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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84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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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정도로 나눠서 업로드할 예정

프롤로그 『게헨나-아리우스 전쟁 개전』

‘게헨나 학원 제군들이여, 우리는 우리를 모욕한 아리우스에 심판을 내려야만 한다!’

‘우리 게헨나 학원은 만마전 결의에 따라 아리우스 분교에 금일 부로 선전포고를 하고, 익일 오전 11시부터 아리우스 자치구에 군사적 개입을 행할 것이다.’

혼돈이 지배하는 게헨나 학원 자치구 중심부에 우뚝 솟은, 권력을 상징하는 위엄 있는 만마전 의사당. 그곳 의장실에 있는 의자에 깊숙이 앉아 있는 만마전 의장 하누마 마코토는 벽면에 설치된 모니터에 커다랗게 나오고 있다. 몇 시간 전에 촬영된, 단상에서 자신이 소리 높여 선언하는 연설 영상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나답게 잘 나왔군.”

마코토는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 넓은 방 안에서 작게 키키, 특유의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제부터 만마전 의장으로 인해 벌어질 게헨나-아리우스 전쟁. 사건의 발단은 에덴조약을 둘러싼 게헨나 학원, 그렇다기보다는 마코토 개인과 아리우스 분교 사이에 있었던 밀약에서 비롯되었다. 아리우스의 힘을 빌려 트리니티와 같은 편인 선도부 양쪽을 모두 제압할 생각에 순순히 속아넘어갔던 마코토.

비열한 아리우스에게 이용당했다며 혐오에 가까운 감정을 품은 마코토는 분노가 채 가라앉지 않아 비행선 추락 사고로 헝클어진 머리도 정돈하지 않고, 전광석화와도 같은 속도로 트리니티로 향해 몇 가지 교환 조건과 함께 제한적으로 부전 조약을 맺나 싶었더니 이렇게 아리우스 자치구에 보복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보복 전쟁의 실현을 위해 오늘에 이르도록 분주히 움직였던 것이다.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께 영상이 끝나고 모니터에는 검은색만이 남았다. 그때 실내에 있는 시계는 때마침 정오를 가리켰다. 소리가 사라진 방에서 마코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일 출정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하기 위해 망토를 휘날리며 예정된 열병식 장소로 발을 내딛는다. 그때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입 밖으로 흘렸다.

“그러고 보니 샬레의 선생은 연설도, 그 뒤에 있을 열병식도 불참이었지.”

마코토 본인은 선생과 대면했던 일이 손에 꼽을 정도였고, 특별히 기억에 남은 점이 있다면 마코토의 눈엣가시인 게헨나 학원 선도부장 소라사키 히나와 가깝게 지내는 모습이 자주 보였기 때문에, 어느 쪽이냐 하면 얄미운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마코토는 병력 보존과 치안 유지를 구실로 병력 제공을 거부했던 히나의 태도와 선생의 태도가 대조적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마코토의 계획에서 애초에 선도부의 힘을 빌릴 예정은 없었기 때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학생의 편’인 줄 알았던 선생이 이번 전쟁을 두고 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는 의사를 표했다는 사실은 마코토로서는 의외였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 봤을 때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고 말했던 선생의 말을 되새겼다.

“나도 선생에게는 한 명의 학생인 걸까.”

다시 한번 키키, 하고 작게 웃으며 마코토가 열어젖힌 무거운 문이 닫히자, 게헨나 의장실은 한동안 진정한 의미로 정적에 휩싸였다.

***

마코토가 열병식으로 향하려 할 때와 거의 동일한 시각. 마코토가 부르기를 ‘학생의 편’인 선생은 일전에 참석했던 티파티 주최 임시 공회, 나기사, 미네, 사쿠라코로 삼자가 한 자리에 모였던 그 회담의 내용을 생각하면서 트리니티에 무수히 많은 방들 중에 현재 유일하게 무사한, 티파티 호스트 키리후지 나기사가 지금 이 시간에 머물고 있는 안전가옥을 찾아왔다.

“여어.”

“어머, 선생님. 숙녀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오시다니 어른으로서 그러시면 안 되지 않을까요.”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나기사는 침착함을 가장하여 방문자인 선생을 가로막는다.

“시간이 별로 없어서 말야, 실례를 용서해 줘, 나기사.”

악의 없이 빙긋 웃으며 대답하는 선생. 나기사는 용서하겠다고도, 용서하지 않겠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은신처를 찾아내는 게 특기인 학생이 있거든.”

아무 말이 없는 나기사에게 선생은 물어보지도 않은 질문을 두고 대답했다.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나기사의 머릿속에서는 분홍색 긴 머리를 지닌, 언제나 종잡을 수 없고 솔직히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는 어느 학생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선생이 말하는 그 학생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기사, 이야기 좀 하고 싶어. 지난번 회의 말인데.”

선생은 나기사가 앉은 곳과는 또 다른 작은 테이블에 딸린 의자를 멋대로 끌어와 앉으면서, 아무 말 없는 나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은근히 주도권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기사는 선생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듯한 어조로, 선생의 말을 받아치듯이 대답했다.

“나기사, 전에는 왜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말만 했냐, 그렇게 말씀하시려는 걸까요?”

이번에는 웃는 표정을 유지하던 선생의 눈썹만이 약간 움찔했다. 선생의 의문은 나기사가 말한 대로였다. 얼마 전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 속에 진행된 청문회, 내지는 트리니티의 권력자들이 티파티를 탄핵하는 자리라는 말이 더 어울리던 그 회의에서, 티파티의 유일한 참석자였던 나기사의 입에서는 관찰자로서 동석한 선생이 보기에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방어 일변도에 도저히 진심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이런 진흙탕 싸움은 저희가 해야 할 일이겠죠.’

‘그럼에도 저는 미카 씨를 믿습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저지른 죄 이상으로 대가를 치렀으니까요.’

그 말 하나하나가 강렬한 위화감과 함께 선생의 귀에 박힌 듯이 남아 있었다.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선생은 나기사에게 묻는다.

“시스터후드나 구호기사단 단장을 상대로, 지금 티파티는 약해졌다고 연출하면서 비난을 피하려 했던 거야? 동정심을 유발할 생각이었어?”

몹시 무례하고도 무정한 선생의 말을 들은 나기사는 화를 내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오히려 후훗 웃었다. 그 반응은 선생이 보기에 그 무엇보다도 긍정하는 뜻이었다.

“티파티가 약해졌다는 연출이고 아니고를 떠나, 미카 씨와 세이아 씨가 빠진 티파티는 대외활동을 금지하는 시스터후드도, 구호기사단의 일개 단장도, 심지어는 일반 학생마저도 트리니티의 운영에 하나하나 간섭하는 형국입니다.”

참견을 하는 상대에게 말한다기보다는, 그런 처지에 놓인 자기 자신을 조소하듯이 말하는 나기사.

“그러나.”

잠시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어올려 순간 선생을 쏘아보는 듯한 눈매로 바라보는 나기사. 눈빛이 변한 나기사의 도망치지도 숨지도 않겠다는 그 소리 없는 선언을 선생은 정면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지금은 티파티 호스트 부재 시에 임시 조치로서 저 혼자 결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전에는 제 오랜 숙원이기도 했던 게헨나와의 공수 동맹도 제한적으로나마 맺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가치 있는 것들을 미용실 요금 정도 대가를 내고 얻을 수 있다면 충분히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 시점에서 나기사도, 듣고 있던 선생도 최근에 있었던 격동적인 사건들과, 앞으로도 무슨 일이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라 예상되는 미래에 왠지 모르게 흥분해서 격해져 있었다.

“나 참, 어떻게 그렇게 연기파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홍차를 마시면 협상에 좀 더 능숙해질 수 있으려나?”

서로의 흥분을 일단 가라앉히기 위해 선생이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그런 의도를 파악한 나기사도 한번 숨을 고른 뒤에 다시 한번 후훗 웃었다.

“글쎄요. 입이 가벼워지는 찻잎을 대접해 드릴까요.”

그러더니 빈 찻잔을 들고 일어나는 나기사. 옆에 있는 찻주전자에 두 사람 몫의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 모습을 선생은 그저 바라보았다. 홍차를 끓일 때만 나기사가 보여주는, 적갈색으로 물든 액체를 잔에 따르는 그 늠름한 모습은 선생에게 나기사의 몇 안 되는 믿음이 가는 행동 중 하나였다.

후우, 숨을 내쉬고는 화상을 입을 만큼 뜨거운 홍차를 살짝 입에 머금는다. 입 안에서 코로 향기가 빠져나왔다.

“그럼.”

본인 몫의 홍차에는 아직 손을 대지 않고 선생 쪽의 기색을 살피던 나기사에게 선생이 말을 건넨다.

“티파티와 트리니티는 나기사가 있으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비꼬려는 것처럼 비치지 않게 하려 했으나 나기사의 표정은 달라지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를 나기사가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어떤지 선생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그 말을 들은 나기사는 이번에는 확연하게 표정이 달라졌다. 별 일 아니라고 말하려는 듯이 미소를 머금은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눈에서 웃음기가 분명히 사라졌다.

“미카 말이야.”

“이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미카 씨는 퇴학당할 거예요.”

“너는 그래도 괜찮아?”

선생이 어느 학생의 이름을 꺼내자 이를 예상했던 나기사는 주춤하지도 않고 그 학생이 처한 사정을 최대한 무심하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고, 곧바로 선생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겼다.

선생이 미카라 부른 학생. 앞서 트리니티와 게헨나를 뒤흔든 대소동을 일으켰고, 나기사가 구상했던 에덴조약 성립 시나리오를 망가뜨렸고 절친했던 두 친구를 위기에 빠뜨린, 지금 트리니티 학생들이 누구보다 미워하는 인물인 미소노 미카의 이름은 두 사람 모두에게 되도록이면 입에 담고 싶지 않은 이름이었다. 지난번 회의 때와 또 다른 어색함이 방 안을 지배했다. 한동안 그런 침묵이 이어진 뒤,

“후아… 에취!”

예고도 없이 선생이 재채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는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하니 그대로 침묵이 이어질 줄 알았으나 이를 계기로 나기사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쩔 수 없습니다. 트리니티를 배신하는 행위를 했다는 건 사실이기 때문에 과거 선례에 따라 처분해야…”

“아니, 티파티나 트리니티의 견해를 묻고 싶었던 게 아니야. 미소노 미카의 소꿉친구인 키리후지 나기사의 생각이 듣고 싶어.”

선생이 말허리를 자르자 나기사는 순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씁쓸한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면… 글쎄요. 게헨나만 좋아하시는 선생님께는 알려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까다롭네~. 편애하려는 생각은 없는데.”

나기사는 또 한번 후후, 하고 웃었다. 방금 전과 같은 동작처럼 보이는 그 작은 웃음은 이번에는 완전히 달라진, 명백하게 부정하는 표현이었다.

“선생님.”

그리고 잠시 침묵하던 나기사가 다시 선생보다 앞서 입을 열었다.

“선생님께서는 아까 제가 회의에서 마음에도 없는 말만 했다고 말씀하셨죠. 예를 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미카를 믿는다든가.”

나기사의 물음을 덮어씌우듯이 선생이 즉답하자 나기사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듯한 표정으로 선생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배려해 달라며 나기사가 말없이 호소하는 그 눈빛은 선생에게 닿지 않았다. 무정한 표정으로 날이 선 말들을 이어간다.

“너는 미카가 전부 다 털어놓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 예를 들면…”

갑자기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나기사가 선생의 말을 끊었다.

“아리우스로 들어가는 입구, 그런 말씀을 하시려는 거군요.”

그러면서 선생을 바라보는 나기사의 눈빛에는 처음으로 적의가 담긴 빛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게헨나만 아끼시는 선생님께서는 침략을 위해 미카 씨가 가진 아리우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다, 그게 오늘 방문하신 의도이셨나 봐요? 그렇다면, 몹시 실망스럽다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겠네요.”

손 안의 찻잔에는 식었다지만 여전히 뜨거운 홍차가 가득 남아 있다. 그 잔에 담긴 내용물을 선생에게 흩뿌릴 기세로 나기사는 선생에게 말했다.

그렇게 나기사가 화를 낼 것이라 예견이라도 했다는 듯이, 선생은 화를 달래려는 눈치로 나기사에게 말한다.

“아니, 그게 아냐. 오늘은 미카가 가진 정보는 필요없다는 말을 하러 왔어. 내가 여기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밀레니엄에 이런 암호나 비밀 같은 분야에 뛰어난 학생이 있거든.”

트리니티의 수장이자 티파티 호스트인 나기사의 두뇌는 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분노를 포함한 모든 자원을 분석적인 사고에 쏟아붓고 있었다.

“밀레니엄이라 하시면, ‘빅 시스터’인가요? 아니, ‘전지’일까요? 이 정보는 트리니티의 보호 하에 있는 아리우스 분교의 입지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는 정보입니다. 고립주의를 고수하는 밀레니엄이 이런 식으로 개입했을 거라 생각하기는 어려운데요?”

나기사가 알고 있는, 선생에게도 익숙한 밀레니엄 거물들의 이름을 늘어놓았지만 선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전혀 다른 학생의 이름을 말한다.

“하얀 토끼, 쿠로사키 코유키.”

선생의 대답은 딱 한 마디였다.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짐작하고 놀라면서도 납득한 나기사는 그렇다면 미카에게는 누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고, 선생은 알 수 없을 안도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렇군요, 이미 아리우스는 발가벗겨졌다는 거네요. 어쩌면 밀레니엄도…”

아리우스를 지키는 것은 소수정예로 이루어진 광신적인 군사력이 아니었다. 아리우스 분교가 신비의 베일에 싸인 이유는 트리니티 지하 카타콤에 있는 미궁화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공간 때문이다. 만약 그곳이 쉽게 뚫릴 만한 상황이라면 아리우스를 지킬 병력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얼마 전에 우라와 하나코에게 이 안전가옥에 관한 비밀을 들킨 탓에 잊을 뻔했지만, 오늘도 선생은 간단히 이곳을 찾아냈다. 그런 사실을 생각하는 한편으로 일단은 같은 편인 아리우스는 조금 안타깝게 여기는 정도에 그쳤고, 나기사는 트리니티를 지키기 위한 최선의 대답을 선생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선생님.”

분위기를 정리하듯이 나기사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한다.

“아리우스의 문제는 곧 트리니티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게헨나도 이제는 중요한 동맹이에요. 지금 만약 트리니티가 아리우스와 게헨나 사이 분쟁에 개입하려 한다면 게헨나 편에 서게 되겠죠.”

그것은 틀림없는 나기사의 본심이자, 트리니티를 다스리는 티파티의 공식적인 견해였다. 나기사의 말에 담긴 의도를 감지한 선생은 그건 어떤 입장에서 하는 말이냐고, 그렇게 묻지는 않았다.

“선생님.”

나기사의 말을 이끌어낸 선생이 이만 돌아가려 하자 나기사가 선생을 불러세웠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주신 점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트리니티 진영에 다시 한번 미카 씨가 있을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됐습니다.”

나기사의 의미심장한 말에서 선생은 의도가 무엇인지까지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기사와 미카의 관계가 소동 직후만큼 악화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그 점에 크게 안도했다. 오늘의 가장 큰 수확이 자신의 몰이해 내지는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자 나기사에게 다시 한번 확인하듯이 묻는다.

“미카랑은 충분히 이야기했지?”

“네.”

나기사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수많은 학생들의 선망을 한몸에 받는 티파티 호스트의 표정이 아니라, 그저 친한 친구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 소녀의 표정만이 있었다. 그런 얼굴을 보고 안심한 선생도 마음이 놓여서 그만 묻지 않으려던 말까지 꺼내고 말았다.

“세이아랑 미카도?”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한 선생은 순간 놀라더니 곧바로 사과하려 했지만, 나기사의 표정은 여전히 온화했다.

“네.”

다시 짧게 대답하는 나기사를 보며 안심한 선생은 기왕 이렇게 된 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그 둘도 직접 화해할 수 있었던 거야?”

“네. 처음에는 제가 사이에 끼어야 할까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세이아 씨가 몸이 허락하는 한 미카 씨가 있는 독방에 드나드는 모양이에요.”

“그렇구나. 그럼 미카에게는 희망이 있네.”

“네. 한동안은 감금 생활을 해야겠지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미카 씨의 재산이나 소지품은 정의실현부에서 몰수하기로 했습니다. 차라리 제가 직접 처분하고 싶은 오래된 물건들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전부 압수 물품 보관소에 두고 있습니다. 따로 넣어주시는 물품도 마찬가지니 참고해 주세요.”

요즘 들어 스스로도 잊고 있었던 것 같은 평온함을 느끼며 듣고 있던 선생이었지만, 마지막 한 마디에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물품이라는 건 음식도 예외는 없지?”

“네. 벌을 받는 입장이니까요.”

롤케이크 이외에 다른 음식을 간절히 원하는 미카에게 선생은 어떤 경로를 통해 몰래 음식을 건네주려 시도했고, 잘 되고 있는 줄 알았으나 아마도 의도적으로 덧붙였을 나기사의 그 한 마디를 통해 자신의 계획이 실패했음을 깨닫게 되었다.

“썩을 수도 있는 건 처분하는 게 낫겠지.”

“그렇죠. 제가 말씀드려도 되겠지만 자세한 사항은 압수 물품 보관소 담당 학생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게 더 빠를 거예요. 목록은 선생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같은 시각 게헨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소라사키 히나가 대답했다.

“열려 있어. 들어와.”

“실례합니다.”

만마전 의사당에 비하면 작고, 기능적으로 짜인 건물이라는 인상을 주는 선도부 본부. 그곳의 좁은 부장실에 빼곡하게 쌓인 서류 더미에 파묻히다시피 하면서 업무를 보던 히나의 앞에 나타난 이는 응급의학부 부장 히무로 세나였다.

“선도부장, 이번 생의 작별인사를 드리러 찾아왔습니다.”

“호들갑이네.”

장난스럽게 대답한 히나도 이번 게헨나-아리우스 전쟁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다. 마코토가 통과를 전제로 하는 결의안을 발의했을 때 히나는 일찌감치 자신이 이끄는 선도부의 불참을 결정했다.

하지만 직속이 아닌 응급의학부의 참전 여부를 결정할 권리는 히나에게 없다. 그리고 그 응급의학부의 수장인 세나를 친구로서 설득은 해 봤지만 세나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고, 히나는 그녀들의 전투 행위 참여를 만류하기를 단념했다.

히나는 선도부원이지만 반전주의자는 아니다. 트리니티와 맺은 불가침 조약인 에덴조약을 게헨나 측에서 강력하게 추진했던 것도 그녀였고, 아리우스와 전쟁을 하면 어느 정도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도 그녀였다. 병사는 싸워야만 강해진다는 것이 그녀의 신조다. 혼돈으로 가득한 지역인 게헨나의 치안 유지 활동에 의욕적으로 개입하고, 대원들에게 적극적인 전투 의지를 가지도록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선생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세나가 한 그 말을 듣고 히나는 세나가 출정을 앞둔 이 분주한 시기에 일부러 선도부장실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세나의 심정을 알고 있는 히나는 친구로서 조금 놀려 보기로 했다.

“내가 뺏어버려도 괜찮겠어?”

말하고 나서 그 말이 지닌 뜻을 다시 생각해보니 히나는 부끄러워져서 얼굴이 붉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세나가 눈치를 채서 놀리려다가 오히려 놀림을 받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세나에게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히나의 자폭이나 다름없는 짓궂은 말에도 세나는 낯빛 하나 바뀌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다만.”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하는 세나. 이어지는 한 마디도 세나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들으면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선생님의 시체는 제게 넘겨주세요.”

무슨 일이 터졌을 때 걸핏하면 시체를 탐하기로 유명한, 세나의 집착이 지금도 드러나고 있었다. 세나의 그 섬뜩한 말은 분명히 진심이겠지만,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히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세나에게 말했다.

“예이예이.”

“선생님이 시체가 되실 때도 바로 연락해 주세요.”

이 자리에 없는 선생이 들었다면 기절초풍할 이야기였다. 아니면 우스꽝스러운 표정에 과한 리액션으로 세나를 말렸을 것이다. 또는 불온한 소문을 듣고서 재채기라도 했을지 모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세나의 무심한 가정을 히나는 즉시 부정했지만, 이전에 눈 앞에서 지켜야 했던 선생이 총에 맞았던 광경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히나는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는 않았던 세나도 거의 직접적으로 관여해서 사건의 전개를 잘 알고 있었기에, 히나의 그런 심경의 변화를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다소 배려가 없는 발언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도부장님.”

사과를 하면서도 세나는 여전히 무심하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한다.

“제가 선생님을 흠모하는 이유는, 선생님이 키보토스에서 가장 시체에 가까운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나는 그런 세나의 모습이 평소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한 명의 동급생으로서 친구에게 충고할 수밖에 없었다.

“세나.”

문득 시선이 마주친다. 히나는 항상 올곧은 세나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자기 자신의 지쳐버린 마음과 자꾸만 비교하게 되어 항상 부럽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건 자기 마음이지만, 호의를 전하려면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이번 전투에 참전하는 네 주변에서 시체가 나올 확률이 훨씬 더 높겠지.”

“아뇨, 부장.”

히나의 걱정을 뒤로 한 채 세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의장이 지휘하는 이상 시체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그 말에 대해서는 마코토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히나도 딱히 이견이 없었다. 안팎으로 무능하다는 평을 받는 마코토이지만 그런 마코토가 선출로만 취임할 수 있는 만마전 의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히나를 비롯해서 마코토 외에는 그 누구도 이 혼란스러운 게헨나 학원을 하나로 모아 학생들을 이끌어야 하는 이른바 학생회장이라는 자리에 선뜻 앉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취임한 뒤로 해임되지 않고 지금까지 의장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적과 아군을 포함하여 인적 자원의 낭비를 철저히 금하고 실현했다는 공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히나가 평가하기에도 마코토의 몇 안 되는 미덕 중 하나였다.

“내가 보기에.”

방을 나서 전장으로 향하려는 친구의 등 뒤에 대고, 잠시 망설이다가 한 마디를 건넸다.

“너야말로 키보토스에서 가장 시체에 가까운 존재야, 세나.”

조심하라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테니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세나는 고개만 돌린 채로 웃으며 친구의 말을 받아들였다.

“고맙습니다, 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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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5.02.22번역

소설핫산) 키보토스에서 가장 시체에 가까운 사람 - 1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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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
hex8208작가
게시물 36개
슬DC
슬로보단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5.02.2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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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나
ㅇDC
ㅇㅇ125.02.22

이따 잘때 몰아봐야지

ㅇDC
ㅇㅇ125.02.23
디시콘
ㅇDC
ㅇㅇ225.02.22

선생을 향해 '게헨나만 아낀다'고 말한 나기사의 말은 사실인가? 아니면 좀 더 자신을 도와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에서 나온 비아냥인가? 전쟁이 나면 스쿼드 멤버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선생은 코유키의 도움으로 카타콤의 미궁을 돌파할 방법을 알게 되었는데 그걸 정말로 게헨나에게 알려 줄 것인가? 선생이 전쟁이 나는 것을 방관하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협력한다고?

ㅇDC
ㅇㅇ225.02.22

표지가 세나인 걸 보면 게헨나-아리우스 전쟁 그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서 겪게 되는 선생의 부상과 그걸 곁에서 치료하는 세나의 이야기가 주가 되려나... 뒷 내용이 너무 기대된다

ㅇDC
ㅇㅇ25.02.22

그냥 의심암귀 기질 발동된 것 같은데 실제로 '모든 학생을 평등하게 대한다'라는 선생 특성상 한쪽만 저렇게 편들어줄리는 없음 저런 태도는 오히려 나기사 본인에게만 손해를 입히는거라 생각함, 저 태도가 계속 이어가다간 파멸에 빠지는 것은 나기사를 비롯한 트리니티가 될 듯

ㅇDC
ㅇㅇ325.02.22

타이밍 지렸고

ㅇDC
ㅇㅇ425.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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