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밤의 희망은 꿈속에서 기다린다
86,564자
*에덴 조약 완결 후 ~ 최종장 사이
*미카가 최애인 선생님의 키보토스
1
“어라?”
눈꺼풀 위로 내리쬐는 노란 햇살에 잠에서 깼다. 눈가에 물방울이 고여 있었다. 손등으로 훔쳐내 확인하려 하자, 금세 피부에 스며들어 사라져 버렸다.
꿈을 꿨다.
어쩐지 차갑고 쓸쓸한, 아무도 없는 겨울의 가로수길을 홀로 걷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나는 꿈을 자주 꾸는 편이었지만, 꿈의 내용을 제대로 기억해 본 적이 없다. 행복한 꿈도, 악몽 같은 꿈도 잠에서 깨면 파도가 멎으며 잔잔한 파동이 되어 수면에서 사라져 갔다.
남에게 설교하는 게 취미인 친구는 이 이야기를 듣고 ‘미카, 덕분에 오랜 불면증을 고치고 숙면에 취하는 방법을 깨달았네.’ 라더니 ‘자네처럼 단순 무식한 바보가 되는 게야.’ 하고 비아냥거렸다.
욱해서 곧장 응수해 주고 말았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내가 먼저 뭔가 그 아이의 심기를 건드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으음…….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진 거 같네.”
이 노후한 다락방은 성한 것을 찾는 게 더 빠를 거야.
올려 묶은 머리를 풀고 공기가 텁텁한 것 같아 창문을 열었다. 이른 겨울의 아침 인사가 들이닥치고 얇은 슬립을 입고 있던 나는 두 팔을 감싸 안아 파들파들 떨었다. 그리고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간밤의 꿈을 떠올렸다.
기억하다니. 이상해.
명백히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나는 꿈을 기억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지만, 감각적으로 가슴 속에 남아있었다.
아마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텅빈 수영장에 움츠리고 앉아, 외롭게. 당최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왜 그런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그 하염없는 기다림이 애달파서, 조금 울어 버린 것 같다.
나는 어제 사 온 식빵을 야금야금 뜯어 먹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모모톡의 채팅 목록이 숫자 하나 없이 깨끗한 것을 보고 맥아리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아…….”
꿈속에서의 내가 그러했듯, 현실의 나 역시 누군가의 연락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2
“혹시……, 최근에 선생님한테 연락 온 사람 있어?”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친구들이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
다기가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
전부 내 질문과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째서인지 정면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어 시선을 피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왜 이러는 거야! 이상한 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분명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한 오후 햇살이 발그레 내리쬐는 탓이다. 나는 뻣뻣한 움직임으로 월계수가 그려진 접시 위의 롤케이크를 포크로 잘라 입술 사이로 밀어넣었다.
우물우물.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흩날리는 연분홍 머리카락에서 애용하는 샴푸의 솜사탕 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저기, 두 사람 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내가 막, 그……, 이상한 걸 물어본 건 아니지 않아~!?”
억울해!
나는 찡그린 눈꼬리로 최대한 항변했다.
“미카 씨.”
맞은편에 앉은 소녀가 우아한 손동작으로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는다. 얽힌 실뭉치처럼 복잡한 내 심경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차분한 분위기였다.
냉혹한 티파티의 호스트. 정치적 페르소나가 두꺼운 필리우스 분파의 수장. 하지만 가벼운 장난에도 쉽게 휘둘리고 건조한 듯 보여도 속은 여린 소꿉친구.
나기사는 잠시 동안 눈을 감고 입안에 머금은 홍차의 향을 음미하는 듯했다. 그리고 등허리에서 뻗은 하얀 날개를 크게 펄럭이며 되물었다.
“여기서 선생님과 가장 많이 연락하는 사람은 미카 씨 아니었나요?”
어라? 묘하게 날이 서 있지 않아?
나는 그녀의 말을 잠시 곱씹었다.
가장 많이 연락하는 사람? 나, 선생님이랑 그 정도로 자주 연락했었나? 그냥 하루에 서너 번 선생님이 바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골라 안부를 묻고, 가벼운 사담을 나누는 정도인데. 아, 최근에는 선생님 쪽에서 먼저 연락해 준 경우도 많았지.
“응? 그, 그랬나? 두 사람은 선생님이랑 연락 잘 안 해?”
“…….”
나기사는 한쪽 눈을 반쯤 게슴츠레 뜨고 이쪽을 응시했다. 그 시선이 민망해서 연거푸 눈을 깜빡거리니 그녀가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순진한 겐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는 겐지…….”
이어서 또다른 소녀가 큼직한 여우 귀를 쫑긋거리며 빈정댔다. 금실 같은 털과 머리카락이 태양빛을 받아 고풍스럽게 빛났다.
무슨 의미로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좋은 뜻이 아니란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세이아는 그런 아이였다.
“그러네요.” 하고 나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나만 빼고 공감을 주고 받으며 동시에 찻잔을 든다.
치사해. 저 둘은 눈만 마주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 같단 말이야.
“주에 한두 번 정도는 연락을 드리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그 내용의 전반이 샬레의 일이나 티파티의 업무니까요. 선생님께서도, 저도, 서로 바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서……. 그러니까, 다시 말해 다소 드문드문하다고 할지…….”
“그, 그래? 막 오늘 뭐 했는지, 별일 없었는지, 그런 얘기는 안 해?”
“네? 간단한 안부 정도는……. 저기, 미카 씨. 혹시…….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렇구나. 선생님과 사적으로 자주 연락하고 있는 건 나뿐인 거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양팔을 마구 흔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껴안는 베개를 꽉 쥐고 매트리스 위에 뛰어들고 싶었다.
“잘 참았네, 나기사.”
그런 와중에 세이아가 끼어들었다.
“세이아 쨩. 무슨 소리야? 잘 참다니, 뭘?”
감성에 젖는 것을 방해한 것이 얄미워서 나도 모르게 쏘아붙이듯 고개를 불쑥 들이밀었다.
“무심코 돌을 던진 사람은 맞은 개구리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지.”
“개구리?”
으응?
세이아는 내 벙찐 의문에도 전혀 괘념치 않고 나팔꽃 같이 생긴 소매에 가려진 두 손으로 뜨거운 찻잔을 감싸쥐었다. 그리고 홀짝 마신다.
“음……. 향의 깊이가 조금……. 온도도 조금 차이가 있는 것 같고……. 나기사, 지난 번에 마셨던 홍차와는 블렌딩이 다른 겐가?”
정말이지, 세이아 쨩도 참. 왜 항상 간단한 이야기를 이렇게 빙빙 둘러서 어렵게 말하는 걸까?
“응, 완전히 이해했어.”
“……정말인가? 그런데, 왜 갑자기 일어서는…….”
“좋은 의미로 한 소린 아니란 걸 완전히 알겠어!”
“잠깐, 미카. 그렇게 팔을 걷어붙이고 씩씩대면서 다가오지 말게. 자네를 비방하려는 의도로 한 얘기는 아니라네. 가끔은 설교하는 입장도 생각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미카. 그 이상은 정말로 위험하네. 내가 잘못했네. 동물원의 고릴라도 그렇게 쉽게 흥분하진 않을 걸세. 사람이면 사람답게 대화로……. 나, 나기사? 여기 좀 도와주지 않……”
빨래집게 같은 내 손가락이 세이아의 두 뺨을 찹쌀떡처럼 늘려 놓기 직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기사가 “저!” 하고 큰소리를 냈다.
깜짝 놀랐다. 나는 그녀가 화를 내는 줄 알고 흠칫했는데, 낌새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약간 뭐라고 할까. 어린 형제 사이에 ‘우리 엄마랑 아빠는 나를 더 좋아해!’ 라는 말을 들은 동생이 지을 법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기사와는 땅꼬마 같은 시절부터 함께 해 왔지만, 굉장히 낯선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대로 행동을 멈추고 멀뚱멀뚱 그녀를 지켜보았다.
“저한테도……. 자주는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종종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권해 주시고는 합니다만…….”
“…….”
“…….”
아, 얼굴 빨개졌다.
“뭐야? 질투? 헤에……. 그 나기 쨩이? 흐으응~ 평범한 소녀처럼 질투도 하는구나?”
“네? 아. 네? 아, 아니요. 질투, 질투라니……. 그런 게 아니라, 이건……. 다름이 아니라 저도 선생님과 잘 연락을 하고 있다는 그런, 그런 의미에서 한 얘기지, 그런 게…….”
나기사가 손사레를 치며 반쯤 남은 홍차를 단숨에 들이킨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공식 석상에 있을 때와 같이 습관성 포커페이스를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온데간데없다. 대신 울먹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졸졸 쫓아다니던 여자아이가 그곳에 앉아있었다.
“아핫☆ 그러면, 그러면? 어필?”
“그, 그런 거 아니예요!”
“아야! 왜 때려!”
그리운 추억을 음미하며 생글생글거렸더니 세이아가 내 등짝을 찰싹 때렸다. 맞은 부위가 얼얼하다.
세이아 쨩은 예나 지금이나 쪼끄만 게 손은 맵단 말이야.
“미카. 자네의 그런 부분이 섬세하지 못하단 말이네…….”
“흐흥. 세이아 쨩이 아까 한 얘기, 그런 얘기였구나. 응. 그런 거였구나? 이제 알겠어. 나기 쨩. 선생님이랑 있을 때는 하늘이 무너져도 당당한 척 구는데, 우리랑 있을 땐 가드 약하단 말이지.”
“미카 씨. 그 이상 나불거리면 당장 여기 있는 롤케이크를 전부……”
“역시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지? 잠. 나기 쨩. 으읍……!!”
“매를 버는구만…….”
아무래도 조금 과했던 모양이다. 애써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 보았지만, 나기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문답무용으로 트레이 위에서 가장 큰 롤케이크를 집어 들었다.
그치만 일렁일렁 사라질 것만 같아서.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밤하늘이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상기해서. 조금은 심술을 부리고 싶었는걸.
“아무튼 저는 선생님과 이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뿐이에요.”
“우물우물.”
“미카. 상스러우니 다 먹고 얘기하게.”
“우물우물!”
입안에 가득하던 달콤한 생크림 맛을 남은 홍차와 함께 말끔히 씻어 넘겼다. 내 입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던 세이아가 “그래서 무슨 일인가?” 하고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무슨 일. 무슨 일……. 그러니까.
“하아…….”
“땅이 꺼지겠군.”
그녀의 말마따나, 내 감정은 이미 깊은 곳까지 가라앉아 있었다. 주머니에서 코하루와 세트로 맞춘 연분홍색 젤리 케이스를 씌운 스마트폰을 꺼냈다.
잠금화면은 샬레에서 찍은 종이학. 선생님의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것을 맞은편 자리에서 귀엽다며 찍었다. 사실 정말 찍고 싶은 건 선생님의 사진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없어…….”
없다! 진짜 없었다. 해는 이토록 쨍쨍하게 중천에 떠 있는데도 모모톡의 채팅 목록에는 빨간불이 하나도 떠 있지 않다. 마른벼락이라도 떨어진 건지 하지도 않았던 기대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다.
선생님, 바빠?<
그와의 채팅방에는 오전 내내 고민하다 미처 보내지 못했던 말이 입력창에 깜빡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자마자 곧장 백스페이스 버튼을 연타했다.
지금은 선생님이 가장 바쁠 시간이니까. 실수라도 보냈다가는 민폐가 되고 말 거야.
마지막으로 그와 대화를 나눈 게 벌써 일주일 가까이 되어 간다.
야―호!!☆<
선생님!! 뭐해, 뭐해? 바빠?<
요즘 쌀쌀했잖아? 그런데 오늘은 날이 엄청 화창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반소매를 입었을 정도야!<
그러니까 혹시<
선생님만 괜찮다면…….<
나, 오늘 샬레 근처에 들릴 일이 있을 거 같거든…….<
아, 선생님이 바쁜 건 알고 있어.<
쿨하게 거절해도 난 괜찮으니까!!<
근처에서 차라도 한잔 하지 않을래? (≧∇≦)/ <
>미카
>미안, 좀 힘들 것 같아.
>지금 급한 일이 좀 생겨서
>한동안 많이 바쁠 거 같네.
>시간이 되면 다시 연락할게.
아. 눈으로 훑어보기만 했는데, 또 울적해. 꼭 데이트 신청했다가 차인 궁상맞은 여자 같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는걸. 선생님, 엄청 바쁘니까. 오히려 여태까지 운이 좋았었던 거라고 봐야지. 분명 일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 선생님이 먼저 연락해 줄 거야. 나는 착한 아이처럼 얌전히 그걸 기다리면 되는 거고.
분명 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나는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고 그에게 보낼 이 아름다운 날의 하루 인사를 쓰고 지우기 반복했다. 한번은 조심스럽게, 한번은 활기차게, 또 한번은 애교스럽게.
어느새 내 스마트폰의 코앞까지 고개를 들이밀고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세이아가 새침하게 말했다.
“마치 데이트를 신청했다가 차인 궁상맞은 여자 같군.”
이……, 이……!!
“야!”
“아하……. 그렇게 된 거였군요. 저도 아직 자세한 내용은 전달 받지 못했습니다만, 총학생회까지 조사에 나섰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리 미카 씨의 부탁이라도 선뜻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으셨겠지요. 어라? 그러고 보니 세이아 씨. 세이아 씨도 어제인가 선생님께 연락한다고 하시지 않으셨던가요? 사적으로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고…….”
사적으로?
나는 나기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세이아에게 정곡을 찔려 차오른 열을 삭히고 그녀의 스마트폰을 노렸다.
설마 선생님과 하하호호하진 않았겠지? 나한테 아무 말도 없이? 분명 시간이 생기면 연락해 준다고 했는데!
“잠깐, 미카. 자네가 지금 하려는 행동은 명백한 프라이버시 침해일세. 그만두게!”
“세이아 쨩도 내 모모톡 훔쳐봤잖아! 이건 불공평해! 나도 볼래!”
입을 앙다물고 몸을 내빼는 것을 붙잡아 가까스로 세이아의 스마트폰을 쟁취했다. 항상 그녀 주위를 지키는 흰머리 오목눈이 몇 마리가 작은 부리로 내 손등을 쪼아댄다.
“아얏! 잠깐, 잠깐만 보고 금방 돌려줄 테니까!”
선생님, 용건이 있다만.<
잠깐 얼굴을 볼 수 있겠나?<
아, 물론 대단한 용건이 있는 건 아니네.<
다만 얼굴을 못 본 지도 꽤 되었으니 그 겸사겸사가 되겠지.<
아니, 어쩌면 이쪽이 용건보다 우선일지도 모르겠군…….<
“우와아…….”
세이아 쨩. 선생님과 이야기할 때는 이런 느낌이구나.
그녀가 모모톡을 보낼 때 손가락에 담았던 미묘한 감정이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세이아 쨩. 이거, 대놓고 플러팅한 거 아니야?”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방금까지 얌전하게 앉아있던 나기사가 어느새 먹이를 찾은 두루미처럼 목을 쭉 빼고 다가와 말을 거들었다.
“……무슨 소리.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관계에 입각한 서신에 불과하네. 말은 경애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수단이니까. 조금은 친근감을 담아 사족을 붙였을 뿐, 지극히 개인적인 연락 수단인 모모톡에서 이 정도는 흔하지 않나.”
“그냥 보고 싶다는 말을 빙빙 돌려서 한 게 아니고?”
“……오산이야.”
어려운 말로 갖은 핑계를 주저리주저리 설명하더니 이내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홍차를 홀짝거리며 눈을 감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한다. 하지만 자기가 마시고 있는 음료의 색깔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귓볼은 숨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역시 연락은 없으셨군요…….”
“여기 궁상 맞은 여자가 하나 더 있었다는 얘기지☆”
“……미카.”
“아야! 먼저 놀린 건 세이아 쨩이잖아! 너무해!”
받은 말을 돌려주었을 뿐인데!
그녀의 앙증맞은 오른발이 내 발등을 짓눌렀다. 약간의 욱씬거림. 틀림없는 고통.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것을 느끼는 동안 먹구름이 걷히는 듯했다.
적어도 선생님이 나를 피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니까.
절대로 선생님의 말을 의심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다만 직접 보고 듣고 느끼지 못하면 숨을 쉬는 게 짜증이 날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지곤 해서.
이래선 귀찮은 여자라는 얘기를 들어도 어쩔 수 없잖아…….
“나기 쨩?”
방금까지 같이 생글거리던 나기사의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무언가를 곰곰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예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하고 대답을 피했다.
이어서 공중 정원의 커다란 문을 열고 필리우스 분파의 수행원 한명이 들어와 그녀에게 긴밀하게 말을 건넸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나는 괜스레 눈치를 보며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찰랑거리는 홍차를 입에 대 보았지만, 차갑게 식어 있어 더 이상 풍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꽤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가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나누었고, 내 시선을 의식한 수행원은 가볍게 묵례 한 뒤에 자리를 떠났다.
아무래도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진 듯했다.
“미카 씨? 벌써 돌아가시나요?”
“아, 응! 오후에 일정이 있거든. 슬슬 돌아가서 준비라도 해둘까나~ 해서……. 에헤헤. 그리고, 그리고, 응? 나기 쨩도 세이아 쨩도 요즘 선생님 못지 않게 바쁘잖아? 벌써 이런 시간이고 말이야.”
“그러네요…….”
“그치? 오늘은 두 사람 모두 초대해 줘서 고마워! 나, 이렇게 다시 모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거든. 너무 기뻐.”
“뭘. 나도 나기사도 경황없는 일과 속에 가끔은 이런 안식의 시간도 필요했던…….”
퉁명스럽게 말하는 세이아와 일순간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말문이 막힌 듯 잠깐 입을 뻥긋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게 아니군. 자백하도록 하지. 미카. 우리는 자네와의 시간이 얼마나 긴요했는지 깨달았네. 타인과의 관계가 그러하듯, 친우와의 관계도 보여지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니까. 이 시간은 그동안 미루고 있던 화음의 완성이 될 것이네. 앞으로도 이런 시간이 자주 이루어질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
“세이아 쨩…….”
“미카 씨. 이곳, 공중 정원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답니다. 저희는 정말 급한 용무가 있는 게 아니라면 언제라도 괜찮으니, 미카 씨도 초대해 주세요. 기꺼이 참석할 테니까요.”
“나기 쨩……!”
두 사람이 이렇게나 나를 생각해 주다니.
통통 튀어 올랐다. 잔잔한 수면 위에 반짝거리는 고기 떼가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내 눈은 뜨겁고 뭉클하게 달아올라 카메라 렌즈처럼 번뜩이며 우리라는 바다를 담아내려 했다.
나는 두 사람을 가볍게 끌어안고 부푸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아 감사를 전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만. 그 이상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중 정원을 나서기로 했다.
무심코 팔에 힘을 너무 넣어 버렸는지, 목이 졸려 켁켁거리던 나기사는 아쉬워하는 내게 아직 여유가 있으니 좀 더 있다가 가도 된다고 숨을 고르며 말했다.
평상시 이 시간은 두 사람 모두 무척 바쁜 시간이다. 종종 찾아와도 티파티의 업무에 관한 이야기만 사무적으로 했었고 나에게 신경 써 줄 여유는 없어 보였다. 거기에 더해 나기사는 지금, 나 때문에 하나의 커다란 짐덩이를 더 짊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도, 그 귀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내게 건넨 것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돌려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과분한 이야기까지 덤으로 받아버렸는데, 나는 내어 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꼭 다시 올게!”
다음에는 내가 오늘 먹은 것보다 더 맛있는 디저트를 포장해 오자. 그런 생각을 하며 멀어져 가는 두 사람에게 호들갑스럽게 손을 흔들었다.
좀 더 놀고 싶어. 좀 더 어리광부리고 싶어.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순진하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바라는 것일수록 나누는 편이 분명 더 좋은 미래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두 사람 옆에 설 수 있을까?
혼잣말처럼 툭 흘렸던 그 질문에 선생님은 ‘미카가 두 사람을 싫어하게 되지 않는다면.’ 이라고 답했다.
나는 당연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는 ‘그래서 한 얘기야.’ 하고 피식 웃으며 ‘말했잖아. 미카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그리 장담했다.
“나, 열심히 할 테니까!”
커다란 공중 정원의 문을 열자, 까마득한 앞날처럼 어둡고 컴컴한 복도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막막함에 침을 꼴깍 넘겼다.
그런 미래가 정말로 존재하는 걸까?
그의 말을, 나는 마냥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재야말로 절대 있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미래였으니까.
불안해. 무섭고 겁이 나지만, 그때처럼. 도망치지 않고 한걸음씩 내딛다 보면 꼭.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3
백 개에 가까운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한점에 모인다.
넌 꿈을 꾼 거야.
누군가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조금 전의 벅차오르던 감정도, 눈에 가득 차던 친구들도 전부. 모두 다. 아침이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별빛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이 반전되어 버렸다.
온몸에 끈적한 점액질을 흘리는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것들은 고개를 돌려도, 눈을 질끈 감아도 일절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눈꺼풀이 아플 정도로 힘껏 도망친 어둠 속까지 쫓아와 맹독을 지닌 독사처럼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도무지 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차가운 쇳덩이가 발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이 모든 게 내가 자처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이런 분위기에는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네. 나…….”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채, 들리지 않게끔 중얼거렸다.
불현듯 코하루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공포가 안개처럼 내려앉은 난국에도 넘쳐나는 두려움 대신 기적 같은 용기로 내 앞을 가로막았던 그 모습.
나에게는 그런 용기가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애써 외면하며 언제 그칠지도 모르는 눈보라가 지나가기를 염원하는 것뿐. 그게 최선이었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래서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꼭 돌아오겠다느니, 열심히 하겠다느니. 불과 몇 분만에 손바닥 뒤집듯이 마음이 약해진다. 결코 거짓말을 한 건 아니지만 꼭 거짓말을 한 것처럼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나를 짓누르는 쇳덩이의 무게를 다시금 실감한 것이다.
이곳에 과오를 짊어진 내가 뻔뻔하게 다시 발을 디딘다는 건, 두 사람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전과 같이 홍차를 마신다는 건, 바로 이런 의미다.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그날의 후회가 덧이 나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주먹을 꽉 쥐며 안간힘으로 버텼다. 선생님이 할 수 있다고 말해 주었으니까.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분명히 견뎌 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미카 님, 동행하겠습니다.”
“으앗!?”
누군가가 말을 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귀신이라도 마주친 양 화들짝 놀라 몸이 튀어올랐다. 얼마나 놀랬으면 과장된 만화처럼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환상을 보았을 정도다.
그 탓이라고 할지, 그 덕이라고 할지. 조금전까지 뇌리를 잠식하고 있던 모든 상념들이 미친듯이 팔딱거리는 심장 바운스를 타고 떠내려갔다.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돌리니 나기사를 찾아왔던 수행원이 따라붙었다.
정원에서 묵례를 나누었을 때도 느꼈지만, 역시 썩 좋은 인상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나기사의 고지식한 면을 닮은 것 같기도. 생각 없는 소리라도 입 밖으로 냈다간 된통 꾸지람을 들을 것만 같았다.
“으, 아, 응. 고마워. 입구까지면 되니……, 딸꾹.”
아.
다급하게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딸꾹.”
“알겠습니다.”
아아아아아아―――!! 분명 주변에 있던 아이들까지 다 들었겠지? 절대 그랬을 거야. 으아아……. 민망해…….
하지만 막상 정면에서 목격한 이 아이는 무덤덤해 보였다. 원래 이런 돌발적인 상황에 익숙한 것인지, 아니면 나를 위해 배려해 주는 것인지.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명상할 때처럼 평온하게 눈을 감고 앞장서서 나를 이끌었다.
거기에 끌려가듯이 발이 떨어진다. 차마 고개는 들지 못하고 쫄래쫄래 뒤따랐다. 분명,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이 자유로워진 것은 이 아이 덕분이겠지. 거기다 타인의 수치를 보고도 모르는 체해 주는 섬세함까지 가지고 있다.
좋아. 첫인상에 대한 편견은 말끔하게 지우자! 이 아이, 분명 좋은 아이 같아. 생각해 보니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기 쨩의 측근인걸. 나한테까지 싹싹하게 구는 걸 보면 단순히 인상 때문에 손해 보는 타입일 거야.
“저기, 저기, 있잖아.”
“예.”
“아까는……, 딸꾹! 흡.”
아, 왜 꼭 말을 하려고 할 때 꿀렁거리면서 튀어나오는 거야!
“이……, 이쪽이에요↗”
삑사리?
“…….”
“흠흠. 죄송합니다. 이쪽으로…….”
취소.
앞에 칭찬했던 거 취소―!!
없던 일로 하고 자연스럽게 넘어가려고 했는데, 이 아이. 누가 양 옆구리에 들러붙어 집요하게 간지럽히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깨가 들썩들썩 춤을 춘다. 갑자기 말을 끊고 튀어나간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였겠지!
안일했다. 이래 봬도 원래는 한 분파의 수장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다. 정치니 뭐니 하는 귀찮은 얘기는 질색이었지만,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기를 세우고 다니고는 했었다.
그걸! 그랬던 사람이! 충분히 의기소침할 만한 정황이었다곤 해도 이렇게나 얼빠진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서 매트리스에 얼굴을 파묻고 싶었다.
너무해.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웃었으면. 아니, 역시 싫어. 부끄럽잖아. 끝까지 못 본 척 해 줬어야지, 정말! 고맙다는 말을 어떻게 전할지 한참 동안 고민한 끝에 말을 건 거였는데.
그렇게 좋은 아이스 브레이킹의 기회를 통째로 날려 버리고 말 없이 복도를 거닐었다.
거북하다. 완전 거북하다.
또각또각. 걸을 때마다 다시 무거워지는 구두의 굽소리가 이 넓은 공간에 울려퍼졌다.
티파티가 사용하는 이 건물은 어디든 각 분파의 임원들로 빼곡해서, 나의 존재는 좋든 싫든 부담스러운 이목을 끌게 되어 있다. 임시 처분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그게 꽤 좋은 방향으로 작용하곤 했었다. 지금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만.
그때는 샤방한 눈으로 알쫑거리는 후배의 칭찬이 쑥스러워서 솔직하게 기뻐하지 못했었다. 눈은 두리번두리번 갈 길을 잃고, 몸은 쭈뼛거리고. “그, 그래? 에헤헤…….” 하며 실없이 웃기만 했다. 신경 쓰지 않는 척 쿨하게 굴려고 했었다.
그런 주제에 주말만 되면 드레싱 테이블 위에 아끼는 액세서리들을 너저분하게 흩어 놓고 새하얀 두 날개와 머리에 하나하나 달아 보며 다음 주의 허영을 각별히 공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공허할 뿐이다. 무척이나 쓴 커피를 마신 것처럼, 혀끝에 아련하게 남았던 그때의 그리움은 몇 번의 목 넘김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만 해도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던 아이들은 나를 발견함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길을 터줄 뿐, 하나같이 침묵으로 맞이했다. 꼭 마네킹이 줄지어 선 인형숲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해프닝 덕분에 조금은 나아졌나 했던 기분이 다시 차갑게 식는다. 바닥에 남기는 발자국의 수만큼 좋지 않은 생각들이 늘어간다.
참 웃기는 일이다.
바람이 무척 차가운 날, 여기서 잃어 버렸던 별 볼 일 없는 슈슈를 돌려주기 위해 대성당 앞에서 몇 시간이나 나를 기다렸던 후배는 “너무 이쁘고 잘 어울리셔서, 꼭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했어요.” 말하며 눈웃음을 지었다.
나라는 녀석은, 그 애틋한 마음이 정교하게 세공된 그녀의 눈동자보다도 하나의 원수를 향해 들이미는 서늘한 칼끝들에 더 깊이 꽂히는 것이었다.
물론 예전에도 나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적잖게 있었다. 그때의 나는 좀 더 당돌해서, 갖고 싶은 게 있거든 어떻게든 거머쥐려 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거든 당당하게 떵떵거렸다. 그래도 이건 자만이지, 거만은 아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있었다.
그랬던 게, 지금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이제는 일부에 그칠 리가 없으니까. 대부분. 아니, 어쩌면 모두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한 얘기다. 그들이 나를 좋아해 주었던 만큼, 똑같이 좋아했을, 그리고 나 역시 정말 좋아하는 두 사람을, 나는.
나는―――
“―――마녀.”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가 고요하던 복도에 파동을 일으켰다. 나도 모르게 질끈 씹은 입술에서 밍근하고 비릿한 맛이 느껴졌다.
잘못 들은 걸까?
아니, 똑똑히 들었다.
내려앉은 서리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목소리는 잊을 수 없도록 몇 번이고 귓바퀴에 메아리쳤다. 제아무리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 귀를 막아 보아도 멎지 않았다.
그러니 잘못 들었을 리가 없다. 수도 없이 나에게 새겨졌던 그 말을. 가슴이 답답해서 숨을 쉬는 게 조금 버거웠다. 억지로 숨을 내쉬려고 하면 쉰 소리가 컥컥 나오며 목이 따끔거렸다.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두리번대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의 목소리였을까? 저기 저 창가에서 시시덕거리는 상투스 분파의 애들이 그랬을까? 아니면 아까부터 서툰 솜씨로 나를 미행하고 있는 저 아이들이 그랬던 걸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말한 아이를 탓할 생각도 없었다. 단지 조심스럽게 두 어깨에 손을 올리고, 겁을 주지 않도록 애써 웃어 보이며, 자신이 없어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간절하게 호소하고 싶었다.
그 말은 한 사람에 의해 부정되었다고.
분명 이상한 소리처럼 들리겠지?
고작 한 사람이다. 그 사람이 대체 뭔데 그런 자격이 있냐고 따지고 들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렇다 해도 나는 물러설 수가 없는 것이다.
밤하늘. 밤하늘 같은 사람이야. 나를, 우리를 품은 가장 큰 사람.
“…….”
하지만 이건 간곡한 바람일 뿐,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었다.
엎지른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고 저지른 일은 없던 것으로 할 수 없다. 원래 굳게 닫혀 있어야 했던 유폐실의 문은 열렸고, 다시금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기회를 받은 것은 많은 이들이 도와준 은혜였다.
그러니 잘못에 따른 책임은 응당 져야 하는 것이고, 나는 스스로를 변호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그게 꼭 선생님이 해 준 말을 부정하는 것만 같아서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아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정원에서 마셨던 달콤쌉싸름한 홍차의 끝맛이 피와 뒤섞이며 엉장진창이 되어 버렸다.
나갈게. 금방 나갈 테니까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 줘.
“미카 님.”
“…….”
“미카 님.”
“어? 으, 응. 미안. 갑자기 치고 나가서 놀랐으려나?”
이 아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꽤 오래전부터 나기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보좌하던 아이다. 당연히 에덴 조약과 관련된 내막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터였다.
얼기설기 듣기로는 중등부 시절부터 나기사를 동경해서 줄곧 발자취를 따라왔다고 했었는데, 입장상 이렇다 할 티를 내지는 않아도 다른 아이들처럼 나를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 그래? 아하핫……. 조금 급한 일이 생각났거든. 그래서 뭔데, 뭔데? 나한테 할 얘기라도 있어? 혹시 나기 쨩에 관한 얘기려나?”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다소 호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명백히 의아했을 나의 행동거지를 보고도 묵묵히 뒤따라왔다. 나를 바라보는 눈도 트리니티의 지긋지긋한 그것과는 달랐다.
“미카 님. 외람되지만……, 가능한 이곳의 방문은 삼가해 주셨으면 합니다.”
―――달랐다고 생각했다.
아. 역시 그렇구나.
나는 원래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게 서툴러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 아니, 만일 그런 재능이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단지 바람일 뿐이었다.
이곳에도 한명쯤은 내 편이 있었으면 해서.
그럴 자격 따윈 없다는 걸 알면서도 늘 낙관적인 바람으로 나를 기만해 왔다. 잘못을 사과하기 위해 세이아를 찾았던 그날도. 오늘도.
“어……, 어? 왜?”
똑바로 쳐다보는 게 힘들어서 시선을 피했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니었다. 단지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듣지 않아도 뻔한 이유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세이아 님과 나기사 님이 환영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으면 입이 시끄러워지니까요. 괜한 불씨가 생기면 어디로 번질지는 미카 님도 짚이는 부분이 있으시겠지요. 그러니 다음번에는 저한테 따로……”
“아, 그……. 아무래도 그렇지? 역시? 응. 청문회가 끝난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티파티도 아직 완전히 내려온 건 아니지만 임시일 뿐이니까……. 너무 스스럼없이 들락거리는 건 좋지 않지? 아하하……. 응. 그러네.”
“미카 님?”
“미안해. 조심하도록 할게. 또 두 사람한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 너한테도 그렇고. 꼭 내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만 오는 게 낫겠지……. 그런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으응.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했거든. 아, 따라와 줘서 고마웠어. 여기서부터는 괜찮아.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거 같으니까. 그럼 다음에 또……, 아니. 그럼 갈게!”
“미카 님!”
아직 할 말이 남았는지 나를 불러 세우려 하는 애처로운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작정 달렸다. 달리고 달려서, 복도를 지나고, 계단을 내려왔다. 스쳐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외면했다.
밖은 절로 눈이 찡그려질 만큼 환했다. 정말 포근한 오후다. 중앙 광장으로 이어지는 쭉 뻗은 산책로에는 모자이크 파편 같은 잎사귀들이 사각거리고 작은 새 몇 마리가 풀밭을 발발거렸다.
“하아……. 하아……. 역시 따뜻한 곳이 좋아. 따뜻한 곳이…….”
속이 조금 울렁거린다. 건물벽에 기대어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상하다. 분명 해가 드는 곳으로 나오면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사방히 꽉 막힌 듯 숨이 막히고 답답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아직도…….”
고개를 드니 커다란 유리문에 익숙한 방이 비쳤다.
지면에 내리꽂힌 쇠창살, 먼지 쌓인 피아노, 습하고 퀴퀴한 공기와 수명이 다해 깜빡이는 전등.
나는 아직도 거기에 있구나.
4
가시 돋은 장밋길 교정을 지나고, 호화로운 저택이 한참이나 늘어선 향연이 끝나면 보이는 조금은 삭막한 주택가 변두리. 그곳에 종종 찾는 공원이 하나 있다.
평범한 키보토스 주민에게 트리니티는 어떤 이미지인가 묻는다면 대개는 이런 느낌으로 답할 것이다. 사람의 존재가 아득하게 느껴질 만큼 웅장한 대성당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 깊은 역사가 빚어낸 고전적인 양식의 건축물과 함께 축적된 부.
실제로도 그것을 뒷받침하듯 도심은 어딜가도 그런 느낌이고, 사람들은 여유롭고 자신감에 차 있다.
하지만 외곽에 가까운 이 동네는 그 대부분을 내려놓는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 수수한 매무새, 인자한 표정. 사람 사는 곳은 다 똑같다고, 당연히 트리니티에도 이런 곳은 존재한다.
적당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정말 조그만 공원이다. 있는 거라고는 고장나서 바닥이 메마른 채 방치된 소박한 석조 분수대 하나. 애기들이 좋아할 법한 목마 두어 개. 그리고 비좁은 모래사장이 전부다. 사람도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다.
아마 이런 곳에 관심을 가지는 트리니티의 학생은 거의 없겠지. 예전의 나 역시 그랬을 터였다. 그때는 귀엽고 눈에 띄는 것만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가 이런 장소를 알게 된 건 정말 우연 아닌 우연이었다. 언제였더라, 선생님은 종종 엉뚱한 얘기를 툭 꺼낼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아마도 이른 시기에 나타나 쩌렁쩌렁 여름날의 도래를 알/리던 매미 소리와, 오전 구보 중이던 육상부 아이들의 절도 있는 구호가 귀가 부시게 어우러지던 골든 위크 첫날이었던 것 같다.
교내가 한산한 틈을 타 봉사 활동 시간을 마구마구 채울 생각이었던 나는 선생님과 함께 운동장 골포스트 뒤, 커다란 펜스와 녹음이 만들어 준 그늘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뜯고 있었다.
“그곳에 가면 반가운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몰라.”
“에?”
아차! 나 때문에. 내가 꼭두새벽부터 징징거려서 그를 불러낸 탓에 결국 선생님이 더위를 먹고 말았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뜬금없고 등골이 서늘한 한마디였다.
“깜짝이야……. 놀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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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쓰네 조아요
와 고봉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