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나, 우리, 종착역을 등지고 당신을 바라보며.
1
이타가키 카노에는 별바다에서 길을 잃었다.
상처 입은 두 무릎을 품에 꼭 안고, 밤도깨비를 집어삼킨 시커먼 동공이 하나의 별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살랑바람에도 훅 꺼질 것 같은 기운으로 그저 멍하니 히죽히죽 웃었다.
세상이 소리를 죽이고 소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밤의 도래를 알리던 우악스러운 피아노 소리도. 바보들의 야반 소란을 쫓던 사감대의 발소리도. 인적을 피해 뒷산에서 구슬프게 부르던 수줍은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금이 가 위태로운 외벽 아래, 무너진 벽돌 더미들. 엎어진, 깔린, 부서진 예술 인형들. 악령이 휩쓸고 간 땅은 그야말로 와일드 헌트의 지독한 잔향만이 짙게 깔려 있었다.
선명하게 떨어지는 달빛은 눈물이 되어 흐르고 별들은 자리를 피하듯 운무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어디에 있는 거야……? 나에겐 당신밖에 없는데…….”
따스하게 바라봐 주던 사랑스러운 샛별은 어느덧 까막별이 되었나.
부서진 성가퀴에 비틀비틀 동아줄을 묶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메 되뇌며.
소녀는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아 우주로 떠나기로 했다.
이윽고 하늘이 떠오른다.
턱 하는 시동음과 함께 소녀는 동아줄을 타고 자유롭게 상승했다.
하지만 키보토스의 하늘은 질겨서 날개가 부러져도 마음처럼 날아오를 수 없었다. 불타는 고통에 셀 수 없이 정신을 잃고 깨는 기나긴 비행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여릿여릿 본 풍경은 자기 새끼손가락을 타고 뚝뚝 떨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실.
어디를 향해 가는 걸까.
어디로 이어지는 걸까.
누구에게 얽히는 걸까.
그 의문은 끝내 해소되지 못한 채, 달콤한 우주가 쏟아졌다.
***
“으아아!”
어린아이 같은 앙칼진 비명이었다. 두꺼운 이불을 박차고 일어난 카노에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으음……. 카노에 선배?”
“선배……?”
왼쪽 가슴에 손을 얹자 콩알만 한 심장이 탯줄을 달고 나온 아기처럼 펄떡거리고 있었다. 카노에는 두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와일드헌트 기숙사 4동 404호.
이내 완전히 뒤집어진 방안에 환한 불빛이 켜졌다. 그녀를 걱정한 후배들이 하나둘 뻐근한 눈을 손으로 비비며 다가왔다.
“선배, 괜찮아?”
샛노란 병아리 잠옷을 입은 키누이 레나가 벙어리장갑 같은 둥근 손을 걱정스럽게 내밀었다.
“레나 쨩.”
당사자보다 더 겁을 먹은 듯한 그녀의 표정은 멍하게 가라앉아 있던 정신을 수면 위로 이끌며 이곳이 현실임을 자각시켰다. 역시 이러쿵저러쿵해도 정이 많은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아. 조금…… 좋지 않은 꿈을 꾸었을 뿐이거든…….”
“토요일 밤의 악몽인가요…….”
시라오 에리가 뽀얀 속살이 은은하게 비치는 실크 잠옷 바람에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며 다가왔다.
꿀벌 같은 두 눈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덜 닫힌 창문 사이로 들어온 잔바람은 커튼을 펄럭거리며 은은한 달빛을 싣고 왔다. 찰나의 정적 속에 까끌까끌한 사이프러스 나뭇가지가 몸을 비비고, 청개구리 우는 소리가 날카롭게 귓바퀴를 긁어 댔다.
“뭐, 뭔데……. 두 사람. 갑자기 왜 그래?”
분위기가 순식간에 으스스해지고 레나가 두 사람을 번갈아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뉴후후……. 카노에 선배. 드디어 머지않아 운명의 사람과 만날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네……. 이힛……. 마침내……. 이히히힛…….”
“뭐야? 무슨 소리야? 운명의 사람? 뭔데, 그 음흉한 웃음은! 두 사람 또 나만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
“쉿.”
“으응?”
자다 깬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운차게 하악질을 해 대는 레나의 입술을 우아하게 다가온 시이나 츠무기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이 살짝 멈춰 세웠다. 그녀는 여유롭게 눈웃음 지으며 따뜻한 물이 담긴 머그잔을 카노에에게 건넸다.
“고마워…….”
“네.”
그러고는 열려 있던 창문을 닫고 커다란 달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와일드헌트의 오랜 풍문 중에 하나랍니다. 운명으로 이어진 두 사람이 토요일 밤, 한날한시 같은 악몽을 꾸면 서로를 가리켜 맺어지게 된다.”
“같은 꿈이라니, 완전 미신이잖아……. 그리고 세상에 사람이 대체 몇 명인데, 그런 일이 일어나도 어떻게 알아?”
레나는 손사래를 치며 질린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연에 우연을 거듭해 기적을 이룬다. 후훗. 꿈이라는 것은 휘발성이 강해 설령 정말로 만나게 된다 해도 이를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만, 여기선 바로 그런― ‘감성’. ……이 중요하니까요. 어쩌면 레나 쨩도 이미 만났거나, 혹은 만나게 될 운명일지도 모르죠.”
“운명의 사람……. 됐어. 난 그런 거 안 믿으니까. 어차피 그런 건 나중에 가서 좋을 대로 끼워서 맞추는 것뿐이잖아.”
“히히……. 그렇구나. 레나 쨩. 책장 위의 노트 사이에 끼워 놓은 ‘사랑하고 싶은 소녀의 별자리 연애점’은 못 본 걸로 해 둘게…….”
“……에? ……!! 무, 무슨 소리야! 서, 선배가 잘못 본 거야! 난 그런 거 안 봐!”
“오오! 레나 쨩. 역시 아르카나의 마법에 관심이 있으셨나요? 그런 거라면 굳이 책을 찾아보지 않아도 제가 얼마든지 봐 드릴 수 있답니다? 어때요? 당장에라도 보자기를 펴 볼까요? 뉴후훗.”
“지금? 곧 자정인데!? 아, 정말!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고! 그래서 선배는 괜찮은 거 맞아? 나, 카노에 선배의 그런 목소리는 정말 처음 들어봤단 말이야.”
그녀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듯 시선이 모였다.
“……괜찮아.”
카노에는 괜스레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404호실의 전등은 금방 다시 꺼지고, 시끄럽던 소란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카노에는 이불 속에 정수리까지 집어넣고 몸을 둥글게 말아 옆으로 누웠다.
사실 츠무기가 말했던 와일드헌트의 풍문에는 주/석이 달려 있었다. 악몽에 대한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악몽은, 단순한 무서운 꿈 같은 게 아니었다.
‘전생의 기억.’
―바로 그 파편.
그녀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전생이라는 단어에 꽂혀 홀린 듯이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불빛 주위를 빙빙 돌다 불 속으로 사라지는 불나방같이.
그것은 아마도 수개월 전, 하늘이 붉게 물들었던 그날로부터 시작된 본능.
잠에서 깨면 반나절을 넘기지 못하고 깨끗하게 사라져 버리는 그 기억 속에서 그녀는 항상 누군가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카노에는 이불 밖으로 얼굴을 슬쩍 내밀어 모두가 다시 잠든 것을 확인하고 베개 밑에서 작은 노트와 볼펜을 꺼냈다. 스마트폰 전면의 환한 불빛은 그동안 보았던 전생의 기억을 무심하게 밝혔다.
적잖은 양.
오래된 기록은 아니지만 바싹 마른 활자들은 신기하게도 이미 바스러져 버린 먼 시간을 머금은 듯 느껴졌다.
대개 그녀는 폐허가 된 와일드헌트 자치구를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하염없이 거닐었다. 그곳이 정말 알고 있던 와일드헌트가 맞는지, 어째서 폐허가 됐는지, 왜 그런 상처투성이인 몸이 되었는지, 무엇도 알지 못했다. 누구와도 만나지 못했고, 자치구 밖으로 나갈 기회도 없었으니까.
그 답답한 반복 속에서 확실한 것은 누군지도 모를 이를 애타게 부르며 꺼져 가는 목소리와 맨발의 연약한 살가죽을 가르는 삭막함 뿐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종이가 빠르게 잉크를 삼키는 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오늘, 바로 조금 전에 보았던 것은 아주 다른 것이었다. 여태까지 타인의 기억을 엿본 듯한 이탈감이 있었다면, 이번에는 비명을 지르기 직전까지 현실과 구분할 수 없었을 만큼 생생했다.
한 줄 한 줄 상세한 기록이 꼬리를 물고, 기억 속에서 느꼈던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과 분노, 정신과 육신이 찢어질 듯한 간절함이 척추에 내리꽂힌 것 같았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심장이 난폭하게 뛰기 시작했다.
잘 때도 빼놓는 일이 없는 초커의 안쪽은 달궈진 쇠 목걸이를 두른 듯 뜨겁게 욱신거렸다.
간신히 마침표를 찍은 카노에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아이처럼 대자로 뻗었다.
“하아……. 하아…….”
숨죽인 신음이 이불 속을 따뜻하게 적셨다.
카노에는 여전히 펄떡거리는 왼쪽 가슴을 거칠게 부여잡고 헐떡였다.
“이힛……. 이히히히…….”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에 있는 거야?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 허공에 물었다.
전생에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자신이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꿈을 꿀 때마다, 베개 밑의 노트를 펼칠 때마다, 항상 꿀렁거리는 심연에 머리를 통째로 삼켜지는 것 같은 오싹오싹한 공포가 엄습해 왔다. 하지만 동시에 제어할 수 없는 절대적인 갈망이 그녀를 이리저리 흔들어 놓았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정신병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어디에 터놓을 수도 없고 스스로 해결할 수도 없었다.
도무지 어쩔 도리가 없는 이 문제에 대해, 카노에는 의외로 흔쾌히 정답을 내놓았다.
예술에는 비운이 따른다.
그녀 역시 그 비탈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와일드헌트에 입학한 학생이지 않은가. 이러한 시련이 앞으로 어떤 영향을 가지고 올지 알 수 없는 미지라 해도, 험지를 올라 먼지 쌓인 유물을 발견해내는 고고학자처럼, 아무도 도달하지 못했던 새로운 땅에 발을 디딘 개척자처럼, 정신병자 취급을 받아도 자신의 미를 관철해내는 예술가처럼.
이것이 정말 그토록 바라 왔던 운명이라면―
만 갈래로 부서진 기억의 편린을 모아 온전히 받아들이고, 기꺼이 망가지는 것을 택하겠다고.
―그렇게 멀지 않아 그녀는 당신과 다시 만난다.
2
“이틀 뒤, 샬레의 선생님을 초대해 와일드헌트 예술학원을 안내해 드리기로 했어요.”
츠무기의 한마디에 티 테이블 위로 정적이 흘렀다.
이어서 그녀는 변모한 주위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기괴한 악마 날개 모양 쿠키가 장식된 딸기 파르페를 스푼으로 떠 입술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 우아한 모습은 관능적이며, 요염해 보이기까지 했다.
오랜만에 모인 404호실의 네 사람은 에피파니 광장의 그늘진 카페에서 느긋한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 에? 갑자기!?”
잠시 벙쪄 있던 레나가 당황한 듯 자신이 주문한 초코밀크 프라페와 똑닮은 색의 트윈테일을 배배 꼬면서 대답했다. 다른 두 사람도 반응은 크게 다르지 않아 멀뚱멀뚱 츠무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샬레의 선생님인가요…….”
에리는 호박색의 눈동자를 반짝이며 곰곰이 생각했다.
샬레의 선생.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뉴스를 통해서도 쉽게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이미 교류가 있었던 츠무기에게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뒤였다.
학생이 하는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관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순진하게 보이지만 배려가 깊고 섣불리 파고들지 않는 섬세한 어른.
말이라면 무엇을 못 할까.
실제로는 어떤 사람일까?
키보토스의 어느 학원이든 교직원은 소수. 대부분이 학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깊이 엮일 일은 적은 편이나, 에리는 입학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교무와 행정을 담당한 어른들과 여러 차례 스치듯 얽혀 왔다.
솔직히 이야기해서 좋은 기억은 없었다. 학원의 어른들은 항상 등 뒤를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 말이 빠르고, 상황을 벗어나려고 하는 회피 능력이 뛰어났다. 분명 눈을 마주보고 있음에도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아니라, 나의 뒤통수 너머 앞을. 지금이 아니라, 5분 뒤의 미래를.
그렇기에 과거에, 혹은 현재에 홀로 남겨진 에리는 그들 앞에 서면 항상 말을 더듬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마지막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에리는 츠무기에서 레나로, 레나에서 카노에로 차례차례 시선을 옮겼다. 레나는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불신하는 티를 내비치고 있었다. ‘나는 속지 않을 테니까.’ 표정으로 몇 번이나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선생과 대면하게 되면 저 아이가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지겠지. 워낙 호기심이 왕성한 아이니까.
카노에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뜨거운 카푸치노에 눈깔 모양 설탕을 퐁당 빠뜨렸다. 티 스푼으로 커피를 저을 때 나타나는 소용돌이처럼, 선배는 매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쉬이 가늠하기 어려웠다.
“……이힛.”
커피잔을 들어 홀짝이던 카노에가 무심코 웃었다. 그녀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프레임이 몹시 높은 동영상 속 인물처럼 기괴한 동작으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가에 묻은 거품을 닦아냈다.
“왠지 기대되는걸…….”
그 말에 동의하듯 까마귀 몇 마리가 까악까악 울었다. 카노에는 ‘샬레의 선생’이라는 말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강한 인력을 느꼈다. 전생, 운명, 예술, 오컬트. 그 외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그녀에게 있어 이건 예고 없이 불어온 커다란 바람이었다.
뉴스나 가십 기사 같은 곳에서 접했을 때도 느꼈지만 참 신기한 감각이었다. 혹시 전생의 일과 관련이 있지는 않을까. 카노에는 어느새 허벅지에 올라타 갸르릉거리며 잠든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마트폰으로 그를 검색했다.
***
봄.
잘 익은 볕과 싱그러운 녹색 바람만으로 충분히 배부른 봄, 아침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기숙사를 빠져나온 카노에는 긴 앞머리를 살짝 넘기며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삐죽, 입술을 내밀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인데도 눈치 없이 하늘이 너무 맑았다. 간질간질한 바람이 자꾸만 등을 떠밀었다. 오늘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망상 속에서 열심히 시곗바늘을 거꾸로 밀지 않았던가. 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걸까.
카노에는 무거운 교과서 가방 때문에 축 처진 어깨를 들썩거리며 바로잡았다.
―와, 날씨 뭐야?
―헐. 야, 저거 봐. 벚꽃도 엄청 폈어!
등 뒤에서 여학생들의 발랄한 목소리가 까르르 들려 왔다.
까악.
어느샌가 발치에 날아온 까마귀가 흠칫 놀라 움츠러든 그녀를 올려다보며 울었다.
“알았어……. 얼른 갈게…….”
하는 수 없네. 카노에는 그렇게 말하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굣길을 따라 빼곡하게 뻗어 있는 벚나무들이 따뜻한 바람살에 흔들리며 보슬보슬 웃었다. 영문을 알 턱이 없는 까마귀가 대가리를 갸우뚱거리며 총총 그녀의 뒤를 쫓았다.
분명 이른 시간이지만, 제3 기숙사 앞 운동장에는 구보 중인 리듬체조부 학생들의 기합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에피파니 광장 거리를 지나 본관과 가까워지면 오전 연습 중인 관현악부 학생의 피아노 연주가 흐른다.
중앙 현관에서 신발을 갈아신은 카노에는 계단을 올라 텅 빈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다.
교실 뒷문 앞에 서서 한 차례 심호흡했다. 안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자리는 창가 맨 뒤에서 한 칸 앞. 책상에 턱을 괴고 무심히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하나둘 등교하는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손바닥에 닿는 숨이 뜨겁다.
기숙사를 나서기까지 마냥 우울하기만 했는데, 막상 교실에 들어서니 묘한 기분과 함께 긴장되기 시작했다. 역시 새 학기 첫날이라는 울림 때문일까. 추웠던 계절이 지나고 설레는 봄이 온 것처럼. 나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카노에는 자꾸만 부푸는 가슴 탓에 우물쭈물하다, 이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결심했다.
빈 교실이 차곡차곡 채워져 나간다.
간략한 조례가 끝나고 수업이 시작된다.
수업이 끝나면 긴 쉬는 시간을 멍하니 보낸다.
정오는 순식간에 찾아온다.
점심시간이었다.
카노에는 마침음이 들리기 무섭게 뻣뻣한 손가락을 뻗어 옆자리 학우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그녀와는 예전에 체육 수업에서 함께 짝을 지어 활동한 적이 있었다. 그다지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얌전하고 착한 아이였다.
“……카노에 양?”
노트를 정리하던 그녀가 돌아보고,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쳤다. 카노에는 그녀에게 점심을 같이 먹자고 제안하고 싶었다. 여태 하루도 빠짐없이 홀로 먹어 왔기에, 새 학기 첫날인 오늘만큼은 점심시간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저, 저기…….”
하지만 좀처럼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데는 자신이 있었지만, 내 이야기를. 더군다나 자신의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굉장히 쑥스러웠다. 그런데도 카노에는 용기를 내어 목을 쥐어짰다.
“가,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온몸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해냈다. 끝까지 말했다는 성취감이 있었다. 분명 갑작스러운 탓에 당황했겠지만, 그녀라면 흔쾌히 제안을 받아주리라 생각했다.
“어…… 네? 카노에 양……?”
기대하던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줄곧 발등만 쳐다보고 있던 카노에는 이를 이상하다고 생각해 고개를 들었다.
“죄송한데, 뭐라고 하신 건지 잘 들리지 않아서요. 다시 한번 얘기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게…….”
간과했다. 이런 적극적인 행동은 아득하리만치 오랜만이었기에, 자신의 커다란 맹점을 고려하지 못했다.
카노에는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어릴 때부터 부끄럼이 많은 성격 탓에 말할 기회가 적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소리가 작아졌다. 의식하고 큰소리를 내면 평범하게 대화할 수 있을 정도는 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경우 귓가에 대고 속삭이는 수준에 불과했다.
“그……”
“토우코~ 밥밥~ 아, 맞아. 오늘 메뉴 그거 있다던데?”
“앗!”
이번에는 제대로 말해야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옆자리 그녀의 친구로 보이는 학생 무리가 대담하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마구 흔들어대며 장난을 쳤다. 주변 공기의 기압은 순식간에 변해 위아래로 나뉘었다.
창밖의 봄과 완벽히 동기화한 고기압은 보기만 해도 화창하다. 그녀들은 모여드는 먹구름을 뒤로한 채 짧게 수다를 나누었고 금방 자리를 뜰 기색이었다.
“아, 잠깐만 얘들아. 먼저 가고 있어 봐. 카노에 양이랑 하고 싶은 말이 조금 있어서.”
“…….”
먹구름의 색은 점점 더 짙어진다.
“미안해요. 갑자기 소란스러웠죠?”
그녀가 곤란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아까 하시려던 얘기가…….”
역시 안목은 틀리지 않았다. 불편한 기색 하나 느껴지지 않는 상냥한 말투였다. 친구들과 보낼 즐거운 점심시간이 방해받았는데도 말이다.
“미안……. 그러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카노에는 최대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그런가요? 후후. 그러면 저는 그만 가볼게요. 괜찮으니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주세요.”
그녀가 문을 나서고 교실은 순식간에 어둑어둑해졌다.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것 같았다. 카노에는 앙증맞은 한숨을 푹 내쉬고, 가방에서 샌드위치 하나와 팩으로 된 토마토 주스를 꺼내 밖으로 나갔다.
본관의 뒷문으로 나와 푸릇푸릇한 나무가 빼곡한 정원을 깊숙이 들어가면 쓸쓸한 쉼터가 나온다. 여기는 볕이 잘 들지 않고 스산한 분위기가 있어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비밀 명소였다. 카노에는 늘 이곳에서 쓰러진 통나무를 벤치 삼아 홀로 식사했다.
역시 기세만으로는 안 되는구나.
당연한 얘기.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번 통감했다.
우물우물. 쪼오옥.
“난……. 나쁜 애야…….”
마지막까지 귀를 기울이고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던 그녀의 인상이 떠올랐다. 거기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았던 건 대화가 서투름을 알고 있는 성심성의의 배려였을 것이다. 바로 그 배려에 조바심이 났다. 모난 탓에 누군가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음? 이런 곳에 먼저 온 사람이 있네.”
낯선 남자 목소리였다.
동시에 절로 눈이 감길 만큼 거친 바람이 불어왔다.
카노에는 기다란 머리카락이 날리는 걸 간신히 붙잡고 애써 눈을 뜨려 했다.
불어온 바람은 언뜻 따뜻하지만 봄과는 거리가 멀고, 학교의 학생이라기에는 무척 스스럼없이 자유로우며, 싱그러운 숲 바람과 달리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안녕.”
“……!!”
힘겹게 눈을 뜨자 그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깜짝 놀란 카노에는 두 눈을 똥그랗게 뜨고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끽소리도 내지 못했다.
“옆자리, 앉아도 될까?”
“…….”
“어, 앉을게.”
그는 일말의 망설임이나 눈치를 살피는 일도 없이 10센티미터도 불과한 거리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쥐고 있던 비닐봉지에서 카레빵과 콜라를 꺼내 먹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정신을 차린 카노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안 된다고 해도 앉을 거였거든.”
“…….”
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어?”
그런 생각이 드는 동시에 의아함을 느꼈다. 조금 전의 대답은, 개미 기어가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얘기이지 않은가.
“그거 마저 안 먹어?”
그가 먹다 만 샌드위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연일까.
카노에는 대꾸하지 않고 조막만 한 입으로 아구아구 남은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
“내 목소리가 들려……?”
“그래. 잘 들린다.”
“…….”
적당히 풀어헤친 정장, 부스스한 머리카락,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이 초췌한 눈, 은은하게 풍겨오는 담배 냄새와 애써 덮으려는 듯한 시트러스 향기.
“목소리 좋네.”
세상에 흩어져 있던 퍼즐이 단숨에 모여들어 착착 맞아떨어지는 것처럼.
마치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거스를 수 없는 강렬한 운명을 느낀 순간이었다.
―
오랜만에 써 왔는데, 이번에는 다 써온 게 아니라 분할 연재.
요새 글 쓰는 거에 집중을 영 못해……. 슬럼프인가;;
원래 무조건 다 쓰고 올리는 걸 유기하고 싶지 않아서 동기 부여 삼아 올려 본다…….
소재는 카노에 메모로비 본 사람은 바로 이해했을 텐데, 아래 대사에서 따 왔어.
다음주까지 꼭 다 써 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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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읽었음 다음편 기다리고 있을게
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