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반투명한 유리를 뚫고 들어와, 내부를 은은한 색감의 그림자로 물들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얇은 안개처럼 공간을 가득 채운다.
유색의 그림자는 어느새 이곳의 유일한 조명이 되었고, 소녀의 음성은 은은히 퍼지며 깊고도 묘한 침묵 속으로 변모한다.
그 침묵은 말로 다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각오란 암흑의 황야에 나아갈 길을 비춰 주는 일입니다."
사쿠라코는 대성당에서 채플을 이어가고 있었다.
"유스티나 성도회도 그렇습니다. 그들의 역사와 유산은 아직... 아니, 어쩌면 평생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각오는 여전히 우리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각오..."
코하루는 조용히 혼잣말했다. 사쿠라코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낀 듯한 표정이었다.
코하루는 사쿠라코조차 알지 못하는 사실을 하나 알고 있었다.
유적에서 보았던 먼 선배들의 흔적들. 어쩌면 자기들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소녀였을지도 모를, 그렇기에 더 와닿는 흔적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하나코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여러분, 각오라는 건 거창한 게 아닙니다. 소소하더라도 일상에서 용기를 실천하는 것도 각오죠."
하나코는 집중하고 있는 코하루의 귀에 가까이 입을 댄다. 코하루는 사쿠라코의 말에 몰두한 나머지 하나코의 잔잔한 숨결조차 인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하나코는 장난스레 속삭였다.
"이런 데까지 야한 책을 들고 오는 것도, 어쩌면 각오겠죠."
그 말에 코하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듯 붉어진다.
"무... 무슨 소리야! 이... 이건 그냥, 내가 압수한 거라서...!"
"어머, 정말 가져오신 건가요? 농담이었는데요."
"다, 당연히 아니지! 어쨌든 사형이야! 사형!"
코하루는 쩔쩔매며 자신의 가방을 꼭 끌어안았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가방의 버클이 풀려 있는 것도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였다.
툭.
"……오늘은 이쯤에서 마치죠."
예상치 못한 소란에 사쿠라코의 표정이 안 좋아진다,
사쿠라코는 하나코를 바라보았고, 하나코는 그 시선을 방긋 웃으며 되받아치는가 싶더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
그날 밤, 코하루는 절망에 빠졌다.
"없어…"
가방에 있어야 할, 아니, 없어서는 안 되는 책 한 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나코의 장난 이후 코하루는 가방을 열지 않은 채로 구교사로 왔고, 그때까지 한 순간도 가방을 자신과 멀리 하지 않았다.
이것도 하나코의 장난일까? 이건 하나코의 장난이어야만 했다.
코하루는 씩씩거리며 하나코를 찾기 위해 나섰다.
"아, 하나코 쨩은 밤 산책 중이에요."
히후미의 말에 코하루는 핸드폰을 꺼내 하나코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반응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코하루의 불안은 커졌다.
만약 장난이 아니면? 자기가 어디에 떨어뜨렸다면? 누군가 주워서 본다면? 만약 그게 정의실현부의 선배 손에 들어간다면?
'이런 책을 가지고 다니다니... 정의실현부원으로서 실격입니다.'
'실망임다 코하루.'
'정의실현부 부장으로서, 시모에 코하루를 정의실현부에서 추방한다.'
망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연쇄작용을 일으킨다.
그런 그녀를 본 아즈사는 지도를 펴더니, 마커로 선을 긋기 시작했다.
"하나코의 산책 루트는 파악하고 있어."
코하루는 뒤를 돌아 아즈사를 보았다. 아즈사는 설명을 덧붙였다.
"하나코의 출발 시간, 이동 속도, 코하루의 전력 질주 속도와 체력을 감안한다면…"
아즈사는 지도의 한 곳에 X표를 그었다.
"여기가 랑데부 포인트야."
코하루는 그곳을 쳐다보았다.
대성당.
~~~~~~~~~~
"어머, 그래서 여기까지 달려오셨다구요?"
하나코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코하루는 숨을 고르려 애쓰며 쏟아지는 숨을 참아냈다.
"흠… 죄송하지만, 저는 그런 장난은 안 해요."
"뭐… 뭐라고?"
"코하루에게 중요한 물건이잖아요? 그런 걸 함부로 다루는건 불쾌한 일이랍니다."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안 좋아진다. 코하루는 하나코를 의심했던 자신을 자책했.....
"그래서… 수위는 어느 정도인가요?"
"뭐, 뭐라… 그게 무슨 소리야!"
"후후후… 그 정도로 소중히 여긴다면 저도 궁금해지네요. □◇🌕$나 $□◇🌑하더니 ◇■🌑해버리는 수준? 아니면 ♤🌕◇🌑$□하다 점점 ♤□◇해지더니 마지막엔 $$□$로…."
"그만! 사형이라니까!"
그 순간, 코하루는 무언가를 보고 하나코에게 달려들었다. 하나코는 돌발행동에 밀려 풀숲 속으로 쓰러졌다.
"여기서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아마 바람 소리겠죠, 시스터."
근처를 살피던 두 시스터후드의 수녀는 성당 주변을 둘러보더니 문을 닫고 돌아갔다.
"가… 갔다…"
코하루는 풀숲에 몸을 숨긴 채, 그들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머, 코하루…"
코하루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나코는 여우처럼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당황한 듯하지만 도발적인 표정으로, 무방비함을 강조하는 포즈로 코하루 아래 깔려 있었다.
"후후… 원하신다면 저를 더럽히셔도 됩니다… 과감하게… 격렬하게… 후후훗…♡"
얼마 전 본 만화 속 히로인의 모습과 하나코가 겹쳐보인다. 그리고 그다음 씬이 떠오르며…
코하루의 얼굴이 귀엽게 일그러졌다.
“끼야아아아아아악!”
~~~~~~~~~~
"흐음… 책을 잃어버리셨다면, 아마 저기겠군요."
코하루는 하나코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끝은 조금 전 채플을 들었던 별관 쪽을 향하고 있었다.
"왜 하필 저기야?"
"코하루가 채플 들어가기 전, 화장실에서 한 번 보셨죠?"
"맞… 아, 아니, 그걸 어떻게…!"
"후후… 다 알 수 있는 법이죠. 그리고 채플을 들은 뒤에는 그 가방을 계속 붙들고 있었으니까 다른 곳은 아닐 거라 생각해요."
단순한 논리였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코하루는 침을 꿀꺽 삼키며 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의 성당은 기묘하게 어두웠다.
햇빛과 달리 달빛은 스테인드글라스를 뚫지 못하고, 그 안에 갇힌 색깔들이 모호하게 어른거렸다.
빛은 유리 안에 머물며, 검푸른 그림자가 은은히 퍼지는 듯했다.
단조롭고 묵직한 발소리가 성당 안에 울려 퍼졌다. 채플 때와는 또 다른 무겁고 텅 빈 감각이다.
코하루는 핸드폰을 켜서 어두운 성당을 비추며,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찾았다.
"하나코… 따라오고 있지?"
두려운 마음에 코하루가 조용히 물었다.
"전 여기 있어요."
"그래, 잘…… 왜 수영복이야?!!!"
"누가 혹시 들어왔을 때 평소 복장이면 들킬 것 같아서요."
"트리니티에서 수영복만 입고 돌아다닐 사람은 너뿐이잖아! 그리고 언제 갈아입은 거야?!"
그때였다.
뚜벅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려왔다.
코하루는 깜짝 놀라 바닥에 몸을 낮췄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어둠 속 의자 아래에 익숙한 책 한 권이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찾았다!"
코하루는 책을 꼭 끌어안으며 안도했다.
얼굴엔 안심한 기색이 가득했다.
하나코를 찾기 위해 고개를 들자, 그때 그녀의 시야에 그것이 들어왔다.
그것은 인간을 닮은 형체였지만, 결코 인간이 아니었다.
푸른빛에 물든 흐릿한 실루엣이, 거미줄처럼 희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기이한 투명함괴 그것에 달라붙어 몸의 윤곽을 보이는 검은 천이 그것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다.
그것의 몸엔 어딘가 빛이 잠겨 있는 듯한 차가운 빛의 잔상이 남아 있었고, 아무 표정도 없는, 마치 헛것 같은 얼굴이 코하루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코하루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왔다.
"꺄아악!"
코하루는 총을 겨누며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탄환은 그것을 향해 뻗어갔지만, 마치 유리를 통과하는 빛처럼 그대로 스쳐 지나가 기둥에 부딪혔다.
"뭐…?"
탕! 탕! 탕!
하나코도 그것을 향해 총을 발사했지만, 나무 의자와 기둥에 부딪힐 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것은 고개를 돌려 하나코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코하루 쪽으로 천천히 다가간다.
"으아아아아아!!!!"
탕! 탕! 탕! 탕!
코하루는 무의미 한 것을 앎에도 두려움에 계속 총을 쏘았다.
"코하루! 이쪽으로 오세요!"
하나코가 멀리서 소리쳤다.
코하루가 소리가 난 쪽을 보니, 하나코는 비품 창고의 문을 열고 있었다. 코하루는 질주하여 창고로 뛰어들었고, 하나코는 힘껏 문을 닫아버렸다.
쾅!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코하루는 숨을 가다듬으며 묻는다.
"저건 대체 뭐야…?"
"미메시스긴 해요."
"미메시스?"
일전에 유적에서 본 미메시스가 떠올랐다. 비슷한 외형이었지만 어딘가 달랐다.
그런데 '긴 해요'라니? 코하루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마 불량... 아니, 돌연변이 미메시스인 것 같아요."
"뭐? 자세히 설명해 봐."
하나코는 무언가를 떠올렸다. 시스터 후드에서 받은 책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하나코는 비품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이리저리 살펴보니 역시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세세한 건 빼고 말할게요. 저 미메시스가 코하루에게만 집중하는 이유, 아마 알거 같아요. 그리고 파훼법도 알 것 같거요."
"뭔데…?"
콰앙!
그때, 문이 크게 흔들렸다.
"빨리! 뭐야? 어떻게 해야 해?!"
하나코가 조용히 코하루의 귀에 속삭였다.
"사혀어어어어엉! 사형이라고, 사형!"
코하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하나코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태도와는 다르게 심각했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눈빛은 차갑고 단호했다.
"농담이 아니에요, 코하루. 전 진지해요."
코하루는 하나코의 말에 충격을 받아 씩씩거리고 있었다.
분명히, 너무나 비상식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창고 밖에서 들려오는 존재는 코하루의 머릿속 모든 논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콰아아앙!
『각오란 암흑의 황야에 나아갈 길을 비춰 주는 일입니다.』
혼란스러운 와중 오늘 채플에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코하루는 이를 꽉 악물며 하나코에게 말했다.
"하나코… 각오는 되어 있어?"
코하루의 눈에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결연함이 깃들어 있었다.
"난 되어 있어."
콰아아아아아앙!
문이 부서지며 미메시스가 천천히 비품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푸른 빛의 형체는 그 자체로 불길한 기운을 풍기며 창고 안쪽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것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공허한 울림을 만들어내며 다가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형체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그리 강하지 않았다.
오히려 묘하게도, 코하루의 표정에는 불안보다는 어딘가 부끄러움이 스며들어 있었다.
"역시…"
하나코가 이 상황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눈에는 안도감과 약간의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코하루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의실현부복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지고, 대신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은 검은색 하이레그였다. 너무 헐렁해서 끈을 몇 번이고 조여 매었지만, 조금만 움직이면 흘러내릴 듯 위태로웠다.
미메시스는 옷, 정확히는 하이레그를 통해 사람을 구분하는 듯 보였다.
그랬기에 처음에 수영복을 입은 하나코를 일원으로 인식해했고코하루만 노린 것이였다.
사쿠라코의 말따라 하이레그는 트리니티의 가톨릭 정신의 기원과 뿌리가 담긴 옷인 모양이었다.
코하루는 억지로 흘러내리지 않게 끈을 잡으며 미메시스를 쳐다보았다.
그 푸른 형체는 가까이 다가와, 코하루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코하루의 가방을 조용히 가리켰다.
하나코는 조용히 코하루의 가방에서 책을 꺼내 건네주었다.
미메시스는 책을 받아들고 천천히 페이지를 넘겼다.
슥, 슥하고 페이지가 넘어가는 소리가 창고 안을 울렸다.
돌연변이 미메시스, 미메시스의 탄생 중 우연히 순수한 욕구에서 태어난 그것은 늘 심심했다. 수녀로서 지켜야 할 도리들, 욕망을 금기로 규정하며 억눌린 감정의 편린들이 쌓여 만들어진 부산물인 그것은 신비에 각인된 욕구였다.
그것은 그저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싶었을 욕구일 뿐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순간, 미메시스는 코하루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발짝 다가가며 코하루에게 책을 건네주었다.
코하루가 머뭇거리며 책을 받자 미메시스의 형체는 마치 소금이 물에 녹듯 천천히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푸르스름한 잔광이 사라지고 나서야 창고는 완벽한 정적에 휩싸였다.
"결국 다 잘 끝났네요."
하나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
코하루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게 끝났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이 가슴 한켠에 남아있었다.
"하나코… 이제 돌아가..."
쿵쿵쿵쿵쿵!
코하루와 하나코는 갑작스러운 발소리에 온몸이 굳었다. 그와 동시에, 성당의 모든 조명이 한꺼번에 켜지면서 어둠이 걷혔다.
"어머…"
"뭐, 뭐야…!"
코하루는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 모든 게 끝난 것이 아닌 걸까?
쿵쿵쿵쿵쿵!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성당의 문이 열리며 발걸음의 주인들이 등장했다. 검은 수녀복을 입은 시스터후드의 수녀들이 단호한 눈빛을 보내며 일제히 외쳤다.
"침입자다!!!"
"에?"
하나코는 후후 웃으며 코하루를 가르킨다. 코하루는 그제서야 자신의 상태가 떠올랐다.
코하루의 각오는 여전히 몸에 헐렁거리며 걸쳐져있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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