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L #드라마 #노아
원본 by 恵利原一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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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1>
O월 O일
에덴 조약 조인식 참석 중, 습격자의 흉탄에 복부 부상.
일시적으로 의식 불명의 중태에 빠짐.
O월 O일
A-H.A 점령전 당시, 우트나피쉬팀의 배 기동 직후 원인 미상의 신체적 변조 발생.
구체적인 증상은 본인에 의해 비공개 처리됨.
O월 O일
샬레 집무실에서 폭발 사고 발생.
다발성 타박상 및 가스 흡입으로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으나, 후유증은 인정되지 않음.
폭발의 원인이 된 가스관에서 누군가에 의한 공작 흔적이 발견됨.
O월 O일
밀레니엄 외곽의 이변 조사에 동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발생한 괴기 현상으로 인해 학생 수명이 공황 상태에 빠짐.
착란한 학생이 주변에 총기를 난사.
진정을 위해 접근하던 중, 해당 학생이 반사적으로 총신으로 타격.
오른쪽 안구에 중등도 외상을—
<2>
오른쪽 어깨에 희미한 무게감이 툭, 하고 실리면서 수첩에 쏠려 있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코유키 짱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저기, 우리 차례에요.“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눈앞의 전광판은 정중한 활자로 알리고 있었습니다.
—밀레니엄 세미나 귀하, 813호실로 들어와 주십시오.
그제야 겨우 저는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이곳은 병원 대기실이었고, 저희는 면회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유우카 짱은 이미 통로 입구에 서서 저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표정은 어떤 감정의 발로였을까요.
무언가 각오를 다진 것 같기도 하고, 포기해 버린 것 같기도 합니다.
저로서는 잘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노아, 괜찮아?“
"아뇨, 문제없습니다. 가시죠.“
저는 어색하게 일어서며 두 사람의 걱정을 털어내듯 앞장서서 나아갔습니다.
곧이어 두 개의 그림자가 저를 뒤따릅니다.
유우카 짱은 아직도 이 자리에 어울리는 말을 계속 찾고 있는 듯했습니다.
두 걸음 정도 뒤처져 따라오는 코유키 짱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기색이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저희는 여러 가지를 떠안은 채.
그저 나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듯한 발소리만이 무기질적인 복도에 귀에 거슬릴 정도로 울려 퍼집니다.
병원이라는 곳은, 하얗습니다.
지나치게 하얘서 정신을 놓으면 자신의 윤곽조차 잃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형광등의 거친 빛이 저희에게서 거리감을 앗아가고, 이 공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8층의 가장 안쪽 방.
정신을 차려보니 저희는 그 방 앞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이 문 너머에 그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병실의 명패는 조금의 실감도 주지 않습니다.
저는 한 번 멈춰 서서 숨을 고르고, 하지만 그 어떤 각오도 떠오르지 않는 채로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오후의 햇살이 창으로 들어와 하얀 시트와 벽이 한층 더 눈부십니다.
그 역광 속에서 선생님은 방 한가운데에 응고된 그림자 같았습니다.
침대에 걸터앉아 환자복 소매를 조금 거추장스러워하며, 어색함을 달래려는 듯 오른손에는 문고본 한 권이 들려 있습니다.
"오, 다음은 세미나 멤버들이네.“
선생님은 저희의 모습을 보자 아주 자연스럽게 표정을 푸셨습니다.
손짓하며 저희를 곁으로 불러 모으십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 일은……."
제 목소리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원내 방송처럼 무미건조하게 울리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말을 끊고 말았습니다.
옆에 있던 유우카 짱은 두 손을 꽉 쥐고 있었고, 코유키 짱은 선생님에게서 숨으려는 듯 저희 뒤에 서 있었습니다.
"후후,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어. 모처럼 만났는데 긴장 풀자고.“
선생님은 곤란한 듯, 하지만 조금 기쁜 듯 웃으셨습니다.
이 웃음은 무엇일까요.
사람이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웃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걸까요.
선생님의 미소는 제게서 말을 더 앗아갔습니다.
굳어버린 제 옆에서 유우카 짱이 겨우 입을 열었습니다.
"몸 상태는 좀 어떠신지요.“
격식을 차리고 있는 말투가 겸연쩍은지 선생님은 다시 눈을 가늘게 뜨십니다.
"사실 평소보다 컨디션이 더 좋을 정도야. 여기 있으면 합법적으로 땡땡이칠 수 있으니까.“
한 손을 턱에 괴고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으십니다.
"이건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간호사님께 들은 얘긴데, 내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한바탕 소동이 있었나 봐.
마취가 깰 시간이 됐는데도 내가 도통 정신을 못 차리니까 담당 의사들이 사색이 됐대.
나중에는 원장님까지 나오셔서 다들 혈안이 되어 이상을 찾다가, 결국 이렇게 결론 내렸다더군.
—'세상에, 이건 심각한 수면 부족입니다!'
아하하, 무려 30시간이나 자 버렸지 뭐야.“
거침없는 말투.
분명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셨겠지요.
수많은 면회객 앞에서.
그리고 아마도 혼자서.
눈앞의 심각한 사태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일부러 "심각한"이라는 단어를 골라가며.
"지금 농담을 할 때가—“
유우카 짱의 목소리가 조금씩 딱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등 뒤에서 코유키 짱이 앞으로 나서더니, 선생님의 무릎에 매달리듯 주저앉아 몸을 바짝 밀착시켰습니다.
"선생님, 얼굴이…….“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목소리였습니다.
"얼굴이 왜? 봐봐, 깜짝 놀랄 만큼 잘생겼지?“
선생님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코유키 짱의 어깨를 쓰다듬으셨습니다.
그 손길은 달래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억제하는 듯했습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러니 슬퍼해서는 안 된다고.
"맞다,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자. 받은 선물이 엄청나거든. 좀 도와줘."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병문안 선물이 있었습니다.
과자에, 꽃다발에, 인형에, 롤링 페이퍼까지…….
용도를 알 수 없는 각종 전자기기는 아마 밀레니엄 학생들의 것이겠지요.
모두의 마음이 담긴 물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산처럼 쌓여 있으니 왜 이렇게 공허해 보일까요.
마치 저희 사이의 깊은 골을 임시방편으로 메우고 있는 듯했습니다.
"좋아, 과일을 깎아줄게. 후후, 환자가 면회객을 대접하다니 앞뒤가 바뀌었네.“
선생님은 코유키 짱을 일으켜 세우고는 선물 꾸러미 속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윽고 꺼내진 그것은 햇살을 반사하며 은색으로 빛났습니다.
"짜잔.“
그것은 과도였습니다.
공기가 얼어붙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분명 그것은 과일과 함께 선물 받은 평범한 물건이겠지요.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날카롭고 짧은 칼날은 참극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이런 상태로도 잘 깎으려나? 뭐, 해보자고. 코유키는 사과면 되지?“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신 순간이었습니다.
정말 찰나의 일이었습니다.
유우카 짱이 선생님의 손목을 낚아채 나이프를 뺏어 든 것은.
"적당히 좀 하세요!“
좁은 병실 안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습니다.
동시에 집게손가락이 똑바로 겨눠집니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은 선생님의 얼굴.
—붕대에 가려져, 이제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오른쪽 눈.
"한쪽 눈을 잃으셨다고요!?“
"…원래 그렇게 좋지도 않았던 눈이야.“
선생님은 한숨 섞인, 하지만 달관한 듯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겨누고 있던 손가락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어째서.“
"유우카?“
"어째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예요.
화를 내세요.
힘들다고 말하시란 말이에요!
왜…왜 그렇게 웃으면서……!“
꾹 쥐고 있는 나이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습니다.
억누를 수 없게 된 감정이 배어 나오듯 유우카 짱의 전신이 떨립니다.
"나는—“
선생님은 입 밖으로 내려던 말을 삼키고 잠시 침묵하셨습니다.
창밖에서 새가 어디론가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여십니다.
"나는 화를 낼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거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우카 짱의 표정이 흔들리더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갈 곳 없는 감정을 쏟아붓듯 나이프를 사이드 테이블에 내팽개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병실을 뛰쳐나갔습니다.
저희가 말릴 틈도 없었습니다.
"유우카!“
선생님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 어깨를 향해 손을 뻗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손은 유우카 짱의 어깨와는 한참 동떨어진 허공을 휘저었습니다.
지탱할 곳을 잃은 몸은 기세 그대로 기울었고, 동시에 슬리퍼가 바닥에서 미끄러졌습니다.
수액 거치대가 넘어지며 둔탁한 금속음을 냈습니다.
선생님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듯 온몸을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아야야…아하하, 실수 실수.“
선생님은 민망한 듯 상체를 일으키며 일어서기 위해 가까운 벽으로 손을 뻗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손은 또다시 아무것도 잡지 못했고, 선생님은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으셨습니다.
그제야 겨우 저는 선생님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했습니다.
선생님은 이제 공간을 파악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한쪽 눈을 잃는다는 것은 입체감을 잃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문까지의 거리도, 자신의 손이 닿는 범위도 모호해진 세상을 지금 선생님은 살아가고 계신 겁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선생님의 모습은 너무나도 볼품없고 비참했으며, 그 사실을 선생님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계신 듯했습니다.
저와 코유키 짱은 서둘러 달려가 양옆에서 선생님의 팔을 붙잡아 침대로 옮겨드렸습니다.
선생님의 몸은 상상 이상으로 가벼웠습니다.
이 가벼움을 저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저희가 하는 대로 몸을 맡기셨지만, 침대에 걸터앉자 다시 헤벌쭉 웃어 보이십니다.
"이야, 너무 폼만 잡았나 보네. 우선 제대로 걷는 연습부터—“
그 말을 다 맺기도 전이었습니다.
코유키 짱이 선생님의 가슴에 매달리듯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괜찮으니까요.“
작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습니다.
"이제 괜찮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제 제발 그만하세요……!“
둑이 터진 것처럼 코유키 짱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환자복에 번져 나가는 눈물이 선생님을 감싸 안는 듯했습니다.
선생님의 얼굴에서 미소가 벗겨져 나갑니다.
아무 말 없이 천천히 팔을 둘러 코유키 짱의 등을 감싸안으셨습니다.
조금 전처럼 과장된 손길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코유키 짱의 감정을 달래기 위한 팔이었습니다.
"……미안해.“
이윽고 선생님이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무서웠지. …응. 맞아. 무서운 일이지, 이런 건.“
코유키 짱의 흐느낌이 조금씩 잦아듭니다.
선생님은 재촉하지 않고 그 작은 등을 일정한 리듬으로 천천히 계속 쓰다듬으셨습니다.
그 후로 긴 시간이 흘렀습니다.
창밖으로 구름이 흘러가고, 하얀 방의 빛이 잠시 흐려졌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미안해."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꾸밈없는 말들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다음 면회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식하기 시작할 무렵이었습니다.
코유키 짱이 얼굴을 들었습니다.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하지만 똑바로 선생님을 올려다보며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웃는 얼굴, 노아 선배보다 훨씬 더 무서웠어요.“
"후후, 그거 큰일이네. …그렇지, 미안해. 정말 미안하다.“
거짓 없는 솔직한 사과였습니다.
이 병실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본 선생님의 진짜 미소였습니다.
"절대 안 용서해 줄 거예요. 샬레에 별점 1점 테러할 거니까요.“
"그러지 마.“
"모모톡에 선생님 사칭 계정도 만들 거예요. 있지도 않은 사실들 다 떠벌리고 다닐 거니까요.“
"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선생님 비공식 위키도 만들 거예요.“
"후후, 무슨 괴롭힘이야. 하지만 그건 진짜 하지 마, 부끄러우니까.“
코유키 짱은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내더니 겨우 평소의 모습을 되찾은 듯했습니다.
히죽, 입꼬리를 올리며,
"그럼 선생님은 여기서 반성이나 하세요!
반성실보다 훨씬 지루해 보이네요! 선생님한테 딱 어울려요!!“
"이 녀석, 코유키.“
선생님이 쓴웃음을 지으며 눈썹을 치켜올리자, 코유키 짱은 "와아!" 하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병실을 뛰쳐나갔습니다.
복도에서 "몸조리 잘하세요!" 하는 목소리만 되돌아옵니다.
"참 나, 코유키는……. 어라, 어느 사이에.“
돌아보니 선생님이 네잎클로버를 손에 쥐고 계셨습니다.
틈을 타서 코유키 짱이 환자복에 쑤셔 넣은 모양입니다.
점점 코유키 짱의 발소리가 멀어지고, 병실은 원래의 정적을 되찾아갑니다.
그렇게 저 혼자 남겨졌습니다.
해야 할 말은 아주 많았을 텐데.
여기에 오기 전까지 수많은 말을 준비했을 텐데.
하지만 밀레니엄의 서기는 형식을 우선시한 모양입니다.
"오늘…이런 일이 생기게 되어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시시한 사과의 상투적인 문구.
도대체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로.
선생님이 무언가 말하려던 기색이 느껴졌지만, 저는 깊이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왔습니다.
복도로 나오니 유우카 짱이 벽에 등을 기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붉어진 눈가를 앞머리로 가린 채.
눈이 마주치자 어색한 듯 시선을 피합니다.
그렇게 뛰쳐나온 마당에 차마 다시 들어갈 수는 없었겠지요.
말을 걸려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저희 옆을 스쳐 지나 한 학생이 달려갔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넘어질 듯이 813호실로.
그 옆모습에 낯이 익었습니다.
교대하듯 닫힌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죄송해요…죄송해요, 선생님, 정말 죄송해요……!“
격정에 찢긴 듯한 비통한 울음소리였습니다.
말조차 되지 않는 통곡과 그것을 달래는 선생님의 낮은 목소리가 복도에 스며듭니다.
어느샌가 곁으로 돌아온 코유키 짱이 제 소매를 끌었습니다.
"…저 사람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질문의 뒷부분을 저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코유키 짱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선생님의 오른쪽 눈을 앗아간 사람인가요, 라고.
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코유키 짱은 아무 말 없이 813호실에서 시선을 거두었습니다.
셋이서 대기실로 돌아왔습니다.
대기실은 학생들로 가득했습니다.
밀레니엄의, 트리니티의, 게헨나의, 아비도스의 교복.
학원도 동아리도 제각각인 학생들이 번호표를 꽉 쥐고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습니다.
모두가 선생님을 문병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선생님을 경애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 학생은 이 대기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요.
이 비극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하면서.
수많은 시선을 견뎌내면서.
그러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분명 바늘방석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의 고통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래서였던 것입니다.
"…유우카 짱.“
저는 지금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친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 사람을 용서해 주세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그 과도한 농담도.
그 억지스러운 활기참도.
앞으로 찾아올, 죄를 짊어진 한 명의 학생을 위해서.
—아무것도 아니란다, 네 탓에 잃어버린 것 따위 하나도 없단다, 라고.
그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은 그 병실에서 홀로 계속 연기를 하고 계셨던 겁니다.
유우카 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었고, 꽉 쥔 두 손이 하얗게 질렸습니다.
유우카 짱.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자신을 비하하지 마세요.
그 죄책감마저도 저는 당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화를 내세요, 힘들다고 말하세요.
그 말만이 그 병실에서 유일한 진실이었으니까요.
툭툭.
다시 소매가 당겨졌습니다.
"…노아 선배. 저, 실수한 걸까요?“
코유키 짱이 불안한 듯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울어버린 것. 선생님의 연기를 망쳐버린 것.
저는 대답 대신 그 작은 머리에 손을 얹고 천천히 쓰다듬었습니다.
보드라운 머릿결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집니다.
—아니에요, 코유키 짱.
당신은 분명 놀라서 운 게 아닐 겁니다.
선생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서 무서워 운 것도 아닐 테고요.
당신은 알아버린 것이겠지요.
선생님이 왜 그렇게까지 웃음을 잃지 않으려 했는지.
누구를 위해 그 소동을 벌이고 계셨는지.
선생님을 그렇게 만드는 이 세상의 일그러진 구조를.
선생님이 책임이라 부르는 숙명의 정체를.
그 모든 것이 괴롭고 잔인해서 당신은 울었던 것이겠지요.
당신은 분명, 사실은 사람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똑바로 꿰뚫어 보는 아이일 테니까요.
그런 당신으로 있어 주는 것이 저는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는 도대체 그 자리에서 무엇을 했을까요.
그 병실에서 저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우카 짱처럼 화를 내지도.
코유키 짱처럼 울지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저 자리를 수습하고 고개를 숙이고 나왔을 뿐이었습니다.
저는 세미나의 서기입니다.
밀레니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기록하는 역할.
스스로는 아무것도 일으키지 않고 관찰만 하는 역할.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지루한 백색의 존재.
그런 제가 그분께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3>
조금 옛날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선생님의 육체적 취약함을 키보토스의 각 학원이 우려했던 적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에덴 조약 조인식에서 총탄에 쓰러진 이후, 그것은 공공연한 의제이기까지 했습니다.
어떤 학생은 선생님을 전선에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또 어떤 학생은 선생님의 지휘를 대행할 직책을 신설해 달라고 탄원했습니다.
총학생회는 그때마다 각 학교의 의견을 정중히 수렴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끝내 선생님을 전투에서 멀어지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명백했습니다.
선생님 본인이 수면 아래에서 그런 우려들을 묵살하도록 손을 쓰고 계셨던 겁니다.
저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곳은 키보토스입니다.
총과 신비가 일상에 녹아든 세계.
학생들은 신비의 보호를 받으며, 총탄에 맞아도 치명상을 입는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선생님에게는 헤일로가 없습니다.
그저 평범한 인간으로서, 인간의 나약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선생님은 이 세계에 서 계십니다.
단 한 번, 제가 이 점에 대해 직접 여쭈어본 적이 있습니다.
"내게 과도한 권한이 맡겨져 있기 때문이야.“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그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권한요?“
"싯딤의 상자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끔찍한 짓도 할 수 있지.
…만약 이 힘이 폭주했을 때, 즉 내가 이성을 잃었을 때, 키보토스의 누구라도 나를 물리적으로 멈출 수 있어야 해.
총알 하나면 충분하니까.
…그런 인간이 이 권한을 맡고 있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해.
너희가 좋아하는 말로 하자면…합리적이라고 할까?“
합리적.
선생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육체적 취약성을 제도상의 안전장치로 규정하는 사고방식.
자신의 목숨을 마치 퓨즈처럼밖에 생각하지 않는 고요한 계산.
저는 그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두려웠습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여 따져 묻자, 선생님은 그저 한마디만 하셨습니다.
"나는 선생이니까.“
선생이니까.
—선생이니까,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희는 학생이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놀러 다니고, 자유롭게 총을 쏘고, 급기야 소중한 사람의 눈을 멀게 해도 되는 건가요.
그리고 선생님은 선생님이니까 그 한쪽 눈을 내어주신 건가요.
당신이 들고 있는 그 저울은.
도대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 건가요.
선생님의 철저한 평등의 신념.
모든 학생에게 똑같이 향하는 자애.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누구도 저버리지 않는 그 중립의 정신.
제가 한때 동경했던 선생님의 모습은 무아(無私)를 통해 실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의 완전한 객관이라는 이상과는 닮았으면서도 전혀 다른 것.
선생님의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를 한없이 가볍게 취급함으로써 비로소 성립되는 평등이라는 것을, 저는 깨닫고 말았습니다.
그날 헤어질 때였습니다.
선생님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시 한 구절을 읊조리셨습니다.
저희 대화의 여백을 메우듯, 혼잣말처럼.
부모 없는 소녀들의 눈동자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를 사랑하기 위해
아아, 자연이여. 내게 용기와 힘을 다오—
나 자신이 이제 어른이라고 믿을 수 있도록
아아, 자연이여. 이 고개를 들 수 있게 해다오—
저는 그 시를 알고 있었습니다.
라포르그.
요절한 시인이 죽음의 문턱에서 썼다고 전해지는 시입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낮고 쉬어 있어서, 마치 누구에게도 들려줄 생각이 없는 중얼거림 같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선생님이 입 밖에 내지 않은 마지막 한 줄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죽을 테니까.
굳어버린 제 표정을 눈치채자, 선생님은 장난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수줍게 미소 지으셨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진심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출처를 들킨 것이 부끄러웠던 걸까요.
아니면 학생 앞에서 일부러 강한 척해 보인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결코 학생에게 보여서는 안 될 나약함이 자신도 모르게 그 구절을 빌려 흘러나온 것일까요.
—아뇨, 세 번째는 제 희망 사항이겠지요.
저는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그 시의 인용이 선생님의 진심이 드러난 순간이었다고.
그 미소 너머에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있었다고.
그러나 이는, 선생님의 숨겨진 나약함을 나만이 목격했다 생각하고 싶어 하는 편향된 주관에 불과합니다.
저는 어디까지나 기록 담당.
형편 좋은 해석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4>
해 질 녘의 세미나 집무실은 고요했습니다.
키보드 소리와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저희의 유일한 대화였습니다.
그 병원에서 돌아와 저희 셋은 업무에 매달리고 있었습니다.
코유키 짱은 원래 그대로 반성실로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얌전히 일할 테니까 오늘은 같이 있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간청했습니다.
저도 유우카 짱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저희 모두 오늘만큼은 혼자 있고 싶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약속대로 구석 자리에서 묵묵히 비품 목록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이따금 힐끔힐끔 이쪽의 눈치를 살피면서요.
유우카 짱은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습니다.
평소처럼 단말기를 마주하고, 평소와 같은 속도로 키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고 맙니다.
밀레니엄 최고의 계산 능력을 자랑하는 그녀가, 똑같은 수지 타산표를 벌써 세 번이나 검산하고 있다는 것을.
암산으로 충분할 계산을 굳이 화면에 다시 입력하고 있다는 것을요.
뭐, 저 역시 이렇게 남의 눈치나 살피고 있는 시점에서 도긴개긴이겠지만요.
"앗……!“
침묵을 깬 것은 유우카 짱의 작은 목소리였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유우카 짱?“
"이거…엔지니어부에서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부탁받은 건데.
오늘 깜빡하고 못 전해 드렸어…….
그게, 워낙 갑자기 뛰쳐나와서…….“
유우카 짱은 서랍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습니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상자에는 엔지니어부의 직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일 전해드리면 안 되는 건가요?“
"우타하 선배가 '한시라도 빨리' 전해달라고…그렇게 신신당부를 해서…….
하지만 난 리오 회장을 호출했으니까…….“
아아, 그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리오 회장이 또다시 누구의 승인도 거치지 않은 채,
묘한 감시 시스템—아마 '빅 시스터 알고리즘'이었나요—을 세미나 권한 아래 구축했다고 자백한 건 말이죠.
오늘 밤은 그에 대한 청문회, 아니, 솔직히 말해 설교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유우카 짱뿐이니, 대신할 사람도 없었죠.
"정말이지, 그 사람은 타이밍도 안 좋다니까.
도대체 여죄를 얼마나 더 숨기고 있는 건지…….“
유우카 짱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렇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괜찮겠어?“
"네. 면회 시간까지는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요.“
"…고마워, 노아. 살았어.“
유우카 짱의 표정이 눈에 띄게 풀립니다.
그 안도감이 단순히 물건 전달에 대한 걱정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저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병실 문을 여는 것이 그녀에게는 아직 조금, 버거운 일이겠지요.
유우카 짱의 서먹함은 낮에 있었던 다툼 때문만은 아닙니다.
유우카 짱은 선생님을 연모하고 있습니다.
그건 누가 봐도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유우카 짱의 성실함은 선생님 앞에서 조금 어색해지고,
선생님을 향한 잔소리에는 애정이 배어 나오며,
선생님이 다칠 때마다 가장 안색이 창백해지는 건 언제나 유우카 짱이었으니까요.
뭐, 비단 유우카 짱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선생님이라는 분은 많은 학생에게 사랑받습니다.
흠모와 신뢰를 한 몸에 받으며, 때로는 고백까지 받곤 하죠.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만 해도 그 횟수는 열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네가 어른이 될 때까지, 난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기다릴게.
그때까지도 내가 좋다면, 다시 한번 고백해 줘.“
온화하고 성실하며,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는 거절 방식.
선생님의 평등 정신은 이런 데까지 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선생님이 완전히 똑같은 말을 열 살 남짓한 아이에게까지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작은 소동이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몇 년을 기다리게 할 셈이냐면서요.
유우카 짱의 일도 있고 해서, 저는 이 건을 슬쩍 찔러보았습니다.
"상당히 인기가 많으시네요? 선생님.“
"어? 아아…아니, 그건 뭐랄까, 교사로서의 사교적인 멘트라고나 할까.“
"내년에 입학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을 반복하실 생각이죠?
매년 그걸 계속하신다면, 제 친우는 도대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걸까요?“
"그, 그렇게 인기 많지 않아, 정말로.“
"얼버무리지 마세요. 본인이 가장 잘 알고 계시면서.“
"으음……. 게다가, 봐봐.“
선생님은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툭 하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말씀하셨습니다.
"모두가 어른이 될 때까지, 내가 살아있을 것 같지도 않고.“
—.
선생님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셨습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으셨겠지요.
저는 그때 받은 충격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분명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을 겁니다.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경악과 분노를 삼키느라 필사적이었으니까요.
저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능한 한 평탄한 어조로 말씀드렸습니다.
"…만약. 그걸 진심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제가 선생님을 노려본 것은 딱 이때뿐입니다.
"그건 가장 악질적인 배신입니다.
마음을 품은 아이들에게 뿐만이 아니에요. 키보토스의 모든 학생에 대한—“
선생님은 당황한 듯 양손을 휘저었습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냥 농담을 좀 잘못한 것뿐이야.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 절대로 안 일어날 테니까.“
저는 더 이상 추궁할 수 없었습니다.
반복된 그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라는 말이 저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 스스로를 믿게 하려는 주문이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 납득하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선생님은 게으른 분입니다.
보고서는 쌓아두고, 온갖 신청은 잊어버리며, 마감 기한도 어기기 일쑤죠.
결국 막다른 길에 몰려 유우카 짱에게 매달리곤 합니다.
그런 선생님이 단 하나, 꼬박꼬박 갱신하고 있는 서류가 있었습니다.
바로 업무 인수인계서입니다.
"어른은 말이야, 이렇게 일을 하는 거란다.
내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도록 매뉴얼을 남겨두는 거지.
이 직책이 영원히 이어질 수 있도록 말이야.“
선생님은 자랑스럽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은 그 문서가 어떤 사태를 상정하고 쓰인 것인지 똑똑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선생님의 뒤를 잇는 사람은 결코 선생님에게 직접 인수인계를 받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까지도요.
그에게 있어서 고백에 대한 대답도, 인수인계서도 모두 똑같이 '유언'인 셈입니다.
그러니 선생님을 연모하는 것은 헛수고로 끝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본인조차 자신이 한 약속이 지켜질 거라 믿지 않으시니까요.
저 자신 또한 선생님께 다가가는 것을 애써 피해 왔습니다.
기록자는 관측 대상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밀레니엄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관측 행위의 원칙입니다.
밀레니엄의 서기인 저는,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흥미를 느끼면 느낄수록 깊게 관여하는 것을 스스로 금해 왔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 자신이 신기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 섣달그믐날 밤.
저는 선생님께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요.
무슨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요.
<5>
처음에 선생님은 수많은 관찰 대상 중 하나에 불과했습니다.
흥미로운, 외부 세계에서 온 방문자.
신비가 없는 어른.
기록할 가치가 있는 희귀한 표본.
하지만 어느 당번 날.
샬레의 집무실에서 수첩을 든 저를 보고 선생님은 장난스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 오늘은 내가 노아를 기록해 볼까.
거기서 무언가가 일어난 것이겠지요.
그런 모호한 말로밖에 그날의 일을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홀린 듯이 선생님을 계속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제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요.
어느샌가 시야에는 주관이 끼어들었습니다.
왜곡된 제 수정체는 선생님이라는 인물을 실물보다 훨씬 더 크게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제 이상이 위협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주관을 배제한 절대 중립의 기록자.
그것이 제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사명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한 객관적 기록이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밀레니엄의 서기로서 저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순을 말씀드렸을 때, 선생님은 몹시 놀라신 듯했습니다.
"에엣, 잠깐만. 그래도 되는 거야?“
"된다니요, 무엇이 말인가요?“
"그치만 노아가 지금까지 이상으로 삼아왔던 목표가 있었잖아?“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네, 당연하죠.“
여우에게 홀린 듯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을 충분히 관찰한 뒤에 저는 말을 이었습니다.
"이론의존성(Theory-ladenness)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즉, 기록자가 전제로 삼는 패러다임에 따라 기록 결과가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관측자의 기대와 입장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달라지는 법이죠.“
—제가 처음 만났던 날처럼 이제 선생님을 기록할 수 없게 되었듯이요.
머릿속으로만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흐음, 그런 건가?“
"그 외에도 여러 난관이 존재합니다.
관측은 대상을 변화시키고, 대상은 다시 관측자를 변화시키죠.
그리고 관측한 내용을 온전히 손상 없이 기록으로 옮기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으음, 왠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노아는 그걸 알면서도 계속해서 철저하게 객관을 고집하고 있는 거구나?“
"그렇게 되네요.“
말해놓고 나니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습니다.
상대적인 것에 불과한 객관성에 계속 집착하는 것.
그 자체가 비합리적이며, 밀레니엄의 학생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태도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구나, 밀레니엄 아이답네.“
"…답다, 고요?“
분명 제 목소리는 살짝 들떠 있었을 겁니다.
선생님은 저를 똑바로 응시하셨습니다.
"봐봐, 그렇잖아.
다들 그렇게 똑똑하고 논리적이면서, 뿌리는 깜짝 놀랄 정도로 로맨티스트들이잖아?
우타하도, 히마리도, 그 리오조차도.“
거기서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셨습니다.
"노아는 자주 스스로 독창성이 없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독특한 로망을 쫓고 있는 것처럼 보여.
하얀색도 개성이라고 했었지?“
저는 황급히 시선을 손끝으로 옮겼습니다.
분명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겨우 입 밖으로 나온 말은 무척이나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가끔 제가 모르는 저를 알고 계시네요."
그리고 그렇게 그 섣달그믐날이 왔습니다.
얼어붙을 듯한 밤공기에 타워에서 내려다본 야경이 멀리 번져가고.
술래잡기와 파자마 파티, 그리고 연초부터 시작된 잔무 처리까지.
저는 언제나 자신을 숨깁니다.
장난치는 건 좋아하지만, 그건 타인의 반응을 기록하기 위해서이지 저 자신을 보여주고 싶어서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날 밤만큼은 분명히 저는 제 본심을 선생님께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죠.
—한창때의 소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야. 아무것도 나쁘지 않아. 걱정할 거 없단다.
선생님은 제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계셨던 걸지도 모릅니다.
그날부터 저는 옷에 묻은 얼룩처럼 시야에 끼어드는 주관을 조금씩 긍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기 어려운 대상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요.
관측을 기록으로 옮기는 그 순간, 반드시 섞여 들어가는 변수로서의 자기 자신.
관측자도 나이고 관측 대상도 나일 때, 거기서 주관을 뺄 방법은 원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변수의 값을 변수 스스로에게 물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렇다면.
제가 쫓아온 객관이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6>
밤의 대기실은 낮보다 어느 정도 사람이 줄어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면회를 기다리는 학생들의 줄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긴 의자 끝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면회를 마친 학생들이 교대로 대기실을 지나쳐 갑니다.
그 표정은 실로 다양했습니다.
화난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하며 떠나는 아이.
복도로 나오자마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
들어갈 때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아이.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눈을 내리깐 채 아무 말 없이 스쳐 지나가는 아이.
모두 선생님의 병문안을 온 것이 분명했습니다.
다친 선생님을 위로하고 걱정하기 위해서요.
하지만 이렇게 지켜보고 있으면 알게 됩니다.
위로를 받고 돌아가는 건 언제나 학생들 쪽이라는 것을요.
모두가 선생님을 걱정할 생각이었지만, 실상은 선생님의 상담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방금 한쪽 눈을 잃은 당사자로부터 "이건 너의 상처가 아니란다"라는 말을 처방받으면서요.
그리고.
…네, 분명 그럴 겁니다. 인정하죠.
저 자신 또한 그 차례를 기다리는 한 명이었습니다.
은인에게 닥친 불행이라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위로를 찾으러 온 것이었습니다.
오늘 낮에도.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요.
'띵' 하고 부드러운 전자음이 울렸습니다.
전광판이 다음 면회자를 알립니다.
—우시오 노아 님, 813호실로 들어가 주십시오.
낮에는 그곳에 '밀레니엄 세미나'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 그곳에 있는 것은 저 혼자만의 이름입니다.
저는 상자를 안고 일어섰습니다.
밀레니엄의 서기로서가 아니라.
세미나의 일원으로서도 아니라.
우시오 노아로서 그분을 만나러 간다.
그렇게 결심했습니다.
밤의 복도는 낮보다 훨씬 더 하얗게 보였습니다.
더러움을 허용하지 않는 하얀색.
장식을 걷어낸 하얀색.
불필요한 모든 것을 배제하고 그렇게 남은, 공허할 정도의 하얀색.
과거의 저라면 이 하얀색을 평등의 색이라 불렀을지도 모릅니다.
그 무엇의 편도 들지 않는 완벽한 중립의 색이라고요.
지금의 저는 압니다.
이건 중립 같은 게 결코 아니라는 것을.
하얀색은 결코 무색이 아닙니다.
To Be Continued : Part 2
댓글 11
달다
똥아로나 뭐해써!!!
이런 류 팬픽은 똥아로프라나 뭐했냐 로 귀결되지만, 문장이 예뻐서 흐린 눈 하기로 했습니다.
저거 실제로 잇는 시구인가
최후의 시들(Derniers Vers), 쥘 라포르그
아무리 찾아봐도 안 나오던데 어케 찾았노...
네이놈 똥아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