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콘비프 스튜 / 공백 제외 4203자
눈이 새하얗게 세상을 덧칠하고 있었다.
숨을 내쉬자 길게 하얀 그림이 그려졌다. 은발의 소녀는 흘러내리는 담요를 붙잡으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스코프에 눈을 대고 다시 사주를 경계했다.
소녀가 타고 있는 노란색 트럭은 한 건물 앞에 멈춰 있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이지만 간판이 남아있어 원래 어떤 건물이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동행은 간판을 보자마자 반드시 그 안을 확인해야겠다고 말했다. 거기에는 소녀도 동의했다. 어차피 남는 것이 시간이었고 저 안에서 뭔가를 건지기라도 하면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너진 잔해로 입구가 막혀 있어 차가 들어갈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한 바퀴 돌아 간신히 찾아낸 입구도 너무 좁았다. 사람 한 명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금방 돌아올게.”
그래서 동행은 혼자 어두운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소녀는 바깥에 남겨졌다.
평소라면 문제없었을 것이다. 겨울이었지만 추위에는 꽤나 익숙해진 상태였으니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첫눈이 내렸다.
그것도 아주 많이.
머리와 어깨에 점차 소복하게 눈이 쌓여갔다. 체온에 눈이 녹아 옷이 점점 축축해졌다. 들고 있는 총도 평소보다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장갑을 끼고 있는데도 총을 잡은 그대로 얼어버릴 것만 같았다.
소녀는 흘깃 입구를 바라봤지만 아직 동행은 나올 기미가 없었다.
이대로 영영 나오지 않아 여기서 눈사람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소녀는 후후 웃었다. 그것도 그것대로 재밌는 결말이었다. 그 수많은 위기를 넘어서 마주한 것이 눈사람이라니.
진동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방금까지 짓던 미소가 사라졌다. 소녀는 긴장한 얼굴로 자세히 건너편을 바라봤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로 새하얀 눈이 계속 쌓이고 있었다. 뭔가가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찍혔을 것이다.
그걸 유의하며 자세히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청각에 감각을 집중했다. 다시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바람소리뿐이었다.
소녀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잠시 총을 내리고 장갑을 벗었다. 차갑게 굳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너무 피로한 모양이었다. 당연한 일이다. 쉴 장소를 찾지 못해 며칠째 차에서만 지내고 있었다. 식량도 거의 떨어져 제대로 먹은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씻은 건 더 오래였다.
그래서 동행이 ‘카이저 마트’라는 간판을 보고 눈이 돌아가 안으로 진입을….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쳐 소녀는 급하게 몸을 돌렸다. 마트의 입구는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고 아주 조용했다.
동행이 들어간 지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혹시 안쪽에 매복이 있었던 건 아닐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여기는 온갖 식료품과 물품이 모여 있었던 ‘마트’였다. 당연히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드디어 뭔가를 발견했다는 사실에 기뻐해 그것을 놓쳤다.
만약 안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래서 동행이 습격을 당해 쓰러져 있는 거라면….
발소리가 났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총구를 입구에 겨누었다. 불안감에 총구가 흔들렸다.
“이것 봐! 좋은 걸 건졌…응? 왜 그래? 하루나.”
두터운 외투에 털모자를 쓰고 있는 소녀가 통조림을 흔들면서 나오다 멈칫했다. 아래쪽으로 휜 두 개의 뿔이 인상적인 소녀였다.
하루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총을 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후우카 씨.”
“그래? 표정이 별로 안 좋은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그렇죠. 추워서 죽을 것 같아요.”
“아, 확실히. 언제 이렇게 많이 왔데?”
후우카가 손바닥을 펼치고 눈송이를 바라봤다. 두꺼운 함박눈이다. 잘 녹지 않아 도로를 빙판길로 만드는 운전자의 적이다.
“후우카 씨가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서요. 그래서 뭘 찾으신 건가요?”
하루나가 물었다.
“아, 이것 봐. 하루나. 콘비프야. 오랜만에 고기를 먹을 수 있겠어.”
후우카가 한 손에 들고 있는 통조림을 흔들었다. 트리니티의 문양과 함께 콘비프라고 큼지막하게 써있었다.
“정말 좋은데요?”
하루나가 반색하며 말했다. 지난 며칠간 먹었던 건 전부 비스킷 형식의 전투식량 뿐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네. 그럼 우선 눈을 피할 장소를 찾아야겠군요.”
“아, 그것도 걱정하지마. 안쪽에서 열 수 있는 문을 찾았어. 우리가 벽인줄 알았던 곳이 문이더라고. 혹시 아까 문 열리는 소리 못 들었어?”
진동음이 그 소리였던 모양이다.
“그 말은….”
후우카가 웃으며 운전석에 올라탔다.
“오늘은 맛있는 걸 먹고 편하게 잘 수 있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추워서 그런지 잘 걸리지 않았지만 곧 엔진음이 들렸다. 후우카는 천천히 기어를 넣고 차를 움직였다.
눈이 쌓인 길을 천천히 달려 오른쪽으로 코너를 돌자 아까는 없었던 입구가 있었다. 본래 물건을 받던 하역장인 듯했다. 앞에는 잔해들이 쌓여 있었지만 문이 열리면서 밀려난 건지 차가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생겨 있었다. 후우카는 그 안으로 천천히 운전해 들어갔다.
내부는 어두웠지만 입구 앞에는 램프가 다섯 개 놓여 있어서 꽤나 밝았다. 후우카가 돌아다니면서 찾은 램프였다. 문이 열리는 걸 보면 전등도 켜질 것 같았지만 스위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차를 그 옆에 주차하고 시동을 껐다. 그리고 방금 들어온 입구를 닫았다.
바람소리가 멈췄다.
고작 그 뿐이었는데도 하루나는 포근한 느낌을 받았다.
“좀만 기다려. 바로 요리해줄게.”
후우카 역시도 제대로 요리하는 게 오랜만이라 어딘가 즐거워 보였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재료도 도구도 부족해서 제대로 된 요리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비스킷을 그냥 꺼내 먹을 때와는 표정 자체가 달랐다.
캠핑용 미니 스토브 위에 반합을 올렸다. 고이 고이 모셔왔던 당근과 양파, 감자를 꺼냈다. 마지막 남은 채소였다. 상태를 확인하니 다행히도 아직 괜찮았다. 빨리 익을 수 있도록 잘게 자른 후 반합에 넣었다.
다음은 주인공인 콘비프였다. 통조림을 열자 짭짤한 냄새가 올라왔다. 후우카는 그 냄새를 한 번 음미하고는 역시 잘게 썰어 빈합에 넣었다. 그 다음 스토브의 불을 켜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저었다.
스튜 냄새가 퍼졌다.
“하루나. 거기 비스킷 하나만 꺼내줘.”
“예. 여기 있어요.”
이미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빠르게 비스킷이 건네졌다. 하루나 역시 오랜만의 요리인지라 굉장히 기대하는 표정이었다.
비스킷을 으깨서 스튜에 넣었다. 걸쭉해진 스튜에 풍미가 더해졌다. 물을 다시 조금씩 붓고 늘어붙지 않도록 열심히 저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콘비프 스튜 자체가 빠르게 요리해 먹기 위한 음식이었으니까.
“다 됐어. 잠시만.”
스토브의 불을 끄고 후우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트럭으로 다가가 하루나가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하루나는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내려와 바닥에 앉았다. 곧 후우카가 숟가락을 건넸다.
하루나는 감사인사를 전하고 조심스레 스튜 한 숟가락을 떴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고기와 감자가 올라와 있다. 하루나는 호호 식히며 입 안에 넣었다.
후우카는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봤다.
곧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정말 맛있네요.”
그제서야 후우카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 다행이다. 넌 입맛이 까다로우니까 걱정했거든.”
“후우카 씨. 저도 상황에 따라 기대하는 바가 다르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인다이닝급 맛을 기대하지는 않아요.”
“흐음, 그래? 네 기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충분하다?”
하루나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놀리지 말아주세요. 후우카 씨의 요리는 저에게 언제나 최고의 미식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매번 급식실을 폭파해?”
후우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후후. 그 역시도 제가 후우카 씨의 요리를 좋아하기 때문이죠. 게헨나의 급식실은 후우카 씨에겐 족쇄였어요. 항상 혼자서 수백명 분의 음식을 만드니 제실력을 발휘하지 못하셨잖아요. 상황에 갇힌 셰프만큼 보기 힘든 것이 없답니다.”
“…그래서 날 구하려고 급식실을 폭파하고 납치했다?”
“그런 셈이죠.”
하루나는 당당하게 말했다. 후우카는 할 말을 잃었다는 듯 입을 살짝 벌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사고방식이 다른 사람이다. 말을 꺼낸 내가 잘못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후우카도 숟가락을 움직였다. 호호 분 다음 입에 넣고 씹는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감이다. 과거의 폭파와 납치조차도 이제는 그립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루나는 그런 후우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은은한 미소가 점차 옅어졌다.
“후우카 씨.”
“응?”
“저를 두고 가셔도 됩니다.”
숟가락이 멈췄다. 후우카가 고개를 들어 하루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하루나는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다리를 다친 지금의 저는 그저 짐짝이니까요. 후우카 씨가 이렇게 돌아다니며 식량을 구하는 와중에도 차에 앉아 있는 일 밖에 할 수가 없잖아요.”
“차하고 짐을 지키는 거지. 중요한 일이야.”
“말이 지키는 거죠. 누군가 폭탄이라도 던지면 아무것도 못할 거예요.”
“하루나.”
후우카는 숟가락을 내려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환자를 두고 가는 쓰레기로 만드려는 거야?”
“살 수 있는 사람은 살아야죠. 저는 그렇게까지 후우카 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이미 옛날에 많이 끼쳤잖아요?”
하루나는 후후 하고 웃었다. 즐겁지는 않은 웃음소리였다.
“옛날에 폐를 끼쳤다는 건 알고 있었구나.”
“옛날엔 몰랐죠. 요즘 후우카 씨와 다니고 나서야 그때 제가 조금은 심했구나, 하고 깨달았을 뿐이에요.”
“장족의 발전이네.”
후우카는 수통을 열고 물을 조금 마셨다. 그리고 숟가락을 들어 다시 우물우물 스튜를 먹었다.
“하루나. 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건 사실이야. 굳이 따지면 싫어하는 쪽에 가깝겠지만 그래도 미운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죽일 정도로 싫어하진 않았어. 애증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려나? 아무튼 그래. 옛날에 네가 날 얼마나 납치하고 괴롭혔든 지금은 상관없어. 난 널 버리고 가지 않아.”
반합에 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이제 우리 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그런 말 하지마.”
하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숟가락을 움직여 반합을 비웠다.
후우카는 다 먹은 식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세제도 물도 없었지만 눈은 많았다. 그래서 가장 윗면의 깨끗한 눈으로 눈덩이를 만들어 식기를 닦았다. 반짝거리지는 않아도 다시 쓸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다시 안으로 들어오니 하루나는 차체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후우카는 문을 닫고 돌아와 식기를 차에 실었다. 그리고 하루나에 뺨을 살짝 때려 깨웠다.
“일어나. 찬 바닥에서 자면 입 돌아가.”
“후후. 트럭의 짐칸도 차갑기는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래도 모포가 깔려 있잖아. 자, 어서.”
억지로 일으키자 하루나는 저항하지 않고 몸을 맡겼다. 내려왔을 때와 반대로 힘겹게 올라갔다. 차체에 쌓인 눈을 적당히 치우고 짐도 한쪽으로 치워 공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배낭을 배게 삼아 하루나는 누웠다.
후우카는 바닥의 램프를 다 끄고 하나만 든 채 짐칸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하루나의 옆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담요를 덮고 램프의 불을 껐다.
“안녕히 주무세요, 후우카 씨.”
하루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자, 하루나.”
후우카가 웅얼거렸다.
오랜만의 포식. 오랜만의 바람 없는 잠자리였다.
두 사람은 곧 꿈나라로 떠나갔다.
불 하나 없지만 따뜻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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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종말여행을 보고 감명을 받아 끄적인 글입니다
이번에는 따로 일러스트는 보내드리지 않습니다
즐거운 여행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 14
명작이지 소종여
어어 원작결말따라가지마라
'불 하나 없는 따듯한 밤' 이거 너무 좋다 앞으로 펼쳐질 어두운 세상에 서로 의지한다는 의미도 숨겨진 것 같고
솔직히 소종여랑 블아랑 콜라보해도 잘어울릴거같긴 한데
선생이랑 다른 멤버들은 다 죽은 건가...? 원작은 모르지만 이런 분위기 아주 좋아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