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트 #M #드라마 #스미카 #네루 #미카
원본 by 恵利原一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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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5>
<1>
샬레의 집무실에는 코를 찌르는 파스 냄새가 가득했다.
슬프게도 그 원인은 나에게 있었다.
“아이고고…….”
나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채 신중하게, 정말 신중하게 책상 위의 서류로 손을 뻗었다.
책상 구석에는 정형외과 진찰권.
허리에는 코르셋.
그리고 선거 포스터처럼 빈틈없이 붙은 대량의 파스.
사건의 발단은 오디세이아 해양 고등학교의 기함, 올림포스호를 방문했던 날이었다.
갑판에서 발을 헛디딘 학생이 있어 나는 반사적으로 그 아이를 받아냈다.
거기까지는 나름대로 폼이 났다고 생각한다.
오랜만에 어른의 듬직함을 보여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직후, 허리에서 온몸으로 전류가 흘렀다.
뚝.
인체에서 그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건강의 소중함이란 언제나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하아아…….”
자연스럽게 새어 나온 한숨과 함께 젊음도 몸에서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똑, 똑.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 뒤에 문틈으로 체구가 작은 소녀가 머뭇거리며 얼굴을 내밀었다.
“시, 실례합니다…….”
“어라, 스미카?”
트라이던트의 코모리 스미카였다.
그날, 내 허리와 맞바꿔 받아냈던 소녀다.
상반신이 다 가려질 정도로 커다란 과자 상자를 양팔에 안고 있었다.
“멀리 D.U.까지 와준 거야?”
“선생님!”
스미카는 과자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자마자,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리며 바닥에 이마를 댔다.
“이번에 제 부주의로 인해 선생님의 귀하신 허리를 손상시키고 말아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귀하신 허리라니.”
“그 일이 결국 부부장님 귀에 들어가는 바람에…….”
스미카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비에 젖은 강아지를 보는 기분이었다.
“게헤나의 높으신 분들 건으로 호되게 혼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번엔 샬레의 선생님을 다치게 하다니…….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생기면 전 이제 바다의 이슬로 사라질 거예요…….”
“너무 과장한다. 화 안 났다고 모두에게 전해줬잖아?”
“아니요!”
스미카가 고개를 홱 들었다. 이마가 빨개져 있었다.
“그러면 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선생님의 허리가 완치될 때까지, 이 스미카가 선생님의 손발이 되고 허리가 되겠습니다!”
“허리는 좀 사양하고 싶은데.”
“부디 명예 회복의 기회…가 아니라, 선생님이 하루빨리 쾌차하시도록 이 코모리 스미카를 부려 먹어 주세요!
제발, 이렇게 부탁드립니다!”
울먹이는 눈망울로 올려다본다.
…으음, 이건 진심이네.
여기서 거절했다간 정말로 바다에 뛰어들 것 같은 표정이다.
“알았어. 그럼 당분간 좀 도와줄래?”
“!! 아이아이 서!”
절도 있게 경례하는가 싶더니, 스미카는 금세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이 완치되시는 날에는 부부장님께 ‘스미카가 아주 잘해줬다’라고 한 줄 써주시면…….
아니, 물론 대가성은 아닙니다만…….”
“하하, 알고 있어. 제대로 고맙다고 말해둘게.”
내 대답에 스미카의 얼굴은 등대 불빛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하, 이거 또 재미있는 아이랑 알게 된 모양이네.
<2>
그 후 며칠 동안 스미카는 정말 열심히 일해주었다.
나 대신 서류를 옮기고, 커피를 내리고, 떨어진 펜을 주워주었다.
어느샌가 선반은 용도별로 정리되었고, 바닥은 반짝반짝하게 닦였다.
내가 일어나려고만 하면 “안 됩니다!”라며 달려와 어깨를 빌려준다.
작은 몸으로 필사적으로 지탱하는 모습은 기특하기 그지없는데…하지만…….
…명백하게 위축되어 있단 말이지.
내가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스미카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지금도 내가 “아이고” 하고 무심코 흘린 탓에, 세상이 끝난 것 같은 표정으로 굳어버렸다.
화나지 않았다는 걸 좀 더 확실히 전해줘야겠네.
“스미카, 잠깐 이리 와봐.”
“네, 넵! 무, 무슨 일이시죠? 역시 처분이…….”
“안 한다니까. 자, 이거. 열심히 해준 보답이야.”
나는 서랍 깊숙이 비장해 두었던 고급 쿠키 캔을 내밀었다.
당번 학생의 기분이 상했을 때 쓰는 비장의 카드다.
“…어?”
“매일 고마워. 스미카가 있어 줘서 정말 큰 도움이 돼.”
“어, 어어?”
덤으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스미카는 캔을 안은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날 스미카는 “수고하셨습니다!” 하고 활기차게 경례하고 돌아갔다.
발걸음은 중력을 잊어버린 듯 가벼웠다.
다음 날도 나는 스미카를 칭찬했다.
멋진 사슴벌레를 보여주러 가져왔길래 “멋지네, 소중하게 키우고 있구나”라고 찬사를 보냈다.
책상 한쪽을 스미카 전용 공간으로 꾸며주었다.
절차가 번거로울까 봐 임시 출입증까지 발급해 주었다.
“스미카가 있어 줘서 정말 든든해. 이제 스미카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할지도 모르겠네.”
조금 과장일지도 모르지만, 거짓 없는 진심을 스미카에게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스미카의 뇌 내에서 엉뚱한 항로가 만들어져 버렸다는 것을.
나중에 트라이던트 학생에게 들은 이야기다.
이날 스미카는 소등 후에도 이불 속에서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한다.
“샬레의 선생님.
연방수사동아리의 고문이자 키보토스 전역의 학원에 영향력이 있는 어른.
그 선생님에겐 내가 없으면 안 돼……!
…즉, 나는 지금 선생님의 총애를 받는—아니, 측근!
샬레의 서열로 따지면 선생님 다음! 실질적인 정점!!
나야말로—키보토스의 실질적인 넘버원……!!!!”
참다못해 베개를 던지자, “넘버 원한테 무슨 짓이야!”라고 대꾸했다나 뭐라나.
그 학생에겐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3>
다음 날 아침.
스미카의 왼쪽 팔에는 완장이 감겨 있었다.
‘연방수사동아리 부장’이라고 적혀 있다.
“…스미카, 그건 뭐야?”
“네! 직접 만들었습니다!”
스미카는 가슴을 폈다. 칭찬해달라는 눈치다.
일단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샬레에는 명확한 서열이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선생님의 총애를 받으며 운영에 필수적인 인재—즉, 부장입니다!”
“…연방수사동아리에 부장 같은 게 있었나?”
“제가 만들었습니다!”
“…만들어 버렸구나.”
그러고 보니 여름 사건 때도 캡틴이라는 직함에 상당한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과연. 직함을 좋아하는구나.
나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작은 몸을 한껏 젖히고 있는 모습이 기지개를 켜는 아기 고양이 같아서, 솔직히 좀 귀엽다.
딱히 실질적인 피해도 없으니, 당분간 스미카에게 부장으로서 힘내게 해줄까.
허리 상태가 슬슬 진정되어 가서 오늘부터 다시 당번 접수를 재개했던 터였다.
가장 먼저 찾아와 준 것은 보충수업부의 아지타니 히후미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 잘 부탁드립니—”
“잠시 기다려주세요.”
스미카가 히후미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당번분이시군요. 소속과 성명을 밝히세요.
샬레에서는 업무 전에 부장인 저에게 신고하는 게 규칙입니다.”
“앗, 그, 그랬나요!? 아우우, 몰라서 죄송합니다…….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아지타니 히후미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히후미 씨는 서류 분류를 하세요.
선생님께 차를 내드리는 건 제 담당이니 참견하지 마시고요.
선생님의 취향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건 바로 저니까요.”
“네, 네…….”
“무엇보다 저는—”
스미카는 뱅그르르 턴을 하더니 자랑스럽게 완장을 내보였다.
“선생님께 있어 최고의 학생이니까요!”
히후미가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이쪽을 본다.
나는 웃으며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의욕이 넘쳐서 그러는 거니까 맞춰줘.
그런 의도를 담아서.
히후미는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리면서도 끄덕였다. 본성이 착한 아이다.
그 뒤로도 스미카는 ‘부장’처럼 행동했다.
학생이 방문할 때마다 신고를 요구하고, 서류 두는 방식에 참견하고, 자신의 자리를 ‘부장석’이라 이름 붙이고 사수했다.
나는 그걸 묵묵히 지켜보기로 했다.
우쭐해 있는 건 틀림없다.
하지만 일은 제대로 해내고 있고, 누군가를 진심으로 상처 입히는 것도 아니다.
조금 거들먹거리는 것도, 직함에 약한 것도 이 아이의 애교 중 하나다.
조만간 스스로 깨닫겠지—.
…그렇게 생각했었다.
히후미가 화이트보드를 보고 작은 소리를 내기 전까지는.
“저, 저기 선생님…오늘 미카 님이 오실 예정인데요……?”
나는 화이트보드로 눈을 돌렸다.
『15:00 미카 방문 (케이크 선물)』
『16:30 네루 C&C 임무 보고』
내 등 뒤로 허리 통증과는 다른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히후미.”
“네, 넵.”
“오늘은 긴 하루가 될지도 모르겠어.”
“아우우…….”
오후 3시 정각.
노크 소리가 울리자마자 스미카가 튕겨 나가듯 문으로 달려갔다.
“기다리십시오!
선생님 면회는 부장인 저를 거쳐야 합니다.
성함, 소속, 직함을 말씀해 주세요.”
문 너머로 보인 것은 분홍색 긴 머리에 하얀 날개, 그리고 화려하고 웅장한 헤일로.
음, 틀림없다.
“응? 트리니티의 미카야☆ 선생님 있어?”
스미카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트리니티 종합학원에서 미카 님 방문하셨습니다!”
“아하, 뭐야 그거 재밌네☆”
미카는 생글생글 웃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다행이다, 기분은 좋아 보인다. 일단 가슴을 쓸어내렸다.
“선생님, 야호!
있잖아, 다음에 트리니티에서 다과회를 열 건데 선생님도—”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스미카가 나와 미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선생님은 현재 집무 중입니다. 면회 용건은 부장인 저를 통해서 전달해 주세요.”
미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부장?”
“네!”
스미카는 완장을 치켜든다.
“잠깐만 스미—”
“선생님께 있어 최고의 학생이라는 뜻입니다.”
…아아, 저질러버렸다.
미카의 미소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더 무서웠다.
언제나 폭풍 전야가 가장 고요한 법이니까.
손에 든 커피잔이 무의식중에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방구석에서는 히후미가 페로로 가방을 꽉 껴안고 벽지의 일부가 되려고 애쓰고 있었다.
“헤에~최고라니.”
미카는 검지를 입술에 대고 뱅글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기 선생님? 이 아이가 최고래. …정말이야?”
“미, 미카! 어서 와! 자자, 앉아 앉아!
롤케이크를 가져왔구나! 기대하고 있었어!
스미카, 미카한테 차 좀 내주렴!”
미카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주었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가져온 케이크를 꺼내는 손길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정중해서 먹잇감에 달려들기 직전의 맹수 같았다.
반면 스미카는 속 편하게도 차 내리는 법에 대해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티파티의 일원 앞에서.
어떻게든 스미카에게 전해야 해……!
하지만 미카 앞에서 노골적으로 “이 아이를 화나게 하지 마”라고 했다간, 그건 그것대로 미카가 상처받을 거야……!
나는 헛기침을 하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스, 스미카. 미카는 말이야, 트리니티에서 아주 높으신…아니, 높으셨던…에, 그러니까 명의상으로는 지금도…….”
“과연, 옛날에 잘나셨던 분이라고……. 알겠습니다!”
스미카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악, 스미카!
제발 눈치 좀 채줘!
지금 너는 기뢰가 가득한 해역을 전속 전진하고 있단 말이야!
“그, 그리고 말이야…트리니티에서 아주…그, 영향력이 큰 아이란다.”
“그렇군요! 교우분이 아주 많으신가 보네요!”
“아하하. 나는 친구가 적은데?”
미카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나 이제 울어도 될까.
“그, 그리고 말이야, 미카는 아주 힘이 세서…….”
“그거 든든하네요!”
스미카는 금세 얼굴을 밝혔다.
“그럼 미카 씨, 나중에 자료실에 있는 종이상자 좀 옮겨주시겠어요?
선생님이 지금 허리를 다치셔서요.”
미카의 미소가 마침내 사라졌다.
“…선생님, 허리를 다쳤다고?”
“아, 아니, 이건 그냥—”
“그건 말이죠, 사소한 사고가 좀 있어서요.”
스미카가 서둘러 말을 가로챘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 현재는 부장인 제가 책임지고 선생님을 보살펴—”
빠직.
건조한 소리가 났다.
미카의 손안에서 찻잔 손잡이가 뿌리째 뽑혀 있었다.
“앗, 미안. 떨어져 버렸네☆”
나는 보고 말았다.
떨어져 나간 손잡이가 미카의 손가락 사이에서 스르르 모래가 되어 흩어지는 것을.
“흐음…선생님을 보살핀다니.”
미카는 툭툭 손을 털더니 손님용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결정했어. 나 오늘 당분간 여기 있을래.
이 아이가 얼마나 ‘최고’인지 좀 보고 싶기도 하고☆
…저기, 스미카라고 했니?”
“네?”
“기억해 둘게☆”
아, 끝났네.
나는 마음속으로 묵념을 올리며 롤케이크를 입에 넣었다.
폭신폭신해서 아마 맛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야 밖에서 가냘픈 “아우우…….”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4시 반.
줄타기 같은 90분이 지나고 두 번째 방문객의 시간이 찾아왔다.
노크는 없었다. 문이 기세 좋게 벌컥 열렸다.
“여어, 선생! C&C 임무 보고서 가져왔다고.
나 원 참, 허리 나갔다며? 영감님도 아니고… 응?”
나타난 것은 에이전트 집단 C&C의 리더, 미카모 네루였다.
“기다리십시오! 성함을!”
“아? 네루다. 밀레니엄의.”
“밀레니엄에서 네루 님 방문하셨습니다!”
“시끄러워! 귓가에서 소리 지르지 마!”
스미카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네루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메이드복, 작은 체구.
그리고 뭔가 납득했다는 듯 손뼉을 친다.
“과연, 메이드분이셨군요! 샬레의 청소 담당이신가요?”
“청소…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이렇게 작은데 일도 하고 기특하네요.”
스미카는 발끝을 세워 아주 미세한 높이 차이를 만들고는 싱긋 웃었다.
“중등부인가요?”
시간이 얼어붙었다.
나와 히후미는 동시에 숨을 멈췄다.
소파 위의 미카조차 홍차를 마시던 손을 딱 멈췄다.
“…지금 뭐라고 했냐.”
땅속 밑바닥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스미카는 멈추지 않는다.
자애로운 표정을 지으며 살며시 손을 뻗었다.
“착하다, 착해.”
쓰담쓰담, 스미카의 작은 손이 네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스미카에게 해줬던 것처럼.
네루의 손이 허리춤의 서브머신건으로 향했다.
위험하다, 폭발 직전이다.
“스, 스미카!”
나는 의자에서 굴러떨어질 뻔하며 소리쳤다.
“네루는 밀레니엄 3학년이야! C&C라는, 그, 엄청난 부서의—”
“아하, 중학교 3학년이었군요?
앗, 그렇구나. 클리닝(Cleaning)의 약자인가요! 메이드복을 입고 있으니까!”
스미카, 그 추측은 틀리지 않았어. 틀리지는 않았는데……!
“…그래, 맞아.”
네루는 천천히,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청소라면 자신 있지.
특히 위아래를 모르는 쓰레기를 치우는 건 말이야.”
“든든하네요! 그럼 나중에 탕비실 청소 좀 부탁드릴게요.”
“좋은 배짱이구나……!”
“아하☆”
소파에서 미카의 즐거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기 저기, C&C 리더 씨. 이 아이 말이야, 선생님의 ‘최고’래.”
“…최고?”
네루의 날카로운 시선이 스미카의 완장에 꽂혔고, 거기서 멈췄다.
“헤에, 좋은 걸 감고 있잖아.
…어이, 선생. 이 녀석이 꽤 마음에 드나 본데?”
“어, 그게. 아니, 아하하…….”
게다가 불똥이 나한테까지 튀었다.
당사자인 스미카는 만면에 미소를 띠며 완장을 툭툭 쳤다.
“두 분 다, 그렇게 선생님께 다가가면 실례예요. 제대로 분수를 알아야죠!”
미카의 손가락 끝이 찻잔 받침에 금을 냈다.
…내일까지 살아남는 식기가 하나라도 있으면 좋겠네.
<4>
“스미카, 잠깐 이리 와봐.”
나는 허리를 감싸 쥐며 스미카를 탕비실로 끌고 들어갔다.
등 뒤로 식은땀이 폭포처럼 흘렀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부장에게 내리는 특별 지시인가요?”
“응, 뭐,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네.”
나는 심호흡을 했다.
자연스럽게. 어디까지나 넌지시.
이 아이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스미카, 지금 상황을 오디세이아로 비유하자면 말이야…….
저 방에는 아일랜드의 함장님이나 트라이던트의 부장님 같은 입장의 아이들이 있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엣.”
스미카는 눈을 깜빡이며 탕비실에서 슬쩍 집무실을 엿보았다.
그 시선 끝에는 히후미가 무언가로부터 필사적으로 눈을 돌리려는 듯 묵묵히 서류를 분류하고 있었다.
“…히후미 씨가요!?”
“아니, 그쪽이 아냐.”
“그럼 설마…….”
스미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여기는 확실히 말해줘야겠지.
“미카는 트리니티의 학생회 ‘티파티’의 대표 중 한 명.
네루는 밀레니엄 최강의 에이전트 집단 ‘C&C’의 리더이자, 진짜 고등학교 3학년이야.”
스미카는 완전히 동작을 멈췄다.
그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맹렬한 기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학생회 대표라면…그러니까 함장님이고…….
리더라면…부장님이라는 뜻이죠……?”
“그렇게 되지.”
“그분들에게 저는…저는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요…….”
“상자 좀 옮겨달라고 하거나 머리를 쓰다듬거나 했지.”
그 순간 스미카는 굉침당했다.
“아바바바바바바…….”
입에서 보글보글 거품이 나오고 온몸이 서서히 가라앉는다.
“스미카! 정신 차려, 기운 내!”
내 구명 노력도 헛되이 스미카의 안색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갔다.
“괜찮아, 두 사람 다 사과하면 용서해 줄 거야!”
그 한마디에 스미카가 다시 부상했다.
“핫, 사과! 맞아요, 사과하러 가야 해요!”
스미카는 튕겨 나가듯 일어났다.
그 눈은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었다.
온갖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살아온, 역전의 눈이다.
“코모리 스미카, 지금부터 전력으로 사과 임무에 임하겠습니다!”
“으, 응. 진정해. 천천히 해도 되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스미카는 탕비실을 뛰쳐나갔다.
내가 허리를 감싸며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스미카는 이미 바닥에 이마를 비비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미카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네루의 정확히 중간 지점.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치밀하게 계산된 위치 선정과 각도였다.
“이번에! 티파티의 미카 님, C&C의 네루 님께 수많은 무례를 범한 점!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아아!”
창문이 덜덜 떨렸다.
“에이~ 아까까지의 기세는 어디 갔어?”
미카가 뺨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세 전환 존나 빠르네, 어이.”
네루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그리하여, 작게나마 보답하는 의미로—”
스미카는 바닥을 기어 부장석…아니, 구 부장석으로 향하더니 책상 밑에서 사육통을 끌어냈다.
검게 빛나는 훌륭한 사슴벌레가 느릿하게 큰 턱을 치켜들고 있었다.
“이것은 제 보물, 게헤나 톱사슴벌레 포세이돈 호입니다!
게헤나의 숲에서 제가 직접 포획했습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우와, 크다.”
미카가 몸을 뒤로 뺐다.
“배 같은 이름을 붙여놓지 말라고. …좀 멋있긴 하네.”
네루는 딱히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이것도요!”
그러고는 스미카는 왼쪽 팔의 완장을 뜯어내어 양손으로 정중히 내밀었다.
“연방수사동아리 부장 자리를 삼가 양도하겠습니다!
어느 분이 취임하실지는 두 분이 상의하신 뒤에……!”
“아하, 필요 없어☆”
“애초에 그런 직함 없잖아.”
그 말에 스미카는 그토록 집착하던 완장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그렇죠…….”
“뭐냐 이 녀석은……. 나 참, 페이스가 다 꼬여버렸잖아.”
네루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찼다기보다 독기가 빠졌다는 게 솔직한 심정인 듯했다.
미카도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왠지 말이야, 이렇게 필사적으로 사과해버리면 화내는 쪽이 나쁜짓 하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그러더니 무릎 위에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툭 덧붙였다.
“…그래도 사과하는 건 힘든 일이니까. 이해해.”
그 옆얼굴에 아주 잠깐 우울함이 스쳤지만, 금세 환하게 얼굴을 들고 스미카 앞에 쪼그려 앉는다.
그대로 스미카의 고개를 들게 하고는 이마에 붙은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정리해 주었다.
“봐, 이마가 새빨개. 식혀줄 테니까 이리 와.”
미카의 손에 이끌려 스미카가 천천히 일어난다.
…다행이다. 어떻게든 원만하게 해결된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바로 그때, 나는 깨닫고 말았다.
손을 잡혀 걷기 시작한 스미카의 한 발짝 앞에 내던져진 완장이 있다는 것을.
“위험해!”
직후, 스미카가 완장을 밟았다.
반짝반짝하게 닦인 바닥은 보답이라도 하듯 스미카를 완장째로 미끄러뜨렸고, 작은 몸이 공중에 붕 떴다.
정말 반사적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몸을 단단히 받아냈다.
받아내고 말았다.
우드득.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다시 내 몸에서 울렸다.
나는 스미카를 안은 채 천천히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선, 선생님!?”
“어이, 선생!”
“선생님!”
“선생님……!”
네 명의 비명이 겹쳤다.
<5>
정신을 차려보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수면실에 엎드려 있는 내 허리에는 새 파스가 붙어 있다.
열려 있는 문 너머로 시끌벅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스미카~ 얼음주머니 더 가져와 줘~”
“네! 지금 갑니다!”
“야 꼬맹이, 다음은 선생 옷 갈아입히는 거다.”
“아이아이 서!”
내 허리가 두 번째 붕괴를 맞이한 직후, 스미카는 무심코 “저 때문에 또……”라고 중얼거렸다.
거기서 올림포스호에서의 사건도 줄줄이 밝혀졌고, 스미카는 당당히 선배들의 심부름꾼으로 취임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선배 두 명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스미카는, 부장 시절보다 훨씬 생기 있어 보였다.
“…스미카.”
“네, 넵!”
엎드린 채 손짓하자 스미카는 겁먹은 표정으로 머리맡에 다가왔다.
“화 안 났어. 이번에도, 저번에도.”
“선생님…….”
“그리고 말이야. 나한테는 다 소중한 학생이야.
1등이니 2등이니 하는 순서 같은 건 없단다.”
“에이~ 난 1등이 좋은데~”
미카가 다가와 내 허리에 새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난 그런 거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딴청을 피우며 중얼거리는 네루의 귀가 살짝 붉다.
“그, 그럼…주제넘지만 저는 2등으로—”
“아앙!?”
“아니, 3등으로요!”
“그러니까 순서 같은 건 없다니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스미카의 머리를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었다.
미카가 도끼눈을 뜨고 그 광경을 지켜봤고, 네루는 작게 혀를 찼다.
그 기세에 눌린 스미카의 등이 빳빳하게 굳었다.
안색이 파랗게 질린 스미카를 보며 나는 얼음주머니 뒤로 몰래 미소 지었다.
금세 우쭐해지는 것도, 직함에 목매는 것도, 높으신 분들 앞에서는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 것도.
그 모든 게 다 이 아이만의 귀여운 개성이지 싶다.
…다만, 다음부터는 조금 더 일찍 확실하게 말해줘야겠다. 내 위장 건강을 위해서라도.
그건 그렇고 방구석에서는 히후미가 당번 일지를 적고 있었다.
“음, 찻잔 받침이 한 개……”, “허리는 이번이 두 번째……”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아주 꼼꼼하게.
다음 날, 나는 약속했던 대로 트라이던트 앞으로 보낼 편지를 썼다.
스미카가 얼마나 헌신적으로 일했는지, 샬레에 얼마나 큰 힘이 되어주었는지.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편지지 세 장 분량을 꽉꽉 채워 정성껏 적었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보자마자 스미카의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이거군요! 선생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죠.
이 코모리 스미카가 책임지고 부부장님께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 응, 고마워—”
하지만 만류할 틈조차 없었다.
스미카는 책상 위의 종이들을 능숙하게 추려내더니 깔끔하게 3단으로 접어 봉투에 넣고 밀봉까지 마쳤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절도 있게 경례를 붙인 스미카는 콧노래라도 부를 기세로 가볍게 발을 구르며 집무실을 나섰다.
스미카가 떠난 집무실은 평소보다 훨씬 고요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스미카와 함께한 시간은 꽤 즐거웠던 것 같다.
책상 위에 있던 히후미의 당번 일지까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그날 밤이 되어서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제 당번 일지 내용이 뭐였더라.
겉보기엔 영락없는 우등생인 히후미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일지에 기록해 두었다.
업무 진행 상황, 다음 날 일정, 방문객 명단, 학생들 사이의 마찰, 파손된 비품, 그리고 내 건강 상태까지…….
다음 당번이 곤란하지 않게 아주 상세하고 꼼꼼하게 적어놓은 것이다.
그걸 트라이던트의 간부들이 읽게 된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머릿속이 최악의 시나리오로 가득 차려던 찰나, 집무실 문이 거칠게 벌컥 열렸다.
“선생님! 저 스미카, 선생님의 허리가 완치될 때까지, 아니요!
완치된 후에도 만약을 대비해 당분간 샬레에 상주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오자마자 임무 속행을 선언하는 스미카의 등에는 커다란 짐꾸러미가 매달려 있었다.
아무래도 샬레에 아예 눌러앉을 작정인 모양이다.
“…너, 혼나서 도망쳐온 거 맞지?”
“선생님의 쾌유를 위해서라고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느긋하게…아니, 아주 푹 쉬면서 허리를 치료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창밖으로는 D.U.의 밤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깊어가고 있었다.
카네사키 항 쪽에는 오디세이아 선단의 정박등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나는 파스를 새로 한 장 꺼내 붙였다.
아무래도 이 친구와는 꽤 오랫동안 부대끼며 지내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Fin.
댓글 6
스미카 소설 개귀엽네 ㅋㅋ
내 아내겸 오나홀 너무 귀엽다앗!!!!

진짜좋다
미카랑 네루한테 반으로 인쪼개진것만으로도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