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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빔 요소 약간 있으니 주의 (매우 순한맛)
실연의, 추억
그날. 태어나서 처음으로 고백을 했다.
상대는 샬레의 선생님. 누군가를 돕기 위해 연일 여러 사람들을 찾아다니느라 자신에게는 소홀해지고 마는 선생님의 모습에 나는 연심을 품었다. 그런 선생님을 위해 매일 된장국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했던 것 같다. 급양부 일로 정신없는 와중에 짬을 내어 샬레에 가서, 선생님께 밥을 지어 드리고는 했다.
나의 고백을 들은 선생님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짓고. 그리고 늘 그러했듯 다정한 표정으로 고백에 대답해 주셨다.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건 정말, 정말로 기뻐… 하지만 말야, 그 마음을 받아줄 수는 없어.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을 배신할 수는 없어. 나를 탓하고 싶다면 탓해도 괜찮아.’
미안하다는 그 말.
처음 입 밖으로 낸 고백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시들어 가던 그 순간을 지금도 분명히 기억한다.
아아.
역시 그랬구나.
어른인 선생님에게 그런 상대가 없을 리가 없는데. 이 고백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못할 거였어. 그런 말을 되뇌이면서 자기 자신을 납득시키려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뺨을 타고 흐르는 슬픈 열기만은 진짜였고, 선생님 앞인데도 울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자 다시금 내 마음을 깨닫게 되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도무지 멈출 수 없었다.
‘후우카.’
그런 나에게 선생님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 주더니.
‘이것만은 기억해 줘. 후우카가 만들어 준 밥은 정말 맛있었어. 날 위해서 그렇게 솜씨를 발휘해 줬다는 사실이 정말 기뻤어. 그러니 부디 그 솜씨를 후우카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위해 발휘해 줬으면 해. 그래 준다면 참 기쁠 거야.’
조심스럽게, 그렇게 말씀하셨다. 망가진 목소리로 ‘네’라고 대답한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선생님은 옆에 있어 주셨다.
그런 어디에나 있을 법한, 보답받지 못한 이야기. 보답받지 못한 이야기라는 식으로 말하면 뭔가 좀 나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 안에서는 이미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추억으로 승화되었다.
아무튼 이별을 겪은 지 1년도 더 지났다. 실연을 딛고 일어서기까지 사실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급양부 활동에 전력을 다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를 슬픔을 달래기 위한 수단으로 삼을 생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버렸다고 할까. 적어도 급식을 만드는 동안에는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내 상태야 어쨌든 급식을 먹는 입장에서는 알 바 아니니까.
그런 날들이 쌓여가고, 계절은 반복되어.
어느새 게헨나를 졸업하는 날이 되었다.
마음이 도통 놓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급양부 부장 자리를 주리에게 맡겼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연락하라는 말을 전한 뒤, 나는 졸업했다. 다음 달부터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어느 대학에 진학했고 그곳에 다니기 위해 방을 빌렸다. 그런 새로운 생활에 대해 생각하면서 가슴과 마음이 설레고 있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희망으로 가득찬 미래. 그것이 설마.
“안녕하신지요, 후우카 양.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에?”
예상치 못한 인물과의 재회로 인해, 어디에든 있을 법한 희망찬 미래에.
단숨에 그림자가 드리울 줄은 몰랐다.
옆집은, 미식 테러리스트
이사 당일에 있었던 이야기다.
이른 아침부터 내 물건이 든 골판지 상자나 새로운 생활을 위해 산 가구들을 새 집으로 옮겼다. 가구 수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점심이 지날 즈음에 업체 직원들은 돌아갔다. 수도, 전기, 가스 등 필수적인 설비의 개통도 차질없이 끝나서 이 방에서 생활할 준비는 대강 끝났다. 하루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조금 여유가 생겼다. 이제 남은 건 자잘한 짐들을 정리하는 것뿐이다.
“......”
숨을 고르며 의미없이 방 안을 돌아다닌다. 방 하나에 다이닝 키친이 딸린 이른바 1DK. 급양부에서 있던 경험 때문에 좀 더 넓은 주방을 원했다. 주방은 넓은 게 좋다. 여유를 가지고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망이 실현된, 넓은 주방이 내 눈앞에 있었다.
“후후.”
자연스레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사라는 흔치 않은 이벤트가 겹쳐서인지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월세가 예산 범위에 맞았기 때문에 방문해 본 뒤에 충동적으로 계약한 이 1DK. 혼자 사는 나에게는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 여기서 요리하는 게 기대된다. 방을 조금만 더 정리하고 나서 식재료를 사러 가야겠다. 이곳 근처에 슈퍼가 있는 건 확인해 두었다. 빠짐없이.
“자, 그럼.”
주방에서 방으로 돌아와 짐을 풀고 있던 위치로 향한다. 몇 개 남은 골판지 상자의 테이프를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떼어내고 내용물을 살펴본다. 식기와 요리도구가 들어있는 상자. 레시피에 관한 책이나 메모지, 요리 프로그램을 녹화한 테이프들로 채워진 상자. 이쪽에 있는 상자는 옷가지들. 그런 물건들을 순서대로 적재적소에 정리해 나간다. 요리와 관련된 짐이 많은 게 참 나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상자는 하나만 빼고 모두 정리가 되었다. 가져온 짐 중에서는 작은 상자.
“이건 아마…”
카레나 파스타용 소스 같은 레토르트 식품을 넣었던 기억이 난다. 열어보니 역시나 그런 내용물이 들어 있었고, 낯익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
상자 속에 있던 것은 하얀 포장지로 싼 선물이었다. 인사말이 적힌 종이로 감싼 메밀국수. 그것을 보고는 이웃집에 아직 인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밖이 어두워지기 전에 얼른 끝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기로 정한 이상 서둘러 실행에 옮겨야 한다. 화장실에서 최소한의 몸단장을 하고 방을 나섰다.
이 주택은 2층 구조이고 내가 계약한 곳은 102호실이다. 양 옆에 있는 방에만 인사하면 될 것 같아서 메밀국수는 두 개밖에 준비하지 않았다. 101호실과 103호실 중에 어느 쪽부터 갈까. 둘 다 똑같나. 별 이유는 없지만 103호실부터 가기로 했다.
샌들을 신은 발로 터벅터벅 몇 걸음 걸어, 문 앞에 서서 인터폰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버튼을 누르자 방 안에 호출음이 울려퍼지는 것이 들렸다. 그대로 서서 응답을 기다린다.
“...외출했나?”
30초 정도 기다렸지만 반응이 없었다. 뭐 평일이니까 부재 중일 수도 있지. 조금 더 기다려봤지만 역시나 응답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오기로 했다. 그럼 다음은 101호실로 가자. 다시 샌들을 끌고 반대쪽 방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인터폰 버튼을 눌러 손님이 왔다는 것을 알린다.
‘네.’
이번에는 단 몇 초만에 응답이 돌아왔다. 다행이야. 이쪽에는 사람이 있다.
“옆 방으로 이사 온 아이키요라고 합니다. 이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알겠습니다. 바로 열어드릴 테니 기다려 주시길.’
“아, 넷.”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인터폰의 통신이 끊겼다.
“......”
알겠습니다, 바로 열어드릴 테니 기다려 주시길, 이라고 했다. 품위 있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말투를 어쩌다 보니 쓴 게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듯한 사람이 옆 방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주택은 솔직히 근사하다고 할 정도는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낡았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제법 외관이 오래되어 보이는 곳이다. 지은 지 십 년은 넘은 것 같고, 그렇기에 값이 떨어져서 내 적은 예산으로도 계약할 수 있었던 1DK 주택이었다.
이런 곳에 품위 있어 보이는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은 뭔가 좀 의외였다는 말이다. 품위 있는 사람은 이런 주택이 아니라 깔끔한 아파트 같은 곳에 살 것이라는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나올까, 아주 조금 긴장하면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곧이어 문 너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문고리 위아래에 있는 잠금을 여는 소리와 함께 그 순간이 찾아왔다.
천천히 열린 문.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나타난 인물의 모습을 보자.
“안녕하세…”
나의 인사말이 마지막까지 채 나오지 못했다.
왜냐하면.
“안녕하신지요, 후우카 씨.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에?”
내가 잘 아는 사람. 이제 와서는 그리움마저 느껴지는 상대인.
“하루나…!?”
미식 테러리스트. 쿠로다테 하루나가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키보토스에서 단 한 달만이라도 생활해 봤다면 쿠로다테 하루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미식연구회의 부장으로서 언제나 미식을 추구하면서, 여기저기에 나타나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식당을 가차없이 폭파해버리는 그 모습은 곧장 뉴스에 나왔고, 동영상 동영상 사이트에 검색하면 곧바로 나왔고, 그 영상을 스크랩한 것이 SNS에 삽시간에 퍼져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하루나는 요식업계에서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한편으로 대접한 식사가 하루나의 마음에 든다면 그 가게는 안정적인 장래를 약속받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돌았고, 도전적인 음식점들은 하루나가 방문하기만을 기다린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음식에 대해서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 유명인과 나는 아는 사이였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미식가와 급양부라는 입장 때문에 인연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일손과 장비가 부족한 나머지 만족스러운 급식을 만들지 못해 하루나가 급양부를 폭파했던 횟수는 두 손에 두 발까지 동원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였고, 백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귀한 식재료가 있으면 그 식재료를 요리해 달라며 믿을 수 있는 셰프인 내게 맡기기도 했다(납치한 뒤에). 급기야는 우주까지 끌고 가서는 키보토스의 운명을 건 자동차 추격전을 시킨 적도 있었다. 그런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만은 않았던 관계에 있었다.
‘미식 테러리스트.’
‘칭찬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칭찬 아니야…’
한 살 위인 선배이면서도 그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하루나가 유명인인 것도, 하루나와 아는 사이였다는 것도 우리가 게헨나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일 뿐이다. 한 발 앞서 게헨나를 졸업한 하루나는 같은 시기에 미식연구회에서도 물러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애매한 표현을 쓴 이유는 소문으로만 들었을 뿐이지 하루나 본인에게 확인을 받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연락할 기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전까지는 하루나가 일방적으로 내게 어떤 액션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하루나가 졸업하고 난 뒤로는 그런 액션이 뚝 끊겼다. 급양부 일이 바빠서 내가 모모톡을 보낼 일도 없었으니 연락할 기회가 극적으로 줄어든 수준이 아니라 없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뒤로 하루나의 행적은 알 수 없었다. 이전까지는 뉴스를 보면 좋든 싫든 하루나가 어떤 가게를 폭파했는지 알 수 있었는데, 그런 정보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졸업하고 미식연구회를 그만둔 뒤 조용히 지내고 있나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정도였고, 따로 연락도 하지 않았다. 함께 우주까지 가기도 했지만 결국 그 정도 사이일 뿐이라,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지금에 이르렀다.
그랬기에.
“하루나…!?”
갑작스러운 하루나와의 재회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사를 왔는데 이웃집에서 아는 사람이 나온다면 누구나 놀라겠지만.
“네. 오랜만에 뵙네요, 후우카 씨.”
“오, 오랜만이네… 근데 왜 하루나가 여기 있어?”
“여기에 살고 있답니다.”
“농담이지!?”
내가 먼저 물어봤으면서 이성적이지 못한 반응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지간히 황당했나 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설마 하루나가 살고 있는 방 옆으로 이사를 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게 말이 되는 확률인가?
하루나가, 내 이웃.
그 사실만으로도 희망차고 찬란했을 새로운 생활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을 것임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 하루나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좋지 않은 일에 휘말리는 미래밖에 안 보이잖아…! 아, 하지만 요즘은 하루나가 뉴스에 나올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 것 같고 의외로 괜찮을 수도…?
모르겠다. 분명한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현관 앞에서 이사 인사를 하다가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뿐이었다.
“...저기, 후우카 씨? 괜찮으신가요?”
그런 나에게 하루나가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건넨다. 그런 반응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미안, 괜찮아… 이웃이 하루나라는 사실에 좀 놀랐을 뿐이야…”
“그러셨군요.”
반대로 하루나는 그러셨군요, 하고 대답만 하면 되는 모양이다. 하루나치고는 너무 차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내가 이웃이 될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은 차분함이라고 할까…
아.
그러고 보니 아까 문을 열고 내 앞에 나타난 하루나가 말했다.
‘안녕하신지요, 후우카 씨.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니, 내가 여기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하루나…”
“후우카 씨.”
그것을 확인하려던 순간 하루나의 오른손이 뻗어나와 그 손끝으로 내 말을 가로막았다.
“후우카 씨를 만나는 건 일 년만인가요. 오랜만의 재회이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시겠지만…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니 우선 후우카 양의 이사 인사를 하는 게 먼저이지 않을까요?”
“......”
일리가 있다. 원래 목적은 이 방에 사는 사람에게 이사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하루나가 나온 탓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숨을 한번 내쉰 뒤에 말했다.
“...옆 방에 이사 온 아이키요입니다. 이사로 인해 여러모로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앞으로 신세 지겠습니다. 또 이건 약소하지만 괜찮으시다면받아주셨으면좋겠습니다잘 부탁드립니다…”
입에서 나온 것은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1분도 안 걸려서 나올 법한, 정형화된 인사말이다. 어제 찾아봤다. 하루나에게 정중한 인사를 하는 게 약간 쑥스러워서 마지막에는 말에 억양도 사라졌고, 가져온 메밀국수를 내밀었다.
“어머나,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루나는 그런 인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며 메밀국수를 받았다. 그런 행동에서 품격이 묻어 나오는데, 이런 점만 보면 아가씨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다음에 맛있게 먹도록 할게요.”
“그랬으면 하는데, 하루나 너 요리할 줄 알았던가…?”
하루나에게 휘둘리던 시절을 떠올려 봐도 하루나가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실례네요. 물을 넣고 3분만 기다리면 되는 간단한 일이랍니다.”
“그건 컵라면이잖아…”
그걸 요리라고 인정하지는 않아, 나는.
“시시한 농담은 일단 제쳐두죠.”
“시시했나…”
“후우카 씨, 이후에 잠시 시간 있으신가요?”
“에.”
질문을 받은 뒤 방의 상황을 떠올린다. 이삿짐 정리도 거의 끝났으니 잠깐은 괜찮을 것 같다.
“있는데… 왜?”
“여기 이렇게 서서 이야기하기도 좀 그러니까요. 이 근처 안내라도 해 드릴까 싶어서요.”
“아, 그거 좋네.”
하루나의 제안은 정말 고마운 제안이었다. 슈퍼 위치만 파악해 둔 정도니 다른 좋은 가게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옆집으로 이사 올 줄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고.
“부탁해도 될까?”
“네. 그러면 외출 준비를 할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후우카 씨의 방으로 제가 갈게요.”
“알았어.”
“예, 다시 뵈어요.”
하루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방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는 것을 본 뒤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왔다.
“......”
세상에, 설마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이야. 인생이란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하아…”
현관 앞에서 한숨이 나왔다.
지금 내 기분은 당황스러운 마음이 가장 크다. 하루나가 이웃이 된 것이 기쁜지 아닌지 묻는다면 후자, 기쁘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게헨나에 있을 때 하루나에게 당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그럴 수밖에 없다. 옆 방에 사는 사람이 만약 주리였다면 순수하게 기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뭐, 그런 말을 해 봤자 의미는 없다. 옆 방에 하루나가 있다고 해서 다시 이사를 가고 싶어졌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렇게까지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저 이상한 일에 휘말리는 게 싫을 뿐이고, 예전에 만들었던 음식을 미식가인 하루나가 맛있다고 해 줬던 걸 일종의 자부심처럼 여기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친구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하루나에 대한 감정은 그런 식으로 조금 복잡한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메모장.”
마음을 돌릴 생각으로 방금 전에 정리했던, 요리에 관한 것들을 정리해 둔 메모장을 꺼냈다. 이 메모장에는 레시피 말고도 재료를 파는 가게 정보도 정리해 두었다. 급양부 시절부터 써 왔으니 파트너이기도 한 셈이다. 잠시 뒤에 안내받을 가게에 대한 정보도 여기에 꼼꼼히 적어 둬야겠다.
메모장과 지갑을 가방에 넣고 다시 몸단장을 하면서 하루나가 방 인터폰을 누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인터폰이 울린 것은 하루나와 헤어지고 나서 정확히 10분이 지난 뒤였다. 현관문을 열자 외출복 차림으로 깔끔하게 차려입은 하루나의 모습이 보였다.
“기다리셨죠. 가실까요.”
“잠시만.”
이번에는 샌들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발을 신는다. 그렇게 준비하는 동안 하루나가 묻는다.
“후우카 씨는 안내해 줬으면 하시는 곳이 있나요?”
“음… 근처에 슈퍼 말고 식재료를 살 만한 곳이 있으면 알려 줬으면 좋겠는데.”
“흐음. 그럼 역 앞 상점가로 갈까요.”
요청을 들은 하루나는 곧바로 가야 할 곳을 정한 듯 했다.
“상점가가 있어?”
“네. 아케이드 상점가가 있어요. 정육점이나 채소 가게, 생선 가게처럼 다양하게 식료품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음식점이나 오락시설도 있고, 위치도 좋아서 활기가 넘치는 곳이랍니다.”
운동화를 신은 뒤 준비 완료. 다른 소지품들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하루나를 재촉해 밖으로 나왔다.
“조금 거리가 있으니 제 차로 가시죠.”
“아, 응. 고마워.”
방문이 잠겼는지 확인한 뒤에 빌라 맞은편에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걷는다. 차를 가지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인연이 없을 듯한 공간이었다. 벽에 걸린 간판을 보니 이 공동주택 전용 주차장 같은데, 차는 한 대밖에 세워져 있지 않았다. 필연적으로 구석에 세워진 저 하얀 차는 하루나의 차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타시죠, 후우카 씨.”
그 차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는 하루나.
“......”
그런 모습을 보며 멍하니 서 있는 나였다.
“...후우카 씨?”
“...아, 내가 직접 타는구나.”
“에.”
몇 초간 기다려도 차에 타지 않는 나를 보며 하루나가 말을 걸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하루나 차에 탈 때는 항상 뒷좌석에 돌돌 말아서 태웠으니까?”
게헨나에 있을 때는 하루나가 내 요리 솜씨를 빌리고 싶을 때면 그렇게 납치해가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오늘도 또 그런 식인가 하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그런 일도 있었죠~ …”
시선을 돌리는 하루나. 그런 일밖에 없었지 않나.
“...근데 하루나가 운전하는 차에 평범하게 타는 건 처음 같은데.”
“설마요. 그렇지는…”
조수석에 타면서 중얼거리자 하루나는 시선을 돌린 채 굳어 버렸다. 그렇지 않다고 즉답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리고 하루나가 운전석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지난 과거 이야기는 묻어둘까요. 후우카 씨와 제 사이가 아닌가요.”
그러더니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늘 보던 하루나의 반응이었다.
“......”
“아, 안전벨트 하세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하루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안전벨트를 매라고 재촉한다. 아무리 그래도 이 지시에는 따를 수밖에 없다.
“...했어, 벨트.”
준비를 마친 뒤 그럼 출발하겠다며 하루나는 차를 운전하기 시작한다. 주차장을 나와 역 앞에 있다는 상가로 향한다.
“얼마나 걸려?”
“5분도 안 걸린답니다.”
“약 5분, 이라.”
그 정보를 메모장에 적으면서 어느 정도인지 계산해 보니, 차로 5분이라면 걸어서는 약 40~50분은 걸릴 것이다. 만약 지금 안내받을 상가가 찾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그곳까지 갈 수 있는 수단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까지는 급양부 차나 스쿠터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에 의존할 수 없다. 자전거조차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두 다리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40분 걸려 상가에 가서 쇼핑을 하고, 무거운 짐을 들고서 다시 40분 이상 걸어야 한다. 그건 역시 힘든 일이다.
“...차가 있으면 편하겠네.”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후우카 씨는 차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군요.”
“없지. 원래는 급양부 차량이 있었으니까. 쉬는 날에도 몰래 타고 그랬는데, 졸업했으니까 이젠 역시 좀 그래.”
“졸업…”
당분간은 학교를 다니면서 알바를 해서 뭐가 됐든 이동수단을 마련하는 게 목표가 될 것 같다. 중고 스쿠터 같은 건 의외로 금방 구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제 와서 늦었지만 게헨나 졸업, 축하드려요.”
빨간불. 차가 멈춘 타이밍에 하루나는 축하한다는 말을 건넸다.
“고마워.”
“졸업 이후의 진로를 여쭤 봐도 될까요?”
“진학이야. 다음 달부터 대학생.”
“그렇군요. 대학생 후우카 양. 듣기 좋네요.”
“왜 듣기 좋은지는 모르겠는데.”
그런 대화를 나눈 후, 나는 한발 앞서 졸업한 하루나의 진로에 대해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학생 하루나일까, 사회인 하루나일까. 어느 쪽일까.
“하루나는 진학했던가? 취직했어?”
“아니요. 저는 진학하지 않았고, 취직도 하지 않았답니다.”
“엣.”
파란불로 바뀐 뒤 다시 차가 움직이기 시작함과 동시에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와서 조금 놀랐다.
“그, 그럼 지금은 뭐 해?”
“...여행, 이려나요.”
“여행!?”
또 다시 놀랐다. 대학생 하루나도 아니고 사회인 하루나도 아닌, 여행자 하루나가 왔다.
“여행이라 해도 그리 대단한 건 아니랍니다. 지금은 어느 작은 잡지에 미식 관련 칼럼을 비정기적으로 싣고 있는데… 소재를 찾을 겸, 미식을 좇아 여행을 다니고 있을 뿐이에요.”
“오…”
“하는 일은 지금까지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단지 전달하는 매체가 미식연구회에서 잡지로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구나.”
그렇지만 하루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모양이다. 그런 자세는 좋은 것 같다. 남에게 민폐만 끼치지 않는다면야.
“하루나답네. 좋은데.”
“그런가요?”
“나는 절대 못 따라할 것 같아서… 아, 나쁜 뜻은 아니야?”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조금은 보람이 느껴지네요.”
“응?”
하루나가 하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운전하는 하루나의 옆모습은 웃고 있었지만,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의 이런 모습이 하루나 입장에서는 그다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자, 슬슬 도착합니다.”
“아이쿠.”
물어보려던 사이에 차는 상점가 근처의 유료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차가 흔들리기도 해서 왠지 모르게 이야기가 흐지부지됐다.
…뭐, 괜찮아. 나중에 다시 물어보면 되지. 하루나에게 물어보고 싶은 건 더 있기도 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내받은 상점가는 정말 좋은 곳이었다. 가게를 둘러보는 김에 오늘 저녁에 쓸 식재료를 사려고 가장 먼저 들렀던 채소 가게. 그 앞에 진열된 채소들을 둘러보니 전체적으로 저렴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슈퍼에 비해서 품질 관리 비용이 적어서 싸게 살 수 있는 건 이해가 가지만, 그런 점을 감안해도 생각보다 저렴했다. 급양부 시절에 신세를 졌던 가게만큼 저렴하다. 활기 넘치는 점원에게 추천해 달라고 말하자 마침 좋은 봄 양배추가 들어왔다고 알려주었다. 하나를 집어들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싱싱한 겉잎은 신선도를 나타내는데, 확실히 좋은 양배추였다.
그 양배추와 몇 가지 다른 채소들을 달라고 하자 점원이 그러고 보니 처음 보는 얼굴이라고 말했다. 오늘 이 근처로 이사 왔다고 대답하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면서 바나나를 하나 덤으로 주셨다. 고맙게 받은 다음 맞은편에 있는 정육점으로 향했다.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친절한 점원이 오늘 저녁 메뉴가 뭔지 물었다. 채소볶음을 만들 거라 다진 돼지고기를 달라고 말했다. 얼마나 드실 거냐고 묻기에 1인분이라고 대답하려다 옆에 동행하던 하루나의 존재를 깨닫고 급히 2인분, 200그램이라고 대답한 뒤에 포장해달라고 말했다.
고기가 준비되는 동안 이 가게에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말을 들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오늘 이사 왔다고 대답하자 어머,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면서 고로케를 두 개 덤으로 주셨다. 가게를 나온 뒤에도 아직 조사는 끝난 게 아니었다. 알아봐야 할 가게가 남아 있었다. 이 이상 구입하면 식재료를 다 쓸 수가 없으니 가게 위치만 알려달라고 했다. 생선 가게, 차나 커피 같은 기호품 가게부터 두부 가게까지 있었다. 제법 많은 식료품점이 모여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게 정보를 메모장에 모두 적고 나니 한 시간 정도 지났다. 하루나에게 잠시 쉬었다 가자는 말을 듣고 근처 카페에 가기로 했다. 시크한 외관을 한 가게로 들어가 빈 자리로 안내를 받은 뒤 둘이서 적당히 커피를 주문했다.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한 종업원이 자리를 떠난 뒤…
“...친절한 곳이네…”
냉수를 한손에 들고 중얼거렸다.
“이 카페 말씀이신가요?”
“여기도 그렇긴 한데, 이 상점가 전체 말이야.”
식료품점과 정육점에서 덤으로 뭔가 얹어주는 것도 포함해서 식재료에 관해 기분 좋은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상점가만의 특징이라서 슈퍼에서는 이런 식으로 소통할 수 없다.
“후후.”
“어쩐지 뿌듯하네요.”
“어쩐지 뿌듯하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올 만큼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아가씨 같이 대답을 하기도 했다.
“뭐랄까, 그런 작은 가게에서 대화를 나누는 게 좋아서. 추천하는 메뉴를 알려주기도 하고, 그 메뉴에 필요한 식재료를 알려주기도 하고, 그냥 세상 돌아가는 잡담도 하고. 뭔가 그런 게 좋아.”
“마음에 드신 모양이에요.”
“응. 채소 상태도 좋고, 고기 값도 저렴했어. 오늘 못 가 본 가게도 다음에 가 보고 싶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 상점가까지 오갈 교통수단을 빨리 구해야 할 것 같다.
“시간이 맞으면 다음에도 태워드릴게요.”
“에.”
하루나가 또 다시 고마운 제안을 했다.
“그래도 돼?”
“네.”
동시에 의문이 생긴다.
“왜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거야?”
그저 우연히(?) 이웃이 됐을 뿐인 내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묻자 하루나의 표정이 잠시 굳어지더니.
“...저와 후우카 씨 사이잖아요.”
그렇게 말했다.
“또 그거야? 아니, 고맙기는 한데…”
고마운 마음 때문인지 자세히 사정을 캐묻기도 좀 꺼려진다. 그러는 사이에 점원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다소 따뜻한 날에 돌아다니다 보니 좀 더워서 둘 다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맛있게 드시라는 말을 남기고 점원이 떠난 뒤, 준비된 시럽을 잔에 넣고 빨대로 섞었다. 그대로 한 모금 마시자 차가운 쓴맛이 온몸을 감싼다.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하루나.”
“네.”
다시 한번 하루나를 바라보았다.
“이것만은 알려줬으면 좋겠는데.”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요.”
사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이 있다. 하지만 그걸 다 물어보다가는 날이 저물겠지. 그래서 딱 한 가지만 묻기로 했다.
“...하루나 너, 내가 인사하러 갔을 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잖아.”
“네.”
“내가 거기로 이사 올 줄 알았다는 뜻이지.”
가장 알고 싶었던 것보다 한 걸음 뒤. 재회했을 때 하루나의 반응으로 보아 하루나는 내가 옆 방으로 이사를 올 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맞아요, 알고 있었답니다.”
예상했던 반응이다. 하루나는 이어서 말했다.
“아까 차 안에서 여행 중이라 말씀드렸죠.”
“그랬지.”
“그 집은 여행 거점 중 하나예요.”
“여행 거점.”
그런 용도라면 게스트하우스나 호텔 같은 곳을 이용할 것 같은데. 하루나는 굳이 공동주택을 빌린 모양이다. 별장처럼 사용하는 건가? 하지만 뭐… 하루나에게는 그만한 재력이 있을 테니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거랑 내가 이사 올 줄 알았던 게 무슨 관련이 있어?”
오히려 그쪽이 더 궁금해진다.
“집주인 분과 제가 아는 사이랍니다.”
“아는 사람?”
“네. H 씨라고 할게요. 저와 H 씨는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라서요. 그분이 소개해 주신 대로 그 공동주택을 여행 거점으로 삼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래서?”
“H 씨와는 곧잘 식사를 같이 하는데… 그분은 주사가 별로 좋지 않아서요. 술에 취해 하시는 말을 들었어요. 제가 살고 있는 방의 옆 방에 게헨나를 졸업한 아이가 온다고. 그때 나온 이름이…”
“...나였다는 거야?”
하루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계약자 정보를 유출했다는 말인데… 부동산을 통해서 클레임이라도 넣어야 하나…
“그런 경위로 후우카 씨가 옆 방으로 이사 온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렇게 된 일이랍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연결이 된 모양이다. 내가 이사 올 줄 알고 있었던 이유는 이해했다. 다음으로는 내가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은?”
이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이사 온다는 사실을 알고 나를 기다렸다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걸까. 대략 1년 만인데, 미식을 이유로 어떤 무모한 짓을 시킬까. 그것만이 의문으로 남았다. 그 질문에 하루나가 대답하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경위야 어떻든 간에, 오랜 지인인 후우카 씨가 이사를 오신다 하니… 정중히 맞이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단지 그뿐…이랍니다.”
“...에?”
“엣?”
하루나의 말은 너무나도 김이 빠지는 말이었다.
“...그게 다야?”
“그게 다, 입니다만…”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될 리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그 하루나가… 그 하루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면서 내 앞에 나타났는데. 그저 아는 사람이 옆 방에 이사를 온다니 환영해요~. 그것뿐이었다니. 그럴 리가 있나…?
“...내가 그 방으로 이사 온다는 걸 알았으니까, 미리 방을 빌려서 예전처럼 미식을 찾아 끌고 다닐 테니 각오하라는 의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게 아니라?”
“그, 그그, 그렇지 않은데요!?”
허둥대는 반응이 그야말로 전형적이었다.
“후우카 씨는 저를 대체 어떻게 생각하시는 건가요…?”
“어, 미식 테러리스트…?”
“칭찬해 주셔서 영광입니다만…”
“칭찬 아닌데!?”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대화였다.
“...그렇지만 후우카 씨? 후우카 씨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셨다는 건, 다시 예전처럼 이곳저곳에 데리고 다녀도 괜찮다는 의미인가요?”
“어, 그건 싫은데… 그러진 마.”
“그러지는 않겠지만요…”
“...으음?”
하루나의 대답을 들으니 역시 어색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하루나가 선뜻 물러났던 적이 과거에 몇 번이나 있었더라. 내가 기억하는 한 거의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하루나다. 하지만 내가 잘 아는 하루나가 아닌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어른스러워졌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실제로 그런 모습을 눈 앞에서 보니 역시 위화감이 강하다.
시간이 하루나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렇게 위화감이 느껴질 만큼 변할 수가 있을까?
…모르겠다. 단지 지금 마시고 있는 이 아이스커피가 맛있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뭐, 정말로 그게 다였으면 좋겠는데.”
얌전하게 나를 대해 준다면야 그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어야 하는데…
“뭔가 납득이 되지 않으시는 것 같은데요…”
“......”
하루나 말대로, 하루나에게서 내가 알던 익숙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사실에 나는 당황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가게를 폭파해서 예전의 하루나다운 모습을 보여줬으면 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렇지만 뭔가 좀 예전 같지 않다는 감정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여전히 하루나에 대한 내 감정을 잘 모르겠다. 예전같지 않다니 그게 뭐야. 개그맨도 아니고.
“...있지, 하루나.”
“네.”
“오늘. 우리 집에서 밥 먹고 갈래?”
그래도 눈앞에 있는 하루나에게서 내가 아는 하루나를 조금이라도 끌어내고 싶어서 그런 말을 했다. 오늘 하루에 대한 보답으로 밥을 해 줄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재료를 조금 더 많이 샀고.
그러자 하루나는,
“그, 그래도 될까요!?”
“왓.”
갑자기 몸을 내밀면서 말하길래 조금 놀랐다.
“진심이신가요!?”
“진심이야.”
긍정했더니 하루나는 기쁜 듯이 웃었다. 밥 좀 해준다고 반응이 저렇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반응하는 점만은 내가 아는 하루나의 모습이라 조금 마음이 놓였다.
“후우카 씨의 요리… 오랜만이에요. 기대가 되네요.”
“차도 태워줬으니까 답례야. 그리고…”
“그리고?”
“차 안에서 했던 이야기도 천천히 들어보고 싶고.”
“차 안에서 한 이야기요?”
“여행 이야기라든가, 잡지에 쓰는 칼럼 이야기. 자세히 듣고 싶었거든.”
그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루나가 얌전해진 이유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다.
“...그다지 재미있는 이야기는 못 될 거라 생각하는데요?”
“상관없는데?”
순수하게 관심이 생겼다. 하지만 하루나는 굳이 건들지 않았으면 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거야?”
“네…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도 있고… 흑역사라고 할까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한데.”
그러고 보니 아까도 어물쩡 넘어갔는데 차 안에서 보람이 느껴진다,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해도 돼.”
“그러, 시군요. 그러면 그렇게 해요.”
“그럼 조금만 더 있다가 나가자.”
하루나가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우리 둘의 아이스커피가 없어질 때까지 소소한 이야기를 나눴다.
댓글 13
내가 지금 본문 글자수를 잘못봤냐 시발..?
고맙다 진자...

씨발 북극곰 너이새끼 꼼짝마
우아악 글자수가
감사합니다 다음편도 기다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