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S #순애 #이로하
원본 by 大典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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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하게 들려오는 매미 소리가 단순히 여름뿐만 아니라, 열기까지 살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비단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밖은 여름의 정취에 젖어 들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한 환경이 아니었다.
주변에는 기록적인 폭염과 함께 열사병 경보가 내려졌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양산을 지참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기상 캐스터의 전언이다.
“음, 선생님, 움직이지 마세요.”
“안 움직였는데.”
“거짓말. 아까보다 불편해졌거든요.”
방금은 여기였는데, 지금은 이쪽.
손가락이 배에서 옆구리로 이어지는 선을 부드럽게 훑는다.
간지럽다며 항의 섞인 시선을 보내자 이로하는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래도 고의인 모양이다.
게헨나의 모처.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감도는 방 안에서 우리는 자포자기한 듯 나태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나저나, 명치에 머리를 올리고 있으면 좀 괴로운데.”
“약점이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좋잖아요. 약점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다는 건 신뢰의 증거라고요.”
“그런가.”
“그럼요.”
밀어붙이면 통할 거라 생각하는 건지, 이로하는 가끔 억지를 부린다.
거기서 입을 다물어 버리는 나도 나지만, 그녀가 발을 들이미는 선은 날이 갈수록 업데이트되어 황색 신호를 넘어선 지도 이미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늘 미묘하게 말대꾸할 수 없는 지점을 찔러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기민함이라고 해야 할지,
균형 감각이 대체 어떤 환경에서 길러진 것인지 상상해 보면 또다시 그녀의 노고가 느껴져 편애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괴롭지 않은 위치로 슬그머니 머리를 옮겨주는 다정함이 살을 훑는 손가락보다 더 간지러웠으니까.
“…선생님, 포키 먹을래요?”
“먹을래.”
“잠시만요. …자, 아~ 하세요.”
먹고 싶다고 했지 먹여 달라고는 안 했다는 말을 내뱉었다간 포키를 압수당할 게 뻔했기에, 나는 아무 말 없이 주는 대로 받아먹기로 했다.
이윽고 정적이 공간을 채운다.
한숨 돌린다고 해야 할까.
그곳에 말은 필요 없었고, 그저 느릿하게 흐르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차츰 의식이 흐릿해진다.
하얗고 눈부신 햇살이 다다미의 녹색을 방 안 가득 흩뿌려 시야의 조도가 극도로 높다.
그런데도, 아니, 그래서일까.
의식은 갈수록 엉클어진다.
눈앞이 녹색과 하얀색, 파란색 같은 색들로 덧칠되고, 소리도 여름이 옅은 순서대로 멀어져 간다.
기분 좋은 페이드아웃을 나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 10분인지 20분인지, 그 정도 시간이 흘렀을 즈음일까.
“…아―, 아―. 뭐랄까, 아무것도 없네요.”
평소에는 잘 듣지 못하던 억양에 눈이 떠진다.
매미 울음소리.
선풍기 돌아가는 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잡다한 음성.
멀리서 들리는 공사 소음.
멧비둘기 울음소리.
호흡, 옷깃이 스치는 소리.
이로하의 목소리를 되짚어 보려 했지만, 끝내 기억나지 않는다.
창문에 비친 뭉게구름은 천천히 흘러가고, 태양은 주변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우고, 아스팔트의 반사가 창틀을 비추며 반짝이고―
역시, 그 울림을 붙잡을 수 없었다.
나는 한동안 어떻게든 기억해 내려 머릿속을 반추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포기하고 물었다.
“이로하, 방금 뭐라고 했어?”
“방금…? 딱히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만.”
“아니, 좀 전에. 5분 전쯤인가, 아무것도 없다, 같은 말을 했던 것 같아서.”
“아…아니요, 별 의미는 없었습니다만.”
이로하는 조금 난처한 듯 말을 고르더니,
“그냥 왠지, 아무것도 없는 날이구나 싶어서요.”
그렇구나. 중얼거리자 다시 고요한 방으로 돌아온다.
“심심하네요.”
“심심하네.”
결국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맴돌았다.
“게임도 별로 하고 싶지 않고요.”
말을 어중간하게 끊고 이로하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인다.
복부의 감각이나 옷깃이 스치는 소리로 대충 짐작이 갔다.
“이쪽도 나쁘지 않네요.”
코끝을 살구 향이 스친다.
가슴 근처에 가벼운 압박감을 느낌과 동시에 우아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고,
그것이 아는 냄새라는 사실에 절반의 이해와 절반의 당혹감이 교차했다.
“답답해.”
“명치보다는 괜찮을 텐데요.”
그건 그렇지만, 이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뺨을 부비는 듯한 행동을 하는 바람에 말이 쏙 들어갔다.
이건 괜찮은 건가.
솟구친 의문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선풍기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툭, 하고 모자가 떨어지자 이로하가 "아" 하고 소리를 흘린다.
숨소리가 섞인, 목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한 힘 빠진 목소리였다.
“음.”
“나중에 주워도 돼요.”
모자를 집으려 하자, 적당한 위치를 찾아낸 듯한 이로하가 반대편 손을 감싸 쥐었다.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풀려 했지만 손가락까지 얽혀오는 통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체념하듯 창밖을 내다보니 뭉게구름은 아까보다 더 느릿하고 나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심장 소리, 마음이 편안해지네요.”
가슴에 귀를 바짝 대고 이로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위를 올려다본다.
그녀치고는 노골적인 호의 표현이라 조금 동요하게 된다.
곧이어 입가에 비죽이 미소를 띠는 걸 보니, 나는 그녀의 의도대로 휘둘린 모양이다.
“저, 좋아해요. 선생님의 심장 소리.”
그 놀리는 듯한 어조와 의미심장한 도치법부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붉어진 귀까지,
그 모든 것을 다 합친 게 이로하라는 소녀였고,
그녀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 모든 요소에 나는 동요를 넘어 마음이 요동쳐서.
한편 이로하는 “후후”와 “에헤”의 중간쯤 되는 애매한 웃음을 흘리며,
“고동 소리, 빨라졌네요?” 역시나 짓궂은 미소.
귀는 여전히 붉다.
TV 소리가 귀에 박힌다.
“OO 해수욕장은 인파로 붐비고 있습니다.”
“여름 레저, 정말 좋죠!”
“이번 여름에는 많이 놀러 다니려고 생각 중이라서…….”
일종의 현실 도피처럼 들려오는 세상 밖의 이야기는 즐거워 보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축 처지는 무게감을 품고 있었다.
천장에는 둔탁한 빛의 층이 져 있다.
어딘가에서 반사된 빛이 지루한 영화처럼 추상적인 그림을 그려낸다.
그런 것들이 여름의 기운을 부추겼고,
이런 시기에 정체되어 있는 건 우리뿐일 거라는 근거 없는 생각이 들고 나서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가슴팍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며 움직이더니 목 근처까지 다가와 멍하니 있던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어?”
방금과 같은 애매한 웃음.
굳이 따지자면 “에헤” 쪽에 가까운 웃음을 띤 이로하가 있었다.
붉은 기는 어느새 뺨까지 번져 있었다.
“그냥, 아무것도 없어서요. 어쩐지요, 정말.
이건 뭐 놀리고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글쎄요. 기분이랄까요?”
이번에는 정면.
이로하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이내 먼 곳의 뭉게구름이 방안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소리도 없이 겹쳐진다.
나른한 입맞춤에서는 은은한 초콜릿의 단맛이 났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처럼 아래에 깔린 나는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겼다.
어느덧 숨이 가슴까지 차올라 애써 부드럽게 탭을 쳐보았지만, 그녀는 멈춰주지 않았다.
이, 로, 하.
목을 울려 이름을 부르며 시선을 던진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혀로 내 입술을 훑고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멈췄다.
아무래도 고의인 모양이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괴로우셨나요?”
나를 걱정하는 기색은 역력한데, 어째서일까.
그녀의 뛰어난 균형 감각은 정체된 시간과 함께 마비되어 버린 것일까.
황색 신호가 점멸한다.
혹은 그것이 산소 부족으로 인한 의식의 명멸이었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제는 판단을 내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지쳤어.”
“다음에는 더 잘 할게요.”
다음이 또 있는 거냐는 말을 침과 함께 삼킨다.
목젖에서 반향된 말은 툭 하고 떨어진 누군가의 땀방울과 겹쳐지며 실감을 더했다.
시선이 얽히고, 고요한 침묵이 찾아온다.
아무래도 말은 필요 없는 모양이다.
여러분도 더위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밖으로 나가 여름 이벤트를 즐겨보자고요.
그것은 방금 꺼진 TV 속 아나운서의 멘트.
우리는 여름의 대낮에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입맞춤이 쏟아지고, 여름의 옅은 순서대로 페이드아웃.
나는 그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찌할 도리 없이 정체된 시간 속에서 소녀의 그림자가 하늘에 겹쳐진다.
뭉게구름은 여전히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