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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폐
"유우카쨩, 오늘 CAD 개발은 안 하나요?"
며칠 후, 최근 들어 유우카쨩이 선생님에게 가는 횟수가 현격히 증가해서 초조함 때문인지 만류하는 말이 나와버린 낮 12시. 내가 히키코모리를 졸업한 그날, 유우카쨩은 CAD 개발을 하고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서 리마인드의 의미도 담아 나는 유우카쨩에게 말한다.
"CAD? 그런 거 개발한 기억은 없는데?"
"네? 하지만 유우카쨩은 분명히 CAD의 개발을 했었다고......."
"CAD 개발이라면 엔지니어부나 베리타스 쪽일 거 같은데...... 노아가 기억을 착각하다니 드문 일이네."
키득키득 웃으며 유우카쨩은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거기까지 듣고 나는 깨달았다. 선생님이 계신 역사에 CAD를 작성하는 유우카쨩은 없다. 선생님이 죽고 세상이 활기를 잃었을 때 색을 입히는 게 적어도 밀레니엄의 정상에 선다는 것이라고 유우카쨩은 생각했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선생님이 죽지 않았기 때문에 활기를 잃지 않았고, 유우카쨩이 다채로워질 이유도 없었다. 때문에 나와 유우카쨩 사이에 기억의 차질이 발생했다.
"......네, 조금 피곤할지도 모르겠네요."
사실은 기억이 틀린 건 아닌데. 그래도 이 세상의 정사는 다른 모양이라 나는 부끄러워하며 얼버무렸다. 선생님과 유우카쨩의 접촉을 줄이기 위해 말을 걸었지만, 이 세상의 기억에 없는 말을 해도 의미가 없다. 그렇다는 건 손쓸 방법이 없었기에 얌전히 물러나기로 했다.
"괜찮아? 오늘은 내가 세미나 일을 해둘 테니까 쉬어도 괜찮은데?"
"아뇨, 일은 제대로 할게요. 유우카쨩이나 세미나의 모두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사실 그런 건 추호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유우카쨩에게 지고 싶지 않을 뿐. 선생님이 돌아가신 세상의 유우카쨩은 나에게 끔찍할 정도로 변해 있었다 남들 위에 설 만한 인격과 기술을 지녔고, 내가 기억하는 얼빠진 면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래? 딱히 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유우카쨩이라는 인물을 그저 단순하게 업그레이드 한 것 같은 성장. 그리고 그에 비해 나는 어떨까. 성장하기는커녕 비열해져 버린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오히려 줄어들고 정신은 어려지기만 한다. 그 영향으로 지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유우카쨩에게 질투심과 대항심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으음~! 하아~ .......끝났다~"
그런 아이같은 마음을 안고 덤벼드는 오늘의 일. 키보드 소리와 종이 펄럭이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세미나의 한 방에서 기운 빠진 목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는 유우카쨩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질투심이나 대항심은 있지만 유우카쨩을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좋아한다. 일이 끝난 후의 조금 피곤한 얼굴은 왠지 재미있어서 웃게 되고, 유우카쨩의 애교는 다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유일무이한 매력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 희미해져 버린 선생님이 죽은 세상의 유우카쨩이 지금의 유우카쨩에게 겹쳐져 있을 뿐. 그저 나쁜 건 여러가지로 구분할 수 없는 나다.
"나는 이따가 선생님에게 갈건데 노아도 어때?"
"......아뇨, 오늘은 정말 피곤해서 쉴까 해요. 그러니 유우카쨩은 선생님과 즐기다 와주세요♪"
"......! 그, 그럴 리가, 선생님이 일을 땡땡이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러 갈 뿐이니까!"
내 말로 무엇을 상상했는지 당황한 기색으로 부정하는 유우카쨩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내 귀에 잘 닿지 않는다. 나는 피곤하다고 했지만 딱히 선생님 만나는 걸 거절할 정도로 피곤하지는 않다.
내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솔직하게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게 나의 아이같은 부분. 그건 이제 솔직하게 말하자면 현 시점에서 나는 인간으로서 유우카쨩에게 몇 배나 뒤쳐진다는 얘기다. 1년이라는 짧으면서도 긴 시간을 허비했는지 아닌지의 차이는 너무나 크다.
"네네, 그렇다고 해둘게요."
"그러니까 아니라고!"
그렇다고는 해도 내 대항심이 말하길 유우카쨩을 상대로 패배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지금도 화를 내는 유우카쨩을 보면 그렇게까지 유능한 인물로 보이지 않지만, 진실이라는 것은 잔인하고 겉모습과 분위기만 갖추어진 나보다 유우카쨩이 몇 배는 더 우수하다.
"후우......"
그 뒤로 약 1시간 반. 두껍게 쌓인 프린트 다발을 탁탁 쳐서 책상에 내려놓은 다음 숨을 내쉰다. 이제야 내 일이 끝나고 시계를 확인하니 곧 저녁이 끝날 무렵이었다.
"......"
꽤 시간이 걸렸네요, 라고 어설픈 자신에게 불평한다.
――다만, 변호를 하자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선생님을 잃고 1년간 재기불능이 되는 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대단한 건 선생님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어설 수 있었던 유우카쨩이다. 그래서 나는 딱히 나 자신을 바보로 만들 정도로 뒤쳐지지는 않았지만, 눈앞에 대단한 사람이 있으면 아무래도 비교하기 쉬워진다. 일의 내용도 다르고 양도 다르다. 하지만 나와 약 1시간 반 차이를 두고 일을 끝낸 유우카쨩은 분명 유능한 사람.
그리고 일을 마치고 몹시 지친 얼굴을 한 나는 기억력이 좋기만 한 범인이다.
".......자 그럼."
퇴근 후의 히스테리도 적당히 일어남과 동시에 마음을 바꾼 나는 곧바로 세미나 부실을 나와 그대로 밀레니엄을 등뒤로 했다. 향하는 곳은 물론 선생님이 계신 샬레의 사무실. 질투든 히스테릭이든 선생님이 있으면 그것도 치유된다. 오늘은 쉰다고 전한 유우카쨩에게는 『역시 와버렸다』 같은 말을 해두면 그다지 위화감이 없기 때문에, 이 마음에 생긴 추한 상처를 치유해 달라고 하자.
근미래화가 진행된 밀레니엄 부근을 걸으며, 도시의 거리를 연상시키는 역과 개찰구를 지나, 피크 시간에 붐비는 전철 안에서 눈을 감고 익숙한 안내방송에 반응해 눈을 뜰 무렵엔 샬레와 가장 가까운 역이다.
"......"
역을 나와 도시이기는 하지만 밀레니엄 부근만큼은 아닌 듯 한 거리를 보고 떠올린다. 여기도 꽤 눈에 익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세상에서도 이 풍경은 자주 봤지만, 지금 감각으로 따지면 『오랜만』인 풍경이다. 하지만 선생님을 만나러 갈 기회가 늘어난 영향인지 이미 이 풍경에도 익숙해져버린 내가 있어 감회가 새로워 재확인한다.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거다, 라고.
◇
"선생님, 만나러 왔어....... 요.......?"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일상은 이 세상의 진실과 괴리되어 있다.
샬레 빌딩 입구를 지나 조금 소란스러웠던 공공도로를 달리는 차량 소리가 단번에 차단되면서 귀와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 앞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샬레의 사무실. 선생님이 있어 완전히 저항이 없어지고 그때와 비교해 발걸음도 가볍다.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는 꿈을 이루고, 거기에 선생님이 가까이 있어준다는 꿈같은 시간과 곧 마주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살짝 얼굴이 히죽거리는 지금의 나는 필시 기분 나쁘겠지.
단지 정말 기분 나쁜 건 이 세상이라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유우카...... 아무래도 이건......"
"괜찮잖아요, 여긴 아무도 없다구요?"
두근거리며 샬레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황홀한 표정으로 서로의 입술에 실을 이을 정도로 키스한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비쳐 말을 잇지 못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푹 빠져 있는지 바로 거기에 있는 내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 했고, 내가 당황하는 사이에도 유우카쨩이 반강제로 키스를 요구하며 다시 내 앞에서 키스했다.
"......아."
말이 되지 못한 소리를 내고 나서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 친다. 평소 목소리를 높이지 않던 게 유효했는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 당당하게 사무실에 들어가 말을 걸었음에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용히 사무실을 나와 인증이 필요한 사무실 문이 닫힌 것을 등 너머 소리로 확인한 것도 잠시, 전력 질주로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숨이 차 고통스러워도 그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인도의 빨간불조차 무시한 채 필사적으로 역까지 달려간다. 논스톱으로 역 개찰구를 빠져나와 그대로 밀레니엄에서 가장 가까운 역 전철에 뛰어들듯 탔고, 피크가 딱 지났을 즈음에 전철 안에서 현실 도피하듯 눈을 감았다.
――――아아, 어째서?
대체 언제부터 유우카쨩과 선생님이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었지? 확실히 최근의 유우카쨩은 선생님에게 가는 일이 늘었지만, 그런 건 훨씬 옛날부터 그랬고 간격의 차이일 뿐이었다. 게다가 내가 아는 유우카쨩은 좀더 어리숙하고 건설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이었다. 단계를 건너뛰고 과정을 무시하는 성격은 아닐 텐데 어째서?
"......!"
그런 생각에 괴로워하던 중 나는 문득 생소한 역 이름을 말하는 안내방송을 듣고 눈을 떴다. 혹시 생각에 빠져서 내려야 할 역에서 내리지 못한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핸드폰으로 순환선을 알아본 나는 알아차린다.
"......하하, 역시."
사실 전철에서 조금 생각했을 때부터 어느정도 답은 나왔다. 단지, 그것에 확신이 서지 않았을 뿐. 하지만 『나의 기억』과 비교해서 조금 달라진 순환선을 보고 그 어느정도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내가 틀어박혀 있던 한 해 동안, 세상은 달라진 것이다.
그래, 예를 들어 이 순환선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새로운 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내가 틀어박혀 있던 1년 사이에.
선생님이 살아계신다는 사실에 눈을 빼앗기기 쉽지만, 선생님이 돌아가신 1년 후에 선생님이 살아계신 세상으로 바뀌었다.――즉, 그 사이에 일어난 일들은 현재라는 시간에 구현되어 간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신 세상에서 그 1년을 살아왔다. 그래서 기억에 남은 것은 선생님이 죽은 세상에서 일어난 1년간.
그럼 만약, 선생님이 살아계신 세상의 1년간 유우카쨩과 선생님의 관계가 진전되었다면?
게다가 만약 유우카쨩 이외의 학생이 선생님에게 맹공격을 하고 있다면 어떨까? 설마 아무도 없다 같은 일은 없을 테고, 가능성 따위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1년 뒤라고하는 최근에 이 세상이어야 할 모습이 구현돼 갈 뿐. 거기에 개입할 여지는 없고, 혹시 신은...... 사랑을 하겠다는 소원을 이룰 여지도 없이 누군가에게 빼앗겨버린 선생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악질적인 장난을 친 건가?
――――너무하다.
신이란 존재는 분명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망상은 점점 커져 누군가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아, 아아....... 으으아아아아아......!"
휘청거리며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자 그 순간 팽팽하던 긴장감이 빠져나가 현괌에 주저앉음과 동시에 울고 말았다.
이건 꿈이다. 꿈인 거다.
어째서 내가 아니야, 어째서 유우카쨩인거야. 나는 이렇게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할 자신마저 있는데, 내가 손을 뻗은 끝에 있는 빛은 덧없이 손가락 사이를 뚫고 사라져갔다.
아아 너무해, 선생님이 살아있는데 선생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그 반죽음 같은 상황이 어떻게 보면 선생님이 죽는 것보다 더 괴롭다고 나는 한탄한다.
"이 사랑은 반드시 이뤄질텐데......"
선생님이 살아난다는 꿈을 이뤘으니 이 사랑도 이뤄지겠지. 그런 아이같은 마음이 간절히 원한다. 맹목적으로 강하게 바라면 근거없는 기대가 아련하고 애달프게 빛나지만, 그것은 그저 빛날 뿐이다. 결국 이건 그저 도피일 뿐이고, 그 1년 동안 만들어낸 아이같은 마음이 떼를 쓸 뿐.
"아, 하하......핫."
마른 웃음에 반비례해 눈물은 계속 흐른다.
그리고 이건 꿈이라고, 이건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걸로 점점 나는 떠올린다.
이 세상은 『가짜』라고.
그것은 도피이며 도피가 아니다. 진실이며 거짓이다.
선생님의 온기로 한번은 늘어졌던 뇌가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다. 나는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이 죽었을 때의 일, 죽은 후의 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때를. 그런데 왜 선생님은 살아계시지? 왜 모두는 선생님이 살아계신다고 진심으로 생각하지?
죽었잖아.
선생님은 돌아가셨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 이 기억이, 이 우시오 노아가 제대로 기록하고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이 세상은, 저 선생님은 가짜다.
"우읍......"
그렇게 생각한 그 순간부터 이 세상의 모든 게 기분 나쁘게 느껴져서 나는 토한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선생님과 내가 맺어지지 못한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선생님은 분명이 돌아가셨을 거다. 나는 그걸 외면하며 진실을 아는 걸 피하고 있었다.
"......"
구토한 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나의 시간은 선생님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상태에서 계속 멈춘 채였다. 1년 전과 비교해 뭔가 내가 가진 시계가 아무리 지나도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선생님도 빼앗기고 말았다.
선생님도 내가 모르는 1년 사이에 여자가 익숙해진 거겠지. 그래서 내가 껴안아도 내가 제멋대로 말해도 특별히 곤란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불투명했던 것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드러나고, 모호하고 잘 알지 못했던 점과 점이 모두 연결되어 형태를 이룬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꿈입니다.
즉 이것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하하."
충격으로 감정이 죽고 눈물도 말라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게 되어버린 몸이 트림하듯 마른 웃음을 쏟아냈다.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탄피 향기가 감도는 이 일상에서는 평온이란 분명 없다.
슬프게도 나라고하는 어리숙하고 허약한 존재로는 선생님이 살아있든 아니든 결말은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노아, 오늘도 선생님에게 안 가도 돼?"
"네, 괜찮아요. 최근에는 조금 이쪽의 대응으로 바빠서......"
"그래도 노아라면 그런 건 뒤로 미뤄도 괜찮잖아?"
"아뇨, 유우카쨩, 저는 그런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구요?"
결론부터 말할까. 나는 다시 돌아와 버렸다. 제대로 꿈도 꾸지 못하는 시든 나로.
"그건 알지만......"
"......괜찮아요, 유우카쨩은 선생님과 즐기다 오세요. 저도, 혹시 갈 수 있다면 갈 테니까."
세상이 급격히 부패했다. 화려했던 내 세상이 다시 흑백의 세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날』 이후로 선생님과는 만나지 않았다. 선생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어도 선생님과 만날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가짜. 결국은 가짜.
그것이 이 세상과 선생님에 대해 내놓은 나의 대답이었다.
"일단 알겠는데...... 하지만 최근에는 선생님도 노아와 만나지 못해서 서운해하던걸?"
"또 조만간 여유가 생길 때 갈 테니 안심하세요."
선생님이라고 하는 빠져들 존재가 내 안에서 사라져 버렸을 때 의외로 나는 틀어박히는 선택을 하지 못했다.
――――틀어박히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틀어박힌다. 즉 내가 세상을 거절하는 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되면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나는 다시 세상에 뒤쳐질 뿐이다. 지금 틀어박히고, 다음에 밖에 나갔을 때 선생님과 유우카쨩이 같은 반지를 끼고 있다면 결국 나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내가 세상을 거절했기에, 나는 세상을 전혀 모르는 채로 남았기 때문이다.
"알았어....... 그럼 난 다녀올게."
"네, 다녀오세요."
능력부족으로 일을 빠르게 끝내지 못하는 나를 유우카쨩은 어째서인지 선생님에게 데려가고 싶어한다. 이미 선생님은 유우카쨩의 것인데, 만약 내가 유우카쨩의 입장이라면 기뻐하며 선생님을 독점할텐데 유우카쨩은 어째서인지 나를 데려가고 싶어한다.
그것이 유우카쨩의 상냥함인지 아니면 여유나 자비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답이 무엇이든 간에 모든 것이 헛되다. 『태양[유우카쨩]』이 『달[나]』을 비추어도 그 태양이 어둠을 파헤치는 일은 결코 없다. 저 태양은 그저 달을 비출 뿐이다.
"하아......"
홀로 남은 세미나의 한 방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강하게 움켜쥔 이 마음도 조금의 망설임으로 놓아버린다. 아무리 크든 아무리 소중하든 이 손에 넣어둘 수 있는 건 단 두가지 뿐. 그러나 그 둘조차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를 사람들은 허무라고 부른다. 바로 지금의 나다. 한쪽 손으로 잡은 사랑과 다른 한 손으로 잡은 희망을 놓아준 나. 거기서 두 손으로 눈물을 닦는 내가 무엇을 가질 수 있을까. 나에게서 선생님을 빼앗아간 유우카쨩에게 화는 나지 않는다. 전혀는 아니지만 유우카쨩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1년 전에 가장 큰 슬픔을 맛보고도 죽지 못했던 나에게 이제 와서 자살이란 선택은 생기지 않는다. 살아있다는 것에 의미는 없지만 죽는 것에도 의미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 버리는 걸까. 나는 내가 제일 잘 알 텐데, 나 자신도 『나』를 잘 모른다.
"......"
혼자 고민하고, 곤란하고, 울 뻔해서 나는 책상에 엎드렸다.
세상은 여전히 기분 나쁘고 진실은 불필요한 정보밖에 가져오지 않는다. 뇌가 이해를 거부하면 자연스럽게 어려운 생각을 하기가 싫어진다.
그렇다면 다음으로 내가 할 행동은 무엇일까. 그것조차 모르는 나는 현재도 팽창하는 우주에 버려져 무중력 속을 정처없이 방황하는 그저 한사람의 인간일 뿐이다.
◇
"......하."
언제부터 잠이 들었을까. 천천히도 아닌 확 의식이 깨어 나는 황급히 일어난다. 캄캄한 창밖을 보고 난 후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저녁 8시가 넘어 조금 처량한 마음이 들었다.
탄식하며 옆에 있던 마우스를 움직이니 자동 슬립한 PC의 전원이 켜졌고, 작성 중이던 자료 화면이 나와 울컥했다.
"......"
허망한 눈으로 컴퓨터를 닫고 이번에는 등받이에 기대었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지친 OL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신데렐라 스토리를 걸었을 텐데.
지금쯤 유우카쨩과 선생님이 꽁냥대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분노보다 허무함이 몰려와서 아무것도 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어딘가 멀리 가고 싶다......"
툭 중얼거린 도피 선언. 허무함만 울리는 이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한번 억지로라도 마음을 리프레쉬시키고 싶어서, 유우카쨩과 선생님이 맺어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축하한다고 축하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역시 맺어질 수 있따면 나와 선생님 둘이 좋다고 생각했고, 어쨌든 멀리 가고 싶었다.
여기서, 혹은 샬레에서 도망쳐 좌우로 갈라진 길이 있다고 하자. 거기서 헤매면서도 왼쪽을 택했다면, 그 다음에 또 좌우로 갈라진 길이 있다면 그때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을 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출발한 장소보다 어쨌든 멀리 가고 싶으니까.
"아하, 하하."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웃음이 입에서 새어나왔다. 내일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이제 틀린 것 같다. 이럴 바에야 계속 흑백의 바깥에 겁먹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유일하게 밖에 나가서 잘한 일이 있다면 선생님에게 『정말 좋아』라고 말했던 일일까.
.......다만, 그 선생님도 가짜였다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잿빛이 될 것 같았다.
"......노아? 들어갈게?"
"!"
생기가 없는 상태로 굳어 있는데 갑자기 세 번의 노크와 함께 유우카쨩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황급히 생기가 돌아왔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를 혹사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어, 노아. 오랜만이려나?"
"서, 선생님......"
......정말로, 나를 혹사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째서 둘 다 여기에?"
충분히 당황하고 나서 어떻게든 말을 쥐어짜낼 수 있었던 나를 누군가 칭찬해줬으면 좋겠다. 유우카쨩은 물론 선생님이 이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니까.
"노아가 최근 선생님에게 안 가니까 내가 부른 거야. 노아도 선생님이랑 만나고 싶어했잖아?"
"괜찮아? 혹시 내가 뭔가 한 걸까? 그렇다면 주저하지 말고 말해줘."
그렇게 말하며 선생님은 내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굽히고, 이야기에 나오는 오아자님처럼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따.
아아, 오랜만에 느끼는 선생님의 온기는 역시 기분이――
"만지지마!!"
――좋을 리 없어 나는 일어서며 황급히 그 손을 힘껏 뿌리쳤다.
"잠깐, 선생님......!? 노, 노아!? 뭐하는 거야!?"
뿌리친 기세에 선생님은 엉덩방아를 찧고, 그것을 본 유우카쨩은 참지 못하고 나에게 분노를 날린다.
하지만 나도 격분하고 있으니까. 선생님에게 닿으면서 몸과 사고가 갑자기 아련해져있던 1년 전 죽음을 떠올렸다.
――그래,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선생님의 죽음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는 내 기억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다. 내가 완전기억능력의 소유자라서가 아니다. 내가 선생님의 죽음으로 극도로 절망했기 때문이다. 그걸 이제 와서 꿈이었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확실히 선생님은 죽었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에 있는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해도 가짜다. 허구다. 환상이다.
애초에 이 세상조차 전부 가짜다.
"아야야......"
"괜찮으세요? 선생님."
"괜찮아괜찮아."
엉덩방아를 찧은 선생님에게 유우카쨩이 황급히 손을 내밀지만 선생님은 그것을 괜찮다며 손을 흔들어 제지의 신호를 보내고 자력으로 천천히 일어섰다.
"노아, 역시 내가 뭔가 한 모양이구나. 정말 미안해. 나쁜 건 뭘 했는지도 모르는 내 쪽이야. 그러니 나는 노아의 모든 걸 받아들일 의무가 있어. 나는 노아의 모든 걸 받아들일게."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며 자애로운 표정을 지었다.
"......!"
그 웃는 얼굴이 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따르면 그 미소는 선생님 생전에 여러 번 보여줬던 미소였고, 바로 최근 『선생님이 살아난 날』에 처음 나와 선생님이 만났을 때도 했던 미소이기도 했다.
그런 희망의 상징인 듯한 미소가 어떠한가. 지금은 그게 너무나도 화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다. 가짜가 마치 진짜인 것처럼 행동하는 게, 나를 잘 안다는 분위기를 풍기는 게.
――――유우카쨩을 안았으면서.
물론 그것은 단지 비유. 하지만 만약 그때――유우카쨩과 선생님이 키스하던 그때 선생님에게 그럴 마음이 없다면 거부할 수도 있었다. 특별히 유우카쨩이 키스를 강요해서 일어난 행동이 아니다. 선생님은 어느정도 자유의사가 있었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선생님은......!
"이제 됐어요!"
"미안, 노아. 이렇게 갑작스럽게 와서 무신경했네. 그럼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아. 1년이든 2년이든 노아가 용서해 줄 때까지 나에게 그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해주면 안 될까?"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다시 상냥하게 미소지었다.
"그――――"
말하자면 감정이 불안정했다. 그것만으로 정리될 일이다.
다만 나로서는 역시 참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내가 괴로워했는지 전혀 모르는 거 같고, 내가 일년 내내 쌓아둔 비통함을 바보 취급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웟는데, 나는 이렇게 울부짖고 있는데 갑자기 사다리를 걷어차고 그 끝에 갑자기 그런 미소를 지으며 보상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제 한계다. 이제 무리다. 나는 나를 유지할 수 없다.
우시오 노아 같은 건 없었다. 우시오 노아는 죽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그렇게 도망치면서 나는――――
"――그 상냥한[역겨운]얼굴로 내 이름을 부르지마!!!"
두려울 정도로 높은 목소리로 바로 곁에 놓여 있던 서기의 결단, 말하자면 권총을 선생님에게 난사해, 나는 길을 벗어나는 걸 선택했다.
총알은 물론 물리법칙을 무시하지 않고 선생님의 몸을 관통했고, 피가 터지자 금세 내 옷이 일부 붉어졌다.
"노아――――!"
그리고 선생님 옆에 있던 유우카쨩이 미간을 찌푸리며 귀신 같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을 때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어......."
선생님을 죽인 직후, 나를 중심으로 세상이 모자이크가 걸린 것처럼 흐릿해지며 눈앞에 있는 유우카쨩과 선생님을 지워나간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자이크가 걸린 세상이 되감기라도 하듯 원래대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방금 전까지 있던 선생님과 유우카쨩이 사라져버렸다.
"아........."
그리고 이 세상이 선명하고 깨끗한 것이 되었을 때, 정확히 선생님이 죽은 근처의 장소에 툭 「하나의 단말」이 떨어졌다.
"이, 건......."
휴대폰이라기보다는 태블릿이라고 하는 편이 적당한 그 단말은 액정에 하나의 탄흔을 남기고 거기에 있었다.
――아아, 이건 내가 쏜 거구나.
확증은 없지만 왠지 알 거 같았다. 이것은 선생님이 항상 가지고 있던 태블릿――그래, 『싯딤의 상자』다.
"아, 하......."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극도로 팽팽해져있던 긴장감으로부터의 해방과 모든 게 끝났음을 인식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다.
아아, 역시 선생님은 가짜였구나. 그 사실에 안심함과 동시에 나는 후회했다.
"아아, 으......아, 으아아아......"
정말로, 가짜였구나. 정말로, 끝나버렸구나.
"으아, 아아아아아아아아......!"
만약 아까 선생님이 『대가를 치를 수 있게 해달라』라고 했을 때 내가 뻔뻔스럽게도 사귀어 달라고, 애인이 되어 달라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결말은 달랐을까. 설령 가짜라고 해도. 그럼에도 서로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행복했을까.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탐미적인 세상을 이제와서 상상하고 후회했다.
나는 내 손으로 그 꿈을 끊은 것이다. 거기에 후회따윈 없을텐데, 그건 정말 가짜였을텐데 얼마전까지 내 곁에 있던 선생님이 사라져버린게 슬퍼서...... 슬퍼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아."
유우카쨩이 사라지고, 선생님도 사라지고, 그리고 선생님에게서 튀었던 피마저도 사라진 가운데 유일하게 나에게 묻은 피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으으, 으아......."
내 손에 묻은 선생님의 피, 그걸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핥으면 물론 피맛이 나서 오열한다. 하지만 나는 핥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원했던 꿈을 스스로 끊었다는 증거.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생님을 스스로 죽인 증거. 그것을 지우듯, 몸속에 흡수하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이 맛없는 액체를 핥았다.
"......"
그리고 이 손에서 선생님이 있었던 증거가 없어져 한순간의 허무에 빠진 후, 다시 나는 울부짖는다. 눈앞에 있던 싯딤의 상자를 선생님처럼 쳐다보고 아이처럼. 아기처럼. 날이 갈수록 나는 점점 어려지고 있었다. 그것이 지금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노아!? 괜찮아!?"
내가 운지 한참 지났을 무렵, 나의 외침을 듣고 조금 전까지 귀신같은 형상이엇을 유우카쨩이 이번에는 당황한 듯한 얼굴로 찾아왔다.
"유우카쨩......!"
"노아...... 미안해, 괜찮아. 내가 곁에 있으니까."
아까까지 있던 유우카쨩과는 다른, 조금 키가 큰 유우카쨩이 흐느끼는 나를 껴안았다.
――돌아와 버렸구나. 나보다 훨씬 우수해서 솔직히 싫었던 유우카쨩이지만, 지금 이 순간은 그 유우카쨩이 있다는 게 안심된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옳지옳지."
유우카쨩은 우는 나를 아이 달래듯 부드럽게 감싸준다. 나와 유우카쨩은 동급생일텐데, 완전히 내 정신인 아이가 되고 유우카쨩은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러고 보면 우는 이유고 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이해한 듯 유우카쨩은 행동하며 나를 위로한다.
"괜찮아, 노아는 내가 꼭 지킬게. 곤란한 일이 있으면 전부 내게 말해줘."
이윽고 유우카쨩은 얼굴을 마주하고 내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얹으며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
그런 상냥함 100%의 표정에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유우카쨩이 그 표정은 지은 건 내 기억으로는 내가 히키코모리를 졸업하고 처음 유우카쨩과 만났을 때뿐. 다만, 그 표정은――――
"그――――"
"......그?"
――아니, 아니다. 단정 짓기에는 이르다.
하지만 머리가 생각하기 전에 답을 주려고 해 고동이 빨라진다.
"호, 혹시 유우카쨩은..... 장래에 선생님이 되려고 하는 건가요?"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바라면서도 속으로는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 어떻게 알았어? 아직 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알아채다니 역시 노아네."
"――――――!!"
――이 직후, 나는 절규했다. 제3자가 들으면 귀를 막고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소리로 나는 발광했다.
――――선생님은 저주다.
선생님을 죽여도 내 가장 가까이에 선생님이 있었다.
아아, 그렇구나. 유우카쨩은 계속 선생님이 되려고 했구나. 그래서 저렇게 다채로워지고 『저런 표정』까지 하게 된 거다. 여기까지 와서야 겨우 점과 점이 연결된 것 같았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한다, 선생님은 저주다.
이것이 운명이라고 한다면, 필시 운명이라는 녀석의 정체는 기분 나쁜 거겠지. 결국 소원이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내 곁에 있었다는 거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이끌리듯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분홍빛으로 물든 나무들이 벚꽃을 흩뿌리며 봄을 구가하고 있었다.
"와아......"
그런 계절의 풍경에 나는 순순히 감동했다. 아름다웠으니까. 이 풍경도 조금 지나면 볼 수 없게 되어 버리니 시간의 흐름이란 빠르고 봄의 수명은 짧은 법이다.
"......"
하얀 침대에서 바라보는 이 경치도 왠지 익숙해져 버렸다.
모든 것이 처음일텐데. ......아니, 이 경치는 처음이 아니야. 그래서 익숙해진 거야.
"......아, 그랬었지."
지금 본 벚꽃 경치를 제대로 『일기장』에 간직해야겠다. 아까 경치는 「여기」에서 본 경치 중에 제일 아름다웠으니까. 분명 좋은 추억이 되겠지.
"노아! 이제 겨우 깼다는 게 사실이야!?"
조금 전의 경치와 그 경치를 보았을 때의 감정을 일기장에 천천히, 정성스럽게 적고 있는데 갑자기 방의 슬라이드식 문이 힘차게 열려 누군가가 내 바로 옆까지 달려왔다.
"음......누구신가요?"
『나』는 말한다.
"......! 미리 듣긴 했지만, 역시 그렇구나......"
눈앞의 그녀는 조금 슬픈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걸 보고 이해했다.
이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라고.
".......죄송합니다."
내가 상대방의 입장이었다면 마찬가지로 나도 슬퍼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과했다.
"아, 괜찮아!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 말에 그녀는 황급히 내 말에 보충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그 사실에 쇼크를 감추지 못하고 점점 말소리가 줄어드는 걸 보고 나도 왠지 모르게 슬픈 기분이 든다.
"......."
슬슬 그녀도 제대로 이해했겠지.
――――그래, 나는 기억상실이다.
언어나 생활 리듬 같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것을 제외한 모든 걸 나는 잊어버렸다. 그래서 과거도, 그녀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서 저....... 오늘은 무슨 일로......?"
그리고 물론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것 이외에는, 나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름 자체는 금방 알 수 잇었다. 왜냐하면 지금 몸에서 떼지 않고 가지고 있는 이 일기장에 이름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병실에서 일어나 바로 근처 책상에 놓여 있던 이 일기장――다른 사람의 것일 수도 있었지만 그것은 간호사의 설명으로 없어졌다. 내 이름은 이 일기장에 적혀 있는 대로 『우시오 노아』다.
"그, 그렇네...... 근데 잠깐 기다려봐. 지금 노아는 기억상실인거지? 그럼 내 소개를 해둘게."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자신 있게 가슴을 편다.
"나는 하야세 유우카, 직업은 선생님이야!"
한 손을 가슴에 대고, 파팡 하고 효과음이라도 붙을 거 같은 자랑스럽고 기세넘치는 자기소개를 선보여 준 하야세씨. 그 쾌활함에서 좋은 사람임이 묻어나와 무심코 피식 웃고 만다. 아아, 나에게 이런 재미있고 좋은 사람이 아는 사이였구나, 그 사실에 두근거리고 말았다.
"세상에......! 선생님.......!"
――단지, 두근거리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저 지금, 엄청 기뻐요.......!"
――선생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그래?"
"네! 너무 기뻐요."
――――일기장. 그것은 나의 과거를 설명해 주는 귀중한 자료. 그 일기장에 의하면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로 헤어져 버린 모양이다. 그게 너무 충격이었는지, 선생님과 멀어지게 된 뒤로는 매일 쓰던 일기 날짜에 공백이 생기게 됐고 단 한마디, 또는 두마디로 간소하게 선생님이 없는 우시오 노아가 얼마나 수척해졌는지 설명할 뿐 글의 색채가 없어졌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선생님』을 만나는 게 기뻤다.
혹시 이게 운명......? 만약 그렇다면 운명이란 상당히 멋지고 상냥한 존재인 거 같다.
"흐흥, 그렇다면 다행이네. 앞으로도 노아는 내가 지킬테니까 곤란하거나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해! 나는 선생님이니까!"
"아, 그럼 한 가지 선생님이 봐주셨으면 하는 게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바로 옆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태블릿 단말기를 선생님에게 보여드렸다.
"이건..... 뭐야? 애초에 이거, 움직여? 총에 맞은 거 같은데......."
"움직이는지 아닌지도 포함해 전부 몰라요. 그저 제가 기억을 잃기 전에 너무 소중하게 껴안고 있던 거 같아서....... 아마도 「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선생님이라면 이 태블릿을 고치는 방법이라든가 애초에 움직이는지 같은 걸 알고 있으면 좋을거라 생각해서......"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남긴 수수께끼의 태블릿. 그 정체는 내 일기장에도 적혀 있지 않아서 아마 개인적인 물건이라든가, 기억을 잃기 전에 껴안고 있었다든가, 잘 모르는 단편적인 정보밖에 없어서 곤란했다. 보다시피 탄흔이 남아있기 때문에 총에 맞았다고 생각하지만, 그 영향으로 기판이 망가진 거겠지. 전원도 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이 태블릿은 매우 중요한 거라는 생각이 들어, 이 태블릿을 고쳐 줄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음, 잠깐 줘볼래? 뭐 솔직히 말해서 내가 보는 것보다 엔지니어부 같은 데 보여주는 편이 좋겠지만...... 약은 약사에게라고도 하고."
얘기를 들어보면 선생님이 안 되더라도 선생님이 아는 분들 중에서 기계를 잘 아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아 마음 든든하다. 하지만 일단 선생님에게 보여드리기 위해 나는 태블릿을 천천히 두 손으로 내밀었다.
".......어?"
"와......?"
내가 건네주고, 선생님이 태블릿에 손을 대는 순간 「그것」은 갑자기 부팅되었다.
――기묘하게도 나는 『선생님』과 만났다.
아무도 나와 선생님이 만나는 게 저주라는 것을 알려주지 않은 채 나는 『선생님』을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선택한 길이다. 선생님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어려져버린 내가 아주 짧은 시간속에서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내고 선생님을 죽이면서까지, 선생님도 유우카쨩도 모든것을 기억하고 있던 그 소중한 기억마저 떨쳐버리면서가지 선택한 나의 길이다.
거기서 남은 이 유일한 태블릿이――시작을 고하는 것인지, 아니면 끝을 고하는 것인지,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렇기에 지금 여기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무엇이든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다시 한번 선생님과 만나 사랑을 하고 싶다.』
그 소원은――이루어졌나요?
갑자기 부팅되는 태블릿에 당황하는 귀여운 『선생님』을 보고, 나는 천천히――부드럽게 미소지었다.
소설 모음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projectmx&no=2463136
댓글 17

뭐야 이 엄청난 명작

결국 선생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가 노아 한테 죽고 노아는 기억상실증인건가?

다시 살아난 선생은 싯딤의 상자가 보여준 환영이엇을듯
그럼 피는 뭐지? 처음에 환영이라 생각했는데 피 때문에 햇갈리네
상자가 피까지 구현한건가..?
선생이 죽은지 1년만에 히키코모리로 피폐해진 노아가 샬레에 방문했는데 싯딤의 상자가 모종의 이유로 환영을 보여줌. 그러나 자신이 아닌 유우카와 선생님이 이어지는 결말에 질투심 등의 감정으로 노아가 선생님(싯딤의 상자)를 쏘고 환영에서 깸. 뒤늦게 유우카가 왔지만 유우카 또한 선생님이 되려고 한다는것을 알아챔. 선생님(싯딤의 상자)을 죽이고 환영에서 깨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유우카 또한 선생님이 되고자해서 충격으로 혼수상태&기억상실 (개인적으로 이부분이 이해안됨) 깨어났더니 일기장의 선생님 = 유우카로 착각해서 노아가 원하던대로 (새로운)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는 엔딩
내 생각으로는 아로나가 자살하려고 노아의 심리를 이용해서 환영을 보여준게 아닐까 싶음. 그게 아니면 굳이 노아에게만 저런 환영을 보여준 이유를 모르겠음. 근데 선생님이랑 그렇게 붙어다닌 유우카가 싯딤의 상자를 못 알아본다는게 말이 되나...?
뭔가 많이 복잡하긴 하지만 맛있으면 됐지
개추개추개추개추
흑흑 너무 슬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