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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소설] 초천재미소녀해커의 죽음으로의 찬란한 여정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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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천재미소녀해커의 죽음으로의 찬란한 여정 -上-

코누리 마키는 연락을 받자마자, 저도 모르게 '에이, 거짓말' 하고 중얼거렸다.

장난은 내 전문인데 말야. 역시 베리타스구나, 라고 부장마저 장난을 치는 거냐며 병원으로 향하는 내내 중얼거렸다. 병원에 도착하기까지 이상하게도 길게 느껴지는 시간 내내, 그녀는 주변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지직거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대형 병원 특유의 긴 대기 시간 끝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도,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복도를 걸을 때에도, 그녀는 평소처럼 웃지 못했다. 아니, 조금은 화가 났다. 같이 웃고 떠든지 얼마나 됐다고. 말도 안되잖아. 이런 장난.

마키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라 믿는 추론에 의하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반드시 그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병실에는 히마리가 침대에 누워있고, 부부장인 치히로와 항상 히마리와 같이 있는 에이미가 있었다.

"장난……이지? 혹시 병실까지 빌려서 장난을 치는 거야? 아니면 조금 아픈 김에, 짓궂은 장난이라도……그런 거지? 부장? 선배?"

마키는 주변을 둘러보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 주변의 반응을 요구하는 듯이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치히로가, 에이미가, 히마리가, 실은 장난이었다고 웃으며 말해주기를 바랬다.

마키는 기대를 품고서 히마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윽고 평온한 얼굴을 한 히마리가 입술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마키는 묘한 희망이 들었다. 저런 얼굴을 하고 그런 충격적인 말을 할 리가 없으니.

"마키."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려는 것치고는, 너무나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역시 장난이구나. 마키는 영문 모를 확신을 가지며 다음에 이어질 말을 잠자코 기다렸다.

"저는 불치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올해를 넘기지 못할 거에요."

"……뭐?"

예상과 전혀 다른 말에 마키는 순간 당황했지만, 금방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꼬리를 어설프게 끌어올렸다.

"자, 장난이잖아. 그런 거. 내가 속을 줄 알고?"

마키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바닥에 바싹 엎드려 침대 밑을 살폈다. 침대 밑은 텅 비어있는 데도, 그녀는 필사적으로 숨겨진 무언가를 찾았다.

"여기, 이런 곳에 숨어있을 거 아냐. '서프라이즈~!' 하고 간판을 든 사람들 말이지. 아니면 다른 곳……여긴가!"

침대 밑을 뒤지던 그녀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원하는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누구 한 명이라도 장난이라고 말해줬으면,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그녀는 일생일대의 소원을 빌었다.

"아- 속았네. 정말 제대로 속았는 걸? 그러니까 이제 그만, 장난이라고 말해주라. 응? 부장? 부부장?"

간절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키는 공중에 부유하는 기분이 들었다. 붕 뜨는 듯한 초현실적인 감각. 시야가 갑자기 어둠에 잠기는 것 같기도 하고, 넘어질 것 같은 아찔한 감각 속에서 차라리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했다.

마키는 말라버린 입술을 재차 움직였다.

"말해줘. 제발……."

대답은 없었다. 치히로는 마키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나머지 아예 고개를 돌렸다.

***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말해야 했을까요?"

고요한 공기를 파고드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에이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울함을 달래는 방법' 검색 결과가 띄워진 휴대폰 화면이 그대로 꺼졌다.

"마키도 그렇고……다들 충격을 너무 받은 거 같아서 말이에요. 차라리 일찍부터 말했으면 마음의 준비를 했을지도 모르겠네요."

히마리는 침대에 앉아 담요를 덮은 채로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리에는 가을이 스쳐가며 남긴 울긋불긋한 흔적이 가득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도 모두 계절감이 뚜렷히 돋보이는 차림이었다.

"……글쎄."

에이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에 말했다.

"난 부장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확신에 찬 말을 들은 히마리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충격을 받은 건 마키 만이 아니라, 베리타스의 다른 부원들, 그리고 연락을 받은 학생 모두가 똑같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괴로운 건 바로 히마리 본인이었다.

그렇게나 즐거웠는데. 그게 마지막 여름이었다니.

히마리는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물을 참기 위해 모포 밑으로 감춘 두 주먹을 아플 정도로 세게 쥐었다. 마키가 히마리의 상태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처럼, 히마리에게도 현실을 인정하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여름은 끝났다. 가을은 짧고, 겨울이 다가온다.

다시는 봄도, 여름도 보지 못하겠지.

히마리는 침대에 몸을 누이고 지긋이 눈을 감았다. 여전히 생기가 느껴지는 창 밖의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하얀 천장을 바라보는 일도 모두 괴로울 뿐이었다.

이대로 영원히 잠들어 버리면 어떨까. 히마리는 잠시 회한에 빠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면조차 버거워질 예정이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잠자리에 들 때마다 '아침에 눈을 뜰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해왔지만, 이제는 잠에 드는 게 축복이 될 것이다.

닥쳐올 미래를 몰랐다면 좋았을까.

기분이 울적해진 히마리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마른 세수를 했다. 에이미는 말없이 시선을 창 밖에 두다가 문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반응했다.

"세미나의 츠카츠키 리오입니다."

에이미가 문고리로 잡고서 히마리를 쳐다봤다.

리오와 히마리는 오랫동안 껄끄러운 사이라는 건 에이미도 알고있었다. 히마리가 그녀를 거부한다면 그대로 돌려 보내려던 참이었다.

"괜찮아요. 에이미."

히마리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에이미가 문을 열자, 리오와 유우카, 노아, 코유키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유우카의 눈은 이미 촉촉히 젖어 있었고, 노아의 표정도 사뭇 어두웠다. 항상 활기차게 웃고 다니던 코유키마저 잔뜩 풀이 죽어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반면 히마리는 한껏 웃으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어머나. 어서오세요. 세미나의 여러분. 밀레니엄 최고의 천재 미소녀 해커과 만남을 가지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지만……. 어느 곳에서라도 저와의 만남은 매우 두근거리고 즐거운 시간이겠죠?"

히마리는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녀가 불치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고한 자태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입술을 움직이는 목소리의 높고 낮음과 억양. 손동작부터 턱 밑에 얹은 손가락을 움직이는 각도까지.

그러나 노아는 그녀에게서 마지막 불씨가 타오르는 것 같은 위태로움을 느꼈다. 다 타버려서 재가 남기 직전의 불씨처럼.

"히마리. 사실이야?"

다들 머뭇거리는 와중에 리오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전혀 흔들림이 없어서, 히마리는 새삼 놀랐다.

역시 빅 시스터네요, 히마리는 내심 감탄했다. 히마리가 보기에 리오는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듯 보였다. 리오가 감정이 없는 로봇일 리는 없다. 하지만 그녀는 현실주의적이며 효율을 추구하는 이답게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네. 사실이에요."

그래서 히마리는 더욱 태연하게 받아치기로 마음 먹었다.

"밀레니엄 최고의 청초계 병약 미소녀 해커의 삶은 앞으로 반년도 남지 않았답니다."

나긋하고 청명한 목소리에 반해 내비치는 의도는 명확했다. 금방이라도 깨질 살얼음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유우카가 나설지 말지 망설이며 흠칫거렸지만, 노아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저었다.

"아케보시 히마리라는 작품의 끝은 이렇답니다. 키보토스의 역사에 길이 남을 미소녀의 마지막 치고는 너무나도 너절하지 않나요?"

기묘하게도 고혹스런 미소에 제법 어울리는 독설이었다. 칼 끝에 선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 속에서, 안색이 새파래진 코유키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을 떼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꼴 좋다, 라고 마음껏 비웃어도 좋답니다. 누군가를 탓할 일도 아닌 걸요. 차라리 그 편이 제게는 더 편하답니다. 자아, 어서."

"……히마리."

누가 말릴 새도 없이, 리오가 빠른 걸음으로 히마리에게 다가갔다. 똑바로 서서 내려다보는 리오와 침대에 앉아 올려다보는 히마리. 냉정한 얼굴과 씁쓸한 미소가 마주했다.

"네. 마음껏 말하세요."

히마리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내에는 짓궂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리오가 어떤 말을 해도 거세게 쏘아 붙여주리라. 이 정도의 심술은 부려도 되지 않은가. 그녀는 리오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렸다.

"히마리. 나는……."

히마리가 입 밖으로 내뱉을 독설을 하나하나 헤아리던 찰나, 갑자기 리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히마리는 하려던 말조차 까맣게 잊었다.

"리오?"

"미안해. 나는, 정말로, 몰랐어. 네가 병에 걸렸을 거라고는……."

항상 냉정하고 침착하던 얼굴이, 현실주의를 새겨넣은 얼굴이 한껏 감정에 물들었다. 당황한 히마리 앞에 리오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내가,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방법을 찾을테니까, 어떻게든……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안을 찾아낼테니까……."

흘러내린 눈물이 병실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리오는 울어야 할 사람이 자신이 아닌 히마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히마리에게 했던 모든 언행이 미안했고, 그런데도 눈물 흘리는게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욱 미안했다. 리오는 소리를 내며 엉엉 울었다.

"리오."

히마리가 그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빅 시스터가 이런 일로 울고 그래요."

히마리는 리오를 품에 안았다. 예전에 치히로가 히마리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는 히마리가 리오를 껴안았다.

히마리는 리오의 등을 토닥이며 어깨 너머로 세미나 부원들과 에이미를 훑었다. 무언의 부탁을 받은 모두가 방을 나선 뒤, 둘만 남은 병실에는 흐느끼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괜찮아요."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히마리는 그 말이 리오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사실 구분할 필요도 없었다.

"전부 다, 괜찮아질 거랍니다. 그러니까 뚝."

히마리는 치히로에게 위로받았던 때를 떠올렸다. 치히로가 그녀에게 그랬던 것처럼, 히마리는 리오가 눈물을 그칠 때까지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

가을과 겨울의 경계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비가 세상을 때려댔다.

늦은 오후에 병원 입구에 도착한 에이미는 비에 푹 젖은 우산을 여러번 턴 뒤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에이미가 병원에 들어오고 나서도 빗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세차게 창문을 두들기며 빗소리를 냈다.

처음에는 이목을 끌 정도로 파격적인 노출도, 이제는 병원의 사람들에게 익숙한 광경이다. 에이미는 그런 차림으로 병실 앞에 서서 노크를 한 다음 문을 열었다. 거의 매일 반복하는 루틴이 되어 있었다.

"어머나. 에이미. 오늘도 찾아주셨네요."

싱긋, 웃는 미소는 여전히 다르지 않았지만, 안색은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부장. 마시고 싶은 거라도 있어? 마침 나도 목이 말라서 말야."

에이미는 빈 의자에 가방을 올리고 히마리를 쳐다봤다. 히마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래? 그러면……."

"아뇨. 이제는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에요."

에이미는 가방을 열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미안하지만 어떤 의미인지 물어봐도 될까?"

에이미는 혹시 히마리가 화가 났나 싶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히마리가 화를 내는 건 이상하지 않다. 겉보기에는 무감각해보이고 튼튼한 에이미도 아픈 건 싫다. 그녀는 본래 타인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타인의 감정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감정을 느끼지 못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에이미는 인내를 품고 히마리의 말을 기다렸다.

"말 그대로의 의미에요. 병원에는 저를 도와주실 직원 분들도 있으니, 이제 에이미는 일상으로 돌아가라는 거죠."

에이미는 대답 하는 대신 평소의 얼굴 그대로 히마리를 응시했다. 빗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오며 그녀들이 있는 공간을 세상과 격리시키는 것 같았다.

영겁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히마리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저는 괜찮답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역사에 남을 천재, 아케보시 히마리가 이뤄낸 것들은 영원불멸히 남을테니까요?"

히마리는 여전히 청초한 자태를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금방 시들어버릴 백합꽃과 같았다.

"게다가 앞으로의 미래도 너무나 기대가 되는 걸요. 죽음으로의 탐구, 누구도 증명하지 못한 미지의 여정. 정~말로, 흥미로운 일들 뿐이라구요?"

히마리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감정을 표출하는 것조차 그녀에게는 서서히 힘든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당신도 괜찮아야죠."

히마리는 생긋 웃었다. 예쁘게 휜 입술을 보고 에이미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부장. 지금……."

언제 터질지 모를 화약고 같은 위태로움을 감지한 에이미가 다가가려는 찰나, 그걸 제지하듯 히마리가 말했다.

"네. 당신은 괜찮을 거에요."

히마리는 소름끼칠 정도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읊조리며, 열망 어린 눈이 에이미에게 향했다. 에이미는 섬칫한 기운을 느꼈다. 이윽고 히마리가 달려들 것처럼 상체를 내밀었다.

"제가 보지 못하는 미래를, 그리고 꿈의 결말을! 당신은, 당신은. 그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을테니까요."

이 말에는 분명 분노나 절망 같은 감정은 없다. 하지만 에이미는 뿜어져 나오는 열망에 쉽사리 헤어나오지 못했다. 순식간에 타버릴 것 같은 아찔한 두려움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렇게 감정을 잔뜩 쏟아낸 뒤에는 침묵이 따라왔다.

서서히 무거워지는 고요함 속에서, 히마리는 뒤늦게 후회하기 시작했다. 일전에 리오에게는 괜찮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리오가 아닌 에이미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껏 쏟아부어도 된다는 건가?

"……."

히마리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혀 말을 하지 못했다.

근거없는 나르시즘과는 엄연히 다르지만, 자기애가 뚜렷한 그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품고 있었다.

"저는, 저는, 그, 게……."

히마리는 무어라고 말하려 하다가도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말은 커녕 에이미를 똑바로 쳐다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고개를 들면 에이미의 뒷모습만 보게 될까봐,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사라져 버릴까봐, 히마리는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했다.

필요없다고 말한 주제에. 에이미가 떠나는 걸 두려워하다니. 히마리는 자괴감의 늪에 서서히 잠겨들었다. 누구도 꺼내주지 못할 깊은 늪으로.

"부장."

그러나 에이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피곤하지? 숙면을 취하는 일도 중요하니까……오늘은 일찍 잘까?"

에이미의 권유를 받은 히마리는 뒤늦게 에이미의 상태를 살폈다. 밀레니엄에서 건강으로는 한 손에 꼽히는 에이미다. 그런 그녀의 눈가가 눈에 띄게 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히마리는 자괴감에 더해서 스스로를 향한 모멸감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가장 의지하고 의존한 사람은 에이미다. 누구보다 그녀를 가장 도와준 사람도 에이미다. 그토록 건강한 에이미가 저렇게 될 정도로 자신을 위해 힘쓰는 데도, 그녀는 감사의 말을 건네기는 커녕 되려 화를 냈다.

그걸 알면서도 히마리는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그래야죠. 에이미도 이만 돌아가보도록 해요."

에이미는 히마리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옷을 툭툭 벗었다. 당황한 목소리가 에이미를 재차 불렀다.

"……에이미?"

하지만 에이미는 태연히 옷가지를 하나둘 벗었다. 몸에 열이 많아 겨울에도 얇게 입을 정도인데다가, 이전에도 덥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옷을 벗어던지고는 했으니, 어느 정도는 익숙했던 히마리는 더 말하는 대신 얌전히 시선을 돌렸다.

"고개 돌려도 돼. 다 입었어. 미리 챙겨왔거든."

다시 히마리의 시선에 들어온 에이미는 속옷과 다름 없는 잠옷 차림이었다. 모르는 사람이라면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했을 정도지만, 히마리에게는 익숙한 차림이었다.

"오늘은 자고 갈게. 괜찮지?"

에이미가 기지개를 쭉 폈다. 히마리는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미 잠옷으로 갈아 입고나서 말하는 건 통보 아닌가요?

"통보 맞아."

뻔뻔할 정도의 대답에 새삼 감탄한 히마리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네. 밀레니엄에서 가장 청초한 미소녀 해커와 같은 침대를 쓰는 일은 일생일대의 소원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죠. 저와의 동침을 허락할게요."

어느새 히마리는 자기혐오에서 벗어나 이전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전등까지 끄자 어두워진 방은 더욱 고요해졌다. 침대는 그리 작지 않지만, 둘이 쓰기에는 제법 작은데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별 말이 없었다. 한 이불을 덮고서 똑바로 누운 에이미와 다르게, 히마리는 에이미의 반대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히마리가 잠에 들듯말듯할 즈음,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이랑 처음 만났을 때, 어떤 말을 했었는데 말야. 언젠가부터 기억이 나지 않더라고."

작은 목소리도 고요한 방에는 또렷하게 들린다. 히마리는 눈을 감은 채로 기억을 헤아렸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시 에이미는 자기 할 말만 했었죠."

"그랬나?"

에이미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달라진 건 없어."

에이미가 숨을 내쉴 때마다 부드러운 숨결이 히마리의 뒷목에 닿았다. 항상 뜨거운 그녀의 신체와 달리, 숨결은 그리 뜨겁지 않았다.

"나는 부원, 히마리 부장은 부장. 부장을 보좌하는 게 부원의 일이지. 그러니 불안해 할 필요 없어."

평상시의 억양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목소리지만, 이번에도 히마리는 안심해버리고 만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부장의 곁을 떠나지 않을테니까."

그리고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른 이유였다. 두 사람의 숨소리 사이로 훌쩍이는 소리가 간간히 섞여들었다.

히마리는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잠에 들었다. 오랜만에 드는 편한 잠이었다.

***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면 곧장 익숙한 부유감이 찾아온다. 몸이 붕 뜨는 감각에 익숙해질 때면 목적지에 도착해 문이 열렸다.

히마리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병원 옥상에 조성한 정원은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도 이용이 가능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게 설계되어 있었다.

가을색으로 물든 세상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더없이 높다. 다가온 가을이 여름의 더위를 몰아내고 들여온 쌀쌀한 날씨는, 아직 겨울이 되지 않아서인지 춥다기보다는 기분 좋은 시원함으로 닿았다.

하늘정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정원과 하늘 사이를 가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당장 빠져들어도 될 것처럼 새파란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던 히마리는, 저 편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날씨가 좋아. 그렇지?"

그녀가 동경해 마지 않는 선생이 저 편에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흰색 베이스에 파란색이 드문드문 섞인 총학생회의 제복은 묘하게 병원에 어울렸다.

"네.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 말인데요. 근래에는 너무 자주 한 거 같네요. 후후후. 지고의 미소녀에게 시간을 투자하는 건 당연한 일이려나요?"

선생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금방 히마리가 그랬던 것처럼 나란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럼. 당연하지."

말은 가볍게 하지만, 선생이 얼마나 바쁜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히마리는 그가 바쁜 와중에 자신을 위해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는 사실이 기뻤다. 시한부 인생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에게는 결국 남의 일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에이미, 치히로, 선생은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아니 자신의 일보다 더욱 힘써줬다.

"이런 질문을 하는 건 좀 그렇지만……. 항상 묻게 돼. 잘 지내고 있으려나?"

"물론이죠. 병원에서의 생활에는 갈수록 익숙해지고 있답니다."

어투는 가볍지만,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사뭇 어려운 질문이었다. 하지만 히마리는 태연작약하게 답했다.

어쩌면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에이미의 선언을 듣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 때의 히마리는 가까운 이들에게 마음 속에 담아둔 감정을 표출하려 들었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속에 겨우겨우 담아뒀던 부정적인 감정을 도무지 억누를 수가 없었다. 절망과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려는 찰나, 에이미가 그녀를 잡아주었다.

덕분에 히마리는 웃으며 말할 수 있었다.

"선생님. 평행우주에 대한 이야기, 기억하고 계신가요? 우트나피쉬팀의 배에서 말했었죠."

"기억하고 있지. 히마리만큼 자세히 아는 건 아니지만 말야."

잊을 리가 없다. 색채의 침공, 프레나파테스와 다른 시간선에서 온 학생들은 공상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이었고, 특히 그와 큰 관련이 있었다.

수많은 가능성에 의해 도출된 세계. 어쩌면 그가 맞이했을지도 모를 최후를 목도한 그였다.

그런 이유로, 선생은 히마리가 하려는 말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어쩌면 어느 시간선에는 제가 아무런 병도 걸리지 않은 세계도 있을 거에요."

담백한 목소리가 오히려 슬픈 선율처럼 들린다. 세상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잔혹한 시련을 안겼다. 그것도 극복할 수 없는 시련을. 히마리는 몇 번이고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하지만 선생님께서도 보시다시피……이 세계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죠. 그러네요. 결말이 결정된 드라마와 같달까요."

결국 그녀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좌우가 막힌 선로를 걷는 것처럼, 이른 결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히마리……."

선생은 안쓰러운 눈길로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차라리 어리광이라면 품어주련만. 떼를 쓰는 아이는 달래고 얼러줄 수 있는데. 어른이라 한들 만능은 아니기에. 그는 애써 슬픔을 삼켰다.

"밀레니엄의 고고한 꽃은 이렇게 진답니다. 아, 찬란했던 날들이여!"

히마리가 두 팔을 벌리며 외쳤다. 절명의 순간이 닥친 비극의 히로인처럼, 두 팔 벌려 결말을 맞이하는 목소리는 그야말로 극적이었다. 머리카락도 본래도 새하얀데, 어찌된 일인지 밤사이에 새어버린 듯한 착각이 들게 했다.

그러나 비극적인 대사를 담담하게 담았던 입술은 차마 참지 못하고 떨렸다. 필사적으로 평정을 유지하던 얼굴도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전에, 먼저 움직인 쪽은 선생이었다. 허리를 숙여서, 넓은 품 안에 히마리를 끌어안고는, 상냥하게 토닥이는 손길이 그녀에게 닿았다.

"물론,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어요."

깊은 숨이 섞인 말이 선생의 귓가에 닿았다.

"그래서, 선생님께서 제게 찾아와주실 때마다 저는 정말 기뻤답니다."

히마리는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계속 읊조렸다.

아니, 정말로 꿈을 꿨던 걸지도 모른다. 행복의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고, 모든 순간들은 그저 꿈에 지나지 않아서.

"당신과 나란히 걷고 싶었어요."

깨어난 순간부터 서서히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한순간의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함께하는 모험의 끝이 어느 것인지, 함께 알아가고 싶었어요."

마음 깊은 곳에 품은 사모의 감정도, 한낱 꿈의 한 페이지에 지날지도 모른다.

"당신의 곁에서 아름다운 날을 함께 지새우고 싶었어요."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녀가 떠나간 뒤에도 남겨질 이들의 슬픔을 짐작하기에.

"미안해요."

히마리는 사과를 했다. 누구보다 슬퍼야 할 그녀가, 영원한 이별로 인해 현실 속에서 슬픔에 잠길 선생에게 사과를 남겼다. 마음 속에 깊이 담아둔 애정을 말해버린 것에 대해, 사과했다.

선생은 히마리의 사과를 부정하려다가 그만뒀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렇게 해야 할 때가 있었다. 착잡한 마음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선생을 대신해, 히마리가 흘러가는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실은……무슨 수를 써서라도 선생님의 기억 속에서 저를 지우고 싶었어요. 선생님께서 저로 인해 슬픔에 잠겨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했했거든요."

선생은 애써 눈물을 참았다. 소리 내어 우는 건 아이의 몫이었다.

"하지만 저는 방법을 찾지도 않았죠. 왜냐하면……선생님께서 영원히 저를 잊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그게 제 바램이니까요."

하얀 제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럼에도, 히마리는 결국 손을 놓았다.

"아케보시 히마리는 이렇게나 이기적인 사람이랍니다."

그렇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로 하는 부정이 히마리에게는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그녀는 조금 더 용기를 내기로 했다.

"부탁이 있어요. 선생님."

히마리는 선생의 품에서 나와서 그의 손등에 손을 포갰다. 여학생들과 다르게 핏줄이 불거진 거친 손등을 쓰다듬으며 한숨을 내뱉듯 말했다. 히마리는 여전히 웃고 있지만, 마주보는 그는 웃지 못했다. 어른이라고 해도 무적은 아니었다.

"저를 잊으세요."

예상치 못한 말에 선생은 말문이 막혔다. 놀란 얼굴을 보고, 히마리는 노래하듯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라는 아름다운 선율에 불협화음이 스며들지 않도록, 한 때의 추억으로 삼아 잊어버리세요."

히마리는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을 마쳤다. 어딘가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다.

어려운 부탁을 마친 히마리는 얌전히 기다렸다. 망설여지는 건 당연하다. 기억은 시간 앞에서 영원하지 않고, 감정도 옅어지기 마련이지만, 그러나 의도적으로 이르게 잊는 건 다른 문제였다. 최소한 선생이 여러차례 보여준 성정과는 맞지 않았다.

그러나 히마리는 그러기를 바랬다. 학생의 수만큼의 책임감을 가지는 선생이, 그녀로 인해 더욱 힘들어하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선생은 거부했다.

"미안, 히마리. 그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어."

"역시 주제 넘었던 거죠? 다른 사람의 일을 마음대로……."

"잊지 못할테니까."

히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밀레니엄 학원의 천재 해커를 어떻게 잊겠어."

그건 히마리와 선생의 첫 만남 때 했던 자기 소개였다. 순간 히마리의 눈에 그 때의 선생이 겹쳐보였다.

히마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활짝 웃었다. 선생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교실에서의 일도. 모두.

"그러네요. 맞아요. 밀레니엄 최고의 청초계 병약 미소녀 해커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히마리는 선생을 다시 끌어 안았다. 치히로에게 안겼을 때처럼, 리오를 안아줬던 때처럼 따스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러나 몸에 느껴지는 감각은 전혀 달랐다. 더욱 단단하고, 넓어서.

'정말, 언제나 당신은…….'

안심이 되었다.

"저, 살아볼게요. 오래도록……최대한, 살 수 있을 때까지 말이에요."

히마리는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파도처럼 벅찬 감정이 가슴으로 올라와서,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눈물로 흘러내릴 것 같았다.

"후훗. 선생님, 제 생일 기억하고 계시죠? 태어나서 축하한다고, 제게 어울리는 축복을 듣고 싶어요. 당연히 선생님도 축하 해주시겠지요?"

선생은 히마리의 다짐이 얼마나 힘들지 짐작했지만, 결국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품 안에서 걱정을 감지한 히마리가 그를 안심시키려는 듯이 말했다.

"걱정마세요. 저는 포기를 모르는 초천재병약미소녀해커랍니다."

히마리는 이뤄지지 않을 사랑에 상냥하게 키스했다.

***

밀레니엄의 학생들을 비롯해 히마리를 아는 사람들은 자주 병실에 찾아왔다. 때로는 베리타스가, 어느 날은 세미나가, 또 어느 날은 엔지니어부, 트레이닝부가. 그리고 오늘은 게임개발부가 찾아왔다.

"빠밤빠밤! 게임개발부! 히마리 선배를 위로하기 위해 접속했습니다!"

병실 안에 들어온 게임개발부 부원들이 침울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와중에도, 아리스가 밝은 얼굴로 히마리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어서오세요. 주스가 있는데 마시겠어요? 종이컵은 저기에 있답니다."

히마리도 웃으며 아리스를 반겼다. 하지만 누가 봐도 얼굴은 초췌했고, 링겔과 호스를 단 몸은 쇠약해진 모습이 역력했다. 그러나 후배를 대하는 태도는 예전과 똑같이 상냥했다.

"괜찮은 겁니까. 히마리 선배? 아리스가 모두와 함께 치유 아이템과 스킬을 찾아볼까요?"

아리스의 순진무구한 말에, 히마리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리스에게 손짓했다.

"후훗,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답니다."

"어떤 방법일까요? 듣고 싶습니다! 히마리 선배를 위해서 꼭 알고 싶어요!"

아리스가 활기찬 동작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이자, 히마리는 아리스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댔다. 여전히 새하얗지만, 이제는 새버린 머리카락이 그녀들 사이로 드리웠다.

히마리는 오랫동안 고심했다.

아직 세상을 알아가는 작은 존재를 위해 전해주고 싶다. 무엇이라도 남겨주고 싶다. 히마리는 간절한 심정이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없어진 뒤에도 아리스는 더 많은 지식을 배우고 다양한 일을 마주하겠지만, 아리스가 겪게 될 최초의 이별은 가능한 훌륭하게 매듭짓고 싶었다.

아리스는 잊지 못할테니까. 슬픔을 배우더라도 슬픔에 지지 않기를 바라고, 슬픔을 극복하기를 바라며.

"아리스. 알고 있나요? 사람은,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히마리는 마법의 주문을 속삭였다. 아리스는 생경한 표정을 하고서 연거푸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리스는 히마리 선배의 말을 메모리했습니다! 이 세이브는 절대로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아리스는 당당히 선언했다. 약속을 한 뒤에는 새끼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가볍게 흔들며.

"고마워요. 아리스."

***

"치 쨩. 오늘도 우주를 유영하는 꿈을 꿨어요. 아프고 난 뒤부터 계속 꾼 꿈인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내용이 구체적으로 변하더라구요. 어쩌면 별을 쫓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네. 유서는 그 정도면 될 거 같아요. 방치되어 잊혀지는 것보단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는 편이 더 나은 법이니까요. 어머나. 울지 말아요. 치 쨩."

***

히마리는 약속을 지켰다.

끊이지 않는 고통에 속수무책으로 떠내려가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을 부여잡고 필사적으로 견뎌냈다.

문자 그대로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그녀는 살아서 12월 10일을 맞이했다.

"모두……축하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히마리는 고통에 몸을 떨면서 힘겹게 감사 인사를 했다. 아직은, 아직은 견딜 수 있었다. 여전히 희망은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 날 밤부터 히마리의 병세는 급속도로 악화했다. 진통제의 투여량을 최대한으로 높여도 닥쳐오는 고통을 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신경 하나마다 스며드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극심한 고통이 끝없이 이어졌다.

모두가 마지막을 직감했다.

사실 히마리에게는 몇 번이고 연명치료를 중단할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집일지도 모르고, 고집이라고 치부해도 반박하지 못하겠지만.그녀는 최대한 버텨보겠다며 거절했다.

히마리는 시련 속에서도 고통을 발판 삼아 더욱 피어나겠다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끝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

생일에서부터 열흘째 되는 밤, 히마리는 몇 번이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그녀는 몇 번이고 떠나가다가 돌아왔다. 하지만 생명의 추는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히마리! 듣고 있어? 히마리! 선생님은 금방 도착하실 거야!"

치히로가 히마리의 손을 잡고 외쳤다. 어찌나 애절하게 부르짖는지, 곁에 있는 누구도 차마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히마리! 나 기억해? 네 친구! 카가미 치히로! 기억하고 있잖아!"

버티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올해를 버티면. 아니, 오늘을 넘긴다면. 치히로는 희망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모두 부질없는 소원이라고 생각했다. 의사에게 오늘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는 말을 들었는데도, 그런 헛된 희망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치히로의 뇌리에 다른 생각이 스쳤다. 지금 누구보다 고통스러운 건 히마리인데, 그런 고통은 모르는 자신이 히마리를 붙잡는다고?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구원의 말을 건넨 건 히마리였다.

"기, 기 억, 하……고, 있, 죠. 치, 쨩. 내, 치, 친, 구……."

고통 속에서 한껏 일그러졌던 얼굴이 조금씩 미소를 찾았다. 져서 떨어지기 전의 백합처럼, 녹아내리기 전의 눈처럼, 촛점을 잃은 눈동자가 소중한 친구를 찾았다.

"저, 어, 렸, 을……때……."

히마리는 숨이 넘어갈 듯이 헐떡였다. 목에서 차오르는 숨소리를 뱉는 일조차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치히로는 가슴이 아려오면서도 히마리가 하는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도록 귀를 기울였다.

"어, 언덕, 너……머, 로……저물, 어……가, 해……를. 보……면, 서. 어, 어디……든……. 가, 갈, 수……있, 을 거, 라……고……. 새, 생, 각……했, 어……요. 아, 아, 직……가, 갈……수, 있……다, 고, 믿, 으, 니……."

치히로는 흘러나오는 비통함을 참지 못했다.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녀를 무겁게 짓눌렀다.

베리타스의 부부장이 일생동안 익힌 지식도, 치히로가 가진 모든 능력도 히마리를 구원하지 못했다. 떠나가는 친구를 무력하게 바라보며 슬퍼할 뿐이었다.

"히마리……."

마침내 히마리는 인정했다. 이제 손에 쥐었던 모든 것들을 놓아줄 때라고.

마지막 순간은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라고 정했는데. 깊은 무의식 속에서 여러가지 생각이 맴돌았다.

천재라고 받들어지던 어릴 적의 히마리는 자신이 고고한 존재로 말미암아 끝내 고독사에 이를 것 같다며 걱정했다. 당시의 그녀에게 끝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득히 먼 것이었는데도, 그녀는 그런 걱정을 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맞이한 결말은 우려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확실히, 쓸쓸한 끝은 아니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결말이라고 생각하며, 여정의 끝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을 맞이했다.

"에, 이, 미……."

히마리는 사랑해 마지 않던 후배를 바라보며 일그러진 입꼬리를 힘겹게 끌어올렸다. 해야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대신 짧은 한마디를 남겼다.

"즐, 거……웠, 어……."

에이미 또한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입술을 끌어올렸다.

"나, 나도. 정말로……즐거웠어. 히마리."

서로에게 작별인사를 마친 히마리의 손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천장 너머의 하늘은 보이지 않는데도, 해가 뜨기에는 너무나 먼 밤인데도 이상하리만치 따스하게 비치는 눈부신 햇살에 히마리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흐려지는 시야로 여러 얼굴들이, 다양한 장면들이 차례대로 스쳐 지나갔다.

선생과의 첫 만남.

후배와의 첫 조우.

악우와의 첫 다툼.

처음 사귄 친구.

처음 성공했던 해킹.

처음 풀어낸 수학문제.

처음. 처음. 처음. 처음. 다시 처음으로.

그녀는 짧지만 행복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그녀는 처음에 그러했듯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왔다.

시작에는 반드시 끝이 있으니.

아케보시 히마리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꿈속으로 잠들었다.

***

히마리는 별들이 빛나는 광활한 우주에 서 있었다.

휠체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 피었던 하얀 꽃을 닮은 헤일로도 없었다. 그녀를 방해하는 것 또한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두 다리로 걸었다.

두 다리로 걷는 감각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생소하고 흥미로웠다. 그녀를 붙잡았던 모든 고통에서 해방된 그녀는 드넓은 우주를 자유롭게 둘러보며 좇을 별을 찾았다. 아름다운 눈동자가 수많은 별들을 쫓았다.

자유로이 항행하던 그녀의 시선 끝자락에 익숙한 얼굴들이 닿았다.

에이미, 치히로, 선생, 그리고 수없이 많은 이들이 미지의 여로에 선 히마리의 마중을 나왔다.

"히마리 부장!"

저 멀리에서, 에이미가 손을 크게 흔들며 외쳤다.

"히마리!"

치히로도 마키, 코타마, 하레와 함께 울면서 히마리를 불렀다. 다른 이들도, 모두 입을 모아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리고 히마리가 화답했다.

"안녕. 안녕히. 모두들 안녕!"

히마리는 활짝 웃었다. 소중한 얼굴들 하나하나를 눈에 담으며 작별인사를 남겼다.

모두들 히마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히마리는 손을 높이 들고 활기찬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이 있다면! 다음의 여정에서 꼭……!"

히마리는 경쾌한 걸음으로 별을 쫓는 여정에 올랐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여로를 밝혔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목적지는 키보토스 너머, 드넓은 우주를 지나, 은하수 건너 멀리, 아득히 멀고도 먼 곳.

아케보시 히마리의 새로운 모험은, 이로써 끝나지 않을 끝을 향해──

***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 3학년생. 아케보시 히마리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예외가 있다면 오직 한 명, 하얀 수의를 입고 관 속에 누운 소녀 뿐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소녀를 추억하고 그리워하며 슬퍼했다. 그녀는 누군가의 선배이자, 누군가의 친구였고, 누군가의 동료였으며, 누군가에게는 학생이었고.

모두의 소중한 존재였다.

"히마리 선배는, 다시는 볼 수 없는 거겠죠?"

미도리의 손을 잡은 채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리스가 말했다.

"아리스는, 슬프다는 감정을 알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아리스는 아직 잘 모르지만요."

미도리는 눈물을 닦지도 못하고 훌쩍거렸다. 슬픔에 잠긴 건 모두 똑같았다. 아리스의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아리스는 히마리 선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슬픕니다."

아리스를 기특하다고 말해줄 히마리는 없다. 부드럽게 웃으며 칭찬해줄 히마리도,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돈해줄 히마리도 없다. 아리스에게는 처음으로 겪는 영원한 이별이었다.

"그래서……아리스는 히마리 선배를 잊지 않을 겁니다. 히마리 선배와 함께했던 소중한 시간도, 아리스가 전부 기억하겠습니다."

아리스의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아리스는 흔들리지 않고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그녀가 하는 말은 작별인사이자, 다짐이자, 약속이었다.

"누군가가 기억하는 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한 사람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히마리 선배가 아리스에게 가르쳐줬으니까요."

장례식이 끝난 뒤, 비밀을 함께 간직했던 세 사람은 히마리의 묘비 앞에서 떠나간 그녀를 추억했다. 선생의 눈시울은 여전히 붉었고, 치히로의 눈가에도 눈물 흘린 흔적이 역력했다.

에이미도 다르지 않았다. 슬픔의 자국이 흐릿하게 남아있었다.

"잘 가. 선생님. 치히로 선배. 난 조금 더 있다가 갈게."

에이미가 선생과 치히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생과 치히로는 에이미에게 몇 마디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남겨진 에이미는 묘비 앞에 쪼그려 앉아 묘비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이 묘비에 새겨진 자기애 가득한 문구를 한글자 한글자 느릿하고 선명하게 훑었다.

「베리타스의 부장이자 초현상특무부의 부장, 밀레니엄의 최고의 청초계 초천재 병약 미소녀 해커, 밀레니엄의 청초한 절벽의 꽃이자 모두가 동경하는 전지의 학위를 가진 미목수려한 재녀, 아케보시 히마리」

히마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문장만 봐도 그녀를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히마리가 항상 읊조리던 기나긴 자기소개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나 '사랑받았던' 이라는 흔한 문구는 없었다. 그녀는 명백하게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까. 그 대신 간결한 문구 하나만이 새겨졌다.

「모두 사랑해요」

에이미는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그녀를 부르는 청초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서 차마 일어나지 못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겠다고. 그녀는 중얼거렸다.

순간 바람이 불어오며 분홍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휘날렸다. 상냥히 스치는 바람이, 마치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촉하는 것 같았다.

에이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히마리라면, 그녀와 함께한 히마리라면, 분명 누군가가 그녀 때문에 슬픔에 잠겨 멈춰서는 걸 원치는 않을 것이다. 두 다리로 서서, 원하는 바를 힘껏 추구하고, 자신의 길로 나아가기를 바랄 거라고, 에이미는 확신했다.

그래서, 그녀는 멈추지 않기로 했다.

"안녕히. 히마리 부장."

걸어가던 에이미가 뒤를 돌아봤다. 한떨기 백합 같은 소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에이미를 부를 것만 같은 착각이 들어서, 그녀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에이미는 손을 작게 흔들었다.

"다음에 또 봐."

초천재미소녀해커의 죽음으로의 찬란한 여정 -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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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4.08.29창작

[소설] 초천재미소녀해커의 죽음으로의 찬란한 여정 -下-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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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DC
붕붕차차작가
게시물 25개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
게시일2024.08.29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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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7

나
ㅇDC
ㅇㅇ124.08.29

잘 읽었습니다

붕DC
붕붕차차작성자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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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DC
ㅇㅇ24.08.29

그래서 AI로 부활한 히마리 어딨음?

붕DC
붕붕차차작성자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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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DC
ㅇㅇ2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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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DC
붕붕차차작성자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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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3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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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차차작성자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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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4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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