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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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실을 따뜻하고 자욱하게 메운 수증기 속에서 비누를 헹궈내고 있노라니 애들이 밖에서 무얼 하는지,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고 물소리만이 들려온다.
샤워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비누를 제대로 헹구어 내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몇 분간의 노력이 모두 허사로 돌아갈 수 있기에.
냄새가 날 수 있는 부분은 더 잘, 미끄러운 부분 없이 빡빡 문질러서 불어난 때를 씻어내야 하는 것이다.
이 정도면 다 된 것 같다. 나는 수도꼭지를 꼭 잠그고, 수건으로 온몸의 물기를 축축한 부분 없이 잘 닦아낸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드라이기가 어디 있더라..’
…
그러나 내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이 하나 있었다. 오늘은 평소처럼 집에 나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으며, 심지어 그 손님들이 전부 여자에다가, 학생이라는 것.
애초에 이 집에 손님이 오는 일은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으므로,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는 걸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나는 전라의 상태 그대로 로션과 드라이기 생각만 하며 욕실을 나서고 말았다.
목욕을 마치고 기분 좋게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거실로 걸어 나온 내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상을 들고 나르던 키쿄. 고기를 한 점 먹어보며 간을 확인해보고 있던 하루나. 행주를 빨고 있던 유카리.
그리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있던 아리스의 모습이었다.
키쿄와 눈이 마주치고, 하루나의 시선이 살짝 아래쪽으로 쏠려 있는 것을 느낀 순간 뭐가 잘못되었는지를 깨달으며 온몸의 소름이 쭈뼛 섰다. 몸에 한기가 도는 것만 같았다.
가용 용량을 넘어선 정보의 범람으로 인해 잠시 작동을 멈췄던 뇌와 신체는 잠시 뒤 상황을 다시 인식했고, 할 수 있는 최적의 판단을 내려 실행에 옮겼다.
“저질. 변태. 선생님. 미쳤어?!”
키쿄가 했으리라곤 평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상기된 투의 날 선 말들이 뒤에서 날아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끼야아아악!!”
고간에서 덜렁거리는 비엔나 소세지와 함께 나는 있는 힘껏 비명을 지르며 다시 화장실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안에서 문을 열고 먼저 나갔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므로(좋지 않은 일일 것은 분명하다) 나는 그저 애들이 밖에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며.
온갖 상념들이 서로 차례를 지키지 않고 새치기를 하며 몰려들었다.
‘자살할까?’
‘애들한테 알몸을 보이는 건 결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아리스는 등을 돌리고 있었어. 못 봤겠지?’
‘우리 순수한 아리스 만은 안돼!’
“선생님. 이거 당신 옷 맞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있던 내 의식을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멱살째로 끌어올린 건 키쿄의 흥분된 듯한 목소리였다.
곧 문이 손목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살짝 열렸고, 그 사이로 옷가지가 슥 고개를 내밀었다.
옷가지를 받아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제일 먼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통이 큰 검은색 반바지였다.
그래. 반바지를 가져다줬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옷가지를 계속해서 풀어헤쳤다. 그 밑에는『Kivotos Halo Festival』이라는 문구가 검은색 글꼴로 큼지막하게 쓰여 있고,
키보토스 밖에서 열리는 어떤 게임 대회 결승 라운드의 진출자들에게 지급되는 티셔츠와 매우 흡사하게 생긴 노란색 반팔 티셔츠가 있었다.
“이거 없어진 줄 알았는데!”
“선생님.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 거야?”
“어? 아무것도 아냐!”
“선생님. 이번엔 제발 옷을 제대로 입고 나와주세요..”
‘제대로’를 힘줘서 말하는, 마찬가지로 상기된 하루나의 말을 뒤로 하고 나는 엉켜 있던 옷가지를 계속해서 풀어나가기로 했다.
“어?”
그러나 옷가지를 풀어가던 나를 반갑게 맞이해준 것은..
*
...
다리가 휘어지게 양껏 차린 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저희 사이에는 아무 말도 없이 정적이 흐르며, 그저 옆에 준비해 둔 차가운 1.25리터짜리 콜라 페트병에 맺힌 물이 흘러내리고만 있습니다.
모두가 분주히 움직이며 식사 준비에 한창일 때는 우선순위에 있는 일이 있어서인지 분위기가 이상해지지 않았지만, 할 일이 모두 끝난 지금은 그렇지 않은 걸까요.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았지만, 쉽사리 먼저 꺼내놓기는 어려운 그런 이야기가 모두의 머릿속을 지배하다 보니 정적이 찾아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저는.. 이번이 세 번째인가요.
결전 때 한 번. 겨울방학 때 한 번. 오늘 한 번.
별(?)이 3개라.. 미식을 탐구하는 사람으로서 이보다 영광스러울 수 없는 칭호지만, 이게 잘된 일인지 잘 안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의 그.. 자..’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아까 선생님의 다리 사이에 달려 있던 부어스트의 이미지가 떠올랐습니다. 정말 오랜만이지만 크기가.. 정말..
아니죠. 아니죠. 평정심을 되찾아야 해요..
심호흡을 하고.. 좀 이따 다 같이 맛있게 먹을 제육볶음의 맛에 대한 생각을..
“나 속옷 입고 올게! 다들 밥 먼저 먹고 있어!”
“아오!! 그걸 굳이 꼭 말하고 갔다 올 필요가 있냐고!!”
...
...
에휴. 어떻게든 되겠죠. 뭐.
선생님께서 방으로 들어가시며, 시간이 꽤 걸릴 것이라고 생각하셨는지 먼저 밥을 먹으라는 얘기를 하셨지만,
겉치레였을까요. 선생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방문을 열고 나오시더니 주방으로 향해 냉장고 냉동실을 열고, 샷 글라스와 커다란 술병을 하나 들고 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어? 선생님? 그건 뭔가요?”
“보드카. 이런 게 있는데 또 술을 먹지 않을 수가 없잖아.”
보드카.. 였군요. 학생의 신분인지라 실물을 영접해 보지는 못했지만, 독주의 선두 주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답니다.
한 번 맛을 보고 싶지만. 어렵겠죠. 선생님은 본인의 학생한테 그런 걸 선뜻 내어주는 어른이 아니니까요.
참 묘하게 안 어울리는 노란색 황륜대제 기념 티셔츠를 입으신 선생님은 어린아이처럼 그저 행복한 표정으로 병의 마개를 돌려서 여신 뒤, 잔에 술을 한 잔 따르셨습니다.
‘으헤..’
‘나 안 취했어어..’
근데 제 기억으로는 선생님이 술에 그렇게 강하시지 않은데.. 저번 겨울방학 때도 분위기에 휩쓸려서 막 들이키시다가 뻗으셨으면서..
“다들 잔에 음료수 따르고, 건배!”
“건배!”
그래도 어른이니까. 알아서 적당히 조절해 드시겠죠..? 믿고 있답니다. 선생님?
잔에 있는 사이다를 한 모금 들이켰습니다. 조금 전까지 꽉 막혀있던 속이 뚫리는 청량감이 역시 언제나처럼 일품이네요.
선생님과 함께라서 그럴까요? 평소에 느껴지던 텁텁한 잔향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걸요.
제육볶음도 마찬가지로 아주 잘 됐습니다. 양념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잡혀 있어 너무 밍밍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너무 맵지도 않은 이상적인 지점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것 같군요.
쏴아아-
그것보다 비가 많이 내리네요.. 집에는 어떻게 가야 할지. 걱정인걸요.
뭐. 일단 즐기면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 즐거운 시간을.
*
언제나 그렇지만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경험 중 하나이다.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서 시원하고 뽀송한 거실에서 즐기는 제육볶음, 두부김치, 그리고 술까지. 어느 때보다 맛있게 느껴진다.
하루나, 아리스, 키쿄, 유카리. 다들 맛있게 먹는 것 같으니까 기분이 너무 좋은걸.
“그래서 커피를 사 갖고 나오는데 화장실 앞에 유우카랑 노아가 딱!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유우카랑 노아가 같이 있었던 거군요!”
“우와! 지나가는 소문으로만 들었는데, 직접 이야기를 들으니까 더 재미있는 것이와요!”
“선생님. 도대체 몇 명을 만나고 온 거야?”
“많이 안 만났어. 10명 내외였나?”
“흐음..”
키쿄의 시선이 부담스럽지만, 같이 예전 썰도 풀 수 있고 말이야. 물론 정신 바짝 차려야 하는 게.. 밖으로 새 나가면 큰일 나는 얘기도 있으니까.
술도 적당히 먹어야 한다. 보드카를 맥주처럼 들이켰다가는 큰일이 날 수도 있다. 일어났는데 날짜가 2일이 넘어가 있다거나, 전날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든가 하면 완전 낭패이기에.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배고팠던 애들이 밥을 빠르게 먹어 치워서 그런지, 저녁 식사는 내가 취해버리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취기가 좀 올라오긴 하지만 이성을 잡고 있을 정도는 된다고.
일.. 더하기 일..은 삼? 아니지. 2야. 좋았쓰.
약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초토화된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저게 다 설거짓거리다. 먹을 땐 좋았지만 이걸 어떡한담..
“음..”
“아리스한테 무슨 볼일이 있으십니까?!”
“아. 표정이 무서워 보였다면 미안. 혹시 너, 테일즈 사가 크로니클 2라는 게임의 개발에 참여했어?”
“네! 아리스, 프로그래머로 참여했습니다!”
“역시. 어디서 본 이름이다 했어. 재밌게 했다고? 이런 게임을 만들어줘서 고마워.”
“네! 감사합니다!”
이런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애들은 이제 먹을 게 없었는지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데 여념이 없었지만 말이다.
“그으.. 얘들아.”
“네?”
“우리 뒷정리는 어떻게 할까?”
“다 같이 해야죠.”
하루나는 다른 옵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몰아주기 할래?”
거실에 떨어진 핵폭탄. 순간 급변하는 분위기. 애들의 눈동자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어떻게 몰아주는 건가요?”
곧바로 이 몰아주기 ‘게임’의 ‘룰’을 질문해오는 아리스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다들 손가락 다섯 개 펴봐.”
나를 포함한 모두의 한쪽 손가락이 모두 펴졌다.
지금부터 뒤처리를 걸고 할 게임은 아무런 도구 없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파티 게임 중 하나.
“뭔가 조건을 말하면, 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은 손가락을 접으면 돼. 간단하지?”
“네에.”
“제일 먼저 다 접히는 사람이 뒤처리 당첨.”
“동시에 접히는 경우도 나올 수 있지 않아?”
“그럼 그 사람들끼리 가위바위보 하면 되지.”
손병호 게임.
“그럼 나부터 시작해도 될까?”
“음.. 좋아.”
“네!”
“네..”
“예!”
엉겁결에 선공을 잡게 되었다. 눈알을 굴려 가며 애들의 특징을 되짚어간다. ‘인연’을 되짚어간다. 같이 겪었던 사건들을 되짚어간다.
그래. 결정했어. 이렇게 하면 되겠구만.
“나랑..”
“선생님이랑..?”
공공의 적으로 찍힐 가능성은 줄어들면서도..
동시에 여러 명의 목숨을 줄일 수 있는 조건.
“겨울방학 사건 때 만난 적 있다 접어.”
__________
후기

플래 딴 사람들 같이 짠 한번 해볼까요?
선생님과 학생들의 여름방학 1일차가 절정으로 접어들고 있습니다
주기를 더 끌어올리고 싶은데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네요..
좀 노래 들으면서 쉬다가 다음편도 최대한 빨리 써올게요
항상 그렇지만 추천과 댓글은 (제발 콘이라도 달아주세요) 글쟁이의 열정을 불태우는 데 큰 힘이 됩니다
댓글 19
으흐흐흐




플레하는 사람이 부럽네요. 저는 그냥 흙수저라서...
나도 월정액만 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