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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기준 8248자
번역 피드백 대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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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샬레 바닥에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실내에는 내가 태블릿을 조작하는 전자음과 서류를 뒤적이는 소리만이 울렸다.
"...뉴후, 뉴후후후..."
그리고 또 하나, 고요한 공간에 즐거운 듯한 수상쩍은 웃음 소리가 정기적으로 울려퍼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손님용 의자에 앉아 탁자 위에 타로 카드 몇 장을 늘어 놓고 있는 소녀.
와일드헌트 예술학원, 오컬트 연구회 회장인 시라오 에리였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대한 마녀 모자가 카드를 들여다볼 때마다 흔들렸다. 깊게 파인 가슴팍, 틈새 사이로 보이는 흰 피부가 아주 선정적이지만 본인은 딱히 신경 쓰이지 않는 듯 그저 놓여진 카드의 그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정방향의 [운명의 수레1바퀴], 그리고 정방향의 [연인]...! 이건 즉, 우주의 진리가 저와 마스터의 운명적인 만남을 축복하고 있다는 계시...!"
에리는 양손을 모아 기도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고는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몸을 배배 꼬았다.
"에리,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그래도 무리는 할 필요 없으니까 쉬어도 돼"
내가 책상에서 말을 걸자, 에리는 앗 하며 고개를 들고는 커다란 모자를 양손으로 누르며 일어섰다.
"다, 당치도 않습니다 마스터! 샬레 당번 업무란 마스터의 주위에 떠다니는 탁한 마력을 정화하고, 위대한 지혜를 하사받는 중요한 의식! 이 시라오 에리, 마스터 전용 마법사로서 한 치의 틈도 없는 결계를 펼치고 있습니다!"
"결계라는 건... 아까부터 바닥에 분필로 그리던 별?"
"뉴후후, 정답이에요! 이것은 고대 켈트 비술을 응용한 [절대 방벽 - 마스터의 피로를 치유하는 진(陣)]! 이 진 안에 있기만 하면, 마스터께 제 순도 100%의 마나가 흘러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거기다"
에리는 소리도 없이 책상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고, 촉촉한 눈빛으로 미소지었다.
"이렇게 마스터의 곁에 있으면 제 안에서도 영감이 떠올라요. 마스터의 오라는 마치 [창세의 초상]을 볼 때와 같은... 아니요, 그 이상의 예술적 충동을 제게 줘서..."
에리는 품에서 스케치북 한 권을 꺼내 안았다.
그녀는 회화 전공 학생이다. 한때는 주위 학생들과의 재능 차이에 좌절하여 오컬트라는 껍질 속으로 도망쳤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다르다. 다시금 자신이 그리고 싶은 것을 발견하고 캔버스를 마주할 용기를 되찾았다.
"마스터. 업무가 끝나시면, 잠시 동안만... 제 모델이 되어 주시지 않으시겠나요? 마스터의 그 상냥한 눈동자를, 저만의 캔버스 안에 가두어 버리고 싶어요...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저만의 걸작으로"
에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톤이 낮아져 달콤하고 끈적해졌다.
숨결도 닿을 거리. 옆머리에 있는 헤일로가 마녀 모자에 의지하듯 밝게 빛났다.
"에리...?"
"마스터는 제 모든 부분을 긍정해 주셨어요. 마법은 마음 속에 있다는 걸 가르쳐 주셨어요. ...그러니까, 마스터의 마법은, 저만의 것인 거죠? ...다른 누구에게도 마스터의 마력을 넘기지 않을 거에요. 언제까지나, 쭉... 저만을 봐주셨으면 해요"
에리의 눈동자가 약간 삼백안처럼 가늘어졌다.
그녀의 시선 속에는 순수한 경애와 동시에 도망칠 수 없을 만큼 무겁고 축축한 [독점욕]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녀의 마녀 의상은 부족한 자신감을 숨기기 위한 무장이었을 테지만, 지금 그녀는 그 무장을 이용하여 나를 옭아매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어, 저기... 모델이 되는 건 상관 없는데, 이렇게 다가오면 업무가..."
"뉴후후. 마스터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지네요. 제 매료 마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네요... 자, 마스터. 제게 더 깊은 마력 공급을―"
에리가 내 넥타이에 손가락을 걸고 얼굴을 더더욱 밀착시킨 그때였다.
―까악, 까악.
창밖에서 불길한 까마귀 울음 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샬레 사무실의 문이 끼이이익... 하는 공포 영화의 효과음 같은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히힛... 왠지 엄청 농후한 의식이 느껴져서 끌려와 버렸네..."
억양은 없지만, 한 번 들으면 귀에서 떠나가지 않는 독특한 목소리.
문 틈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부스스한 은발로 한 쪽 눈을 가리고 목에 꿰맨 자국 같은 초커를 찬 조그만 소녀.
와일드헌트 예술학원, 오컬트 연구회의 최연장자― 이타가키 카노에였다.
"카, 카노에 선배?! 어째서 여기에?!"
에리가 어깨를 흠칫 떨더니 황급히 내게서 떨어졌다. 카노에는 긴 소매의 카디건을 끌며 유령과도 같은 발걸음으로 사무실 안에 들어왔다.
"어째서라니... 당연하잖아. 운명의 붉은 실로 엮여 있으니까. 나와 선생은, 전생부터 쭉 깊은 인연으로 엮여 있으니까... 그렇지, 선생?"
"어서 와 카노에. 오늘은 당번이 아닐 텐데, 무슨 일이야?"
"이히히... 선생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을 뿐이야. 거기다..."
카노에는 남색과 주황색의 홍채를 가진 특징적인 오드아이를 부릅뜨고 에리 쪽을 쳐다봤다.
"귀여운 후배가, 어딘가 재미있어 보이는 마법을 걸려고 하길래... 나도 끼어들고 싶어졌어"
"카, 카노에 선배, 오늘은 제가 마스터 전속이에요! 선배라고 해도 이 결계 안으로 들어오는 건 허락할 수 없습니다!"
에리가 마녀 모자를 양손으로 꾹 누르면서 나를 지키려는 것처럼 앞에 섰다.
오컬트 연구회 회장과 최연장자. 평소엔 에리가 카노에에게 이리저리 휘둘리지만, 내가 엮인 일이라면 에리도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히힛, 무서워라. 에리 쨩은 선생 일만 되면 바로 독점욕 덩어리가 되어 버리니까... 그렇게 껴안으면 선생이 숨쉬지 힘들지 않겠어?"
"그, 그렇지 않습니다! 마스터는 제 마법이 기분 좋다고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그렇죠, 마스터?!"
"그, 둘 다 일단 진정하고..."
"선생. 나는 말이지, 선생의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전부 알고 있어"
카노에는 내 말을 가로막듯 스르륵 하고 내 등 뒤로 돌아 들어왔다. 눈 깜짝할 사이 움직인 그녀의 차가운 손이 내 어깨에 닿았다.
"전생에서, 선생은 내게 약속해 줬지... [쭉 함께 있자]라고. 나는 그 말을 믿고, 지금까지 전생해 온 거야... 에리 쨩의 마법 같은 건 일시적이지만, 내 사랑은... 영원한 거니까"
카노에의 서늘한 손끝이 내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그것이 공포 때문인지, 그녀만의 독특한 매력 때문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카노에 선배!! 마스터를 곤란하게 하지 말아 주세요! 마스터의 영혼은 현세에서 저의 예술과 공명하고 있다고요! 전생의 인연 같은 건 제 마법으로 덮어 씌워 버리겠어요!"
"이히힛... 말은 잘하네. 그럼, 선생이 결정하게 할까"
카노에는 카디건의 주머니에서 둥그렇고 작은 플라스크를 꺼냈다. 안에는 기묘한 빛을 내는 녹색 액체가 들어있었다.
"선생을 위해 특제 연금술 포션을 만들어 왔어. 이걸 마시면 전생의 기억이 선명하게 되살아나 나를 향한 사랑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거야... 자, 선생, 아~ 해봐"
"카, 카노에, 좀 색깔이 위험한 것 같은데..."
"아, 안 돼요 마스터! 그런 수상한 약품을 마시면 안 돼요! ...마스터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도 특제 허브티를 끓였어요! 별의 반짝임을 추출한 매혹의 블렌드입니다!"
에리도 지지 않고 사이드 테이블에 준비해 둔 컵을 가져왔다.
"이히힛, 에리 쨩의 차도 맛있겠지만, 내 포션 쪽이 선생의 몸에 더 좋을 거라고? 연금술은 부엌에서 태어났다는 말도 있고... 이거, 사실 여주 시금치 특제 스무디니까"
"스무디야...?"
"응, 몸에 좋은 거야... 맛도 보증할게. 어릴 때 먹었던 그리운 맛이 날 거야..."
"스무디에 질 수는 없어요! 마스터, 제 홍차를! 제 마나가 듬뿍 녹아 있으니까요!"
"선생, 내 포션을. 전생으로부터의 사랑이 담겨 있어..."
오른쪽엔 수상한 빛을 내는 녹색 스무디. 왼쪽엔 에리의 뜨거운 시선이 꽂히는 허브티. 나는 완전히 사이에 끼인 채 식은땀을 흘렸다.
"아, 알았어. 그러면, 둘 다 조금씩 마셔 볼게..."
나는 마음을 굳히고 둘에게서 음료를 받아 들어 번갈아 마셨다.
카노에의 스무디는 겉보기와 달리 엄청 맛있었다. 은은한 단맛과 상쾌한 쓴맛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확실히 어딘가 그리운 맛이었다.
에리의 허브티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좋은 향과 맛이 났다. 둘의 오컬트에 절여진 말 뒤에 숨겨진 실력에 속으로 깊이 감탄했다.
"맛있어. 둘 다 엄청 잘 만들었네. 고마워"
"...읏! 마스터께 칭찬 받았어요! 제 마력이, 마스터의 피와 살로 승화하고 있습니다...!"
컵을 안아든 에리는 기쁜 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이히힛... 선생이 기뻐해주면 나도 기뻐... 그런데 에리 쨩만 치사하게. 선생, 내 쪽도 더 봐줘"
카노에는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리고는, 내 무릎 위에 머리를 툭 하고 얹었다.
"선생의 무릎, 따뜻하네... 전생에서도 이렇게 낮잠을 자곤 했지... 선생의 체온이, 내 차가운 몸과 섞여서... 엄청 기분 좋아..."
"카, 카노에... 무겁다는 건 아닌데, 업무가..."
"카노에 선배! 마스터를 유혹하지 말아 주세요! 마스터는 지금 저와 신성한 시간을 보내고 계시단 말이에요!"
에리는 카노에의 옷깃을 잡으려 했지만, 카노에는 [이히힛]하고 웃으며 슬쩍 몸을 돌려 소파 쪽으로 도망쳤다.
"에리 쨩은 정말 선생을 독차지하고 싶어하네. ...그런데 말이야 에리 쨩"
소파 등받이에 기댄 카노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에리의 [마녀 모자]를 가리켰다.
"그렇게 무겁고 큰 모자를 쓰고 있으면 선생에게 다가갈 때 방해가 되지 않을까? 거기다 실내인데 불편하진 않고? 적어도 선생의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편하게 있어도 될 텐데"
카노에의 지적에 에리는 몸을 흠칫 떨고, 양손으로 모자를 푹 눌러썼다.
"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가요 선배! 이 모자는 제 아이덴티티! 마력의 근원! 그걸 벗는다니,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이히히, 그래? 하지만, 선생도 에리 쨩의 맨얼굴, 더 자세히 보고 싶다고 생각할걸? 그렇지, 선생?"
"응? 아, 응. 뭐 실내기도 하고, 힘들면 벗어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에리가 싫다면 무리하지 않아도 돼"
"봐봐, 선생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고. 에리 쨩, 사실은 자신 없는 거지? 그 모자, 그저 자기를 커 보이게 만들기 위해 쓰는 것 아니야?"
카노에의 말은 에리의 마음속 가장 여린 부분― 재능에 대한 콤플렉스와 부족한 자신감을 정확히 파고들었다.
에리의 표정이 순간 경직됐다.
에리가 오컬트에 빠져들고 마녀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무장]이다. 그녀에게 있어 모자는 그저 치장품이 아니라, 자신을 [시라오 에리]라는 한낱 회화 전공 낙제생에서, [오컬트 연구회의 마녀]로 변신시켜주는 절대적인 방벽이다.
"...아니에요"
에리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있어, 모자를 벗고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알몸으로 거리를 걷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모자를 쓴 채 옷을 벗는 쪽이 더 낫다고요! 그러니까... 절대로 벗을 수 없습니다!"
"이히히힛! 모자를 쓴 채 옷을 벗는 쪽이 낫다니... 에리 쨩, 의외로 대범하네. 선생, 다음에 한 번 부탁해봐"
"카노에, 에리 놀리는 건 그쯤 해둬"
내가 카노에를 타이르자, 카노에는 [쳇] 하고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선생은 정말 과보호라니까... 전생에선 나한테 더 상냥했었는데... 뭐 괜찮아. 오늘은 이 정도로 끝낼게. 방해꾼은 그럼 이만"
카노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디건의 소매를 흔들었다.
"그럼 다음에 봐, 선생. 또 올 테니까... 오늘 밤 꿈속에서 보자. 이히힛... ♡"
카노에는 공포 영화의 유령처럼, 발소리도 내지 않고 스르륵 사무실을 나갔다. 덜컥, 하고 문이 닫혔다.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진 그녀의 여운이 방 안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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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에가 떠나자 사무실에는 다시금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책상 모니터를 향해 자세를 고쳤다.
"...괜찮아? 에리"
"네. 카노에 선배의 장난에는 이미 익숙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에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았고, 기운도 없었다.
뒤돌아보자 에리는 소파에 앉아 무릎에 얹은 양손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큰 모자가 드리운 그림자 때문에 그녀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자신이 없어서 모자로 자신을 커 보이게 만든다]
그것은 에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선생인 내가 [꿈이라는 마법은 마음속에 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녀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허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열등감과 불안이 완전히 사라졌을 리는 없다.
"에리"
나는 책상에서 일어나 에리가 있는 소파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카노에의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거야? 상처가 됐다면 내가 나중에 따끔하게 말해둘게"
"아... 아니요. 괜찮습니다, 마스터. 카노에 선배가 나쁜 게 아니에요"
에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겁쟁이에요. 이 모자가 없다면 저는 그저 [그림에 자신 없는 여자애]로 돌아가 버려요. ...그게 두려워서, 저는 마녀인 척을 하고, 마스터께 마법을 거는 척을 할 뿐..."
에리의 목소리는 어느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마스터는 제 모든 것을 긍정해 주셨습니다. 제게, 꿈을 가져도 좋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스터와 어울리는 [진정한 마법사]는 되지 못했어요. ...이런 겁쟁이인 채로 마스터의 곁에 머물러도 되는 건지... 가끔 불안해져요"
"에리..."
나는 떨리는 에리의 손에 내 손을 겹쳤다.
"나는 에리가 마녀라서 긍정해준 게 아니야. 그림 그리는 것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 시라오 에리라는 한 명의 학생이... 소중하니까, 응원하고 싶은 거야. 모자가 있든 없든, 에리는 에리야"
"...마스터"
에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눈물이 살짝 맺혀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 결심한 듯한 강한 빛이 감돌았다.
"...마스터는 정말... 치사한 분이에요. 제가 펼친 방벽을, 그렇게 간단히 퉁과해 버리다니... 후우"
에리는 작게 심호흡했다. 그리고 양손을 머리로 가져갔다.
―바스락.
그녀는 자신의 아이덴티티이며, 절대 벗지 않겠다 호언장담한 [마녀의 모자]를 제 손으로 벗었다.
바닥에 닿을 정도로 긴 백발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옆머리에서 빛나는 헤일로가 모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드디어 그 모습을 분명히 드러냈다.
모자를 벗은 에리의 맨얼굴은 마녀라기보다는 어딘가 가냘프면서도 동시에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소녀의 그것이었다.
에리는 벗은 모자를 살며시 옆에 놓았다.
"...어라, 에리. 모자 벗었는데 괜찮아?"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카노에에게 [알몸으로 거리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격렬히 저항했었던 그녀다. 그 정도로 중요한 무장이 너무나도 손쉽게 내려 놓아졌다.
내 질문에 에리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쭈뼛쭈뼛댔다.
"에, 에헤헤... 어째서라고 생각하시나요?"
"에, 에리?"
에리는 소파에서 일어나 내가 앉은 자리 바로 옆... 아니, 거의 밀착할만큼 가까이 앉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내 팔에 닿았고, 비누와도 같은 달콤하고 시원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아까, 말했었죠. 모자를 벗는 건 알몸이 되는 것만큼이나 부끄럽다고"
에리의 눈동자가 바로 눈앞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더 이상 자신감 없는 소녀의 그것이 아니었다. 사냥감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한 마법사의 그것이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무겁고, 달콤하고, 축축한 [습도]를 머금은 한 명의 여자의 눈동자였다.
"마스터의 앞이라면... 무장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에리의 숨결이 내 귓가에 닿았다.
"마스터에게만은... 제 [알몸]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에, 에리...?!"
너무나도 직설적인 은유에 내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았다. 에리는 내 팔을 꽉 껴안고 얼굴을 내 어깨에 비볐다.
"모자를 쓴 저는, 모두의 오컬트 연구회 회장이에요. 하지만... 모자를 벗은 맨얼굴의 저는 마스터만의 것. ...마스터의 앞에서만은, 저는 그저 [에리]로 있고 싶어요"
"...마스터. 제게, 더 깊은 마법을 걸어주세요. 제가 두 번 다시 마스터에게서 떨어지지 않게 될... 영원의 속박을"
에리의 말은 오컬트적인 표현이었지만, 그 본질은 극도로 스트레이트한 [사랑의 고백]이자 [독점욕 덩어리]였다.
그녀는 자신감이 없기에 나라는 존재에 강렬하게 의존하고 있다. 거기다 그 의존을 감추는 것도 그만둔 채 전심전력으로 내게 기대어 오고 있는 것이다.
"...뉴후후. 마스터의 심장 박동, 아까부터 계속 빨라지고 있네요. 제 맨얼굴에... 그렇게나 두근대시는 건가요?"
"그, 그야... 모자 없는 에리를 보는 건 신선하기도 하고, 엄청... 귀여우니까"
"귀엽... 읏!!"
내 솔직한 감상에 에리의 얼굴은 한계까지 빨개졌고, 내 팔을 껴안은 채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마스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제 마나를 폭주시켜요...! 어떡하죠. 저, 더는 마스터 없이 살지 못하는 몸이 되어 버렸을 지도 몰라요...! 책임, 져주실 거죠, 마스터?"
"채, 책임이라니..."
"후훗. 우선..."
에리는 내 팔을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내 무릎 위에 쑥 들어와 앉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밀착감. 그녀의 부드러운 체온과 무게가 내 허벅지에 다이렉트로 전해졌다.
"업무가 끝날 때까지, 이렇게 마력 공급을 하게 해주세요. ...카노에 선배에게 방해당한 만큼도, 듬뿍 되찾아야 하니까요"
"에리, 이러면 업무를..."
"안 됩니다.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에요"
에리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눈을 치켜뜨며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눈동자에는 거절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너무나 무거운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항복하겠다는 듯 에리의 흰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에리는 [에헤헤... ♡] 하고 기분 좋은 듯한 소리를 흘리며 고양이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바깥 세계에서 그녀는 훌륭한 마녀로서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이 샬레 사무실이라는 결계 안, 모자를 벗은 그녀는 그저 오로지 나만을 갈구하는 한 명의 소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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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