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2나기사의 연락을 받고 트리니티에 도착한 선생을 나기사를 보좌하는 수행원 호즈미 히카리가 맞이했다. 급하게 온 탓에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선생에게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기사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만날 수 있을까?"
"네. 선생님. 나기사 님은 집무실에 계세요. 안내해드릴게요."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갈색 구두와 검은색 구두가 소리를 냈다. 마치 주인의 성정을 대변하듯, 그녀의 발소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조곤조곤했다.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그 일은 잘 해결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녀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선생은 괜찮다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학생의 밝은 표정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아, 그리고 말인데요."
살갑게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갑자기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생이 다정하게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 고민거리라던가."
"아뇨. 제 이야기는 아니에요. 실은……요즘 나기사 님께서 너무 과로하시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나기사를 부를 때 '님' 자를 붙였다. 티파티 분파의 수장은 학원 내에서 아예 다른 지위로 여겨졌고, 티파티 소속인 그녀도 당연히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알맞게 예의를 갖춰서 그들을 대했다.
"더군다나 최근의 일들로 나기사 님께서 해야 하는 업무도 더욱 비대해졌고요."
나기사의 연락을 받고 트리니티에 도착한 선생을 맞이한 사람은, 나기사를 보좌하는 수행원 호즈미 히카리였다. 그녀는 선생에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나기사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는데, 만날 수 있을까?"
선생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나기사의 연락을 받고 급하게 왔지만, 나기사의 부탁대로 자세한 용건을 숨겼다.
"네. 선생님. 나기사 님은 집무실에 계세요. 안내해드릴게요."
집무실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는 동안 갈색 구두와 검은색 구두가 소리를 냈다. 마치 주인의 성정을 대변하듯, 그녀의 발소리는 목소리만큼이나 조곤조곤했다.
"선생님의 조언 덕분에 그 일은 잘 해결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그녀가 연거푸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할 때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선생은 괜찮다고 손사레를 치면서도, 학생의 밝은 표정을 보며 보람을 느꼈다.
"아, 그리고 말인데요."
살갑게 이야기를 하던 그녀가 갑자기 고민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선생이 다정하게 말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어? 고민거리라던가."
"아뇨. 제 이야기는 아니에요. 실은……요즘 나기사 님께서 너무 과로하시는 거 같아서요."
그녀는 나기사를 부를 때 '님' 자를 붙였다. 티파티 분파의 수장은 학원 내에서 아예 다른 지위로 여겨졌고, 티파티 소속인 그녀도 당연히 그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에 알맞게 예의를 갖춰서 그들을 대했다.
"더군다나 최근의 일들로 나기사 님께서 해야 하는 업무도 더욱 비대해졌고요."
"확실히 그래보이더라. 저번에 봤을 때도 이래저래 바빠보였거든."
그녀의 말을 들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이라고는 해도 나기사와 티타임을 가질 때마다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는 바람에, 선생은 트리니티도 이미지만큼 조용하지는 않은 곳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기사 님께서는 항상 자신의 일을 숨기려 하세요.
그녀도 티파티의 내부 사정을 아무에게나 밝히면 알고 있었다. 본래 티파티 자체가 비밀주의를 표방했거니와, 특히 호스트인 나기사에 관한 이야기는 함부로 밝힐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선생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선생은 키보토스의 학생들을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오랜 앙숙 관계인 게헨나와 트리니티가 힘을 일시적으로나마 합치도록 도왔고, 한 명의 학생이라도 최대한 구하려 했으며, 학생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가르쳤다. 선생에게 도움을 받은 다른 많은 학생들처럼, 그녀도 선생을 성자처럼 여겼다. 공교롭게도 그녀는 필리우스 분파였으니.
"오늘은 제게 얼굴도 비추지 않으셨고요. 힘드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셔도 될텐데……."
그녀는 티파티의 학생회장들을 존경했다. 그러나 때로는 그들이 가여워 보였다. 같은 3학년생이건만 그들이 짊어진 책임은 학생을 넘어서 어른하고도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막중했다.
"티파티의 학생회장은 항상 큰 책임을 져왔죠. 미카 님이 그런 일을 벌이신 것도 어쩌면……그런 압박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고요."
그 분이 저지른 잘못과는 별개로 말이에요. 그녀는 최근 파테르 분파원들이 저지른 사건을 떠올리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파테르 분파원들의 심리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과격성에는 공감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질투나 분노가 아니라, 파테르 분파에 피처럼 내려온 증오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나기사 님을 보좌하는 제가 이런 부탁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구두굽 소리가 멎었다. 티파티 호스트 집무실 앞에 도착한 그녀는 몸을 돌렸다. 하얀 티파티 제복은 구겨진 곳 하나 없이 깨끗했다.
"부디, 나기사 님을 잘 부탁합니다."
***
트리니티의 높은 곳에 자리한 다과회실은 트리니티의 전경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탁트여 있다. 반면 티파티 호스트 집무실은 여느 방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보였다. 평범한 검은 문 하나가 달려 있을 뿐이다.
'소염진통제에, 과로라…….'
선생은 나기사를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우연에 우연이 겹친 탓에 조금 허술한 모습을 보이기는 했어도, 그녀는 교양있고 완벽한 모습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항상 그랬다. 보충수업부에 관한 일로 오가며 만날 때에도, 선생과 대립각을 세우는 와중에도 그녀는 항상 상대의 우위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며, 감정을 애써 숨겼다.
문 앞에 선 선생은 입고 있는 정장의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약을 부탁한 것을 비밀로 해달라는 나기사의 간곡한 요청 때문에, 수행원에게도 밝히지는 않았지만, 나기사의 몸 상태에 따라서는 바로 구호기사단에 데려갈 작정이었다.
"들어가도 될까. 나기사?"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선생이 문을 두드리자마자, 문 너머로 나기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선생님."
목소리로는 별다른 이상을 느낄 수 없다. 하지만 나기사가 항상 여유롭고 기품 있는 태도를 견지하려 드는 것을 알기에, 선생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은 손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검은색 구두 신은 발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선생님. 그간 격조하셨는지요…….?"
한눈에 보아도 특별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는 트리니티 다과회실과 달리, 티파티 집무실은 겉모습만큼이나 내부도 평범하기 그지없다. 손님을 위한 길다란 소파 두 개와 테이블이 있고, 책장 옆 벽에는 커다란 지도가 걸려 있다. 그리고 호스트의 업무를 위한 책상 하나. 그게 전부였다.
"별 일은 없었단다. 나기사는 잘 지냈어?"
집무실에 들어선 선생은 나기사에게로 다가가며 곧바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책상 앞에 앉은 나기사의 안색은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관자놀이를 짚고 있던 나기사는 태연한 척 선생을 맞이했다.
"네. 혹여 오시는 길에 불편하지는 않으셨을지요. 차를……."
의자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향해 선생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니까 앉아있으렴. 무리하지 말고."
선생의 제지에 나기사는 도로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은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 할 정도로 초췌했다. 항상 여유롭고 기품 있는 그녀는 한떨기 청초한 백.합을 떠올리게 했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시들어가는 꽃 같았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이 조금 안 좋아서요."
선생은 착잡한 눈으로 나기사를 바라봤다. 찻잔 대신 펜 하나만 겨우 들고 있는 손하며, 애써 허리를 세우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처연해보였다.
'차라리 아프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으련만.'
책상 위에 수북히 쌓인 서류는 선생에게도 익숙한 광경이다. 오랜 업무시간과 잦은 야근으로 고충을 겪는 선생은 나기사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그녀 또한 무언가를 책임지고, 책임져야 하는 이였다.
"괜찮아. 나기사가 불렀는데 당연히 와야지. 일단 약 가져왔으니까, 약부터 먹자."
나기사는 흐릿한 눈으로 선생이 품에서 꺼낸 소염진통제를 바라봤다. 어제부터였나, 머리가 지끈거리는 두통이 시작되더니 온 몸이 뜨거워졌다. 종종 있는 가벼운 감기 정도로 생각했건만, 하루가 지나고 자고 일어나도 증세는 전혀 가라앉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이런 일은 세이아에게 부탁했을텐데, 본래도 허약했던 그녀는 최근의 일들로 인해 요양 중이었다. 결국 부탁할 사람은 선생 밖에 없었다.
"……네. 선생님."
눈가에 무거운 그림자가 진 눈이 느릿하게 꿈뻑였다. 선생에게 연락을 한 뒤부터 그녀의 증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그녀의 몸은 마치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아팠고, 들끓는 머리로는 온전한 생각을 하기가 힘들었다.
"약값이랑, 차비는……드릴게요. 윽……."
머리 속에서 맥박이 울리는 듯한 두통을 느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에서 떨어진 펜이 책상 위를 굴렀다.
"나기사. 많이 안 좋아보이는데. 구호기사단에 연락하는게 어떨까."
선생은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나기사의 의사를 존중해서였다. 그러나 생각했던 이상으로 위태롭게 보이는 터라, 지금이라도 나기사의 고집을 꺾을지 고민에 빠졌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러지 말아주세요."
나기사는 힘겹게 고개를 젓고는 선생이 건넨 약을 받아서, PTP 포장재에서 약 한 알을 꺼냈다. 아니, 꺼내려했다.
"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약이 바닥에 두어번 튕겼다. 선생은 그녀에게서 포장재를 건네받고는 말없이 약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커다란 손과 가느다란 손이 가볍게 닿았다. 약을 건네받은 나기사는 머뭇거리다가 힘겹게 말했다. 목에서 쥐어짜낸 듯한 마른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다른 일정은 없으신지요……?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아 둔 것 같아서요."
나기사는 애써 선생을 돌려보내려 했다. 이대로라면 아픈 몸으로 폐를 끼칠 것 같았다. 일전에 선생과 즐거운 시간을 가지기는 했지만, 그녀 스스로는 선생에게 단순한 호의 이상의 무언가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아니, 괜찮아. 내가 대신 먹여줄테니까……."
머리 속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차라리 심한 부상을 입었더라면, 호스트의 업무 뿐 아니라 활동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구호기사단의 진료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사소한 감기 정도는 다른 이들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약함을 드러내지 않는 것, 약함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는 것이 정치며…….
"나기사?"
미카를 해코지하려는 파테르 분파 학생들은 어떻게 해야하지? 그들을 제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런 움직임은 미카를 향한 반감을 키우기만 할 것이다. 다행히 퇴학만은 면했지만, 미카는 그간의 행실 때문에 언제라도 공격받기 쉬운 처지였다.
그래서 외면하는 거야?
"나기사, 괜찮아?"
두서없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 속에서 서로 충돌하고 뒤섞였다.
미카 씨, 어째서?
세이아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야.
어떻게든 퇴학만은 막지 않으면.
부탁드립니다. 미카 씨를 구해주세요…….
"나기사!"
다양한 색이 한데 섞여서 검게 물들듯, 나기사의 의식도 가라앉기 시작한다.
끝없는 어둠 속으로.
***
'…흐응. 너, 제법 예쁘네? 나만큼은 아니지만.'
'제 이름은 너가 아니라 키리후지 나기사인데요.'
이건 어떤 기억이지?
'이제부터는 나기 쨩이라고 부를래!'
'……네. 차라리 그렇게 불러주세요.'
이건 언제였더라?
'나, 꼭 공주님이 될거야!'
'또 그 이야기인가요?'
'나기 쨩은 내가 공주님이 되는게 싫어?'
'공주님은 되는게 아니라 공주님으로 태어나는 거랍니다.'
아, 분명 그 때였어.
'우우. 나기 쨩이 또 어려운 말로 놀렸어!'
'그래도, 만일 미카가 그걸 바란다면……약속하죠.'
'어떤 약속?'
미카 씨와 약속했었지. 나.
'미카가 공주님이 될 수 있도록 제가 도와줄게요.'
'정말로? 나기 쨩 좋아!'
'네. 저도 미카가 좋아요.'
"음……."
"나기사, 정신이 들어?"
무거운 눈꺼풀 안쪽으로 빛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나기사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익숙한 집무실 풍경이 아니라, 하얀 천장이었다.
어디선가 본 천장인데, 언제였지? 기억을 천천히 더듬던 나기사는 마침내 기억 속의 어느 지점에 도달했다.
"……구호기사단?"
고성당에 아리우스의 순항미사일이 직격했던 당시에 입원했던 구호기사단의 병실이었다. 나기사의 시야에 들어온 왼손에는 링겔이 꽂혀 있었다.
"맞아. 나기사가 갑자기 쓰러져서 말야. 멋대로 데려오긴 했는데, 몸은 좀 어때. 아프지는 않고?"
선생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나기사는 곧바로 허리를 세워 앉았다. 멍한 머리에 피가 서서히 돌기 시작하고, 병실 특유의 향과 매트리스의 감각이 느껴질 즈음에, 그녀는 참담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습니다. 선생님께 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선생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추한 모습이라……. 나기사. 난 네가 쓰러진 것도, 그리고 이렇게 입원한 것도 전혀 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선생은 나기사가 상처받지 않도록 말을 골라내면서 말했다.
"네가 잘못한 게 있다면, 그건 그렇게 될 때까지 네 자신을 몰아붙인 거,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해."
나기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생이 옳았다. 증상이 느껴졌을 때 바로 약을 먹었더라면, 아니면 조금 늦었더라도 먼저 구호기사단에 입원했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집무실에 방치 되어있을 서류부터 오늘 끝마치지 못한 업무와 내일부터 해야 하는 일정까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온갖 것들이 그녀를 짓눌렀다.
"왜 그랬어?"
"……."
선생은 나기사를 재촉하는 대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고열로 쓰러져서 입원까지 한 학생을 혼내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번 일이 타이르거나 질책 해야 하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기사를 추궁하려는 건 아니란다. 단지 앞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말야. 만일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게."
선생의 희미한 미소를 보자, 나기사는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말을 꺼낼듯 말듯, 한참을 머뭇거리는데도 선생은 말없이 기다렸다. 이윽고 나기사의 말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어요."
나기사의 목소리에 서서히 감정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 감정을 헤아리고자, 선생은 귀를 기울였다.
"결점이 있다면 드러내지 않고, 약점이 있다면 숨겨야 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라고, 그것이 정치의 기본이니."
어릴 적의 나기사는 미카에게 공주님은 되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범위를 넓히면 티파티의 학생회장도 다르지 않았다. 물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 다다를 만한 자격을 갖춘 후보군은 어린 시절에 정해졌다.
트리니티를 넘어서 키보토스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이자, 천진난만함 속에 뛰어난 지략을 숨긴 미소노 미카. 꿈을 매개체로 다양한 능력과 뛰어난 미래시를 보유했으며, 또한 현명함이라는 무기를 지닌 유리조노 세이아. 그에 비하면 키리후지 나기사라는 사람은 초라할 정도로 평범하다.
범인(凡人)이 초인(超人)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혹사에 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깎아내는 노력 끝에 그녀는 필리우스 분파의 수장이자 티파티의 학생회장, 그리고 티파티의 호스트가 되었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서 약점을 찾고, 반대로 어떠한 결점도 드러내서는 안되고, 칭찬을 바라거나 응석을 부려서는 안된다고요."
금빛 눈동자가 위태롭게 일렁거렸다.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현재만은 아니었다. 지나온 과거와, 감당해야 했던 것들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느다란 속눈썹 끝에 이슬이 맺혔다.
"그래서 저는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하여, 무고한 이들을 의심했습니다. 단지 의심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추악한 음모에 휘말리게 했죠."
에덴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은, 수많은 갈등과 다툼과 상처를 빚었다. 하지만 결말만큼은 희망으로 가득했다. 비록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라는 식의 엔딩은 아니지만, 누군가는 자비를 배웠고, 누군가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으며, 누군가는 믿음을 되었다. 하지만 나기사의 가슴 속에 생긴 응어리는 전부 사라지지 않았다.
"완벽한 사람이라면 그런 어리석은 짓은 저지르지 않겠죠. 네. 저는 초인을 흉내내는 범인에 불과했어요."
나기사는 울분을 토하듯 말을 이어갔다. 목소리에 감정을 꾹꾹 눌러담아서, 흐느끼듯이 말했다.
"노력한 끝에 남은 것은, 뛰어난 초인이 아니라 불쾌할 정도로 정치적인 인물인 키리후지 나기사였습니다."
나기사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선생을 마주하는 얼굴은 고귀한 아가씨처럼 아름답지만, 피로와 스트레스로 생겨난 그림자가 드리웠다.
"저 같은 학생은, 선생님께서도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눈가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뺨을 스치는데도, 나기사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왼손을 세게 붙든 채로, 선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오늘 실례 많았습니다. 선생님. 이제 돌아가셔도……."
"싫어하지 않아."
순간, 나기사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얼굴에 흐르던 눈물마저 멈출 정도였다.
"……네?"
"말그대로야. 나는 키리후지 나기사라는 학생을 싫어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한다고 말하는게 맞겠지."
선생은 살며시 나기사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생이 보기에 그녀는 한없이 어른에 가까우면서도,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 같았다.
"미카와 세이아를 위해서 어떠한 칭찬도 바라지 않고 혼자 일하는 거잖니. 그런 책임감 있는 태도는 본받을만 하다고 생각해."
"……그렇게까지 대단한 건 아니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기사는 머리를 쓰다듬는 선생의 손길이 싫지 않았다. 칭찬을 바라거나 응석을 부려서는 안된다고 말했지만, 결국 그녀도 한 사람의 학생이었다.
"구호기사단의 미네와 시스터후드의 사쿠라코에게 허리를 숙이고, 직위에서 물러날 각오로 친구를 구해달라고 부탁한 것도, 모두 나기사가 한 일이잖아."
나기사는 그 말에 특별히 긍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 아기새처럼 조용히 눈망울을 깜빡거릴 뿐이다.
"나는 나기사가 정치적인 인물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네가 스스로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너를 싫어하지 않아. 내가 아는 나기사는 친구를 위해 스스로를 내걸고, 목숨까지 바쳐서 친구를 지키려는 학생이니까. 그게 '정치적인 행동' 이라면, 나는 네 정치적인 행동도 칭찬할 거야."
단호하고 확신에 가득찬 말이다. 나기사는 선생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다른 학생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맞섰던, 그러면서도 자신과 같이 잘못을 저지른 학생도 보듬고 책임지려는, 진정한 어른이다.
"그러니까, 너무 네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아줘. 너는 무리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미움 받을 만한 사람도 아니야. 그건 선생인 내가 보장할 수 있어. 그리고……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 뿐인 것도 아니니까."
선생이 턱짓으로 문 쪽을 가리키자마자, 살짝 열려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나기사에게 친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나기 쨩. 일부러 들으려 한 건 아니라, 아, 몸은 괜찮아?"
"미카 씨? 세이아 씨? 여기는 어쩐 일로……?"
"너무하네. 나기 쨩. 친구가 입원했는데 찾아오는 건 당연하잖아? 그렇지? 세이아 쨩?"
분홍색 머리의 소녀가 서운한 표정을 짓고는, 이내 해맑게 웃으며 사뿐사뿐히 들어왔다. 다음으로 여우귀가 달린 금발의 소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랐다.
"동감이야. 뭐……방금 네 이야기를 들었으니, 나도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네."
미카가 선생에게 살갑게 인사하는 동안, 침대로 다가온 세이아는 허리를 살며시 숙였다. 그리고는 나기사의 포개어진 두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황금빛으로 물드는 갈대밭 같은 금발이 나기사의 눈 앞에 드리웠다.
"우리는 같은 이상을 공유했고, 그 방향은 비슷하면서도 조금씩 달랐네만……. 다르다고 하여 틀린 것은 아니지. 나는 너를 존중하고 있다네. 내 이상을 내가 부재한 동안 현실에 구현하려고 했던 것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어."
세이아는 세피아색 손수건을 꺼내 나기사의 눈물을 훔쳤다. 미카도 그렇듯 친구들은 어딘가 어린 구석이 있었다.
"그리고……미카 뿐 아니라 나도, 너를 많이 아끼고 있다는 걸, 부디 알아줬으면 하네. 자네도 그렇지? 히카리."
이름이 불리자마자, 문 뒤에서 히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카와 세이아와 같이 있었을테니, 그 때부터 지금까지 숨어있던 것이다.
"호스트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전(前) 호스트인 내가 임시로 업무를 보고 있다네. 히카리가 도와준 덕분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지."
"아……. 그랬나요. 고마워요, 세이아 씨. 요양 중인데 그런 수고까지 하시다뇨."
"나는 크게 상관 없다네."
그러면서도 눈썹을 까딱이는 모습이 우쭐해하는 모양새였다.
"그보다 어떤가. 히카리. 자네도 나기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은가? 적재적소에서만 전할 수 있는 말도 있는 법이야."
아직도 문 뒤에 숨어있던 히카리는 한발짝, 한발짝 느린 걸음으로 병실 안으로 걸어왔다. 평소에 이렇게까지 내성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잔뜩 긴장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이아가 말했던 대로, 오직 지금 할 수 있는 말이 있었다. 그녀는 깊은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뒤에 발언할 용기를 얻었다.
"나기사 님. 저는……나기사 님께서 너무 혼자서 무리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호스트라는 자리가 얼마나 책임이 막대한 자리인지, 알면서도 제가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지만요."
세이아와는 방금까지 업무를 위해 대화를 나누기는 했어도, 그나마 나기사와는 보좌관으로서 오래 보고 지낸 사이였지만, 정작 그 나기사에게 소신껏 말해야 하는 터라, 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기사 님은 아직 어른도 아니시고, 애초에 나기사 님. 저랑 같은 나이거든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조금은……주변에 의지하셨으면 좋겠어요. 미약한 몸이지만 저도 도와드릴테니까요. 어쨌든 저, 나기사 님의 수행원이니까요……."
마치 일생일대의 고백을 하듯, 잔뜩 움츠러든 채로, 그러나 속사포처럼 말하는 모습이 티파티의 학생회장들에게는 묘하게 귀여워보였다. 특히 오랫동안 그녀를 곁에 두었던 나기사는 항상 상냥해보이던 히카리에게 이런 면모가 있었나, 하고 생각했다.
"히카리 씨."
히카리는 그제서야 자신이 누구 앞에 끼어들었는지를 깨달았다. 특히 저 앞의 침대에는, 다른 사람도 아닌 티파티의 호스트이자 그녀가 보좌하는 나기사가 앉아 있었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히카리 씨를 비롯한 모두에게 더 솔직하게 굴게요. 그러니까……앞으로도 잘 부탁한답니다."
더 할 나위없이 솔직하고 진솔한 모습에 히카리는 활짝 웃었다가, 익은 보리처럼 부랴부랴 허리를 숙였다.
"시, 실례했습니다!"
그리고는 후다닥,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부리나케 병실을 빠져나갔다. 전광석화 같은 움직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세이아가 훤히 드러난 어깨를 으쓱거렸다.
"꽤나 귀엽지 않은가? 내 후배였다면 좋으련만, 동급생이라서 아쉽기도 하다네."
어느새 여유를 되찾은 나기사도 한마디를 보탰다.
"퇴원하면 고급 홍차와 롤케이크 선물을 보내야겠네요."
"나기 쨩, 또 한 명의 홍차 중독자를 만들 셈이야?"
미카의 때 아닌 태클에 나기사가 눈을 흘기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저는 홍차 중독자가 아닌데요."
오랜 소꿉친구가 토라지는 보기 드문 모습을 목격한 미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나기 쨩."
의자를 끌어온 미카는 세이아 옆에 나란히 앉았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나기사를 바라봤다.
"나 말야. 그 때 이후로 쭈욱, 나기 쨩한테 감사하고 있어. 솔직히 말하면……나기 쨩에게 미움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기 쨩도, 그리고 세이아 쨩도, 모두들 나를 용서해줬고."
"물론……조금 성가신 무리도 있고,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가 저지른 잘못에 비하면 그 정도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그러니까, 나를 도와줄 수 없다던가, 도와줘야 한다던가 하면서 괴로워 하지 말았으면 해."
"나기 쨩은 이미 나를 구원해줬으니까 말야."
"미카……."
나기사가 먼저 미카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흑, 으, 흐윽. 공주님으로 만들어주지 못해서……."
"훌쩍…….나기 쨩, 그거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 흑. 미안해 하지, 말라니까……."
서로 부둥켜 안은 두 사람은 한참 울고 또 울었다. 그들을 상냥한 눈길로 지켜보던 세이아는 손수건으로는 안되겠지, 하며 티슈를 가능한 뽑았다. 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도 있다.
***
"그건 그렇고, 나기 쨩. 정말 로맨틱하더라. 진짜 감탄했어!"
"미카 씨? 그게 무슨 말이죠……?"
갑작스런 미카의 말에 나기사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세이아조차도 그녀를 거들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미카에게 합류했다.
"나도 그렇다네. 트리니티는 물론이거니와, 키보토스의 학생들도 다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을 정도니 말이야."
"세이아 씨까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요?
나기사가 영문을 몰라 두리번거리자, 세이아가 고개를 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장면 하나만 놓고 보면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선생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키리후지 나기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만한 일이지. 가령……동일한 말을 해도 화자에 따라 설득력이 달라지듯, 동일한 행위여도 당사자의 여하에 따라서 대중의 반응이 다르지 않은가."
"세이아 쨩. 너무 어려운 말만 쓰니까 대화가 안되잖아."
하아, 한숨을 내쉰 미카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액정 화면에 비치는 것은 선생과, 그리고…….
"……?"
선생의 두 손에 오금과 등을 받쳐 들어올려진 키리후지 나기사였다. 나기사는 눈을 여러차례 비빈 뒤에 다시 화면을 바라봤다.
선명하게 찍힌 사진의 주인공은 선생과, 선생의 두 손에 들린 티파티의 호스트인 키리후지 나기사였다.
"서, 선생님?!"
생각지도 못 한 장면이 사진으로 남아 당황한 나기사는 선생을 쳐다봤다. 그러나 선생은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세 사람의 시선은 창 밖으로 향했다. 저 아래로 조그맣게 보이는 선생이 트리니티 정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팔다리를 거창하게 움직이는, 만화에서나 볼법한 동작으로 말이다.
"와-아. 선생님, 진짜 빠르네……. 그건 그렇고, 나기 쨩. 이 자세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공주님 안기' 라고 하거든!"
미카가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자, 나기사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다가올 운명을 직감한 나기사는 고개를 저으며 미카, 제발 그 말 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라고 생각했다. 아니, 간절히 빌었다. 그리고 미카의 눈이 예쁘게 휘었다.
"오늘부터 나기 쨩도 공.주.님.이네☆"
"하으?!"
나기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그녀는 마지막 보루인 세이아를 애처롭게 쳐다봤지만, 애석하게도 세이아는 태연한 얼굴로 약간의 심술을 담은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게 됐네만. 오늘부터 나기사가 트리니티의 공.주.님.이 되는게 어떠한가? 진심으로 잘 어울릴텐데 말일세."
"그치그치! 공주님께 어울리는 드레스가 있으려나?"
"으으……."
짓궂은 말로 놀리는 미카와 보기 드물게 그에 동조하는 세이아. 그리고 양쪽에서 들어오는 공격에 반격도 못하고 쩔쩔매는 나기사. 평상시와 조금은 구도가 달라도, 세 사람에게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일상이다.
그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나이대에 어울리는 웃음꽃을 피웠다. 예쁘디 예쁜, 화려한 색으로.
나기사는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평범한 의자조차 그녀에게 너무나도 커다랗던 시절이다.
'내가 공주님이 되면, 나기 쨩은?'
'저 말인가요? 저는 티파티의 호스트가 될 거에요.'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카가 해맑게 웃으며 선언한다.
'나기 쨩이 나를 공주님으로 만들면, 공주님이 된 내가 나기 쨩을 포스트로 만들어주면 되겠네!'
'포스트가 아니라 호스트에요. 미카.'
'아무튼! 내가 꼭 토스트로 만들어줄테니까!'
'토스트가 아니라……네, 미카.'
미카를 바라보는 나기사도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말한다.
'기대할게요. 후후.'
나기사는 조용히 손바닥을 내려다본다. 텅 빈 손바닥에는 아무 것도 없다. 어릴 적의 그녀는 미래를 알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의 그녀도 미래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어렵게 되찾은 행복도, 힘들게 되찾은 소중한 친구도,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인연도, 모두.
절대로 잊지도, 잃지도 않을 것이다. 나기사는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자만의 맹세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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퍄
캬 십고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