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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다들 엄청 빨리 왔네?"
'폐점' 이라고 적힌 가게의 문을 연 하야세 유우카는 어안이 벙벙해진 채, 멤버들의 빠른 집합에 반가움 섞인 당혹감을 보낸다.
"으음. 전철을 간만에 타려니 긴장되어서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일찍 와 버렸다만......"
옷도 갈아입지 않고 부리나케 달려온 것인지.
아리우스 고문 교사 조마에 사오리는 샬레 제복을 입은 채 주변을 연신 힐끔거리더니, 오늘의 첫 도착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입맛을 다신다.
마치 애처럼 신나보였던 게 아닐까 싶어, 저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던 게 아닐까.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대로 차를 끌고 올 걸 그랬어."
"아니, 잘 하셨습니다. 음주운전의 'ㅇ' 자라도 제게 보였다간 단박에 애들을 불렀을 테니."
오가타 칸나는 그렇게 짐짓 으름장을 놓았다.
발키리 고문으로서의 그녀는 현역 시절의 '악명' 까진 아니더라도 여전히 대쪽같았으니, 행여나 그런 일이 있었다면 즉시 그녀의 학생들을 호출했을 것이다.
...아니, 그녀 본인이 먼저 제압해버릴지도.
물론 사오리 역시 기껏해야 대리나 불렀을 터다. 여전히 고지식함을 버리지 않은 그녀는 그런 오해가 실례라는 듯, '절대 그럴 일 없어!' 라며 칸나에게 일갈을 날렸다.
한편,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우카가 알 수 없는 이질감에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 앞에 앉아 있는 리쿠하치마 아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묻는다.
"아루 선생님, 게헨나의 나머지는 안 왔어?"
"아, 응. 마코토 씨는 대학원이 바쁘고, 사츠키 씨도 출장 있어서 키보토스에 못 들어온대. 치아키 씨는 기사 쓰느라 바쁘고, 이로하 씨는 일주일 째 야근 중. 나머지도 사정 있다고 이부키가 그러더라."
"...아쉬운데..."
"바쁜 거지.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닌데 뭐, 내비둬~"
옆에서 듣던 타카나시 호시노가 뭐 그리 집착하냐는 느낌으로 신경쓰지 말라고 언질한다. 사회인 바쁜 걸 모르는 이들도 아닐 테니 느긋하게 가자는 뜻이겠다.
"나도 동의해. 우리가 언제부터 그렇게 빡빡한 사람이었다고."
"그런가...? 그래도 조금 아쉬워서. 얼굴 보면 좋잖아."
마요이 시구레 또한 호시노의 의견에 동의하며 그 꼬리를 살랑거려보인다. 이렇게 되니 더 이상 묻지도 못하겠다는 표정의 유우카가 괜시리 말끝만 흐린다.
그것보다 다른 게 문제라는 듯, 가만히 바라보던 사오리가 시구레를 향해 난데없이 일침을 날린다.
"...내가 말하기엔 뭣하지만, 시구레 선생은 좀 더 빡빡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압수품으로 들어온 캄포트를 다 마셔버려서, 찾으러 온 학생들에게 과발효되어서 폐기했다고 둘러대지 않았나."
"그건......불가항력이었어. 그 때 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딱 맛있게 발효됐었다니까? 캄포트가 날 유혹한 거야."
"......캄포트라고 인정했군. 애들이 먹기엔 좀 심하다 생각해서 먹어치워버린 주제에 솔직하지 못하긴. 어쨌든, 조금은 더 빡빡하게 임했으면 좋겠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서."
"예이 예이.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사오리는 구태여 꺼내놓지 않아도 되는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둔다. 다른 이들이 딱히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하동문인 모양이다.
물론 시구레는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건성건성 대꾸한다. 시구레와 사오리, 학생들도 다 알 정도의 신흥 '상극 듀오' 는 언제나처럼의 모습이었다.
"저기저기, 나 있잖아? 우리 학원 아이한테 고백 받았다?"
"......뭐?!"
미소노 미카는 한껏 자랑하고 싶어보이는 눈치로, 이제 막 자리에 앉으려는 유우카를 향해 놀라운 사실을 털어두었다.
물론 그 말이 유우카 뿐만이 아니라 대다수의 이목을 확 끌어당겼음은, 구태여 얘기할 필요 없을 것이다.
"정체성에 대한 건 둘째치고, 너와 난 학생과 선생님이니까 그 감정에는 답해줄 수 없다고 했다? 어때? 나 꽤 멋진 선생님 같았지 않아?"
"미카 씨, 그런 말도 할 줄 알았어? 이 선생님은 몰랐지 뭐야?"
"그 반응은 뭘까? 대놓고 멕이려는 의도?"
호시노는 근래 들어 '아저씨' 대신 쓰기 시작한 '선생님' 이란 지칭까지 알뜰살뜰하게 섞어 '꼽' 을 준다.
그 성격 어디 가지 않았는지 잠깐 발끈해 바라보던 미카는, 심히 어른스럽게도 한 번 참고 넘어가겠다는 듯 웃어넘기려 든다.
"그래도 있지, 꽤 우리 선생님같지 않았어? 선생님, 인기 좋았었잖아? 아마 나만 그 생각한 거 아닐걸?"
그럼에도 미카는 '학생에게 고백받는다' 라는 상황이 꽤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이러저러한 사실 다 떠나, 옛날의 선생이 수많은 학생들의 마음을 잔뜩 뒤흔들어놨던 것과 비슷하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미카의 분위기를 읽지 못 한 걸까, 아니면 읽지 않은 걸까.
다만 사오리는 실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미카를 본다.
"...안타깝군. 미카, 그건 진심이라기보단 널 놀리는 거다."
"사오리, 내가 항상 얘기하지? 말에 의미를 똑바로 담지 않으면 이빨 몇 개 나가도 어쩔 수 없다?"
"확실히 말하지. 학생들보다 놀기 좋아하면서 종종 투정까지 부리는 너에게 연심을 품을 아이가 있을 리 없다는 뜻이었다. 오해하게 만들어 미안하군."
"와오, 그냥 이유 없이 때려도 될까?"
진심으로 안쓰러워하는지, 아니면 이 참에 놀려주려는 것인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털어놓는 악담이 썩 호기롭다. 두 사람이 몇 년 내내 이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당장에 분위기가 파국으로 흘렀겠지. 지금에야 일상이라지만.
"아루 선생님. 블랙마켓 건은 잘 마무리 되었습니까?"
그 모습을 평소처럼 바라보던 칸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서 물 한 잔을 따르던 아루를 바라본다.
학생 셋을 납치해 자신들의 D.U. 지점 신설을 주장하던 블랙마켓 은행 병력들. 애들이 엮인 이상 나서야한다며, 아루가 직접 게헨나 선도부와 함께 일망타진시켜놨던 최근의 사건을 입에 담았다.
"응? 아아, 응. 아이들은 다친 곳 없고, 그 쪽도 은행 전체가 개입되기보단 일부 파벌이 난리쳤을 뿐이더라. 은행장한테 조용히 처리하자 했더니 단속 잘 시키겠다고 했어."
"그렇군요. 프라나가 알려주기론, 그 쪽도 조금 구린 사정이 있는 것 같다길래. 한 번 가 볼까 싶어서요."
"...칸나 씨가 갔다간 다 뒤집어질까 봐 무서운데...아, 그, 미야코 씨 생각은 어때?"
아루가 나섰을 때와 칸나가 나섰을 때.
진압 스타일의 강도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쪽도 순순히 진범을 바치며 재발 방지를 약속해왔다는 점도 고려해보면, 아무래도 아루는 칸나가 나선다는 게 살짝 꺼림칙한 모양이다.
프라나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도 없고, 나름의 '뒷조사' 까지 다 마쳐 제기한 의혹이니 타당성도 있겠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나가 나서 뿌리뽑을 필요까지 있을까.
그렇기에 아루는 츠키유키 미야코를 바라본다.
SRT 감독관으로서 그녀를 안심시켜달라는 SOS일 것이다.
"안 그래도 모에 감독관으로부터 전달받았습니다."
"모에 씨가? 어때? 그렇게까지 급한 상황은 아니라지?"
"뒤집어엎을 필요가 있겠다더군요."
유감.
아루를 바라보며 미소짓는 미야코는, 칸나의 계획에 당위성을 부여해주고 말았다.
"물론 아루 선생님께서 예상보다 더 원활히 매듭지어주신 덕에 생각보다 좋게 종결되었죠. 그 덕에 다음 작전에 비밀리에 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작전은 은밀성과 기도비닉이 생명이니까요."
"믿음직한 마음가짐입니다. 저희 아이들도 그 냄새를 좀 맡은 모양이라서요. 곧 계획을 짜 보시죠."
"......진짜 잘 한 게 맞을까, 나는......"
미야코와 칸나.
순식간에 의기투합해가는 두 사람을 보던 아루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은행 쪽과 사건 종결마냥 합의봤던 게 사기친 것처럼 느껴져 찔리는 모양이다.
"아, 오늘 먹을 밥값 말인데. 나기사 씨가 선결제했대."
"나기사 씨가?! 언제?!"
생각났다는 듯 아케시로 루미가 꺼내놓은 말은 후와 렌게를 놀라게 하기 충분했다. 그녀뿐만 아니라, 꽤 많은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해지게 만들었다.
가게의 위치가 위치였던지라.
호시노가 뭐 어쩌겠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오늘. 짬내서 잠깐 들렀다 갔다던데? 선결제해놓고, 남은 금액은 두고두고 빼먹으래. 그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길래 마스터가 그렇게 놀랐대는 걸까."
"으음~ 나기 쨩, 원래 부자였으니까. 지금은 더 부자고."
아무래도 미카는 그녀의 사정을 잘 알고 있겠지. 그렇기에 호시노의 의문에 간단하게 답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자세한 사정을 시구레가 설명해서 문제였지.
"저번에 낸 정치외교학 논문이 대박쳤다며? 이리저리 강연 다닌다고 바쁘다던 것 같더라. 그걸로 받는 돈도 어마어마할걸?"
"맞아! 시구레 씨, 꽤 정확하게 아네?"
"우리 서기장이 신으로 추앙하고 있거든. 정치외교학의 신이 쓴 논문은 수집할 가치가 있다던데?"
시구레가 알 만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약간의 빈틈만 보여도 자비없이 물어뜯는다는 현임 붉은겨울 서기장은, 아마 나기사의 정치외교 분야 연구를 크게 감명깊게 받아들였던 모양이다.
나기 쨩이 만든 악마라고. 무조건 본인이 와서 봐야 한다고.
미카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녀를 줄곧 그렇게 설명해왔었다.
"그래. 우리 회장의 롤모델이기도 하지. 나기사의 수완은 어마어마했으니까. 티파티 호스트라는 이력도 꽤 도움이 됐을 거다."
사오리 역시 거대한 여파를 몰고 온 나기사의 논문을, 그리고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그녀를 고평가한다.
키보토스에서의 경력으로 괴물 신입 취급을 받으며 연구 전선에 뛰어든 그녀는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고, 곧 내놓는 논문마다 학계를 술렁이게 하며 전통적 기법과 과학적, 실증적 기법이 아우러진 새로운 학술적 관점의 선구자가 되어 있었다.
심리학 과정을 밟겠다던 유리조노 세이아와 함께 종종 놀러오더니, 오늘의 불참을 '뇌물 쾌척' 으로 무마하려 들었던 모양이다.
"있지, 이 선생님은 사실 그 사람이야말로 남을 줄 알았다?"
호시노는 그렇게 말하며, 외부에서의 심화 연구를 선택한 나기사가 줄곧 의외였다는 듯 털어놓았다.
"선생님 일 때도 앞장서서 이것저것 했었잖아? 그 때 총학생회에도 제일 협조적이었기도 하고. 그래서 남을 줄 알았더니...졸업하고 훌훌 떠나버릴 줄이야."
"으음~~사실 나도 나기 쨩이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나기 쨩 생각이 확고하더라."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을 향해, 미카가 비하인드 스토리를 꺼낸다.
"나 선생님 할 거라고 먼저 얘기했었어. 그랬더니 그 일에는 오히려 자기보다 내가 맞을 거라더라? 자기는 정치라는 걸 학문으로서 공부해보고 싶대. 어떤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는지, 앞으로 또 다른 선택지를 더 많이 만들고 싶을지...그랬던 것 같은데?"
"같이 다니던 세이아 씨는?"
"인간의 마음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으니, 학문적 관점에서의 심리학을 연구해보고 싶다 했나...그래서 지금도 어려운 말 잔뜩 하고 다녀. 꼴받게."
유우카의 물음에서야, 비로소 나기사와 세이아 두 사람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 이유가 알려진다.
누군가를 돕고 가르쳐주는 데에 미카가 제격이라고 의견이 일치했던 모양인지, 두 사람은 이 참에 각자가 마음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더욱 깊게 파 보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웃기는 일이다. 두각을 나타내던 두 사람이 떠나고, 감정적이고 충동적인 데다가 몸이 앞서는 미카가 선생에 도전하다니......사람 일은 어찌될 지 모른다던 말이 역시 맞는 말이다."
"나 진짜 때린다, 사오리? 감정적인 게 뭔지 보여줘?"
뒤 구린 미소를 지으며 물을 마시던 사오리를 향해, 결국 미카는 주먹을 들어보이고 말았다.
다만 그 일상을 와장창 부수는 이들의 등장.
각기 트리니티 교복과 아리우스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부리나케 가게로 들어오더니, 금방이라도 울 법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찾았다.
"미, 미카 쌤?! 중앙 광장 미술관에 강도가 붙었는데, 도망가지도 않고 정의실현부를 자꾸 유혹하려 들어서......!"
"나타났어요, 선생님! 말씀하셨던 수상한 어른이 포르타 파시스 근처에!"
미카와 사오리.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롭던 기색을 지워버린 채, 서로를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양동인가. 여전히 사이가 좋군. 미카, 트리니티 쪽을."
"응! 내가 괴도를 잡을 테니까, 사오리가 와카모 녀석을 만나 봐. 타이밍 진짜, 눈치가 눈곱만큼도 없네! 아니, 노렸나?"
순식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
사오리는 태블릿이 잘 있는지 확인하며 학생에게 안내를 부탁하고, 옷만 간단히 주워 입은 미카는 고개를 돌려 모두를 바라본다.
"우리 짐 좀 샬레에 갖다놔 줄 수 있지? 부탁 좀 할게!"
"빨리 끝나면 다시 와~ 늦게까지 이러고 있을 거니까~"
"내일 출근 안 해?! 하여튼 다녀올게! 부탁해!"
호시노는 태연자약하게 손을 내저으며 짐을 맡겠다고 한다. 가뜩이나 잔뜩 벼르고 있던 녀석이고 이것저것 물어 볼 것도 많지만, 아리우스에서 사오리가 만나는 것도 꽤나 의미가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문학적인 의미로.
이내 두 사람은 필요한 것만 챙겨든 채, 뛰쳐들어왔던 학생들의 안내를 받아 부리나케 가게를 나가버렸다.
나가면서 동시에 무어라 하는 듯 소리가 들렸다만, 그것도 벌어진 일의 경황을 묻는 게 아닐까 하여 곧 신경을 껐다.
혼란스러움 뒤에 찾아 온 침묵.
불편한 침묵이라기보단, 그저 언제나처럼 찾아 온 일에 대한 공감과 응원의 뜻이리라.
"......사람 많긴 하네."
완전히 닫힌 줄 알았던 문.
두 사람이 뛰쳐나가며 교대하듯 누군가가 그 문을 잡았고, 다시 한 번 옆으로 밀며 새로운 방문을 알리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금 문 쪽으로 집중되었음은 당연하고, 방문객을 살핀 모두의 눈이 일제히 휘둥그레헤지는 것도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히나 씨, 이로하 씨?! 못 온다며?!"
"이로하는 일이 좀 빨리 끝났고, 나는 반차 냈어."
정장 차림의 소라사키 히나는 정말로 반차 내고 곧바로 놀러 온 듯 미소를 지어보였고, 나츠메 이로하라고 딱히 사정은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적어도 서로 다른 색의 정장을 입은 두 사람이 모두에게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었다는 건...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 히나를 향해, 미야코가 슬그머니 다가와 운을 뗀다.
"일은 좀 어떠신가요? 잘하면 최연소 과장도 가능하실 것 같다고 들었는데요."
"어렵게 됐어. 위에서 게거품을 무나 봐. 나이도 경력도 안 됐는데 과장을 어떻게 달아 주냐고. 이러니까 나만 이상해지고 있다니까. 보는 눈이 이상하질 않나, 그러면서도 일 맡기는 건 끊임없질 않나..."
"것 봐. 평범한 회사 생활도 쉬운 게 아니라니까."
히나는 아무래도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게헨나 선도부장 이력도 있겠다, 실제로 일처리 능력도 뛰어나겠다, 사내에 적도 마땅히 없겠다. 전례없는 쾌속 승진의 꿈도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만, 애석하게도 나이드신 양반들이 쌍수들고 반대하는 모양이었다.
물 한 잔을 순식간에 비우고는 식탁에 엎어져버리는 히나의 모습은, 시구레로 하여금 괜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훈수 두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다만 히나는 그런 말에 긁힐 때는 지났다는 듯, 더더욱 지친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부비적거린다. 식탁에.
"누가 과장 시켜달랬냐구......정시 퇴근이나 시켜주지..."
"그래도 선배네는 능력 있으면 승진 얘기도 나오잖아요. 우리 회사는 그런 것도 없어요."
애석하게도, 이로하네 회사는 더더욱 암울한 곳인 모양이다. 그 한 마디에 흥미가 동한 듯한 칸나가 슬그머니 그녀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이로하 씨. 졸업하시고 첫 회사라 꽤 계셨다고 기억하는데요. 지금 직급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뭐어......주임이요."
"아직도?! 꽤 달고 있지 않았어?!"
"네. 말은 인사 적체가 심하다는데......모르죠. 또 어떤 뒷거래가 있을런지."
정작 물어 본 유우카가 머쓱거릴 정도로, 이로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구리구리한 냄새 폴폴 풍기는 사회가 이미 익숙해졌는지, 반 체념으로 좋은 시기를 기다리려는 모양이다.
질문을 던진 칸나는 어째서인지 예전의 제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것인지, 중간관리직 어딘가인 그녀의 모습에서 짠한 향수까지 느끼는 듯하다.
"그나마 두 사람은 좀 나은 거야. 선도부랑 만마전 경력 인정받았잖아? 히후미 알지? 걔는 아무 이력도 없이 들이박아서...두 사람보다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해."
"아무 이력도 없다는 사람이 SNS 인플루언서를 해? 걔는 비유로 들지 마. 예전에도 좀 특별했다고 기억하는데, 그게 평범한 건 아니잖아?"
아지타니 히후미.
뜬금없이 밖에서 인터넷 방송으로 뜨더니 돌연 인플루언서의 길을 걷고 있는 바로 그 사람.
시구레의 지적대로, 반짝반짝 빛나며 살고 있는 그녀가 평범한 회사 생활과는 천만 광년 떨어진 삶이라는 걸 그 어느 누구도 부정치 못하겠지.
시구레는 빈 물컵을 빙글빙글 돌리며 아루를 바라본다.
"비유를 정확히 해야지, 아루 선생님. 그 주제로 얘기할 거면 하나코 씨 얘기를 했어야 맞지 않아?"
"......아, 그렇네."
우라와 하나코.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 그 어떤 특이사항도 없던 이력서로 외부에 나가 평범하게 무역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던 그녀. 들려오는 얘기만으로 따지면 모난 곳 없는 아주아주 평범한 삶을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 하여튼, 내 말은 그런 말이야!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생각보다 높은 곳까지 와 있을 수 있으니까, 조금 침착하게--"
"--그래, 알아. 걱정하지 마. 누가 선생님 아니랄까봐..."
손사레를 치며 일장연설을 중단시킨 히나가 이로하와 마주보며 슬그머니 웃었다. 그렇게까지 고까워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투정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냐고 가볍게 한 소리 하면서.
"자! 얘기를 멈출 생각을 않으니, 우선 다들 받으라고!"
아무래도 마스터는 얘기가 잠시 잘릴 때까지 기다리려던 모양이었으나, 간만에 마주한 어른들의 대화에 결국 난입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특제 라멘과 맥주.
벌써 몇 년째의 기일마다 동일한, 일명 행사 메뉴.
한 눈에 보기에도 과하게 가득 담긴 라멘 그릇들이 줄지어 내와지고, 바쁘게 서빙하는 그는 어찌보면 제법 신난 기색도 보이고 있었다.
호시노는 그런 마스터를 보며, 너무 심하지 않았냐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올해는 특히 힘 좀 썼구만? 마스터, 내일 장사 안 할 거야?"
"단골들한테 이 정도 서비스는 내어줘야 하는 거야. 더 필요하면 리필해 줄 테니, 남기지나 말라고! 아, 그리고 우리 아가씨한테는 하나 더."
헌데 아직 중요 용건이 남았는지, 그가 시구레 앞에 멈춰선다.
그가 꺼내든 꽤나 고급진 병은...적어도 이 키보토스에선 구하기 힘들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가씨 친구가 얼마 전에 맡겨두고 갔어. 기일에 다 모이면 선물해달라고 하더군."
"......노도카도 참. 천문학도가 돈이 어딨다고 이런 걸......"
머쓱해져서 괜시리 친구 탓을 한 번.
병을 받아들더니 '이게 또 보드카 중에선 풍미가 으뜸이야' 라거나, '안 그래도 부탁할랬는데 센스가 좋아' 따위의 말을 꺼내며 헤실거리는 것을 보아 하니, 굉장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두 사람이 빠졌지만 또 두 사람이 채워진 덕인지 머릿수도 딱 맞았고, 익숙하게 그릇과 잔을 세팅하고 나니 언제나의 소박하고 근사한 파티장이 되어 버렸다.
한 번 서 봤다고 사실상 고정 MC가 되어버린 그녀.
하야세 유우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 뭐, 안 온 사람들은 아쉽지만 내년에 오면 되니까. 그럼--"
오늘따라 자주 등장하는 불청객.
들어오지도 않고 노크만 들려오는 문 쪽으로 의아하게 고개를 돌리고, 이내 '들어오세요' 사인에 그 불청객이 문을 열었다.
어찌 보면 히나와 이로하 때처럼.
아니, 그 이상.
당황과 반가움이 뒤섞인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이야~이거, 수석행정관님 아니야? 아니아니, 이제 편집장님이지!"
"...비행기 태우지 마세요. 멀미 납니다."
나나가미 린.
허겁지겁 찾아온 것인지 흐트러진 머리와 썩 어울리는, 조금씩 닳아가려는 정장.
호시노가 말했던 대로, 편집장 승진 파티인지 뭔지 한다고 잡혀있을 테니 불참한다고 했던 그녀가, 마지막 퍼즐 조각이라도 맞추듯 모습을 드러냈다.
"......"
린은 가만히 서서 가게 내부를 둘러본다.
언제나처럼, 아니, 언제나보다 좀 더 많은 양의 라멘과 당당하게 자리잡은 맥주. '한 그릇 더' 를 외치는 아루에다가, 벌써 한 잔 걸친 것마냥 이 쪽을 보며 물개박수치는 호시노 하며, 술병을 끌어안고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시구레.
헛웃음을 참을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하여간 그녀는 자연스레 가방을 내려놓으며, 유우카가 빼 준 의자에 착석한다.
"린 씨, 오늘 승진 회식 있었다며? 어떻게 된 거야?"
"자기들 명분일 뿐이었습니다. 다들 고주망태가 되어가길래 슬그머니 빠져나왔다가, 오늘 여러분의 일정이 생각나서 무심코."
"은퇴하면 나도 출판사나 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시구레의 입은 칸나가 슬그머니 가려버렸고, 미야코가 대신 린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최근에 냈던 여행기 잘 읽었어요. 그것도 린 씨가 담당하신 거죠?"
"네. 뭐, 글은 미사키 씨가 썼고, 검수도 아츠코 씨가 다 해주셔서 전 수월했습니다. 잘 되었으니 다행이죠."
"그거 성공시킨 게 커서 이번에 승진한 거라 했지? 미사키 씨에게 밥이라도 사야겠네."
아루는 여러모로 잘 되었다는 듯 싱글벙글이었다.
'세상을 더 구경해보고 싶다' 며 돌연 여행가 선언을 했던 이마시노 미사키. 그녀는 그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착실히 기록했고, 그 기록을 대형 꽃집에서 경험 삼아 근무하던 하카리 아츠코에게 넘겼다.
아츠코는 미사키의 변화에 '눈물' 을 흘리고는 츠치나가 히요리에게도 몰래 보여주었고,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던 히요리는 졸업 후 밖에서 편집자로 일하던 린에게 그 기록을 넘겨주었다.
린은 은근슬쩍 카케하시 스바루와 타치기 마이아, 아츠코의 도움을 받아 수기를 그럴듯하게 만들어, 이내 미사키의 분노와 허락을 얻어내 출판했던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
책은 불티나게 팔렸고, 내심 불안해하던 미사키는 순식간에 여행과 수기에 맛들려 아예 제대로 다니기 시작했으며, 안 그래도 주목받던 린은 편집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게요. 아예 옛 스쿼드 분들도 모시고 대접해야겠군요. 스바루 씨와 마이아 씨도 모시구요."
린도 슬며시 미소지었다.
편집자 업무도 고되었기에 결국 예전의 그 밝은 미소와는 영영 이별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렇게 옅게 미소짓는 습관이 생겼다.
잘 보면, 수석행정관 시절보다 눈매가 약간은 부드러워진 것 같기도 하고.
"잘 됐네! 온 김에 하루 묵고 가지 그래? 늦게까지 마실 생각인데."
시구레는 기다렸다는 듯 린을 붙잡는다. 아무래도 예상치 못한 술친구는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괜찮겠죠. 다들 내일 일찍 출근하기는 힘들 테고, 마감도 좀 남았으니까요."
"시원시원해서 좋네~ 아주 옛날에 이랬으면 고생도 덜 하고 좋지 않았겠냐구."
예상보다 더 흔쾌히 수락하는 린에게, 히죽거리는 호시노가 대뜸 날카로운 농담을 던진다.
"선배 문제로 시름시름 앓던 당신이 말하기 있습니까."
물론, 그녀 역시도 순순히 당할 '짬' 은 아니었기에.
그 모습을 보며 한도끝도 없겠다고 직감한 유우카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 됐어! 이런저런 말 다 생략하고 건배부터 하자! 린 씨 라멘은 금방 나올 테니까, 일단 잔부터 들어!"
그래, 할 건 해야지.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잔을 들었다.
잠시 뜸들이던 유우카가, 머쓱한 웃음을 짓는다.
"간만에 왔는데, 린 씨가 할래?"
"됐습니다. 라멘 아직 안 나와서 안 할까 싶습니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꼬장 잘 부리네."
"역시 당신에게 들을 말은 아닙니다."
낄낄거리는 호시노를 보며, 린이 옅게 미소지으면서 대꾸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우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잔을 들었다.
"하여튼! 내 말 끝나면 다 같이 위하여만 해! 알겠지?"
"역시 세미나 회계 출신이야. 일처리가 좋네."
"히나 씨, 지방 방송 금지!"
좌중을 휘어잡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그 얼굴들을 잠깐 묵묵히 바라본다.
시간은 흘렀다.
문득 돌아보니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얼굴들이 있었다.
...뭐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었지.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고, 사무치도록 슬펐을 때도 있었고, 그만 둬 버리고 싶을 때도 있었고. 이겨낼 수 있을까 싶었던 순간도 있었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어려운 시간을 넘고, 한없이 낮은 가능성도 넘고.
그렇게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덧 일상이 된 새로운 풍경도 있었고.
그 때 그 사람도, 이런 풍경을 보았을까.
그 때 그 사람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모두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괜찮아.
그러니까 나중에 만나면 많은 얘기를 나누자.
저는 이랬어요. 선생님은 어땠나요?
어때요. 우리 잘 컸나요? 잘 배웠나요? 잘 해왔나요?
그렇게 물어보고, 엄청 뿌듯해 할 그 사람 앞에서 잔뜩 자랑하자.
그러니까.
우리가 여전히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처럼,
지금의 아이들도 우리를 생각할 수 있기를.
우리가 그 사람에게 받은 것들을 소중히 하는 것처럼,
지금의 아이들도 우리가 주는 것들을 소중히 하기를.
힘들더라도, 세상과 당당히 마주볼 수 있는 어른이 되기를.
그런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아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기를.
"--학원과 청춘의 이야기를, 위하여!"
학원과 청춘의 이야기가, 언제까지고 계속되기를.
"""위하여-!!!"""
[[ 선생님이 10일 뒤에 죽는 이야기 ]] -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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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온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함
원래 이렇게 늘어질 얘기가 아니었다
한 10~15화 정도의 짧은 이야기였는데, 이것저것 살을 붙이다보니 70화 가까운 장편이 되어버렸네;;
심지어 상상에 비해 현생이 바빠 중간중간 늘어지고ㅋㅋ 그래도 시작한 건 완결내서 다행이다
큰 스토리는 2024년 6월에 짜였고, 몇몇 중요한 설정들은 거진 2025년 중반 즈음 잡혀있었음
몇 가지 이야기들을 이어붙이고 뜯어고치고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 시작하고, 현생 살면서도 계속 써내려가느라 자연스레 늘어졌지
그러면서 여러 공식 스토리가 진행되었고, 지금 보면 맞지 않는 이야기들도 생기면서 그거 수정하는 데에도 시간을 되게 많이 썼다
거의 대부분의 설정과 스토리는 그 당시 기준으로 아예 틀도 없었음ㅇㅇ 총학생회장이나 카드라거나, 상자의 기전 이야기라거나...
그러니까 그냥 2024년 경에 나온 2차창작 스토리라 생각하고 너그러이 읽어주면 좋을 것 같음
내가 세이아마냥 미래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ㅋㅋ
근황 얘기가 없는 학생들도 많은데, 어떤 삶을 살고 있던 나름대로 잘 살고 있으리라 생각했으면 좋겠음
우리가 학창시절에 알고 지냈던 친구들 대다수가 연락은 닿지 않을지언정 잘 살고 있는 것처럼......어디서 무엇이 되었건 잘 살고 있겠지
이번 이야기로 장편에 대한 교훈을 많이 얻었다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또 삘받고 쓴다면, 그땐 지금처럼 왕창 늘어지지는 않게 해보려고
당분간은 이전에 썼던 것처럼 생각날 때마다 쓰는 단편으로 올게
그동안 재밌게 읽어줘서 고맙다
앞으로도 재밌게 읽어줘
완결난 이것도 생각날 때 한 번 찾아줘ㅋㅋ
댓글 28

정말 고생 많았어.
재밌었다 진짜 잘봤음
완결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