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저 나구사가 찝쩍대는 이야기
13,137자
거리가.
소란스럽다.
해는 서산으로 떨어졌고 하늘은 금세 몰려든 어둠으로 자욱했다.
하지만 상점가를 거니는 그림자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망령, 혹은 괴이한 것들처럼 땅 위를 떠돌고 있었다.
야시장이 열렸다.
도깨비불 같은 홍등이 노점과 식당가의 기다란 행렬을 따라 행진하라 행진하라 거대한 신목이 있는 곳까지 아득하니 뻗어 있다.
어떤 상인들은 호객을 위해 북을 치며 감미로운 음식들의 향기와 일렁일렁 피어오르는 연기로 손님들을 꾀어내고.
어떤 학생들은 거리 한복판에 놀자판을 벌여 샤미센의 현을 뜯으며 백귀야행 연합학원의 오래된 곡을 연주한다.
선율에 감화된 사람들은 먹거리와 풍류를 두 손에 가득 들고 나막신 신은 발로 달그락달그락 연주 소리에 맞춰 덩실 춤을 춘다.
소녀는 하늘하늘한 물빛 하오리를 잔바람에 펄럭이며 그 소란스럽고 거대한 백귀야행을 거슬러 걷는다.
백옥 같은 피부와 고명한 화백이 그린 듯한 미모.
발목 언저리까지 수놓인 순백의 머리카락은 고운 머릿결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린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자태에 자기도 모르게 일말의 시선을 빼앗긴다.
눈보라 몰아치는 흐린 하늘색을 한 두 눈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는지.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없는 것에 매료되어 길을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매는 사람처럼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돌아본 곳에 이미 소녀는 없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들의 기억 속에 남은 것은 소녀가 품에 꼭 안고 있던 하얀 연꽃 한송이.
백련뿐이었다.
“두고 봐라, 백화요란!!”
“으, 으앙! 같이 가!!”
“다신 안 봤으면 좋겠는데.”
고료 나구사는 꽁무니를 빼고 달아나는 망량즈들에게서 총구를 거두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뒤, 드러난 오른팔을 다급히 하오리로 감추며 돌아서자 노점 주인이 화색을 띠며 다가왔다.
“아이고, 학생! 정말 고마워. 고마워! 학생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한 건….”
“아니야. 하마터면 그대로 장사 접어야 할 판국이었다니까! 아무튼. 이, 이걸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노점 주인은 그녀의 두 손을 잡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무엇인가 챙겨줄 게 없는지.
놓아줘.
하지만 나구사는 이 호의가 당황스럽기만 했다. 결코 겉으로 티를 내진 않지만, 마음 같아선 손을 뿌리치고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직전의 전투로 인해 수많은 이목이 쏠려 있다. 보기 드문 외형, 눈에 띄는 물빛의 하오리, 압도적인 전투력. 사람들은 그녀가 누구인지 금세 눈치챘다.
“저 사람…, 백화요란의…”
“저번에 분명 해산령이…”
“어디 있다가 이제 서야…”
노이즈 같은 수군거림이 끝도 없이 귓바퀴에 맴돈다.
터질 듯이 심장이 뛴다.
들려오는 말들이 진짜인지, 환청인지.
그녀는 구분할 수 없었다.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거칠게 옭아매고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의 인영을 하고 비웃는 어둠들이 갈대처럼 흔들흔들. 흔들린다.
“학생?”
호흡이 가빠온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자신을 둘러싼 어둠들은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그 크기를 키워나간다.
얼른 도망치지 않으면 끝내 그 어둠에 깔려 버릴지도 몰라.
“크윽….”
“아, 저기! 학생!”
나구사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노점 주인의 손을 뿌리쳤다. 감은 눈에 의지한 채, 인파를 헤치고 무작정 달렸다.
더운 날인데도 밤공기가 베일 듯이 차다.
이 칼바람은 업보다.
사명과 책임을 팽개치고 온갖 핑계와 비열함으로 세워 올린 절벽의 끝으로 도망쳤던 날의 단죄.
보이지 않는 마수가 심장을 손아귀에 쥐고 옥죄는 듯 고통스러웠다.
무서워.
보지 마.
나를 보지 말아 줘….
제발….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것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그렇게 한참을 달렸을까.
어느덧 상점가 입구에 서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입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출구가 될 수도 있는 문.
지금이라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도망칠 수 있다.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듯, 나구사는 구겨진 표정으로 한참이나 그것을 올려다보더니 다시 돌아섰다.
눈 앞에 펼쳐진 건 신목까지 이어지는 수많은 사람들, 공포, 두려움.
가녀린 어깨가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나구사는 하오리의 소매를 잡아당겨 간절하게 자신을 끌어안았다.
다시 건조하고 얼음장 같은 얼굴을 쓴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으리라, 그렇게 평생에 다시 없을 결심을 굳혔으니까.
어차피 이대로 도망쳐 보았자 그 남자가 지옥 끝까지 데리러 마중 나올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조금 안심되는 것 같았다.
나구사는 터벅터벅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한산한 골목의 벤치에 앉아 파닭꼬치 하나를 입에 물었다.
우물우물.
편식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역시 축제 요리 중에는 이만한 게 없다. 한동안 잊고 지내며 가장 그리웠던 것 중 하나, 순찰 중에 먹는 닭꼬치.
보기에는 무미건조한 표정이지만 가슴속엔 입안 가득한 행복으로 폴짝폴짝 뛰고 있는 요정 같은 나구사의 본심이 있었다.
꿀꺽.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시선을 주위로 돌리니 골목 안쪽에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종이 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극의 막이 오르는 것을 별가루 같은 눈빛으로 기다리고 있다.
때마침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서쪽 거리 클리어 했사와요!]
>[광장도 이상 없어.]
>[나구사 선배 쪽은?]
[작은 소란이 있긴 했는데 문제없어.]<
>[역시 나구사 선배이시와요! 소녀, 그 쿨함을 본받아 더 열심히 순찰을 돌겠사와요!]
>[유카리, 그만 싸돌아다니고 20분 휴식해.]
>[에에….]
[렌게는?]<
>[모르겠어. 보고 시간에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미]
>[미안! 여기 지금]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니, 왜 내가 순찰하는 쪽에만 이렇게 난리들이야!]
>[여기 지금 망량즈들끼리 패싸움이 났는데]
>[싸우면 내가 상대해 준다고 싸우지 말랬더니]
>[어디선가 카에데가 나타나서 그럼 승부는 듀얼로 결정하는 거야!]
>[이러는 바람에 지금 얘네 무시킹 듀얼하고 있어!]
>[나는 지금 거리가 복잡하니까 인파 통솔 중;;]
>[그, 저기, 좀 도와줄 사람?;;]
>[동쪽 거리도 이상 없다는 얘기네.]
>[그럼 다들 20분 휴식.]
>[다음 정기 보고 시간에 다시 연락해.]
>[아앗! 렌게 선배! 그렇다면 소녀가 지금 당장!]
>[안 돼.]
>[힝….]
>[잠깐만, 키쿄. 왜 내 말은]
>[무시하ㄴ]
>[무시하는 거야! 아오]
>[그럼.]
>[야!]
“여전하구나, 이 아이들은. 하긴.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니까….”
그리고 연극의 막이 오른다. 나구사는 관심 없는 척을 하면서도 흘깃대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간도 생겼으니 조금만 보고 갈까.”
그러고는 품에서 닭꼬치 하나를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이야기는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
어느 이름 없는 설산 마을에 숨어 살던 괴이의 이야기.
실이 이어진 종이 인형들이 춤을 추자 이 소박한 골목이 순식간에 서늘한 설산으로 변해간다. 나구사는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
내용은 흔하디흔한, 오래된 사랑 이야기였다.
눈과 얼음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그 모습 또한 순백인 소녀가 정체를 숨기고 인간 마을에 살던 중 위기가 찾아오고.
복잡한 과거사와 함께 마을로 도망쳐 왔던 소녀는 모두를 구할 능력이 있었지만, 정체를 들키는 것이 두려워 나서지 못하고.
그런 소녀를 남몰래 사모하며 살갑게 지냈던 나무꾼이 애걸복걸 그녀를 설득해 가까스로 마을을 구해 냈다는 이야기.
나무꾼은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지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설득했고 필사적으로 소녀에게 청혼해 끝내 이루어지는 해피 엔딩으로 끝났다.
극이 막을 내리자 천진난만한 아이 하나가 씩씩대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선생님! 주인공은 답답하게 어째서 그렇게 겁을 먹은 거예요? 그렇게나 센데 바보 같아요.”
“…아니. 아니야.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 나구사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삼켰다. 이내 차갑게 식어버린 닭꼬치를 바라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얘들아, 근데 중간쯤부터 나오는 나무꾼 너무 멋지지 않아? 어쩜 그렇게 강직할까.”
“….”
나구사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어린이집 교사는 나무꾼이라는 캐릭터에 꽤나 애착이 있는 모양인지 수줍은 아이처럼 몸을 배꼬며 그를 치하했다. 공감한 몇몇 여자아이들이 와글와글 그녀의 말에 너스레를 떨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나구사는 이 이야기가 영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무꾼의 이야기가 나오는 내내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르게 사실 나구사는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남몰래 비디오 대여점에서 순정 만화나 드라마를 곧잘 빌려보곤 했으니. 집에 있는 쿠션이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는 것도 이게 원인이었다.
이야기 속의 나무꾼처럼 끈질기게도 찾아오더니.
어느덧 그가 찾아오지 않은 지도 벌써 2주가 다 되어 갔다.
물론 나구사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의 일이 있고, 여태까지 그렇게 찾아와 주었던 것이 특별했다는 것쯤은.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함께 빙수 가게에 갔던 날. 영문을 모르고 새빨개져 있던 얼굴을 보며 어린아이처럼 놀리던 그의 해맑은 미소가 떠오른다.
그를 떠올리면 어딘가 가슴 한구석에 돌멩이가 들어찬 것처럼 답답했다. 욱하고 짜증이 날 정도였다.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평소의 모습으로 냉정하게 있고 싶은데. 이래선 능숙하게 ‘백화요란의 부장 대리’, 고료 나구사라는 역할을 해낼 수 없지 않은가.
그녀는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모모톡을 열었다. 여전히 그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조차 2주 전의 것이다.
>[오늘 재밌었어, 나구사.]
>[또 만나러 갈게 ㅋㅋ]
[오지 마]<
>[싫은걸]
>[꼭 가야지~]
멍하니 남아있는 그와의 흔적들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초조해진다.
“그게 언젠데….”
또 만나러 온다고 했으면서….
왜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건데….
약간의 외로움을 견디며 하오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물빛 하오리에 지는 주름처럼 무표정하던 그녀의 얼굴에 작은 파도가 쳤다.
어쩌다 그의 존재가 이렇게 불쑥 커져 버린 걸까.
되돌아보면 한번 도망쳤던 백화요란으로 다시 복귀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폭풍이 지나간 듯, 이미 안팎으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백화요란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사무치게 무서운 일이었다.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많은 일을 지나쳐 왔지만, 나구사는 여전히 솔직하지 못했다. 남들에게 모난 모습을 보여 실망하게 하는 게 두려웠던 그녀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일 따위 없었다.
그저 일과가 끝나면 쓸쓸하게 달빛이 비치는 개울가에 앉아 우울을 곱씹으며 이슬 같은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하지만 그가, 선생님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는 어른인 만큼 감이 예리하다고 할지, 통찰력이 뛰어나다고 할지, 항상 그녀가 미처 숨기지 못하고 흘려 버린 근심을 귀신같이 찾아와 주워 들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선생님….”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져 완전히 정전된 세상.
의지할 만하다 할 거라곤 무성한 풀밭에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몇 마리가 고작인데, 그는 나구사를 찾아왔다.
이 더운 날에 얼마나 애타게 찾아다녔는지 옷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고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하늘에 잔뜩 끼어 있던 구름이 개는 것처럼 활짝 웃어 주었다.
“왜 이런 데서 혼자 궁상 맞게 울고 있어.”
“그냥….”
“그래?”
그는 그 이상 아무것도 캐묻지 않았다.
그저 조심스럽게 다가와 옆에 앉아 주었다.
“시원하네. 운치도 있고. 백귀야행에는 이런 장소가 많아서 좋더라.”
“여긴 어떻게….”
“응?”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나 걱정스러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으면서. 능청스럽게 모르는 체를 한다. 야비한 사람.
무슨 일이 있었냐든지, 어째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냐든지. 모두에게 걱정을 끼치고 말았으니 그런 마음에 한두 마디 질타하더라도 괜찮을 텐데.
저렇게 천진난만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어서야 신경 쓰지 말라고, 혼자 두라고. 마음처럼 그를 밀어낼 수 없지 않은가.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바쁘지.”
“그런데 왜 온 거야.”
“내가 말했잖아. 네가 어디에 있든 혼자 두지 않겠다고.”
“바쁘면 안 와도 돼.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말 잘했다. 알면 미리 연락 좀 해. 그러면 시간 내서 올 거 아니야.”
“…그런 건 나한테 무리야.”
“어? 대충 뭐, 보고 싶다든지. 시간 있냐든지. 대충 보내, 알아서 올 테니까.”
“보, 보고…! 으, 음…. 그런 말을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아까까지만 해도 그렇게나 우울하고 추웠는데. 어째서 고작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고 이리도 안심되고 따뜻해지는 걸까.
나쁜 기억들은 오래도록 남아 사람을 괴롭힌다. 홀로 멍하니 있으면 그 하나하나가 발목을 붙잡아 기어오르고 떨쳐낼 수 없도록 좀먹는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두 팔 벌려 가로막아 준 것이다.
만약 이대로 느슨해진 몸을 그에게 기대면 어떻게 될까? 무거운 고개를 그의 어깨에 소심하게 기대면, 그는 싫어할까? 놀랄까? 좋아해 줄까?
글쎄. 모르겠다.
나구사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어차피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상상은 잘도 한다며 속으로 비웃었다.
“여긴….”
“응?”
“새벽이 되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개가 껴.”
“조심해야겠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안개에 잡아먹혀 다시는 돌아올 수도 없다는 얘기가 있어. 평생 방황하게 되는 거야.”
“괴담…, 같은 거구나.”
“맞아. 내가 만약, 어느 날 이 안개에 잡아먹혀 사라진다면….”
“사라진다면?”
“당신은…, 선생님은…, 그래도 날 찾아줄 거야?”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말이라고. 내가 그랬지, 네가 도망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가서 옆에 있어 줄 거라고. 그러니까 외로우면 말해. 다 알고 있으니까.”
“쓰다듬지 마….”
“싫은걸.”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마치 그녀의 마음을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것처럼.
외로움.
그래,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외로워]
“…아무리 그래도 학생이 할 소리는 아닌 거 같은데.”
[언제 와?]
“약속을 잡아둔 것도 아니고….”
[온다며]
“….”
나구사는 모모톡에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본심을 들키고 싶지는 않다. 뭐라고 보내야 체면을 지키면서 적절히 그를 꾀어낼 수 있을까.
[보고 싶어]
“너무 노골적이잖아….”
물론 그가 바라는대로 솔직히 이야기하라면 할 수야 있겠다만은. 그런 짓을 했다간 얼굴이 터질 듯이 부끄러울 것 같았다. 지난 빙수 가게에서의 수모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피해야 한다.
도무지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성을 대하는 게 평생에 처음이니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가슴이 답답했다.
“앗! 선생님! 여기 주인공 언니가 있어요!”
폰을 붙잡고 한참이나 끙끙거리고 있었더니 연극을 관람하던 아이 한명이 손가락질하며 달려왔다.
“어머, 함부로 사람한테 손가락질하면 안 돼요! 아, 그, 죄송합니다. 하하….”
어린이집 교사는 재빨리 달려와 아이를 거두고 그녀에게 사과했다.
“…괜찮아. 미안하게도 난 주인공은 아니야. 그래…. 조금 신비로워 보이고 다소 귀여운 모습이 특징적일 뿐인 백귀야행의 학생일 뿐이니까.”
짜리몽땅한 혀로 신이 나서 방방거리는 아이를 보며 나구사는 서툴지만 소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 그래, 지금은 외로워서 선생님에게 찝쩍대기보다는 순찰이라는 역할을 소화해 내는 것이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 하지만 선생님이 말한 거랑 똑같이 생겼는데! 언니! 언니는 정말 나무꾼이랑 결혼했어요?”
“뭐, 결, 뭐…?”
아이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나구사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미처 낚아채지 못한 스마트폰이 바닥 위로 떨어졌다.
“얘, 얘가! 아이고…. 실례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교사는 그 모습을 보고 그녀가 화를 내는 줄로 알고 황급히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아, 그…, 아니…. 뭐…?”
하지만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뒤늦게 이해한 나구사는 한참 동안 선생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높아지는 심박수에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가렸다.
결국 그녀는 그에게 보낼 말을 정하기는커녕 정신없이 스마트폰을 주워 잰걸음으로 골목을 빠져나왔다.
사달이 난 모모톡의 화면도 확인하지 못한 채.
[보고 싶어]<
>[???]
“그래서 문제는 잘 해결하고 온 거야?”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키류 키쿄가 기진맥진하며 다가오는 소녀에게 무심하게 물었다.
“그래…, 으으. 누구 덕분에 인파에 쓸려 내려갈 뻔했지만 말이야. 근성으로 버텼다고.”
붉은 포니테일의 소녀, 후와 렌게는 기다란 용의 꼬리로 바닥을 내려치며 피곤한 듯 대답했다. 어지간히 지쳤는지 당장 빨랫줄에 널어도 위화감이 없을 것 같았다.
밤이 무르익었다.
야시장의 운영 시간도 마감 시간에 가까워져 가고 있었고, 분수대가 있는 원형 광장 역시 많이 한산해져 여유가 있었다.
“그거 봐, 괜찮을 거랬지?”
키쿄가 탁하고 한손으로 책을 덮었다. 그녀의 얼굴은 계산대로,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는 것처럼 거만한 미소를 은은하게 머금고 있었다.
“역시 렌게 선배이시어요!”
선명한 자주색 눈동자에 은하수가 내리다시피 렌게를 쳐다보던 카데노코지 유카리가 호들갑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부끄러우니까 그러지 좀 마. 대단한 일도 아닌데.”
“아니요! 홀로 수많은 인파를 통솔해 거리의 질서를 지키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이어요! 나구사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아잇, 진짜 그만하라니까!”
렌게는 칭찬에 약하다. 내심 기뻐하고 있으면서 쑥스러움을 견디지 못해 몸을 배꼬았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던 나구사는 그 모습을 보고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렌게는 대단해.”
“그렇지요? 우후훗.”
“나, 나구사 선배까지!”
빈말이 아니었다. 사람들 앞에 서서 물러서지 않고 하고자 하는 말을 당당하게 외치는 강직함은 나구사가 생각하는 그녀의 정말 멋진 점 중 하나였다.
“큿…. 그건 그렇고 설마 거기서 우등생 사마귀를 소환해 역전할 줄이야…. 역시 카에데는 못 이기겠네.”
“뭐야, 힘든 척하더니. 즐기고 온 거야?”
“아, 아니야! 그냥 가기 전에 딱 한 판. 딱 한 판만 한 거야!”
“애 같긴. 하지만 그게 너답네, 렌게.”
“그거 욕이야, 칭찬이야!”
“당연히 칭찬일 거시어요!”
나구사는 세 사람을 지켜보며 잡념을 떨쳐내기로 했다. 어차피 이 이상 미련을 가지고 있어봤자 그것은 미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선배 쪽에는 아무 일 없었어? 이번에 볼 게 많아서 좋았는…, 어? 어어? 선생님…?”
그 순간이었다. 다가오던 렌게의 표정이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당혹으로 물든 것이다. 나구사는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님이라는 말에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하아…, 하아…. 아, 안녕. 얘들아. 좋은 밤이네.”
낯익은 목소리. 한참이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잡념의 목소리.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 있을 리 없는 그가 있었다.
“선생님…?”
“아앗! 선생님! 어서 오시어요! 이런 시간에 급히 백귀야행에는 어쩐 용무이신가요!?”
모두가 벙찐 가운데 유카리만이 해맑게 그를 맞이했다.
“선생님이 여긴 어떻게….”
나구사는 뛰는 가슴을 억눌렀다. 유카리의 말처럼 정말 급한 용무가 있어서 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 그런 것이라면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급한 일은 아니고. 잠깐 나구사를 만나러 왔어.”
“네? 나구사 선배 말인가요?”
“나를…?”
꿈인가? 그렇지 않으면 속으로만 바라던 염원을 하늘이 나서서 이루어 준 걸까?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런 순수한 생각은 그의 말에 의해 금방 종식되었다.
“그래. 불렀잖아? 모모톡으로.”
“그럴 리가, 난….”
뭔가 이상하다.
불렀다니, 그럴 리가. 오늘은 단 한 마디의 메시지도 그에게 보낸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아까 벤치에 앉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썼다 지웠다 반복한 게 고작이다.
나구사는 다급하게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보고 싶어]<
>[???]
>[당장 간다]
“아….”
보내져 있었다. 확실하게.
도대체 어쩌다 보내진 거지?
머릿속이 눈밭처럼 백지로 뻗어간다. 온몸의 피가 마르는 듯한 감각. 아마도 아까 폰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그랬을 것이다. 그거 말고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얼굴이 뜨겁다.
이래선 꿈도 뭣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그에게, 항상 자신에게 호의를 보내오던 선생님에게 툴툴대며 거리를 두려 했던 자신이 제 발로 어리광을 부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니까 얘들아, 나구사 좀 빌려 갈게.”
“저, 자, 잠깐. 당신….”
그는 그녀에게 생각을 정리하고 도망갈 궁리를 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잽싸게 가녀린 손을 맞잡아 끌어당겼다. 당황한 나구사가 그를 말려 보려 하지만 당연히 무용지물.
그는 이미 그녀의 반응을 통해 그 메시지가 의도치 않게 자신에게 전달되었음을 눈치챘다.
아쉽다면 아쉽다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좋았다. 여태 그런 티를 낸 적이 없던 나구사가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고 안절부절 애달픈 시간을 보냈을 것을 상상하면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사랑스러웠다.
“뭐,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이게?”
“어라? 렌게 선배.”
“응?”
“키쿄 선배가 돌처럼 굳었사와요.”
“아…. 괜찮아. 잠시 그대로 내버려 둬. 콕콕 찌르지 말고. 그러다 물린다.”
자리에 남겨진 세 사람은 그의 구두굽 소리와 그녀의 나막신이 만들어 내는 불협화음을 들으며 망연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백귀야행이 끝나간다.
상점가의 홍등이 하나둘 꺼져 가고 소란스럽던 사람들이 하나둘 거리를 빠져나간다.
샤미센을 연주하던 학생들도 없고, 마감을 마친 노점들도 순서대로 가판대를 접는다.
그의 보폭은 그녀의 것보다 훨씬 넓어서 쫓아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비틀비틀, 뛰는 것도 걷는 것도 아닌 애매한 걸음걸이.
선생님의 페이스에 완전히 휘말려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문을 모르고 지켜보던 아이들은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그것보다 신경 쓰이는 건.
‘손….’
희고 가녀린 손을 완전히 감싸는 투박하고 커다란 손.
여름철에도 손발이 차가운 나구사는 그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이 기분 좋으면서도 어딘가 민망했다.
어째서일까.
단지 그에게 붙잡혀 억지로 끌려가고 있을 뿐인데. 매일같이 보는 거리가. 흥겨운 불빛이 모두 사라진 거리가.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거리가.
어쩐지 다르게 보였다.
여느 때보다 눈부시고 애틋하다.
평생 간직하고 싶을 만큼.
그는 신목 아래에 있는 휴식처에 다다라서야 손을 놓아주었다. 그러더니 벤치에 앉아서 딱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아직 문을 닫지 않은 편의점에서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 와 나구사에게 건넸다.
여전히 떨떠름한 그녀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 조막만 한 입에 물었다.
“휴…. 그래서?”
“뭘?”
“많이 보고 싶었어?”
“…큽!”
아이스크림을 물고 있던 나구사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사레들리는 것까진 피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콜록대더니 간신히 진정될 때쯤 양쪽 눈꼬리에 눈물을 머금고 그를 노려본다.
“나 참, 미안해. 하하…. 설마 그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어. 미안하다니까. 그렇게 쳐다봐도 안 무서워.”
“잊어 줘.”
“잊어 달라니, 뭘?”
“모모톡….”
나구사는 자신이 그런 메시지를 보냈다는 게 여간 분했던 모양이다. 불끈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흠….”
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반응이 마냥 재밌었다. 만화 속의 악당처럼 야비한 조소를 짓더니 곧장 스마트폰을 들어서 보란 듯이 나구사가 보낸 모모톡을 마구마구 캡처했다.
“잠…! 잠깐. 그만둬. 당신이란 사람은 대체…!”
“하하! 이 귀한 걸 어떻게 잊어! 바로 프린터로 뽑아서 액자에 장식해야지.”
결국 참다못한 나구사는 그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신장이 큰 선생님에게서 한손만으로 물건을 빼앗기란 쉽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자연히 스킨십이 이루어졌고 결과, 나구사가 그의 다리 위에 올라타는 꼴이 되었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지워 줄게, 지워 줄게!! 잠…, 나구사! 가까워! 가깝다고! 아….”
“….”
나구사는 끝내 그에게서 스마트폰을 갈취했다. 하지만 가까스로 버티고 있던 그의 균형도 무너져 그대로 두 사람은 벤치 옆으로 쓰러졌다. 그녀가 그의 품에 꼭 안긴 채로.
정적.
서늘하고 기분 좋은 밤바람에 신목의 잎사귀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상점가의 불빛도 대부분 꺼져 두 사람을 지켜보는 건 오직 커다랗게 뜬 달님뿐이었다.
두 사람의 다급하고 달콤한 고동 소리가 서로의 귓가에까지 울린다.
선생님의 횡포에 못 이겨 홧김에 저지른 일이었지만 나구사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이 시간의 편린, 고작 이 1분 1초가.
견딜 수 없이 행복하다고.
“그…. 나구사? 음. 괜찮으면…, 비켜 주면 안 될까?”
그가 멋쩍게 얼굴을 긁적이며 부탁했다.
“….”
“그…, 나도 슬슬 좀 민망한데….”
그제야 나구사는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안 올 줄 알았어.”
“뭐…. 최근에는 자주 못 올 만큼 바쁘긴 했지. 당분간은 계속 이럴 거 같고….”
“미안해. 나도 이럴 줄은 몰랐어.”
“미안하긴 뭘. 그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그 나이엔 좀 더 어리광 부려도 돼.”
“하지만….”
“저번에 말했지. 미리 말만 해준다면 얼마든지 시간 내서 오겠다고. 어디 뭐, 테러 용의로 출석해서 도와달라고 연락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쯤이야, 애교지.”
“….”
“근데 나도 좀 놀라긴 했어. 힘들면 얘기하랬더니 대뜸 보고 싶다고 할 줄은 몰랐거든.”
“…그, 그건…. 부탁이야. 잊어 줘….”
“안 돼.”
나름대로 간절하게 부탁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어림도 없다며 호탕하게 웃으며 나구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
조용히 끄덕이자, 그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거면 된 거야. 그냥 편하게 불러. 나는 솔직하게 기뻤으니까.”
선생님은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걸까?
어느새 그녀의 머릿속에는 나쁜 생각보다도 그에 대한 생각이 훨씬 많아졌다. 힘든 일이 있어도, 무서운 일이 있어도, 슬픈 일이 있어도 어느 순간 그를 떠올리곤 했다.
비록 당장은 또다시 아까와 같은 공포가 두려워 자리에서 도망치는 일이 있을지도, 또 홀로 개울가에 앉아 우는 일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곁에 있는 한 계속해서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만약 이 모든 게 전부 그의 계략이라면.
괘씸한 사람.
이래선 혼자 선생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꼴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끔은―, 가끔이라면 주제넘게 욕심을 부려도 정당방위이지 않을까.
“그럼…. 잊어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대신….”
“응? 대신?”
결심을 다잡기 위해 제 소매를 꽉 붙잡은 나구사는 그의 손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면서도 조심스럽고, 또 애절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손….”
“손?”
“당신의 손, 다시 잡아봐도 될까?”
언젠가 모든 불안을 떨쳐내고 당신의 도움 없이 온전히 서게 됐을 때, 만약 그런 때가 온다면. 이런 소심한 부탁이 아니라 좀 더 솔직하게 마음을 전하고 싶어.
“하하…. 말이라고. 물론이지.”
“…고마워.”
나구사는 머리 위에 얹어진 그의 손을 내려 깍지를 낀 뒤, 여태 보인 적 없던 해맑은 미소로 제 가슴팍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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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구사가 좋다...

전작도 그렇고 완전 미식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