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이 언제 올라올까 했는데 오늘 올라오네 이게
10달만에 올라오는 다음편이라니
이전 시리즈들 갤핫산 링크도 첨부해둠
시리즈라기에는 옴니버스 형식이긴 하지만
[0] 카즈사에게 밀려 넘어진 선생님이 무서워서 우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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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여성공포증 선생님과 무거운 감정의 학생들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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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여성공포증 선생님과 무거운 감정의 학생들 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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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성공포증 선생님과 무거운 감정의 학생들 2 - 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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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여성공포증 선생님과 무거운 감정의 학생들 2 - 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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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26810885
공백 제외 10078자(前)+8457자(後)
등장인물 : 세리나, 우이, 하나코, 세이아
――――
뿌옇게 흐려진 거울에 고개를 숙인 나만이 비치고 있었다. 불을 켤 생각도 없이 맨발로 젖은 타일을 밟고, 열쇠를 만져 돌린 후, 다시 허리를 숙였다.
「으윽.....」
예고도 사양도 없는, 뱃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 거세게 쏟아져 나오는 것을 막을 기력 따위는 진작에 없어졌고, 끈적하고 뜨거운 것들이 입술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대로 소화되지 못한 저녁 식사.
목으로 넘어가지 못한 알약.
그리고, 익숙해져 버린 냄새.
「커헉.....으.....읍.....으으윽.....」
젖은 바닥의 차가움이 피부에 직접적으로 스며들었다.
얕게 웅크린 채로 손등으로 입술을 닦자, 고형도 액체도 아닌 물질이 바닥에 흥건히 퍼져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음을 채우는 건 서늘한 안도감이었고, 발이 둥둥 뜨는 것처럼 불안정했지만 머리만은 묘하게 냉정했다. 사실 쓰레기통에 토하던 시절보다 훨씬 나아졌다. 그만큼 양도 늘어난 것 같지만.
「.....끝났으려나.」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누구에게 향한 것도 아니었다.
긴급함의 소멸이 보여주는, 행위의 끝.
그 다음은 당연히, 흘려버리면 된다.
「.....」
샤워기 꼭지를 틀자, 미지근한 물이 세차게 뿜어져 나오더니 타일에 부딪혀 튀었다.
꾸르륵, 꾸르륵 하는 생생한 소리가 욕실의 정적을 흐트러뜨리고, 배수구가 주저하듯 수위가 높아지다가 뒤늦게 빨려 들어갔다.
완전히 투명해지지 못한, 칙칙한 색.
금속 테두리에 아주 미량의 끈적한 위액이 얽혀 있었다. 샤워기 수압을 올리고, 다시 한번 확인사살하듯 물을 뿌렸다. 철썩, 하는 소리를 내며, 더러운 것과 함께 무언가 소중한 것까지 흘러간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소중했는지는 이미 잊어버렸지만.
「.....정말, 다행이야.」
도청. 도촬.
그런 단어들은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당하고 있다'는 현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샤워실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아무리 이치에 맞는 말을 늘어놓아도.
아무리 호의로 가득 찬 선물이라 해도.
가능성이 있는 것들은, 전부 거절했다.
이곳이 무너지면, 이제 어디에도 도망칠 곳이 없다.
「미야코 일행한테 감사해야겠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문이 있고, 열쇠가 있고, 구획되어 있다.
그것만으로 안전하다고 믿을 만큼, 나는 이제 순진하지 않았다. 이곳이 지켜지는 것은 나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동 시설'이라는 명목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도 사용하는 장소'라는 명분이 없었다면, 이 공간도 사생활과는 거리가 먼 장소였을 것이다.
여기는, 샤워 소리에 묻혀버릴 거야.
혹시라도 밖에서 누가 귀를 기울여도, 그냥 물소리로 들릴 뿐이다. 한숨도, 흐느낌도, 떨림도.
모든 것은 평평해져, 의미를 잃고, 생활 소음으로 전락한다.
아아, 다행이야.
정말로, 다행이야.
「.....하아.」
바닥의 미끄러움을 빠르게 닦아내고, 배수구에 약품을 흘려보낸다. 업무용 흡착 분말을 뿌리고, 환풍기도 확실히 가동시킨다. 은폐나 다름없는 이 청소도, 이제는 손에 익어 버렸다. 그걸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마음은, 진작에 사라졌다.
「.....뭐, 괜찮겠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상적인 어른이, 단 한 번의 실수로,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것을. 영웅담에서나 나올 법한, 몇 번이고 다시 일어설 강인함이 아니라는 것──그것을 아는 것은, 이제 나뿐이다.
쏴아, 하는 물소리가 완전히 끊어진다.
욕실에 정적이 돌아오고, 방금까지 가득 차 있던 열기와 습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진다.
나는 그 자리에서 등을 돌리고, 마른 수건으로 발끝을 닦았다. 아무것도 응답하지 않는 어둠을 응시하며, 의식을 다른 곳으로 도피시켰다.
내일 일정은, 뭐였더라.
회의. 서류. 보고.
누군가의 상담.
누군가를 위한 판단.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한 순간, 가슴 속 깊이 자리했던 거친 느낌이 조금씩 형체를 잃어갔다.
기억해야 할 것은, 감정이 아니라 스케줄이다.
나는 이미 그 전환에 익숙해져 버렸다.
「.....」
탈의실 거울을 힐끗 보니, 그곳에는 그저 담담히 숨만 쉬고 있는, 감정을 숨긴 얼굴이 있었다.
평범하고 보잘것없어서──보고 있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얼굴이었나.」
툭 내뱉은 말은, 공기에도 닿지 못한 채 가라앉았다. 이렇게 계속 가장하는 것이 미덕이라거나 강함이라 불린다면──그것은 다소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죽고 싶어.....랄까, 농담이야.」
말로 내뱉으니, 아주 조금 편해진 것 같았다.
내일도, 모레도, 어제조차 변함이 없다.
아무도 마법의 탄환을 쏴주지 않을 것이고, 슈퍼맨이 나타날 리도 없다.
그것이 상식이고, 그것이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길을 이끄는 것이, 내 역할이다.
「.....좋아.」
탈의실 불을 끄고, 소리 없이 문을 닫는다. 습한 공기를 뒤로 하고, 나는 조용한 복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자, 일을 시작하자.
비관할 필요는 없다.
이 작은 정원 안에서, 내 가치는 그것뿐이니까.
스미 세리나의 경우
아무도 없는 의무실이라는 곳은 쓸쓸한 곳이다.
문진이라는 역할을 잃고, 동반이라는 형식을 잃었다. 그저 깨끗한 도구들이 쇼케이스처럼 늘어서 있고, 누가 정했는지 모를 새하얀 벽이 고독을 에워싸듯 공기와 동조하고 있다.
창밖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이 위세를 떨치고, 난반사된 빛이 유일하게 찾은 보금자리처럼 내 눈으로 뛰어든다. 피부 감각상, 25도.
온화하고, 부드러운. 지금 나에게는, 귀찮은.
끼이, 하는 소리를 내는 낡은 서랍을 열어, 대강인 듯 치밀하게 정리된 바인더를 꺼낸다. 종이와 펜은 구비되어 있었기에, 바로 준비를 마쳤다.
아무도 없는 의무실.
이제 이곳은 쓸쓸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것은 수십 초 전에 진동한 스마트폰이 결정한 것인지, 지난 3개월에 걸친 그의 행동 양식에 따른 것인지, 나는 판단하기 어려웠다.
요컨대, 정기검진. 하지만, 이 시간의 그것은, 그런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아, 세리나.」
『선생님, 수고하십니다.』
문을 연 본인보다 먼저, 의무실 공기에 스며들 듯한, 언제나와 같은 목소리.
나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일어설 만큼의 긴급성은 없다는 건 알았지만. 앉아서 맞이하기에는 어딘가 불안했다.
「오늘도, 잘 부탁해.」
그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 구겨진 셔츠와, 목 끝까지 매어진 넥타이. 평소의 하얀 가운은 없었다──는 사실이 이 시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바인더를 여닫는 소리.
종이가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럼.....평소처럼 확인부터 하겠습니다.』
형식적인 말. 구호기사단으로서의, 올바른 도입. 선생님은 등받이에 기대지 않고, 두 발을 가지런히 바닥에 놓았다.
『지난 한 주 동안, 수면 시간은 얼마나 되셨습니까?』
「평균 6시간 정도?」
즉답.
망설임이나 주저함은 없었다.
눈 밑은 옅었다──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감추려 한 흔적도 없었다.
『도중에 깨어나신 적은요?』
「가끔. 하지만, 전보다는 나은 편이야.」
전보다는.
나는 그대로, 그렇게 적어 놓는다.
『식욕은요?』
「평소처럼 잘 먹고 있어.」
『가슴 두근거림이나, 숨 막히는 듯한 증상은요?』
「지금은 딱히.」
『플래시백이나, 갑작스러운 공포감은요?』
아주 짧은 한 박자.
문진으로는 허용 범위 내의 침묵.
「잘, 대처하고 있어.」
그 말버릇이, 너무나도 완벽했다.
‘더 의지해 주세요.’ 같은 달콤한 말이 혀 밑에서 녹아내리다, 그가 블랙파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씹어 삼키듯이 도로 집어넣었다.
『.....참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입니까?』
공기가 정지한다.
의무실의 하얀색이 갑자기 윤곽을 띠는 듯했다.
문제없음. 경과 관찰.
그것이───태연하게 여기 앉아 있다는 그 자체가,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 없이 마음에 걸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소모되고, 모욕당하고, 부서진 밤이 있었는데도.
어째서, 당신은, 아직─────
「.....역시, 깐깐하네.」
라며, 웃었다.
창문으로 비치는 빛이 바닥에 직사각형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아침만큼 날카롭지도, 저녁만큼 부드럽지도 않은, 오후의 빛.
나는 무의식적으로 바인더 끝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종이의 감촉은 건조하고,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그 나름의 배려. 그것을 상냥함으로 받아들일지, 계산으로 받아들일지는 그날의 나에게 달렸다.
『구호기사단이니까요.』
당신의 세리나, 같은 말은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세상에는 시간이 떨어지기 때문에, 그때의 기억은 희미해져 간다.
선생님은 ‘누구의 잘못인가’ 같은 이야기는 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 감정을 둘 곳이 아무데도 없다.
나는 목구멍에 걸린 말을 천천히 삼켰다. 의자에 약간 체중을 실은 그에게, 어느 정도 안심을 느낄 뿐이었다.
일어나서, 뒤편의 선반으로 향한다.
서랍을 여는 소리는 절제되어 있었고, 약병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하얀 라벨. 검은 글씨. 효능과 용량.
모두 수도 없이 익숙했던 것들이었을 텐데, 오늘은 왠지 눈에 거슬렸다.
『.....이걸. 평소처럼 드시면 됩니다.』
평탄한 목소리였다.
떨리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선생님은 받기 전에, 잠시 시선을 내렸다.
그것이 주저함인지, 확인인지, 이제는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이 행동도 일상이 되어 있었다.
「고마워.」
그런 말이 내 고막 속을 흔들었다.
아아, 싫어.
선생님은 분명, 오늘도 이걸 마실 거야.
이 무기물에 기도를 올리며, 제발, 제발 진정되기를, 하고 얼버무리고 말겠지.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할 수도 없고, 대신할 수도 없으며, 기도의 방향을 바로잡아줄 수도 없다.
선생님이 그걸 바라지 않으니까.
의사가 구할 수 있는 건, 구원받을 준비가 된 사람뿐이니까.
『다음은, 2주 뒤죠?』
「응. 잊어버리지 않으면, 또 올게.」
농담 같은 말투.
약속도, 기대도 아닌.
그걸로 됐어.
그 이상을 바라는 건, 지금 나의 역할이 아니야.
선생님은 병에 든 독약을 가방에 넣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작은 신중했으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확인하듯 습관처럼 한 박자를 쉬었다.
「그럼, 다음에 봐. 오늘 고마웠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향하는 뒷모습을 배웅했다.
말을 걸 이유도 찾을 수 없었고, 찾아내서도 안 된다. 의무실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의 발걸음에 맞춰 조금씩 모양을 바꾸다가, 이내 문 저편으로 사라져 간다.
──덜컥, 하는 소리가 나고, 깨끗하고 올바른, 어찌할 수 없이 조용한 의무실이 돌아왔다.
종이 위에 놓인 선생님의 거짓말이 무도회를 열었고, 나는 홀로, 바인더를 닫았다.
코제키 우이의 경우
고서관을 채우는 기분 좋은 어둠. 정적한 공간에 울리는 것은, 심장 박동과 하나하나 겹쳐지는 규칙적인 초침 소리뿐. 먼지를 비추었다가 사라지게 하고, 또다시 떠다니게 하는 오후의 햇살은, 후배가 최소한의 예의라고 창문을 열어 둔 것이었다. 평소라면 나중에 몰래 닫겠지만, 오늘만은 그러고 싶은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후우. 이쯤이면 됐겠죠.』
고서관의 마법사, 라는 칭호는 명색뿐인 육체노동. 오늘은 선생님이 트리니티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조금 청소를 했다. 그렇다고 해도, 책상 위의 고서들을 다시 쌓아 올리고, 컵 가장자리를 휴지로 닦은 것뿐이지만──뭐,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포트에서 얼음을 꺼내, 천천히 소리를 내며 따른다. 하나는 나를 위한 것, 다른 하나는 선생님을 위한 것. 둘 다 투명한 유리잔에 담은 것은, 흐트러짐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메리카노는 순서를 잘못하면 맛이 죽는다. 바깥세상에는 얼음에 직접 에스프레소를 떨어뜨리는 무례한 사람들이 있는 듯하지만, 향이 사라지면 그건 그냥 검은 액체일 뿐이다.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한숨을 내쉬었다. 가득 채워진 아메리카노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나무 코스터 위에 놓은 뒤, 시계를 바라본 지 수십 초.
──딸랑.
초인종이 울렸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다. 아니, 시간은 딱 맞다. 아마 내 쪽에서 마음의 준비나 긴장이 부족한 탓이겠지.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선생님이 서 있었다.
빛의 테두리에 스며드는 듯한 모습으로, 고양이처럼 시원한 표정으로──아주 조금, 지쳐 보였다.
「오랜만이야, 우이. 잘 지냈어?」
그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어느새 안색도 평소와 같아져서, 선생님에게도 한숨 돌릴 타이밍 정도는 있을 테니, 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납득했다.
『늘 그렇죠.....차가운 것이 괜찮으시다면, 아메리카노를 준비해두었습니다. 들어오세요.』
「응, 실례할게. 오늘은 평소보다 오래 머무를지도 몰라.」
선생님은 몸을 숙여 문턱을 넘어섰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누가 들어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나를 배려한 것이리라. 선생님이라면 조금은 신경 쓰지 않을 텐데.
『평소처럼, 여기서 괜찮으신가요? 먼지가 좀 많은데.』
부정적인 말을 바라며, 그런 식의 표현을 썼다.
당연히, 선생님은 내가 원하는 말을 해준다.
「아니, 그렇지 않아. 오늘 추천하는 건 뭐야?」
처음부터 이 장소에 익숙했던 듯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린다. 선생님은 트리니티에 볼일이 있는 날, 돌아가는 길에 이곳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내가 고른 단편을 읽고, 간단히 감상을 남기고 돌아가는 것──그것이 늘 하던 일이었다. 집 밖으로 나가는 것을 귀찮아하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시간이 좋았다.
『오늘은 이 책을. 호불호가 갈리겠지만, 선생님이라면 문제없을 겁니다.』
책상 끝에 준비해둔 한 권을 선생님께 건넨다. 최근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이었으며, 나 자신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정도의 걸작이었다. 무엇보다 마지막의 복선 회수가 훌륭했다. 기승전결은 물론이요, 종합에 대한 도전이────이런, 안 돼.
「와, 제목 어려울 것 같아. 어떤 이야기야?」
『음, 어떤 청년이 자신의 기억을 한 권의 책으로 남기려 해요. 그런데, 다 쓸 즈음에는 아무도 그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되고, 그 자신도 자신이 무엇을 썼는지 기억하지 못하는.....그런 이야기입니다.』
「헤에.....재미겠네.....」
선생님은 작게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책장 끝을 더듬었다. 그 행동에 눈을 빼앗겨, 나는 그만, 불필요한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뭐, 밖에서는 고리타분한 사람들에게 아주 비난받았던 것 같습니다만. 쓰여지지 않은 행간을 읽을 상상력도 없으면서, 감히 문학을 논하다니.』
입 밖으로 낸 순간, 「앗」하고 작게 숨이 새어 나왔다.
선생님 앞에서는 가급적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던, 나의 나쁜 버릇.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러다간 갑자기 잔소리나 듣겠────
「그럼, 바로 읽어볼게.」
『.....엣, 아, 네.』
순간, 숨 쉬는 방법을 잊었다.
선생님은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짐을 구석에 두었다. 위화감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선생님의 시선은 종이 위에 떨어져 있었고, 그곳에는 내가 존재할 틈이 없었다.
『.....』
「.....」
평소라면 「그런 말은 좋지 않아」라며 타이름을 받을 것이다. 적어도 씁쓸한 웃음 정도는 돌아왔을 것이다. 못 들으신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선생님이라면, 그럴 리가────
『.....』
평소와 같은 침묵.
평소에는 편안했던 침묵이 1초, 2초 길어질 때마다 심박수가 그걸 앞질러 간다.
나는 시선을 돌리듯, 유리잔에 손을 뻗었다. 방금까지 완벽했던 아메리카노 표면에, 얇은 막이 생겨 있었다.
『.....식어 버립니다, 선생님.』
저절로 튀어나온 목소리가 정적을 찢는다.
선생님이 얼굴을 들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미안해. 조금 있다 마실게.」
그 변명은 마치 정교하게 세워진 벽처럼 느껴졌다. 얼음이 작게 갈라지며, 녹아내린 빛이 번졌다.
『.....그렇습니까.』
입안에 남은 쓴맛을 천천히 삼킨다.
평소보다 약간 신맛이 강한 것 같았다. 은은하게 부드러워진 입안에는, 아마 딱 알맞은 쓴맛이었으리라.
「.....」
『.....』
무음의 시간이 이어진다.
고서관의 공기는 누군가 뭔가를 말하기까지의 시간을 늘리는 데 능숙하다. 평소에는 그 고요함이 사랑스러웠지만, 지금은 길어지는 침묵이 나의 그림자를 끌고 가는 것 같아 숨이 막힌다.
어색하다는 단어가 사전에서 걸리지만, 다르다. 좀 더 습하고, 형태 없는 감각. 온도가 하나 낮아진 방 같은, 그런 불편함이다.
『.....읍.』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 좋은 방향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이 그저 피곤한 것일 뿐. 혹은 단순히 내가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일 뿐. 그걸로 납득하면 될 일인데도, 어느 쪽 이유로도 나는 쉽게 납득할 수 없었다.
결국 내가 취한 행동은, 아무런 전략도 없이, 선생님께 진의를 묻는 것이었다.
『서, 선생님.....! 그게.....!』
「응? 왜 그래?」
퍼뜩, 하고 책을 덮는 소리가 떨어진다.
선생님은 늘 온화하고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불안이 가실 만큼 나는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지 않았다. 초침 소리만이 울리는 이 공간에서, 이제 와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아까, 그, 이상하지 않았나요?』
「이상해? 뭐가?」
선생님은 당연하다는 듯이, 의문을 드러낸다. 그 목소리에 담긴 순수한 울림이 오히려 나를 재촉하는 것 같았다. 지적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그렇게 도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게.....아까,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을 때────』
거기까지 말하고, 목구멍에서 말이 얽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형태를 갖추고 있었을 문장이,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리는 모래처럼 윤곽을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겠지. 나 자신도 확신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선생님께 질문한 것이니까.
「.....응? 미안해, 잘 못 알아들어서 말이야. 뭐라고 말했었어?」
상냥한 목소리였다.
그만큼, 가슴 속의 꺼칠함이 더해졌다.
유도당하는 것 같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덮어 가려져 있는 것 같은.
그 속내를, 끝내 눈치채지 못했지만.
───따르릉, 따르릉.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자음.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순식간에 누구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네, 연방수사부 샬레입니다. 네, 네.....아.....지금부터요. 네, 괜찮습니다.」
어딘가 거리를 둔, 업무 목소리. 선생님의 목소리가 한 번씩 장단을 맞출 때마다, 내 안의 무언가가 옅어진다. 그것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처럼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에스프레소를 붓는 것 같은, 1대16이라는 비율도 모르는 듯한, 바깥세상의 속도였다.
통화를 마친 선생님은, 주저하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우이. 여러 가지로 바쁜 모양이라, 오늘은 이제 가야 할 것 같아.」
그 말은, 아직 통화의 여운이 남아있는 듯한 말투였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는 분명 다정한데, 어딘가 멀게 느껴졌다. 이곳이 아니라, 저편을 향한 목소리다.
『.....선생님은 바쁘시니까요. 오히려, 매번 조금이라도 와 주시는 게 기쁩니다.』
나도 놀랄 만큼, 온화한 목소리를 낸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은, 찢어진 페이지를 붙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선생님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짐을 챙기고 빠르게 메시지를 보내는 동작은 정성스러웠고, 당연하게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
「고마워, 우이. 맛있었어.」
문 앞에서 돌아보며, 그런 말을 했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겨진 아메리카노가 반짝, 건배하고 있었다.
우라와 하나코의 경우
우라와 하나코는 ()이다.
그런 문제가 시험에 나온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사람은 "노출증 환자", 또 어떤 사람은 "문제아".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은 "재색겸비"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어떤 것도 오답이고, 단 하나의 모범 답안이 있다는 것을. 나의 모든 면은 단 하나의 단어로 충분하다는 것을.
(겁쟁이)
이것이, 정답이다.
우라와 하나코는, 겁쟁이다.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라는 것. 본심을 들키는 것이 두려워 저속한 말로 도피하는 것. 에두른 방식으로만 대처할 수 있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는 것.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자신이 없다는 것.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주길 바라면서도, 완벽한 나 자신만을 보아주길 바라는 것.
『.....』
그렇다면 여기에, 완벽한 이해자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꾸며낸 말들을 손바닥 보듯이 이해하며.
에두른 방식에도 어울려 주고, 내가 받을 수 있을 만큼 사랑을 나누어 주고, 건네주는───그런 이해자가 있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되어 버릴까?
『.....♡』
띵동, 하고 엘리베이터가 울렸다.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에 벌써 도착한 모양이라, 나는 경쾌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갔다.
생각해 보면, 꽤 오랜만이었다. 트리니티에서 얼굴을 마주칠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당번 근무를 맡으러 오는 것은 실로 몇 주 만이었다. 당번 주기는 내가 알 바는 아니지만, 내가 당번인 날은 선생님의 업무가 막혀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한동안 불려가지 않았다는 것은,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내 도움이 필요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선생님의 몸을 걱정하는 나로서는 기쁜 일이지만, 유능한 학생들이 선생님을 보좌했다는 증거이기도 해서, 가슴이 아프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 될 것이다.
나는 선생님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 그만큼 우회해야만 하는 나다. 질투 같은 귀여운 수준을 넘어 게헨나 뺨치는 뿔을 내미는 것도 시간 문제일 터. 그렇게 되기 전에 당번 근무를 얻은 것은 실로 천운이라 할 만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집무실이 코앞에 자리하고 있다.
『선생님, 실례하겠습니다.』
노크와 함께, 입장.
선생님은 마침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려던 참이었고, 내 얼굴을 보자마자 컵을 내려놓고는 손을 흔들어 나를 불러들였다.
「안녕, 하나코. 오늘 잘 부탁해.」
몽롱한 울림. 목소리에 아주 약간의 허스키함이 섞여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눈꺼풀의 옅은 그림자와 쌓여 있는 서류들이 저절로 눈에 들어왔다.
『.....이틀 정도, 주무시지 못하셨군요.』
「아하하.....역시 티가 나? 쪽잠은 좀 잤는데.」
그러면서, 어깨를 푸는 듯 목을 돌린다.
그것만으로도, 정말 무리하고 있구나, 싶었다.
변명치고는 너무도 담백했다. 선생님 입에서 ‘조금’이라는 애매한 말이 나오는 건, 대개 정말 한계에 달했을 때다.
『안 됩니다. 무리를 하면 효율만 떨어질 뿐이고, 몸이 자본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니까요.』
「아하하.....미안, 그렇네.」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 웃음이, 평소보다 조금 약했다.
컵 속의 커피는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다. 분명 선생님은 저것도 블랙으로 마실 것이다. 한 모금에 목이 막힐 것 같은 쓴맛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마시는 모습은 멋져 보이지만, 역시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그럼, 서둘러 정리해 버리죠. 오늘만큼은 쉬게 해 드려야 하니까요.』
선언하자, 선생님은 살짝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고마워. 그럼, 부탁할까.」
『네, 맡겨주세요. 빨리 끝내서 침대로 몰아 넣어 드리겠습니다♡』
그런 가벼운 농담을 섞어가며, 책상 위 서류들을 능숙하게 정리했다. 힐끗, 시야 한쪽으로 선생님이 커피를 다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이런 말을 하면 혼날 거라고 기대했던 나는, 조금 어정쩡해졌다.
뜨거운 것을 잘 못 마시는 선생님이, 방금 내린 커피를 다 마시는──그 위화감을 눈치챈 것은, 이미 그걸 화제로 꺼내는 것이 부자연스러워진 뒤였다.
・
・・
・・・
『선생님, 이쪽 정리해두었습니다. 나중에 결재 부탁드립니다.』
「와, 일 빠르다.....대단하네, 하나코. 벌써 일이 끝날 것 같아.」
그 한마디에, 손가락 끝에 기분 좋은 피로감이 스며드는 것을 깨달았다. 업무 시작 후 몇 시간. 시계바늘이 정점에 도달하기 조금 전, 그렇게나 많던 종이 뭉치에도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남은 서류는 선생님이 확인해야 할 것이고, 당번인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은, 방금 건넨 서류가 마지막이었다.
휴식을 취하기에 딱 좋은 시점일 것이다.
『슬슬 쉴까요? 선생님, 커피 한 잔 타 주시겠어요?』
「응, 물론이지. 잠깐 기다려.」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가볍게 기지개를 켠 뒤, 의자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선생님을 부려먹은 것 같아 죄송하지만, 내가 피곤하다는 것을 선생님이 알아차리면 선생님도 함께 쉴 것이다. 선생님은 무리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쉬게 할 수밖에 없다. 선생님이 타준 커피가 특히 맛있다는 이유도 있지만.
「자, 마셔. 뜨거우니까 조심해.」
선생님이 내민 컵을, 두 손으로 받았다. 김과 함께 피어오르는 향이 방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하는 것 같았고, 손가락 끝에 닿은 도자기의 뜨거움이 유난히 현실적이었다. 나의 제안은 성공한 듯, 선생님은 책상으로 돌아가지 않고, 내 맞은편에 앉았다.
『감사합니다.....후훗, 역시 맛있네요. 혹시 뭔가 비법이라도?』
「물론이지, 사랑 같은 거?」
선생님의 눈썹이, 살짝 곤란한 듯 찌푸려졌다.
그 표정이 더없이 좋았다.
졸려서인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직설적으로 받아주는군요.
『어머, 과감하시네요. 우애, 경애, 자애───사랑에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어느 것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런 말버릇에 나 자신도 질려버린다.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어떻게 되받아칠지 준비하고 묻다니, 너무 번거롭다.
하지만───어쩔 수 없다.
놀리기 재미있는 선생님이, 잘못인 거다.
「물론, 친애지. 누구에게든, 말이야.」
아아, 역시나.
가장 올바르고, 성실하며, 아주 조금 거리를 둔 말.
기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더 귀찮은 존재니까. 흔한 표현에서 한 발짝 더, 답을 갈구하게 된다.
『어머, 멋지네요. 하지만──사랑은 쌍방향의 것이에요, 선생님. 한쪽은 친애라 해도, 다른 한쪽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답니다.』
예를 들면, 연애라든가───하는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이어질 수 없기에, 겁 많은 나였다.
「.....뭐, 자주 듣는 이야기네. 가치관의 차이랄까?」
아주 조금, 거리가 있는 대답.
문득 고개를 들어 보면, 선생님은 조금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이라면 헤아려 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족을 계속 이어가기로 했다. 그것은 자신감의 반증이기도 했고, 선생님의 반응을 오해한 것에 대한, 미미한 위화감을 보강하는 것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이미 커피를 다 마셨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가치관의 차이───미세한 어긋남이 쌓여 불평불만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되기 전에 조율하는 것이 좋겠지요.』
손안에 들어온 컵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그저, 선생님의 존재를 느끼는 데 집중했다. 싹트고 만 사랑의 마음을, 에둘러 전하려 했다.
『제 선생님을 향하는 사랑은.....후훗♡ 조금 탁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짐짓, 말꼬리를 올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쑥스러움 표현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이, 이 상황에서는 잘못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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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이야 이게 후속이 나오네ㅋㅋㅋㅋㅋ
오 이거 드디어
재업인줄 알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