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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소설 핫산) 한밤의 영애 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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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엄 #M #드라마 #세이아

원본 by レオ

====================

<1> ~ <4>

<1>

여름이 끝나서일까, 하고 생각해 본다.

봄이라면 만남,

여름이라면 청춘,

가을이라면 적막,

겨울이라면 죽음.

계절이 바뀔 때면 으레 무언가에 감정을 투영하곤 한다.

적당히 시원해진 이 시기에 내가 늦여름에 투영한 것은 가을에 대한 기대와 분에 넘치는 지루함이었다.

“…곤란하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자.

연휴라는 건 시작하기 전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손에 쥐고 나면 별거 없다.

잠을 자고,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다시 책을 읽는다.

특이한 선택지가 그리 자주 뜰 리도 없으니, 일상은 여전히 일상인 채로 남아 있었다.

“흠…….”

책은 충분히 읽었다.

궁금했던 영화도 대충 다 봤다.

게임에 손을 댄 날도 있었고, 낯선 곳에 발걸음을 옮긴 날도 있었다.

그런데도 휴일은 끝나지 않는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오락이 아직 썩어 넘칠 정도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인간은 막연하게 시간이 주어지면 의외로 그걸 잘 쓰지 못한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라서 미지의 문을 열 호기심이 지금은 조금 바닥난 상태다.

그렇게 게으름을 피우는 사이에, 드디어 유희에도 성이 차지 않게 되었다.

결국─질린 것이다.

“…좋아.”

그리하여 기분 전환.

오늘의 의제는 바로 그것이었다.

부스스 일어난다.

회색 후드티에 남색 캡.

신고 있던 양말을 벗고 적당한 크록스에 발을 집어넣는다.

예부터 제례에는 예복이 있고, 상중에는 상복이 있으며, 취침에도 드레스 코드가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 법을 따르라 했으니, 가로되 이것도 스마트 캐주얼의 일종인 것이다.

“가볼까.”

메모 한 장 남기지 않고, 호위도 거느리지 않은 상태에서 소지품은 단말기 하나뿐.

현재 시각, 0시 29분.

심야 배회.

흠.

말로 내뱉고 보니 생각보다 불량하지 않군.

<2>

자의식의 손을 잡고 밤의 거리로 뛰어들었다.

인적은 없다.

명문 학교라는 꼬리표 때문일까,

아니면 통금이라는 울타리 때문일까.

트리니티의 학생이 한밤중에 돌아다니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양들도 의외로 자발적으로 우리 안에 돌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 그 양 중 한 마리가 방금 울타리를 넘긴 했지만.

“달에 구름이라 했지.”

하늘을 올려다본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별에 눈이 가─는 일은 없었고, 아쉽게도 흐린 하늘이었다.

이럴 때만 나답지 않은 감상에 젖으려 하다니.

그렇다고 옥에 티라는 뜻은 아니다.

구름 한 점 없이 달이 맑고 별이 반짝이는 그런 밤은 너무 작위적이다.

이쪽의 형편에 맞춰 무대 장치가 갖춰질 만큼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얄궂지만, 오히려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밤이다.

“흠…….”

목적지(임시)─편의점.

위치 정보에 따르면, 아무래도 20분이면 도착하는 모양이었다.

가볍게 걷다 보니 갈림길이 나타난다.

최단 경로는 왼쪽.

물론 나는─오른쪽으로 꺾었다.

“오, 나쁘지 않은 길이야.”

모르는 길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 길.

가로등 간격도 듬성듬성하고, 고르게 포장되어 있던 조금 전의 보도와 비교하면 여기저기 금이 가 있었다.

낮이라면 신경도 안 썼을 정도의 차이가 지금의 나에게는 묘하게 선명했다.

생활권이라는 단어는 상상 이상으로 좁다.

익숙한 동네라도 큰길 하나만 벗어나면 금세 미지가 얼굴을 내밀고,

지도상으로는 불과 몇 미터 옆에 있는 장소를 몇 년 동안이나 모른 채 지내기도 한다.

대항해 시대의 탐험가가 들으면 콧방귀를 뀌겠지만, 나에게 오늘 밤의 우회전은 훌륭한 미답지로의 진출이었다.

문득 바람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바람은 상하좌우 마음 가는 대로 헤엄치며, 건물 사이를 날아가듯 빠져나갔다.

낮에는 좀 더 행동거지가 조심스러웠던 것 같은데.

나무를 흔들고 풀을 쓰다듬으며, 가끔 스커트 자락을 들추는 정도였지.

밤놀이를 즐기는 건 바람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후후.”

크록스 바닥이 마른 소리를 낸다.

필요 이상으로 서늘하다고 생각했던 공기도 걷기 시작하니 의외로 기분이 좋았다.

이윽고 횡단보도가 보인다.

빨간불.

좌우를 살핀다.

차는 없다.

자전거도, 사람도 없다.

“과연. 불시 검문이라는 건가.”

‘선’이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를 던져 본다.

바르게 행동하는 자인가.

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자인가.

아니면─그런 구분을 생각할 필요도 없이 그저 빨간불에 멈춰 서는 자인가.

공리주의적 입장을 취해 보자.

이 자리에 차는 없다.

사람도 없다.

내가 지금 여기서 빨간불을 무시한다고 해서 누군가의 행복이 손상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으며,

오히려 시간이 절약되는 만큼 총 효용은 미세하게 증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건너가도 좋다.

하지만─똑같은 판단을 만인에게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안전이 확인된 경우에 한해 빨간불을 무시해도 좋다’는 규범이 일반화되면, 안전에 대한 판단 자체가 각 개인에게 맡겨진다.

간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자만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니, 결과적으로 사고가 늘어난다면 규칙을 따르는 편이 장기적인 효용은 높다.

“흠. 다른 측면으로 갈아타 보자.”

의무론적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결과가 어떻든 지켜야 할 규칙은 지킨다.

나 혼자만 예외이기를 바라면서 타인에게는 준수를 요구하는 것은 보편화될 수 없다.

따라서 빨간불은 정지.

아주 심플하네.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규칙이라는 것에 자신을 너무 맡기고 있다는 기분도 든다.

만약 눈앞의 횡단보도에 쓰러진 사람이 있고 빨간불을 무시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다면, 그래도 나는 고지식하게 초록불을 기다릴까.

의무와 의무가 충돌할 때 표지판은 답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나는 마땅한 행동을 취할 수 있을까.

애초에 선한 사람이라면 아무도 보지 않아도 바르게 행동한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선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한다’라는 설명은 순환 논법과 종이 한 끗 차이다.

나는 빨간불에 멈추니까 선한가.

선하니까 빨간불에 멈추는가.

…곤란하네.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어.

그럼 좀 더 고전적으로.

가령 지옥이라는 존재를 전제로 한다면─

“…아.”

문득 원추세포가 나에게 알린다.

초록불이다.

아무래도 나는 사고의 속도에서 낙제인 모양이다.

“후후…티파티의 체면을 구긴 걸지도 모르겠네. 수고했네, 덕분에 살았어.”

모자를 벗고 무뚝뚝한 그에게 감사를 전한다.

선택은 끝내 명확해지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선성의 증명에 실패한 내가 결과만 놓고 보면 아주 모범적인 보행자였다는 사실이다.

흰 선을 밟고 앞으로 나아간다.

등 뒤에서는 고지식한 그가 벌써 다음 빨간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토록 아낌없이 시간을 쓰고 답을 내지 않아도 번거롭게 여겨지지 않는다.

선구자들이 입을 모아 혼자임을 권장하는 이유가 있었네.

내 기질과도 아주 잘 맞는다.

“습관으로 만들어 볼까…아니, 어떨까. 들켜버리려나.”

밤중에 혼자 돌아다닌다─는 부분만 떼어 놓고 보면 다들 입을 모아 걱정하겠지.

정서의 발견이라는 건 대개 예정에 쫓겨 걷는 낮에는 얻기 힘든 법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호의를 무시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은근한 죄책감조차 양념이다.

횟수를 거듭한다고 해서 익숙해지지 않는 것도 있는 법이니까.

“마음 가는 대로 해볼까.”

작은 돌을 발로 차며 다시 앞으로.

잔잔한 밤은 내 사고를 나무라지 않았다.

세상의 볼륨이 낮아진 만큼, 나 혼자 떠드는 정도가 분명 딱 적당했다.

<3>

밤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허연 빛이 길 끝에 떠 있었다.

24시간 인간의 욕구에 계속 시달리는 현대 문명의 작은 제단─편의점.

사실은 묘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반걸음쯤 낙오된 사람들이 고인 장소─같은 상상을 했다.

현실은 나른해 보이는 점원 한 명뿐이라, 멋없다고 해야 할지 당연하다고 해야 할지.

“어서 오세요—”

늘어지는 목소리.

그들이라고 해서 계산대 뒤에 항상 상주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손님이라는 입장에 서면 종종 그들이 NPC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는 것이 참 신기했다.

점원은 나에게 시선을 주더니 금세 흥미를 잃은 듯 선반 정리로 돌아간다.

새벽 1시 직전, 후드티에 모자, 샌들 차림의 혼자 온 손님 따위는 진작 질리도록 본 이벤트겠지.

적당히 가게 안을 한 바퀴 돈다.

과자.

음료.

잡지.

칫솔 옆에 건전지,

그 조금 앞에는 테이블 양념.

만물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게도 인간이 갑자기 필요로 할 법한 물건은 충분히 갖춰져 있는 모양이다.

목적지이긴 하지만 딱히 무언가를 사러 온 건 아니다.

다트가 우연히 맞았을 뿐이라는 정도의 마음가짐이었다.

문득 발걸음이 멈춘다.

쇼케이스에 갇힌 투명한 파란 병은 어딘가 하늘의 푸르름을 연상케 했다.

“이건…분명 네루가 좋아하던 거였지?”

슬쩍 쳐다본다.

여름의 끝, 단명하는 기포의 일생─소다.

스스로 나서서 고를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여름이라기엔 조금 늦었지만…큰 문제는 아니겠지.”

가볍게 집어 든다.

평소에는 고르지 않는 ‘탄산음료’라는 카테고리는 의외로 내 흥미를 끌었다.

병을 한 손에 들고 몇 번 선반 사이를 걷는다.

과자를 하나 집어 들고, 익숙한 디저트의 성분 표시를 훑어보고, 가급적 오래 버틸 것 같은 아이스크림을 고른다.

양손이 가득 차서 곧 계산대로 향하려던 순간─시야 끝에 따뜻한 색이 걸렸다.

“…오.”

핫 스낵.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네.

“이건…고민되는데.”

이 시간대라면 기껏해야 한두 종류, 그것도 팔다 남은 것들이 처량하게 누워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튀김류도, 고기류도 나름대로 선택지를 유지하고 있다.

골라잡는 재미가 있다고나 할까.

문명은 때때로 필요 이상으로 끈질기다.

“…좋아.”

물론 저녁은 진작에 먹었다.

특별히 배가 고픈 것도 아니다.

즉, 여기서 억지로 무언가를 살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살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카라아게 하나. 그리고 고로케도 하나. 봉지도 주게.”

“네— 총 980엔입니다.”

“카드로.”

단말기에 갖다 댄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어딘가에 있는 나의 980엔이 사라졌다.

싸네, 하고 생각한다.

소다에 아이스크림, 과자, 그리고 카라아게와 고로케.

이만큼이나 들고도 네 자릿수가 되지 않으니 금액만 놓고 보면 아주 검소하다.

티파티, 나아가 내 자산을 깎아 먹을 수도 없는 푼돈이다.

동시에─사치스럽네, 라고도 생각한다.

음료도 과자도 마트 같은 곳에 가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다.

튀김만 해도 자취라는 선택지까지 꺼내 들면 값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편리함이라는 가치를 부여해도 편의점이라는 장소는 상당히 비싸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최종적인 결론으로서는 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치란 결코 비싼 물건을 사는 것이 아니다.

필요 없는 것을 필요 없는 시간에 필요 없는 이유로 선택하는 것.

‘지금 당장’이라는 욕구는 가격을 매길 수 없으니까.

“유의미한 낭비네.”

불룩해진 봉투를 보며 만족감.

옛 시인은 이런 때 시를 읊었겠지.

“자.”

자동문을 나서서 주변을 둘러본다.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봉지 내부에서는 미세한 열역학이 시작되고 있다.

아이스크림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리 여유를 부릴 수도 없다.

잠시 찾아보니 가게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구색만 갖춘 연석을 발견했다.

걸터앉기에는 약간 불안한 높이.

하지만 오늘 밤의 식탁으로는 충분하겠지.

“잘 먹겠습니다.”

자리를 잡고 카라아게부터 한 입.

튀김옷이 바스락하며 작은 소리를 내고, 그 직후에 기름기와 짠맛이 혀로 퍼졌다.

“…음.”

맛있다.

놀라울 정도도 아니고 감동할 정도도 아니지만, 확실히 미식이었다.

눅진한 향미가 고기에 배어 있어 즉각적으로 배덕감을 느끼게 한다.

스테이크처럼 터져 나오는 열파가 없는 만큼 식사는 평소보다 빨랐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밀레니엄에 갔을 때도 비슷한 걸 먹었던 기억이 난다.

뒤풀이라며 리오의 은신처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었지.

미각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현상을 흔히 프루스트 효과라고 부른다던가.

문학사에 남을 기억의 문이 홍차와 과자라면, 내 경우에는 심야의 카라아게인 셈이다.

“…약간 격조가 떨어지는군.”

뭐, 딱히 기억까지 고상할 필요는 없지만.

카라아게를 절반 정도 먹었을 때 이번에는 소다의 마개를 딴다.

치익, 하고 기분 좋은 소리.

기포가 일제히 병 바닥에서 솟아오른다.

“윽…….”

한 입 마시니 생각보다 공격적이었다.

목을 축인다는 본연의 역할에 비해 혀를 찌르고 목을 어루만지기는커녕 거의 때리듯이 넘어간다.

이래서야 음료라기보다 액체의 형태를 빌린 일종의 자극제다.

“시원한 건 고맙지만…….”

나기사에게는 맞지 않겠네, 하고 생각한다.

차에 향기를 더하는 것조차 회의적인 사람이 소다를 즐길 리 만무하고, 입안에서 날뛰는 거품을 좋아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반대로 미카는 의외로 좋아할 것 같다.

“…그렇다면.”

한 입 더.

이번에는 아까보다 잘 마실 수 있었다.

혀 위에서는 무수한 거품이 소규모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두 번째가 되니 역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자극이 강하고 알기 쉽다.

입에 넣은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미뢰를 가동시킨다.

네루가 좋아하는 것도 납득이 가네.

“…후후. 음료 하나로 인물평이라니 조금 너무 멋대로인가.”

본인들이 들으면 이의 한두 개쯤은 날아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 변호사는 없다.

있는 것은 나와 먹다 남은 카라아게, 조금 드센 소다뿐이다.

카라아게 나머지를 입에 털어 넣고 고로케 봉투를 연다.

감자, 기름, 소금.

어딘가 얌전하게 느껴지는 건 역시 대전 상대가 나쁜 탓이겠지.

“…어라.”

문득 어둠이 움직였다.

─고양이다.

이쪽을 경계하는 건지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가만히 내 손을 보고 있다.

“구걸이라니 곤란한걸. 이래 봬도 상투스 분파의 대표인데.”

고양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시선은 아마 내가 아니라 고로케나 카라아게의 남은 향기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목적의 명료함이라는 점에서는 오늘 밤의 나보다 훨씬 우수했다.

“이건 980엔어치야. 저 가게는 카드도 쓸 수 있으니 자네도 사 오게.”

길고양이에게 함부로 먹이를 줄 정도로 무책임하지는 않다.

고양이의 건강과 나의 선성을 위해서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것’이라고 선을 긋는 게 최선이었다.

한 입, 두 입.

정확한 시선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온다.

“앗.”

갑자기 홱 등을 돌린다.

내가 불러 세울 틈도 없이 그대로 밤의 장막 속으로 녹아들었다.

“정말이지, 박정한 녀석이군.”

먹이도 안 주는 인간에게 애교를 부리지 않는다.

극히 합리적이고 판단이 빠른 아이였다.

봉투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이스크림은 아직 무사한 모양이다.

“자, 돌아갈까.”

쭉 기지개를 켜니 서서히 근육이 뻐근해진다.

다시 딛은 지면은 수평이었다.

어딘가 젖은 신발 바닥이 앵무새의 수다 같은 소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4>

같은 길을 걸으면 같은 경치가 보인다.

그런 세상의 이치는 오늘 밤과는 궁합이 나빴다.

단말기를 연다.

현재 위치에서 세이프 하우스까지 최단 23분.

“…기각이다.”

검색창의 글자를 지워 나간다.

필요한 건 최적의 경로 따위가 아니라 그야말로 대항해 시대 같은 백지 지도이며, 여기저기 메워진 내 기억 영역이 딱 적당했다.

봉투를 들고 밤을 달린다.

어느새 구름은 걷히고 괴수에게 한 입 베어 물린 달이 조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어라.”

한참 걷다 보니 기억이 나에게 추억을 건넸다.

그립다고 부르기에는 조금 가까운 장소.

예전의 생활권, 중등부 통학로─의 바로 옆길이었다.

걸어본 적은 없다.

통학로 이외에는 다니면 안 된다는 교칙이 있었기 때문이다.

“…후후.”

쓴웃음이 새어 나온다.

당시에는 몸 상태도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꽤 고지식한 아이였다.

발길을 옮긴다.

실제로 걸어보니 아무것도 아닌 길이었다.

전봇대가 있고, 화분이 있고, 잠든 집들이 늘어서 있다.

기억 속에서는 좀 더 넓은 길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에는 이곳을 지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특별한 이유나 증표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지.

“…이런 건가.”

고양감은 없다.

감동도 그저 그렇다.

하지만─조금은 기분이 좋다.

아주 옛날에 쓴 체크 리스트에 이제야 동그라미 하나를 친 것 같은, 그런 지극히 수수한 성취감이었다.

과연, 이건 이것대로─

에취!

“……!”

갑작스러운 반향에 나 자신도 놀란다.

소리가 크다.

입가를 막을 필요도 없으니 그만 무방비하게 재채기를 하고 말았다.

자고 있는 주민에게까지 들렸을 것만 같다.

“…이거 부끄러운걸.”

낮이라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

세상의 잡다한 소리에 섞여 재채기 하나쯤은 세상의 끝으로 떠내려갔을 것이다.

밤이라는 건 무섭네.

잘게 쪼갠 하나를 끄집어내서 ‘봐, 넌 이렇게 큰 소리를 냈어’라고 굳이 수치심을 주니까.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할까.”

헛기침을 한 번.

이번에는 적절한 볼륨으로.

할 일이 없어지니 어색해서 봉투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낸다.

아무런 특징 없는 막대 아이스크림.

포장지 너머로 만져보니 부드럽게 녹은 원형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그대로 뜯…뜯…….

“…음.”

안 뜯긴다. 다시 한번.

“…응?”

안 뜯긴다.

뭐야, 이 절취선은.

거의 장식이나 다름없잖아.

나라고 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힘이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저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게 타당하겠지.

“너까지 불시 검문이니? 기꺼이 상대해 주지.”

약간의 짜증과 힘을 담는다.

이슬을 닦아내고 꽉 쥐어서─

“…윽, 아.”

이번에는 허무하게 찢어졌다.

기세만 앞선 나머지 포장지 안쪽에 고여 있던 녹은 물이 손에 잔뜩 묻고 말았다.

“…….”

극히 명확한 불쾌감.

뱃속이 뜨거워지기 시작하고, 그 열기로 부화한 기분 나쁜 벌레가 공기며 침 따위를 데리고 한숨이 되어 빠져나갔다.

“…나 참. 편의점 매뉴얼에 감사하도록 하게.”

아마 튀김용으로 넣어주었을 물티슈를 뜯는다.

끈적거리는 손을 닦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풀렸다.

원망스러운 마음 그대로 한 입.

곤란하게도 조금 전까지의 격투가 바보 같아질 정도로 솔직하게 차갑고 달콤했다.

“…석연치 않네.”

심술을 부린 직후에 거금을 건네받은 것 같은, 그런 뒤끝이 남았다.

걸으면서 깨문다.

아삭하며 얇게 부서지고 안쪽에서 부드러운 단맛이 배어 나온다.

과즙을 흉내 낸 향료는 작위적이지만, 그래도 차가움과 함께 혀에 올라타면 그런 사소한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질 정도로 맛있었다.

이윽고 아이스크림이 작아지고 마지막 조각도 막대에서 사라진다.

봉투 안에서 과자만 구해내고 영수증이며 쓰레기들과 함께 묶는다.

“잘 먹었습니다.”

손가락에 걸고 빙글빙글 돌린다.

원심력을 만끽하며 문득 나답지 않은 생각을 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무단 투기’를 해본다면 어떨까.

“…흠.”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간판을 다시 꺼내 든다.

벌레가 옮길 리도 없고 바람이 앗아갈 리도 없다.

아침이 되면 누군가 청소부가 수거하거나, 혹은 몇 달 동안 수거되지 않은 채 여기에 굴러다니고 있겠지.

나쁜 짓이다.

하지만 나무라기는 어렵다.

현장에 남는 건 그저 버려진 쓰레기뿐이니까.

“완전범죄겠네. 용의자 후보에도 오르지 않겠어.”

관측되지 않는 죄는 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걸까.

선악은 누군가에게 인식되어야 비로소 성립하는 것일까.

재미있는 의제다.

하지만─유감스럽게도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미안하지만 소중한 친구라서 말이야. 초범은 사양하도록 하지.”

빙글빙글 돌린다.

버리지 않고 손가락에 건 채로.

봉사 활동에 힘쓰는 친구일까.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는 부지런한 에이전트일까.

어느 쪽이든 내가 여기서 쓰레기를 버리면 그녀들의 일거리가 하나 늘어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버리지 않을 이유로는 충분했다.

계속 걷는다.

모르는 가게, 모르는 모퉁이, 아는 횡단보도를 건너서.

낯익은 경치가 늘어날수록 밤은 평소의 얼굴로 돌아간다.

말괄량이 같은 바람도 오늘은 여기서 작별인 모양이다.

“여기까지 오면 이제 비일상이라고 부를 수도 없겠군.”

낯익은 교문을 통과한다.

달빛에 반짝이는 교장만이 불량한 양을 맞이해 주었다.

익히 알고 있는 쓰레기통에 봉투를 던져 넣는다.

세이프 하우스의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끝내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후우…….”

모자를 랙에 걸고 머리를 흔들어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되살린다.

후드티를 뒤집어 쓴 채 그대로 침대로 향해 등부터 털썩 쓰러졌다.

“…아아.”

부드러운 척력이 등을 받아낸다.

몇 시간 전에 주체하지 못했던 시간이 마침내 자신의 형태에 맞게 스며든 기분이 들었다.

“…나쁘지 않네. 지금이라면 정말 시라도 쓸 수 있을 것 같아.”

눈을 감는다.

뇌리에 떠오른 비눗방울에는 지루함은 없고 확실한 만족감과 밤의 기억만이 담겨 있었다.

물론 말로 남기고 싶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젓겠지만.

“말하지 않는 게 약이라던가.

유리조노의 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우물 안에서 얌전히 있도록 할까.”

손가락으로 찔러 거품을 터뜨린다.

내가 오늘 밤 몇 시간에 걸쳐 경험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몇 분 후에는 그 점원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몇 달만 지나면 내 기억에서도 사라져 문득 떠올렸을 때 ‘어느 밤에 산책을 했다’라는 그런 문자열이 떠오르는 것에 불과하겠지.

기억이란 난폭한 편집자다.

몇 시간을 몇 줄로, 몇 줄을 한 문장으로.

마지막에는 감정만 얇게 남기고 도중의 사고도 갈등도 불필요한 부분으로서 잘라내 버린다.

따라서 오늘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정답이다.

이렇게나 여유롭고 감성적인 밤은 그렇게 소비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니까.

“…후후.”

생각해 보니 계절에 국한될 이야기도 아니었다.

오늘 밤의 나는 참으로 제멋대로인 것들을 투영했다.

감상에 젖는다는 행위는 결국 나중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별을 보면 시적이라 말하고, 밤길을 걸으면 청춘이라 말하고, 싼 음식을 사면 작은 사치라고 말한다.

주관적이고 자의적이다.

하지만 인생의 태반은 자의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며, 선택되지 않은 무수한 선택에 이유는 없다.

오늘 밤 내가 밖으로 나간 것도 일종의 취사선택─이라고 계속 이어갈 수도 있겠지만.

이제 사고활동은 충분하지 않나.

그러니 라코니즘에 몸을 맡기도록 하자.

그럼, 이만.

양치질 잊지 말고.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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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2일 전번역

소설 핫산) 한밤의 영애 배회

#소설
좋아요 0댓글 4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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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
leooon0907작가
게시물 23개
고DC
고관위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6.10.06 00:08
조회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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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나
ㅇDC
ㅇㅇ121일 전
디시콘
ㅇDC
ㅇㅇ221일 전

ㅈㄴ 세이아 같은 이야기였어

ㅇDC
ㅇㅇ320일 전
디시콘
ㅇDC
ㅇㅇ420일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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