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토스.me
홈모음집마이페이지
SUBSCRIBED
EXPLORE
BA블루 아카이브BR봇치 더 록!ZZZ젠레스 존 제로GI원신HSR붕괴: 스타레일모든 채널 보기
문의하기
블루 아카이브
블루 아카이브소설 핫산) 책벌레의 매장법
/블루 아카이브
광고

#미디엄 #VL #드라마 #시미코 #아츠코

원본 by Rubbish Box

===========================

<1> ~ <3>

<1> 프롤로그

아츠코가 샬레의 선생 앞으로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중앙에 찍힌 히요리의 손을 자세히 보니, 기하학적으로 가공된 석판 같은 출토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그 왼쪽으로는 흐뭇하게도 아츠코의 자그마한 브이 포즈가 곁들여져 있었다.

히요리가 들고 있는 돌덩이는 잔뜩 풍화된 모습이었다.

곳곳에 심각한 흠집이나 파손이 눈에 띄는 데다 중앙이 두 동강으로 갈라져 있어 표면이 선명하지 않았다.

화면을 확대해 보니 거칠게 새겨진 문자 같은 기호나 수수께끼 같은 그림이 여러 개 확인되었다.

그중에서도 조류를 쏙 빼닮은 세로로 긴 문양이 이채로웠는데, 그 생김새가 묘하게 귀여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히요리가 찾아왔어.

여기 있는 셋 다 해독할 수가 없는데, 혹시 가치가 있는 거라면 어딘가에 팔거나 박물관에 기증하려고.》

아츠코의 메시지대로라면 스쿼드 세 사람은 현재 오디세이아 자치구 교외에 머무는 모양이었다.

선생이 부근의 모습에 관해 묻자, 곧바로 모모톡을 통해 답장이 왔다.

주변은 자갈과 잡초뿐인 황량한 땅이고, 멀리 고대 유적으로 짐작되는 석주들이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고 했다.

《하트 모양 말고는 알파벳 같은데 미사키는 오래된 라틴어나 뭐 그런 게 아닐까 하더라고.

하지만 그게 전부야.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도 다 나오지는 않았어.》

미사키의 견해대로 석판에 새겨진 문자 나열은 로마자로 보였다.

하지만 읽힐 듯하면서도 읽히지 않았다.

게다가 대문자로 새겨진 알파벳 사이사이에는 군데군데 하트 모양의 작은 기호가 끼어 있었다.

어쩌면 이 하트 마크가 단어를 구분하는 기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직감한 선생은 우선 사진에서 읽어낼 수 있는 내용을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1 / 2

《응, 아마 도움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정말?》

《샬레에는 유능한 학생들이 많거든. 열심히 조사해 볼게.》

《고마워, 선생님. 사실은 삿쨩한테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오리는 여전히 스쿼드의 교신을 끊고 지내는 듯했다.

―몇 달 전, 베아트리체와의 사투 끝에 아리우스가 해방된 이후로 사오리와의 연락 두절 상태는 진전이 없었다.

선생은 정기적으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연락을 시도하고 있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본인이 반응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좋다.

스쿼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사오리가 없어 그녀들이 느낄 쓸쓸함을 상상하자 선생의 손은 무의식중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거기 며칠이나 더 있을 거야?》

《글쎄, 내일모레면 출발하니까 오늘 빼면 이틀 정도일까?》

《알았어. 그럼 모레까지는 해결해 둘게.》

《어? 그렇게 빨리?》

《괜히 들고 갔다가 가치 없는 물건이었다고 하면 헛수고가 되잖아.

괜찮아. 나한테 맡겨 줘!》

얼떨결에 맺은 약속.

하지만 그 확신에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트리니티 종합학원, 그 한편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고서관.

그리고 그곳의 거주자는 속세를 싫어하는 고집스러운 마술사.

그녀라면 분명 금방 해결해 줄 것이다―.

<2>

“으아아아~~ 안 되겠어…….”

한가롭고 화창한 오후의 일이었다.

트리니티 중앙 도서관의 광활한 입구에 초라한 어른의 그림자가 덩그러니 주저앉아 있다.

이 인물은 조금 전부터 관내에 비치된 PC와 마주 앉아 무언가와 악전고투를 반복하고 있었다.

화면에 띄워진 중앙 도서관의 장서 아카이브에는 검색창에 입력된 네 개의 키워드에 호응하여 수백 건에 달하는 결과 항목이 떠 있었다.

그럼에도 알고 싶은 정보가 어느 책에 실려 있는지, 아니 애초에 어떤 분야를 찾아야 할지 선생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나름대로 발상을 전환하려고 노력은 해 보았다.

수십 분 전쯤 역사서 구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압도적인 장서량이 큰 걸림돌이 되었다.

시험 삼아 그럴듯한 책 몇 권을 꺼내 펼쳐 보았지만, 원하는 지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모든 책을 차례대로 찾다가는 시간만 헛되이 흐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큰일이네. 진짜 큰일이야.

한 권씩 확인할 여유는 없는데…….”

한숨 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벽면 가득한 복층 유리를 통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선생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시간은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 아침 소파에서 눈을 뜬 선생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츠코의 의뢰를 받은 뒤로 우이에게 보낸 메시지에는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읽음 표시가 뜨지 않았다.

불안해진 선생이 직접 고서관으로 찾아가자, 데스크에서 들은 이야기는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 죄송해요……. 위원장님은 지금 트리니티에 안 계셔서요―”

도서부 학생은 그렇게 설명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이가 현재 예술학원 쪽에서 갑자기 들어온 요청에 응해 멀리 출장을 갔다는 것이었다.

며칠 전, 선사시대의 미해독 문자로 쓰인 마도서라는 해괴한 유물이 학원 내 오래된 서고에서 발견된 모양이었다.

위조된 장난일 가능성도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 트리니티의 가련한 마술사는 해당 서적의 조기 해독을 의뢰받고 말았다고 한다.

“우이는 어, 언제 돌아와?”

“이번 의뢰는 그게, 좀. 앞으로 사흘 정도는 그곳에 계셔야 할 것 같아요……”

“…역시 연락은 안 닿는 느낌이지?”

“꼬박 하루 동안 답장이 없었다는 건 아마 방해하지 마라, …는 뜻일까요?

코제키 부장님 성격상 휴대폰 전원을 꺼둘 정도로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일지도 몰라요.

아무래도 안건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아하하…….”

“으윽, 그럴 수가…….”

“서, 선생님!?”

데스크 너머로 무너져 내리는 선생을 도서부 학생이 서둘러 부축해 일으켰다.

가벼운 간호를 받으며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긴 했지만, 선생의 계획은 느닷없이 붕괴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서관 부원들에게도 아츠코의 이름을 숨긴 채 석판에 대해 물어보았다.

하지만 명확하게 대답해 주는 학생은 없었다.

애초에 평범한 고등학생이 알 수 있는 종류의 지식이 아니니 무작정 떼를 쓸 수도 없었다.

궁지에 몰린 선생은 스스로 조사해서 해결하는 것 외에 마땅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료를 찾는다면 여기 고서관보다 트리니티 중앙 도서관이 더 확실할 것이다.

도서부 학생에게서 그런 조언을 받은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고서관을 뒤로한 선생은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며 엊그제의 선언을 후회했다.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사실 딱히 고민할 필요도 없이 아츠코에게 한마디 사과하면 그만인 사소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선언해 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철회하는 건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졌다.

이런 감정이 실없는 자존심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선생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아츠코의 사진을 관찰했다.

석판에 새겨진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밝혀내려고 발버둥 치는 건 현명하지 못하다.

가진 패가 적은 만큼 어느 하나라도 정체를 명확히 한 뒤, 거기서부터 고구마 줄기 캐듯 전체상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불확실한 추론 끝에 선생이 가장 먼저 매달린 단서는 바로 그 조류 같은 신기한 문양이었다.

다시금 메모장의 모사본과 비교해 보니, 희한하게도 관찰하면 할수록 정체를 알 수 없었다.

문양은 두 발이 달린 둥근 플라스크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 눈과 부리를 형상화한 머리 꼭대기에서 깃장식 같은 곡선이 돋아나 있었다.

날개 부분이 보이지 않는 것은 실루엣의 몸통이 정면을 향하고 있기 때문일까.

귀여운 마스코트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림이 극한까지 간략화된 탓일지도 모른다.

다만 설령 새 같은 것의 표상이라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내용을 찾는 방법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실은 예상대로 순탄치 않았다.

도서관 안에 발을 들인 이후로도 선생은 문양의 정체를 감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석판의 제작 연대가 불분명했기에 이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고작 서적 검색이라 해도 키워드를 좁히지 못하는 한 해당 저작물의 후보는 끝없이 늘어만 갔다.

정신을 차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시각은 이미 오후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점심을 걸렀기에 심신이 좋은 상태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샬레의 선생에게 그런 상태쯤 평소의 한계 누적 잔업 러시로 몸에 배어 있다.

그런데 오늘따라 왜인지 몹시 피곤했다.

미간을 주무르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빛의 잔상이 보라색, 주황색, 초록색으로 남았다.

아까부터 멍하니 올려다보던 푸른 하늘이 슬슬 망막에 구워질 것만 같았다.

선생은 눈을 적응시키기 위해 의자를 휙 돌려 오랜만에 방문한 시설의 내부를 잠시 감상하기로 했다.

관내 입구는 거대한 천장 개방형 구조로 되어 있었으며,

7층 높이의 외벽을 지탱하는 여러 개의 석주를 축으로 삼아 유리로 된 거대한 커튼월이 본관 출입구 부근의 안팎을 가르고 있었다.

서가들이 늘어선 구역은 그 반대편에 위치했다.

트리니티 중앙 도서관은 키보토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매머드급 학교의 지식저장고로서 학원도시 전체에 그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일반적인 서적뿐만 아니라 잡지나 논문, 만화, 교과서, 신문, 지도 등,

일단 출판사를 통해 발행된 도서는 연대를 불문하고 모두 이곳에 소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압도적인 장서량 때문에 몇 가지 과장된 소문이 남몰래 세간에 퍼져 있었다.

이른바 트리니티에 없는 책은 키보토스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입구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규모는 그 소문에 부끄럽지 않았다.

개가식 서가 공간만 해도 본관 5층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 내부의 적층 서고에는 훨씬 더 많은 도서와 자료가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도 수용하지 못하는 분량을 보충하기 위해 이 밖에도 지하층을 이용해 몇 겹이나 소장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서고 내에서는 매년 수많은 미아와 조난자가 나온다고.

즉, 개가식 서가는 전체 장서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중앙 도서관의 실체는 이미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선생이 화면 너머로 매달리고 있는 상대는,

그런 거대 서고가 품고 있는 수천만 권의 서적으로 구축된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초거대 아카이브였다.

속수무책인 선생에게 이윽고 완만한 졸음이 덮쳐오기 시작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자마자 고개가 꾸벅 꺾이며 잠이 쏟아져, 서둘러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그런 저항도 별 효과는 없었다.

실내 온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쾌적한 공조 설비에 몸을 맡기고 있는 이상, 이런 생리 현상에 맞서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도서관 특유의 향기로운 정적이 평소보다 더 수면욕을 자극했다.

지금은 마침 수업 시간인지 도서관을 이용하는 학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사람 그림자라고는 바로 옆 개가 구역을 오가는 시스터후드 학생 정도였다.

본관 1층 개가 서가에는 주로 사전이나 백과사전이 꽂혀 있으니 외국어 공부라도 하러 온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외에 수면을 방해할 만한 소음은 기대할 수 없었다.

방문객이 적은 이 시간대는 주변 일대가 기묘한 무음 공간에 휩싸여 있었다.

‘맞아. 사전…….’

한동안 시스터후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선생은 아츠코에게 들은 미사키의 말을 무심코 떠올렸다.

오래된 라틴어.

어제 우이의 연락을 기다리는 틈틈이 선생은 이미 한 번 석판의 문자열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 짐작은 대충 맞았던 모양이다.

하트 마크마다 글자를 끊어보니 똑같은 문자열을 가진 라틴어의 존재가 네 개 정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아츠코가 말했던 대로 인터넷 정보만으로는 문장 전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답답하게도 아무리 조사해도 나오지 않는 문자열이 존재했다.

의미를 아는 단어끼리 연결한다 해도 정작 중요한 문장 내용까지는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역시 한 번 제대로 된 사전으로 찾아봐야겠어―’

애초에 컴퓨터 네트워크의 표층 웹이 포괄하는 데이터베이스는 인문학 지식과 관련된 전문성이 떨어진다.

전문성 높은 마이너한 항목이 되면 참고 문헌이 너무 오래되었거나, 다른 사이트에서 정보를 복사 붙여넣기한 수준이기 일쑤였다.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우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선생 자신의 행동에도 비슷한 소홀함이 드러나 있었다.

자기 전문 분야가 아니면 손을 떼고 능력 있는 학생의 힘에만 온전히 의존해 버린다.

예의 그 저품질 웹 백과사전 사이트와 다를 바가 없었다.

스스로 공부하는 수고를 무의식중에 피하고 있던 선생은 그런 허술함이 조금 부끄러워졌다.

수치심을 잠 깨는 약 삼아 의자를 돌리며 선생은 다시 PC 화면과 마주했다.

라틴어. 사전―

‘…있네. 이거다.’

선생이 입력한 두 개의 검색어는 순식간에 수백 건의 결과를 표시했다.

화면에는 『고전 라틴어 사전』이라는 저작명을 필두로 유사한 제목의 도서들이 아래로 아래로 이어졌다.

최악의 경우 모르는 단어의 의미만 알 수 있으면 된다.

일단 사전은 아무거나 상관없었기에 타산적으로 항목 네 번째쯤에서 눈여겨보고 문헌을 클릭했다.

‘분명 이 다음에 도서 청구 기호를 메모했었지…….’

선생은 평소 우이가 도서관에서 반복하던 절차를 떠올리며 상세 화면을 훑어 내려갔다.

이윽고 페이지 하단에 작게 실린 숫자를 발견하자 무례를 무릅쓰고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뒤,

시스터후드의 검은 옷자락이 사라진 개가 서가로 서둘러 향했다.

“038.124.02…….”

선생은 사진으로 찍은 청구 기호를 작은 소리로 복창하며 개가 서가를 하나씩 훑어 나갔다.

각 서가의 측면 판에는 각각 도서의 청구 기호에 대응하는 숫자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이것들은 이른바 가지고 있는 분류 번호와 대조하기 위한 지표로서 마련된 것이다.

키보토스 전역의 도서관은 기본적으로 십진분류법이 채택되어 있기 때문에,

사전 계열의 서적을 찾고 싶을 경우에는 「038」(03: 참고 도서 + 8: 언어)의 세 자리로 시작하는 표지판 중 하나를 찾아가면 발견되는 구조였다.

“음! 아마 여기인 것 같아…….”

라틴어 사전은 생각보다 금방 발견되었다.

양쪽 서가에 빽빽하게 꽂힌 두툼한 책들의 향연에 잠시 주춤하긴 했지만, 잘 관찰해 보니 다루는 언어별로 순서가 나뉘어 정리되어 있었다.

「038」 분류 번호가 표시된 총 다섯 칸의 개가 서가 중, 라틴어 구역은 운 좋게도 앞에서 두 번째 칸에 위치해 있었다.

선생은 청구 기호를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확인했다.

서명, 편자, 출판사, 청구 기호. 모든 정보가 검색으로 알아본 내용과 일치했다.

틀림없이 찾고 있던 『고전 라틴어 사전』 바로 그 책이었다.

책등 양면의 홈에 손가락을 걸어 천천히 꺼내 보았다.

다른 사전에 비해 약간 연륜이 느껴지는 표지는 세월에 바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며 의외로 튼튼한 감촉이었다.

곧바로 페이지를 넘기기 위해 방향을 돌려보니, 두툼한 종이 뭉치의 옆면에는 금박이 입혀져 있었다.

아주 세련된 장식이었다.

선생이 아는 사전 중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꽤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인상이었다.

시험 삼아 책을 팔랑팔랑 넘겨보며 어느덧 선생은 옅은 고양감에 젖어 들었다.

빨리 석판의 단어를 조사하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자연스럽게 몸이 움직였다.

이 사전에 망라되어 있는 것은 인터넷을 통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보석 같은 지식.

무의식중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찰나, 발밑을 채여 천지가 빙글 뒤집혔다.

“와앗!”

“어―?”

등에 바닥의 감촉이 느껴지기까지의 몇 프레임을 선생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발끝부터 복부까지 수많은 책들이 눈사태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서, 선생님!? 괜찮으세요? 선생님!”

부드럽게 늘어진 트윈 테일이 뺨을 스쳤다.

그때가 되어서야 선생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이어지는 그라데이션을 시선으로 따라가자, 낯익은 터쿼이즈 블루 눈동자가 걱정스럽게 이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 아, 시미코?”

“죄송해요. 제가 전혀 앞을 안 보고 있어서…….”

“아냐, 나도 한눈팔고 있…….”

뒤늦게 찾아온 강한 통증이 정강이에 느껴져 무심코 한쪽 다리를 굽혔다.

그 바람에 연녹색 손수레가 시야에 들어오면서 선생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대략적으로 파악했다.

바닥재로 카펫을 사용하는 관내 플로어에서는 설령 시미코라 해도 발소리를 알아챌 수 없었을 것이다.

흥분해서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고는 하지만, 바퀴가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듣지 못한 것은 명백히 선생의 과실이었다.

“와~~ 죄송해요, 죄송해요! 아픈 거야, 날아가라~~!”

“아니 아니 아니, 진짜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응?”

여운이 남는 통증을 참는 동안 도서부원 엔도우 시미코가 같이 아픈 부위를 문질러 주었다.

그 손바닥의 감촉이 너무나 다정해서 놀란 선생은 반사적으로 사양했다.

차가운 자극마저 녹이는 시미코의 온기는 설령 옷감 너머라 해도 충분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머리가 맑아지자 한 줄기 불안이 엄습했다.

선생은 즉시 확인하려 급한 대로 고개만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선생님?”

“미안, 어떡하지.

들고 있던 책, 어딘가로 날려 버렸을지도 몰라…….”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세요! 어떤 책인가요?”

“응, 라틴어 사전인데, …아, 저거, 저기 붉은 거.”

다행히 찾는 물건은 무사했다.

주변에 흩어진 수많은 책들 틈에 섞여 아까 찾아낸 라틴어 사전이 대각선 위쪽에 굴러가 있었다.

안심한 선생은 몸을 일으키려 팔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가로막기라도 하듯 노란 세일러 칼라의 가슴팍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무리하게 움직이면 안 돼요. 저 책이죠?”

“어, 어어…….”

배려인지 아닌지 시미코는 대담하게도 선생을 덮치듯 엎드린 자세로 라틴어 사전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 기세로 상의가 쓸려 올라가고, 밴드에 감싸인 허리가 숨결이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영, 차. …아.”

해당 서적을 손에 들며 시미코는 다시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하지만 양손에 든 표지를 목격한 순간부터 서서히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그늘진 눈가는 난처함보다는 오히려 일종의 쓸쓸한 감정을 연상시켰다.

“…미안해. 어디 파손이라도 됐니?”

“앗, 아니에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절대 그런 게 아니라…….”

선생의 우려를 즉시 씻어내면서도 시미코의 표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황이 정강이 통증의 특효약이 되었다.

선생은 다리를 누르며 부스스 일어나 시험 삼아 시선을 맞춰 보았다.

그럼에도 역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아주 약간의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이윽고 선생이 말을 꺼내려던 찰나, 시미코에게서 의외의 제안이 날아왔다.

“…저기, 선생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이 아이, 가져가 주시지 않을래요?”

“어? 그, 그래도 돼?”

“네.”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

분명 사전 계열 책은 원래 대출 금지잖아. 도서관 측에서 그걸 제안하는 건 좀…….”

“괜찮아요, 문제없어요. 어차피 제적 도서라서…….”

“어? 제적 도서라니……?”

당황하는 고막에 생소한 단어가 울려 퍼졌다.

그 의미를 모르는 선생을 배려하며 시미코는 지극히 알기 쉬운 표현으로 다시 말했다.

“내일, 처분되거든요. 이 아이.”

선생을 걱정시키지 않으려 미소를 지어 보인 학생은 어딘가 슬프게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2 / 2

<3>

시미코의 작업을 방해한 선생은 주변 일대에 흩어진 책들을 회수하고, 카트 운반을 돕기로 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금세 의기투합했고, 틈틈이 다양한 대화가 오갔다.

그 과정에서 선생은 제적 도서에 관한 몇 가지 부연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대장을 이용한 등록제로 관리된다는 것.

노후 등의 이유로 해당 항목을 삭제하는 행위를 ‘제적’이라 부른다는 것.

그리고 제적된 책이 모두 폐기되는 것은 아니며, 매각하거나 다른 시설이나 서점에 넘기는 경우도 많다는 것 등이었다.

시미코가 개가 구역에 나타난 경위도 곧바로 밝혀졌다.

아무래도 ‘고전 라틴어 사전’뿐만 아니라 카트에 실려 있던 책들은 전부 폐기 대상인 모양이었다.

다시금 살펴보니 확실히 페이지의 열화나 커버의 손상 등 여러 결함이 책마다 눈에 띄었다.

선생은 책 본체에 파손이 있는 경우 대개 폐기 처분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구나, 딱 회수하러 온 타이밍에 마주친 거구나.”

“저야말로 죄송해요.

원래는 미리 적층 서고로 옮겨 뒀어야 했는데, 이 아이만 착오가 있어서 개가 서가에 섞여 있었나 봐요.”

트리니티 중앙 도서관에서는 혼란을 피하기 위해 제적이 결정된 도서는 일단 한데 모아 격리 보관하는 절차를 거친다.

그리고 대장의 기록 갱신은 이 단계에서 비로소 정식으로 이루어진다.

시미코의 말에 따르면, 우연히 이 ‘고전 라틴어 사전’만 오늘까지 분류에서 누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브라우저의 장서 아카이브 갱신은 이러한 대장 관리 작업과 연동되어 있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서류상 등록 삭제를 면했던 그 책은 처분 직전까지도 검색 결과에 노출되는 상태로 데이터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들로만 구성된 도서위원회가 관내 운영의 대부분을 도맡고 있는 상황에서는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실수라고 했다.

모든 사정을 전해 들은 선생은 두세 마디 대화 끝에 시미코의 제안을 승낙했다.

만약 지금까지의 경위가 사실이라면, 천문학적인 확률로 이 사전과 만난 셈이 된다.

아마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일상의 기적에 선생은 왠지 모를 인연을 느꼈다.

“아, 여기예요, 선생님.”

시미코를 따라 직원용 좁은 통로에서 카트를 밀고 가다 보니, 이윽고 두 사람은 도서관 뒷문에 다다랐다.

설치된 문은 상당히 묵직해서 방탄 기능까지 갖췄을 법한 인상을 주었다.

“문은 제가 잡고 있을 테니까, 카트만 밖으로 내보내 주세요.”

출입구는 ID 카드로 잠금을 해제하는 엄격한 구조였기에 시미코가 한쪽 문을 열어준다.

턱이 있는 경사로에 주의하며 문을 빠져나가자, 그곳에는 작은 비밀의 뒷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의 뒷면을 가리듯 심어진 키 큰 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약 180㎡ 정도의 직사각형 주차장이 포장되어 있다.

부근에는 운반 작업 전문 업체에서 수배한 소형 트럭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보아하니 이 주차장은 본래 용도로는 잘 쓰이지 않는 듯했다.

부지 내 청소는 깔끔하게 되어 있었지만, 트럭 외에 차량 같은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선생의 시야에 가장 먼저 뛰어든 광경은 따로 있었다.

책의 산.

교사의 눈앞에는 지금 엄청난 양의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평온한 풍경과는 명백히 어울리지 않는 오브제였다.

아마 다른 누가 보더라도 ‘산’이라고 비유할 만큼 수많은 서적이 바닥에 겹겹이 쌓여 있었다.

어쩌면 비교적 좁은 주차장 면적이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 산맥은 능선을 그리며 소형 트럭 근처에 밀집해 거대한 군집을 이루고 있었다.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화장을 기다리는 시신의 산.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런 이미지마저 연상케 했다.

그럼에도 학원 부지 내의 사각에 위치한 이곳은 너무나도 평온한 정취에 휩싸여 있었다.

한적하게 폐기 처분을 기다리는 사서(死書)의 산을 배경으로,

활엽수와 아스팔트를 비추는 오후의 눈부신 햇살이 몇 시간 만에 마시는 바깥 공기를 따스하게 데우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전부 여기 두셔도 괜찮으니까, 나머지는 제가—”

“저기, 시미코.”

“?”

“설마 이거, 전부 다…….”

“…네. 내일 소각장으로 가져갈 분량이에요.”

“…….”

카트로 옮긴 분량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선생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제적 도서 중 매각이나 인수에 충당할 분량은 이미 분류를 마쳤다고 시미코에게 들었다.

설령 그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상상 이상으로 숫자가 많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비일상적인 물량은 문외한의 눈에 위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이번 학기는 조금 많은 편인 것 같아요. 평소에 비하면 30% 정도 더 많으려나?”

“왠지 실감이 안 나네.”

“저도 처음 봤을 때는 그랬어요. 선생님이랑 똑같았죠.

조금, 깜짝 놀라버려서…….”

“…이런 건 아직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정말 폐기하는 거야?”

선생은 우연히 눈에 띈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새하얀 페이지를 감싼 커버는 흠집 하나 없었고, 장정의 색도 바래지 않았다.

비슷한 상태의 책은 그 밖에도 많았다.

주의 깊게 관찰하자, 낡거나 심하게 파손된 책들 사이에 제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질감의 책들이 적지 않게 섞여 있었다.

“새것처럼 보이는 건 대부분 각 분야의 전문서 종류예요.

학술 계통 도서는 기본적으로 양장본이 주류라서 정성스럽게 보관하면 언제까지나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거든요.”

“하지만 그런데도 결국 버려지는구나…….”

제적 기준에 대해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 없게 된 선생은 무심코 질문을 거듭했다.

깨끗한 책.

소중하게 관리되어 온 책.

이것들이 일률적으로 폐기된다는 사실을 그는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책도 학문과 같아서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니까요.”

잠시 틈을 둔 대답이 평소보다 낮은 톤으로 흘러나왔다.

그녀의 표정은 앞머리에 가려 잘 읽을 수 없었다.

“어떤 지식이 틀렸거나 편향되었거나, 부족할 경우에는 반드시 그것을 보완하는 내용의 새로운 책이 필요해져요.

예를 들어 선생님이 가져가신 그 사전도 아주 대표적인 사례죠.”

시미코의 재촉에 선생은 라틴어 사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다.

하얀 손가락이 누렇게 변한 종이 위를 훑기 시작했다.

“여기예요. 판권지를 한번 보세요. 아마 발행 연도가 꽤 오래됐을 거예요.”

“아, 진짜네.”

시미코가 가리킨 곳에는 자세히 보니 선생이 태어난 해보다도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대가 표기되어 있었다.

선생은 자신도 모르게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이 책이 자신보다 오래 산 대선배라는 사실에 아주 조금 자세를 가다듬게 된다.

“이 사전은 지금까지 같은 출판사에서 개정판이 여러 번 발행됐어요.

가장 최신판은 이미 본관에 수장되어 있고요.”

“개정판?”

“말하자면 진화형이라는 거죠.

좋은 점은 남기고, 틀린 부분은 고치면서 더욱 정밀하고 정확한 내용으로 다시 만드는 거예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확실히 새로운 걸로 바꾸는 게 맞겠네…….”

“네. 도서관에서 다루는 책은 사유물이 아니라 공공의 재산이에요.

저희에게는 이런 개정과 갱신의 흐름을 파악하면서 항상 새로운 지식을 계속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유감스럽지만, 사적인 감정을 개입시킬 수는 없죠.”

항구적인 수정과 발전의 작업. 그 논리에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었다.

하지만 선생의 머릿속에는 역시 코제키 우이의 모습이 강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오래된 것.

이제 두 번 다시 구할 수 없는 것.

그런 것들에 역할을 부여하고 소중히 여기는 공공의 가치관 또한 이 세계에는 분명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만약 제적 도서들을—”

“애초에 그 고서관 자체가 최후의 보루거든요.”

“어?”

지체 없이 돌아온 대답은 선생이 물으려던 내용을 두 단계 정도 앞서가고 있었다.

최후의 보루.

시미코는 고서관을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표현했다.

폐기를 기다리는 서적들의 비참한 운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나올 수 없는 표현이었다.

“…선생님께는 아직 말씀드린 적이 없었네요.

처분이 결정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에 대해서.”

시미코는 그렇게 말하며 카트에서 도서를 내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선생은 도와주려 한 발을 내디뎠지만, 망설임이 두 번째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몇 걸음 앞에서 몸을 굽히고 있는 작은 등에 어딘지 모르게 말을 걸기 어려웠다.

“사실 제적 후에 반드시 한 번, 부장 권한으로 최종 체크가 이루어져요.

도서관은 보통 그렇게까지 하지 않지만…….”

“우이가 주도한다는 거야?”

“네. 폐기 예정일 몇 주 전까지 아직 수선할 수 있거나 보존 가치가 있는 아이들을 위원회 내에서 다시 선별해요.

…말하자면 막판 저항 같은 거죠.”

그것은 고서관이 병설된 트리니티 종합학원에서만 실현 가능한, 극히 특수한 절차였다.

고서 인정 작업이라 불리는 이 프로세스는 현 도서부장, 즉 코제키 우이가 제안한 것으로 습관화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시행 초기부터 많은 위원에게 환영받았다.

모든 것은 책을 사랑하는 자들의 단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실이었다.

정말 우이다웠다.

끝자락에 서기 전까지 책의 존엄을 지키려 노력하는 자세에 선생은 그런 감상을 품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눈앞의 광경이 의미하는 슬픈 사실도 즉각 깨닫고 말았다.

“…몰랐어. 마지막까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니.”

“사실은 모두를 숨겨주고 싶어요…….”

소녀의 손이 방금 내려놓은 서적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먼 곳을 응시하는 듯한 목소리는 어느샌가 평소와 같은 온화함을 되찾아 있었다.

“이 심사 단계에서 운 좋게 합격한 아이들은 폐기 처분을 면하고 고서관의 관리하에 놓이게 돼요. 하지만…….”

“…그런데도 데려갈 수 없는 아이들이 이렇게 여기 모여 있는 거구나?”

그대로 입을 다문 시미코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

말할 것도 없이 제적이 그녀에게 본의 아닌 처분 업무라는 사실은 더 이상 안색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선생은 깊이 후회했다.

도서를 폐기하는 일에 대해 시미코가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았을 리가 없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그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사정을 분별하지 못한 치졸한 의문뿐이었다.

“선생님은 참 다정한 분이시네요.”

“…….”

“하지만 부디 그 다정함은 좀 더 다른 곳에 쏟아주세요. 이 아이들보다 소중한 분들에게요.”

“하지만…….”

“애서가 같은 건 되면 안 돼요. 그런 광기 어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거기까지 말한 시미코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광기.

그런 어감이 강한 단어가 시미코의 입에서 나왔다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선생에게는 아직 그녀가 한 말의 진의를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실수를 후회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시미코?”

“그러니까, 왠지 간지럽다는 뜻이에요. 선생님의 배려가 이상하게 따뜻해서.”

목을 옥죄던 굴레가 풀린 듯 시미코의 목소리는 들뜬 톤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화제를 돌리려는 듯한 부자연스러움이었다.

“이래 봬도 감사하고 있다고요? 선생님은 언제나 저희 학생들의 생각에 공감해 주시니까요.

—그래서 지금 설명해 드린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어요☆”

“…그건 아냐, 시미코.”

자신은 아무것도 모를 뿐이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얌전히 듣고만 있을 뿐.

그렇게 말하려다 선생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자신의 그 무지가 학생의 심정에 부담을 강요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일이니까.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누구라도 시미코 너희와 발맞춰 줬을 거야.”

매끄럽지 못한 말을 꾸며내듯 선생은 스스로를 낮췄다.

시미코는 잠시 손을 멈추고 시선을 맞추는가 싶더니, 그대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시 작업으로 돌아갔다.

“…자! 어두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마지막 책을 아스팔트 위에 내려놓은 시미코가 양손을 짝 하고 맞부딪쳤다.

그것은 그녀에게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루틴인 모양이었다.

“그보다 선생님, 라틴어 사전이라니요. 뭐 조사할 거라도 있으세요?”

“…응, 조금.”

“괜찮으시다면 저한테도 사정을 들려주실래요?”

빙글 몸을 돌린 커다란 트윈 테일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생 곁에 와서 살랑거린다.

그 명랑한 반응은 무겁게 짓누르던 현장의 공기를 서서히 누그러뜨려 갔다.

To Be Continued : Part 2(完)

광고
BA블루 아카이브·11일 전번역

소설 핫산) 책벌레의 매장법

#소설
좋아요 0댓글 1저장 0
광고
RP
Rubbish Box작가
게시물 2개
고DC
고관위번역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pixiv
게시일2026.10.17 00:07
조회2
광고

댓글 1

나
ㅇDC
ㅇㅇ110일 전
디시콘
광고

Rubbish Box님의 다른 게시물

전체 보기 ›
번역
3
소설 핫산) 책벌레의 매장법 Part 2(完)
RRubbish Box02

비슷한 태그의 게시물

번역
소설핫산) 유우카 "에... 결혼하시는 건가요?"
Bblac1203034
TEXT
번역
소설핫산) "아, 실수로 사키 샴푸 써버렸다..."
Ffunetsukuri012
VIDEO
창작
소설) 테러를 당한 선생님이 깨어나는 이야기 (1)
데데스/모이네스!062
번역
소설핫산) 케이에게 익숙해진 쓰다듬을 멈췄더니
RRs.χ044
TEXT
창작
소설) 아마우 아코에게 선생님 그만 둔다고 하는 이야기
데데스/모이네스!053
TEXT
창작
소설)그리고 모든 증오가 시작되는 곳(200)-사랑스런 당신에게 총탄을
에에이2061
창작
소설) 정원의 원주율.
사사과가사과035
TEXT
번역
[소설핫산] 선생님의 벽치기 VS 학생
Mmiyagi_sinya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