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2년전에 졸업한 선배를 찾아와서 한다는 말이.."
"네에.."
"다시 정치를 하라고요? 저더러요??"
찻잔을 든 손이 덜덜 떨리고 있습니다. 애저녁에 다과의 여유는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과거의 제 자신에게 절대로 문을 열지 말고, 정중하게 돌려보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문을 열어준 게 너무 후회됩니다. 그저 차 한 잔, 혹은 밥이라도 한 끼 하자고 찾아온 줄로만 알았는데 말이죠. 방범카메라로 비추어 본 코하루 씨가 티파티 제복을 입고 있었을 때 진작에 눈치 챘어야 했습니다. 졸업한 지가 꽤 돼서 그런가 정무감각도 같이 떨어진 걸까요.
저는 제가 벗은 지 꽤 된, 티파티 제복을 입고 저를 찾아온 코하루 씨의 말에 순간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정치인'으로서의 '키리후지 나기사'라.. 나름대로 평가가 나쁘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순서가 아직 찾아오지 않아 준비가 덜 됐음에도, 세이아 씨의 권한대행 역할을 잘 수행했다는 평가가 많았죠.
"너는, 구제불능의 의심암귀다."
"쟤가 걔지? 자기를 사랑하는 후배를 퇴학시키려 들었다는.."
막나간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저도 제가 정치에 천성인 사람인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정치인으로서의 저를 졸업 후에 다시 마주해보니, 아무래도 제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정치인들은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봅니다. 졸업 이후에 곧바로 인재영입, 비례대표 1번, 청년최고위원장 등 여러 직함을 내세워 정계 데뷔도 제안받았지만..
"죄송합니다. 저보다 더 잘 맞는 사람이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다 깔끔하게 거절했습니다. 거절하고, 대신 제 진로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죠. 그러다 보니 학창시절 가장 행복했던 때는, 제 미카 씨, 세이아 씨, 혹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다과회를 열어 느긋하고 여유로우며, 평화로운 시간을 가졌던 때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다과 만들기 참 쉽죠?>
<당신도 할 수 있다 조주기능사 100일의 전사>
<백종원이 알려주는 망하는 자영업의 특징>
그래서 저는 아침에는 차와 커피를, 밤에는 술과 하루의 마무리를 파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학창시절 인연을 쌓았던 사람들, 특히 히후미 씨, 미카 씨, 세이아 씨나 선생님이 찾아와준다면 더 좋고요. 기다란 포스트잇으로 중요한 부분에 표시를 해 두었고, 많이 넘겨봐서 모서리가 뭉툭해진 책들이 책꽂이에 꽂혀있습니다. 곧 조주기능사 시험이 있어서 더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죠.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에 들어가는 럼이 오버프루프였나요? 골드였나요?* 책을 한번 더 봐야겠어요.
*조주기능사 기준 화이트 럼 반온스입니다. 공부 다망했자나..
어쨌든, 이런 사람에게 정계 복귀를 제안하러 오다니. 코하루 씨에게 악감정은 없고, 오히려 에덴조약 사건 때문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며, 개인적으로도 호감인, 귀여운 후배지만..
"은퇴한 사람한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아무래도 이 부분에서 제 뜻을 굽히기는 쉽지 않을 것 같군요. 방음이 되어 있어서 실제로 쩌렁쩌렁 울리진 않을 겁니다만, 저는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소리를 빽 질렀습니다.
"상임고문 같은 거죠..? 전면에 나서야 하는 건 아니라고 말해줘요.."
제발. 제발. 제발. 이런 부담감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아요.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마치 실로 얽혀 있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얽혀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섣불리 그게 나쁜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삶을 다시 살고 싶지 않아요.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속해있는 집단을 위해 친한 사람을 의심하는 일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아요.
상임고문 같은 직함을 받아 후배들에게 조언을 해주는 거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으니까..
"나기사 님.."
"네..? 그리고 이제 졸업했으니까 언니라고 불러도 되는데.."
"죄송해요!"
코하루 씨는 그러면서 제게 명함과, 봉투를 하나 내밀었습니다. 아마도 대량생산이 들어가지는 않은, 시안 단계의 명함인 것 같습니다. 저는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들고 인쇄되어있는 정보를 읽어내려갔습니다.
[트리니티 티파티 시모에 코하루 비서실장 키리후지 나기사]
그리고 봉투를 펼쳐보자..
익숙한 필체가 저를 맞이해 줬습니다.
맨 위에 추천장이라는 제목이 써 있네요. 아마도 이 후배는 저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나 봅니다.
"음모에 휘말려 퇴학당할 뻔한 불쌍한 후배 좀 도와주시면 안될까요?"
그리고 마음에 비수를 꽂는 한 마디. 예전이었다면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절대 흔들리지 않았겠지만..
*
자, 3학년이 된 코하루는 티파티의 일원이 되어, 2년 전 졸업해 창업 준비에 한창인 선배를 데리러 왔습니다. 그렇다면 코하루는 왜 나기사를 영입하러 왔을까요?
이걸 알기 위해서는, 며칠 전 코하루가 누군가를 만난 상황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코하루 짱~"
"하나코!"
"우와~ 이게 얼마만이에요?"
"유급 이의신청은.."
"각하됐어요!"
"아."
세상에나. 기각도 아니고 각하라니. 하나코는 도대체 3학년을 어떻게 보낸거야?!
"그럼 이제 우리 학년이 같아진거야?"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 코하루 짱. 우와.."
"아, 이거 말이야?"
하나코는 내 교복 가슴팍에 달린 뱃지를 손에 잡아들고서 큰 반응을 보였다. 하얀 뱃지에 그려져 있는 찻잔과, Tea party라는 글자.
*
3일 전
[사모에 코하루 당선 확실]
"..."
TV에 떠 있는 자막이 믿기지 않는다. 저거 오타 아니야?
"코하루 짱! 축하해요!"
"응. 축하해. 이제 옷 갈아입고 나갈 준비 해야지."
"내.. 내가? 정말?"
내가 정말.. 티파티가 됐단 말이야?
"시모에 코하루.. 당선 확실! 49.9%의 득표율로.."
TV에서 계속 흘러나오는 개표 방송의 해설자가 말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저 자막이 잘못 나왔다는 점에서,
[시모에 코하루 당선 확실]
..다시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니까 어느새 글자가 수정되어 있다. 슬슬 이게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게 체감되기 시작한다.
탓할 생각은 없지만 미카 님이 유세장에 와서 나를 띄워준 게 기사로 나갔을 때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블라인드를 열어 창 밖을 보니 바쁘게 카메라를 대고 집 입구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기자들과, 방송사에 보낼 영상을 찍고 있는 아나운서와 촬영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항상 입던 교복이었지만, 미리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각을 세워 교복을 다듬었다. 풀어 뒀던 단추도 모두 잠궜다. 자리에서 일어서니 히후미와 아즈사가 내게 건투를 빈다는 듯 엄지를 척 들어 올려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것인지, 긴장감에 두근거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집을 나섰다.
"소감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
당시에는 어벙벙했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 진정되기도 했고, 적응도 해서 나름대로 나는 3학년 준비를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고민은 있었는데, 바로 곁에 누굴 둬야 할지였다. 하나코의 말로는 비서실장을 잘못 뒀다가 나쁜 말로를 맞이하는 사람이 한 트럭이라는 것이었다.
"코하루 짱. 근데, 코하루 짱의 비서실장은 이제 누군가요?"
"글쎄.. 고민이야."
"후훗.."
"그럼 네가 추천 좀 해줄래?"
"나기사 님은 어때요?"
키리후지 나기사. 2년 전 트리니티를 졸업한, 전 필리우스 분파 수장. 이었다만, 아마 지금은 분파를 떠나서 야인이 되었다지? 창업 준비를 하고 있다던데..
확실히 나기사 님이라면 정의실현부가 주 기반인 내게 있어서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하나코가 그랬었지. 키보토스 밖에도 비슷한 정치인이 있다 뭐라나.
물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기는 했다. 나기사 님이 학창 시절 보여줬던 걸 보면, 영입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정말 든든한 지원군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런데.. 나기사 님이 받아 줄까?"
"코하루 짱, 아직 덜 음습해졌군요?"
엥?
"나기사 님은 코하루 짱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지고 있다는 거, 벌써 잊은 건가요?"
"아."
"그리고 선생님의 추천도 받아서 가져간다면.. 아! 직접 찾아가는 게 좋겠어요!"
"진짜 가끔씩 소름이 돋는다니까."
하나코의 평실 행실이 저런 이유를 순간 잊고 있었다. 하나코는 이미지가 영 좋지 않아서 그렇지, 일단 하기만 한다면 트리니티를 정치로 정복할 수 있을 법한 지략을 가진 게 바로 하나코였다. 물론 그게 싫다고 평소에 저러고 다니는 거지만. 그래서 나는, 그대로 선생님의 추천장을 받아 나기사 님에게 향하기로 했다.
*
그래도 교사에 들어서니 모교라고 심장이 두근거리긴 하네요. 씁쓸한 마음이 다 가시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긴 협상 끝에, 저는 제 꿈인, 창업 준비에 그나마 방해가 덜 되는 상임고문직을 약속받았습니다. 다행히 이런 감은 죽지 않았었나 보네요. 물론 제가 학창 시절 뭘 하고 다녔는지 생각해 본다면 상임고문이여도 주목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봐야 할 사람이 몇 있는데.. 일단은..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택시!"
"어디 가세요?"
저는 마음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일단 택시를 잡기로 했습니다. 기사님이 창문을 내리며 제게 물어왔습니다.
"샬레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선생님. 제 미래를 앗아갔으니, 선생님도 무언가를 내놓으셔야겠어요.
저는 비어있는 약지를 슥 쳐다본 뒤, 택시의 뒷자리에 올라탔습니다.
<계속?>
겨울방학 소설 안써지고 급 꼴려서 투척한 소설
2화가 나올지는 몰?루
정치물 좋아 헤헤
댓글 10
키리후지 나기사 티파티 성고문 ㅇㄷ???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용으로 전개될 예정 만약 2화가 나온다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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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사가 불쌍하지도 않나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