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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시 00분 00초.
커다란 전자 시계가 9시 정각을 가리키고, 시계를 바라보던 나나가미 린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그것이 곧 회의의 시작을 선언하는 신호탄임을, 이 자리의 모두가 이해했을 것이다.
"우선, 여러모로 번거로우실텐데도 회의에 참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총학생회 수석행정관, 나나가미 린은 대회의실에 모인 이들에게 사의(謝意)를 표했다.
"시간이 되었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잠시만요, 대행. 아직 선생님이 오지 않으셨는데요. 그래도 회의는 진행되는 건가요?"
참으로 애석하게도, 몇몇 참가자들은 선생이 없다는 사실 자체에 큰 우려를 나타내는 모양이었다.
분위기 상으로는 선생의 중재 아래에서 제일 시급한 현안이나 각 학원 간의 이견을 좁히려는 시도가 벌어질 것으로 전망했건만, 정작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할 선생이 없는 것이 신경쓰이는 것이리라.
트리니티의 구호기사단장, 아오모리 미네 역시도 그러한 입장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선생 없이 선언된 개회가 말도 안 된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동을 걸어온다.
"네. 진행됩니다."
린은 단호하게 회의의 진행을 확언한다.
"물론 선생님의 안위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당신께서 계신다면 더욱 원활하겠지만, 오늘 선생님께선 사정이 있어서 불참하셨습니다. 선생님 사후 키보토스에 대해 의논하는 자리이기도 하니, 저희끼리만 있어도 큰 지장은 없습니다."
"글쎄요? 총학생회의 뜻이 선생님의 뜻과 같다는 보장은 없으니,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겠네요."
백귀야행의 아마치 니야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어보인다.
자칫하다간 느슨한 연합체인 백귀야행에 위협이 될 지도 모르는 총학생회의 돌변을, 어찌됐던 음양부 부장으로선 쉬이 묵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총학생회가 선생님의 뜻을 대변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위해선 선생님의 보증이 필요해. 가장 좋은 보증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쪽이고."
니야 근처에 앉은 키류 키쿄가 무감정한 얼굴로 상황을 해설했다.
그 말마따나, 지금 총학생회의 뜻이 선생의 뜻이라고 확언할 만한 신뢰는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고, 그렇기에 선생이 참여하지 않는 회의에는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기 힘들었다.
"그걸 대행이 모를 리 없고, 선생님이 모를 리는 더더욱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선생님이 불참했지만 회의를 진행시키려고 한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어째서 불참했는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겠지?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게."
키쿄는 그렇게 이 곳의 주류 의견을 대변했다.
'사정이 있어서 불참했다' 따위로 얼렁뚱땅 넘어가려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고, 실제로 여지껏 벌어지지 않았던 일들이 벌어지려고 하는만큼,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총학생회의 뜻을 낱낱히 파 볼 필요가 있었으니까.
"병원으로 이송되셨습니다."
"...뭐?"
"아직 연락은 오지 않았습니다만, 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습니다."
기세 좋게 속내를 물어보던 키쿄 자신의 입에서 어벙한 목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나나가미 린은 시원시원하게 선생의 이송 사실을 알렸다.
"잠깐만, 잠깐만요. 어째 항상 당신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만, 선생님이 병원으로 이송되신 게 어떻게 큰 걱정거리가 아닌 겁니까?"
미네가 다시 한 번 의심 섞인 의아함으로 물어온다.
"구토. 숨가쁨. 손떨림. 하나같이 하반신마비보단 나은 증상들이죠. 병원 측으로부터 곧바로 연락을 받기로 했으니, 저희는 저희의 일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래서 회의를 속개하고자 했습니다."
구토에 숨가쁨? 손떨림이라고?
린의 말을 중얼중얼 되새김질하는 미네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다. 우려스럽긴 해도, 휠체어를 타고 나타났던 날보단 확실히 강도가 낮음은 분명했다. 여전히 걱정을 놓을 수는 없었지만.
자리에 앉는 미네와 미묘한 표정의 키쿄를 순서대로 바라보던 린이 답변을 속개한다.
"샬레는 총학생회장 직속 기관입니다. 현임 총학생회장 권한대행인 저와, 샬레의 고문 교사이자 총학생회장의 대리자인 선생님은 당신께서 총학생회에 조력해주시는 방식으로 각종 업무를 처리 중입니다. 저희 총학생회는 공인받은 키보토스 최고의사결정기관이구요. 그러니 저희 역시도 키보토스가 대혼란에 빠지는 건 사양입니다. 그러한 문제가 대두되는 것을 최대한 막아보고자 계속 여러분을 회의 자리로 소집하는 거죠. 만약 납득되지 않으신다면 선생님께 추후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설명이 되었는지요?"
".......그래. 충분하네."
키교가 가벼운 한숨만 남기고 한 발자국 물러난다.
그녀가 내세우는 논리가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샬레가 총학생회장 직속 기관인 것도 사실이고, 키보토스가 선생 없이 혼란에 빠진다면 제일 붕 뜰 곳이 총학생회인 것도 사실이었다.
다시 되새겨보자면, 무엇보다 첫날에 선생이 비대위에 참석한 것 자체가 총학생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보증' 이었다.
키류 키쿄는 '아니꼽다' 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무뢰한은 아니었다. 충분한 동기가 있고, 그것이 순리적으로 옳다고 하면 한 발 물러서 추이를 지켜볼 줄 아는 사람에 가깝지.
그렇기에 린의 설명에 더는 토를 달지 않은 것이리라.
"아, 참. 회의를 진행하기 전에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린은 그렇게 말하며 한 템포를 쉬었다.
참가자들을 천천히 둘러보던 그녀는, 에어컨 가동 소리만 맴돌 정도로 장내가 고요해지자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모두와 머리를 맞대야 할 정도로 복잡하거나 곤란한 현안이 있으시면 상신 부탁드린다고 말씀은 드렸습니다만, 오늘까지 총학생회에 수신된 서류는 없습니다. 단 하나의 학원도 보내지 않으셨죠."
그녀의 말에 마코토가 가볍게 콧방귀를 뀐다.
사람을 허구헌날 불러서 귀찮게 하더니, 결국 이런 꼴이 되었다고. 마코토의 콧방귀는 제법 조소 가득한 비아냥과도 같았다.
나름 바뀐 태도의 그녀가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 가소롭기도 해서 어떻게 되려나 궁금한 참에 와 봤을 뿐이었다.
현안? 고민? 그런 걸 총학생회와 나눌 의리는 없었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죠. 정말 그럴만한 화두가 없거나, 저희를 신뢰하지 못하거나. 크게 신경쓰지 않습니다. 저는 어차피 그런 것까지 강요할 사람은 못 되니까요."
적극적으로 변한 총학생회의 첫 행보.
그 행보에 발을 맞춘 사람이 아무도 없었음에도, 천연덕스러운 그 얼굴을 보아하니 정말 크게 개의치 않아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괜시리 찝찝함을 느끼는 이가 한둘은 아니었겠지만, 구태여 그 감정을 입 밖으로 내어놓는 이는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더욱 깔끔하게 진행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각 학원의 수뇌부들께, 앞으로 어떤 일을 추진하더라도 발을 빼실만한 특별한 사정은 없다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요."
"...멋대로 지껄이는군."
회의실 절반의 침묵을 먼저 깬 쪽은, 물론 하누마 마코토였다.
"이 몸께선 바쁜 몸이시지. 어떻게 해야 만마전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해야 이 마코토 님의 업적을 널리 알릴 수 있을지, 그런 걸 고민하느라 바쁘단 말이다. 고작 총학생회와는 할 말이 없다는 뜻이지! 허구헌날 학원들로 떠넘기기만 하던 총학생회가 이제 와서 미주알고주알 떠들어봤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다! 이 몸께서만 그럴 것 같나? 이 자리의 모두가 그럴 거라는 생각을 못 할 리 없을텐데?"
"네. 그것까지 포함해서요."
마코토의 '강짜' 에도, 린은 아무 지장 없다는 능청스러운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댈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각 자치구에서 알아서 할 수 있는 사소한 문제일 터이니, 후일 저희가 선생님 관련해서 무엇을 하더라도 비협조적으로 나오실 이유도 없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머리가 어떻게 됐군! 협조고 나발이고 간에, 총학생회와 할 이야기는 없다는 뜻이시다!"
"그럼 선생님과도 하실 말이 없다는 뜻이시군요. 지금은 그걸 논의하고자 하는 자리이니까요."
"뭐라고?"
마코토가 만면에 띄우던 웃음기를 지운다.
이상할 것도 없다. 린이 우려스러울 정도로 단호하고도 도발적인,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기 시작했으니까.
"선생님께서 향후가 불투명한 심각한 상황에 놓이셨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고자 만든 자리라고 분명 여러 번 설명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선 각 자치구의 현 상황을 파악해보자고 드렸던 말씀인데, 여기에 데면데면하시다는 건 딱히 이후에 문제가 될 만한 배경은 없다는 뜻이겠죠. 저희를 불신하기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면......선생님의 구상이 어떠한 지, 이후에 뭐가 어떻게 되던 별로 신경쓰지 않고 관심도 없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이해하겠습니다."
"비약이 심하네. 그렇다면 애초에 총학생회가 우리에게 믿음을 사게끔 행동했으면 되는 문제 아니었어?"
가만히 듣고만 있던 타카나시 호시노도 불만을 표한다.
그녀는 평소대로의 느긋한 얼굴은 집어치우고, 금방이라도 총구를 들이밀법한 적대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호시노 씨, 역으로 여쭙겠습니다."
린은 그러한 호시노를 똑바로 쳐다본다.
"여러분의 끝없는 불신을 자각한 저희가 이 상황을 수습하길 포기했다고 쳐 보죠. 호시노 씨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처럼 우리가 알아서 하면 될 거잖아. 총학생회가 나서서 이러저러할 게 아니라고."
"알아서요? 호시노 씨는 졸업하시고 나서도 아비도스를 책임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선생님도 없고, 호시노 씨도 없을 아비도스를? 아니면, 이후에는 후배들보고 알아서 하라고 떠넘기실 생각이신 겁니까?"
호시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뭐?' 라고 저도 모르게 반문하려 했으나, 순간 기가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그간 아비도스는 쇠락해가는 자치구, 줄어가는 재학생, 그리고 혼란스러운 현 상황 덕분에 어려운 상황이었죠. 당장 여러분이 쓸 탄약조차도 보급받기 어려울 정도로. 그 보급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 선생님이죠. 맞습니까?"
"......맞아."
"그러한 체계가 계속 작동할 수 있도록 의견을 나눠보자는 겁니다. 결국 여러분과 각 자치구들에 대한 제도적, 행정적 지원은 총학생회가 하고 있으니까요. 선생님께선 원래 저희가 했어야 할 일들을 도와주고 계신 겁니다."
나나가미 린이 호시노 뿐만이 아닌, 회의실의 모두를 천천히 훑으며 바라본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여기 모이신 모든 분들께선 결국 졸업하시게 될 겁니다. 여러분이 원하시는 대로 저희가 발을 빼면 저희는 존재 의의를 잃고 유명무실해질거고, 이후에 여러분이 졸업하시고 후배들에게 남겨주실 상황은...선생님도 컨트롤 타워도 없는 키보토스가 되겠죠."
"왜 총학생회가 유명무실해질 거라고 생각하시죠? 그저 지금처럼 총학생회는 총학생회대로 일을 하고, 저희는 저희대로 저희의 일을 하자는 건데요?"
이번에는 아마치 니야가 반문했다.
지금처럼만 하자는 이야기였다. 총학생회는 총학생회대로 지금의 행정 업무에 집중하고, 각 자치구는 스스로의 일을 스스로대로 해결하고.
그래.
구태여 무리하게 뒤엎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겁니다. 결국 저도 졸업하면 누군가 다른 사람이 총학생회를 도맡게 될 거고, 그 때에도 지금처럼 각 자치구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받을 수 있으리란 법은 없으니까요."
"그 쪽의 임기 내에 제도적인 안전 장치를 만들고 싶다는 뜻인가?"
"뭐...그렇다고 볼 수도 있죠. 가장 중요한 건, 선생님이 돌아가신다는 건 곧 기존 질서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총학생회와 각 자치구들.
느슨하게 연결된 고리.
그 고리를 어떻게든 옭아매어주는 게 선생이었다.
각 자치구를 부지런히 돌며 닥쳐오는 문제를 해결해주고, 총학생회의 입장까지 고려해주며 그 간극을 메워주던 사람.
선생이 죽는다는 것.
그러한 순환이 파국을 맞이한다는 것.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지금까지의 방식 하의 총학생회에는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까지 세세하게 살필 능력은 없습니다. 저희 역시 총학생회장의 능력에 익숙해진 집단이니까요. 그저 큰 틀이 잡히면, 그에 맞춰 진행되는 행정 업무가 저희의 주 업무였습니다. 요컨대 권한에 비해 능력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총학생회가 어째서 선생 사후의 컨트롤 타워가 되냐는 이야기다!"
마코토가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말이야 거창하고 장황함에도, 결국 따져보면 자신들의 능력 부족을 다시 한 번 실토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럴만한 집단이 그나마 저희이기 때문입니다."
린이 마치 '1+1은?' 따위의 질문을 받기라도 한 듯, 아주 태연한 얼굴로 '그나마' 를 강조하며 대답한다.
"총학생회장에게 의지할 뿐이었지만, 저희는 결과적으로 각 자치구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생텀의 제어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계신 샬레도 따지고 들면 저희 총학생회의 직속 기관 꼴이구요. 선생님께서 제한적으로나마 대신 행사해주시고 계셨던 그 권한이 저희에게도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그 권한을 행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
"...강압적인 태도군요. 당신이 그렇게 말하던 총학생회장과 다를 건 없네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키리후지 나기사가 낮은 목소리로 핵심을 짚었다.
말은 '자신은 총학생회장처럼 할 사람이 못 된다' 운운하고 있지만, 위기에 몰려 권한을 입에 올리는 것이 결국 그 한계를 증명하는 꼴이었다.
결국 현임 수석행정관 역시도 그 권력에 의지하게 될 터였으니.
"글쎄요. 총학생회장이었다면 이런 번거로운 회의도 안 열었겠죠. '어떤 상황이니 어떻게 하겠다' 라고 통보했을 겁니다. 그 사람은 능력만큼이나 추진력도 엄청났었으니까."
린은 '독선' 이라는 단어를 길게 풀어놓았다.
하기사, 그 사람이라면 그랬을 것이라고, 몇몇 사람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초인' 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을 계획하고 처리하는 능력은 엄청났지만, 그만큼 각 자치구에서의 반대 의견을 고압적인 태도로 찍어눌러왔었으니까.
"그 권한을 당장 행사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저희 마음대로 행사하겠다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배경은 갖춰졌으니, 그나마 선생님 사후 컨트롤 타워를 맡을 기관이 저희 총학생회가 아니냐는 이야기죠."
제법 순리에 맞는 소리를 내뱉은 린이 마코토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마코토 의장. 게헨나의 일로 바쁘다고 하셨죠. 그렇다면 당장 일주일 뒤부터 키보토스의 모든 자치구의 업무도 겸하라고 한다면 하실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런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호시노 씨. 선생님 사후의 키보토스는 어떠십니까? 아비도스에 종합적인 컨트롤 타워의 역할을 드릴까요?"
"......아니. 그럴 여유는 없어."
"그것 보십시오. 그 귀찮은 일을 저희가 떠맡겠다는 겁니다. 그 귀찮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을 위해선 여러분의 협조가 절실한 상황이구요."
가볍게 숨을 고르며 한 템포를 쉰 린은, 컵의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고는 말을 잇는다.
"각 자치구들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이나 앞으로의 방향성 등을 고려하면, 선생님이 건재하실 때처럼 대주제를 다룰 컨트롤 타워는 필연적입니다. 그리고 그건 지금의 수뇌부가 졸업하더라도 권한과 체계를 구축해 둔 총학생회가 맡는 것이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이고, 그걸 위해서 어느 정도는 여러분의 협조가 필요한 셈이죠."
"협조도 좋고 지원도 좋은데 말이죠~ 조금 걱정이 된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치 니야.
그녀는 아무래도, 총학생회의 청사진에서 '종합적인 컨트롤 타워' 라는 부분이 내심 켕기는 모양이었다.
"시작도 좋고 동기도 좋아요. 그렇지만 조금 우려스럽네요. 후일 총학생회가 각 학원의 전통이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 불능의 지시를 내릴까봐요~ 그랬다간 피차 고달파지는 건 똑같잖아요? 그러느니 차라리 지금처럼 알아서 하게 내버려두는게 낫지 않겠나 싶은데요?"
다른 이도 아닌 니야라면 그런 의문을 품는 것도 타당하겠다.
세 분파의 수장을 묶어 '티파티' 라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뤄낸 트리니티와는 달리, 백귀야행은 수많은 분교와 동아리들이 느슨하고 설렁하게 연결된 연합체.
사실상 학생회로 기능하는 '음양부' 가 강력한 통제력으로 전권을 장악하거나 행사하지 않아도, 결국 어떻게든 잘 굴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필요성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
물론 음양부에 그러한 권한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백귀야행을 강력한 중앙집권식 체제로 바꾸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허나, 니야는 그리 하지 않았다.
백귀야행의 질서에도 부합하지 않는 행동이었고, 음양부에게 그런 강력한 권한들을 위임한 각 분교와 동아리들을 배신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절제된, 극히 일부의 권한만을 행사하여 사실상의 학생회 취급이나 받으면 그만이었을 뿐이다.
"그 점에 대해선 저도 우려하고 있습니다."
의외로, 나나가미 린의 입에선 긍정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니야의 말이 언뜻 듣기에만 부드러울 뿐, 사실상 지금 제시된 총학생회의 향후 로드맵을 부정하는 의미에 가깝다는 걸 생각해보면, 총학생회의 현 대표자 입에서 나오기엔 위험한 말이었다.
"하지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총학생회가 각 학원의 학생회마냥 강력한 권력을 쥐겠다는 건 아닙니다. 원래 총학생회의 취지대로 돌아가자는 뜻이죠."
"원래 총학생회의 취지?"
호시노의 중얼거림에 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총학생회장 한 명의 추진력에 의지한 채 무작정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키보토스 모든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참여해 서로의 처우를 고민하는 그런 집단 말입니다."
"느슨한 연맹 체제를 원하시는군요, 당신은."
키리후지 나기사가 그녀의 생각을 한 단어로 정리하자, 몇몇 인원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뿐만 아니라, 자리에 참여했던 총학생회의 몇몇 임원들 역시도 자기들끼리 목소리 낮춰 의견을 나누는 모양새였다.
뭐가 달라지는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신들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등등.
"각 자치구에서의 내정이나 행사 등에는 저희가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잘 해 오셨으니, 지금처럼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단, 다자간의 복잡한 외교 관계나 자치구 단독으로 해결하기 힘든 업무들, 혹은 범키보토스적인 대규모 행사, 특정 학원이나 소속 학생의 우려스러운 행보에 대한 규탄 등, 넓은 의미의 외교나 종합 행정같은 업무에 힘을 쏟고자 합니다."
"말은 거창하지만, 지금이랑 큰 차이가 없는 것 같군. 네놈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우리에게 인정받고 싶은 건가?"
마코토는 여전히 총학생회의 청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심드렁한 얼굴로 물어온다.
아마 린에게 고압적으로 밀렸던 이후부터 기분이 팍 상해 있기도 한 모양이다.
"의장의 말씀대로 변하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저 선생님이 없다는 것. 그거 하나 뿐인거죠."
아주 간단명쾌하고 단순한, 그리고 거대한 한 가지.
선생이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사실.
"즉, 총학생회와 각 자치구 사이를 이어주던 선생님이 계시질 않을 것이니, 이제 좋던 실던 저희끼리 직접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구태여 이런 번거로운 방법을 써서라도 총학생회와 현장 간의 괴리를 줄일 수밖에요."
말을 마친 린이 다시 한 번 니야를 바라본다.
"각 학원의 전통? 특수성? 사정? 존중해드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러분 개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의도치 않은 실책이 있을 지도 모릅니다."
"총학생회장이 딱 그랬죠. 이야~ 그 사람이 일은 잘 하는데, 당최 이 쪽 사정을 봐 주질 않아서요."
"그러한 일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기에 여러분께서 협조해주셔야만 합니다. 끊임없는 참여와 주장이야말로 각자의 사정을 설명하는 좋은 기회가 될 테니."
니야를 바라보던 린이 다시 눈을 돌린다.
그녀의 이번 시선 끝에 있는 이는, 아비도스의 타카나시 호시노였다.
"각 학원의 자치권을 존중해드립니다만, 보통의 방식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크나큰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희 총학생회는 그러한 상황에서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도움을 드리기 위해선, 무엇보다 앞으로 여러분의 협조와 관심이 절실한 상황이구요."
"...너희들의 능력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그럴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그게 부딪혀보지도 못 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것이 아니었던 문제로 골머리를 썩히고 있어도? 그래도 당신들은 그런 번거로운 남의 집 사정을 위해 발벗고 나서보겠다고? 당신들 총학생회가?"
"네. 선생님이 그리 하셨으니까요. 선생님께 배운 저희도 그렇게 하지 못하리란 법은 없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의 차이겠지만."
이번에는 게헨나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노려보고 있다' 고 표현해도 좋을 마코토의 눈빛과,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린의 눈빛이 정면충돌한다.
"마코토 의장. 당신은 그저 지금처럼 게헨나 내부의 일을 신경쓰십시오. 그게 당신과 게헨나의 주 관심사라면 역시 거기에도 개입하거나 간섭하진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게헨나도 결국 처리해야 할 외교 문제나 행정 업무, 끊임없이 손보고 유지해야 할 시스템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것들도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다. 지배자는 그런 걸 하라고 아랫사람들을 두는 거니 말이다!"
"맞는 말이죠. 그렇지만 결국 아랫사람들이 마코토 의장의 뜻대로 결과를 내려면, 응당 필요한 지원이나 행정 처리가 필요하겠죠. 당신이 아니라면 만마전의 타 간부가 참석하는 한이 있더라도, 역시 총학생회에 협조해주시길 권유드리는 겁니다."
"권유? 키키킷! 제법 건방진 말도 할 줄 아는구나."
마코토는 당당한 태도의 린이, 어쨌든 굉장히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주장과 의견 차이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태도를 견지하며 설득력있게 주장하는 그 모습을 '리더의 귀감' 이라 여길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한 번 되새기자면, 의견 차이와는 별개였다.
"...하나만 물어보겠다."
잠자코 있던 류우게 키사키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필사적이지? 가만히 보니, 작금의 사태를 고려한다 쳐도 너무나도 절박해 보이는구나."
"......그렇게 보였습니까?"
"마치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 같구나. 선생의 죽음과 맞먹을 만한, 그대를 강하게 움직이는 또 다른 동기가."
아마도, 선생이 죽은 뒤를 대비해야한다는 생각만은 아닌 것 같았다.
나나가미 린의 모습은 키사키에겐 너무나도 괴리스럽고, 이질적이었으며, 또한 절박에 가까울 정도로 필사적으로 느껴졌다.
'선생 사후를 대비한다' 라는 감정 하나라기엔 심히 진중하고 고심 깊었으며, 그렇기에 무언가 다른 동기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겠지.
이번만큼은 잠시 고민하던 린이, 신중에 신중을 거듭한 목소리로 대답을 고한다.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기회...? 무엇이 말이냐. 혹 선생의 죽음을 기회라고 일컫는 것이더냐?"
"네."
린의 긍정이 나오자마자, 수군거리던 목소리가 적어도 두 배는 커진 느낌이었다.
자리에 참석한 각 학원의 수뇌부들도, 더불어 착석한 총학생회 임원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로구나. 그리 생각한 연유를 말해다오."
"선생님께서 돌아가신다는 이 거대한 사건은 곧 거대한 기회입니다. 그동안 키보토스에 산재했던 수많은 골칫거리들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는 기회. 그리고......능력도 자부심도 다 사라져버린 총학생회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줄 수 있는 기회."
린은 그렇게 말하며 각 학원 수뇌부들 뒤쪽의, 총학생회 임원진들을 천천히 둘러본다.
"단언드립니다만, 선생님께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이런 개혁은 구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저희가 그 일들을 잘 해낼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니까요."
"...그게 보통의 시기였다면, 말이겠지?"
"네. 총학생회장이 실종 이후, 처음으로 '뭔가를 직접 해 본다' 라는 자신감을 배울 만한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기회......라기보단,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 같구나. 그대의 눈빛이 말이야."
"뭐......보시는 대로 같네요."
그동안 해오던 것들이 송두리째 뒤바뀐 것은 총학생회도 마찬가지였다.
항상 총학생회장이 밀어붙이면 큰 생각 없이 나머지 잡무들을 기계처럼 해결해왔고, 그렇기에 그녀가 없어진 뒤엔 자연스레 일도 제대로 돌아갈 턱이 없었던 것이겠지.
선생이 혼란을 수습하고, 엉망진창이 된 총학생회와 각 자치구 사이에 끼어들어 알게 모르게 중재해 주었으며, 나나가미 린은 각 자치구에 대해 방임에 가까울 정도로 '선택과 집중' 을 선보여 총학생회 내부의 혼란을 최소화했다.
시라누이 카야의 쿠데타로 그 판단이 허사로 돌아갈 뻔했으나, '준비 안 된 리더의 독선' 이 얼마나 거대한 참사로 돌아오는지를 총학생회의 모두가 알게 되었으니 나름 새옹지마였다.
선생이 건재했던 동안 각 자치구의 학생들도 성장했으나, 총학생회 역시도 성장하고 있었다.
나나가미 린의 지휘 아래서 각 업무의 분담들도 익숙해지고 있었고, 실무진인 실장급들의 업무도 꽤나 자연스러워졌다.
시간이 흘렀고, 의도치는 않았지만 기회가 찾아왔다.
총학생회장의 그림자 속에서 허우적대던 총학생회를, 현 상황에 맞춘 옷으로 갈아입힐 수 있을 천재일우의 기회가.
"...그래. 그렇구나. 기회란 말이지......"
"...죄송합니다. 서두가 너무 길어졌군요."
무언가 고민에 빠진 키사키를 뒤로 한 채, 나나가미 린이 헛기침 두 번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결론은 오늘 선생님은 불참하셨고, 그렇다 하더라도 저희끼리 논의를 계속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부디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린 겁니다. 여러 사정들이 있으시겠고, 저희의 방침이 심히 우려스러우시더라도, 그런 모든 말씀을 이 자리에 참석하셔서 제기하시라는 당부 말씀도 겸해서요."
말을 마친 나나가미 린이 눈을 살짝 들어 시계를 바라본다.
시간이 꽤 흘렀다.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킬 필요도 있을 것이고, 이 자리의 모두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응당 필요하겠지.
"15분 휴식하겠습니다. 나머지는 각자 생각을 정리하신 뒤에 말씀 나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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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잡혀가는 기틀과 청사진
의도치 않게 흘러나오는 개개인의 본심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매우' 험난함
사람들이 많은 만큼,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것 그만큼 쉽지 않은 도전이니까
그게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선생이 있었다가 없어진 뒤의 미래 이야기라면 더욱 더......
총학생회에 갖고 있는 적대감 치고는 생각보다 원활히 흘러가고 있는 것 같지?
선생이 까딱 했다간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혼란함과 위기감이 그걸 가능케 했는지도 몰라
이걸 어떻게 이용할 지는 린에게 달렸고, 그것이 성공할지는 결국 각 자치구에 달린 것이니...엄밀이 따지면 갑도 을도 없는 난장판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일하는 중간중간 글을 더 많이 쓰려면 쓸 순 있는데, 그러다 까딱 졸음운전하면 우리는 줄초상이라...
일단 일주일에 한 편 올린다고는 생각했는데, 일주일보다 좀 빨리 올려도 될 것 같다
물론 늦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
댓글 12

이번 화 보고 문득 생각해보니 아비도스가 가장 총학생회에 적대적이어도 이상할 게 없겠구나. 선생이 보급을 들고 찾아오는 게 조금만 더 늦었으면 두 눈 뜨고 그대로 카이저에게 모든 걸 빼앗길 뻔했고, 총학생회는 아비도스의 사정을 다 알면서도 그냥 방치하고(혹은 그럴 여유가 없었던가) 있었으니...
결국 선생이 없어져도 현재 유지되고 있는 질서를 학원 간에 함부로 깨뜨리지 않으면서 합의를 할 정도의 신뢰가 서로에게 있는가 신뢰게임 하는 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이 신뢰를 유지하려면 구심점 세력이 강한 권한과 힘을 바탕으로 주도해야 한다고 봐서 지금 총학 처지로는 쓰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