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L #하나코 #사쿠라코 #??
원본 by は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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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7>
<4>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나에게 내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에 지난 며칠은 마치 육상 경기가 끝난 뒤 쿨다운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제대로 살고 있다고 하기도 어려운, 끝을 앞둔 유예 기간 같은 시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교제하게 되었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무언가 바뀐 것은 없었고,
그 사실을 크게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기에 비밀의 관계를 숨기는 것도 딱히 어렵지 않았다.
변한 게 있다면 선생님과의 모모톡 대화가 급격히 늘어났다는 점일 것이다.
내가 전업주부처럼 매일 선생님을 찾아가는 건 아니었기에 소통의 대부분은 모모톡을 통해 이루어졌다.
선생님의 업무가 끝날 때쯤이면 대화가 시작되고, 한참 대화가 이어지다 보면 이번에는 통화로 넘어가는 연장전이 시작되는 식이었다.
별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사소한 문답들이 내게는 너무나 소중해서 이제는 이것이 삶의 보람이 되어 있었다.
『하나코, 지금 괜찮으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그런 탐미적이고 평온한 어느 날이었다.
시각은 밤 9시.
모모톡 중 선생님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고등부 학생이 외출하기에는 꽤 늦은 시간이다.
장소에 따라서는 발키리에게 선도될 수도 있는 이 시간에 선도하는 입장인 선생님이 만나자고 제안한 것에 조금 의구심이 일었다.
“지금 말인가요? 물론 갈 수 있어요.”
『다행이다. 하나코도 알고 있는 그 공원에 있어.
괜찮다면 거기서 직접 하나코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네.』
선생님이 나를 원하신다는 부끄러움과 총알에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선생님이 혼자 있다는 걱정이 반반씩 섞여 가슴속에 툭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꾸미지 못하는 게 아쉽지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전신 거울을 보며 부끄럽지 않은 차림인지 확인한 뒤 곧장 공원으로 향했다.
트리니티 종합학원 근처 역에서 조금 떨어진, 비가 온 뒤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를 것만 같은 조금 쓸쓸한 분위기의 공원이었다.
“기다리셨죠?”
“아니, 별로 안 기다렸어. 그보다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아니에요. 저도 선생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었으니까요.”
“응, 나도 하나코가 보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어.”
“…….”
설마 신사적인 선생님의 입에서 그런 육식계 같은 멘트가 나올 줄은 몰랐고, 그 상대가 나라는 사실에 할 말을 잃고 당황하게 된다.
선생님은 본인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좀 더 자각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해 버려요’라고 말하기엔 우리 관계가 이미 멀지 않지만, 그 한마디에 나를 포함 수많은 학생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다는 건 사실이니까.
“…저도, 선생님 보고 싶었어요.”
한참을 당황하고 번민한 끝에 겨우 말을 자아내며 수줍게 웃었다.
밤의 어둠이 내 얼굴에 어린 붉은 기를 부디 가려주길 바라며 발걸음을 옮겨 가장 가까운 그네 두 자리에 앉아 서로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막상 대면하니 왠지 쑥스러웠기 때문이다.
대체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지금의 나는 알 수 없었다.
“아, 맞다. 하나코, 자!”
“앗……?”
무언가 생각난 듯 선생님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게 가볍게 던졌고, 나는 서둘러 그것을 낚아챘다.
“콘포타주……?”
“이제 겨울이니까. 저기 자판기에서 따뜻한 걸로 사 왔어.”
“…저, 이런 자판기 음식은 사본 적이 없거든요.”
“우연이네. 나도 아까 전까지는 사본 적 없었어.”
“그게 뭐예요.”
우리는 마주 보며 살짝 웃었다.
콘포타주의 온기는 쌀쌀한 밤공기 속에서 피부 깊숙이 스며들었고, 후 하고 숨을 내뱉자 입김이 하얗게 번지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만큼 의식이 선생님에게만 쏠려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야 겨우 냉정해질 여유가 생겼다.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고, 통행인조차 보이지 않는 정적 속에 우리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추위 때문인지 가로등에 꼬이는 벌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나코는 말이야, 나중에 하고 싶은 거 있어?”
“네? 저, 장래 희망 말인가요?”
본래대로라면 죽은 사람이 되었을 내게 그 질문은 너무 얄궂다.
천국일까, 지옥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만, 불과 며칠 전 이승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내게 미래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장래 희망 같은 건 어린 시절에 버렸고, 아직 어린 내게 먼 미래의 커리어를 상상하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시스터후드의 사쿠라코 씨 같은 사람들이 장래에 성직자가 될 거라는 건 당사자가 아닌 내가 봐도 뻔한 일이지만,
일반 학생인 내게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지의 세계만이 펼쳐져 있다.
이대로 선생님과 결혼한다고 해도 얹혀사는 백수는 싫고, 그래도 만약 아이가 생긴다면 전업주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장래에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의 답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뭘 하고 있을까요. 저는 미래에서.”
몇 번이고 말하지만, 죽었어야 할 내게 미래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 나랑 여행이라도 갈까?”
“여행요?”
“응, 여행.
북적거리는 곳도 좋고 조용한 곳도 가보고 싶네. 세계 일주 같은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나는 대로 말하는 선생님을 따라 나도 하늘을 보니, 그곳에는 가득 별이 펼쳐져 있었다.
별은 여기서 보이는 저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져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알려주고 있었다.
그 넓은 세상을 선생님과 유람하는 미래라면 확실히 아주 좋을지도 모르겠다.
“…네, 여행. 꼭 가요.”
“오, 좋아. 약속이다?”
“네, 약속이에요.”
멋지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그런 미래가 올까 싶어서 대답하기까지 꽤 긴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도 그런 나를 보며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만약 조금이라도 위화감을 느꼈다면 그 부분은 용서해 주길 바란다.
“여행이라~ 어디로 갈까~ 역시 여기저기 다니려면 성능 좋은 카메라 같은 것도 갖고 싶어지네.”
“그건 그렇지만, 굳이 그렇게 돈 드는 물건을 사지 않으셔도 돼요. 낭비잖아요.”
“낭비 아니야.
이건 미래에 더 예뻐질 하나코를 담기 위해 필요한 비용이니까.
그에 비하면 너무 쌀 정도지.”
그 뒤로 여행 이야기로 꽃을 피우며 밤은 더욱 깊어갔다.
대화에 열중하느라 시간 확인하는 것도 잊고 있었다.
문득 선생님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아차 하는 반응을 보였다.
“미안, 하나코. 대화에 너무 집중했네.
선생이라는 사람이 학생을 통금 시간까지 붙잡아 두다니 정말 미안해.”
“아니에요, 선생님. 괜찮아요. 그런 법보다 저는 선생님을 우선하고 싶으니까요.”
여전히 사람이 없어서 목격담 같은 건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에게 들킨다면 나도 선생님도 무사히 넘어가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오늘 선생님과 대화한 것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글자뿐인 대화보다 그 연장선에 있던 통화보다,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이 순간은 천금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아주 조금이지만 선생님과 함께 위험한 짓을 한다는 사실에 스릴과 배덕감, 그리고 우월감이 느껴져 즐거웠다.
우리는 ‘들켜서는 안 된다’라는 리스크를 안고 살지만, 그것은 어딘가 현실감이 부족하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시간 외에 외출한다는, 일상에 실재하는 리스크를 함께 짊어지는 것은
우리 둘만의 세계를 더욱 선명하게 의식하게 해주었고, 정말 오랜만에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하나코, 이건 결코 엉큼한 뜻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먼저 밝혀둘게.
사실 내가 이 근처에 호텔 방을 잡아뒀거든.
거긴 그렇게 북적이는 곳도 아니라서 지금 한 명 더 묵는다고 해도 문제없고, 정 뭣하면 다른 방을 잡아도 돼.
비용은 내가 낼 거고 트리니티 외박 허가도 내가 나중에 신청해 둘게.
벌써 밤이 늦었는데 오늘은 어때?”
“…음.”
찰나의 순간,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불건전한 호텔은 아닐지라도 선생님과 학생이 의도적으로 같은 호텔에 묵는 것은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 딱 좋고,
아무리 한적한 곳이라 해도 사람의 눈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나의 밤길을 걱정해서 한 제안이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의견은 경솔하다고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를 염려한 끝에 선생님이 그런 선택지를 내놓았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설령 우리 관계가 누군가에게 들킬 위험이 있을지언정 나를 우선해 주었다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 것 또한 사실이었다.
“…….”
인생의 오묘함이 느껴지는 순간.
지금 여기에서는 선생님의 말에 기대는 편이 편한 선택지이긴 하다.
‘사귀는 사이’라는 관계에 편승해 일선을 넘어버린다면?
서로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남길 수 있다면?
그건 뭐, 틀림없이 행복한 일이겠지.
선생님을 연모하는 이라면 누구나 최종 목적지로 삼는 곳—지금 이 순간 한정으로 그 마지막 목표를 바로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아니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사양할게요.”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선생님의 제안은 매력적이었지만, 동시에 안이한 선택이었다.
분명 나중에 후회할 것이다.
선을 넘지 않더라도 한 방에 같이 있는 정도로 그칠 수도 있겠지만, 그 수위가 어떠하든 좀 더 순서라는 게 있지 않나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의 제안은 내가 판단하기에 ‘하룻밤의 실수’다.
리스크를 생각한다면 애초에 같은 호텔에 투숙하지 않는 편이 옳다.
…게다가 지금의 내가 100%의 호의만으로 선생님을 마주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점도 거절의 이유 중 하나였다.
지금, 행복한 걸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여전히 그런 고민을 하며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부분이 내게는 있다.
선생님과 교제하게 되었어도 미래나 자신에 대한 불안은 여전히 어른거리고, 정신이 불안정한 채로 선생님과 선을 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했다.
자신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선생님을 본다는 건, 그건 사랑에 눈이 먼 게 아니라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발을 내딛는 것은 파멸과 동의어—그것이 나 혼자라면 상관없지만 선생님까지 휘말리게 한다면 그건 사양하고 싶다.
“다음에도 또 이야기해요. 심야까지라도 괜찮으니까요.”
밤의 트리니티에 딱히 공포심 따위는 전혀 없다.
애초에 죽으려 했던 내게 ‘죽어도 상관없어’라는 마인드가 이제 와서 사라질 리도 없고,
그런 심경에서 보면 밤의 트리니티든 낮의 트리니티든 어디에 있든 다를 바 없다.
그러니 본심을 말하자면 걱정은 필요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그래서 진심 어린 말을 전한다.
어깨 근처까지 손바닥을 들어 선생님께 미소 짓자, 선생님도 조금 미안한 듯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그것이 작별 인사라는 것을 서로 이해한 뒤 나는 공원을 나섰다.
“후우, 하아…….”
공원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나는 홀로 조용히 한숨 섞인 숨을 내뱉었다.
인생의 분수령이라 할 수 있는 날이었다.
여기서 내린 선택으로 내 미래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가장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미래를 선택한 셈이다.
하지만 그걸로 됐다.
지금은, 이걸로 충분하다.
내가 호텔에 묵는 선택지를 골라 육체관계를 가졌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행복이라 할 수 있었을 거다.
강제로 관계를 진전시켜 버리면 머뭇거리는 내 마음도 결국 긍정적으로 변했을 테니까.
다만 역시 도망칠 구멍이 필요했다.
배수의 진은 굳이 치지 않아도 된다면 치지 않는 게 상책이다.
그 논리로 생각하면 도망칠 구멍은 많을수록 좋다.
‘이제 되돌릴 수 없어’ 같은 절박한 정신 상태에 빠지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니 이걸로 된 거다.
인간은 진화하는 생물이지만, 연이은 변화를 견뎌낼 수 있는 생물은 아니다.
죽음을 넘겨버린 내게는 변함없는 사랑 정도가 딱 적당하다.
순수한 마음으로 선생님을 사랑할 수 없는 현 상황에서 더 큰 변화를 일으키고 싶지는 않다.
그랬다간 정말 내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으니까.
“…….”
생각에 잠겨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조금 전까지 아름답던 별하늘에 구름이 잔뜩 끼어 별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이런 늦은 밤에 갑작스러운 암운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게 하지만, 내게는 오히려 안도감을 주었다.
별이 보이지 않으면 세상이 넓게 보이지 않으니까.
여기서 보이는 하늘 끝까지 구름이 이어져 있다는 것.
그것은 세상의 넓이를 알 수 없게 된 것과 같고, 세상이 좁으면 정보량도 적어 안심할 수 있었다.
아주…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세상에는 나와 선생님만 있으면 된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존재는 무엇이든 방해물일 뿐이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은 선생님뿐이면 족하다.
그래서 가급적 세상은 좁은 편이 내게는 좋았다.
“하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자정이 되기 전 하루의 마지막 한숨을 내뱉었다.
내 앞에 변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밀어냈다.
그 사실에 나는 깊이 안심하며, ‘정말 어쩔 수 없네…….’라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5>
“자, 치즈~”
“…저기, 부끄러운데요.”
그로부터 또 시간이 흘러, 내가 죽으려 했던 그날로부터 벌써 한 달은 지났을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이 한 달을 용케 살아남았다.
절망에 짓눌리면서도 여기까지 온 내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그만큼 내가 여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여전히 위화감이 있었다.
“음~ 역시 하나코의 자연스러운 미소를 찍는 건 난이도가 높네.”
겉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카메라를 든 선생님은 부드럽게 웃는다.
현재 우리는 백귀야행에 있는 강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언젠가 여행을 가자고 약속한 뒤로 선생님은 곧장 카메라를 구입해 내게 장난감을 자랑하는 아이처럼 사진을 보내왔다.
DSLR이라는 물건일 것이다.
묵직한 자태에 나도 모르게 보낸 ‘얼마나 하나요?’라는 현실적인 질문이 담긴 메시지에는 아직도 답장이 없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어차피 살 거면 타협하지 않는다’라고 하셨으니, 분명 엄청나게 비싼 카메라를 사셨을 게 뻔하다.
“미소를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의식하게 되면 아무래도 어려워서요…….”
“괜찮아 하나코.
시간은 아주 많으니까 천천히 하나코의 표정을 수집해 나갈 거야.
자 봐봐, 찍고 싶은 하나코 리스트도 제대로 만들어 뒀다고.”
그렇게 말하며 보여준 전자 메모장에는
‘부끄러워하는 하나코’,
‘음식을 맛있게 먹는 하나코’,
‘셔츠로 가리지 않은 수영복 차림의 하나코’ 등등 다양한 나를 찍는 것이 목표인 모양이었다.
무슨 수집 게임도 아니고 싶으면서도,
메모장을 조금 더 보니 지명이나 장소가 지정된 것들도 있어서 선생님 나름대로 여행에 대한 비전이 꽤 구체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런 걸 보여주시면 더 움직이기 힘들어지잖아요!”
“아하하, 미안 미안.
하지만 이 리스트에 있는 모든 하나코를 사진에 담는 게 지금 내 꿈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다양한 하나코를 보여줬으면 좋겠어.”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선생님은 말한다.
“…….”
“오, 셔터 찬스! 부끄러워하는 하나코 겟!”
선생님의 말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 몰려와 뒷짐을 지고 얼굴을 붉힌 찰나,
찰칵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고 나의 다음 표정은 멍청하게 굳은 얼굴로 확정되었다.
연달아 다시 셔터 소리가 들리자 몸 둘 바를 모를 부끄러움이 몸 안에서 난반사되어 열이 날 정도로 얼굴이 빨개진 것을 자각했다.
“정말……!”
갈 곳 없는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의도도 담아, 나는 팔짱을 끼고 삐친 듯 선생님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선생님에게는 예쁜 내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이렇게 남들에게 잘 보여주지 않는 모습까지 들킨 데다 사진으로 남겨지니 부끄럽기 짝이 없다.
선생님은 다양한 표정과 모습의 나를 보며 ‘이게 좋은 거야’라고 변태 같은 소리를 하셨지만, 그 사진들은 절대로 저한테 보여주지 마세요.
그러시면 진짜 화낼 거예요.
“미안해, 하나코. 하지만 하나코가 너무 귀여워서 그만…….”
반성하는 척하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이 사람은.
내가 그런 꾸밈없는 솔직한 말에 약하다는 걸 알고 저지르는 만행일까.
이제는 부끄러움을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니까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거예요.
착각하게 만든다고도 하죠.
“…우후후, 어쩔 수 없네요.
그럼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백귀야행의 맛있는 디저트라도 사주시면 용서해 드릴게요.”
“물론입니다, 하나코 아가씨. 그럼 제 손을 잡으시죠.”
딱히 기분이 나빴던 것도 아니었기에 아무렇지 않게 가벼운 반격을 던졌지만, 눈치 빠른 선생님은 금세 기지를 발휘해 내 손을 잡았다.
새삼스럽지만 이건 데이트다.
그러니 이 시간을 즐겨야만 하고, 나와 선생님 모두 그것을 잘 이해하고 있기에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데이트의 짧은 휴식처였던 강변로를 떠나 우아한 거리 곳곳을 누비다, 우연히 인적이 드문 곳에서 고즈넉한 정취를 느끼며 서로 얼굴을 마주한다.
트리니티에도 D.U 지구에도 없는 백귀야행만의 독특한 거리 분위기는 데이트를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신선함을 선사했고, 즐거웠다.
백귀야행은 이름만 들어봤을 뿐인 미지의 장소나 다름없었기에 선생님이 말한 '여행'이란 이런 즐거움을 찾기 위한 것이었을까 생각하게 된다.
명물이라 불리는 삼색 경단을 먹으며 바라보는 이 거리는 비록 평범한 길가일지라도 풍류가 느껴졌고,
시선을 정면이 아닌 옆으로 돌릴 때마다 그곳에 선생님이 있다는 사실을 매번 처음인 것처럼 일깨워 주었다.
“후후후, 선생님?”
“응? 왜 그래, 하나코?”
“…그냥 한번 불러봤어요.”
낯선 곳에서 선생님과 단둘이—마치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겨진 것 같아 무척이나 포근한 기분이었다.
“그럼 선생님, 다음에 봐요.”
“응, 또 봐.”
저녁의 오렌지빛이 사라지고 하늘의 푸른 기운도 서서히 옅어져 가는 밤.
전철 안에서 간결하게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는 열차에서 내렸다.
선생님은 그대로 전철을 타고 D.U 지구 방면으로 향하고, 나는 이곳 트리니티에서 하차했다.
백귀야행에서 데이트를 만끽한 후 마지막 장소가 전철 안이었다는 점도 있어 오늘의 데이트는 담백하게 끝이 났다.
학생들이 놀러갔다 돌아오는 시간대이자 직장인들의 업무가 끝나는 시간대이기도 한 이 시간,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니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나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이것이 현실이라면, 방금까지의 데이트는 역시 꿈만 같은 순간이었던 셈이다.
이곳은 정말 변함이 없구나.
“…윽.”
오늘이라는 하루도 이미 종반에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하루의 절정을 꼽으라면 그것은 선생님과의 데이트가 아니다.
바로 지금부터다.
기숙사에 도착해 내 방으로 들어가 현관문 잠기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나는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절망했다.
—어째서?
이유는 간단하다.
“아아…아아아……!”
설령 이대로 선생님과 교제를 지속한다 해도 세계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오늘의 데이트를 돌이켜보면 일상을 잊게 해줄 만큼 신선하고 즐거운 날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보여준, 정보가 가득 적힌 메모장을 보고 나는 얼굴을 경련시킬 수밖에 없었다.
미래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공포스러운 일이지만, 반대로 너무 명확한 것 또한 두려운 법이다.
장래에 어디에 가겠다는 예정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다는 사실에 나는 공포를 느꼈다.
“어째서…어째서……!”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하지만 장래의 예정이 늘어날수록 죽을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사실이 내게는 어느새 공포로 다가왔다.
어릴 적부터 품어온 충동은 이제 신체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이런 '사람'이라는 괴물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죽을 수 없게 된다'라는 것이야말로 내게는 지옥이었다.
선생님이 미래의 계획을 세우면 세울수록, 그것을 저버리는 것에 미안함을 느껴 죽기가 힘들어진다.
…결국 변하지 않았다.
선생님과 교제하게 되어도 세계가 밝아지는 일은 없었고, 정신이 팔려 세상의 추악함을 보지 않아도 되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키보토스에서 가장 영예로운 자리에 앉았다 해도 내가 행복해지는 일은 없었다.
손에 넣은 최대급의 행복조차 내 인생의 마취제 역할을 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결국 내 인생은 이제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증거일 뿐이다.
역시 무리였다.
여전히 나는 죽고 싶고, 그렇다고 선생님과 육체관계를 맺는 것이 미래를 만드는 일로 이어진다면 그 또한 우스꽝스러운 것 같아서.
선생님과의 데이트라는, 유일하게 나를 현실에서 떼어놓아 주던 마취 기운이 다하고 정신이 돌아오면 나는 금세 죽고 싶어진다.
그리고 마침내—오늘은 마취가 듣고 있어야 할 데이트 도중조차 아주 잠깐 죽고 싶어졌다.
“…….”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죽고 싶다, 죽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생님과 교제하게 된 탓에 죽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나는 산지옥을 맛보게 되었다.
내 알량한 다정함이 심술을 부려 선생님에 대한 도리를 저버리지 못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나날이 정신이 불안정해진다.
여기서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윤리를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죽음의 충동과 선생님에 대한 도리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신세가 괴롭고 괴로워서, 오늘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선생님이 나를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된 그 고백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얼굴을 보고 죽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기에 그때의 내 행동은 필연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나는 그때 선생님을 만나지 말아야 했다.
선생님과 교제해도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답을 알아버렸다면, 애초에 내 인생에서 선생님과 만나는 것 자체가 불행이 아니었을까?
선생님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쓸데없는…기대도 하지 않았을 텐데.
아무런 미련 없이 죽을 수 있었을 텐데.
선생님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괴로움을 겪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
내 정신도 인생도 한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선생님과 만나는 것이 불행이라니, 결코 그럴 리가 없는데.
선생님과 만나서 나는 행복했다,
그것만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얻은 행복에 비례하듯 불행도 찾아왔고, 지금은 불행으로 천칭이 기울고 있다.
“누군가, 좀 도와줘…….”
<6>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간다고 생각하시나요?”
다음 날 깊은 밤, 희미한 빛을 내뿜는 랜턴을 사이에 두고 나와 사쿠라코 씨는 성당 한구석에 있었다.
“…또 어려운 질문을 하시는군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사쿠라코 씨에게 조금 미안함을 느껴 쓴웃음을 지었다.
“윤회전생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다시 다른 생물로 옮겨간다는 것이죠.
전생이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 것인데, 이건 어떤가요?”
“글쎄요, 흥미로운 사고방식이라 생각하고 그게 가장 일반적인 견해 아닐까요.
저 자신도 긍정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렇군요. 참고로 사쿠라코 씨에게 전생이 있다면 무엇이었을 것 같나요?”
“네, 저, 저 말인가요? 그, 글쎄요…비둘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네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조심스럽게 말하는 사쿠라코 씨의 모습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사쿠라코 씨는 선생님 다음으로 맑은 사람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또한 선생님과의 데이트 비슷하게 나를 현실에서 떼어놓아 준다.
“비둘기인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 그건…그…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요!”
얼굴을 붉히며 눈에 띄게 당황하는 사쿠라코 씨를 보며 마음이 치유되는 나.
선생님과 만난 것이 행복이라면, 사쿠라코 씨와 만난 것 또한 하나의 행복이다.
“그럼 사람은 죽으면 깨끗이 사라져 버린다는 생각은 어떻게 보시나요?”
“그건…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후 세계는 존재합니다.”
“…하지만 죽으면 사람은 그저 살덩어리일 뿐이잖아요?”
“시스터후드에는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이 명확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죽으면 천국, 혹은 지옥으로 향하게 되죠.
선한 사람은 천국으로 인도되고, 악한 사람은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선한 존재가 되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군요.”
물어봐 놓고 실례되는 말이지만, 사쿠라코 씨가 이런 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다만 내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대답이 아니다.
“즉, 죽음은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건가요?”
생물로서 끝을 맞이한다.
하지만 윤회전생이든 사쿠라코 씨의 해석이든, 죽음은 시작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천국으로 인도될 가능성에 걸어보는 것도 나쁜 선택지는 아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거라 봅니다.
죽음이 슬프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음이야말로 구원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사쿠라코 씨에게는 어느 쪽인가요? 죽음은 좋은 건가요? 나쁜 건가요?”
“아직 하고 싶은 일도 있기에 죽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내 질문에 사쿠라코 씨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하고 싶은 일…인가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그렇군요, 남에게 함부로 말할 만한 내용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코 씨에게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말을 고르던 사쿠라코 씨는 이윽고 각오를 다진 듯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빛이 어린 눈동자에 서린 온화한 미소는 무언가를 품고 있음을 웅변하고 있었다.
대체 사쿠라코 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저는 선생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
“언제 어느 때든 제가 좋아하는 것, 가고 싶은 장소, 이상적인 미래, 혹은 취미 등을 상상하면 그곳에는 반드시 선생님이 계셨습니다.
좋아하는 것—즉 좋아하는 사람은 선생님이고,
가고 싶은 장소는 선생님이 계신 곳이 되며,
이상적인 미래는 선생님을 언제든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고,
취미는 선생님을 생각하는 것이 되어버려서 제게 선생님이란 전부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기에 선생님께 이 마음을 전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습니다.”
“——”
얼마나 진실된 고백인가.
현재 진행형으로 선생님과 교제하는 내게, 마음속에 품은 연정을 선생님께 전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는가.
사쿠라코 씨의 말을 다 듣자마자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시점에서는 모든 학생의 사랑은 무로 돌아갈 것이다.
행복해지지 못하는 내가 헛되이 선생님의 마음을 끌고 있기에 사쿠라코 씨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부끄럽게도 저는 제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압적인 면이 있어서
선생님에 대한 호의를 자각하면 할수록 선생님을 정복…아니 독점…그러니까, 저만의 선생님이 되어주었으면 하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 마음을 멈추려 해도 의지대로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지금도 느리지만 확실하게 선생님을 향한 마음은 계속 부풀어 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젠가 폭발할 때가 오지 않을까…저는 두렵습니다.”
“…….”
운명은 나를 싫어하고 있다고 이제야 확신했다.
왜 하필이면 그걸 나한테 털어놓느냐고 하고 싶었지만—이는 사쿠라코 씨와 친밀한 관계가 되어 신뢰받은 끝에 나온 결과였다.
오히려 내가 아니었다면 사쿠라코 씨도 허심탄회하게 심경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좋지 않았다.
사쿠라코 씨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사쿠라코 씨가 말한 '폭발의 때'가 얼마나 무서운 일일지 짐작이 갔다.
나의 경우 죽음의 각오가 먼저 찾아왔기에 선생님에 대한 마음도 옅어져 아무 일도 없었지만,
사쿠라코 씨의 경우 그 끝에 있는 것은 그냥 폭발뿐이다.
사쿠라코 씨의 부풀어 오른 마음을 풍선에 비유한다면, 공기가 너무 들어가 터져버리거나 혹은 바늘에라도 찔려 폭발해 쪼그라들거나—
어느 쪽이든 결말이 처참할 것임은 명백하다.
사쿠라코 씨에게도 자신을 구성하는 데 있어 '선생님'이라는 존재의 비중은 상당히 클 것이다.
'그것'이 사라졌을 때,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렇게 하나코 씨에게 말씀드리고 나니 각오가 섰습니다.”
“……?”
“하나코 씨, 저 내일 선생님께 고백하려고 합니다.”
현기증이 났다.
사쿠라코 씨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하고 싶지 않아서 사고가 정지했다.
“저도 이제 3학년이고, 내년이면 이 학교를 떠나게 되겠죠.
그러니 무언가를 시작하거나, 혹은 무엇을 마무리 짓는 분기점으로서는 올해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말씀드린 선생님에 대한 마음도 예외가 아닙니다.
언제까지나 도망치고 있을 수만은 없으니까요.
이 사랑은 분명 이루어질 것…그렇게 믿고 저는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사쿠라코 씨의 말을 듣고 마음이 툭 하고 꺾이는 것을 자각했다.
지금까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유지해 오던 내 마음은 이제 완벽하게 꺾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쿠라코 씨가 나아갈 앞길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구덩이일 것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속에서 용기 있는 한 걸음을 내디뎠다—하지만 그 한 걸음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과 동의어다.
빌딩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다.
이를 내다보고 있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사쿠라코 씨의 앞날에 있을 "최종장"이라 할 수 있는 결말을 나는 알고 있다.
“…윽.”
이 대화가 마지막 분기점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어도 행복해지지 못하고, 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 절망할 미래를 예견하며 나는—
“…응원할게요. 사쿠라코 씨의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저도 기도할게요.”
—그런 미래를 보고 싶지 않다며 눈을 돌려버렸다.
앞으로 수척해져 갈 사쿠라코 씨를 보게 된다면 나는 정말 어떻게 되어버릴 것만 같다.
그러니까 끝내는 거다.
나를, 먼저 끝내는 거예요.
순간적인 결심이었지만 어차피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었다.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은 나는 홀로 헛된 기도를, 손을 맞잡고 수신인 없이 올렸다.
『언제나 노력하시는 선생님께 드리는 포상이에요♡』
메시지를 보낼 준비를 하고 나는 카메라를 켰다.
비치는 것은 속옷을 풀어 헤쳐 거의 나신이 된 나의 모습.
부감 시점으로 아래쪽까지 잘 보이는 구도에 살짝 미소 짓고 있는 내가 있다.
—어차피 죽을 거니까.
어차피 이 뒤에 죽을 테니, 선생님께 내 치부를 보여준들 이제 와서 아무 상관 없었다.
“…….”
공허한 셔터음이 들리고 나는 더더욱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 이르러 평소의 나—말하자면 나의 본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것이 우스워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초 계획대로 아비도스 사막에서 약을 먹고 죽기로 한다.
그리고 그것은 즉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사라져 갈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마지막만큼은 선생님께 내 몸을 보여줘도 괜찮겠지.
선생님을 위해 이 몸을 쓰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미안하지만, 슬프게도 절망이 선생님의 존재를 넘어서 버렸다.
“…결국 카메라, 쓸모없게 되어버렸네요.”
선생님이 카메라를 사고 싶다고 말했을 때부터 왠지 이렇게 될 것 같았다.
카메라를 사도 내가 사라질 테니 낭비가 될 것이라고.
그러니 이것이 최소한의 속죄가 되기를 믿으며 사진을 첨부한다.
선생님이 찍고 싶은 나 리스트에는 '야한 나'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선생님의 사진 리스트에 야한 나를 넣어주는 거예요.
나의 쓸데없는 몸이 부디 선생님께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사진과 메시지를 전송한다.
“…….”
답장은 오지 않는다.
—아니, 왔는지 알 수 없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겠지.
보내는 것과 동시에 전원을 끄고 침대로 던져버렸으니까 선생님이 무언가를 보내도 내게는 닿지 않는다.
“…….”
연명 치료의 한계점이자 이야기의 에필로그였다.
지금까지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느냐고 묻는다면 나조차 잘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과의 나날은 안락사 전에 꾸는 꿈 같은, 혹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며 보는 주마등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적어도 내게는 엄청난 사치였고, 그것을 즐기며 죽는 마지막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역시 우리, 시작하지 말아야 했어요.
마지막 말이 이것인 내 인생은 역시나 변변치 못한 것이었다.
<7>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방법이 있을까요?”
어느 날 밤, 성당 안에 있는 긴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내가 말했다.
“저기, 사쿠라코 님? 괜찮으신가요?”
“괘, 괜찮냐고요?”
과거 "그녀"와 이야기하던 때를 떠올린다.
그때 나는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받고 지극히 진지하게 내 생각을 밝혔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마리처럼 걱정해 주는 것이 정답이었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시면 부디 상담해 주세요. 저라도 괜찮다면 힘이 되어 드릴게요.”
마리의 그 말에 마음이 꺾이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 나도 마리처럼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결말은 달랐을까.
과거의 내 언행을 되새기며 후회했다.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하나코 씨는 내게 그런 메시지를 남기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하고 『즐겁게 다녀오세요』라고 답하며 하나코 씨의 여행이 좋은 여행이 되기를 순수하게 빌었지만,
하나코 씨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그 메시지가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왜 갑자기 여행을 떠난다는 행동을 했는지도 불명.
보충수업부 여러분이나 티파티의 세이아 씨가 하나코 씨와 관계가 깊기에 수색 중이지만 결과는 좋지 않다.
휴대전화를 방에 둔 채 지갑도 신분증도 챙기지 않고 하나코 씨가 어디론가 가버렸기에 발자취를 잡을 수도 없어 모두 곤란해하고 있었다.
“…….”
하나코 씨의 행방을 걱정하는 것은 옆에 있는 마리도 마찬가지였지만, 정작 나는 실의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럴 경황이 아니었다.
“아니요, 오해할 만한 말투였네요. 그냥 순수하게 궁금했을 뿐이에요.”
본심을 숨기기 위해 꾸며낸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 죽으려고 생각하고 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선생님께 차인 것이다.
그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갔던 나였지만 그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축복 따위가 아니었다.
내게 전부나 다름없었던 선생님께 차인다는 의미—그것은 내게 있어 모든 것을 잃는다는 것과 같았다.
내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던 선생님이 사라져 버렸을 때 마음에 뻥 뚫린 구멍만 남았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끝없는 절망이 내게로 찾아왔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까.
내 인생의 취미가, 일상이, 장래가 사라져 버렸다.
일이 마냥 잘 풀릴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거절에 대해서도 생각해 두지 않았기에 마음의 준비 따위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지독한 아픔과 고통, 잃어버린 인생의 목적, 꿈이라 할 수 있었던 이상의 소멸.
“…….”
두 번째는 하나코 씨의 행방불명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번째 이유만으로는 죽음을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한번 차였다고 해도 포기하지 않고 선생님 곁에 머문다는 미래 또한 내 안에는 분명히 있었다.
다만, 나는 깨달아 버린 것이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방법이 있을까요?』
이것을 누군가에게 묻는 정신 상태가 어떤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코 씨와의 그 대화—.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방법을 묻는 사람의 정체가 죽음의 충동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때의 하나코 씨는 이미 죽으려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 질문을 던진 끝에 『여행을 떠납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행방불명이 된다—
그것은 결국 하나코 씨는 이미 이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
선생님께 차이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타계했다—
그것은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이유였고,
선생님께 차여 인생의 목적을 잃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내가 하나코 씨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자책감이 더욱 나를 파고들었다.
—아아, 하나코 씨도 이런 기분이었군요.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며 죽고 싶지는 않다.
현실의 나는 그것으로 끝이라 해도, 그렇게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쉽게 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
타고난 본성일까, 아니면 자라온 환경의 영향일까.
나는 조금—너무 다정한 모양이었다.
“괜찮다면 마리의 의견을 들려주지 않을래요?
왜, 평소에 하던 고민 상담이라 생각하고 부탁해요.”
“…네.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죽는 방법이란 건…참 어렵네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죽음이라는 건 어떻게든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말씀은?”
“어떤 방식으로 죽든 그 장소 주변 분들에게 폐가 되고, 그렇다고 사람이 없는 곳에서 죽는다 해도 그 땅 주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니까요.
단 한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죽음이라니…….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기적이 일어나서 존재 자체가 사라져 버리지 않는 한 그런 건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 죽든 가족이나 친구들에게는 정신적인 면에서 폐를 끼치게 될 테니까요.”
그 대답은 기대했던 대답이기도 했고, 기대하지 않았던 대답이기도 했다.
마리의 말을 듣고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다정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달하게 되는 그 결론에 나는—
마리에게, 하필이면 이 대화에 어울린 마리에게 [동정]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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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피엔딩 아님? 왜 피폐엔딩인데 앆!!!!!!
태그나 제목에 피폐추가해줘...
웬만하면 달아주는데 드리프트류는 그럼 스포가 되어버리는
@고관위 아 그것도 그런가...
와 심리묘사 되게 잘됐다… 번역 고맙고 나중에 원문으로도 읽어봐야겠네
이제 마리가 히나타한테 상담받고 히나타는 다른 수녀에게 상담받고...
트리니티 이 미친 독사굴
정병하나코 묘사 너무 잘했네 변해버린 사쿠라코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