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우리, 종착역을 등지고 당신을 바라보며.
10,525자
3
“후우…….”
아침 일찍 기숙사에 쌓인 쓰레기들을 처리하기 위해 수거 장소로 나온 에리는 양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봉투를 내려놓고 숨을 골랐다.
슬슬 봄이 오려나 봐요. 엊그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추웠는데.
그녀는 블라우스의 윗단추를 두어 개 풀고 검은 터틀넥의 목을 잡아 펄럭거렸다. 안쪽 깊숙한 곳까지 차 있던 열기가 빠져나와 턱 끝에 스쳤다.
“카노에 선배?”
산책을 겸해 함께 나온 카노에는 여전히 봉투를 꼭 쥔 채 무언가에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
“뭘 그렇게 골똘히 보고 계신가요~? 카노에 선배?”
“…….”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호기심이 생긴 에리는 슬쩍 그녀를 관찰했다. 카노에의 눈은 평범한 사람과 달리 무척 동그랗고 직관적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밤의 보름달을 떠올리면 정확하다. 다만 환한 달과 달리, 그 끝을 들여다볼 수 없는 심연처럼 새까만 동공은 기괴하게 보이면서도 신비로움을 자아낸다.
그녀는 자신의 호박색 눈동자와 똑같이 생긴 방울끈으로 양쪽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데, 그렇게 총 네 개의 눈동자가 정확히 본관 뒤편의 숲속을 꿰뚫고 있었다.
저기에 무언가 있는 걸까요?
그렇게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마법처럼 나타난 까마귀와 검은 고양이가 그녀의 가녀린 다리에 기대고 있었다.
까악.
야옹.
사람처럼 말을 건다.
“……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카노에는 도도도 소리가 나는 잰걸음으로 쓰레기봉투를 버렸다.
“에리 쨩……. 돌아가자…….”
“네! 얼른 돌아가서 준비해야 하니까요.”
아무래도 자세한 것은 캐묻지 않기로 했다.
와일드헌트의 학생들은 그들을 404호실의 괴짜들이라고 뭉뚱그려 이야기한다. 마법에 매료되어 있을 뿐 여러모로 서투른 에리와 우아하지만, 시한폭/탄 같은 츠무기. 가장 정상인인 척 굴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는 고양이 같은 레나.
이 세 사람과 다르게 카노에는 무척 여유롭고 포용적이다. 언니니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그 정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좀 더 뭐랄까. 모성이 느껴진다고 할까. 아무튼 신기한 사람이었다.
에리는 그녀의 그런 신비로움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오늘은 츠무기가 선생을 데리고 와 소개해 주기로 한 날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온 카노에는 침대에 누워 가림막을 치고 숨겨둔 노트를 펼쳤다.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페이지가 두 장 더 늘었다. 꿈을 꾼 빈도가 늘어난 것이다. 그녀는 가장 최근 기록을 재독했다.
“……전생의 나.”
다시 봐도 참 이상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꿈의 내용을 전생이라고 표현해 왔지만, 또다시 위화감을 느꼈다. 이건 마치 전생이라기보다는―――
“오오, 이 점괘는……! 틀림없어요. 이건 분명 모두의 염원이 이루어질 거라는 예언! 뉴후후. 제 예술 센스가 폭발하는 날도…… 가까워요! 뉴훗, 뉴후후후……. 뉴후후후후후……!!”
샬레의 선생은 점심시간이 지나갈 즈음 이곳에 도착했다.
“자. 여기가 저와 친구들이 생활하는 방이에요. 아늑하고 좋죠?”
약간의 긴장과 설렘이 응축되어 있던 방문이 열리고 츠무기가 들어와 재잘재잘 말했다. 그리고 한 남자가 머리를 긁적이며 따라 들어왔다.
“오. 와일드헌트는 이런 느낌이구나. 신기한걸.”
“그런가요?”
“그래. 대충 트리니티랑 비슷할 줄 알았거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방문 가까이 서 있던 카노에는 자연스럽게 그와 마주했다. 404호실의 룸메이트 중에서도 특히 체구가 작은 그녀를 봉제 인형처럼 품에 안을 수 있는 건장한 몸.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큰 키.
피곤함에 찌들어 있는 무채색의 눈동자와 무섭지만, 인자함이 느껴지는 눈매.
악취가 될 줄 모르고 시트러스 향과 뒤엉켜 버린 은은한 담배 냄새.
꿈속에서 보았던 그가 손이 닿는 거리에 있었다.
“히히…… 이히히…….”
실없는 웃음소리가 침 흐르듯 새어 나왔다.
이미 영상 매체로 접해 꿈속의 그가 선생과 동일인이라는 것은 예상하였지만 실제로 부딪히니 그 확신이 차원이 달랐다. 발끝의 혈관부터 시작해 뇌가 통째로 전율하며 구워지는 감각. 소름이 확 돋았다.
“드디어 찾아왔군요. 아르카나의 마법에 이끌린 자여.”
“나도…… 운명의 이끌림을 느꼈어.”
이끌림?
아니, 이건 이끌림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애처로웠다.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해야 마땅했다. 연결. 연결이라고 하자.
카노에는 생전 처음 만난 남자에게 운명의 연결을 느꼈다. 태어날 때부터 모체에 이어져 있던 탯줄처럼. 이 세계에서 그녀라는 존재가 확정된 순간부터 운명으로 이어져 있던 것처럼.
“아르카나에, 운명……. 이거 참 또 재밌는 애들을 만났네. 미리 얘기해 두겠는데 나 무교다, 얘들아.”
물끄러미.
모두와 함께 다채로운 와일드헌트를 선생에게 안내해 주는 시시각각 카노에는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동공에 수납 기능이 붙어 있었다면 충분히 집어넣을 수 있을 만큼 정성스러운 시선이었다.
이성적으로는 도대체 저 남자가 뭐길래 이렇게까지 가슴이 뛰는 걸까, 그런 의문이 드는 한편 감정적으로는 심장이 아프다는 착각이 들 만큼 이것이 사랑이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이 사랑.
이것이 운명.
이것이야말로 오컬트.
마음 같아서는 선생을 납치해 전생에 대한 녹진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참이었지만 냉정하게 자제하기로 했다. 만에 하나 섣부른 행동으로 운명이 비틀릴 경우 쉬운 길이 비탈길이 되어 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마스터?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구경?”
방구석에는 검은 천으로 덮인 캔버스가 잔뜩 쌓여 있었다.
에리의 옛날 그림들이었다.
“네? 아! 네!? 서, 설마 보셨어요!?”
뒤늦게 온 그녀는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 몰라 커다란 모자를 눌러쓰며 허둥거렸다.
“아니? 안 봤어.”
“저, 정말인가요?”
“그래. 더 재밌는 걸 보고 있거든.”
“네?”
그가 에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
카노에가 끼어들 듯 말했다.
“아무래도 선생은…… 나와의 전생을 기억 못 하나 봐.”
“헉, 그럼 선배가 말하던 전생의 인연이 설마!”
“거, 난 모르는 이야기라니까.”
시큰둥한 반응을 보아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 눈을 마주친 순간 영화나 소설 속의 이야기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제멋대로 분화되어 쏟아지는 이 뜨거운 정열을 그라면 받아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카, 카노에 선배? 뭔가 표정이 무서운데요…….”
“히히……. 이히히히……. 어쩔 수 없네…….”
이렇게 된 이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에게 하나하나 상기시켜 주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어느샌가 이곳을 잊혀진 정원이라 부르고 있었다.
정돈되지 않은 야생초와 하늘을 가릴 듯 우거진 고목 가지.
겹겹이 쌓여 끼어들 틈이 없는 시간의 퇴적층.
이렇게 얌전히 앉아 있으면, 마치 거대한 과거를 표류하는 돛단배에 올라타 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는…… 엄청 인기 많은 정원이었대…….”
“그래? 뭐, 확실히 이런저런 흔적들은 많이 있네.”
주변을 둘러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넝쿨에 묶인 티 테이블이 있었고, 화원이라도 만들려고 했던 건지 앙상하게 뼈만 남은 구조물이 있었고, 도보를 그리도록 나열된 돌바닥에 이끼가 잔뜩 껴 있었다.
이제는 하나같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 흔적들이지만, 분명 이곳에 정원이 있었다고. 나는 여기에 있다고. 그렇게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래?”
“그건…… 아, 아무래도 요즘은 여기보다 화려하고 귀여운 곳도 많아졌으니까……. 이런 수수하고 작은 정원은 아무도 봐주지 않나 봐…….”
그녀가 자기 일처럼 쭈뼛쭈뼛 수줍게 이야기하자 그가 피식 웃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어져 앉는 거야?”
기다란 통나무 위에 두 사람은 각각 양 끝에 앉아 있었다. 오늘은 선생이 먼저 와 있었고, 그 뒤에 찾아온 카노에가 반대편에 앉았다.
“그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니까……. 미, 미안…….”
“흠. 이런 얼굴로 말해도 설득력은 없겠지만 일단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바빠서 면도도 똑바로 못하고 나온 탓인가?”
그가 턱에 꺼끌꺼끌하게 남은 수염 자국을 연신 매만지며 말했다.
“바, 방금 것도 들렸구나……. 정말 귀가 좋은 사람이네…….”
이 거리에서 이렇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음에도 전부 알아듣고 제대로 대답해 주다니.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어느 의미 오컬트라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글쎄. 내가 딱히 귀가 좋은 건 아닌데. ……굳이 따지자면 눈이 좋은 편이지.”
“눈?”
눈은 아무런 관계없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버린 걸까. 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너, 항상 무언가 말할 때 바닥을 보고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응?”
그거야……
그거야 물론 알고 있지. 내 나쁜 버릇 중 하나인걸. 카노에는 그렇게 즉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잘 알고 있어도 매번 의식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여전히 풀밭만 가득한 시야에 그의 구두가 비집고 들어왔다. 그는 어느새 정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카노에는 자기도 모르게 목과 몸이 긴장해 굳는 것을 느꼈다. 눈을 질끈 감아 버릴까 고민하던 사이, 선생은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 그녀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기 눈과 그녀의 입술을 순서대로 가리켰다.
“입 모양. 사람은 항상 목소리로만 말하는 게 아니거든. 표정, 몸짓, 호흡, 모든 요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나한테 똑바로 들리고 있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자,
“줄게.”
그가 펼친 손바닥에는 레몬 맛 목캔디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
정신을 차린 뒤에는 이미 그에게 받은 사탕을 입에 넣고 혀로 굴리고 있었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불을 땐 것처럼 열이 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말 뭘까.
이미 몇 번이고 이곳에서 만났지만,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이러다 이 의문이 해소될 때까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걱정이었다.
“……선생은 어째서 매번 여기에 오는 거야? 밥을 먹을 거라면 와일드헌트에는 더 좋은 곳들이 많아……. 밝고 따뜻한…….”
제자리로 돌아가 또 어디 편의점에서 대충 사 온 빵의 포장을 뜯고 있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겠지. 눈을 감고 다니다 아무 데서나 적당히 떠도 예술 같은 동네니까. 근데 그거랑 별개로 난 조용한 게 좋아서.”
“그렇구나…….”
“조용한 사람도 만날 수 있고.”
“…….”
“뭐, 네가 싫다고 하면 올지 말지 고민 정도는 해 볼게.”
“시, 싫다는 건 아니야……. 그냥, 선생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어디를 가든 화제인 샬레의 선생, 그는 약간 수상하지만 분명 상냥한 사람이었다. 꽃보라 아래, 볕 드는 양지에서 귀여운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밥을 먹는 모습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여기는 내게 있어 도피처 같은 곳이니까…….”
“도피처?”
“봐…….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전부 낡고 뒤처졌지……. 그러니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아. 눈치 볼 필요도, 열등감을 느낄 일도, 실패를 무서워할 일도 없어…….”
선생이라는 사람 앞에서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걸까.
모르겠다.
약한 소리 한다고 된통 혼나는 건 아닐까.
카노에는 조심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다리를 끌어안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천히 눈을 감으면 싱그러운 풀 내음과 사각사각 바람을 유영하는 이파리 웃음이 가슴 깊이 파고든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그대로 뿌리를 내린다. 시간을 거스르고,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것처럼 서서히 잊혀 간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앞으로 흐르는데, 나와 이 정원만 뒤를 향해 걷고 있는 것 같아…….”
따가운 정적이 흐른다.
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창백한 뺨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검은색 텀블러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커피, 좋아해?”
선생은 정원 구석에 쓰러져 있던 티 테이블과 의자를 세우고 품에서 꺼낸 멀티툴로 넝쿨을 적당히 잘라 냈다. 자리에 앉은 그는 텀블러 뚜껑에 커피를 쪼르륵 따라 카노에에게 건넸다.
두 손으로 꼭 쥔 커피는 몸이 차가운 그녀에게 딱 좋은 온도로 뜨거웠다. 카노에는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빤히 바라보았다. 커피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굳이 따진다면 좋아하는 것 같지만 모호했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그런 어중간한 대답이 적절했다. 더군다나 언뜻 보아도 새까만 이런 아메리카노라면 더욱 그렇다. 아직은 혀를 찌르는 듯한 그런 쓴맛이 익숙하지 않았다.
“…….”
반면 선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물 마시듯 커피를 홀짝거렸다. 그 옆모습을 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자신감이 생겼다. 카노에는 기운차게 커피 한 모금을 삼켰고, 눈살을 약간 찌푸리며 혀를 살짝 내밀었다.
“맛없지?”
“……그러네.”
“네가 올해 2학년이랬나?”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어때, 따라갈 만해?”
“……뭘?”
“지난주에 다른 학교 중등부 애들 몇 명이랑 뜀박질 좀 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요즘 애들 너무 빨라서 못 쫓아가겠던데?”
“그건…… 단순히 선생 발이 느린 거 아니야?”
“무슨 소리야. 나도 학교 다닐 땐 꽤 빠른 편이었어.”
잔을 깨끗하게 비운 선생이 웃옷 안주머니를 뒤적거리다 그만두고 소탈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너도.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지.”
“나이……?”
“그래. 제 발치만 보고 걷던 아이들이 나이를 먹으면, 깜짝 놀라.”
뻣뻣한 몸을 뒤로 젖힌 그는 손바닥을 펼쳐 쏟아지는 볕을 가렸다.
“그야 깜짝 놀라겠지. 고개를 들었더니, 세상이 너무 넓잖아.”
“…….”
“……내 생각엔 네가 뒤를 향해 걷는 게 아니라, 발이 빠른 애들이 너무 많은 거야.”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이런 느린 다리로……. 분명 여기에 있는데 아무도 봐주지 않으면……. 이 정원처럼 잊혀지고, 그대로 죽는 거야……?”
“죽긴 누가 죽어.”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잔뜩 움츠리고 있던 카노에는 조심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선생은 어느새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짙은 두 눈동자에 어린 별이 두려움에 떨며 빛나고 있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멈춰 서는 게 아니야. 어제를 살아 긴 밤을 지나왔다는 얘기니까. 느리든 빠르든 앞을 향해 걷고 있다는 거지.”
카노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얼 보고 그렇게 자신하는 거야.
그 말을 몇 번이고 입속에서 오물거렸던 그녀는, 끝내 꺼내지 못했다.
커다란 구름이 머리 위를 지나간다.
짙은 그늘은 따뜻한 해를 가리고 바람을 서늘하게 만든다. 생기를 잃은 정원의 풀내음은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무심코 입술을 깨물었다.
“……살아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남들 다 하는 쉬운 일 하나 제대로 못 해.
하고 싶은 말도 똑바로 꺼내지 못해.
한마디 감사조차 맘 편히 건네지 못해.
그렇게 앞서가는 이들의 등을 멀뚱멀뚱 맨 뒤에서 바라보며.
누구도 봐주지 않는 우리를, 정말 살아있다고 말해도 되는 걸까.
“그럼. 네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가 말해 줄게. 잘살고 있다고.”
그는 자신이 한 말이 멋쩍었는지 한두 번 헛기침하고 괜스레 목덜미를 문질렀다.
“카노에. ……괜찮으면 손 좀 빌려도 될까?”
“손……?”
“그래. ……아. 변명 좀 하자면 절대 이상한 의도가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이런 아저씨가 하는 말이라 신용도가 팍 떨어져 들릴 것 같긴 한데. 싫다면 거절해도……”
“여기…….”
“……오. 고맙다.”
카노에는 선뜻 오른손을 내밀었다.
“선생의 손은…… 따뜻하네.”
“몸에 열이 많은 편이거든.”
“그리고 같은 사람의 것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커…….”
“아무래도 주변에 여자애들이 많으니까, 남자 손은 좀 낯설지.”
선생의 손은 놀랄 만큼 커서, 살짝만 포개도 그녀의 작은 손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 이렇게 커 보여도……. 네가, 멀리, 아주 멀리. 그래. 저기 조그맣게 뚫려 있는 하늘 구멍 위에서 이 손을 바라본다고 생각해 봐. 그래도 이렇게 커 보일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지? 하물며 내 손도 그런데, 이 작은 손은 오죽 작아 보일까. 카노에. 너도, 나도, 이 정원도. 이 거대한 숲의 작은 땅, 이 넓은 세상의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아.”
“…….”
“우리는 너무 많은 걸 손에 잡을 수 없어. 그 사실을 점점 깨달아 가는 거야. 처음엔 그게 무척이나 분하고, 억울하고, 슬프겠지만…… 괜찮아. 이렇게 우리의 손 크기가 다른 것처럼, 각자 자신의 페이스대로 천천히. 천천히 해 나가면 돼.”
“이렇게 느려도……. 그래도, 괜찮은 거야……?”
“그래. 이렇게 딱 잡을 수 있는 것만 잡아.”
그가 그렇게 말하며 잡은 손을 조심스럽게 포개자, 카노에는 그 따스함에 녹아 무심코 깍지를 끼었다.
“비관적이게 된 자신을 자책할 필요 없어. 애초에 모르는 게 당연해. 내가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우리는 그저…… 그럴 거라고. 자신을 믿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거야.”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해?”
그 불안한 질문에, 선생은 어째서인지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와 동시에 숲을 덮고 있던 두꺼운 구름이 걷히고, 환한 태양빛이 눈앞을 샛노랗게 물들였다.
“고통스럽고 힘들겠지만……, 잘해 온 너라면. 언젠가 꼭 누군가 나타나서 괜찮을 거라고. 잘하고 있다고 말해 주겠지. 정 자신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을 믿어 줘.”
아침에 눈을 뜨면, 거울 속의 내가 지독히도 못나 보일 때가 있다. 지저분한 방구석의 묵은 때를 발견한 듯한 눈빛으로, 나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본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런 식으로 나를 보고 있겠지.
내가 봐도 이렇게 못났으니까.
애써 입꼬리를 잡아당겨 웃는 척을 해 본다.
그 거짓부렁 같은 미소를 짓는 나를, 나는 믿을 수 없었다.
“아…….”
하지만 어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는 그의 강직한 눈동자에 비친 나와, 닮은 꼴이라 여겼던 정원은 반짝반짝 빛나며 한없이 진실하게 비추어지고 있었다.
“……믿어 볼게.”
당신의 눈에 비친 솔직한 나를, 이토록 아름답게 세상을 담아내는 눈을 가진 당신을, 그런 우리를 조용히 감싸 안는 이 정원을.
한 소녀가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수많은 밤이 지나 그날도 아침이 왔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이쪽이 맞는지,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던 소녀는 눈이 쌓인 소박한 정류장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소녀는 지쳐 버렸다.
더 이상 나아갈 의욕도, 자신도 없었다.
결국 소녀는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죽여 울기 시작했고, 잠시 몸을 녹이려고 온 그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소녀가 어떤 상황에 부닥쳤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익히 보아 왔기 때문이었다.
난감한 형국에 어색하게 서 있던 그는 말했다.
“잘 왔어요! 저와 이 정류장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는 소녀를 환대해 주기로 했다.
다행히 소녀는 그의 말을 믿어 주었고 마음의 짐을 조금씩 풀어놓았다.
“여기는 중간 지점이에요. 똑바로 걸어 온 거죠. 당신을 기다리고 있던 정류장과 저를 만났으니까요. 종착역은 여기서 조금 더 먼 곳에 있지만, 무리하게 뛰지 말고 천천히 가다 보면 분명 도달할 수 있을 거예요.”
소녀는 그의 말에 기뻐하며 울음을 그치고 정류장에서 나가는 문을 잡았다.
“……카노에 양?”
“이거…….”
“쪽지네요……?”
「지난번에는 갑작스럽게 미안. 나, 다른 사람보다 목소리가 작아서 똑바로 말을 못 했어……. 그래서 의식하고 크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평소에 얘기할 기회가 적어서…….」
“아! 그랬군요. 그런 줄도 모르고 괜히 무안하게 해 드린 것 같아 죄송해요…….”
“……아, 아니야. 나는 그냥 괜찮다면…… 그러니까, 같이 점심 먹지 않을래, 하고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그는 거짓말을 했다.
이 세상에 종착역은 없었고, 그 역시 세상을 방황하다 우연히 이곳에 왔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가슴에 품은 채, 나아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는 씁쓸함을 느꼈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소녀와 같은 이에게 누군가는 그와 같이 말해 주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그와 같이 방황하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정말 다 우연이었을까.
소녀가 그의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는 것처럼, 그 역시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차가운 현실이 실은 거짓은 아닐까.
소녀를 만났다는 것은, 이 찰나의 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 말, 아직 유효한가요?”
“……응?”
“후후. 사실 저, 전부터 카노에 양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마침 좋은 기회를 주신 것 같아서요.”
“……저, 정말?”
“정말요! 같이 드시겠어요?”
“……아, 응. 좋아.”
“와아! 저도 좋아요. 처음 봤을 때부터 무척 귀여우셔서…… 어떤 분인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먼저 관심을 가져 주실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
4
하루는 그리움을 제분한 듯한 눈물과 함께 잠에서 깼다. 제 것이 아닌 먹먹함을 제 것처럼 느끼며, 카노에는 긴 시간 사색에 빠졌다.
꿈속에서 보았던 그녀의 모습은 마치 어릴 적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의 그때. 어두컴컴한 수면 아래에 홀로 갇혀 있던 그녀는 낯선 온기를 의지했다.
하루하루가 쓸쓸하고 우울하기만 했지만, 신기할 정도로 악몽을 꾼 적은 없었다. 이유라면 분명, 자고 일어난 뒤에도 양손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누군가의 온기.
“그렇구나…….”
바로 그 따스함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한다고,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차갑기만 했던 내 손을 녹여 주었던 건, 역시 당신이었구나…….”
저기, 선생<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뭔데?
선생에게 모모톡을 보냈던 카노에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손가락으로 사랑스럽게 어루만지며 주체하지 못하고 튀어나오려 하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건…… 비밀.<
아마 선생한테도…… 좋은 일일 거야.<
어때? 궁금하지?<
그럼 직접 와서 확인해야겠지?<
오면 알려줄게.<
이히히……<
>궁금하긴 한데…….
>어쩔 수 없네. 마침 그쪽에 볼일도 있고.
>갈게.
―
이번에도 재밌게 봐줬으면 좋겠다.
느낌상 4-5화쯤에서 끝날 것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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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화부터 느낀거지만 표현하는 방식이 너무 이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