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mEOpHE8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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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마키 마이가 큐 사인을 보낸다.
비로소 키보토스 전역으로 생중계되는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고, 카와루 시논이 언제나처럼의 깨발랄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잡는다.
[ D.U. 시라토리 구의 총학생회 앞은 언제나처럼 북적북적입니다! 표정만 보면 선생님이 살았는지 돌아가셨는지 알 수 없을 정도에요! ]
그녀 말마따나, 거리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행인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키보토스도 변함없이 혼돈 그 자체입니다! 게헨나에서는 폭발이 일어나고, 밀레니엄에서는 기계의 돌발행동으로 C&C가 출동하고, 붉은겨울에서는 며칠 사이에 15번의 쿠데타 시도가 있었죠! 오늘 아침에 있었던 두 건의 미수를 합치면 17번입니다! 물론 총학생회에서는 항상 그랬듯이 별다른 입장 표명은 없었구요! ]
평범한 일상 그 자체.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긍정적(?) 일화들을 풀어놓은 시논은, 대뜸 카메라 앞으로 다가서더니 흥분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인다.
[ 원상복구된 키보토스는 겉으로는 평화롭습니다만, 이건 사실 총학생회 측이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거대한 공작을 벌인 게 아닐까요?! ]
초록은 동색이라고, 카메라를 붙잡은 마이 역시 그녀를 말릴 생각 따위 없어보인다.
[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키보토스 어딘가에 그걸 이용하려는 세력이 있고, 사실 그 배후가 총학생회인건 아닐까요?! 설마설마하던, 총학생회와 각 학원 회장들의 유착 관계가 여기서-- ]
더는 못 들어주겠다는 듯, 방송 화면이 알록달록한 조정 화면으로 변하더니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져버린다. '연결 상태가 불량하니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따위를 내뱉는 그 화면만이, 평범하게 폭주하려는 그녀들을 가로막는 유일한 장애물같다.
잠시 지나니 화면이 다시 연결되고, 그닥 신경쓰지 않는 듯한 시논의 모습이 다시 등장한다.
[ 키보토스는 어쨌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각 학원 학생회나 샬레, 총학생회에 관심 가지는 학생들도 꽤 늘어났구요! 그저께 오픈한 종합 견학 사이트도 SNS 등지에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
오늘 처음으로 유의미한 소식을 전한 시논을 뒤로 하고, 카메라가 천천히 앵글을 돌려 총학생회 건물 입구를 담는다.
그 말만큼은 거짓이 아니라는 듯, 출입하고 있는 몇몇 학생들은 꽤나 다양한 옷차림이었다. 총학생회 제복도, 각 학원 지정 교복도.
그 사이에 서류더미를 들고 잔뜩 성이 난 채 걸어나오는 카야 닮은 사람이 잡힌 듯 긴가민가하기도 했으나, 그 쪽에 미처 신경쓰기도 전에 다시 한 번 시논이 튀어나와 화면 전체를 잡아먹는다.
[ 물론 학생들의 식견을 넓히는 순기능을 하리라 기대되지만, 혹시 이건 일견 불온한 정치적 사상을 심어, 모두를 정권의 꼭두각시로 만들려는 총학생회의 거대한 음모가-- ]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 번 연결이 끊어진다.
그리고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이내 TV 화면이 암전되어버렸다.
도끼눈을 한 이즈미모토 에이미는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리모컨을 내린다.
"...역시, 세상엔 이해 못 할 놈들이 너무 많아."
"어머나. 크로노스가 그러는 게 어디 하루이틀인가요?"
무로카사 아카네는 정말 단 하나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태연히 맞받아치고, 에이미는 반박할 거리가 없다는 듯 숨을 고르고는 방 안쪽으로 눈을 돌린다.
어쩌면 자신 이상으로 똥씹은 표정이 되었을 케이.
케이가 바라보고 있는 모니터의 앞, 기어코 컨트롤러를 집어던지더니 옆 사람의 멱살을 잡는......미카모 네루.
"야! 장난하냐?! 이딴 걸 게임이랍시고 만들었어?!"
"컥, 커걱, 자고로 개발이란 세상에 없던 걸--"
"--열쇠는 힌트도 없이 숨어 있고, 조작키는 랜덤하게 바뀌어서 당최 진행도 안 되고, 저장했더니 인생은 저장할 수 없다면서 세이브 데이터 날아가고! 대놓고 엿먹이는 요소밖에 없는데 이게 게임이냐?!"
아무래도 네루는 게임개발부의 신작 베타 테스트를 도와주려던 모양이다.
다만 심히 비극적이게도 그건 게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악질덩어리 산업폐기물이었던 모양이며, 그렇기에 이딴 걸 권해놓고 실실거리던 사이바 모모이의 멱살을 잡아올리는 것으로 대답하는 모양이다.
케이 역시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던지, 못 볼 걸 본 듯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아니, 유즈는 잘만 했는데......네루 선배가 허접인 게--"
"허접? 허접?! 그 녀석을 기준으로 쳐만들어놓고는 뭐?! 허접?! 그 녀석처럼 못 하는 게 당연하잖냐!"
"그, 그러니까 그게, 네루 선배가 허접이라는 뜻--"
"--오냐! 이딴 거 만들 바엔 그냥 여기서 죽어라!"
...멱살을 잡힌 사이바 모모이는 죽어가면서도 그 간사한 세 치 혀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제 명줄을 재촉하는 변명이 될 거라곤 알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알았음에도 도발을 멈추지 못했거나.
"...게임성 측면에서 내가 남길 수 있는 평가는 없어. 다만 게임 캐릭터의 디자인 측면으로는 일정 부분 조언이 가능할 것 같아. 돌아가고 나면 개선점의 시안을 만들어 제공해 줄 테니 적극 검토해 주겠어?"
"아......그, 감사하긴 한데요, 그게...참......"
반면 츠카츠키 리오는 게임성 쪽은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답지않게 디자인으로 접근하고 있었고, 심지어 이해할 수 없게도 승부욕에 불이 붙었는지 굉장히 적극적이었으며, 대재앙을 직감한 사이바 미도리를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지켜보던 텐도 아리스가 정말로 악의 없어 보이는, 순도 100%의 미소로 리오에게 다가간다.
"리오는 디자인 분야에서 영구밴입니다!"
"......어, 어째서? 난 그저 심미적인 면을 무너뜨리지 않는 측면에서, 최대한 효율적이고 전위적인 디자인을--"
"--구립니다!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그럴 리가......"
악의 없는 발언은 리오를 격침시킨다.
금방이라도 작업에 들어 갈 기세였던 리오는 금세 의기소침해져 잔뜩 풀이 죽어버린다. 오히려 미도리가 애써 위로해주기 시작할 정도로.
"...어때요, 에이미? 거짓말같이 일상으로 돌아왔죠?"
아케보시 히마리는 에이미의 옆으로 다가와 그리 웃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의 에이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얼마나 당혹스러운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죽음은 크나큰 의미를 갖죠. 다만 그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만을 내포하진 않아요. 어쩌면 어른으로 나아가는 단계에서, 누구나 겪지만...누구나 극복해 낼 수 있는 과정일 지도요? 네에, 실로,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일지도."
"...그런 걸까..."
히마리의 말을 잠자코 듣던 에이미는,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쉽게 와닿지 않는 눈치였다.
"그렇게 펑펑 울고 슬퍼하던 사람들이 저렇게 돌아온 게...여전히 잘 납득되지 않아. 나는 여전히 쓰라린데."
쓰라리다고.
제 심장 쪽을 어루만지는 에이미는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정의했다. 선생 생각만 하면 여전히 고통스러운 이 감정이라면, 아마 그렇게 불러야 할 테니까.
"그건 나쁜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야."
"...유우카."
"오히려, 잊지 않고 있다는 증거야. 뭐...다른 애들이 선생님을 잊었다는 건 아니지만."
하야세 유우카는 약간은 안쓰럽다는 미소를 지었고, 에이미의 한 발치 멀리서 팔짱을 낀다.
"...그것도 사람마다 다른 걸까. 이렇게나 와닿는 감정인데."
"나도 똑같으니까. 선생님을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는 게 슬퍼. 목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 괴로워. 그렇지만, 마냥 울고만 있지는 않으려고."
한 가지 감정에만 매몰되어있을 수는 없다.
시간은 흐르기에, 결국은 털고 일어나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히마리의 말마따나, 돌아보면 강렬한, 다만 종종 생각나는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지나간 기억이기에 그만큼 강렬하고 또 아프지만, 그저 들춰볼 뿐인. 앞으로 나아가는 걸 막기보단 뒤에서 밀어줄 수 있는, '에피소드'.
유우카가 슬쩍 뒤를 돌아본다.
"그치, 노아?"
"......네. 그 말이 맞아요."
우시오 노아도 따라 웃는다.
"기억은 아프지만 또한 아름다우니까요. 그 기억이 저주이냐 축복이냐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겨내기 쉽지 않더라도 이겨낼 수 있을 거에요. 저에게 유우카 쨩과 코유키 쨩이 있듯, 에이미에게도 그걸 도와줄 이들이 있을 테니까요."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쓰라린 기억에 제일 크게 베였을 그녀이기에.
여전히 그 상처가 방금 난 것처럼 생생하고, 사람을 잡아먹는 블랙홀같이 깊은 상처에 끌려들어가곤 하지만, 그럼에도 일어날 수 있다고.
말없이 옆을 지켜주는 이들과 함께라면, 지금까지 헤쳐나온 스스로라면, 분명 이겨낼 수 있다고.
여전히 쓰라리지만, 우시오 노아는 웃었다.
때로는 울기도 하겠지만, 웃는 법을 잊지 않아보려고 한다.
"뭐, 원래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
카가미 치히로는 에이미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애늙은이라도 된 것마냥 그리 말했다.
"어떤 일이던 뒤돌아보면 지난 일이야. 그러니 앞을 봐야지. 뒤는 그저 참고할 뿐이야. 보안도 똑같아.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에 있을 공격을 방어해내는 거고, 우리가 사는 것도 과거를 바탕으로 미래를 살아가는 거야. 그런 과정이라고 생각해."
"캬! 완전 선배다운 말을 하네!"
"난 좋아. 미지의 지식을 탐구하는 건 미래를 위한 행동이니까. 베리타스의 존재 의의 그대로야."
코누리 마키는 코 끝을 슥 닦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것이 한 5% 정도는 놀림을 담았다고 깨닫기 직전, 그 옆에 있던 오마가리 하레도 깜빡이 없이 끼어들었다.
"...앞을 보는 건 중요하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의 존재를 확실히 파악하려면 그만큼 시각 자료도 중요하니까요. 좋은 말입니다."
오토세 코타마도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듯 만족스러운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다 좋아. 코타마. 다 좋은데 말이야."
헌데, 치히로만큼은 뭔가 아니꼬운 점이 있는 모양이다.
"앞을 보랬지 앞을 엿보랬어? 보안 점검 나가면서 총학생회 회의실에 설치한 도청기는 다 폐기했으니까 그렇게 알아."
"...밀레니엄의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는데..."
예기치 못하게 수족이 잘려나간 코타마가 이내 시무룩해진다.
그에 그치지 않고, 치히로가 천천히 하레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 눈빛만으로도 그녀가 대경실색했음은 구태여 얘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 공범께서 사 둔 요괴맥스도 다 다른 동아리 줘 버렸어. 그거 구매한 돈의 출처가 불분명하더라? 꼭 누군가에게 도청기 설치 묵인의 대가라도 받았던 것마냥."
"......으으, 지성인의 음료는 죄가 없는데......"
결국 꼬리가 밟힌 하레도 코타마 옆에서 시무룩해진다. 오직 마키만이 당장의 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그녀라고 내부에 있는 누군가에게 '총학생회 건물 외벽에 베리타스를 상징하는 그래피티를 박아보지 않겠나' 라는 제의를 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만, 느낌이 싸해 은근슬쩍 발을 뺐던 것이 천운이었다.
...그래. 어떻게든 될 것이다.
에이미는 이내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는지, 얼굴 한 구석에 드리웠던 그림자를 말끔히 지워내었다.
"......유우카."
히마리는 나지막히 유우카의 이름을 부른다.
그녀는 마치 보란 것처럼 모두의 일상을 바라보더니, 실로 학생다운 모습이 아니냐는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보이나요? 누군가의 책임으로부터 출발해, 가르침과 배움을 거쳐 자기변화를 담고, 마침내 이 곳에 도달한 풍경이."
"......응. 잘 보여. 아주 잘."
"후훗, 그러니까 부디......기억해줄래요? 어떤 일을 겪고 어떤 고난에 부딪히더라도, 모두가 즐거이 웃을 수 있는 이 소중한 순간, 즐거운 모습을."
아케보시 히마리.
그녀는 유우카를 향해 싱긋 미소지으며, 그녀가 이 둘도 없을 소중한 모습을 꼭 기억해주길 바래온다.
무언가를 눈치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우카야말로 그리 할 것이라 믿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순간보다도 '전지(全知)' 의 기운을 짙게 풍겨오는 그 시선에 진심이, 그 이상 가는 강한 믿음이 담겨 있었다.
"......"
유우카가 창밖을 바라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 너무나도 화창하고 눈부셔서, 어쩌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들려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유우카는 그 햇빛에 몸을 맡기고, 햇빛처럼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응. 반드시."
* *
"--해서, 최종적으로는 아리우스를 트리니티에서 분리된...별개의 학원으로 독립시키기로 했습니다."
키리후지 나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들어올린다. 길고 격렬했던 트리니티에서의 회의가, 결국은 나기사의 의도대로 매듭지어진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는......"
"네, 스바루 씨. 더 이상은 '아리우스 분교' 가 아닌, '아리우스 학원' 의 학생이 되는 거에요."
약간은 멍해보이기까지 하는 카케하시 스바루에게도, 그 처우에 대해 확실하게 상기시켜 두었다.
"총학생회에서도 곧 아리우스 학원의 신설을 공표할 것이고, 학생들의 원활한 학업과 자치구의 운영에 대한 인프라와 자금을 지원하겠다더군요. 신설 학원에 대한 초기 지원은 적어도 제 기억에선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만......수석행정관의 의중이 강하게 반영된 모양입니다."
나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어보인다.
"학원이 신설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이거든요. 법리적 문제는 유권해석이 가능한 쪽의 의중이 십분 반영되는 법입니다."
"......정말, 아리우스가 독립하는 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 조마에 사오리를 바라보던 나기사는, 홍차 한 모금을 더 하더니 약간은 진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사오리 씨, 스바루 씨. 그리고 스쿼드 여러분. 더 큰 문제들이 이제부터 시작될 겁니다."
그래.
이건 결승선이 아닌 출발선.
"총학생회 공인 학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체계적인 학원 수뇌부가 구성되어야 하고, 학원과 자치구의 운영 방안도 수립되어야 합니다. 편입을 포함한 신입생들의 모집을 위한 행정처리와 학사일정 조정도 필요하죠."
"...상상은 했지만, 복잡한 문제들이군."
"법리적, 행정적 문제 뿐만이 아닙니다. 학원 내에서 제기되는 다양한 의견이나 민원, 혹은 분쟁에 대해서도 해결해야만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학원들과의 외교 관계 역시 검토해야 하죠."
나기사의 설명은 가히 아찔했다.
그냥 아이들이 모여 '나 학원이오'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누군가는 그 대집합을 이끌고 관리해야만 했으니까.
그동안은 크게 신경쓰지도 않았던 '직책에 대한 책임' 이라는 무거운 짐을, 티파티의 호스트께서 친히 던져주시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부담감을 눈치챈 것인지.
나기사는 이내 표정을 바꿔 씨익 웃어보였다.
"다만...이제 그런 것들에 트리니티의 의중은 필요없습니다. 여러분의 학원이니까요. 여러분이 만들어 가시면 됩니다. 천천히, 한 걸음씩."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
이제 막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아리우스를 향해, 나기사는 그렇게 심심한 응원을 건넨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여러분께서 지금 결정해주셨으면 하는 사항이 있습니다."
"......뭔데?"
"임시 학생회입니다."
미사키의 의문스런 표정을 향해, 나기사는 '임시 학생회' 라는 화두를 던졌다.
"지금까지는 스바루 씨의 분투로 어떻게든 되었지만...아리우스가 정식 학원으로 인정받기 위해선, 적어도 학생회는 당장 필요합니다. 지금은 시기 상으로 선거를 하기 곤란하니......우선 임시 학생회를 꾸려, 체계가 개선되고 난 뒤를 도모하시는 게 좋겠죠."
나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스바루를 힐끔 바라보았다.
책임감 하나로 그 모든 부담을 끌어안았던, 이제서야 그 부담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던 그녀다. 또 한 번 '임시 학생회장' 같은 직책이 부담이 되진 않을지, 그걸 염려하는 모양이었다.
스바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자신이 아리우스를 여기까지 어떻게든 끌고 오긴 했다만...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 무리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학생회라니. 자신이 세상의 법칙을 깨닫고 맞춰나기기엔 아직은 부족했으니까. 남은 후배들에게 고통이 되진 않을지가 우려스러웠다.
"......저는--"
"--내가 할게. 임시 학생회장."
그 고민을, 하카리 아츠코가 날려주었다.
"학생회라는 건 어느 정도 봤으니까. 완벽하진 않더라도 잠시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아츠코..."
"애초에 나, 로열 블러드잖아? 도망쳤던 그 책임을 이렇게 질 수 있다면 감사한 일이야."
아츠코는 그렇게 말하며 스바루를 바라본다.
"어때? 학생회, 우리가 해도 될까?"
"...정말, 당신들은......네. 상관 없습니다. 아이들도 당신들이라면 잘 따를 것 같아요."
스바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따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명분도 능력도 있는 사람이 나서겠다면 말릴 이유가 없다.
그러나, 정작 사오리가 곤란하다는 듯 나기사를 바라본다.
"하지만...우리에겐 아직 남은 게 있다. 아직 우리 죄에 대한 대가도 치루지 못했어."
"죄에 대한 대가......그건 괜찮습니다."
"......무슨 소리지?"
"가석방 처리 되었으니까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의 사오리와 스쿼드를 보며, 나기사는 미소를 머금은 채 홍차 한 모금을 또 한 번 마셨다.
"여러분이 자수하려 하신다는 소식을 발키리 공안국에 '슬쩍' 흘렸습니다. 부국장...이었나요? 이렇게 자수하려 한다는 건 처음이라고 감격하더군요. 가뜩이나 자리도 없으니까, 그냥 가석방으로 처리할 테니 찾아오지 말라는 전언입니다."
"......"
가석방 처리.
공안국 부국장 코노카가 전했다는 그 말에, 사오리는 할 말을 찾아보려는 듯 필사적인 얼굴이 되었으나...이 상황에 맞아떨어지는 그 어느 말도 찾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간신히 할 말을 찾은 사오리는, 이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연다.
"......이런 일이, 정말 이렇게 쉽게 풀려도......"
"...아뇨, 사오리 씨. 쉽게 풀린 게 아닙니다."
나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에게 서류 뭉치를 꺼내어 천천히 내밀었다.
'탄원서' 라고 적힌 제목의 서류들을.
"여러분께 꼭 보여드리고 싶어서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여러 곳에서의 탄원서를 전달받아서, 저희가 대표로 발키리에 제출했죠."
"탄원서......라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채, 사오리는 조심스러운 손동작으로 사본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피해자였던 트리니티와 게헨나. 사태를 파악한 총학생회. 활약상을 전해들은 아비도스. 그 외에도 수많은 학원의 다양한 이름으로 된 탄원서들이 넘어갈 때마다, 사오리의 손이 조금씩 조금씩 떨려간다.
특히 그녀의 손이 멈춘 곳은, 게헨나의 소라사키 히나가 쓴 탄원서였다.
선생에게 해를 가했던 것에는 분노했으나, 선생이 용서했고 기회를 줬으니 자신도 그러겠다고.
선생이 믿어준 아이들이니, 그 어느 누구보다도 당당하고 부끄럼 없는 삶을 살도록 선처해달라고.
...더불어, 마코토가 독단으로 청구한 미용실 비용은 매몰비용 처리할 테니 피해 집계에서 빼 달라고.
소라사키 히나가 손으로 정성껏 썼을 마지막 탄원서를 내리니, 사오리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들에 둘러싸인 모양이었다.
"이렇게 많은 탄원서도 처음 받아본다는 군요."
"......저, 정말......그런 죄를 지은 우리에게...이런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져도......괜찮은 건가......?"
"때로는 그런 거짓말같은 일이 벌어지곤 한답니다. 갑자기 나타난 선생님께서 저희 모두의 삶을 뒤바꿨던 것처럼요."
나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산다는 건 그런 겁니다, 사오리 씨. 잘못된 판단을 하기도 하고, 그걸 용서받기도 하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엔 더 나은 선택을 하고...저도, 여러분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런가......그렇게......"
"......축하드립니다, 여러분. 그 죄의 대가를 마침내 정산하신 걸요."
미소를 지었던 키리후지 나기사가, 이내 약간은 머쓱하다는 듯한 웃음으로 바뀌며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이 자리를 빌려서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지난날 트리니티가 여러분께 가한 일체의 비상식적인 모든 행위에 대해,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사태 수습 시까지와, 앞으로의 문제에 대해서도 신속하고 성실히 임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미안해. 아무리 잘못된 가르침에 속았다지만, 모두에게 정말 못된 짓을 했어. 도의적 책임을 갚아나간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게."
나기사의 사과에 아츠코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녀를 따라 미사키와 히요리도 고개를 숙였다.
...사오리 역시,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그래. 정말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내가 배운 이 가르침을......후배들에게 전할 기회를 줘서."
"여러분의 앞날을 진심으로 응원하겠습니다. 후대의 양 학원이 서로 웃으며 마주하는 날이 오기를."
모처럼 상쾌한 미소를 지은 나기사를 바라보던 아츠코가, 이어 모든 스쿼드원들이, 슬그머니 스바루를 바라본다.
뜬금없이 제 자신에게 날아온 시선들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던 스바루도...이내 모두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의 적대적인 행위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사실 아직 혼란스럽지만...이제는 미래를 믿어보려고 해요."
짧고 굵었던 선생과의 만남이.
증오를 깨부쉈던 나기사와의 만남이.
당혹스러웠던 미네와의 만남이.
변해버린 스쿼드와의 만남이.
그리고......마침내 과거를 극복한 자신과의 만남이.
스바루도, 드디어 한 걸음을 내딛어보려는 모양이다.
"정말 기뻐. 아리우스의 새 선도부장께서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저도 제가 이런 감정을......잠깐, 지금 뭐라고 하셨죠?"
"응? 아리우스의 새 선도부장님이라고 했어."
스바루는 잘못 들었냐는 듯 자신을 가리킨다.
아츠코는 잘 들었다는 듯 스바루를 가리킨다.
실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선도부? 제가요?"
"응. 달리 할 사람은 없잖아?"
스바루는 어찌보면 부정해주길 바라는 눈빛으로 스쿼드를 바라보았다.
다만 그녀의 바램은 실로 허황된 것이어서, 고개를 돌린 곳에는 각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스쿼드가 있을 뿐이었다.
"...뭐, 스바루 선배만한 적임자가 없지."
"아아. 물론이지. 스바루라면 문제없다."
"헤, 헤헤...왜, 왠지 어울리네요......"
스쿼드는 그 인선에 전혀 반대하지 않는 모양이었고, 심지어는 나기사마저 결정되었냐는 듯한 웃음으로 이 쪽을 바라본다.
뭐 말할 새도 없이 진행된 이야기에 당혹스러워하던 스바루에게, 아리우스 학원 임시 학생회장 하카리 아츠코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학생회장. 삿 쨩은 총무 겸 부학생회장. 미사키는 회계. 히요리는 서기. 그러니까, 니코메디아 트룹이 선도부를 맡아줬으면 좋겠어. 그래서 스바루에게 부탁하는 거야."
아리우스 학원 임시 학생회장 하카리 아츠코는, 이내 카케하시 스바루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리우스를 어디에도 뒤쳐지지 않을 멋진 학원으로 만들어보고 싶어. 우릴 도와주지 않을래?"
소망.
아츠코의 그 말에, 잠시간 가만히 응시하던 스바루가 슬며시 미소지었다.
"...좋네요. 목표는 일치하는 모양이군요."
그리고, 미래로 향하려는 그 손을 맞잡았다.
"선도부인 니코메디아 트룹으로서...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아츠코 학생회장."
* * *
"카야, 알고 있나요?! 당신이 취합한 자료, 완전 엉망이에요!"
총학생회의 어딘가 복도.
통괄실 행정원 하나가 내뱉는 날카로운 소리가 가득 울려퍼진다.
"인터넷에서 긁을 시간 있으면 뛰어나가서 발품 팔라니까요? 책상 앞에만 있으면 현실이랑 동떨어지는 법이라고 수석행정관께서 누누히 얘기했는데도, 당신이란 사람은 진짜......!"
카야. 시라누이 카야.
실장 제복도 죄수복도 아닌, 행정원으로서의 제복을 입은 그녀는 뜬금없이 날아든 지적에 어안이 벙벙해져, 벙찐 표정으로 그 행정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간 그렇게 두 눈 동그랗게 뜨고 있던 카야는 이제서야 입을 떼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감정 가득 담아 목소리를 낸다.
"...그건 분명 완벽한 조사였을 텐데요..."
"완벽은 무슨, 딱 봐도 인터넷 위키백과에서 복사 붙여넣기하고 줄만 조금 뗀 거 다 티나거든요?!"
애석하게도, 그건 카야 혼자만의 고평가였던 모양이다.
"통괄실에서 그따위로 보고했다간 업무량 곱빼기라고 몇 번 얘기하나요?! 하여간...차장 선에서 빠꾸먹도록 몸 비틀어놨으니까 다시 제대로 조사해서 올려요! 최대한! 빨리! 나 원 참......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일을 돕지는 못할망정......!"
그 행정원은 더 이상 반박할 거리도 없다는 듯 곧바로 몸을 돌리더니, 한껏 성이 난 표정으로 저 멀리 가 버린다.
...복도에는 카야 혼자 남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그녀는 행정원이 멀어진 쪽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주먹을 꽉 쥐고 부르르 떤다.
( ...그동안 안 해 봤던 건데, 나보고 어쩌라고......! )
실장의 업무와는 오천만 년 정도 떨어져있는 업무들.
백번 양보한다 쳐도, 방위실과는 전혀 딴판인 통괄실의 업무.
안 해 본 일인데 너무 완벽을 요구하는 거 아니냐고.
보기 좋게 강등되어버린 카야가 잔뜩 열불내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에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덧없이 가라앉아버리고, 부들거리던 주먹에도 힘이 빠져 너덜거렸다.
( ......하여간. 텃세들 하고는......)
린의 호언장담대로 카야의 복귀안이 상정되었고, 예상대로 꽤나 날선 반대에 부딪혔으나, '곁에 두고 직접 조지겠다' 는 뉘앙스로 강하게 나온 린의 선전포고에 결국 행정원으로의 복귀가 가결되어버렸던 것이다.
각오는 했지만...너덜너덜하네, 정말.
머릿속을 오직 그 생각이 잡아먹어버렸다.
"오, 이게 누구야? 전임 방위실장 아니야?"
듣기만 해도 신경 박박 긁는 목소리.
고개를 들어보면, 체육실장 하이네가 싱글벙글 웃으며 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하필. 당신?
카야는 반쯤 도끼눈이 되어 하이네를 바라본다.
"이제야 좀 어울리는 옷을 입었네! 통괄실은 할 만한가?"
"......누구 놀려요?"
"놀리는 거지! 체육을 업신여기더니 이 꼴이 됐잖아!"
"고작 그딴 것 때문에 이 꼴이 된 게 아니라......!"
신경 박박 긁어오는 하이네를 짜증 가득 바라보던 카야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는 듯 잠깐 입을 벌리더니, 이를 박박 가는 표정으로 명백히 하이네를 노려본다.
"그러는 당신도 일을 제대로 하긴 해요? 당신네들이 제출한 대운동회 계획서 완전 엉망이잖아요!"
"어? 대운동회 계획서? 그런 걸 올렸었나?"
"실장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체육실에서 올린 서류들의 최고책임자는 당신이라구요! 아랫사람들 관리 똑바로 하는 거 맞아요?!"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
그렇게 직감한 하이네의 표정이 떨떠름해지기 시작한다.
"같은 종목이 이름만 바뀌어서 네 개가 들어있질 않나! 한 게임에 여섯 시간씩 걸리는 걸 고작 한 시간 편성으로 잡아두질 않나! 참가자들 체력 안배는 생각도 안 했는지 쉬는 시간 텀도 없질 않나! 계획서에 오타는 기본, 행간 엉터리 띄어쓰기 엉터리!"
"......"
"체육의 우월성을 그리도 알리고 싶으면 알차고 효율적인 소종목으로 꽉 채워 빌드업하고, 학원대항전 본선과 결선으로 빵 터뜨리는 게 기본 아닌가요?! 이런 기본적인 것도 엉망이니, 하여간 체육실에는 멍청이들밖에 없다는 소문이 진짜인 것 같네요!"
"......어, 생각보다 일을 하긴 하는 모양이네......"
"하루에 통괄실 거쳐가는 서류들만 몇 트럭인지 아나요?! 저얼-대 처리 안 할 거니까, 수석행정관 폭발하는 거 보고싶지 않으면 빨리 돌아가서 체육실 근육뇌들이랑 계획서 다시 짜서 제출해요! 지금! 당장!"
놀려먹을 걸 찾아 신났다는 감정은 전혀 없이, 쓰잘데기없이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작자에 대한 순수 100% 분노.
어쩌면 그동안 억눌려왔던 감정과 억울함이 일거에 폭발해, 그 모든 분노와 짜증을 하이네에게 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감정을 다름아닌 카야에게 들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지, 하이네는 이리저리 시선을 돌리더니 바쁜 일이 생각났다며 순식간에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하여간 멍청한 년 같으니...예전부터 정말 마음에 하나도 안 드--"
가라앉지 않는 짜증에 미주알고주알 중얼대던 카야가 그 입을 멈춰버리고 말았다.
...몇 발치 떨어진 복도 저 편.
지나가다가 눈이 떡하니 마주쳐버린 두 명의 행정원.
방위실 행정원들은 자신들과 같은 옷을 입은 카야를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는 듯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건 카야도 마찬가지여서, 분명 실장 시절 달달 볶았을 그녀들을 보자마자 뇌가 멈춰버린 듯 오도카니 서 있을 뿐이었다.
......변화를 선택한 건 카야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이내 엉거주춤 몸을 추스르더니, 슬그머니 고개를 숙여 먼저 어색하게 목례했다.
그 카야에게 먼저 인사를 받아서 놀라운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자신들을 알아봤기에 소름이 끼친 것인지.
방위실 행정원 둘은 경악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인사도 없이 황급히 벽 너머로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 ......하아. )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려진 한숨.
피곤하다는 생각이 어딘가에서부터 피어오른다.
"고생이 많아 보이는 걸."
뒤쪽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린다.
시치도 유키노는 놀랍기도 하고 은근히 반갑기도 했던 것인지, 신선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카야 쪽으로 다가온다.
"...유키노, 당신이 왜 여기에...?"
"이제 SRT는 샬레 소속이니까. 그 관련 논의로 방문했다 돌아가는 길이야. 미야코는 잠깐 발키리에 들릴 거라 헤어졌고."
잠자코 듣고 있던 카야는 답을 내지 않았다.
순순히 목적을 밝힌 유키노는 말을 잇지 않았다.
두 사람의 서먹한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아 무너져내린다.
"어때. 할 만해?"
"......전혀요. 다 밥맛인 녀석들밖에 없어요. 하나같이 다 어중이떠중이들이라구요."
무뚝뚝하게 출발한 대답이, 불과 2초도 되지 않아 격앙되어가는 꼬리를 낳았다.
"처음에는 제가 돌아왔다는 게 믿어지질 않는지 꺼려했죠. 슬금슬금 피하더만, 제가 진짜 이 꼴이 되었다는 걸 깨닫더니 돌변했다구요. 온갖 업무 짬처리에 되도 않는 잔소리, 수군수군 뒷담화까지! 안 지치고 배기나요?! 린은 뭐, 그래, 옹호해주긴 해요! 근데 한 번 만나면 업무가 3배는 더 생기니까 볼 때마다 열받잖아요! 본인이 최악의 상관이라는 자각이 있는지 모르겠다구요!"
"...즈, 즐거워 보이네."
"즐거워?! 이게 즐거운 걸로 보여요?!"
적당한 말로 얼버무릴랬더니, 그 말이 카야의 속을 왕창 뒤집은 모양이다.
"뭔놈의 업무는 또 그리도 많고, 서류 양식은 어찌나 복잡한지! 총학생회에서 추진하려는 일들이 뭔지 달달 꾀게 될 수준이라구요! 왜 하필 날 다시 끌어다놓고는 일을 늘리는 건가요?! 통괄실이 원래 이런 부서였나요?!"
카야는 한동안 묵은 화를 쏟아내었다.
미주알고주알 쫑알쫑알 하소연하는 그 모습은 정말 딱 늦게 사춘기맞은 그 나이대 학생으로 보이기도 했고,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꽤나 정직하게 업무에 임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고생이 많다고.
그렇게 반쯤 키득거리던 유키노가 허리춤에 손을 얹는다.
"그래도, 교정국에 있을 때보단 낫지?"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가요? 당신도 통괄실의 멍청이들같은 부류인가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인 카야가, 오히려 독을 품은 듯 당당하기까지 한 얼굴이 되었다.
"굴복은 자기보다 강한 사람에게 하는 거에요! 저는 저런 멍청이들에게 굴복할 정도로 한심하지 않다구요! 그저, 저 하등한 놈들을 제대로 컨트롤하려면 어쨌든 일을 새로 배우는 게 맞다고 생각할 뿐이라니까요?"
"...생각보다 더 올바른 발상도 할 줄 알았네."
잔뜩 성을 내던 카야가 돌연 멈췄다.
유키노는 정말 의외라는 듯이, 적대감 잔뜩 내뿜으면서도 필사적으로 일을 배우는 카야를 향해 응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잘 해 봐. 우리가 살 날은 아직 엄청 남았으니까. 다음 번에 더 좋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으려면, 후회는 하지 말아야 하잖아."
과거의 앙금도, 어쨌든 지나갔을 뿐.
과거의 문제도, 선생이 이끌어주어 넘어왔을 뿐.
흘러가버린 시간을 탓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많았다.
아마 그러한 얘기를 하고 싶었으리라.
카야가, 슬그머니 고개를 숙인다.
"...그래도, 조금 덜 멍청한 사람도 있어요. 아무 적의 없이 코코아를 타 주는 사람도, 처음부터 일을 세세히 알려주는 사람도 있었으니까. 린 냄새 폴폴 풍기는 멍청이들도 있으니까......배울 거에요. 제일 멍청이는 나였으니까, 그러니까......"
곧이어 카야는 고개를 들어 유키노를 마주한다.
독기 가득 서려있는 그 눈은, 총학생회장실에서 봤던 흐리멍텅한 눈이 아니었다.
"......두고 보세요. 당신 따위가 우러러 볼 정도로 다시 일어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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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엔딩이야말로 키보토스에 가장 어울리는 엔딩 아닐까? 모두가 힘을 합쳐 어떠한 난관도 이겨낸다는 뻔한, 그렇지만 기분 좋은 엔딩
책임과 의무라는 주제를 내내 던져와서 이런 스토리도 뽑아볼 수 있겠고, 나는 그래서 이 게임이 너무 좋다
남은 건 에필로그 두 편
여기까지 온 모두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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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을 낸 그대에게 경의를
이게 완결 나는 걸 볼 줄이야
잘 봤는데 분량 한 절반정도 줄었으면 좋았을거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