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니티를 이끄는 고귀한 영애들의 모임인 티파티.
그들이 머물며 다양한 업무를 처리하는 티파티 집무실의 발코니는 트리니티의 넓은 교정을 한 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아무나 발을 디딜 수 없는 그곳에, 평소 얼굴을 보기 힘든 트리니티의 거물들이 모였다.
“홍차는 입맛에 맞으신가요?”
“물론이죠. 매번 이렇게 대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사건으로 인해 사실상 혼자 티파티, 나아가 트리니티를 이끌고 있는 키리후지 나기사.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그녀는 홍차에 대해서만큼은 타협하는 법이 없었고, 그렇기에 홍차의 맛에 대해서는 지적할 바가 없다는 걸 시스터후드의 수녀원장 우타즈미 사쿠라코도 잘 알고 있었다.
“다행이네요. 아무튼… 공사다망하신 가운데에도 기꺼이 어려운 발걸음을 해 주신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어머. 별말씀을요. 저는 여러모로 한가하다구요?”
상냥한 목소리와 말투로 건네는 보충수업부의 문제아 우라와 하나코의 묵직한 한 마디.
“하필이면 오늘이 선생님의 보충수업이 예정된 날이지만, 그 외엔 특별한 일은 없었답니다.”
“...그건… 유감이네요.”
생글생글 웃고 있는 하나코에게서 살짝 고개를 돌리는 나기사.
에덴 조약에 얽힌 여러 사건 때문에 하나코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직도 나기사에게 악의를 품고 있는 건지 끊임없이 의심을 하게 만들지만, 사실 하나코는 그런 건 이미 신경쓰지 않은 지 오래다.
그저 티파티의 수장이 티파티의 집무실 발코니에서 당황해하는 모습이 재미있을 뿐.
“이렇게 여러분들을 모신 건, 이번에 도서부에서 발견한 중요한 내용을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도서부에서?”
“네. 부탁드립니다. 코제키 우이 씨.”
“아… 네. 알겠습니다.”
테이블 한켠에 얌전히 앉아 있던 작은 소녀, 오래된 책을 복원하고 찾아내는 데에는 트리니티뿐 아니라 키보토스 전체에서 감히 견줄 자가 없는 ‘고서관의 마술사’ 코제키 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을 연다.
“얼마 전에 고서를 복원하던 도중에… 흥미로운 내용을 발견했어요.”
“저희를 호출했다면 수녀원과 관련된 내용인가요?”
“아… 그건 아니에요. 과거 키보토스에 있었던 전승에 대한 이야기에요.”
키보토스의 과거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다. 그렇기에 우이가 발견한 키보토스의 전승이 무엇인지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과거 키보토스에는 ‘스승의 날’이라는 게 있었다고 해요.”
“...네?”
“스승의 날…?”
“그렇습니다. 우이 양이 고서를 복원하던 중 발견했고, 해당 내용은 티파티 내부에서 진실로 판단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요컨대, 키보토스에선 과거에 선생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표시하는 기념일이 있었다는 뜻이다.”
나기사의 옆에서 조용히 홍차를 들이키고 있던 자그마한 소녀이자 또 한 명의 티파티, 유리조노 세이아가 말을 거든다.
“아마 ‘스승의 날’이 사라진 건, 키보토스에 ‘스승’이 없어졌기 때문이겠지.”
대다수의 학생들이 원격 교재와 BD로 자율학습을 하고, 그나마 존재하는 소수의 선생도 로봇으로 대체된 시점에서 스승의 날이란 건 의미없는 날에 불과하다.
아무도 기념하지 않는 기념일이 달력에서 사라지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고, 기억하는 사람조차 남지 않아 고서에 간략히 기록된 게 전부인 기념일을 축하할 사람들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여러분도 아시듯, 트리니티는 샬레의 선생님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니, 이 키보토스 전체가 샬레의 선생님에게 구원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렇기에 우리는 ‘스승의 날’을, 융성했던 과거를 되새기며 한 번 더 반추하는 게 어떨지를 논하고 싶네.”
티파티의 호스트들의 제안에 잠시 침묵하는 참가자들.
“그럼 ‘스승의 날’에는 구체적으로 뭘 했던 건가요?”
사쿠라코의 질문에 우이가 조심스레 고서를 넘기며 말한다.
“그게… 고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꽃을 달아드리고 편지를 쓴다든지, 교실 문 위에 칠판지우개를 설치해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선생님의 머리에 떨어뜨린다든지, 케이크를 준비해서 선생님이 촛불을 끌 때 선생님의 얼굴에 바른다든지…”
“...그게 선생님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는 방식인가요?”
“꽃을 달아드리는 건 낭만적이네요. 후훗.”
단편적인 기록들만으로는 ‘스승의 날’에 어떤 행사를 진행했는지 현 시점에선 알 수 없다. 관련된 기록을 더 찾아낸다면 정확히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있겠지만, 고서를 발굴하여 복원하는 건 단시간에 가능한 일이 아닐 뿐더러 정확하게 ‘스승의 날’과 관련된 고서를 찾아낸다는 보장도 없다.
“따라서 지금 키보토스의 실정에 맞는 새로운 ‘스승의 날’을 만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온고지신이라는 말도 있으니, 고견이 있다면 얼마든지 주시길.”
나기사와 세이아의 말에 의미불명의 미소를 짓는 하나코.
“그럼 스승의 날은 선생님이 원하는 걸 해드리는 날이겠네요.”
“...저기. 하나코 양?”
“선생님이 좋아하는 거라면 모두 알고 있지 않나요?”
“이보게. 하나코 양.”
“우리 모두가 선생님에게 기꺼이 바칠 수 있고, 몇 번을 해도 질리지 않고, 선생님도 즐거워할 만한 거라면 이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걸요?”
얼굴빛에 살짝 홍조를 띄운 하나코가 다음에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예지 능력이 없어진 세이아뿐 아니라 자리에 모인 모두가 예상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선생님 앞에서도 거칠 것 없었고, 키보토스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모인 황륜대제 대표로 선서할 때도 당당히 내뱉었던 그 말.
“선생님을 위한 노래를 만들면 좋겠네요.”
“그건 순번을 정하기가… 네?”
“어머. 순번이라니 무슨 말씀이신가요. 나기사 님?”
순간의 상황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나기사가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기 위해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을 보며 방긋 웃는 하나코.
“키보토스의 학생들이 선생님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서 불러드리는 거에요. 선생님은 물질적 선물이라면 받지 않으실 게 뻔하잖아요? 하지만 노래라면 기꺼이 들어 주실 거에요.”
“흠. 그럴 듯하군.”
“그렇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세이아와 우이. 하나코의 옆자리에서 사쿠라코도 거든다.
“좋은 의견이네요. 마침 저희 수녀원의 성가대가…”
“그건 너무 경건할 것 같은데요. 황륜대제 때의 엄숙함이 기억나지 않으시나요?”
“음. 성가대가 찬양할 대상은 신이지 선생이 아니지.”
학생들이 모여서 선생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건 붉은겨울 연방학원에서나 어울릴 법하다는 말에 사쿠라코도 아쉬움을 감추며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럼 하나코 양, 어떤 노래를 불러드리면 좋을까요?”
하나코의 묵직한 일격에 당한 상처가 회복됐는지, 다시 원래의 표정을 찾은 나기사가 질문을 던진다.
“그야 저희, 아니… 키보토스의 학생들이 모두 함께 만드는 노래 아닐까요?”
“...모두 함께 만든다구요?”
“어머, 그럼 이런 성대한 기념식을 트리니티에서 은밀하게 주도하려고 하셨나요? 방금 말씀하셨잖아요. 키보토스 전체가 선생님에게 은혜를 입었다구요. 만약 저희만 ‘스승의 날’에 노래를 선물한다면, 다른 학교에선 트리니티에게 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선생님에게 더 소중한 걸 드릴 수도 있다구요?”
“미안하지만 그 손동작은 좀 자제해줬으면 좋겠군.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
하나코를 말리며 한숨을 내쉬는 세이아.
“아쉽지만… 하나코 씨의 말이 일리가 있군요.”
먼저 찾아낸 귀한 보물을 아무런 댓가 없이 공개하는 건 트리니티의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일이나, 선생님이 기뻐할 거라는 사실 앞에 세밀한 손익계산서는 필요하지 않다.
“그럼 선생님을 위한 노래를 만드는 건 하나코 씨에게 일임하겠습니다. 필요한 지원 내용은 언제든 가감없이 알려 주시길.”
“감사합니다. 후훗.”
“생각해둔 게 있나?”
“물론이에요.”
틈만 나면 음담패설을 입에 담고 개방적인 자세로 키보토스 곳곳에서 목격되는 우라와 하나코였지만, 진지하게 일할 땐 누구보다 믿음직한 인물이라는 걸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기에 트리니티의 이름을 걸고 진행하는 중요한 일을 기꺼이 맡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시작해볼까요.”
“후훗. 어서 와.”
“반가워요. 듣던 얘기와 다르게 손이 참 예쁜데요?”
“물론이지. 일류 무법자는 자기관리도 필수라구?”
흥신소 68의 사무실은 얼핏 보면 깔끔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캐비넷에 대충 쑤셔넣어 살짝 튀어나온 전통복과 책상에 처박은 배달음식 포장지가 튀어나와 시선을 강탈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트리니티에서 갑작스러운 의뢰라니, 이건 드문 일인걸?”
하나코의 말에 담긴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의뢰가 들어왔다는 사실에 신난 리쿠하치마 아루가 응접용 소파에 다리를 꼬고 ‘하드보일드한’ 자세로 앉는다.
“흥신소 68의 명성은 트리니티에서도 유명하답니다. 강력하기로 유명한 게헨나 선도부와 맞서 싸운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어요.”
“그… 그렇지? 우린 맡은 일이라면 상대가 누구든 물러서지 않거든. 그게 흥신소니까!”
“아루 님… 오늘따라 더 멋져보여요…”
덜덜 떠는 손으로 타온 싸구려 커피믹스 커피를 조심스레 두 사람 앞에 내려놓은 이구사 하루카가 쟁반을 양 손에 움켜쥐고 감탄한다.
“하지만 오늘은 누군가와 싸워달라는 의뢰를 하러 온 게 아니에요.”
“...응?”
“예전에 감명깊게 본 영상이 있어서요.”
가만히 휴대폰을 꺼내 자신이 본 영상의 썸네일을 보여주는 하나코. 썸네일을 확인한 아루의 표정이 살짝 당황으로 바뀐다.
“에!? 이건…”
“극악무도한 사장님의 아이돌 변신이라니, 너무나 하드보일드한데요?”
과거 선생님과 함께 만들고 참가했던 아이돌 그룹, [장난스런☆스트레이트]의 뮤직비디오에 당황해하는 아루.
“아니 잠깐만! 이건 그게…”
“어머?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게 사장님 아니었나요? 트리니티에서도 큰 화제였다구요.”
“그럼 아까 트리니티에서 우리가 유명하다고 한 게 설마…”
“아하하! 다시 봐도 아루 쨩 너무 멋져!”
오랜만에 보는 사장의 공연 영상에 즐거워하는 흥신소의 사원 중 하나인 아사기 무츠키.
사실 아루에게 아이돌 활동이 딱히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지만, 의뢰 내용이 본인이 생각했던 하드보일드한 일거리가 아닌 것 같다는 사실, 거기에 면전에서 갑자기 단 한 번 공연하고 해체한 전직 아이돌 이야기를 하는 의뢰인에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그래서 이런 의뢰를 하러 왔답니다.”
티파티의 집무실에서 나눈 이야기를 차근차근, 적당히 살을 붙여 설명하는 하나코.
“...그러니까, 선생님을 위해서 소중한 걸 바치고 싶다고?”
“그렇답니다.”
“저기 사장… 조금 잘못 이해한 것 같은데…”
“그런 거라면 우린 언제든 환영이야! 지금 당장 샬레로 쳐들어가면 될까?”
“하아……”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은 건지, 하나코가 설명 중간중간에 첨가한 양념이 너무 자극적이라 정신을 못 차린 건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는 오니카타 카요코.
“그러니까 사장이 아이돌 프로듀스를 해 본 경험이 있으니, 그걸 바탕으로 선생님을 위한 감사의 노래를 프로듀싱해달라는 말이지?”
“어머. 저 설명이 더 정확하네요.”
“...그런 거야…?”
“응. 사장이 이해한 그대로야.”
“무… 물론이지! 나도 그렇게 이해했어!”
가슴을 펴고 당당하게 말하는 아루를 보며 기뻐하는 하루카와 계속 웃고 있는 무츠키. 그리고 짧게 한숨을 내쉬는 카요코.
짧은 시간이지만, 하나코가 흥신소 68의 관계도를 파악하는 데는 충분한 순간이었다.
“음… 하드보일드한 악당이 맡아서 진행하기엔 너무 얌전한 일인가요?”
“응?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러고보니 옆에 계신 분, 저번에 선생님과 음반 가게에 가신 적이 있었죠?”
“뭐? 너, 그걸 어떻게…”
“선생님과 관련된 소문은 금방 퍼지기 마련이랍니다. 후후.”
“...그런 일이 있었어. 과장?”
“치사해! 카요코 쨩 언제 선수를 친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애써 손사래를 치는 카요코를 바라보며 하나코가 말을 잇는다.
“그래서… 카요코 씨라고 하셨죠? 선생님의 음악 취향에 대해 잘 아실 것 같은데,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를 맡아주실 수 있나요?”
사실 카요코가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 CD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코는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공식적으로’ 흥신소 68에 의뢰한 내용임에도 사장을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제쳐두고 부하에게 의뢰를 넘긴다면 사장 입장에서 자존심이 상할 수 있기에, 적당히 분위기를 만들어 카요코에게 자연스럽게 일을 맡기도록 유도하는 게 하나코가 준비한 설득의 전략이었다.
“난 상관없는데, 괜찮겠어. 사장?”
잠시 생각해보다 아루에게 결정권을 돌리는 카요코. 올바른 중간관리자의 처신이다.
“그게 좋겠어. 음악이라면 나보다 과장이 더 잘 아니까.”
얼빠진 표정에서 하드보일드한 사장의 표정으로 돌아온 아루가 최종 승인을 내려준다.
“그럼 의뢰 조건은…”
“선생님을 위한 일인데, 보수가 꼭 필요할까요?”
“어? 하지만…”
“농담이에요. 후후.”
하나코는 사장의 얼빠진 표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느꼈다.
“완성된 곡의 저작권을 흥신소 68에 보수로 지급할께요. 이 정도면 괜찮은 조건이죠?”
“그럼 해당 음원으로 발생한 돈은 모두 우리 쪽에 들어오는 거지?”
“물론이에요. 그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그러고보니 지난번 아이돌 활동 수익은 어떻게 됐어, 아루 쨩?”
“아… 그건…”
말을 잇지 못하는 아루를 보면 뭔가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연예계의 어두운 뒷얘기인지, ‘하드보일드’한 사장의 과감한 결정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혹시 생각해둔 방향성이 있어?”
함께 사무실을 나가기 전에 던진 카요코의 질문에 순간 야릇한 미소를 띄우는 하나코.
“카요코 씨는 메탈 음악을 좋아하시죠?”
“어? 어. 메탈도 좋아해.”
“메탈 음악은 역시 가사에 ㅇㅇ이 들어가야 제맛이죠?”
“...응?”
“악당을 ㅇㅇ, 출동한 발키리도 ㅇㅇ, 생텀 타워도 ㅇㅇ, 어떤 대상이든 1초에 12번 ㅇㅇ하는…”
“무… 무슨 소리야!”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요? 얼굴에 흰 분칠도 하고, 자켓 사진은 붉은겨울 연방학원의 침엽수림에 가서 찍고, 무대에선 쇠사슬도 걸치고 기타를 부수고…”
아루의 ‘그 표정’을 보며 메탈에 대해 제대로 공부한 보람이 있었다고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하나코였다.
“그러니까 그런 거 아니라고… 알겠어?”
“그런가요? 아쉽네요.”
“뭐가 아쉬운 거냐고…”
락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다 보니 어느새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앞에 도착한 두 사람.
“티파티에서 미리 밀레니엄에 연락을 해 주셔서, 작업에 필요한 분들이 모여있다고 해요.”
“밀레니엄과도 협업이라니, 꽤나 큰 프로젝트였네.”
“그만큼 모두가 선생님을 좋아한다는 얘기에요.”
“...모두가…”
“긴장됐나요?”
“아무래도 밀레니엄은 일단 공식적으론 처음 오는 거니까…”
“아뇨, 선생님을 노리는 경쟁자가 많다는 게 긴장되냐는 얘기였어요.”
“...아니… 잠깐. 그건…”
“후훗. 다 왔어요.”
세미나 회의실이 위치한 밀레니엄 타워 상층.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손님을 맞을 준비를 마친 채 기다리던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학생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밀레니엄에 온 걸 환영해. 우라와 하나코.”
“맞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우카 씨.”
“카요코 씨도 만나서 반가워요.”
“별말씀을.”
세미나의 재력을 책임지는 든든한 회계 하야세 유우카의 환영에 이어, 유우카와 함께 세미나를 지탱하고 있는 서기 우시오 노아가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저는 우시오 노아. 반가워요.”
“저도 반가워요. 노아 씨.”
“그리고 제 뒤에는…”
“...하나오카 유즈. 잘 부탁드립니다.”
상대적으로 작은 키라 잘 보이지 않던 게임제작부의 부원, 하나오카 유즈가 조심스레 앞으로 나와 인사를 건넨다.
“이번 프로젝트에 대한 얘기는 티파티에게서 들었어.”
“흥미있는 기록이에요. 우이 씨가 대단한 일을 해주셨어요. 스승의 날’이라니, 정말 생각치도 못한 발상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한답니다.”
드론이 서빙해온 주스를 마시며 회의실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학생들.
“그럼 작사와 작곡을 맡아주실 분이…”
“네. 제가 가사를 쓸 생각이에요.”
노아가 웃으며 손을 든다.
“이미 선생님에 대해서 써둔 글이 많이 있답니다.”
“어머, 글 쓰는 걸 좋아하시나요?”
“틈틈히 기록하다 보니 수첩이 부족할 지경이에요.”
유우카도 웃으며 노아를 거든다.
“노아의 시집은 밀레니엄 프라이스에서 대상을 차지했으니까.”
“밀레니엄 프라이스라면… 과학 분야 공모전 아니었나요?”
“거기서 시집으로 우승했으니 그만큼 글 솜씨가 대단하다는 뜻 아니겠어?”
살짝 고개를 갸웃하는 하나코였지만, 이내 신경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럼 작곡은 저기 계신 유즈 씨가?”
“네. 유즈 씨는 뛰어난 프로그래머이자 리듬게임에서 알아주는 고수거든요.”
“호오. 정말?”
“...저기… 일단은…”
“들어본 적이 있어. 게임 음악을 만드는 사람 중에선 리듬게임의 고수들도 있다는 얘길. 비슷한 케이스일까?”
“...음악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가끔… ‘대ㅇ주 - 밴드 브ㅇ더스’ 같은 소프트로 가볍게 비트를 찍는…”
“유즈는 밀레니엄 프라이스에 출품한 게임의 BGM도 직접 만들었어.”
“...대단한데?”
세미나의 지원사격과 카요코의 감탄에 몸둘 바를 모르고 새빨개진 얼굴로 교복 점퍼를 끌어올려 얼굴을 가리는 유즈. 그런 모습에 더 신났는지 유우카가 TMI를 더 풀기 시작한다.
“대단하지? 게임 좀 하는 사람들한테 UZQueen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야.”
“UZ… Queen?”
“어? 하나코도 알고 있어?”
만난 지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지만, 카요코는 하나코의 얼굴에 피어오른 묘한 웃음을 보며 하나코가 먹잇감을 포착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유즈 씨… 제법이네요.”
“...ㄴㅔ?
“겉보기엔 소심한 모습이지만 온라인에서는 당당하게 이름에 퀸을 붙인 모습이 너무 멋진데요?”
“...그건…”
“마치 ‘현실에선 조용한 내가 이세계에선 여왕님!?’ 이라든지… ‘여왕님의 은밀한 이중생활’ 이라든지… 카요코 씨. 이게 사장님이 말하는 ‘하드보일드’ 아닐까요?”
“히… 히익…”
“그쯤 해둬. 유즈 씨는 하나코 씨를 감당 못해.”
다가오는 하나코를 피해 회의실 한 켠 캐비닛에 들어간 유즈를 간신히 설득해서 밖으로 꺼낸 후에야 회의가 다시 이어진다.
“작곡과 편곡에 필요한 DAW나 전자악기는 우리 쪽에서 지원할 거야.”
“녹음실은 이미 만들어놨어요.”
“벌써?”
“후후. 선생님을 위한 선물이라는 말에 유우카 쨩이 순식간에 ‘완벽’하게 끝내버렸지 뭐에요.”
“노… 노아! 무슨 말을… 애초에 노아도 같이 준비했잖아!?”
“후훗. 다들 사이좋아보이네요.”
티격태격하는 세미나의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짓는 하나코. 옆에 있는 카요코를 향해 돌아보며 입을 연다.
“카요코 씨. 이정도면 충분할까요?”
“응? 더 필요한 게 있어?”
“물론이죠. 붉은겨울 연방학원에 요청해서 침엽수림을 배경으로 뮤직비디오 촬영 허가도 받고…”
“...그거 아직도 포기 안했어?”
“응? 무슨 말이야? 침엽수림?”
“유우카 씨도 궁금하신가요? 사실 메탈 음악은 가사에…”
“그만.”
“자, 이제 하드 기타와…”
“메탈 아니라고.”
급하게 마련했다는 말과 달리, 녹음실은 각종 악기와 음향장비에 최신 DAW가 설치된 컴퓨터와 휴게실까지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였다.
아직도 메탈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듯 아쉬워하는 하나코를 보다못한 카요코가 다시 말을 건넨다.
“선생은 내가 추천한 헤비메탈 음악을 들어줬지만, 그게 선생이 좋아하는 음악인지 알 순 없어. 그리고 헤비메탈을 선호하지 않는 학생들도 많아.”
“하지만 메탈 음악을 해야 가사에 ㅇㅇ라든지 거칠게 ㅇㅇ한다든지…”
“그렇게 말하니까 유즈 씨가 캐비넷에서 나오질 않잖아…”
한숨을 내쉬는 카요코를 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열심히 쓰던 노아가 품 속에서 다른 수첩을 꺼낸다.
“여기 오는 길에 가사를 정리해봤는데, 한 번 보시겠어요?”
“어? 그게 가사야? 그럼 지금 쓰던 건…”
“두 분의 락에 대한 논쟁을 적고 있었답니다.”
“...혹시 오해할까봐 말하는데, 모든 메탈 장르가 가사에 ㅇㅇ라든지 ㅇㅇ를 쓰진 않는다구.”
“네. 그대로 기록해 둘게요.”
어째서 흥신소를 벗어났는데도 계속 고통이 이어지는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카요코를 두고, 진지한 표정의 하나코가 노아에게서 수첩을 받아들고 눈으로 훑어보기 시작한다.
“어때요?”
침묵이 길어질수록 노아의 웃음기 띈 표정에서 긴장감이 짙어진다.
아무리 음담패설을 일삼는 이상한 여자처럼 보인다 해도, 에덴 조약에서 중대한 임무를 수행한 트리니티의 숨은 실력자라는 사실은 노아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좋아요.”
장난기가 느껴지지 않는 진지하고 담백한 짧은 소감.
그렇게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카요코가 보기에도 하나코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한 줄, 한 줄… 모두 마음에 들어요. 멋져요.”
“정말요? 고마워요.”
“다른 분들도 읽어보시겠어요?”
수첩을 넘겨받은 카요코도, 캐비넷 틈으로 밀어넣은 수첩을 받은 유즈도.
“좋은데?”
“...이 가사… 좋아요. 그럼… 이렇게 곡을 쓰면… 될 것 같아요.”
모두의 호의적인 반응에 얼굴 한켠에 자리잡았던 긴장이 사라진 노아가 다시 밝게 웃는다.
“밀레니엄 프라이스 수상작 발표 때보다 더 긴장되네요.”
“그랬나요? 하지만 전 믿고 있었다구요?”
“맞아요. 믿음은 중요하죠. 특히나…”
“선생님에 대한 저희의 믿음도.” / “우리에 대한 선생님의 믿음도.”
노아와 하나코가 동시에 한 말을 듣고 카요코가 살짝 미소짓는다.
“어? 카요코 씨. 웃었어요?”
“무슨 말이야… 나도 웃을 줄 안다고.”
“저 때문에 화난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원래 그런 얼굴이니 오해하지 마. 잠깐… 그럼 하나코 씨는 내가 화났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장난을 친 거야?”
“카요코 씨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요.”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하나코를 보며, 이 사람은 정말 못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 웃는 카요코였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
카요코의 지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멤버들.
“코드 진행을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고음 부분에서 가사를 조금 바꾸면 좋을 것 같아. 발성하기 편하도록.”
“이 부분은… 조금 더 멜로디컬하게 고쳐볼께요.”
“감사하는 마음이 전해지려면 여기에 포인트를 두면 좋겠네요.”
레코딩, 편곡, 가이드 녹음, 마스터링, 저작권 등록과 ㅇ튜브 원작자 인증까지.
마치 처음부터 오랜 시간 함께한 밴드마냥 순식간에 작업이 끝났다.
“끝났어요!”
“다들 고생했어.”
“아쉽네요. 여럿이 모여서 음악을 만들면 멤버들이 집단 ㅇㅇ라든지 ㅇㅇ를…”
“히… 히익…”
“…도대체 락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가벼운 다과와 함께하는 담소를 나누며, 네 사람은 선생님을 위해 만든 선물을 들어본다.
“가수분이 노래를 정말 잘 하시네요.”
“제가… 너무 게임음악처럼 만들어서… 어려웠을 텐데…”
“그럼 원곡은 이렇게 하고, 선생님께 드릴 선물은 미리 얘기된 대로 하자고.”
“후후. 기대되는걸요.”
어느덧 어두워진 녹음실 밖의 하늘에 가득한 별이 빛나고 있었다.
“피곤해…”
매번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루틴이 된 건 어쩔 수 없다.
밤이 깊어 어두워진 샬레의 사무실에 남아있는 유일한 인물인 선생님의 하루의 마무리는 기지개와 가벼운 투정.
매일 고된 하루지만, 학생들을 위해
“슬슬 갈까.”
소파에 아무렇게나 팽개쳐둔 외투를 집어들고 샬레 사무실 문을 여는 순간.
눈 앞에 평소 샬레에서 볼 수 없는 자그마한 존재가 보인다.
“드론?”
밀레니엄의 학생들이 사용하는 4족보행 드론이 꼬리로 보이는 막대기를 흔들고 있다.
의아해하는 선생의 시선에 들어온 건 드론이 업고 있는 리본이 달린 BD.
BD 케이스에는 ‘Thanks to’ 라고 적힌 쪽지가 붙어있었다.
“뭐지…?”
이미 전원을 끈 컴퓨터를 다시 부팅시켜 BD를 집어넣는 선생.
안에 들어있는 건 영상과 사진 파일 각각 하나씩이었다.
궁금한 마음에 피곤함도 잊고 영상부터 재생해보는 선생. 영상을 재생하자 처음 보이는 건 트리니티의 로고였다.
“트리니티가 만든 영화? 근데 트리니티는 영화부가 없을 텐데…”
아직도 영문을 모르는 선생의 귀에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들려오고, 이윽고 눈에 학생들의 모습이 하나씩 스쳐지나가기 시작한다. 누군가는 부끄러워하며, 누군가는 쑥쓰러워하며, 누군가는 밝게 웃으며, 누군가는 들떠 보이는 모습으로. 선생이 지금까지 지켜본 학생들이 각자의 개성에 맞게 화면 속에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한 햇살이…]
선생의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있는, 과거엔 UCC라고 불리기도 했던 그런 영상.
학생들이 부른 노래를 한 소절씩 편집해서 모아서 하나로 만든 노래.
누군가는 서투르게, 누군가는 가수 뺨치게, 누군가는 부끄러움에 작은 목소리로 부르지만, 학생들의 마음은 선생에게 제대로 전해지고 있다.
선생은 그제야 쪽지에 붙어있는 ‘Thanks to’라는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기나긴 4분이 지나고 음악은 끝이 났지만 안아줄 소녀는 없는…
“아로나, 여기 있어요!”
라고 생각할 때 마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불쑥 튀어나오는 싯딤의 상자의 슈퍼 OS 아로나.
“학생들이 선물로 노래를 준비했네요.”
“어… 선물이라니… 근데 갑자기?”
“저기 사진 파일을 열어보세요!”
아직 얼떨떨한 선생을 재촉하는 아로나. 열어본 사진엔 빼곡하게 글씨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 이거… 롤링페이퍼구나.”
종이의 가운데에는 ‘스승의 날을 맞아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적어보세요. 티파티 드림’ 이라는 안내가 적혀있었고, 손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수많은 문장이 종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스승의 날… 그래. 그런 게 있었던 것 같아.”
어떻게든 필적을 감추려고 삐뚤삐뚤 적은 글씨, 롤링페이퍼가 뭔지 모르고 이름을 당당하게 썼다가 지운 흔적, 종이에 억지로 붙여 둔 혼인신고서와 도대체 무슨 이름인지 알아보기도 힘든 훈장을 보며 미소짓는 선생.
비록 이름을 쓰지 않았음에도 누가 쓴 내용인지 선생이 알아볼 수 있는 건, 그만큼 모든 학생들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리라.
“휴… 뭐 이런 걸 다…”
“선생님?”
말을 이으려던 아로나는 천장을 바라보며 얼굴에 손을 휘젓는 선생을 보며 입을 다문다.
그렇게 학생들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서프라이즈는 대성공으로 마무리됐고, 샬레의 선생에게 존재감을 철저히 어필한 트리니티에 대해 게헨나 학원의 수장 하누마 마코토의 적대감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는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만마전에서조차 놀라울 만큼 관심이 없었다.
“역시 대성공이야!”
흥신소 68의 사무실에서 Thanks to 영상의 조회수를 보며 기뻐하는 아루.
“그래서 저작권 수익은…”
“아. 그거? 선생이 이 곡으로 발생한 수익은 모두 불우이웃돕기에 기부해달라고 했어.”
“...어? 그럼 돈은…”
“아하하! 진짜 악당이라면 악당답게 돈을 벌어야지, 그렇지? 아루 쨩?”
“그… 그렇지! 이런 건 하드보일드하지 않아!”
흥신소의 밝은 미래는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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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s to를 학생들이 힘을 모아 만들었다고 생각한 느낌으로 쓴 글입니다.
원래 생각한 분량보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나눠서 올릴까 했는데
한번에 보시는 게 편하실 것 같아 그냥 올립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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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추
재밌게잘읽엇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