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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시, 콘비프 스튜 / 공백 제외 7229자

어느 순간부터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내렸다. 부슬부슬 쌓이지도 않는 작은 눈송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거세졌다. 가루눈을 넘어 함박눈이 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니 설국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하루나는 길게 숨을 내쉬고 걸음을 멈추었다.

하얀 연기가 희미한 그림을 그렸다.

몸을 돌리고 배낭을 뒤적거렸다. 트럭을 타고 다닐 때 짐칸을 덮었던 작은 방수포가 있을 것이다. 후우카가 그런 걸 왜 챙기냐고 물었을 때 분명 어딘가 필요한 일이 있을 거라며 하루나가 억지로 배낭 바닥에 깔았던 기억이 있다.

방수포를 꺼내고 수레를 확인하자 그 잠깐 사이에 이미 눈이 좀 쌓였다.

모포를 덮은 후우카가 조금 하얘졌다.

새근새근. 그러나 가끔 힘겨운 소리가 섞였다.

하루나가 손으로 눈을 털어내는데도 후우카는 눈을 뜨지 않았다. 수레 위에 방수포를 길게 펼쳐 얹은 다음 하루나는 다시 수레를 끌었다.

후우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겉으로 드러난 상처는 붕대를 감은 다리뿐이었지만 몸 전체가 쇠약해진 것 같았다.

이미 몇 달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하며 천천히 약해지던 몸이었다. 거기에 트럭을 버린 이후 행군의 피로가 덧씌워졌고 갑작스러운 총알세례가 마무리를 지었다.

심지어 겨울은 거의 끝자락에 이르렀음에도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날은 점차 추워지더니 눈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후우카는 너덜너덜해진 야상과 모포 한 겹으로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괜찮다는 듯 약간의 농담을 던지기도 했지만 시간을 지날수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하루나는 생각했다.

심하지 않다고.

키보토스의 학생은 총알 좀 맞았다고 죽지 않는다. 분명 샬레에 가서 잘 먹고 푹 쉬기만 한다면 금방 나을 수 있을 것이다.

후우카가 지금 저렇게 아픈 것은 덜컹거리는 수레에 타고 밥이라고는 물에 불린 건빵밖에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분명 전부 괜찮아질 것이다.

하루나는 고개를 들었다. 몰아치는 눈보라 사이로 그들이 사랑했던 한 어른의 건물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렇게 멀기만 했던 샬레도 이제 코앞이었다.

가까이 걸어갈수록 하루나는 익숙한 건물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하철 역에서 내려 샬레까지 걸어가는 동안 봤던 식당, 빵집, 편의점, 오락실, 옷가게 등등. 그 모든 상점들이 과거의 기억을 품고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저곳은 선생님과 같이 갔었던 식당이군요. 돌이켜보면 맛은 썩 훌륭하지 않았습니다만 선생님이 좋아하시니 이 정도면 봐준다는 생각을 했었죠.

저곳은 꽤 괜찮은 소보로 빵을 팔았죠. 떨어뜨리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크기라며 준코 씨가 참 좋아하는 빵이었는데요.

저 아이스크림 가게도 기억이 나네요. 이즈미 씨가 온갖 아이스크림을 섞어 먹어 점원이 경악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아. 저 초밥집. 무슨 자신감인지 무한리필을 내걸었다가 아카리 씨에게 제발 나가달라며 애걸복걸했었죠. 그런데도 망하지 않았었군요.

그리고 저곳은 또....

그런 생각을 할수록 눈보라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는 것 같았다.

떨어진 간판은 어느새 제자리에 붙어 있었다. 부서진 유리문은 고쳐져 사람을 맞이하는 듯 활짝 열려 있다.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대화 소리가 들리고 코끝으로는 맛있는 빵냄새가 솔솔 풍겼다.

고개를 돌리니 또다시 떨어뜨릴까 조마조마하게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소녀가 있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 위에 초록색 와사비를 뿌리는 소녀가 있었다.

이미 아이스크림 두 개를 해치우고 세 개째를 뜯는 소녀가 있었다.

그들은 행복하게 웃으면서 다음은 무엇을 먹으러갈까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 하루나에게 고개를 돌렸고 미소를 지었다.

하루나 역시 마주 미소지었다.

"그러고보니 트리니티에서 골든마구로를 전시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희귀한 어종을 전시목적으로만 두는 것은 아깝지요. 후우카 씨와 함께 트리니티로...."

"...안 가. 하루나."

눈을 깜빡이니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마치 모든 걸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처럼 새하얀 캔버스만이 남아 있다.

하루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환상이란 걸 알면서도 그저 다시 한번 그들과 대화하고 싶었을 뿐이니까.

"깨셨나요, 후우카 씨? 몸은 좀 어떠세요?"

"춥고 배고파."

"후후. 그건 언제나 그랬지요."

"그랬지."

후우카가 끙, 소리를 냈다. 그리고 손으로 툭 쳐 방수포 위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근데 지금 눈이 오고 있어?"

"예. 첫눈이 왔던 때처럼 쏟아지고 있답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샬레가 코앞이니까요."

"...넌 괜찮아?"

하루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미 팔다리에 감각이 없어진 지는 꽤 오래되었다. 언젠가부터 다리도 절뚝이지 않았다. 하루나는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위에서 실로 조종해 기계적으로 나아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무엇이 어떻든, 나아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전혀 괜찮은 목소리가 아닌데."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지적하는 건 예의가 아니에요. 후우카 씨."

"미안해."

"그러면 빨리 나아주세요. 그래야 저도 이 수레에서 벗어나지 않겠어요?"

"노력해볼게."

노력한다는 목소리에서도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 꺼져가는 불빛 같다고 하루나는 생각했다.

수레는 눈보라를 뚫고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점차 두텁게 쌓여 바퀴가 나아가는 것을 방해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감각이 무뎌졌다. 손이 얼어붙었고 다리는 나무 같았다. 그럼에도 하루나는 멈추지 않았다.

눈 앞에 샬레가 있었다.

남은 것은 이제 쭉 뻗은 직선대로.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로봇도 없었다.

하루나를 괴롭게 하는 건 날씨도 적도 아니라 더 이상 움직이지 않으려는 자신의 몸뿐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걸음.

마침내 수레가 멈췄다.

하루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 앞을 바라봤다.

정말로 샬레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진 세상에서 홀로 멀쩡히, 그리고 우뚝 서있었다.

하루나는 비틀거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가 힘겹게 유리문을 잡았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깨지지 않은 멀쩡한 유리문이다. 그러니까 역시 멀쩡하게 열릴 거라고 생각하며 당겼다.

하지만 열리지 않았다.

하루나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문을 바라보다가 그제서야 로비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유리문 안쪽은 온갖 철판이 바리케이트처럼 붙어 있었다.

하루나가 아무리 밀고 당겨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총을 들었지만 쏘지는 않았다. 철판이 있는 이상 유리문을 부숴도 의미는 없을 테니까.

"저기."

하루나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아무도 안 계신가요?"

감각이 없는 손으로 유리문을 두들겼다.

"정말로 아무도 없나요? 제발. 누군가 있다면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루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무너지려는 몸을 간신히 버텼다.

아직 모른다. 샬레는 높고 공간은 많았다. 너무 높이 있어서 정문에 있는 사람의 말이 들리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 다른 입구를 찾아서 들어가면...

"안에는 아무도 없어."

하루나는 순간 환청인 줄 알았다. 자신과 후우카 외의 목소리를 들어본지 너무 오래되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계속 그렇게 두들겨도 의미는 없어."

분명한 현실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하루나는 몸을 돌렸다. 후우카를 실은 수레의 옆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회색 머리의 소녀였다.

그 모습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하루나는 자기도 모르게 물었다.

"...안 추우세요?"

"응."

소녀는 대답했다. 그걸로 말은 끝이었다. 대신 무감정한 눈으로 하루나를 응시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사람의 눈이라고 하루나는 생각했다.

"안에 사람이 없는 걸 어떻게 아세요?"

"들어갔었거든."

"어떻게...?"

소녀는 말없이 손가락을 들어 위를 가리켰다. 하루나가 멍하게 현관을 벗어나 위를 바라보자 3층에 깨진 창문이 보였다.

"3층 창문을 깨고 들어가셨다는 건가요?"

"응."

"어떻게...?"

하루나가 바보 같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자 소녀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하루나를 바라봤다. 그런 것도 못하냐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줬다.

옆에 있는 나무를 잡고 올라가더니 점프해서 현관의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 다음은 아무렇지 않게 벽을 탄 다음 깨진 창문으로 들어갔다.

시연을 보인 뒤 다시 반대로 똑같지 내려와서는 참 쉽지 않냐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하루나는 코멘트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튼 그렇게 안에 들어갔다 왔는데 아무도 없다는 건가요?"

"응."

"저 위에 옥상까지 정말 단 한 명도? 그럼 저 바리케이트는 대체 뭐죠?"

손을 들어 문을 막고 있는 철판을 가리켰다. 소녀는 그걸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거짓된 성소가 내려왔을 때 몇몇 학생들이 샬레만은 지켜야 한다며 저 안에서 농성했어. 특히나 여우 가면을 쓴 학생의 열정이 대단했지. 가장 오랫동안 끈질기게 버텼고 결국 샬레가 무너지지 않게 버텨냈으니까."

"그렇다면...!"

"하지만 그 학생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어."

하루나는 입을 다물었다. 샬레를 바라봤고 소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내리더니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를 모를 방랑자 씨."

"응."

"저 수레에 제 일행이 타고 있어요. 혹시 그 분을 여기로 옮겨주실 수 있나요?"

소녀는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눈이 덮인 방수포를 벗기고 후우카를 안아 들어 샬레의 현관 앞에 내렸다.

후우카는 모포로 몸을 감싼 채 문에 등을 기댔다. 별 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수레에 누워 두 사람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 제 배낭도 꺼내주실 수 있을까요?"

하루나가 후우카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소녀는 역시 별말 없이 그렇게 해주었다.

배낭을 받은 후 하루나는 그 안에서 캠핑 스토브와 물, 그리고 콘비프 통조림을 꺼냈다.

"저희 밥이나 먹을까요, 후우카 씨?"

하루나가 물었다.

"...그래."

후우카는 힘없이 대답했다.

"아쉽네요. 콘비프는 나중에 봄이 되면 채소랑 같이 스튜를 끓여 먹으려고 했었는데요."

"채소가 필요해?"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소녀가 말했다.

"있으면 좋죠. 혹시 가지고 있으세요?"

"응. 당근과 양파, 감자가 있어.

하루나는 웃었다.

"완벽하네요. 혹시 같이 드시겠어요?"

소녀는 말없이 하루나를 보다가 몸을 돌렸다. 눈 사이로 사라졌다가 금세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당근 한 덩이, 감자 반 개, 양파 반 개와 본인 몫의 숟가락 그리고 작은 나이프가 들려 있었다. 소녀는 숟가락 빼고 나머지를 하루나에게 건넸다.

"필요할 것 같아서."

필요했다.

칼은 후우카의 배낭에 들어있었고 다른 식량들과 마찬가지로 회수하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하루나는 후우카가 했던 행동을 떠올리며 그대로 따라하려고 했다.

하지만 서툴렀다. 후우카처럼 야채를 깔끔하게 자를 수 없었다. 어딘가 울툴불퉁했고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특히나 양파를 썰 때가 힘들었다.

그래도 반합 가득 채소를 넣으니 기분이 좋았다.

콘비프 통조림을 열어 역시 반을 썰어 넣은 다음 조금씩 물을 부으며 숟가락으로 저었다.

따뜻한 스튜 냄새가 퍼졌다.

"끝났습니다. 후우카 씨는 비스킷을 더 넣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없으니까."

하루나가 웃으며 후우카에게 숟가락을 건넸다. 후우카는 힘겹게 숟가락을 받았다.

"그러고보니 네가 요리해준 건 처음인 것 같네."

"예전에 계란후라이 하지 않았던가요?"

"한다면서 계란은 엎고 밀가루포대를 터뜨렸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후우카는 천천히 스튜를 한입 떠먹었다. 먹는 표정은 조금 묘했다. 하지만 곧 희미하게 웃었다.

"이 정도면 합격점이라고 해줄게."

"영광입니다."

하루나도 한입 먹었다. 후우카와는 달리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음. 제 입장에선 합격점이 아닌데요. 좀 짜네요. 물 조절을 못 한 걸까요?"

"넌 네 음식에도 엄격하구나."

"자신에게 엄격야지 타인에게도 엄격할 수 있는 법이죠. 괜히 매번 후우카 씨를 납치한 줄 아세요?"

"하아. 그걸 알면 차라리 연습하지 그랬어?"

"후우카 씨가 있는데 어째서요?"

진심으로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

후우카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만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회색 소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소녀는 숟가락을 든 채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 같았다.

"저기, 먹어도 괜찮아."

"음, 정말 괜찮겠어?"

"그럼 네 채소도 들어갔잖아. 이 시기에는 꽤 귀한데."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왕이면 맛있게 먹는 게 좋으니까."

"동감입니다."

하루나가 동의했다.

세 사람은 그렇게 눈이 오는 풍경을 바라보며 반합을 비웠다.

후우카가 한숟가락 뜨면 다음은 하루나, 다음은 소녀, 그러면 다시 후우카.

그런 식으로 순서대로 먹다보니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금세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자신의 차례에서 비어버린 반합을 보며 하루나는 중얼거렸다.

"다 먹었네요."

"다 먹었네."

"방금 그게 마지막 식량이었어요."

"그렇겠지. 건빵과 에너지바를 넣어놨던 내 배낭은 터져버렸으니까."

"그랬죠. 총알세례에 방치되어서 건질 수 있는 것도 없었어요."

"어쩔 수 없지."

후우카가 몸을 웅크리며 중얼거렸다. 모포를 끌어당기며 차가운 유리문에 몸을 붙였다. 눈을 감더니 곧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하루나는 스토브에서 반합을 내리고 불을 켠 다음 후우카 쪽으로 붙였다. 고작 그 정도 불꽃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고나서 하루나는 소녀를 바라봤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무엇을?"

"저희를요."

소녀는 무심하게 하루나를 마주봤다.

"모르겠어."

"죽이지 않나요?"

"죽고 싶어?"

"아뇨. 죽고 싶지 않아요."

하루나가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저희에게 달린 게 아니겠죠."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방금까지 같이 식사를 하던 숟가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소녀는 곧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죽이지 않을 거야."

"배려인가요?"

"의미가 없어서."

"의미가 없다?"

하루나가 되물었다.

"이미 목적은 달성했어. 그 이상은 무의미한 일이야."

"목적이 뭐였죠?"

"키보토스의 멸망."

소녀는 저 멀리 무너진 건물들을 바라봤다. 여전히 눈은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 쏟아지고 있었다.

"학생 한둘이 남아있다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으니까."

"...한가지 물어도 괜찮을까요?"

"응."

"왜 키보토스를 멸망시킨거죠?"

하루나는 물었다. 소녀는 눈을 내리깔았다.

"난 그걸 위해서 태어났으니까."

그걸 말하는 소녀의 목소리는 어딘가 체념이 배어 있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응. 다른 이유는 없어."

"그렇군요."

하루나는 말했다.

"어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당신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키보토스의 학생들은 모두 그 고통을 겪어야 했던 거군요."

소녀는 움찔했다.

그 짧은 순간 소녀의 표정에 아주 많은 슬픔과 고통이 스쳐지나간 것 같았지만 정말 잠깐이었다. 소녀는 다시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젠 어떻게 하실 건가요?"

"떠날 거야."

"어디로요?"

"또 다른 키보토스로."

하루나는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키보토스가 또 있나요?"

"네가 내린 선택지의 수만큼 무수히 많은 키보토스가 있지. 학생들의 신비와 색채의 힘을 이용한다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어. 그걸 위해서 키보토스를 멸망시킨 건 아니지만."

평행세계.

하루나는 중얼거렸다.

"즉, 모든 키보토스를 멸망시키겠다는 거군요."

"응. 맞아."

"그걸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응."

소녀가 대답했다.

"그렇군요. 그럼 그런 당신에게 축복을 내려드리죠."

하루나가 말했다.

"당신이 영원히 고통받기를 바랍니다."

소녀는 물끄러미 하루나를 바라봤다.

"당신이 무슨 고통을 겪었고 어째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는 모릅니다. 선생님이었다면 분명 그 생각조차 이해하고 당신을 구원하려고 애썼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전 아닙니다. 당신에게 멸망당한 세상의 주민으로서 당신이 불행하기를 바랍니다."

그 말들에 감정은 담겨 있지 않았다.

하루나는 마치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던 때처럼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 유일하게 남은 그 목적 역시 실패하기를 바랍니다. 평행세계의 또다른 저와 후우카 씨가 당신이 넘어간 그 세계에서 당신의 실패에 일조하기를 바라겠습니다. 당신의 남은 그 유일한 목적마저 완전히 무너지기를. 그래서 당신이 태어난 의미를 잃어버리고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후에도 영원히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기를."

그리고 환한 미소.

"진심으로 바랍니다."

소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천천히 입가를 비틀었다.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거야."

나는 영원히 고통받을 운명이니까.

소녀는 떠나갔다.

새하얀 눈 위에 잠시 소녀의 발자국이 아로새겨졌지만 쉼 없이 내리는 눈은 곧 그조차도 지워버렸다.

죽음은 그렇게 발 없는 새처럼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하루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있었나요?"

"너무 심했어."

하루나가 후후 웃었다.

"저도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사람도 어떤 사정이 있었을 거야."

"예. 그랬겠지요. 그 얼굴은 도저히 세상을 멸망시킨 사람의 얼굴이라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피해자의 대표로서 뭔가 한마디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후우카가 피식 웃었다.

"우리가 대표야?"

"혹시 불만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희한테 찾아오라고 하죠."

그렇게 말하고 하루나는 살짝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던 후우카가 덮고 있던 모포자락을 펼쳤다.

"자."

"괜찮은데요."

"나도 추워서 그래. 둘이 붙어있어야 더 따뜻하지 않겠어?"

"그것도 그렇네요."

하루나는 모포 속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몸을 딱 붙이고 모포 하나를 덮은 채 멍하니 눈이 내리는 풍경을 바라봤다.

"하루나."

"네."

"우린 이제 식량이 없어."

"그렇죠."

"트럭도 없지."

"꽤 됐죠."

"스토브의 가스도 곧 떨어질 거야."

"별로 못 쓴 것 같은데 아쉽네요."

"이제 어떻게 하지?"

"기다려야죠."

"무엇을?"

"봄을요.

하루나가 말했다.

"이 끝눈이 지나면 봄이 찾아올 거예요. 그러면 저희도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겠죠. 그리고 한곳에 자리를 잡아 농사를 짓는 거예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채소를 수확하죠."

"그리고 유채나물 겉절이도 먹고?"

후우카가 웃으며 말했다.

"네. 물론이죠. 그걸 먹으려고 농사 짓는 건데요."

하루나 역시 마주 웃었다.

"좋네."

"좋죠."

"조금만 기다리면...."

말끝이 흐려졌다.

하루나가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후우카는 눈을 감고 있었다. 하루나는 괜히 모포를 후우카 쪽으로 좀더 당겼다.

"네. 조금만."

그렇게 중얼거리고 하루나도 눈을 감았다.

"그러니 잠시만 쉬었다가 일어나도록 하죠."

눈은 계속 내렸다.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아니면 누군가 계속해서 위에서 뿌리는 것처럼 쉴 새 없이 쏟아졌다.

그 아래 키보토스가 잠들어 있었다.

게헨나의 동상도, 트리니티의 고성당도, 밀레니엄의 마천루도, 백귀야행의 벚나무도, 산해경의 대나무도, 붉은겨울의 광장도, 발키리의 순찰차도, 하이랜더의 철도도 모두 그 아래서 새근거리며 숨소리를 냈다.

눈은 그 모든 세상을 덮는 이불이 되고 싶은 것처럼 내리고,

내리고,

내리고,

내리다가,

그쳤다.

그리고 봄이 왔다.

2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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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엔 봄이 왔지만 인생은 아직 겨울 한 가운데라고 느끼는 요즘입니다.

하지만 분명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간 봄이 오겠지요.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번만큼은 즐겁지만은 않은 여행이셨기를.

디시콘디시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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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5.03.31창작

소설) 키보토스종말여행 (完)

#소설
좋아요 0댓글 28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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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DC
조비작가
게시물 210개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
게시일2025.03.31 23:05
조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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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8

나
ㅇDC
ㅇㅇ125.03.31

않되~~~~

ㅇDC
ㅇㅇ225.03.31

오 내일 정주행해야겠당

ㅇDC
ㅇㅇ325.03.31
디시콘
ㅇDC
ㅇㅇ425.03.31
ㅇDC
ㅇㅇ525.03.31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ㅏ아ㅏㅏㅏㅏㅏㅏㅏㅏㅏ.....

ㅇDC
ㅇㅇ525.03.31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둘이서나마 살아가기를 바랬는데 결국은... 차기작도 기대하고 있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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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공황장애가 생긴 선생님#3
ㅇㅇㅇ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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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노아 「선생님은 왜 일부 학생에게만 성희롱을 하나요?」
ククビキリサイクル054
창작
소설)공황장애가 생긴 선생님#4
ㅇㅇㅇ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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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소설) "하루나는 왜 매번 후우카를 납치하는 거야?"
44평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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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2 선생님, 집콕한대
Ppakkiraa_alpha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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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핫산) #1 토할 정도로 무거운 학생들에게 유서를 들킨 선생님
Ppakkiraa_alpha0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