신형이야아!!!"
코하루를 놀려먹는 평소의 얼굴대로.
뒤 구릴 것 없는 솔직한 표정으로, 우라와 하나코는 그저 실없는 농담만을 입 밖으로 흘려보내고 말았다.
( ......그 사람에게 물어본다면...... )
* * *
"......예상도 못했어. 네가 날 보자고 할 줄은."
선도부장 소라사키 히나는 그렇게 말하며, 의외의 만남을 청해 온 상대방을 지그시 바라본다.
"무슨 바람이 분 거야? 학교로 다시 돌아오기라도 하려는 거야?"
"......아, 아냐. 그런 건 아니고, 그......"
"...하아. 여기까지 불러냈으면 당당하게 말해. 리쿠하치마 아루."
시종일관 안절부절해하는 상대방, 리쿠하치마 아루.
히나의 존재 자체가 껄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그런 히나에게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만나줄 수 있냐' 고 물어 본 게 후회스러운 것인지, 하여튼간 그녀는 한 눈에 보기에도 적잖이 동요하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해가 지기 시작할 거야. 그러면 불량배들도 나올거고. 강제로 진압하다보면 네 말에는 신경쓰지도 못 할 테니까 지금 얘기해."
"으, 응......"
나름대로의 배려.
비록 수배중인 리쿠하치마 아루래도, 당장 산적한 초위험군 수배자들이 득시글댈 뿐더러, 먼저 만남을 청해 온 손님을 대놓고 구속해버리는 파렴치함은 갖고 있지 않다.
...손님이라기엔, 이 약간의 외곽지까지 찾아 온 본인이 더 손님에 걸맞았지만.
"......서, 선생님......무슨 일 있는 걸까?"
아루는 그렇게 운을 뗀다.
"......뭐?"
"서, 선생님 말이야! 그...연락도 안 받고, 무츠키가 학교 쪽에서 샬레 당번도 끝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대서..."
히나가 잠시간 벙 쪄버렸다.
아직 선생에 대해 공표도 하지 못했거늘,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평범한 학생들 사이로 스며드는 모양이었다.
아직까지는 일부의 입에서나 오르내릴 뿐이었지만, 과장된 소문마저 돌기 시작했다면 시간문제나 진배없었다.
"그...히나 당신이라면 알 것 같았어. 그래서 연락한 거야. 번거로웠다면...미안해."
"......하아. 아냐, 됐어."
히나가 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수배 중인 사람을 몰래 만난다는 것 자체가 성가실 일이고, 학교 자체가 꺼려진다는 아루이니만큼 친히 이 곳까지 와 줬거늘, 예상보다 더욱 번거롭고 골치아픈 질문이 들이닥치고 말았다.
"...선생님은 별 일 없어. 조금 일이 있을 뿐이니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조심스레 내뱉은 거짓말.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혼자 결정하고 행동할 사이즈의 일도 아니니만큼, 구태여 쓸데없는 말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어 댈 필요도 없었다.
"......그, 그래? 다행이다......난 또, 선생님한테 뭔가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둘러대는 것에 가까운 대답이었음에도, 아루는 오히려 히나 본인이 황송해질 정도로 마음을 놓았다.
선도부장인 히나 자신이 여전히 부담스러운 것인지, 아루는 부자연스러운 경직됨 속에서도 옅은 미소를 띤다.
그 미소가, 그녀가 선생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히나 자신의 가슴 한 구석을 쿡 찌르고 만다.
수배 중이라는 본인의 입장에도, 자신을 체포해버릴지도 모를만한 사람에게 직접 연락해, 선생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위험천만하게 물어보고, 별 일 없다는 말 한 마디에 그 옅은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마는.
리쿠하치마 아루의 그 행동이, 히나 자신을 뜬금없이 괴롭게 만든다.
...저렇게 미소짓는 사람에게 전하게 될 소식이, 선생이 죽는다는 소식이라니.
"그......선생님이 당신 이야기를 많이 해. 엄청 착하고 배려심 넘치는 데다가 고생한다고. 그래서 당신이라면, 선생님 사정을 잘 알지 않을까 해서 물어 본 거고......미안해. 번거롭게 여기까지 불러내서."
"...신경쓰지 마. 당신 마음도 이해하니까."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히나는 등을 돌렸다.
더 마주하고 있다간 기분이 정말로 울적해질 것만 같아서, 이 곳을 빠르게 떠 버릴 생각이었다.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리쿠하치마 아루는 히나를 붙잡지 않았고, 대신 그녀에게 들릴 만큼, 그러나 주변에까지 들리지는 않을 만큼의 목소리를 내었다.
"그......여러모로 고마워!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지만...나 되게 불안했었거든! 그, 그러니까...사고 안 칠 테니깐, 선생님한테 뭔가 일이 생기면 꼭 알려줘! 꼭!"
괴롭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겁다.
누군가의 순수함이, 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무겁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선생이 사실은 괜찮지 않다는 점도.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에게 거짓을 고했단 점도.
그리고 그 올곧은 걱정이, 결국 무너지고 말 거란 점도.
( ...... )
선생이 죽을 거란 소식을 그녀가 접하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게 될까.
별 일 아니라던 히나 자신에게 서운함과 배신감을 느끼게 될까. 불타는 적개심을 머금게 될까.
밀레니엄 C&C의 부장처럼 서슬퍼런 분노를 끌어안고 독을 품게 될까. 그녀처럼 제 주변을 힐난하고 미워하게 될까.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딛고 선생의 용태를 물어 온 그녀는, 그 불안감 이상의 좌절감과 배신감에 눈이 돌아가는 걸까.
거짓을 고한 자신에게 안 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덤벼들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단순히 둘 중 하나가 다치는 수준으로는 끝나지 않게 되는 걸까.
만약 사실을 조금이나마 미리 알게 된다면, 그녀 나름의 방책을 세우게 되지는 않을까.
방책을 세우지 못하더라도, 본인이 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최대한 하게 되지는 않을까.
......정말로, 이게 최선이었을까.
( ......하아. )
소라사키 히나가 제 자신의 발걸음을 멈춰세운다.
정확히는 무겁게 떼던 발을 돌려, 자신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던 아루를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긴다.
이를 악 물었다.
그래.
이러쿵저러쿵 입장 차이는 다 집어치우고, 소라사키 히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자.
근심섞인 눈으로 히나의 뒤통수만 좇던 리쿠하치마 아루의 눈동자는, 이내 제 자신을 향해 맹렬히 걸어오는 히나를 보곤 급격히 흔들려간다.
아까까지의 떨떠름한 얼굴이 아닌, 무언가 결심한 듯 경직되어보이기까지 한 굳센 얼굴.
"...어, 어? 가, 갑자기 무슨--"
소라사키 히나가 아루의 팔을 잡는다.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또렷한 시선으로 아루를 슬며시 올려다본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하지만 곧 알게 될 거야."
"...어? 뭐, 뭘--"
"--선생님, 전혀 괜찮지 않아."
히나는 아루를 향해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귀띔해준다.
"......어?"
"선생님 몸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어. 상황은 절망적이야. 장담할 수 없어."
아루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선도부장이 갑작스레 태도를 180도 뒤바꿔, 선생에 대해 안 좋은 소식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니까.
"곧 총학생회던 어디던 이 사실에 대해 공표할거야. 그 전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해선 안 돼. 이해했어?"
"아, 으, 저기, 그......무슨 말인지.....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있어, 리쿠하치마 아루.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거고, 선생님은 더더욱 돌아올 수 없게 될 거니까.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게 좋아."
그것은 아루에게 건네는 말.
어째서인지, 그 청자가 다름아닌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좋을 말이었다.
"......저, 저기......무슨 말이야......?"
아마도 그녀 나름의 크나큰 용기였을 것이다.
분위기를 180도 바꿔 어두운 단어들이나 나열해놓는 그녀에게, 간신히 꺼내어놓은 부질없는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어떻게 받아들일지, 뭘 할 지는 당신 몫이니까 알아서 해."
다시 돌아서는 히나는 단호했다.
정확히 설명하진 못하더라도, 무언가 일이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은 주었으리라.
등 뒤에서 들리기 시작한 발소리.
그 발소리는 순식간에 길을 잃은 듯 엉거주춤 멀어져가기 시작하고, 이내 점점 등 뒤 어딘가 저 편으로 아득해져간다.
히나는 발걸음을 멈췄다.
멀어지다가 사라져버린 발걸음 소리가 1인분, 다시 멈춰서버려 잦아든 발걸음 소리가 1인분.
어째서일까.
어쩌자고 그런 소리를 한 걸까.
해답을 찾지 못하고, 소라사키 히나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부시던 햇빛은, 어느덧 일몰 때의 구름 속으로 도망갈 준비를 하는 듯하다.
( ......이걸로 된 거야. 이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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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은 얽혀가고 소문은 흘러가고
아마도 키보토스를 휘감는 묘한 침묵이 이상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분량이 계속 늘어지는 감이 있는데
그래도 쓰고 싶은 이야기들은 다 써보고 싶어서 그대로 가려고
날씨가 많이 더워졌네
다들 더위조심해
댓글 8
상처를 피하기만 해서는 고통을 치료할 수도 없지
슬퍼요 ㅠㅠㅠㅠㅠ
너떄문에 인생의 소중한 2시간을 알차게봤어 책임져
곧 메인디쉬가 오는구만
종말이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