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XX년 XX월 XX+114일 17:08
선생 치료 시작 114일 째, 샬레 업무 구역
"..... 오늘도 업무량이 상당하십니다. 제가 도와드립니까?"
"아니아니...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인걸. 부담을 지우고 싶진 않달까. 가뜩이나 곧 부담을 지울 수도 있는데... 일단 앉을래?"
어깨를 으쓱하는 선생의 반응에 아직은 어떻게 대응해야할 지 모르는 유키노였다.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응. 지난 번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안 되어서.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할까....."
어딘가 모르게 답변을 미루는 선생의 모습.
"..... 어떤 내용이든 말씀만 해주십시오. 이미 저희는 선생님께 너무 많은 것을 빚졌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더러운 일이라 할 지라도 그것이 보답의 길이라면 기꺼이ㅡ"
"워워, 일단 진정해. 내 소중한 학생에게 더러운 일을 시킬 리 없잖아? 그런 건 아니고, 지금까지 열심히 훈련해준 만큼 내가 한 가지만 부탁을 하려 해."
"네. 분부를."
"....... 당분간 샬레는 SRT와 아리우스가 지켜주면 좋겠어."
"이미 샬레는 저희가 교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혹시 선생님의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였다든가...."
"그런 건 아니고, 음... 일단 이거 한 번 읽어볼래?"
권유와 함께 선생이 건넨 문서, 한 눈에 봐도 공문서의 수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유키노는 그것을 다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제목에서 선생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음을 본능적으로 파악했기에.
[당번 활동 무기한 중단(협조)]
"...... 이건."
"말 그대로야. 오늘 각 학교의 학생회에게는 전달해놓았어. 그리고, 또 한 가지. 2주 뒤부터는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울거야."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정보들이 들어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안.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지?"
"..... 당번 활동의 중단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음... 니코가 이미 잘 알고 있을거야 그건. 생각컨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 자리를 비우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일단 대외적으로는 각 학교에 순회를 도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실질적으로는.... 휴가라고 해야할까?"
니코, 위장된 휴가, 그리고 샬레의 수비.
도무지 연결점을 찾을 수 없었던 유키노로써는 답답할 따름이었으나, 적어도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 저흰 그럼 선생님의 휴가를 안전히 지키면 되는 것이겠군요."
"음 한 절반 정도 맞긴 해. 유키노와 SRT, 아리우스는 샬레를 지키는 거야."
"... 죄송합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그러니까 내가 그 기간 동안에는 샬레에 없을 예정이라는 뜻이지."
이어진 선생의 말에서 유키노는 그의 의도에 한 발자국 정도는 다가갈 수 있었다.
그녀가 판단하건대, 선생은 당장 내일부터 당번제도를 폐지한 뒤, 약 2주 뒤에 있을 게헨나-트리니티 공동 의료봉사를 마지막으로 순회를 가장한 잠적을 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아닌 샬레를 지킬 것을 부탁한 것은 샬레 내의 설비 보호에 그치지 않고 '마치 선생이 샬레에 있는 것처럼' 행동해주길 부탁한 것.
그리고 혹여, 당번 중단이라는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날뛸 '걱정스러운 학생'들이 샬레에 침입할 경우 대응해주길 바란다는 것.
그러나 여전히 근본적인 원인은 다가갈 수 없었다.
(니코... 대체 뭘 알고 있는거야...)
그런 유키노를 보며 선생이 살짝 미소짓는다.
"뭔가 아직 아리송한 부분이 있는 모양이네?"
"아닙니다. 어떤 말씀인지는 잘 알았습니다. RABBIT 소대와 아리우스 스쿼드를 적절히 배치하여 샬레로 향하는 위협을 배제하겠습니다."
"그래... 그래주면 너무 고맙겠구나. 그동안도 신세를 많이 졌네 생각해보니."
"신세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지금 샬레에 편성된 학생들은 온전히 선생님께서 받아주셨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 저희가 최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학생'으로서 '선생'님에게 보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유키노도 꽤 많이 컸구나. '당신 같은 어른이 제일 싫다'고 말하던 아이가 어느덧 이렇게 기특한 말을 할 줄이야."
"큭.... 콜록 콜록...."
이제는 샬레 내에서도 'SRT의 소대장이라면 반드시 내뱉어야 하는 말'로 통용되는 문장. '당신 같은 어른이 제일 싫다'를 선생의 입에서 직접 들었을 때의 당황스러움은 유키노도 피해가지 못했다. 연신 사레가 들려 기침하는 유키노를 보며 선생은 오랜만에 이를 보이며 웃었다.
"........ 아직 마음에 두고 있으셨습니까?"
"그럴리가. 이건 그냥 분위기가 무거워지려는 거 같아서."
"가끔은 너무 짖궃으십니다."
"하지만 재밌었죠?"
"....... 두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선생님."
"편하게 말해줘."
"... 우선, 니코를 언급하신 것은, 제가 가서 이야기하면 되겠습니까?"
"응. 아마 알고 있을 거야. 말하기를 주저하면 '내가 괜찮다고 했다'라고 말해주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약간 뜸을 들이던 유키노는 조심스레 입을 연다.
"....... 대표자로 저를 부른 이유가 특별히 있으십니까? 1학년이긴 하나 선생님과 더 깊은 유대를 갖고 있는 츠키유키 미야코도, 그보다 더 앞서 선생님과 만난 아리우스 스쿼드의 조마에 사오리도 있습니다. FOX 소대 내라면....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 남다른 니코 역시도 있습니다. 소대장이라곤 하나, 제가 셋을 제치고 이 이야기를 홀로 듣고, 전파해도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조심스레 말을 내뱉는 유키노의 모습은 어딘가는 자신없어 보이기도, 어딘가는 조심스러워 보이기도, 어딘가는 약간의 죄의식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런 유키노에게 선생이 해줄 수 있는 말은 단 하나.
"물론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했지. 했는데, 유키노만큼 어울리진 않더라. 소대장으로서 리더십도, 주변의 인망도, 개인의 역량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 오고 나서 가장 많이 긍정적으로 변했고."
"그럴 리 없습니다."
"아니. 그럴 수 있어. 전해 들었어. 나기사와 자리가 만들어지도록 도운 사람 중에는 유키노가 있었다고."
"........ 니코가 또 쓸 데 없는 소리를 했습니다."
"아니, 중요해. 물론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조언하고, 용기를 복돋아주고, 도움을 줄 만큼 유키노가 많이 성장했다는 뜻이니까."
".......... 그것으로 충분한 겁니까?"
"그럼."
유키노의 눈에 비친 선생의 모습은 처음 보았을 때와는 많이 변해있었다. 머리를 다듬지 않아 지저분했고, 면도를 했다지만 하루가 저물어가며 듬성듬성 검은 바늘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과도한 카페인 때문인지 동공은 잔뜩 수축해있고, 눈 밑의 다크서클, 어딘가 모르게 늘은 듯한 주름살과, 듬성듬성 자라있는 몇 가닥의 흰 머리까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이 주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유키노도 내 소중한 학생이니까.'
그 눈빛을, 이제 유키노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
유키노가 완전히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소리를 듣자, 선생은 재빨리 서랍을 연다
[필요 시]
[알프라졸람 1mg]
두 줄의 글자가 쓰인 약봉투 뭉치에서 4개를 뜯어낸 뒤, 한번에 주욱 찢어내어 약 네 알을 손에 쥔다.
다급하리만치 빠르게 입에 털어넣고, 텀블러의 물을 급히 들이킨다.
- 경고. 일일 성인 적정량에 도달했습니다.
"..... 나도 알아."
- 선생님... 이러다 정말 큰일나요...
아로나의 걱정은 타당했다. 알프라졸람은 향정신성의약품. 가뜩이나 의존성이 있는 벤조디아제핀 계열의 약물로, 장기 복용 시 그 의존성도 강력한 편이다.
무엇보다 벤조디아제핀류 약물이 가지는 끔찍한 부작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벤조디아제핀의 주된 부작용 중에는 뇌 수축, 알츠하이머 발병 가능성 증가, 자살충동 증가 등 모순 반응 등이 있으며, 알코올 및 마약류와 병용 투여 시 호흡곤란, 혼수상태, 심하면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벤조디아제핀류의 부작용은 과다 복용, 혹은 복용량의 급격한 증감, 알코올 등 타 약물과의 병용 투여 시 그 확률이 급격히 증가한다.
유감스럽게도, 선생으 투약 매커니즘은 두 가지 종류에 모두 해당했다. 기본적으로 1회 당 투약하는 횟수는 성인의 적정량인 4mg 혹은 그 이상을 웃돌 때도 있었다. 또한 필요 시 약은 평상 시 이미 좋지 않은 선생의 상태가 급격히 악화될 때 투여하는 것이 원칙이므로 급격한 복용량의 증감 역시 해당하고 있다.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술을 마셨을 때 만큼은 약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점 정도일까.
(...........)
그러나 동시에 약물을 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누차 이야기하였듯, 지금 약은 비가역적인 데미지를 입는 선생에게 '그나마 회복할 수 있는 영역'을 안정화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투여를 중단한다면 '어른의 카드' 사용으로 인한 댓가가 그의 몸을 잠식하는 것은 시간문제. 결국 죽음까지 이를 수 있는 위험한 외줄타기에서 선생은 두 선택지를 놓고 극도로 위험한 저울질을 하고 있는 셈이다.
- 선생님.... 필요하시다면 일정을 변경할 수도 있어요. 우선 회복부터 하시고, 그 다음에 공무를 수행하시는 게..
"아로나."
- ........ 네.
"지금 상황에서, 내가 입원했을 때, 내가 받을 '대가'까지 회복될 가능성이 있어?"
- ....... 프라나 쨩 생각은 어떤가요.
- 불명. '그 세계'에서도 어른의 카드의 반동을 직접 받은 경우는 없었습니다. 허나, 생명과 시간을 담보로 하는 어른의 카드라면.....
"결국 일정 수준 이상까지는 회복되기 어렵다는 뜻. 맞지?"
지금까지 놓인 현실을 앞에 두고, 두 OS는 선생의 말에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녀들이 생각하기에도, 어른의 카드라는 물건이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상 여태 그가 지불한 대가를 '탕감'해주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또한, '일정 수준'의 기준 역시 생각컨대 많아봐야 절반 정도였다. 남은 절반은 이미 몇 번 사선을 넘는 와중에도 적절한 조치 없이 공무를 강행한 결과이자, 누적된 트라우마의 결과이며, 입원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통한다 하더라도 완치를 보장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에.
"..... 어두운 이야기는 그만하자. 아까 그 프로토콜에 관한 이야기라도 하는 게 좋겠어."
- ............. 요청사항을 말씀해주십시오 선생님.
"고마워 프라나. 일단 내가 요망하는 수준을 달성할 수는 있을까?"
- 부분 긍정. 현 프로토콜은 기본적으로 막대한 전력량을 통해 싯딤의 상자를 과부하하여 지휘 가능 학생의 한도를 늘리는 것. 허나 사용하지 않는 리소스의 양이 제한적이므로 요망 수준까지 다다를 가능성은 낮습니다.
- ....... 지금 상태로는 동시에 10명, 정도려나요.
프라나와 아로나의 대답을 들은 선생은 이내 종이에 몇몇의 이름을 적다, 이내 지우고 다시 적기를 반복한다.
"......... 조금만 더 되면 좋을텐데. 다른 기능은?"
- 가능할 것 같아요. 총학생회로부터 생텀타워의 제어권을 받아올 수 있디면 자연히 각 학교의 전투정보도 받아볼 수 있을 거에요.
- 싯딤의 상자의 UI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출력 개시.
프라나의 말이 끝나자, 싯딤의 상자에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등장했다. 학생들의 모습과, 그들의 능력을 보여주던 일반적인 화면이 아닌, 각 학교의 교표가 곳곳에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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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샬레 직할대]
[인력: 12(5 / 3 / 4)(1학년 / 2학년 / 3학년)]
[탄약: 34,000 / 16,500 / 3,000(소화기 / 중화기 /화력지원장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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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갑: 0 / 2(전차 / 장갑차)]
[항공: 0 / 3(고정익 / 회전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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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 현재 인터페이스는 직할대장, 시치도 유키노와 연동되었을 때의 결과입니다.
"가만, 내가 연동한 적은 없는데?"
- 혹시 모르겠다 싶은 것도 있었고, 때마침 들어온 학생이 유키노 씨라 한 번 연동해봤어요. 각 동아리의 부장이나, 학교의 학생회 분과 연동하면 동아리와 학교 전체의 인터페이스도 연동이 될 거에요.
"그 수준까지는 기대하지 않았는데, 이제야 그 전력량 소비가 이해가 가는 것도 같네. 잘 해내줬어. 고마워 둘 다. 이따 엔젤25에 들르는 김에 딸기우유 사다줄게."
유키노와의 대담에 모든 여유와 에너지를 쏟아버린 선생의 말에는 힘이 없었고, 몸은 축 쳐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써 밝은 모습을 보이려는 선생의 모습에 두 OS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그것은 자신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과 흡사했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새로운 프로토콜이 완성 절차에 들어갔다는 사실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아직 정식 명칭이 붙여지지 않은 프로토콜의 핵심은 '대규모 전면전을 상정한 단위부대 수준에서의 지휘통제'. 즉, 이제 학생 개개인이 아닌 '동아리'나 '학교'를 한 번에 지휘할 수 있게끔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다행히 학교마다 현장지휘관, 혹은 참모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다시 말해 선생이 믿고 맡길 수 있는 학생들이 있기에, 그들을 싯딤의 상자로 지휘하고, 기타 소부대 지휘 등은 현장 지휘관과 참모에게 일임하는 구조를 설정할 수 있었다.
종이에 적다, 지우고, 다시 적길 반복한 이름 중에는 익숙한 이름 역시 있었다
<현장 지휘>
[소라사키 히나]
[키리후지 나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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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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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치도 유키노]
<참모부>
[유리조노 세이아]
[오쿠소라 아야네]
[아케보시 히마리]
.
.
.
[ ]
리오의 복귀 등 아직 상수가 아닌 변수로 남아있는 부분이 적잖았으므로 곳곳에 빈 칸이 보이고 있지만, 애써 신경쓰지 않기로 한다.
(조금 더 추려야겠지만... 여차하면 참모부 아이들은 내 곁에서 직접 움직여도 되니까...)
여전히 10명이라는 한계에 묶인 지휘능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렇게 선생은 한참을 종이에 쓰고, 지우고, 또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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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XX년 XX월 XX+114일 20:35
선생 치료 시작 114일 째,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초현상특무부
"..........."
"부장.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자. 점심 저녁을 둘 다 거르는 건 좀 아닌 것 같달까..."
"딱 한 번만 더 해볼게요 에이미."
히마리의 인터페이스에는 'No.318'의 숫자가 막 'No.319'로 변경된 참이었다. 아마도 필요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실험의 갯수를 암시하는 그 숫자는 히마리의 집념과 노력을 대변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힘내지 않으면 안 되겠죠. 밀레니엄이 자랑하는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하도록 놔두진 않겠어요."
에이미의 권유를 완강히 거부하고 난 히마리는 다시금 스크린에 모든 정신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에너지의 파형이 있다는 것은 확인했어요. 그 에너지를 상쇄하는 것은 현재의 기술력으론 불가능.... '방주'를 소환해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데다가, 그 역시 가능하다는 보장이 없죠...)
에너지 생명체의 존재가 확인된 이상, 막대한 화력을 쏟아붓고도 잠시 '분해'되어 흩어질 뿐 어디선가 다시 합성되어 나타나는 극악무도한 특성을 어떻게든 파훼해야만 했다.
(EMP를 이용해보겠다는 생각도 해봤지만...... EMP는 평등하죠. 특히나 전자장비를 다수 사용하는 저희라면 더더욱...)
에너지를 무력화할 수 있는 재밍이나, EMP 같은 극단적인 방법까지 생각해보았지만, 우군 피해에 대한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결정적인 문제라면 에너지의 파형이 흩어진 뒤, '재구축'되는 상황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흩어진 에너지가 다시 모여 에너지 생명체를 이뤄버리면 애써 해체한 에너지 생명체가 부활하는 것 외에 다른 결과는 도출되지 않기에, 흩어진 에너지를 안전하게 '처리'하는 방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으니까, 나랑 같이 뭐라도 먹으러 가자."
"후후.... 치 쨩에게서 전혀 들을 수 없을 법한 이야기가 나오는 걸 다 듣다니, 병약속성의 미소녀로도 살아갈 이유는 충분했나보군요. 그렇죠?"
"몇 시간 정도 지났어 에이미?"
"글쎄... 적어도 점심을 걸렀으니까 8시간 이상은 꼼짝 않고 있었지?"
"진짜 그러다가 앓아눕겠어. 얼굴이 그게 뭐야."
무심한 듯 그의 동기를 걱정하는 치히로의 머릿속 역시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물론 밤새고 3시간 정도만 잔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 때 리오와 함께 천년난제를 풀고자 했던 두 사람의 두뇌를 모두 합했음에도 에너지 생명체에 대한 파훼법은 마땅하지 않았다.
"적어도, 엔지니어부랑 티파티의 그 분은 뭔가 성과를 내었잖아요? 저희 역시 여기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어요 치 쨩. 선생님께서.... 선생님께서 기다리실 거라고요."
선생. 두 글자 이름을 듣자 치히로의 정신 역시 번뜩 뜨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다만, 그녀가 걱정하는 바는 다른 곳에 있었을 뿐.
(그러고 보니 선생님.... 요즘 통 밀레니엄에 오는 빈도도 줄어들었고... 몇 번 힘들어하는 건 봤었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중이려나. 나중에 유우카..... 에게 물어보는 건 아닐 것 같고. 어쩐담)
야밤에 베리타스 부실을 두들기던 유우카의 패닉모드를 경험한 그녀이기에 유우카에게 자초지종을 묻는 것은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물론, 치히로 역시 선생이 정확히 어떠한 연유로 그토록 힘들어하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그것을 가장 가까운 사이라고 여겨지는 학생들에게도 비밀로 한 것을 보면 개인의 사생활이므로, 그 영역을 간섭하지 않기로 했을 뿐.
실제로 이후로도 코타마가 몇 번 도청을 시도했으나, 아예 샬레 전체에 코타마가 주로 사용하는 주파수 대역에 재밍을 걸어둔 것 역시 '사생활 보호'의 연장이었다.
"하아.... 지금 그래서 어디까지 온 거야. 진행상황이라도 좀 알려줘."
"......... 이제 남은 경우의 수는 정말로 제한적이에요. 그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파장을 흩뜨려 놓고, 나머지는 그 다음에 생각하는 거죠."
"일리는 있네. 에너지가 다시 응집한다는 건 먼저 흩어졌다는 뜻이니까. 전자전으로 가능한 영역이야?"
"아뇨. 현존하는 모든 전자전장비로도 완벽히 흩어놓을 순 없어요. 흩어진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면 모를까..."
"......... 과연 그 에너지가 무한정일까?"
"소실되는 양은 적잖겠죠. 하지만 여태까지의 전투 기록을 보았을 때 그 양은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에요. 재구축 수순에서 소모하거나, 열과 마찰로 손실되는 에너지는 사실상 완벽에 가깝게 복구되고 있고요."
"그럼 에너지원이 따로 있을 가능성도 있겠네. 결국 그걸 해결하는 것이 숙제가 될 것이고."
"........ 치 쨩."
"응."
"치 쨩이 선생님이라면..... 에너지 생명체를 흩어놓기 위해서 학생들이 스스로를 희생하겠다고 나선다면ㅡ"
"안 되지. 절대 안 될 거야. 그리고 그게 너라면 더더욱."
히마리의 말을 단호히 끊는 치히로. 무엇이 되었든 학생의 희생은 선생이 원하는 바가 아닐 것임을 짐작하고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다른 아닌 히마리라는 점에서 자신의 친우가 극단의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만 했던 조치였다.
"....... 지금 수준에서 아예 완벽히 흩어놓으려면 인공 지진 수준의 충격파를 때려박지 않으면 불가능해요. 그리고 그 정도의 스케일을 당장 구할 수 있는 매개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시간이 너무 촉박해요."
"인공 지진이라는 부분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데, 몇 가지 문제가 있어. 들어봐."
잠시 숨을 고른 뒤, 치히로가 손가락 하나를 편다.
"첫째, 에너지 생명체를 원거리에서 찢어낼 수 있다고 한들 그 다음이 없어. 최악의 경우 지진을 일으킨 뒤에도 보란듯이 재구축해서 달려들 수 있다고."
"그리고 두 번째. 그럼 결국 최대한 끌어들여서 흩뜨린 다음, 그 다음에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원격 기폭으로 해결이 안 될 가능성이 높겠지? 그럼 결국 그 피해는 우리 쪽도 뒤집어 쓸 것이고?"
두 번째 손가락을 편 치히로는 이미 히마리의 '희생'이라는 키워드를 짐작한 듯했다.
"........ 하지만 시간이 부족해요 치 쨩. 이대로는 안 된다고요."
"하.... 나도 알지... 아는데ㅡ"
"선생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다시금 치히로의 가슴을 때린 '선생'의 존재.
그녀 역시 알고 있다. 시간은 많지 않고, 당장 30분 뒤에라도 침공이 가능한 상황에서, 대안을 생각하는 시간은 그 자체로 아까운 소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명백한 적'이 아닌 '자신의 작전'에 의해 아이들이 상처받는 것은 절대로 바라지 않을, 선생이라는 사람을 너무나도 잘 아는 치히로였기에 반대의 표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말했잖아. 선생님이 그걸 바라겠냐고. 가뜩이나 원격 기폭이 안 된다고 하면 누군가 인공 지진의 영향권까지 가서 기폭을 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기폭자 자신도 안전을 장담 못 한다고. 그걸 누가 하려 하겠ㅡ"
"제가."
"뭐...?"
"제가 할 거에요 그건. 적어도 그 책임은 제가 져야죠. 기폭 스위치는 제가 직접 누를 거에요. 이게, 여태 초천재를 참칭하던 이 아케보시 히마리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복안이에요."
한숨을 내쉬듯 결론을 내린 히마리를 보는 치히로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안타까움? 답답함?
적어도 이번엔 아니었다.
"......... 너 미쳤어?"
".........."
"선생님이 그걸 바라겠어? 가뜩이나 학생들을 끔찍이 아끼는 사람이, 작전의 일부로 누군가가 피해를 보는 것도 모자라, 작전을 입안한 사람이 스스로를 희생한다고 하면, 과연 기뻐하겠냐고. 선생님에게 평생 씻기지 않을 상처를 낼 셈이야? 그게 어떻게 책임이야. 선생님한테는 한없이 무책임한 거 아니야? 그게 네가 낸 해답이라면 나는 이번만은 절대 동의할 수 없어. 리오를 불러서라도 막을거야. 안 그래도 선생님의 상태가 안 좋은데, 너까지 선생님을 아프게 할 셈이야? 정신 차려 제발!"
폭발하듯 쏘아붙인 치히로 자신도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정확히는 모르고 있었다. 정말 답답함일 수도 있고, 이 상황 자체에 대해 무기력함을 느껴서일 수도 있고, 그런 상황에서 나름 '전지'를 칭하는 자신의 친구가 그토록 자기파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에서 오는 욱함일 수도 있었다.
"......... 미안해요 치 쨩. 조금 더 고민해볼게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시겠어요?"
"아니야 선배. 오늘은 어쨌든 결과를 냈으니까, 약속은 지켜야 해. 가서 선배랑 밥이라도 먹고 푹 자. 내일을 위해서라도."
"에이미ㅡ"
- 삑 삑 삑 삑 삑
한사코 거부하는 히마리에게 에어컨의 온도를 18도로 조절하는 것으로 대응하자, 결국 히마리는 이끌리듯 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만,
"근데 치 쨩."
"........ 왜."
치히로는 분명히 순간적인 감정의 격류로 인해 그토록 숨기고자 했던 개인적인 영역을 침범하고 말았고.
"있잖아요... '선생님의 상태가 안 좋다'는 이야기."
(.......... 아.)
치히로가 자신의 실언을 눈치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는 점이 유일한 문제였다.
"그리고 '아프게 할 셈'이냐는 이야기...."
"그... 건....."
"..... 설명. 해주시겠어요?"
~~~
이해를 돕기 위해 덧붙이자면, 에너지 생명체의 형태는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에 나오는 집정관(아콘) 유닛을 참고하시면 거의 제 생각과 같습니다. 본래 EMP 전개를 써먹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밀레니엄 전체가 바보가 되어버리는 상황으로 흘러간다는 맹점이 있기에 폐기했습니다.
덤으로, 앞서 이야기된 '프로토콜'은 싯딤의 상자로 'RTS 게임'을 할 수 있게끔 전환하는 시스템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자원, 유닛 상태와 숫자, 인구수, 유닛의 고유 기능이나 특성이 표시되는 것이죠. 더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싯딤의 상자로 스타크래프트를 한다'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리고 영 후달리는 제 필력을 보완하기 위해 몇 줄 적습니다.
주말이 절반 정도 지나가고 있지만 더위가 반환점을 돌기엔 아직 이른 것 같습니다. 더운 날 건강 유의하시고, 행복한 주말 보내시기 바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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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슈퍼물라매 피폐한 소설 너무 좋음


소설 ㄹㅇ 개맛있네
좋은 평가 감사합니다 계속 이어서 완주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