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조노 세이아는 오묘하고도 익숙한 기시감이 자신의 전신을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자신을 바라본다는 이 기묘한 기시감.
세이아는 이 감각에 익숙했다.
‘오랜만에 꾸는 자각몽(自覺夢)이군요...’
꿈을 꾸는 와중에, 이것이 현실이 아닌 꿈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명확하게 깨닫고 있는 상태. 세이아에게 있어 그것은 단순한 자각몽인 동시에, 미래의 단편을 필름처럼 엿보는 예지몽(豫知夢)과 거의 동의어였다.
‘하지만 제 예지 능력은 이미 사라졌을 터입니다만...’
색채에 물드는 것을 피하기 위한 대가로, 그녀는 스스로 가장 큰 무기였던 예지몽의 능력을 버렸다. 하지만 지금 이 선명한 기시감은... 분명 예지몽의 그것과 질적으로 동일하였다.
물론, 자각몽 자체가 그녀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누구든 가끔은 자각몽을 꿀 수 있으며, 그것이 굳이 예지와 연결될 필연적인 이유도 없었다. 예지 능력이 사라진 자신 역시, 그저 예지가 아닌 단순한 자각몽을 꿀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세이아는 혼란스러운 상념을 조용히 가다듬고, 정신을 꿈의 세계에 집중했다.
예전에는 자주 드나들었던 영역인 만큼, 그녀에게는 자각몽의 모호한 감각을 다루는 나름의 기술이 있었다. 타인인 동시에 화자로서, 이 꿈의 감각과 이미지를 현실처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경험상 이러면 주로 촉각이 가장 먼저 돌아온다.
느껴지는 감각은... 벨벳처럼 부드럽고, 잘 데워진 홍차처럼 따뜻했다.
그 다음으로 돌아오는 것은 감각보다도 선명한 감정.
지금 세이아가 느끼는 감정은... 설렘인가? 아니면 놀라움? 혹은 충만함에 가까운 기쁨? 뭐라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이고도 강렬한 긍정의 감정이었다.
감정까지 느끼고 나면, 이제 장면 전체를 제3자로서 관측할 수 있게 된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를 가장 좋은 좌석의 스크린 너머에서 바라보듯이.
‘이제 잠시 기다리기만 하면, 이 꿈의 전모가 드러나겠...’
CHU♡
어라?
세이아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키스신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과 선생이 부드럽게 입술을 부딪히고 있는, 지극히 사적이고 달콤한 키스신.
***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트리니티의 정원, 은은한 홍차 향기가 감도는 티 테이블, 세이아의 말이 끝나자 미카와 나기사의 표정은 아주 예술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세이아는 그 둘의 반응이 만족스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띤 채 찻잔을 홀짝였다.
파앙!
미카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하얀 도자기 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미카는 여전히 특유의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희고 고운 이마에는 선명한 십자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헤에,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굳이 우리한테 하는 이유가 뭘까, 세이아 쨩☆”
미카는 분노를 억누르며 지극히 상냥하고 위협적인 어조로 물었다.
“단순한 정보 공유일 뿐입니다. 예전에도 저는 예지몽을 꾸면 가장 먼저 미카와 나기사 두 사람에게 공유하지 않았습니까. 오랜만이지만, 그저 과거의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세이아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지만 세이아 씨의 예지몽 능력은 이미 사라진 상태가 아닌가요? 지금의 꿈 역시 그저 희망 사항이 반영된 단순한 꿈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아니 오히려 그쪽일거라고 봅니다만.”
나기사는 애써 태연한 척, 논리적인 반박을 시도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하지만 찻잔을 받치고 있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세이아의 눈이 놓칠 리 없었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제 예지 능력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아닙니다.”
세이아는 예지 능력을 포기했다. 하지만 선명한 영상으로서의 예지몽 대신, 육감의 형태로 그 잔재는 아직 그녀의 안에 남아있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번 꿈에서 느낀 감각은 과거 제가 진짜 예지몽을 꿀 때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았다는 사실 정도는 확실하게 보증할 수 있겠군요.”
세이아의 확신에 찬 말을 들으며, 미카와 나기사는 더 이상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들의 얼굴에는 각기 다른 종류의 초조함과 질투가 선명하게 서려 있었다. 세이아는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이 작은 연극의 마지막을 장식할 결정타를 날렸다.
“아, 그리고 참 공교롭게도 오늘 오후에는 선생님과의 단둘이서의 데이트 약속이 있다는 사실까지 말이죠.”
푸흐흡!
미카와 나기사는 거의 동시에 입에 머금고 있던 홍차를 분수처럼 뿜었다. 최고급 홍차가 새하얀 테이블보와 자신의 얼굴에 튀었지만, 세이아에게 그 불쾌감보다도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승리감이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
세이아는 방금 전 두 가지 거짓말을 했다. 엄밀히 말하면 대놓고 속인 거라기보다는, 의도적으로 진실의 결을 과장하거나, 모호하게 에둘러 넘긴 것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첫째는 오늘 선생과의 데이트에 대한 부분. 실제로는 트리니티의 일부 활동 구역 당번으로서, 현장에서 선생을 보좌하는 업무의 연장이었을 뿐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사적인 시간이라기보다도, 공적인 일정 중 하나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카와 나기사의 반응과 얼굴 근육이 일그러지는 장면이 꽤나 인상적이었기에, 세이아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둘째는 예지몽에 대한 것. 분명 꿈에서 느꼈던 감각은 예지몽의 질감과 본질적으로 일치했다. 그러나 자신이 예지 능력을 버린 이후, 단 한 차례도 ‘진짜’ 예지몽을 꾼 기억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꿈 역시 어디까지나 단순한 자각몽, 즉 평범한 ‘꿈’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고 스스로 의심하고 있었다. 가장 의심스러운 이, 가장 조심스러운 해석을 하는 이 역시 세이아 자신이었다.
‘속으로는... 결국 저도 믿고 있지 않다는 거겠죠.’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아! 이쪽이야!”
환한 햇살 아래에서 손을 높이 흔드는 선생의 모습. 세이아는 잠시 멈춰서, 조금 전 미카와 나기사가 흩뿌린 홍차, 그리고 뒤늦게 태연함을 연기하던 표정을 떠올렸다.
‘거짓이든 진실이든, 결국 미래란 건...’
그리고 세이아는 문득, 그 표정보다 심한 표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면 되는 게 아닐까요?’
***
트리니티 인근의 한적하고 햇살 좋은 카페. 선생과 세이아는 마주 앉아 각자의 음료를 앞에 두고 있었다.
오늘 세이아의 공식적인 역할은 트리니티 시설 감찰 업무를 맡은 선생을 보좌하는 당번이었다. 행정 절차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료를 미리 준비하는 등의 보조 업무. 공적인 일정이었지만, 둘이서 함께 트리니티 캠퍼스를 거닐고, 마주 앉아 홍차 대신 달콤한 파르페를 나누는 이 시간은... 적어도 세이아에게는 데이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데이트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오늘 세이아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한때 밀레니엄 엑스포 당시 리오의 에이전트로서 잠입 임무까지 수행해 본 몸. 세이아는 지금 숙련된 첩보원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자신의 목표를 향한 고도의 심리 작전을 펼치는 중이었다.
“저어어… 세이아 씨?”
선생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선생님?”
세이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는 태도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입술 주변에는 방금 전 그녀가 주문한 파르페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새하얀 크림이 마치 립스틱처럼 과하게 묻어 있었다. 선생은 이미 티슈를 세 번이나 건네주었지만, 세이아는 파르페를 먹는 틈틈이 새로운 크림으로 하얀 입술을 리필하고 있었다.
“혹시 그건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있을까?”
선생은 묻는 자신이 더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떤 의중으로 하시는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선생님.”
세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약 45도 정도 기울여 갸웃거리더니, 턱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선생과의 거리를 미세하게 좁혔다. 그녀의 표정은 묘하게 깊고 치명적인 눈빛을 담고 있는 듯했다. 자신의 입술에 담긴 의도를 해석하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
선생은 그 묘한 눈빛과 압박감에 대꾸하는 대신, 묵묵히 티슈 통에서 티슈 세 장을 북북북 뽑아 세이아의 눈앞, 정확히 그녀의 손 옆에 정갈하게 접어 놓았다.
세이아는 약 3초간 그 티슈를 응시하더니, 결국 작전을 변경하기로 결심한 듯 미련 없이 티슈를 집어 입술을 깔끔하게 훔쳤다.
“……”
세이아는 곧바로 다음 수순을 밟는다.
그녀는 자신의 파르페에 꽂혀 있던 얇은 초콜릿 막대 과자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끝부분을 살짝 물어 고정시키더니, 나머지 부분이 정확히 선생을 향하게 하여 무언가를 암시하듯 응시했다.
“……”
다시 이어지는 약 5초간의 정적. 카페의 잔잔한 배경음악만이 정적을 메웠다. 세이아의 붉은 입술과 갈색 초콜릿 과자가 미묘한 긴장감을 조성했다.
오독오독오독.
세이아가 물고 있던 막대 과자가 그녀의 입 안으로 사라져 들어갔다. 선생은 차마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막대 과자가 완전히 사라지고, 세이아가 입을 다물자, 그녀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이제 슬슬 움직이는 것이 어떻습니까?”
***
다음 목적지는 트리니티 캠퍼스 인근의 영화관이었다. 공식 일정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지만, 세이아는 능숙하게 이곳을 '감찰 업무의 연장선'으로 지정하였다.
‘오늘따라 세이아의 페이스가 묘하게 이상하단 말이지.’
선생은 세이아의 노골적인 유도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 학생이 자신을 리드하는 것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애초에 자신들은 연인 관계가 아닌, 명확한 사제 관계일 뿐이니까.
하지만 오늘의 세이아는 평소와 달랐다. 분명 그녀는 사제 관계의 선을 넘을 생각은 없는 학생일 터. 그러나 앞서 카페에서 보여준 행동은 단순한 장난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었다.
세이아는 정말 믿을 만한 학생인 동시에, 그 이상으로 예측이 불가능한 학생이었다.
그런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선생과 세이아는 매점 앞의 키오스크에 도착해 나란히 섰다. 팝콘을 주문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걸로 하시죠, 선생님.”
세이아가 긴 소매로 거의 가려진 손가락의 윤곽으로 키오스크 화면의 특정 메뉴를 가리켰다. 그것은 화려한 핑크색 이미지와 함께,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 당당하게 ‘러브러브 커플 라지 콤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압도적인 사이즈의 팝콘 통과, 빨대가 하트 모양으로 이어져 있는 음료 두 잔이 포함된, 누가 봐도 연인을 위한 패키지였다.
“…아니. 이걸로 하자. 쿠폰 있어.”
선생이 가리킨 것은 그 옆의 메뉴였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스몰 1+1 세트 콤보’.
“그건 좀 재미 없는 선택이군요.”
세이아의 치명적인 눈빛이 선생을 향했지만, 선생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른을 너무 얕보는 거 같은데, 세이아.”
선생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멤버십 바코드를 스캔하고, 숨겨두었던 통신사 할인 쿠폰과 영화관 앱 쿠폰까지 꼼꼼하게 입력했다.
“이것이 어른의 힘이다!!!”
선생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일반 팝콘 세트 두 개가 찍힌 영수증을 확인하며 승리의 포효를 질렀다.
세이아의 계획이 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에는 실망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선생의 단호함과 지극히 현실적인 대응이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그렇군요. 그것이 선생님의 결정이라면 존중하겠습니다.”
세이아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벽에 걸린 상영표를 확인했다.
“어쨌든 이제 시간이 별로 안 남았습니다. 들어가시죠, 선생님. 저는 영화에 늦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
반응이 너무나 쿨해서, 선생은 묘하게 김이 빠졌다.
“자, 잠깐! 잠깐!”
세이아는 이미 두 개의 스몰 사이즈 팝콘 통을 한 손에 들고 우왕좌왕하는 선생을 뒤로한 채 빠른 걸음으로 상영관 입구로 향했다. 선생은 뭔가 속은 듯한 뒷맛이 썩 좋지 않은 상태로 그녀를 따라갔다.
직원의 검표를 마치고 어두컴컴한 상영관 내부로 들어서는 순간, 선생의 얼굴 표정이 미묘하게 경직되었다.
일반적인 영화관 좌석 배열과는 사뭇 달랐다. 자신들이 예약한 좌석 구역은 의자와 의자 사이에 팔걸이나 칸막이가 없는, 푹신한 하나의 2인용 소파의 행렬로 쭉 이어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은은하게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질감과, 다른 좌석들보다 넓게 확보된 공간이 심상치 않았다. 이곳은 명백히 일반석이 아니었다.
세이아는 아무 말 없이 티켓을 펼쳐 선생의 눈앞에 도발적으로 보여주었다.
티켓에는 ‘프리미엄 커플석 2인’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세이…!”
선생이 항의의 목소리를 높이려 하자, 세이아는 천천히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제지했다.
“영화가 곧 시작합니다, 선생님. 언성을, 언성을 높이지 말아주시죠.”
그녀는 이미 커플석의 가장자리, 즉 소파의 한쪽 끝에 지극히 자연스럽게 몸을 깊숙이 기대고 앉아 있었다. 팝콘 콤보에서는 패했지만, 좌석이라는 핵심 목표에서는 완벽하게 역전승을 거둔 세이아였다. 선생은 결국 길고 깊은 한숨을 삼키며, 소파의 다른 쪽 끝, 세이아와 필연적으로 밀착하게 될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스몰 사이즈 팝콘 통은 마치 보란 듯이 두 사람 사이의 텅 빈 공간에 나란히 놓였다.
상영관의 조명이 꺼지고, 거대한 은막 위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가 흐르기 시작했다.
세이아가 고른 영화는 제목부터 대놓고 연인들을 타겟팅한, 러닝타임 내내 주인공 남녀가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다 결국 빗속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전형적이고도 끈적한 로맨스물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자, 세이아는 기다렸다는 듯 작전을 개시했다.
프리미엄 커플석은 두 사람이 각자 팔다리를 쭉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광활하고 쾌적한 공간을 자랑했다. 하지만 세이아에게 그 넓은 공간은 사치에 불과했다.
부스럭.
미세한 옷감 스치는 소리와 함께, 세이아의 무게중심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녀는 소파의 빈 공간을 모조리 무시하고 선생의 왼쪽 어깨 부근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작은 어깨가 선생의 팔뚝에 지그시 닿았다. 체온이 옷감을 뚫고 전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
선생이 흠칫하며 몸을 굳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세이아는 모르는 척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했다. 짐짓 영화에 몰입한 척하고 있지만, 그녀의 신경은 온통 맞닿은 어깨의 감각에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문제의 팝콘.
분명 두 사람의 무릎 위에는 각자 1인 1통의 팝콘이 놓여 있었다. 맛도 똑같은 맛이었다. 하지만 세이아는 자신의 팝콘 통을 두고 선생의 팝콘만을 집요하게 노렸다.
스크린 속 남녀 주인공이 서로의 손을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클라이맥스 직전의 장면.
세이아의 하얀 손이 어둠을 가르고 선생의 무릎 위로 뻗어왔다.
“……!”
선생이 팝콘을 집으려던 찰나, 팝콘 통 안에서 두 사람의 손가락이 얽혔다. 우연이라기엔 너무나 노골적인 타이밍이었다.
세이아는 손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팝콘 더미 속에서 선생의 손등을 손가락 끝으로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버터 향 가득한 옥수수 알갱이들 사이로 느껴지는, 부드러운 그녀의 손길.
“아, 실례하겠습니다.”
세이아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선생의 귓가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그녀는 굳이, 정말 굳이 선생의 손가락 사이에 끼어 있던 팝콘 한 알을 낚아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으음, 역시.”
오물오물.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스크린의 반사광을 받은 세이아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그리고 요염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히 영화 관람이 아닌, 선생 관람의 눈빛이었다.
***
“영화는 즐거우셨습니까?”
“……”
영화관을 나서며 세이아는 싱그럽게 물었지만, 선생은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세이아는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대담했다.
“저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선생님. 앞으로는 영화 감상도 자주 해야겠군요.”
“그래… 그렇구나….”
선생은 빤히 세이아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소녀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뭔가 철두철미하게 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한없이 어설픈 행동거지. 단순한 장난이나 구애라고 하기에는 그 감정의 색채가 너무나 애매하고 복잡했다.
하지만 선생의 고뇌와는 반대로, 지금 세이아는 완벽한 자기과신(自己過信)에 빠져 있었다.
비록 목표했던 결정적인 ‘키스’에는 다다르지 못했으나, 커플석 점거와 스킨십 공방전에서 선생을 상대로 판정승을 거뒀다는 사실이 그녀를 고양시키고 있었다.
이 흐름을 조금만 더 탄다면, 꿈에서 보았던 그 장면을 재현하는 것도, 그리고 그 결과물을 미카와 나기사의 눈앞에 들이밀어 그들의 표정을 예술적으로 일그러뜨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주도권을 잡은 지금이 기회입니다. 쉴 틈 없이 휘몰아쳐야...’
세이아는 머릿속으로 다음 씬을 그렸다. 방금 영화관 스크린 속에서 보았던, 병약하지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의 클리셰가 뇌리를 스쳤다.
마침 본인도 병약한 캐릭터가 아닌가. 평소라면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드러내거나 인정하는 것을 극도로 혐오하는 세이아였지만, 지금은 달랐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약점조차 무기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아… 갑자기… 머리가….”
세이아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그리고는 맥없이 바닥으로 스르르 쓰러졌다.
누가 봐도 작위적이고, 형편없는 연기였다.
“……”
선생은 아무 말 없이 차가운 보도블록 위에 대자로 누워 있는 세이아를 내려다보았다. 걱정을 해야 할지, 박수를 쳐줘야 할지, 아니면 컷 사인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는 난해한 상황이었다.
그것보다도 선생은 남들이 자신이 아프다고 동정받는 것을 싫어하는 세이아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가 않았다. 대체 무엇을 위해?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정적은 길어졌다. 세이아 역시 자신의 연기가 실패했음을 직감하고, 무안하게 슬그머니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괜찮으십니까아아아――!!!!”
고막을 찢을 듯한 엄청난 괴성과 함께, 대지를 울리는 가공할 기백이 덮쳐왔다. 선생은 화들짝 놀라 소리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 그리고… 저기 쓰러져 계신 분은 티파티의 세이아 님?”
구호기사단장, 아오모리 미네였다.
그녀의 눈이 바닥에 누워 있는 세이아를 포착하는 순간, 미네의 뇌내에 탑재된 구호 본능이 미친 듯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세이아의 선천적으로 빈약한 건강 상태.
내리쬐는 오후의 뜨거운 직사광선.
그리고 묘하게 붉게 상기된 얼굴.
모든 단서가 가리키는 결론은 단 하나였다.
“상황 파악, 완료했습니다.”
미네가 비장하게 말했다.
“아니, 뭔가 잘 모르고 있는 거 같은데 미네...”
선생이 황급히 손을 저으며 해명하려 했지만, 미네의 결단은 그보다 빨랐다.
“급성 열사병이군요!!!”
미네는 망설임 없이 바닥에 있는 세이아를 쌀가마니처럼 번쩍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에 둘러멨다.
“자, 잠깐만요! 미네?! 이건 연ㄱ... 아니, 저는 괜찮...!”
“말씀하지 마십시오! 체력을 아끼셔야 합니다!”
미네는 세이아의 저항을 열사병 환자의 헛소리로 치부하며, 즉시 의무대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세이아 님! 제가 전속력으로 구호해 드리겠습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아스팔트 바닥이 쩍 갈라지는 파열음과 함께, 미네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하늘로 솟구쳤다.
우악스럽게 날아오르는 미네의 어깨 위에서, 세이아는 마치 바람 빠진 풍선처럼 나풀거리며 멀어져 갔다. 선생은 그 구조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미네와의 소동과 구호기사단에서의 아찔했던 탈출극이 마무리된 후, 두 사람은 트리니티 외곽의 강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었습니다.”
세이아는 강물에 비친 노을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실로 엄청난 오후였다. 미네가 내려놓자마자 달려온 하나에가 ‘체온이 높다면 물리적으로 신체의 부피를 줄이면 된다’는 기적의 논리로 전기톱의 시동을 걸었을 때, 세이아 육감은 그 자리에서 벗어나야 함을 절규했어다.
다행히 그 찰나의 순간,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선생이 필사적으로 하나에를 저지하고 그녀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지금쯤 세이아는 외다리 티파티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랬으면 다행이고.”
선생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강가에는 어느덧 짙은 황혼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과 강물이 온통 주황빛으로 물드는 시간. 하루 중 가장 아름답지만, 동시에 끝이 다가옴을 알리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놀랍게도 구호기사단에서 탈출한 직후부터, 세이아의 기행은 뚝 끊겼다.
입술에 크림을 묻히지도, 과자를 물고 유혹하지도, 억지스러운 연기를 펼치지도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진 채 선생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미카와 나기사에게 ‘키스’라는 전리품을 자랑하며 그들의 표정을 구경하는 것은 여전히 매력적인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세이아는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꾸미는 작위적인 연극에 신경을 쏟기엔, 해가 저물어가는 이 시간이 너무나도 짧고 아깝다는 것을.
‘목적을 위해 과정을 희생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겠지요.’
미래의 통쾌함을 위해 현재의 선생님을 기만하거나 이용하는 대신, 그녀는 지금 이 순간 옆에 있는 그와 온전한 현재를 공유하고 싶어졌다.
계산된 유혹도, 전직 에이전트의 작전도 필요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시원함과,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따스한 온기면 충분했다.
세이아는 슬며시 고개를 돌려 선생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을빛을 머금은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비로소 소란스러운 계획들이 침묵하고, 잔잔한 행복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예지몽은 되지 못했군요.’
황혼이 내려앉는 강가의 거리를 걸으며, 세이아는 생각했다.
미카와 나기사의 그 일그러진 표정을 보기 위해 시작한 짖궂은 장난이었다.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였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찾아오지 않은 채 하루가 저물어가자, 가슴 한구석에 아쉬움이 고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바랐던 것은 장난의 성공이었을까, 아니면 정말로 선생과의...
“오늘 하루, 재밌었어?”
상념을 깨트리는 선생의 목소리에 세이아는 고개를 들었다. 노을을 등진 그의 얼굴이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오늘 하루종일 자신에게 시달렸으면서, 저렇게 사람 좋게 웃고있는건가.
“...물론입니다.”
세이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비록 씁쓸함이 섞여 있을지언정, 그 미소는 분명한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비관이 대부분일지라도, 그 끝에 안도가 있기에 지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쓴웃음이니까.
예지 능력을 잃은 후, 세이아의 세계는 역설적이게도 더욱 선명해졌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기에 권태로웠던 과거와 달리,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지금의 삶은 매 순간이 벅찬 ‘미지(未知)’였다.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이토록 삶을 생동감 있게 만들 줄이야.
가장 무지해진 순간, 세이아는 가장 홀가분해졌고, 비로소 행복해졌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 평범하고도 소중한 하루의 마무리에, 굳이 기적 같은 우연을 바랄 필요는 없었다.
“그러면 세이아. 오늘 하루 고마웠...”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 듯, 선생이 발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린 그 순간이었다.
빠아아아아앙―!!
경적 소리가 울린다.
“우와아아아앗!!!”
골목에서 튀어나온 트럭, 중심을 잃은 선생의 몸,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세이아의 시선이 한데 뒤엉켰다.
그 찰나의 순간에,
CHU♡
세계가 멈췄다.
입술에 닿은 감각은... 기억 속의 그것처럼 벨벳같이 부드럽고, 잘 데워진 홍차처럼 따뜻했다.
뒤이어 밀려오는 것은 감각보다도 선명한 감정.
지금 세이아가 느끼는 이 감정은... 설렘인가? 아니면 놀라움? 혹은 충만함에 가까운 기쁨?
꿈속에서 느꼈던 바로 그,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복합적이고도 강렬한 긍정의 파동이었다.
감정의 해일이 지나가자, 세이아는 비로소 본인의 시점에서 이 장면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영화의 클라이맥스처럼.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아까 선생을 칠 뻔하고 멀어지는 트럭의 잔상. 중심을 잃고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선생의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입술과 입술이, 치아와 치아가 미세하게 부딪히는 투박한 통증.
생각한 것만큼 달콤하지는 않았다.
생각한 것만큼 부드럽지도 않았다.
생각한 것만큼 로맨틱한 무드도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 이상으로,
행복했다.
콰당탕!
만유인력은 무심하게도 두 사람을 바닥으로 이끌었다. 선생의 무게에 밀려 엉덩방아를 찧으면서도, 세이아는 그 아픔조차 현실의 증거인 것만 같아 싫지 않았다.
“괘, 괜찮아?!”
선생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다급하게 세이아의 안부를 묻는 와중에도, 그는 당혹스러운 듯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가볍게 훔치고 있었다.
저녁 노을 탓일까, 아니면 방금의 사고 탓일까. 선생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세이아는 자신의 얼굴이 그보다 더 붉게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 네...”
목소리가 깃털처럼 작게 떨려 나왔다.
“정말... 괜찮습니다...”
예지몽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과정이, 그녀가 알던 방식과 달랐을 뿐.
미래를 알 수 없게 된 예언자는, 자신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사실에...
그저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회지로 팔던 소설인데 제고 거의 다 팔렸고 더 뽑을거 같진 않아서 전문 올림
https://x.com/cheesedontgas?t=iWtPAElx3CotowvT-ma8Dw&s=09
내 트위터고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rojectmx&no=18876343&page=1
소설 모음집임
댓글 7
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