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세이아는 결심했다.
사랑하는 트리니티를 위해서.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는 스스로를 버리기로 했다.
***
지평선 너머로 저무는 해가 주황색의 베일을 펼치는 시간, 트리니티 다과회실에는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소녀의 이름은 유리조노 세이아, 트리니티의 학생회장이며 상투스 분파의 수장이자 티파티의 호스트였다. 티파티의 주최자라는 의미에서 유래한 호스트라는 직책에 걸맞게, 그녀는 티파티에 참여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이아는 가느다란 검지와 엄지 손가락이 차숟가락을 들고서 홍차를 저었다. 따뜻한 김이 줄지어 올라오는 찻잔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폭신한 레이스가 잔뜩 달려 손이 가려지는 소매가 한스푼의 신비스러움을 보탰다. 소매 속에 감춰진 손이 느릿하게 움직일 때마다 고요하던 수면에 파문이 생겨났다. 작은 움직임 만으로도 홍차는 쉴새없이 일렁였다.
특이할 것 없이 지극히 당연한 일인데도.
세이아는 찻잔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흔들리는 홍차의 수면이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에, 그녀는 수면이 잦아들며 비치는 얼굴이 선명해질 즈음에야 찻잔을 내려놓았다.
길다란 테이블 위에 스콘이나 케이크 같은 디저트가 올라간 3단 트레이가 놓였고, 과일 장식으로 가득한 디저트 접시가 가지런히 세팅되어 있었다. 그리고 테이블 양 끝에 놓인 문양이 새겨진 찻잔과 티스푼, 티나이프가 전등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해가 서서히 저무는 와중에도, 세이아는 홀로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의 손님이 지각을 할 사람은 아닌데, 아마도 사정이 있는 모양이다.
평소의 세이아였다면 손님을 맞이하는 동안 다과에 손대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이제까지의 세이아라면 그랬을 것이다.
세이아는 찻잔을 들었다. 한모금, 두모금. 따뜻한 찻물을 입에 머금을 때마다 진한 향이 느껴졌다.
테이블 너머 빈 자리는 금방 채워질 것을 알기에,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모든 미래를 예지할 수는 없지만, 그녀는 꿈을 통해 많은 미래를 볼 수 있었다.
예지 능력을 지닌 세이아에게 인내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미래를 관측하고,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건 너무나도 쉬운 일이니까.
이제까지는, 그랬었다.
세이아는 계속해서 찻잔을 기울였다. 손님은 세모금 째에 도착할 것이다.
복도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세번째로 입에 홍차를 머금자마자, 다과회실의 커다란 문이 벌컥 열렸다.
해가 저물어 세상이 밤으로 물드는 시간에, 뒤늦게 도착한 손님이었다.
"어서오세요. 나기사."
세이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손님을 맞이했다.
차 접시에 찻잔이 내려앉는 소리가 작게 울린 뒤, 에메랄드 빛이 어슴프레 녹아내린 듯한 황금빛 눈동자가 키리후지 나기사에게로 향했다.
"하아. 하아. 후우……."
나기사는 들어서자마자 문을 닫고서 가쁜 숨을 작게 헤아렸다. 급하게 달려왔지만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려는 태도가 역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세이아 씨."
숨을 다 고른 뒤에, 그녀는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로 다가왔다. 미카였다면 지각을 했다며 나기사를 놀려댔겠지만, 세이아는 그런 일과 거리가 먼 점잖은 성격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답니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나기사가 자리에 앉자마자 세이아가 조용히 일어나 나기사에게 다가갔다. 걸음걸이부터 찻주전자를 드는 동작까지, 오늘의 티파티를 개최한 호스트이자, 이번 임기의 호스트답게 예법에 어긋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찻잔 손잡이를 잡은 나기사의 손가락 하나하나도 마찬가지였다.
"고마워요. 세이아 씨."
나기사는 세이아의 '알고 있었다' 는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실제로 나기사와 미카 모두 세이아의 예지 능력을 잘 알았고, 이따금 세이아가 미래를 예지할 때에도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찻물이 찻잔에 다 쏟아진 뒤에도 나기사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는 태연하게 홍차를 음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혹여 세이아의 기분이 상한 탓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세이아에게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다과도, 놓여진 다기도 입 안을 맴도는 홍차의 향도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한데.
근원 모를 곳에서 들려오는 불협화음 같은 은은한 불안감이 나기사의 마음 깊숙히 자리했다. 멀어지는 세이아를 보는 내내 그랬다.
'착각이겠지.'
나기사는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트레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딸기잼이 얹어진 스콘을 조심스럽게 접시에 옮긴 뒤, 스콘을 나이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고는 한 입 베어물었다.
입 안 한 가득 단 맛이 났다. 불안감이 잊혀지고 안도감이 불쑥 들 정도로 달콤했다.
"에덴조약 말이죠."
나기사가 스콘을 다 먹을 즈음,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곤거리는 것 같은 말은 이상하게도 뚜렷하게 들려왔다. 나기사는 찻잔을 들려다가 말고, 세이아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나기사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솔직한 감상을 듣고 싶어요."
갑작스런 질문을 받은 나기사는 곧바로 세이아의 안색을 살폈다. 평온한 표정은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기사는 세이아의 의도를 최대한 파악하려 했다. 세이아는 자주 말을 돌려서 하고는 했지만, 그녀가 하는 말에는 항상 의미가 담겨있었다.
따라서 이번에도 뭔가 깊은 뜻이 있을 거라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에덴조약. 총학생회장이 행방불명된 뒤, 백지화 되었던 트리니티와 게헨나 간의 평화조약."
나기사의 눈동자가 다과회실의 탁트인 발코니 너머로 향했다. 다과회실은 트리니티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위치에 위치해 있어서, 캠퍼스 너머 트리니티의 거리까지 바라볼 수 있었다.
"에덴조약이 좇던 건 평화이자 미래입니다. 트리니티와 게헨나가 언젠가 닿아야 할 궁극적인 목표죠. 비록 조약은 무산되었지만……."
나기사는 잠깐 말을 삼켰다. 세이아는 나기사를 조용히 기다렸다.
"우리는 언젠가 에덴에 다다를 겁니다."
티파티의 세 수장 중, 키리후지 나기사와 미소노 미카는 에덴조약에 대해 이견을 가졌다. 그런 사실이 나기사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세이아의 친구이기도 한 미카와의 우정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하지만 각자가 이끄는 분파의 여론마저 바꿀 수는 없었다.
정치란 그런 것이었다. 사랑도, 우정도 무의미해지게 만드는. 그럼에도 누군가는 해야 하는 것이다.
나기사는 찻물을 들이켰다. 진한 향이 다시금 입 안을 맴돌다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그녀는 몸 안을 홍차로 채우려는 마냥 홍차를 연거푸 마셨다.
잔을 다 비운 뒤에야, 나기사는 찻잔을 다시 찻잔 접시 위에 두고서 입을 열었다. 또렷한 눈동자가 세이아에게 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에덴조약이 반드시 이뤄져야 합니다. 트리니티와 게헨나 간의 오랜 갈등을 멈추고, 마침내 평화를 가져오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자 사명이에요."
마치 연설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던 나기사는, 말을 다 마치고 나서 겸연쩍게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조금 진지해졌다는 생각에 괜히 뻘쭘해진 나기사는 뒤늦게나마 볼멘소리로 말했다.
"세이아 씨도……평화를 바라잖아요?"
나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세이아에게 물었다.
미카가 이끄는 파테르 분파는 게헨나와의 관계를 극단적으로 받아들인다. 나기사가 이끄는 필리우스 분파는 나기사의 뜻과 함께하여 게헨나와의 평화를 바란다.
언제나와 비슷하게 두루뭉술하고 길게 늘어트리는 말에는 분명 평화와 화합에 대한 바램이 있을 거라고, 나기사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그녀는 세이아에게 동의를 구했다.
단순히 동의를 묻는 걸 떠나, 삼두정치의 일원으로써 현 호스트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했다. 동시에 나기사는 저도 모르게 안도감이 들었다. 세이아라면 자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감정적이며 게헨나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 미카도, 나기사의 생각으로는 함부로 일을 벌일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 세이아와 나기사 두 사람이 설득할 수 있다면 더욱 그럴 것이라고, 나기사는 생각했다.
그러나 침묵이 길어지자 나기사는 조금씩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세이아의 생각은 다른 걸까?
"――낙원은."
한참이나 침묵이 흐른 뒤에야 세이아가 입을 열었다. 소리 없이 홍차와 디저트가 줄어든 뒤였다. 나기사는 뒤늦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완전무결한 낙원에 당도한 사람은 낙원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낙원에서 나오는 이가 있다면 낙원은 완전무결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낙원의 존재는 증명할 수 없다."
세이아가 자주 언급하던 키보토스의 7대 화두 중 다섯 번째 이야기였다. 낙원에 대한 이야기였으나 지금 타이밍에 나오는 이유를 모르는 나기사가 고개를 들었다.
"세이아 씨?"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해서."
나기사가 불안함을 못 이기고 불쑥 말하자마자 세이아가 말을 이었다. 나기사는 저 멀리에 앉은 그녀가 바로 곁에서,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에덴동산을 꿈꾸고 지향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는 않죠. 그렇지 않나요?"
나기사는 식은 땀을 훔쳐냈다. 주로 돌발적인 언행을 보이는 미카 탓에 가려지고는 하지만, 세이아의 성격도 사실 명쾌한 편은 아니었다. 사려깊음과 상냥함을 두꺼운 껍질 안에 품어 숨겼다고 할까. 여러 겹의 껍질을 벗기기 전까지는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방금의 말로 나기사는 확신했다. 세이아는 에덴조약의 목표를 지지한다. 현 호스트인 세이아의 뜻이 이렇다면, 미카의 반대를 감안하고서라도 향후 에덴조약과 같은 평화조약의 추진을 계획할 수 있었다.
"증명만이 목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짧은 말을 마친 나기사는 홍차를 머금었다. 이게 몇 잔 째더라. 나기사는 세이아는 본론을 곧바로 꺼내기보다는 복잡한 단어 선택과 미사여구를 통해 돌아가는 경향이 있지만, 오늘따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곁들여진 탓에 평소보다 더 답답했다.
"그, 그렇죠."
나기사는 홍차를 한모금, 두모금 머금으며 긴장을 가라앉혔다.
"――꿈을 꿨습니다."
세이아가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세이아는 찻잔도 포크도 들지 않고 소매로 덮인 손등 위에 오목눈이를 앉혔다.
"어떤 꿈을 꾸었나요?"
세이아의 예지 능력을 아는 나기사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이제까지의 긴 이야기는 결국 예지몽을 언급하기 위함이었나. 나기사는 창자가 꼬이는 느낌이 들었다. 세이아와 자주 말다툼을 하는 죽마고우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체감하고 있었다.
"낙원을, 우리가 꿈꾸는 평화를, 그리고 사랑해마지 않는 모든 것을, 누군가가 모조리 불태우는 그런 꿈이었어요. 많은 이들이 지옥의 겁화에 사그러들며 끔찍한 비명을 지르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수없는 고통 속에 사라졌습니다."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 나쁜 악몽에 지나지 않겠지만, 세이아에게는 예지몽을 꾸는 능력이 있었다. 그녀의 예지 능력 또한 다양한 꿈에서 비롯 된 것이었으니, 나기사는 세이아의 말을 듣자마자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그 누군가는 대체 누구였나요? 아니, 그건 어떤 상황이었죠? 설마 게헨나인가요? 그렇다면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미카 씨를 부르겠습니다. 미카 씨와 함께 논의를 시작하죠."
나기사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다과회실 밖의 기나긴 복도 끝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기사는 미처 듣지 못했다. 세이아가 한 말에 당황했을 뿐더러, 세이아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길게 늘어놓은 탓에 기가 빠진 탓이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이제 없습니다. 그런 끔찍하고도 있어서는 안될 결말을 타파할 방법은, 단 한 가지 뿐이니까요."
세이아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찰나의 순간이 지난 뒤에 가늘게 떴다. 그 짧은 순간이, 나기사에게는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저는 이미 준비를 마쳤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나기사는 세이아가 하는 말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리 호스트라고 해도 삼두정치가 엄연히 유지되는 한 마음대로 일을 벌일 수는 없을텐데.
애시당초 위기라면 더욱 협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을 되짚던 나기사는 문득 시끄러운 사이렌이 울리는 착각이 들어 주춤거렸다.
"세이아 씨? 그게, 무슨……말인가요?"
이윽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한동안 안온한 시간을 보내시죠. 오랜만에 휴가를 가지는 건 어떻습니까. 키리후지 나기사."
세이아의 시선이 나기사에게로 또렷히 향했다. 그에 질세라, 나기사도 세이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세이아 씨의 눈, 이렇게 탁했었나?'
나기사는 순간적으로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짧게 스쳐가는 사소한 의문에 지나지 않았다.
"세이아 씨!"
참다 못한 나기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동시에 커다란 문이 벌컥, 열렸다.
다과회실 안으로 우르르 들어온 이들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이었다.
"당신들은, 지금 대체. 이곳은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라는 걸, 알."
아니, 호스트에게 초대받은 손님이었다.
세이아의 지시를 받은 상투스 분파의 학생들이 나기사에게 다가갔다. 나기사는 당황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다수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놓, 으세요! 지금 당신들의 행위는 티파티를 향한 불법적인 행위입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당신들 또한 처벌 받을……!"
나기사는 상투스 분파의 학생들에게 붙들린 채로 황급하게 세이아를 쳐다봤다. 그러나 세이아는 전혀 놀라지 않고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분파원들을 제지하려 들지도 않았다.
나기사의 머리 속에 한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친위 쿠데타.'
"이거 놔! 놓으란, 말야!"
나기사는 있는 힘껏 저항했다. 테이블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찻잔과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진 조각들이 비산하고, 포크와 나이프가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그러나 그건 테이블 한 켠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
"세이아 씨! 안돼! 세이아!"
다과회실 밖으로 끌려가던 나기사가 외치는 새된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그러나 세이아는 외면하며 찻잔을 들었다. 꿈에서 본 그대로, 찻잔 안에는 홍차 한모금이 알맞게 남아있었다.
세이아는 마지막 한모금을 삼켰다. 손님들의 소리가 복도 너머로 사라져 들리지 않을 때까지, 세이아는 묵묵히 밤하늘을 쳐다봤다.
이상하리만치 환하게 뜬 달도,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는 별도, 음습한 음모를 가득 머금은 밤을 밝히지는 못했다.
비로소 시작이었다.
***
세이아는.
꿈을 꾸고 있었다.
향긋한 꽃향기가 가득했던 학교를 화약 냄새가 뒤덮고, 꽃다운 소녀들이 저마다 재잘거리던 소리 대신 귀를 찢는 듯한 총성이 쉴새없이 울려퍼지며, 새하얀 교복을 입은 소녀들이 바닥에 누워있었다. 그녀들의 감겨진 눈에서, 붉게 젖어든 옷에서 흘러나온 피로 새하얀 교정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검붉은 연기가 새빨갛게 불든 하늘을 뒤덮었다.
높고 낮은 비명소리가 세이아를 내몰고, 끌어당기고, 부르고, 붙잡고, 애타게 찾았다.
세이아는 지옥을 헤맸다.
세상은 마치 종말에 다다른 것처럼 불탔지만, 그럼에도 아직 종말은 다가오지 않았다.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한다면, 이것은 분명 잔인한 처사였다.
목숨 붙어있는 것들이 모두 죽음으로 내몰릴 때까지, 끝에 다다른 것들이 모두 타오를 때까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재로 사라질 때까지.
그러고도 세상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으리라고.
신은 그렇게 정했다.
'나기사.'
세이아의 발길이 다다른 곳에, 나기사는 있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세이아는 '그것' 이 나기사라는 걸 어렵사리 알 수 있었다.
형체만 남은 소사체를 보며 세이아는 나기사가 고통 속에서 얼마나 괴로워했을지 알 수 있었다.
트리니티를 향한 헌신이 어떻게 비참하게 끝났는지,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카.'
반면 미카를 알아보는 건 훨씬 쉬웠다. 확실히, 세이아가 아니더라도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을 것이다.
여전히 탐스러운 분홍색 머리카락을 자랑하는 미카의 얼굴은 피가 조금 묻었을 뿐, 생전의 형태를 거의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몸이 따로 떨어져 보이지 않을 뿐이었다.
"아. 아아. 아아아아……!"
세이아는 트리니티의 끝에서 또 다시 절망했다. 꿈은 항상 이랬다. 그녀는 절대 먼저 죽지 않았다. 모든 이의 끝을 하나하나 관찰해야만 했다. 무릎을 꿇고 절규하던 그녀의 앞에 누군가 다가섰다.
두건을 뒤집어 쓴 탓에 그 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세이아는 아직도 그 자의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트리니티를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이라는 사실만은 이상하리만치 명백했다.
"-하앗."
이로써 열 두 번째였다. 악몽에서 깨어난 세이아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트리니티는 불타지 않았다. 총격음도 포격음도 들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선 그녀는 두 손을 뻗어 어둠 속을 헤맸다. 그러나 침실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내장 안에 든 것을 모두 쏟아냈다.
"우욱. 하아. 하아……."
근래에는 제대로 식사를 하지도 못한 탓에, 바닥에 쏟아낸 양은 그리 많지 않았다. 대신 위장에서 올라온 위액의 쓴 맛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반복되는 꿈은 세이아의 현실을 위협했지만, 그럼에도 현실과 꿈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다.
현실의 트리니티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세이아는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트리니티의 끝을 계속해서 목도하던 그녀는 결심했다.
그녀는 스스로 가장 혐오하는 존재가 되기로 했다.
트리니티를 위해서.
***
그리고 나기사가 비밀리에 감금 당한지 얼마 되지 않아, 나기사가 앉았던 의자에는 미소노 미카가 앉아있었다.
"아하하하!"
미카는 세이아의 말을 듣자마자 쾌활한 웃음을 터트렸다.
세이아의 설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트리니티를 지키기 위해서 나기사의 학생회장 권한을 정지시키고 연금했다' 라는 말만 전했을 뿐, 제대로 된 설명은 하지 않았다.
터무니 없이 들리는 건 당연했다. 친구라도, 아니 친구라서 더욱 그랬다.
텅 빈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서 두 사람은 서로를 얼마간 쳐다봤다. 조금 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미카가 말했다.
"흥미로운 이야기네. 나한테도 미리 알려줬으면 정-말 재밌었을텐데 말야."
눈을 깜빡이며 밝게 재잘거리던 미카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여전히 예쁘장하지만, 적대감이 진하게 물든 얼굴이 칼날처럼 예리한 날을 내비쳤다.
"세이아 쨩. 지금 장난해?"
테이블 아래로 감춘 미카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참았다.
친구니까, 라는 평범한 이유는 아니었다. 티파티의 학생회장, 미소노 미카로서 발휘한 인내심 덕분이었다. 참지 못했더라면 진작 테이블을 부수고 다짜고짜 달려들었을 것이다.
"혹시 메시아라도 될 생각이야? 선지자의 역할로 충분히 만족할 줄 알았는데. 구세주가 되는 꿈이라도 꿨나 보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나머지, 미카는 끓어오르기보다는 되려 냉정해졌다. 하지만 그건 붉은 불꽃보다 파란색 불이 더 뜨거운 것과 같은 이치와 같았다. 미사일 스위치 하나를 남겨둔 장군처럼, 미카는 팔짱을 낀 채 몸을 뒤로 젖히며 세이아를 쏘아봤다.
세이아는 대꾸도 없이 묵묵히 미카를 쳐다봤다. 평상시에 미카와 말다툼을 할 때도 전혀 기죽지 않던 그녀였고,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미카는 눈쌀을 찌푸렸다.
"뭐, 좋아. 안 그래도 네 예지 놀이에는 조금 지쳐 있던 참이거든."
미카는 머리 속에 담아뒀던 생각부터 하지 않던 생각까지 모두 동원해서 세이아의 마음을 할퀴려 들었다. 그렇지 않고는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세이아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그녀로서는 더욱 참기 힘들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세이아는 미카의 기대를 배신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기가 죽거나 사과를 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외면하려는 태도였다. 그녀의 냉정함은 곧바로 비수가 되어 미카에게 날아들었다.
"이미 그럴 나이는 지났죠."
마치 조용히 하라는 마냥, 세이아가 검지 손가락을 입술에 올렸다.
"무지하고 우매한 이들과의 우정놀이는, 그만둘 때도 되었잖아요?"
쾅! 테이블을 내리친 미카는 저 어이없을 정도로 뻔뻔한 말을 듣고는 벌떡 일어났다. 머리 끝까지 치솟는 분노와 일말의 우정이 그녀를 움직였다.
이윽고 우당탕, 하는 큰 소리가 난 뒤, 두 사람은 함께 뒹굴고 있었다.
"너……!"
세이아는 미카를 힘에서 이기지 못한다. 세이아는 미카의 아래에 깔려 미약한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옷가지가 흐트러진 채로, 멱살을 붙들려서 윽, 하는 신음을 흘리며 무방비하게 미카가 손을 치켜드는 걸 쳐다만 봤다.
세 사람이 함께 티파티가 된 이래, 미카와 세이아가 다투는 일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대거리를 하며 다투는 일은 없었다. 둘의 싸움은 대부분 말다툼이나 장난 수준의 아웅다웅으로 그치고는 했다.
그러니까, 미카에게도 이런 상황은 낯설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미카도 이런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터다. 무방비하게 그녀를 올려다보는 세이아를 마주보며, 미카는 친구를 향한 분노를 표출하려 했다.
"……미카."
그러나, 세이아와 눈을 마주한 미카는 차마 손을 휘두르지 못했다.
당장 주먹을 내지르면, 아니 손바닥만 휘둘러도 세이아는 큰 부상을 입을 것이다. 조금 더 힘을 주면 중상까지도 가능하다. 키보토스의 학생들은 쉽게 다치지 않지만, 미카에게는 그를 상회하는 힘이 있었다. 반면 세이아는 본래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다.
세이아를 멈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데도, 그녀는 여전히 망설였다.
"세이아 쨩은……. 현명하잖아? 분하지만, 나보다 똑똑하고."
미카는 트리니티의 학생회장이 아닌 친구로서 세이아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니까, 이게 잘못된 거라는 거도 알고있잖아."
여전히 머리 위로 치켜든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어찌나 강하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바닥이 찢어지고, 틈사이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미카는 아픈 줄도 모르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만하자. 응? 나기 쨩한테도, 미안해, 라고 사과하고 되돌리면, 아무 일 없던 게 될테니까. 없을 거야. 그러니까 제발……."
이렇게까지 싸우는 건 둘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지만, 다른 날이었다면 세이아는 지금의 미카에게 감탄했을 것이다. 오히려 그녀에게 감동하고 감화되어, 미카의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미카의 진솔한 말은 오랜 친구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애석하게도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아뇨."
지금의 세이아는 그렇지 않았다.
"어쩔 수 없어요."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까지도, 그녀가 꿈에서 봤던 장면이었다.
"미소노 미카! 티파티 호스트를 향한 폭행과 협박, 테러 혐의로 당신을 체포하겠습니다!"
우렁찬 고함과 함께 정의실현부장과 구호기사단장을 비롯한 정의실현부의 학생들이 들이닥쳤다. 신고를 받고 올 때만 해도 긴가민가했던 그녀들은 현실을 마주하고 경악했고, 곧바로 그들 본연의 업무를 수행하려는 의지를 다졌다.
"아니, 이건……!"
세이아를 덮치는 자세 그대로, 미카는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는 다시 세이아를 내려다봤다. 변명조차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런 미카를 올려다보며, 세이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어요. 미카."
당신은 나를 막지 못한다는 걸.
"이미 봤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을 믿으니까요.
구호기사단원들에게 부축받아 현장을 벗어나는 동안, 세이아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예지가 없다면 이끌어낼 수 없는 결과였다.
미카를 불러내어 이런 상황을 만드는 것도, 미카의 행위를 목격할 증인이자 미카를 제압할 정의실현부를 불러내서, 때맞춰 도착하게 하는 건 모두 계산의 영역이 아니었다.
단순히 '타이밍을 맞춘다' 라는 방식으로는 불가능했었다.
더군다나 거기까지 성공한다고 해도, 미카가 세이아를 인질로 삼는 것과 같은 수단을 쓰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세이아는 그런 가능성은 상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모두 알고 있었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리고, 고함과 비명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양옆의 단원들과 걸음을 맞추던 세이아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작게 보이는 열려있는 문과 문 사이로 미카가 스쳐지나갔다.
그녀는 홀로 싸웠다. 무엇과 맞서야하는지도 모르는데도, 필사적으로 싸웠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홀로, 외롭게.
"세이아 님?"
세이아를 부축하던 정의실현부 부원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잠깐 걸음을 멈췄을 뿐이지만, 세이아의 시선이 저 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은 모양이다. 그녀가 무어라 덧붙이려던 찰나, 세이아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흝날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닙니다. 가죠. 아직 끝난 건 아무 것도 없으니까요. 시작은 결말에 도달하기 위한 첫걸음에 지나지 않아요."
"네. 세이아 님."
구호기사단원은 세이아의 알듯 말듯한 말을 듣고는, 더 고민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걷는 동안 세이아의 시선은 그녀들에게 향했다. 단지 나기사나 미카를 위해서만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니었다. 여기에 있는 그녀들도 마찬가지로, 세이아의 소중한 존재였다.
트리니티의 모두를 위해, 세이아는 친구를 배신하고, 스스로를 배신했다.
세이아는 마음 속으로 맹세했다.
증명하지 못할 에덴에 닿지 못하더라도 지옥으로 떨어지지는 않겠노라.
차마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하고, 가슴 속에 눌러담은 맹세는 바야흐로 사명이 되었다.
미카의 말대로 세이아는 선지자가 아닌 메시아가 되었다.
학생회장 중 한 명은 불가피한 사유로 입원, 다른 한 명이 호스트를 향한 테러로 구속된 상황이다보니, 남은 호스트인 세이아는 트리니티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었다.
나기사나 미카와 달리 그녀는 구호기사단과 시스터후드에 명망이 높을 뿐더러 대외적으로 그녀가 겪은 일들은 그녀의 권력을 공고히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너무나도 손쉬운 친위 쿠데타였다.
세이아의 예지는 무엇 하나 틀리지 않았다.
그 뒤의 일도, 세이아는 알고 있었다.
***
현실은 놀라우리만치 꿈과 똑같이 흘러갔다.
전쟁은 트리니티의 게헨나를 향한 선전포고 없는 선제 타격으로 시작되었다. 그로 인해 트리니티와 게헨나 간에 수많은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전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두 학원 사이에 축적된 갈등에 더불어, 각 학원에 얽혀있던 다른 학원과 여러 자치구까지 이런 휘말린 뒤부터 전쟁은 갈수록 과격해져만 갔다. 비명과 총성 사이에서 많은 피가 흐르고, 더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다.
전세는 명백히 트리니티에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세이아의 예지 능력은 유용했지만, 매 순간마다 발휘할 수는 없었다.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전쟁의 현황에 비하면 세이아의 예지는 너무나도 느렸다.
정의실현부와 티파티의 보유 부대를 가진 트리니티는 키보토스 내에서도 손꼽히는 군사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런 전력을 운용하기 위한 나기사의 지휘 능력과 미카의 전술전투 능력이 없는 트리니티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본래부터 몸이 약했던 세이아는 몇 번이고 까무러쳤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한 명 뿐인 국가 원수이자 군 통수권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니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전황이 시시각각으로 위태로워지는 가운데, 세이아는 또 다시 꿈을 꿨다. 그녀는 어김없이 트리니티 교내 분수 옆에 서있었다.
"……."
여전히 트리니티는 불타고 있었다.
"……아니야."
아직도 트리니티는 무너지고 있었다.
"아니라고."
새빨갛게 물든 하늘에 새까만 연기가 자욱하고, 길에는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며, 보이는 곳곳에 절망과 죽음이 넘쳤다.
세이아는 미래를 바꾸고자 예지를 믿고 스스로가 혐오하던 존재가 되었건만, 아직도 꿈에서 트리니티는 구원받지 못했다.
"나는, 분명히. 예지했을텐데."
세이아의 머리 속에 메시아라도 되려는 모양이냐며 비아냥거리던 미카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울렸다.
차라리 메시아가 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세이아는 트리니티를 구원하지 못했다.
「가짜 메시아.」
문득 목소리가 들려와, 세이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미카."
잘못 들은 게 확실했다. 미카는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녀가 몇 번이고 봤던 것처럼, 목만 남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
세이아는 비척거리며 걸었다. 총탄의 흔적이 가득한 길을 어렵사리 걷고, 포탄에 깨진 벽돌을 피하며 걸었다.
「세이아 씨의 말대로……에덴은 결국 증명할 수 없나 보네요.」
나기사의 목소리에도 세이아는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잘못 들은 게 분명했다. 타들어 가는 숯냄새가 그쪽에서 진하게 풍겨왔다.
그러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될 수는 없다.
세이아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건 잘못됐어. 이건. 아냐. 아니라고!"
하얀 구두는 달리는 일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구두 굽이 돌과 부딪히는 소리가 나며, 세이아는 연거푸 넘어질 뻔했다.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욕지기를 느낀 그녀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돌바닥에 무릎이 부딪혔는데도, 세이아는 아픈 줄도 모르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가린 손가락 사이로 변명의 말이 새어나왔다.
"나는 예지했어. 미래를……운명을, 바꿨다고."
들어줄 이 없는 변명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러나 변명은 멈추지 않았다. 세이아의 한탄에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나는 봤어. 그저 본 대로 한 거야. 메시아가 되고 싶었냐고?"
꿈속의 트리니티처럼, 세이아도 서서히 무너졌다.
"아냐."
회한이, 그녀의 후회가 눈물로 흘러내렸다.
"내가 바란 건 메시아가 아니라 평화였어. 에덴 같은 게 아니라, 그저, 평화로운 트리니티를 바랬을 뿐이라고……!"
얼굴을 가리고 울부짖던 세이아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인기척을 느낀 세이아는 손을 내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이전의 꿈에서 그랬듯, 이번에도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 자의 얼굴은 이상하리만치 어두워서,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었다.
가증스럽다고, 세이아는 불쑥 생각했다.
"너……. 대체 누구야. 누구냐고!"
세이아를 사로잡은 절망은 삽시간에 분노로 바뀌었다. 불길이 거세지며 만든 그림자와 빛이 그녀를 감싸며 절망과 분노의 색으로 검붉게 물들였다.
"트리니티를, 네 마음대로 되도록 두지는 않아!"
바닥을 박차고 일어난 그녀가 힘껏 손을 뻗었다. 깨어나기 전에 그 자의 얼굴을 눈에 새겨둘 작정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이 용케 두건을 벗겨냈다.
"어?"
세이아의 허탈한 목소리와 함께, 꿈은 끝났다.
***
세이아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창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꿈속에서 들었던 소리는 날이 갈수록 그녀에게로 가까워졌다. 슬리퍼도 신지 않은 맨발이 비척비척 바닥을 디뎠다.
늦은 밤을 강제로 밝히는 불길한 빛들은 창 밖에서 방 안까지 스며들었다.
서서히 움직이던 세이아의 시선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바로 벽에 걸린 커다란 거울이었다.
작은 두 손바닥이 거울 위를 짚었다.
"물론 기억하고 있답니다."
세이아는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어떻게 잊겠어요. 트리니티를 지옥으로 만든 자의 얼굴을."
어둠 속에서 검붉은 빛이 터질 때마다 거울에 비친 상이 더욱 선명해졌다.
"맞아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세이아가 대답했다. 나기사가, 미카가, 트리니티의 모두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럴 리가 없지만, 지금의 세이아는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지 못했다.
"가짜 메시아에게는……현실을 볼 자격이 없겠죠."
거울에 비친 소녀의 손이 스스로의 눈으로 향했다.
손가락이 눈을 가리고 나서, 눈동자 위에 자리했다.
이윽고 시야가 빨갛게 물들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전에 이 짤을 보고 생각하던 걸 글로 썼습니다.
글마다 스타일 같은 것에 변주를 주고 있는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댓글 31
오아오... 띵작... 대국적으로 하려다가 파국적으로 해버리는 묘사가 개쩌네...


실장해달라는 개그물인줄 알았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