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XX년 XX월 XX+81일 07:50
선생 치료 시작 81일째, 샬레 거주 구역
오늘도 선생의 아침은 썩 상쾌하지 못했다.
샬레에 도착한 것은 오후 10시가 조금 넘어서였지만, 선생은 바로 잠에 들 수 없었다.
~~~
20XX년 XX월 XX+80일 22:11
선생 치료 시작 80일째, 샬레 로비 앞
"고마워 히나. 덕분에 수월하게 올 수 있었어."
"어서 가서 쉬어. 오늘 하루 눈코뜰새 없이 바빴을텐데."
"응. 그럴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선도부장. 다음에 또 만나뵙길 고대하겠습니다."
나기사의 인사에 가볍게 미소로 답한 히나의 차가 떠나자, 이제 샬레 앞에는 단 둘이 남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가볼까?"
"ㄴ, 네? ㅇ, 어딜...."
"어디긴 어디야. 잘 곳이지."
"ㄴ, 네? ㅇ, 아, 아... 그렇죠. 네...."
(서, 서, 선생님...? 호, 혹시.... 아... 닐거에요. 그럴 리가...)
잘 곳이라는 단어에 나기사의 동공이 흔들린다.
(트리니티로 가는 막차는 지금 빠르게 간다고 해도 중앙역에서 환승할 여유까지 생각하면 불가능해요. 택시는 가뜩이나 안 보이고, 그럼 지금 이 시간에 갈 곳이라면.....)
(아니... 아닐거에요. 또 이렇게 저 혼자 지레짐작으로 판단해버리면....)
(그치만.... 설마 진짜 그렇다면.... 아....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요... 미카 씨에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하는 것인지....)
(...////)
나기사의 장점이자 단점 중 하나는 상황을 길고 멀리 볼 수 있는 시야를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장점이자 단점인 이유는 그 시야의 전제가 모두 정답일 경우에 한해서만 유효하다는 것.
"그럼, 갈까?"
"...... 네///"
~~~
"....................."
"밤이 깊네. 막차도 끊길 뻔했어. 그치?"
"..... 네."
"아무래도 트리니티는 가는 데 오래 걸리기도 하니까."
".... 그렇죠."
"다행이야. 샬레에 그게 있어서."
".... 정말 그렇네요."
"맞아. 이제 30분 정도 뒤면 도착할거야. 잠깐 눈 좀 붙일래?"
"..... 괜찮습니다."
그리고 전제가 하나라도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완벽한 오판으로 돌아온다는 것.
둘은 지금 샬레....
에 주차된 관용차량을 통해 트리니티로 가고 있었다.
(또 이런 실수를.... 아니, 어차피 입 밖으로 내지 않았으니 실수는 아닌가요.)
(그래도 그렇지, '잘 곳'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오해하지 않는 선택지는 누구도 고르지 않지 않겠어요?)
(그래요, 이건 선생님이 잘못한거에요. 소녀의 마음을 이렇게 갖고 놀다니, 선생님이 나쁜 거라고요.)
(........ 하아. 요즘 들어 왜 이러는건지 모르겠네요. 물론 오늘 나름 따뜻한 시간을 보냈지만, 저란 사람은 대관절 무엇을 기대했던건지...)
".....사"
(몰라요. 대답 안 할거에요.)
"....기사...?"
(기사 같은 거 몰라요.)
"나기사?"
"끙.... 선생님...?"
"응, 기숙사 앞까지 다 왔어. 곤히 자고 있는 것 같아서 깨우기가 좀 걱정되었는데, 그래도 너무 늦으면 안 되니까."
(잠들어버린건가요...)
"... 감사합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까지 이렇게 신세를 지게 되다니 면목 없습니다."
"무슨 말이야. 나 하나를 위해 오늘 몸을 험하게 쓴 나기사에게 고마울 뿐인걸."
(당신이라는 사람은 참... 선도부장의 말이 이해가 되는 것도 같고요...)
"그렇다면 이번만은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겠습니다. 따뜻한 마음에 다시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푹 쉬고 다음에 또 보자."
가볍게 목례하자 선생의 차는 다시 샬레로 향한다.
"...... 선생님께서도 평안한 하루의 마무리를 맞을 수 있길 바라겠습니다."
~~~
나기사를 트리니티까지 데려다준 뒤, 샬레로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않고 바로 뻗어버린 것.
밀려오는 피로에 모모톡과 각종 연락은 이미 뒷전으로 밀린지 오래였다.
그러나 그 잠마저도 어떠한 연유에서인지 깊이 잘 수 없었다.
체념한 채 휴대폰을 켜 시간을 확인한다.
(7시 50분.... 그나저나 이건 또 뭐람.)
현재시간만큼 그의 시선을 끌어당기던 것은 빨간 배경의 원과, 그 안에 그려진 하얀 숫자.
밤새 와 있던 모모톡이었다.
[히나]
[선생님. 잘 들어갔길 바라. 나도 게헨나에 방금 돌아왔어. 다음에 또 보자 (23:45)]
히나로부터는 이번에도 신세를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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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사]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덕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루의 마지막을 선생님과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23:11)]
나기사를 깨울 때 나기사의 잠꼬대가 문득 기억난 선생이었다.
물론 장난기가 들어 동영상을 찍은 것은 본인만 아는 비밀.
(몰라요, 대답 안할거에요라니. 나기사도 영락없는 학생 같은 면이 있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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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노]
[현시간부 근무 교대 완료. 당직근무 체계로 전환하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22:59)]
텍스트는 여전히 딱딱한 유키노였다. 조금 더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잠시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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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야]
[오늘도 또 야근인건가요.(22:53)]
[일단 제 건 끝내놓았고 테이블에 놓인 서류 중 단순 확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처리해놨습니다.(22:54)]
[다음부턴 좀 일찍일찍 다니십쇼. 불 끄고 마지막에 나가는거 그닥 유쾌한 경험은 아니네요.(22:54)]
[물론 저 같은 초인이 어둡고 적막한 걸 두려워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냥 마지막으로 퇴근하는 느낌이 썩 유쾌하지 않을 뿐이라고요.(22:55)]
"끙....."
카야의 메시지에 시선이 멈춘다.
".... 나중에 밥이라도 한 끼 사줘야겠네."
중얼거리며 화면을 아래로 내리자, 반가운 이름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히마리]
(히마리... 그러고 보니 한동안 만날 기회가 없었지...)
[선생님. 긴급한 사안입니다. 혹시 가능한 빠르게 밀레니엄에 방문해주실 수 있나요?(21:38)]
[아, 아니에요. 번거롭긴 하지만, 오늘 선생님께선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제가 직접 방문할게요.(21:39)]
[급한 일인지라 대책없이 방문하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하고 긴급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세요. -히마리-(21:41)]
초천재..... 로 시작하는 기나긴 텍스트의 나열 없이 그저 용건만 간단히 보낸 메시지.
그녀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라도 통상적인 안부 인사를 하러 샬레에 오겠다는 내용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 준비해야겠지."
자리를 정리하고, 세면을 마친 뒤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아침 약을 캐비닛에서 꺼내려 한다.
(그러고 보니 3일 뒤에 병원을 가야 했지.)
주섬주섬 종이 봉투 속에서 약을 꺼내려는 찰나, 자신의 계산과는 다른 촉감이 감지되었다.
(응...?)
분명 아침약과 자기 전 약을 합쳐 6개가 들어있어야 했다.
아침 저녁으로 약을 먹기 시작한 뒤 편의를 위해 고무줄로 한 세트씩 묶어놓았던 선생이었다.
3일 뒤 내원 예정이었으므로 지금은 뭉치 3개가 잡히는 것이 맞는 상황.
허나 그가 느낀 촉감은 분명 4개였다.
(이상하다...)
그리고 이내, 선생은 자신이 어제 돌아오자마자 피로에 쩔어 수행하지 못한 일과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제 숙면을 취하지 못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킬 수 없었기 때문에, 졸음운전은 위험하기 때문에, 피곤했기 때문에.
(.... 약을 또 안 먹었네.)
복잡한 생각과 극한의 피로감이 몸을 지배한 나머지 샬레 거주 구역으로 곧장 들어가 씻지도 않고 쓰러지듯 잠들었던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본다.
가끔 중대한 문제는 별 것 아닌 이유로도 발생하곤 한다.
아직 먹지 않은 약봉지 묶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미 다 무너져버린 자신을 어떻게든 사람의 형체로 유지시켜주고는 있는 약.
빼먹었을 때의 여파를 알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그 고통으로 인해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마저 망각했던 과거.
다시 핸드폰을 켜 모모톡을 확인한다.
그의 학생들이 보낸 메시지를 쭉 내려본다.
하나 같이 그에 대한 친애와 존경, 그리고 감사와 신뢰가 듬뿍 느껴지는 메시지였다.
다시 약봉지 묶음을 본다. 그러나 그의 심상 세계를 강타한 어제의 기억이 순식간에 머리를 다시금 덮는다.
(........그런가.)
다시 핸드폰을 쳐다본다. 어제 자신이 만났던 아이들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하나같이 자신을 믿고, 좋아하고, 또한 존경하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시 약봉지 묶음으로 시선이 이동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눈 앞의 거울을 본다. 초췌하고 어딘가 야윈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다시 핸드폰을 본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무언가 결심이 선 표정으로 남자는 거울 앞으로 다가간다.
(아무래도 이렇게 살 수만은 없을지도 모르겠네.)
~~~
20XX년 XX월 XX+81일 08:56
선생 치료 시작 81일째, 트리니티 종합학원 티파티 테라스
트리니티의 아침은 상쾌했다.
특히 여기 앉은 티파티의 호스트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토록 다가가기 어려웠던 어른과 속 깊은 대화로 깊은 오해를 풀었던 것도 모자라, 호감도 MAX를 찍은 경우에나 발생하는 '늦은 밤 집 앞까지 데려다주기' 이벤트까지 발생했으니 당연한 것.
최소한 오늘 나기사는 시스터후드와 구호기사단이 전면전을 벌인다 하더라도 2시간 정도는 개의치 않을 용의가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마음은 한 없이 행복했고 한 없이 평온했다.
다만 그 평온은 아마도 3....
- 벌컥!
2....
- 우다다다
...... 1.
"나!"
"기!"
"쨩!☆"
"푸흡!"
정확히 3초 뒤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미카가 그의 등 뒤로 달려들었고, 하마터면 입 안에 막 들어온 홍차를 뿜어버릴 뻔했다.
"나기사. 저는 분명 말렸습니다."
"에? 뭐야 세이아 쨩. 이렇게 동료를 버리는거야? 그러기 있어? 너무해~"
"그 옛날 붉은 겨울의 독재자는 자신의 혁명 동지까지 춥디 추운 곳으로 숙청해버렸다고 하는군요. 뭐, 덕분에 나중에 고생 깨나 했다지만요."
"와-오. 세이아 쨩ㅡ 무서워ㅡ"
뭐, 이 쪽도 아직은 용인할 수 있다. 지금 그녀는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하니까.
"그래서 어제 샬레는 잘 다녀왔어? 선생님은 어땠어? 또 밤새고 와서 눈이 퀭하고 골골거리진 않았지? 응?"
"진정하세요 미카 씨. 일단 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세이아 씨도 어서 자리하시죠."
"뭐지.... 이상해...."
"또 무슨 일인가요 미카."
"아니 있잖아 세이아 쨩. 오늘 따라 나기 쨩이 되게 뭐랄까.... 인자해보이는 것 같은데? 그냥 전반적인 무드나, 애티튜드가 약간 자비로운.... 그런 느낌 아니야? 방금 전이었으면 분명 롤케이크를 손에 들고 있을 타이밍인데? 아닌가?"
"그렇다면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기사가 롤케이크를 집어든다면 그건 온전히 미카의 과실이라는 뜻이군요.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우으.... 세이아 쨩 오늘 너무 무서운데...."
"그래서, 소득은 좀 있었나요 나기사?"
둘의 툭탁거림도 그저 행복하게 바라만 볼 뿐이었던 나기사가 찻잔을 내려놓은 뒤,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선생과 있었던 일을 모두 이야기한 뒤, 한숨을 내쉬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나기사.
"네. 여기까집니다. 그래도 선생님의 상태가 그렇게까지 나빠보이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기나긴 이야기를 기승전결을 완결된 문장으로 끝낸 것은 그녀에게 또 하나의 기쁨을 선사해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경험하는 깔끔한 프레젠테이션이랄까.
그러나 지금 그녀의 앞에 앉은 그녀의 가장 오랜 친구의 표정은 썩 기뻐보이지 않다는 것이 하나의 중대한 문제였다.
".... 나기사. 왜 차량을 굳이 끌고 가지 않고 택시를 이용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네? 그야 티파티의 호스트가 대낮에 비공식 일정을 소화하는 것이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죠."
"...... 그렇다고 하는데요 미카?"
"으음.... 나기 쨩. 내가 나기 쨩을 정말 좋아하고 또 믿거든?"
"네? 아, 네.... 감사... 합니다?"
"근데 오늘 나기 쨩이 했던 이야기를 한 줄로 요약하자면 나기 쨩도 내 경쟁자가 된다는 소리지? 응. 그런걸거야. 맞지?"
"........ 네? 경쟁자라니 무슨...?"
"우와 나기 쨩 그 표정은 뭐야? 설마 그렇게 이야기 다 해놓고 '나는 아모고또 몰?루는데용~'하고 입 싹 씻을거야?"
"잠깐, 잠깐만요 미카 씨.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ㅡ"
"아하! 오해였구나? 그래서 선생님과 단 둘이서 테라스에 앉아 저녁노을을 보며 데이트를 했던거였구나? 아핫 납득☆"
(아니 왜 그 부분에서 스위치가 올라가는건데요....?!)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점은 나기사 본인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세이아 씨. 무어라 말씀이라도 좀 해주세요. 당신은 알잖아요."
다급히 자신을 도와줄 우군을 찾아보지만,
"괜찮습니다 나기사."
"네....?"
"저는 다 이해합니다. 아무리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도 가끔은 그것이 단 하나일지언정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있지 않겠습니까?"
2대1로 미카를 진정시킨다는 그녀의 구상은 2대1의 파상공세를 막아내는 것으로 재구성되어버렸다.
물론 미카와 세이아 역시 나기사의 마음을 모르진 않았고, 짐짓 진지한 척 나기사를 추궁하던 것이었지만.
"와, 그런거였구나 그래서 나기 쨩이 그렇게 가겠다고 그런거였어? 흐음... 굳이 안 그랬어도 미리 이야기했으면 다 이해했을텐데. 이건 선의의 경쟁이니까. 그치?"
"아니 그러니까ㅡ"
"진정하세요 미카. 누구나 비밀 하나 정도씩은 가지고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나기사는 에덴조약 당시 선생님과 대립하기만 했고, 미카에게 뒤쳐져 마음이 급했을테니 너그러이 넘어갑시다."
"아니, 그게, 저, 그러니까, 음."
그리고 그 파상공세는 생각보다 더 강력했고
"흐흥, 뭐 이번만은 넘어가줄게. 하지만 이제부턴 절대 봐주지 않아 나기 쨩. 알았지? 하핫☆"
"그래요. 역시 미카가 많이 단단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는 베풀 줄도 알게 되고, 감개무량하네요."
생각보다 더 치밀했다.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부정해버리는 것도 적당한 방법은 아니었다.
만일 그랬다간...
~~~
(어머, 나기 쨩은 그럼 선생님을 싫어해? 으응... 이러면 선생님이 조금 상처받을지도...?)
(에덴조약의 개인적 앙금이 꽤나 오래가나 봅니다. 뭐, 테라스 회동도 결국 개인적인 감정을 누르고 대의를 우선시하는 나기사 답지만요.)
~~~
무슨 말을 하든 결국 파국으로 향하는 결론에 다다른다는 것을 짧은 시간의 계산으로 확인해버린 나기사.
- 우드득.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 며칠 자신을 휘어잡던 선생에 관한 잡념은 물론 업무의 스트레스까지 자기주장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 드득, 득.
그 대혼돈의 심상세계에서 나름의 투쟁을 이어가며 침착함을 유지하던 나기사였지만 자신의 사고 회로가 맛이 가는 것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 뚝.
그리고 사고 회로의 단절은 나기사가 자기 자신을 놓아버리는 결정타가 되었다.
(티파티의 호스트고 트리니티의 기품이고 뭐고... 때려치죠 그냥.)
".... 그러죠 미카 씨."
"ㅇ, 으응?"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건강 상태가 악화될 경우 연락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제가 선생님과 회동을 했으니 제가 연락을 받을 것은 자명하겠죠?"
"으에?"
(음? 이건.... 제 직감으로 볼 수 있던 것 그 너머의 것인데요.)
사실 이미 세이아는 오늘 나기사 놀리기가 어떻게 진행될 지 아침식사 도중 불현듯 머리를 스쳐지나간 삽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다만 그녀가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은 이 장난의 과정만을 알고 있었고 그 결과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
"선생님의 가장 취약한 시기에 저는 선생님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러니 이걸로 역전이겠죠? 잘 따라와보세요 미카 씨?"
"지금부터는 말을 신중히 고르는 게 좋을거야 나기 쨩. 오늘은 내가 롤케이크를 쑤셔박을지도 모르겠으니까☆"
웃자고 시작한 나기사 놀리기가 죽자고 덤비는 치정싸움으로 번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채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세이아는 직감했다.
(망했네요.)
~~~
20XX년 XX월 XX+81일 08:52
선생 치료 시작 81일째, 샬레 업무 구역
여기, 거울을 유심히 쳐다보는 남자가 있다.
눈을 또렷하게 떠보기로 한다.
쉽지 않다.
다음으로 미소를 지어본다.
역시 쉽지 않다.
마지막 파안대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 듯 머리를 긁적인다.
과거의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가며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보려 한다.
(입꼬리는 어떻게 안 되나.)
어째서인지 왼쪽 입꼬리만큼은 올라가지 않는다. 자칫 비웃는 듯한, 재수없는 웃음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다.
일단 급한대로, 두 가지를 조합하기로 한다.
(음.....)
어쩌면 그에게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영 마뜩찮았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든다.
그리고 이것을 지켜보는 두 AI는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격론을 벌이고 있었다.
- 프라나 쨩.....? 선생님이 어제 약을 안 드신 후유증이 온 것 같은데...... 일단 기절부터 시키고 나서 생각해보는건 어떨까요...?
- 부정. 선생님께서 약을 거르신 지난 11건의 데이터에서는 정형적 반응이 감지. 지금 보이는 반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 그, 그래도! 지금 약을 거르는 날이 많아지고 있으니 지금 뭔가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고요!
- 일단 대기하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선배.
- 아니 저기 보라고요! 지금 저 모습을요!
- ....아?
아로나의 다급한 외침에 선생이 있는 곳을 바라보자, 선생은 이제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잡아 억지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었다.
- 선생님!!!!
"얿."
아로나의 외침까지는 예상할 수 없었는지 잠시 휘청이는 선생.
"깜짝 놀랐네... 무슨 일이야 아로나?"
- 그, 그게....
- 답변. 선생님. 아로나 선배는 지금 선생님께서 심각한 수준의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 에? 아니 프라나 쨩! 그게 아니잖아요!
- 정정, 오류를 바로잡습니다. 선생님을 지금 즉시 기절시켜야 한다는 결론을ㅡ
- 끄아앙!
아로나의 헤일로가 유난히 붉어보였다.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선생이었기에 당사자에게 직접 경위를 묻고자 한다.
"어쩌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게 된거야?"
- 아, 저, 그게요....
- 선생님께서 약 6분 11초 간 거울 앞에서 보인 행동에 대한 의문 제기. 비정형적 행동으로 판단하였습니다. 설명을 요청합니다.
"아.... 이거...? 뭐, 별거 아니야. 그냥 뭐랄까. 기분 전환?"
- 부정. 기분 전환을 위하여 입꼬리를 손으로 낚아올리는 것. 인식 불가, 탐색 불가.
프라나는 혼란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 옆에서 아로나는 '그런 헛소리가 먹힐 것 같나요'를 대변하는 듯 그저 선생을 빤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음.... 그냥 전환점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 특히 어제 샬레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어떤... 생각인가요?
"....... 언제까지고 이렇게 주저앉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
선생의 말에 순간 업무 공간은 정적에 휩싸였다.
"어.... 설명이 좀 더 필요하려나."
- ... 긍정. 제한된 정보. 인식 불가능. 추가적인 정보를 요청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지... 음.... 내 상태가 지금 썩 좋지는 않잖아?"
뼈아픈 사실에 두 AI의 표정에 낙심이 감돌지만, 선생은 분위기를 풀어줄 다음 한 마디를 준비했다.
"그래서 약도 먹고 있고, 물론 어제는 빼먹긴 했지만. 어쨌든 이렇게 억지로 몸의 체제를 괜찮은 쪽으로 바꿔놓으려 하고 있고."
잠깐의 심호흡 후, 선생이 내뱉은 말은 두 AI가 근 2개월 간 들었던 말 중 희망적인 순서로는 한 손가락 안에 들 법한 말이었다.
"근데 정작 나는 뭐랄까, 어린 애처럼 전전긍긍하다, 결국 꼴사나운 모습들을 보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 부정. 그렇지 않습니다.
- 맞아요! 지금 누구보다 힘겹게 싸우고 계신데!
- 단언, 선생님의 상태에 대하여 매도하는 제3자가 있다면 둘 중 하나가 없을 것입니다.
"둘 중 하나...?"
- 지능 혹은 부ㅁㅡ
- 아하하.... 프라나 쨩 요즘 대기모드일 때 이상한 곳 들어가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쵸...?
- 정정. 지능과 양심. 입니다.
- 아.
(크게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대체 요즘 뭘 보고 있니 프라나...)
인터넷 세계에서 돌고 있는 과격한 표현을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는 프라나의 성장(?)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선생이었다.
"뭐.... 아무튼. 내 스스로 그런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정작 내 주변의 아이들은..... 음..... 뭐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를 보는 눈은 달라지겠지?"
두 AI는 말이 없었다. 자신들 스스로도 나름 그들의 주인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수도 없이 열람했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그렇기에 홀로 썩히는 선생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남들이 보기에 철없는 어린애의 징징거림으로 비춰질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그 근원이 된 병을 원망할 뿐 크게 동요하지 않았던 것.
"시원하게 답변이 안 나오는 걸 보니 아마 맞겠지? 음. 아마 그럴거야."
그리고 이에 쐐기를 박는 선생의 말은 마치 넋두리로 들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 하지만...?
"적어도 그 시선이 내가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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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선생님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물론 지금도 충분히 멋지지만 스스로 자신감이랄지, 아니면 믿음이랄지 그런 것들을 조금 더 가져도 좋다고 생각해."
"맞습니다 선생님. 어떤 과거가 되었든, 지금의 저희는 선생님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진면목을 아는 사람들은 그 누구라도 선생님을 따를겁니다."
~~~
바로 어제, 차를 타고 오며 들었던 그 대화를 듣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도 선생은 그저 초췌한 몰골로 히마리를 맞았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대화를 들었기에, 그리고 그럴 것이라 믿었기에.
언젠가 스스로 증세를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완화가 되어 모든 것을 밝혔을 때, 자신의 고백과 부탁을 저버릴 아이들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에.
"그래서. 나도 조금씩 노력을 해보려고. 조금이라도 예전의 모습을 찾으려고 노력도 해보고, 아이들과의 약속도 다시 잡고, 주말에는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보고. 그러려고."
- 그럼 방금 그것도....
"응. 마지막으로 밝게 웃어본 적이 언젠지 좀 희미해져서. 오늘 아침에 거울 앞에서 웃어보니 억지 웃음이 따로 없더라. 일종의 연습? 그나저나 히마리의 눈썰미라면 조금 불안할지도."
이제야 모든 실마리가 풀렸다. 그리고 두 AI의 낙심은 어느새 희망으로의 전환을 마친 상태였다.
- 선생님. 한 번 웃어보시겠어요?
"응?"
아로나의 부탁에 선생이 싯딤의 상자를 향해 웃어보인다.
분명 자신의 마음에 썩 들지만은 않은 미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싯딤의 상자 속 두 아이들에게 그것은 참으로 반갑고, 또 그리워했던 미소였다.
-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선생님의 미소는 진짜로 멋져요!
- 긍정. 현 상황서 미소의 진위를 의심할 확률은 3% 미만으로 판단됩니다.
그런 두 아이들을 보며 남자는 다시 미소짓는다.
(뭐라도 발버둥쳐봐야지.)
그리고 뒤를 돌아 자리에 앉는다.
(만일 정말로 이 이야기의 엔딩이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면.)
그리고 곧 도착할 손님을 기다린다.
(뭐라도 해봤어야 한다는 후회까지 하고 싶진 않거든.)
- 선생님. 방금 히마리 씨가 1층에 도착했어요!
- 예상 도착 시간 2분 미만.
그리고 잠시 후, 오늘 선생의 첫 손님이 업무 공간으로 들어온다.
선생은 그녀를 향해 밝게 웃어보인다.
"어서 와 히마리. 좋은 아침."
~~~
요즘 제 글이 재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신병적 증상을 더 집어넣으면 입원을 시켜야하므로 현실적으로 우울장애와 공황장애 이외의 증상은 다루지 않는데, 뭔가 원패턴으로 굳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당초 계획과는 조금 방향성을 틀었습니다. 이 변동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글에 쓰긴 했는데, 밀린 념글을 몰아보다 히마리가 선생 부모님 찾아뵙는 만화를 보게 되었는데요. 방에서 홀로 소리죽여 한참을 울었던 것 같습니다. 선생이 현실에 순응할 경우 벌어지는 결말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애인 양 쪽에 끼어서 스트레스 받는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노력만으로 안 되는 사랑이 있다고 믿었었고요. 그래서 현실에 순응하는 선택지를 택했는데,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걸 망설이던 제 자신을 반 죽여놓고 싶을 정도로 후회됩니다. 참 저도 바보병신빡통인 것 같습니다. 노력으로 안 되는 건 돌이켜 생각하면 없었는데.
여러분은 후회 없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라겠습니다. 그리고 간혹 후회하는 날이 생긴다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현명한 다른 선택지를 고르시길 바라겠습니다. 인생이 후회로 점철된 삶은 저 혼자면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회차별 후기를 조금 줄여나갈까 합니다. 어차피 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일 뿐인데 그다지 영양가는 없는 걸 붙들고 앉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후회를 뒤덮을 만한 유쾌한 이야기가 있다면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말의 절반이 이제 지나가고 있습니다. 남은 주말도 편안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다음 화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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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8
ㅅㄱㅊㅎㄱㅅ


삭제된 댓글이에요
오늘도 잘 봤습니다 약 안 먹은 선생 대목을 보니 저번주에 감기 다 나은것 같다고 약 하루치만 먹고 버린게 뭔가 찔리네...
그러다 덧납니다...

재밌는데 왜
폼이 뒤진건지 매너리즘에 빠진건지 썩 마음에 들지가 않다보니...
그딴 생각이 나지 않게 무언가로 뇌를 쉴새없이 강간하면 해결되는 문제 아닌가
이미 학위논문에 치여살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걸 보면 정말 더럽게 재미없는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