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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아."
하야세 유우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쉴 일이 부쩍 많아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습관이 되어버린 모양이었다.
잠시 숨을 돌려야만 할 것 같아 수면실 밖으로 나왔다.
문 옆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서 있자니, 짧은 복도 저편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을 지그시 감아버리고 말았다.
(...싯딤의 상자...)
선생은 세 사람에게 싯딤의 상자에 대해 알려주었다.
선생 본인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설정되었고, 메인 OS이자 고성능 AI가 탑재되었으며, 자신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신기한 태블릿이라고.
이름난 그의 지휘 역시도 싯딤의 상자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그 태블릿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 했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세 사람이 오기 전에 나눈 대화 역시도 태블릿의 AI와의 대화였으며, 사용 권한이 없는 학생들은 그 AI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는 모양이었다.
그래, 마치 자그만한 블루투스 이어폰이라도 착용한 것마냥.
(......들어 본 적도 없는 일만...한가득이네.)
어른의 카드.
싯딤의 상자.
그가 일상처럼 가지고 다니기에, 그리 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뒤늦게서야 알게 된 전말이 더욱 충격적인 것이겠지.
자신의 지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으니, 그건 별로 특별할 것이 못 된다고.
그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내뱉었던 사족.
"선생님이 아니면 의미 없잖아요, 그거......"
유우카가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그 말마따나 싯딤의 상자는 오직 선생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이었고, 그 사용권자인 선생이 없어진다면 학생들이 똑같이 내던져지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그 선생이기에 학생들을 모을 수 있었고, 그제서야 싯딤의 상자의 사용 배경이 마련된다는 점에서, 그의 필요성을 부정할 수 없었다.
(졸업하는 학생들을......선생님으로......?)
문 너머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말.
그러나 분명히, 확실하게 들었던 말.
(...그렇게 할 만한 사람이, 대체 누가......)
선생이야 될 수 있겠지.
헌데, 그처럼 헌신적이고 사명적으로, 어찌보면 병적일 정도로 학생들에게 충실한 모습을, 그 누가 보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야세 유우카의 무거운 마음이, 덧없이 흩날리는 억새풀처럼 헤집어진다.
"머리가 복잡하신가보네요, 유우카 씨."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제 앞에 서 있는 하얀 제복의 여학생.
나나가미 린은 한 발치 뒤의 우시오 노아와 함께, 문 옆에 선 채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대행이구나. 언제 왔어?"
"한 30초는 서 있었을 겁니다. 옆에 서 있었는데도 자각하지 못하시더군요."
30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그 시간동안, 나나가미 린은 문 앞에 멈춰 선 채로 고심에 빠진 유우카를 바라보았고, 하야세 유우카는 그런 린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그래? 미안. 머리가 조금 복잡해서..."
"이해합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린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시선을 힐끔 문 쪽으로 돌렸다.
"......선생님께선?"
"괜찮으셔. 오늘은 하나도 나빠지지 않으셨어."
"다행이네요. 이후의 일을 의논하려던 참이었습니다. 들어가시죠."
아무래도 그녀는, 이후의 일을 의논하고자 직접 샬레로 행차한 모양이었다. 선생의 거동이 불편하니만큼 쓸데없는 움직임을 권하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그...아비도스의 타카나시 호시노 씨랑, 게헨나의 소라사키 히나 씨가 왔어."
"...호시노 씨랑 히나 씨? 아아, 뭐, 두 사람도 선생님의 안부가 걱정되었던 모양이군요. 상관은 없습니다."
어차피 두 사람도 결국 관계자일 뿐.
향후의 대응 방침에 대해 딱히 비밀로 하려는 것도 아니기에, 나나가미 린은 그녀들의 방문에 대해 딱히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그렇기에 하야세 유우카 또한 말을 더 잇지 않고, 순순히 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나머지 한 사람, 우시오 노아.
그녀는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신, 작게 머뭇거리며 린과 유우카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답지 않은 머뭇거림을 알아차린 것인지, 나나가미 린은 노아 쪽을 힐끔 바라본다.
...그래.
이후의 대응에만 몰두했던 나머지, 샬레로 오는 길에 노아가 내뱉었던 말이 이제서야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아, 유우카 씨. 아무리 경황이 없더라도, 주의는 조금 기울이셔야 할 것 같네요."
"어, 뭐, 나? 왜?"
린은 대답 대신 노아를 바라본다.
그 시선 끝의 노아는, 유우카에게 무언가를 스윽 건넨다.
그건 노아의 휴대폰이었다.
게다가 누군가와의 통화가 아직 연결되어있는지, 휴대폰의 액정은 누군가의 이름을 화면에 큼지막하게 띄워놓고 있었다.
......미카모 네루.
핸드폰 액정이 띄우고 있는 발신인이었다.
"......네, 전화 바--"
[ --야! 너 대체 뭐하는 거야!! ]
저도 모르게 움찔, 얼굴을 찡그려버렸다.
고요함의 바다를 헤집어놓는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제 고막에 사정없이 펀치를 날려댄다.
"까, 깜짝이야......왜 그렇게 소리를 질러?"
[ 깜짝이고 나발이고, 휴대폰 여기에 던져놓고 대체 어디서 뭐하고 있냐?! ]
......휴대폰?
어안이 벙벙해지는 일갈에, 하야세 유우카는 벙찐 표정으로 제 주머니 쪽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전화도 문자도 없었는지, 주머니 속의 휴대폰은 연신 고요했기에, 그만 그 존재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것 같다.
휴대폰은 없었다.
그제서야 약간 묵직해야 할 주머니가 가볍다는 것을 깨달았고, 더불어 자신이 샬레로 급행하느라 휴대폰마저 세미나실 제 서랍에 내팽개쳐두고 왔다는 것까지 스치듯 떠오른다.
그렇다면, 네루는 부원들과 함께 일주일짜리 극비 작전에 투입되었고, 아무런 연락조차 받지 못한 채 망각되어버렸으며, 코유키만 남겨두고 온 세미나실에서 어안이 벙벙한 채 주인잃은 휴대폰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는 소리가 된다.
......물밀듯이 쏟아지는 죄책감에, 유우카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기어들어간다.
"아......미안해, 네루 선배. 진짜 미안해. 경황이 없어서 휴대폰 두고 온 지도......작전은 잘 끝났어?"
[ 니네 꼬맹이한테 보고서 줬으니까 읽어보셔. 근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
"...어?"
네루의 목소리에는 제법 날이 서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마치 용의자를 신문하는 수사관과도 같은, 경계심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 선생, 무슨 일 있냐? ]
실로 야속함까지 담겨있는 그 말은, 짧지만 많은 것이 함축되어있는 질문이었다.
C&C의 부장이면서, 유우카의 선배이기도 하며, 그녀와 가깝다고도 할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선생을 꽤 마음에 들어하기도 하는 제 자신에게는 일언반구의 귀띔조차 없었던 데에 대한.
"......어? 선생님?"
[ 대답 똑바로 해. 나 지금 되게 열받았으니까. ]
무언가를 아는 듯한 말투.
정말 몰라서 묻는다기보단, 어떤 실마리를 잡은 채 떠 보는 듯한 목소리.
장기 작전에서 방금 돌아왔을 C&C의 부장은, 아무래도 어떤 출처를 통해 사태의 개요를 이미 파악한 것일지도 모른다.
선생의 심상찮은 용태에 자뭇 당황하기도 하고 어안이 벙벙하기도 했을 터이나, 이내 몰려드는 서운함과 배신감에 눈 앞이 핑 돌았겠지.
그렇기에 대답 똑바로 하라는 그 호령은, 아마도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눌러담은, 이성이 걸어낸 마지막 브레이크일 것이다.
"...미안해.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
진실로 진실로, 유우카에게 네루를 속이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나도 너무 경황이 없었을 뿐이야. 선생님, 아마도 돌아가시게 될 거야."
[ ......허어. ]
반쯤은 탄식, 반쯤은 어이없음.
한창 모든 학교의 수뇌부를 복잡하게 만드는 중인 그 뉴스에, 기가 찬 것인지 기가 질린 것인지 맥없는 단말마만이 날아들었다.
[ ...만나서 얘기해. 지금 어디야. ]
"샬레야. 샬레로 와. 기다리고 있을게."
미카모 네루는, 이 상황을 가만히 묵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행해졌던 긴 작전에 몸은 천근만근, 눈꺼풀도 천근만근.
헌데 이 상황은......그런 피로에 찌든 몸조차도 억지로 깨워버리는 묘약과도 같았다. 아니, 묘약이라고 해야 할 지, 독약이라고 해야 할 지...
그렇기에 샬레에서 기다리겠다는 그녀의 말에, 단 한 마디 대답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제 스스로 끊어버린 전화통을 붙잡은 채, 미카모 네루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뭐라던가요, 부장님?"
무로카사 아카네는 그런 네루에게 조심스럽게 일의 전말을 물었다.
코유키 역시도 짐짓 험악해진 분위기에 잔뜩 움츠러들었는지, 그저 네루의 대답만을 기다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죽을 수도 있댄다. 선생."
그 복잡한, 아는 것보다 더욱 복잡할 그 문제를, 네루는 단 한 마디의 말로 담백하게 정리했다.
"선생님이......요? 대체 어째서......"
"몰라. 샬레로 오랜다. 그래서 가 보려고."
퉁명스럽기까지 한 그 목소리에는, 손을 가까이 대는 것만으로도 베일 법한 날이 서 있었다. 지금 당장 누가 됐건, 뭐가 됐건 베어버릴 수도 있을 날이.
"...애들한테 잘 말해둬라, 아카네. 일단 다녀올 테니까."
"부장님 혼자서......? 저도 가야겠어요."
아카네는 당연스럽게도 동행을 청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선생과 엮인 일인 모양이고, 보통 심각하게 돌아가는 일도 아닌 듯하니, 그리 청해오는 것도 당연하겠지.
허나, 네루는 단호했다.
"아니, 나 혼자 간다. 나머지에게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기에는 니가 딱이야. 아카네, 니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줘라."
"그, 그치만......"
"말 들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희들한테는 안 숨길 거니까, 걱정 말고 기다려."
아스나와 카린, 토키에게 침착하게 대략적인 개요를 설명하고, 적당한 시기까지 대기하는 일에는 아카네만한 인재가 없다고.
네루는 그렇게 판단한 모양이었다.
"네, 네루 선배......저는......?"
네루가 고개를 돌린다.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코유키는 안절부절해하는, 초조해하는, 조심스러워하는 얼굴로, 자기 자신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제 선배들이 모조리 뛰쳐나가고, C&C마저도 순식간에 혼란스럽게 만들만한 이러한 상황에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 지조차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쿠로사키 코유키는 그저 눈 앞의 네루에게, 마치 도와달라는 듯 조언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꼬맹이, 너도 남아라. 누군가는 세미나를 지키고 있어야 할 거 아니냐."
"그, 그치만...제가 여기서 할 수 있는 게--"
"--했잖아. 내 보고서 잘 받더만. 그런 작은 것부터 하나씩 해 보라고."
오히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는 네루를, 코유키가 그저 멍하니 바라본다.
"너 임마, 맨날 사고뭉치 취급받는다고 진짜 사고뭉치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거야. 못 써먹을 녀석이었으면 진작 내쫓았겠지."
"어......그......"
"그 자리, 지금처럼 지키고 있는 것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니까 잘 생각해보셔. 아카네, 그럼 난 다녀올 테니까, 일단 기다리고 있어."
"......네, 부장님."
네루는 더 이상 지체하기 싫다는 듯, 한 마디 말만을 툭 던진 채 세미나실을 나선다.
(...젠장.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선생이 죽는다. 죽을 지도 모른다.
유우카의 그 한 마디 말이 머릿속을 엉망진창 헤집어놓아, 작전의 피로조차 느낄 수 없게 헤집어놓은 느낌이었다.
유우카가 총학생회로부터 그러한 문자를 받았다는 것은, 필시 각 학원 학생회는 동일한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고, 곧이어 소집된 비상대책위원회에는 학생회뿐만 아닌, 각 학원 주요 관계자들 또한 참석했을 것이다.
...자신들은 작전 중이어서 연락을 못 받았다고 친다면.
그렇다면, 밀레니엄의 한 사람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시점에서, 미카모 네루는 제 휴대폰을 꺼내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면 배신이다.
모르고 있었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 ......무슨 일이야? ]
전화통 너머의 그 사람은, 제법 퉁명스럽게 안부를 물어왔다.
"야, 리오. 너 연락 받았냐?"
[ ......무슨 연락? ]
츠카츠키 리오는, 무언가 숨기고 있다기엔 제법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무감정으로 대답해온다.
"...학생회한테는 다 연락 간 것 같은데, 진짜 들은 거 없어?"
[ 미안하지만, 내 밀레니엄 계정은 현재 동결 상태야. 즉, 학생회장 명의로 수신되는 연락이나 그 기반으로 한 메시지는 내가 열람할 수 없어. 그래, 너처럼 이렇게 개인적으로 걸어오는 연락이 아닌 이상. ]
"......아, 그러셔. 잘났네."
평소대로의 그 장황한 설명에, 네루가 콧방귀를 끼며 대충 흘려넘겨버렸다.
"적어도 니네 후배들한테는 전화 좀 하고 살지? 그러니까 이런 일이 터져도 너한테 연락할 생각을 못 하잖냐."
[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
"선생한테 일이 터진 모양이다."
이번에도, 네루는 아주 간단명료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 ......선생한테? ]
"어. 죽는댄다. 나도 지금 상황 들어보러 가는 길이고."
리오의 대답은 이어지지 않았다.
네루도 딱히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 3초 남짓한 시간이 흐르고, 리오는 침묵을 깬다.
[ ......죽는다니, 무슨 말이야? ]
"그러니까, 그 상황을 들어보러 간다고. 뭐, 그 반응을 보아하니 너도 처음 듣는 모양이네."
[ ......그,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기야. 나랑 농담하자는 거야? 만우절은 지났어. 그런 멍청한 문화-- ]
"--내가 이런 걸로 농담할 사람 같냐?"
리오의 말이 끊겼다.
네루가 이런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리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 ...그래. 무, 물론 그 사람이 제법 애쓰고 있는 건 알아. 아는데, 죽는다니, 그건 무슨......? ]
부쩍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뜬금없이 전화가 오더니, 선생이 죽는다는 뜬금없는 말을 들어버린 마당이니, 부쩍 당황스러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내가 너한테 왜 전화한 것 같냐?"
[ 그......이런 연락을 받았는지 확인해보려고-- ]
"--그거 말고. 그것도 이유이긴 하다만."
네루는 넌지시 그러한 질문을 던졌다.
따지자면 이 문제는 네루가 리오한테 전화를 걸 문제는 아니었다. 했다면 선생이나 유우카, 조금 오지랖을 부려보자면 총학생회, 이 정도가 적합한 수신인이었겠지.
허나, 네루는 츠카츠키 리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째서?
[ ......나한테 뭘 원하는 거야? ]
잠시 침묵을 이어가던 리오는, 당황한 기색을 꽤나 지워낸 목소리로 주문을 물어온다.
구태여 많은 말까지는 필요없었다.
이미지와는 다르게, 미카모 네루라는 사람은 전체적인 일의 흐름과 작전을 세우는 데에 꽤 능숙했으며, 그녀의 그러한 성향은 다름아닌 밀레니엄의 학생회장, 츠카츠키 리오가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순한 궁금함, 또는 인정(人情).
고작 그런 이유로 전화를 걸어 올 리가 없었다. 특히나 이런 상황에, 이런 목소리로.
그렇기에 리오는, 곧바로 제 자신의 어떤 능력을 원하는지를 물어 온 것이다.
"니네 애들이 이런 농담을 칠 애들은 아니란 말이지. 그러면 선생이 죽는다는 건 사실로 봐야 할 테고."
[ ...그래. 그 아이들은 이런 저열한 농담을 하진 않아. ]
"그렇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를 다 계산해봐야지 않겠어?"
여전히 샬레로 향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로, 네루가 크나큰 한숨을 몰아쉬었다.
이윽고, 생각을 마무리하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혓바닥을 작게 낼름거린 네루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리오, 너는--"
* *
"......그렇습니까."
나나가미 린이 중얼거리듯 대답한다. 또 하나의 아득한 이야기를 들어버린 것처럼, 거대하고 막연한 감정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졸업하는 학생들을 선생으로..."
"응. 어차피 키보토스의 선생은 학업적인 면은 크게 신경쓰지 않으니까. 학생들을 보호 감독하고,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지도해주는 면이라면, 그렇게 해도 충분하겠구나 싶어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는, 말 그대로 '댁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따위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은 비단 린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우카 씨. 하실 말씀이 있는 것 같네요."
그 말마따나, 유우카 역시도 쉬이 와닿지 않는다는 듯 떫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대행이랑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걸?"
"그렇군요. 그럼 제가 말하죠."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린 나나가미 린이 선생을 향해 다시금 고개를 돌린다.
"선생님. 선생님께선 이 키보토스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이시라는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응. 확실히."
"저희들 중 그 어느 누가 그러한 자리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명감과 헌신은 보통의 사람으로선, 단언컨대 따라 갈 수 없습니다. 즉, 선생이라는 직책 자체가 저희에겐 너무 무거운 셈이죠."
몸까지 혹사시키며 보이는 헌신이요, 죽음까지 각오할 정도로 흘러넘치는 사명감은 쉬이 가져지는 것도, 흔히들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생을 살면서 한두 명 만날까 말까하는 수준이겠지.
선생은 '선생으로서의 모범' 을 보였다.
좋다. 좋은 이야기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가 보인 본보기는, '선생' 이라는 직책의 무게감 자체를 달리 했으며, '선생' 이라는 이는 자고로 그래야 한다는 틀을 만든 것과 다름 없었다.
어른이고 자시고를 떠나, 그런 직책을 떠안을 이는 쉬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 설령 졸업한 누군가가 선생이 되겠다고 다짐한들, 다른 학생들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머릿속에 강하게 박힌 그의 이미지가, 이후에 부임하게 될 누군가를 따라다닐 것도 당연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은 학생이었던 사람이 선생이랍시고 찾아온다면, 그걸 또한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의문인 셈이다.
"무엇보다 결정적으로......선생님만큼 잘 해낼 능력은 없을 겁니다."
수많은 학생들에게 신뢰를 얻고, 그렇게 얻은 신뢰를 오직 학생들을 위해서만 사용하며, 정확하고 거시적인 판단으로 키보토스를 지켜 온 것.
졸업하는, 졸업하게 될 학생들 중 그 어느 누가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그 어느 누가 그만큼의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선생님의 말씀 자체는 생각해 볼 법합니다만...여러모로 현실적으로는--"
"--현실적이라. 또 탁상공론에나 열중하고 있군!"
또 한 명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 그 목소리.
제 자신의 말을 싹뚝 잘라버린 그 쪽을 향해, 나나가미 린이 고개를 돌렸다.
"말로는 선생을 믿네 뭐네 하면서 끊임없이 제동을 걸어대다니, 말의 앞뒤가 맞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나?"
"......마코토 의장......"
하누마 마코토.
린의 말을 가열차게 잘라버린, 그 사람의 이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등 뒤에서 나츠메 이로하와 모토미야 치아키 역시 모습을 드러낸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몸은 좀 어떠신가요?"
"어서 와. 보는 것처럼 괜찮아."
고개를 살짝 숙여 안부를 물어오는 이로하에게, 선생이 씩 웃으며 답해준다.
하야세 유우카는, 그런 그녀들을 은근슬쩍 꺼려하는 눈치로 바라본다.
악명이 자자한 게헨나의, 악명이 자자한 하누마 마코토이기에, 그녀의 그러한 께름칙해하는 반응도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당신들은, 무슨 일로?"
"키키킥! 샬레가 그대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나? 이 마코토 님과 대등한 리더인 선생의 안부를 살피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라지만, 사실 해산했을 때부터 답지않게 계속 전전긍긍한 거지만요!"
치아키가 거리낌없이 마코토의 뒷생활을 까발린다. 정작 당사자인 마코토는 치아키의 그러한 사족을 단 1도 신경쓰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아무래도 대행, 당신은 리더 치고는 너무 무른 감이 없지 않아 있군."
지금 그녀의 관심은, 아무래도 린 쪽으로 쏠려있는 모양이었다.
"비대위를 소집했을 땐 이 마코토 님이라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지. 비대위로 그렇게 애먹어놓고는 또 비대위를 소집한 데다가, 뚝심있게 밀고 나가는 모습이 그동안의 대행과는 꽤나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헌데, 불과 하루만에 멋대가리 없는 사람으로 돌아오지 않았나!"
"...마코토 의장. 말씀이 너무 공격적--"
선생 앞에서 보일 모습이 아니라 여긴 것일까, 아니면 눈 앞에서 힐난당하는 린을 향한 의문스러운 동정심이었을까.
우시오 노아가 마코토의 공격적인 언행에 제동을 걸었다.
그리고 나나가미 린은, 그런 노아를 향해 한 손을 살며시 들어 제동에 제동을 건다.
"......무슨 뜻이신지요?"
"진정한 지도자란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해선 확고해야 하는 법! 자기 스스로 그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강하고 단호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그 뜻을 관철시킬 수 있어야 하지. 어제의 모습이 딱 그랬다! 언뜻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에도 굳건하게 회의를 이끌어 나가는 모습이 말이지."
아무래도 하누마 마코토라는 위인은, 비대위 소집 당시의 린을 상당히 인상깊게 바라봤던 모양이었다.
그동안 그녀가 주지해왔던 중립과, 총학생회장의 그늘에 잠겨 그저 하루하루의 행정 처리에만 몰두하던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기에 썩 새로운 모습을 보였던 어제의 그 모습에 오히려 긍정적인 평을 내린 것이겠지.
"무얼 망설이는 거지? 이건 이래서 안된다, 저건 저래서 안된다! 그딴 소리나 지껄일 시간에, 원안을 이룰 수 있을 세부 방안을 떠올리는 게 더 나을 터인데 말이다. 키키킥!"
"뭐, 그렇게 쓸데없이 추진한 행정명령들에 학교는 개판이 됐지만요."
"토 달지 마라, 이로하! 판데모니움 소사이어티는 그런 사소한 장애에는 굴복하지 않는다!"
언뜻 듣기에 그럴듯한 궤변. 이로하가 한숨과 함께 제 선배의 실상을 다시 한 번 까발렸고, 이번에는 '긁힌' 것인지, 마코토는 아주 간단명료한 헛소리로 즉시 반박해버렸다.
마무리가 이상해 취지가 퇴색된 감이 있음에도, 나나가미 린은 그러한 의견이 썩 인상깊은 모양이었다.
"제법 좋은 말씀이군요. 그렇지만 그 원안이 정말 실현 가능한 의견인지 아닌지, 정확히 분석해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 아닌지?"
"생각이 짧군! 그렇게 왈가왈부하는 건 평소에 하는 서류놀음에나 충분하다! 촌각을 다투는 일에는 리더의 추진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지금의 대행에게는 그러한 모습이 없지 않나?"
"촌각을 다투기에 신중해야 합니다. 졸속으로 처리한 중대사가 어떠한 영향으로 돌아오게 될 지, 그 영향이 우리가 처리한 방안을 어떻게 망치게 될 지, 마코토 의장은 장담할 수 있습니까?"
"제시되는 방안마다 결함 투성이어서 결국 처리되지 않는다면? 앉아서 탁상공론이나 하다가 위기가 들이닥치면 어쩔 테지? 책상 앞에 앉은 채로 무력하게 굴복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해 보는 게 더 좋은 방법이라는 건 세 살배기 코흘리개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
총학생회장 대행과 만마전 의장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집념과 집념, 철학과 철학이 맞붙는 싸움이었고, 완강한 두 대표자가 충돌하는 콜로세움이었다.
나나가미 린만큼이나, 하누마 마코토 역시 작금의 위기를 상당히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위대한 지도자인 선생을 잃는다는 것은 키보토스 전체에 미치는 지도력의 부재이고, 자신의 의견에 대해 맹목적인 찬성이나 반대를 던지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닌, 대등한 위치에 앉아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동반자의 상실이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 한다해도 시원찮을 상황에, 키보토스의 최고위원이라는 대행이 저렇게 사사건건 지적하고 나선다는 것이, 마코토에게는 심히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자, 두 사람 다 일단 멈춰 줘."
두 사람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그 선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둘을 타일러 진정시킨다.
"뭐라도 해보자는 마코토의 의견도 타당하고, 신중하자는 린 쨩의 생각도 맞는 말이야. 두 사람 다 생각이 다른 것뿐이지, 틀린 건 아니니까. 잠깐만 멈춰볼래?"
추진력, 신중함.
두 키워드 사이에서, 선생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제안한 이 방안은 린 쨩의 말대로 신중할 필요가 있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벌어질 수 있는 모든 돌발상황에 대해 논의하고 나서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거대하고 위태로운 방법이기도 하니까."
"맞습니다. 섣불리 시행했다간 분명 문제가 터지겠죠."
"하지만 마코토의 말도 맞아. 내가 제시하는 방안도, 다른 사람들이 내세우는 방안도, 끊임없이 기각하고 기각하다간 끝도 없이 늘어질 거야. 아이디어라는 건 순식간에 튀어나오는 게 아니니까. 그 시간도 감안해야하고, 논의하는 시간도 생각해야 해."
선생은 그렇게 말하며, 린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지금 바로, 학생회장들에게 이렇게 연락해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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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올리는게 늦어서 미안함;;
요새 배차도 빡세고 개인적인 사정도 많아서...시간 자체가 거의 없더라
일주일에 한 편 생각하고 시작했던 건데......앞으로도 종종 늦어질지도 모름ㅜ
사실상 상중하 나누는게 의미가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
그래서 그냥 상중하 말고 숫자로만 나눠야겠네
분명 12~15화 정도가 계획이었는데...
네루랑 리오랑 생각보다 친해보이더라
두 사람 은근히 어울린다는게 재밌는 것 같음
마코토는 생각보다 진중한 소리를 많이 지껄인다
선도부 관련된 일 빼면......
그게 매력인 것

댓글 8
생각보다 피폐가 아닌게 좋다. 선생 아파서 죽는 피폐는 맛있지만 너무 많이보긴했지
(대충 존나 미식콘)
네루랑 리오 관계는 파반느2장에서 파탄난줄 알았는데... 둘이 끈끈한 우정이 있던게 의외이고 보기 좋았지
단 선도부는 제외
슬슬 선생 계승 싸움 스타트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