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에 빛나는 샛별을 관측한 아이는 머나먼 우주를 상상했다.
화면에 가득한 숫자들 앞에서, 아이는 가상세계의 전능을 꿈꿨다.
천년 난제를 목도한 아이는 오랜 숙원의 실현을 열망했다.
소녀는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역사 속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였다.
사람들은 소녀가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불운히도 소녀는 선천적인 장애를 가졌지만, 오히려 그런 점마저 소녀를 더욱 신비한 존재로 만들었다.
모두는 당연한 듯이 그녀를 우러러봤다.
그녀는 전지하며, 결국 전능에 닿을 것이다.
그녀 자신조차,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케보시 히마리의 끝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녀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덧없는 꿈의 결말이 그녀를 찾아오고 있었다.
전지하나 전능하지 못 한 그녀는 자신을 구할 길을 찾지 못했다.
"모두들, 평온하신가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어둠 속, 한떨기 백합꽃이 피어난 것처럼 고요한 목소리가 울린다. 키보토스에 존재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을 동원해도 흔적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이 곳은, 히마리가 학원 안에 비밀리에 구축한 공간 중 한 곳이었다.
"밀레니엄 사이언스 스쿨의 베리타스의 부장 겸 초현상특무부의 부장. 또한 밀레니엄 최고의 청초계 병약 미소녀해커. 아케보시 히마리랍니다."
설원에 있으면 설녀, 숲속에서는 요정. 우아함을 자아내는 비단 같은 하얀 머리와 뾰족한 귀가 특징인 그녀는 오늘도 지극히 아름답다.
비록 다리는 불편하지만 항상 앉아있는 휠체어에는 밀레니엄의 최첨단 과학 기술이 고스란히 녹아있어, 오히려 히마리에게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한눈에 확연히 들어오는 장애를 안고 있음에도 결코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자신의 아름다움과 능력을 피력하는 소녀. 자칭 초천재 병약 미소녀해커인 그녀는 오늘부로 233번째 영상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총천연색의 꽃이 저마다 개화하는 4월의 이른 아침이랍니다."
히마리는 입술에 손가락을 올리며 꽃잎을 활짝 연 백합처럼 웃었다. 이 영상을 보게 될 사람은 누구일까. 히마리는 대상을 특별히 상정하지 않았다. 뭐랄까 이건, 누군가를 향한 메시지보다는 불특정다수에게 남기는 흔적에 가까웠다. 히마리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들 사이를 거닐다보면……혹여 그 사이에서 저를 찾지 못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게 되네요. 후후."
상세한 내용이나 문장을 이루는 단어는 날마다 바뀌고는 했지만, 어느 말이든 그녀가 읊조리는 문장에는 특유의 자신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부담스러울 수는 있어도 무례하지는 않은, 언제나 떠오르는 샛별과 같이.
"아, 기우로군요. 화사한 꽃들 사이에서도 청초한 저는 더욱 빛날테니까, 봉접수향의 초천재미소녀를 찾지 못하는 불상사는 없겠지요."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식의 자화자찬을 늘어놓는 것조차 망설일 터다. 하지만 히마리는 단어 하나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읽어내렸다. 내로라하는 천재들이 모인 밀레니엄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인 그녀를 막아 세울 만한 걸림돌은 존재하지 않았다.
"네. 그러면, 오늘의 날씨는……윽."
그녀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녀 자신 뿐이다.
"콜록, 콜록! 케흑. 끄흐윽……!"
히마리는 입을 틀어막고 격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몸을 웅크린 채로 한참동안 콜록거리다, 기침이 멎고 나서도 부들부들 떨면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 하아. 흐으. 하아……."
땀으로 젖어든 가녀린 몸은 흘러내리는 마냥 흔들린다. 몇 번이고 가쁜 숨을 몰아내쉬고서야 히마리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입을 감싸쥔 손을 서서히 내렸다.
"하아. 후우."
벌써 몇 번이고 겪은 일이지만, 감성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은 이미 알고 있다. 입 안 한가득 느껴지는 비릿함에 익숙해진지도 오래였다.
"아, 하아. 하아."
그러나 은은하게 명멸하는 모니터를 시선에 담자마자, 그녀의 마음은 산산이 무너졌다.
"하아, 아, 후우……."
커다란 화면에 비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아케보시 히마리다. 또한 밀레니엄의 제일 가는 천재이며…….
입에서 붉은 피를 쏟는 시한부의 소녀였다.
"정말이지. 이건. 으윽……."
히마리는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심호흡을 이어갔다.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 묻은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한참동안 호흡을 가다듬은 뒤에야, 그녀를 잠식하던 두려움이 가라앉았다. 히마리가 허공에 손을 뻗어 피아노를 치듯 손가락을 움직이자, 전신슈트의 전극에 드론이 반응하며 날아왔다.
히마리는 티슈를 건네 받은 동시에 녹화를 종료했다. 입가를 닦는 와중에도, 화면에 비친 핏기 없는 얼굴이 그녀를 노려보는 것 같았다.
"……아직."
히마리는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향해 중얼거렸다.
"아직은……아냐."
해가 지면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떠오르며 시간이 흘러간다.
그러나 끝은 아직 오지 않았다.
히마리는 그 사실에서 위안을 얻었다.
***
히마리는 스스로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분야를 섣불리 판단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는 항상 자부심을 가지지만 결코 오만하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히마리는 비밀이 새어나갈 위험을 무릅쓰고 여러 자치구의 의료 기관을 전전해왔다. 이미 증상이 검사 결과 질병은 초기 단계였다. 얼마든지 낙관할만한 단계였다.
하지만 병세를 치료할 방안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수많은 처방과 치료는 그녀가 겪는 증상을 약화하거나 고통을 잠재우는 수준에 그쳤고, 그럼에도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서 무엇하나 그만둘 수 없었다.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쓰러질 것 같은 초전도 병약 절세미소녀에게 약은 필수 아이템이죠.'
히마리는 한 손으로 다 세지 못 하는 약들을 복용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속삭였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그랬다가는 비참함에 짓눌려 쓰러지고 말테니까.
부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병세는 점진적으로 악화했다. 끝은 아직 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띄게 가까워졌다.
히마리는 고통과 불안함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필사적으로 평온한 면모를\ 보이려 했다. 비록 학생회장과도 같은 높은 지위에 앉지는 않았지만, 데카그라마톤 추적 및 조사부터 색채의 침공을 저지하는 등. 그녀는 키보토스에서 여러 중책을 맡고 있었다.
밀레니엄 어느 곳에서든 드높은 센터를 관측할 수 있는 것처럼-히마리 또한 키보토스에서 무너져서는 안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였다.
그래서, 아케보시 히마리는 항상 굳건해야 한다. 강건해야 한다. 고고한 여신으로 존재해야 한다.
타인을 위해, 모두를 위해.
밀레니엄에서 제일 명석한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히마리는 이즈미모토 에이미와 함께 데카그라마톤 조사를 마치고 복귀하는 중이었다. 그녀들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은 어느덧 겨울이 지나 찾아온 봄의 한낮을 즐겁게 만끽했다.
휠체어를 탄 히마리와 함께 걷는 에이미는 초현상특무부의 유일한 부원이자, 부장인 히마리보다 먼저 부에 몸을 담은 1학년 후배였다. 특이할 점으로 언제나 과다한 노출의 차림을 했는데, 거의 드러난 가슴은 그녀가 걸을 때마다 푸딩처럼 흔들렸다.
"부장. 안색이 안 좋아 보여."
평탄한 어조에는 특별한 감정은 실려 있지 않다. 특유의 고저차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에도, 히마리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가요?"
"응. 그렇게 보여."
밀레니엄의 매끄러운 도보 위를 움직이던 휠체어가 멈추자, 에이미도 그대로 멈춰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머뭇거리던 히마리는 곧장 자연스러움을 가장해 표정을 고쳤다. 이윽고 뻔뻔스러울만치 여유로운 얼굴이 에이미에게로 향한다.
"후후. 병약계 미소녀에게 약한 면모는 기본 소양이랍니다. 이렇게나 눈에 보이는 병약 속성은 시대를 뛰어넘는 스테디셀러니까요."
그녀의 말을 들은 에이미가 '또 시작이네, 부장' 이라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자, 그제서야 히마리는 약간이나마 안도했다. 이전에도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이 있었지만, 히마리는 그 때마다 익숙한 자아도취 가득한 언행으로 어떻게든 얼버무리고는 했다.
"아니라면……불가사의의 매력을 자랑하는 초천재 해커의 병약미가 오늘따라 더욱이 빛나는 탓에, 심장이 가련히도 두근거렸나요?"
눈동자를 빛내며 나긋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덧붙인 그녀는 이마에 손등을 얹고 과장된 동작으로 휠체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 이토록 죄많은 꽃의 이름은 아케보시 히마리랍니다."
히마리가 느끼는 메스꺼움은 부담스러운 멘트 때문은 아니었다. 약의 부작용일까, 병세의 증상일까, 아니면 늘어놓은 거짓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그녀를 괴롭힌다는 사실은 결국 같았다. 언제까지 감출 수 있을지, 노심초사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나날은 가면 갈수록 잦아졌다.
"아니. 오늘만이 아냐."
히마리는 저도 모르게 가디건을 잡은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에이미는 유독 이런 쪽으로 감이 좋았다.
"최근 2주 동안. 부장은 줄곧 그랬어."
에이미는 담담하게 쐐기를 박았다. 히마리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어깨에 걸친 가디건을 정돈했다. 눈을 내리깔아 시선을 피하고, 목소리에 고뇌가 묻어나지 않도록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는.
"아마도……병약계 미소녀 포인트가 오른 모양이네요."
어렵게 말을 내뱉은 뒤에야 다시 휠체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에이미도 재차 히마리를 뒤따랐다. 밀레니엄의 보도 위를 휠체어가 부드럽게 움직이는 내내, 히마리의 마음은 쉴새없이 요동쳤다.
'만약, 비밀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화를 낼까요?'
원하든 원치 않든, 그녀의 질병은 언젠가 모두에게 밝혀질 것이다. 하지만 히마리 본인은 아직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준비를 미루고 있다는 말이 맞겠지만. 히마리는 지었다.
'차라리 화를 낸다면 좋을지도 모르겠네요.'
히마리는 에이미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차분히 가라앉는 듯한 자주색의 눈동자를 바라보다보면, 저도 모르게 비밀을 털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애써 에이미를 외면했다.
그러나 다가오는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
히마리는 우주를 헤엄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은하수를 흘러내려가는 동안 수많은 별들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인지 불편한 다리도 지금은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녀는 행복한 얼굴로 광활한 우주를 유영했다.
꿈속에서는 괴로움도 고통도 없었다.
***
"히마리, 괜찮아?"
어두컴컴한 시야 사이로 선생이 갑작스레 들어왔다. 그제서야 히마리는 깜빡 졸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둥거렸다. 약의 부작용 탓인지 그녀는 종종 갑작스런 졸음에 빠지고는 했다. 정신을 차린 히마리는 이어서 말을 꺼냈다.
"앗, 그, 따, 딱히 졸고 있었던 건 아니랍니다."
다소는 당황한 탓도 있지만, 히마리는 빠르게 부정하는 모습을 연기했다. 어설픈 연기는 오히려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선생은 사뭇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안색이 좋지 않아서 말야. 얼굴도 창백하고."
평소였다면 장난스러운 말을 건넸을텐데. 선생은 걱정어린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며 우려를 표했다. 혹여나 병세를 들킬까 두려웠던 히마리는 빠르게 둘러댈 말을 생각해냈다.
"괜찮답니다. 선생님. 아, 청초한 절벽의 꽃의 가련한 모습에 반하셨다면야. 초천재병약미소녀해커로써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만요. 후훗."
"잠깐 실례할게."
이마에 올려진 손은 조금 차갑다. 몸에 감도는 미열 때문이라고, 히마리는 무심코 짐작했다. 그녀에 비해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이마를 쓸어내리고, 식은 땀을 훔쳤다.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히마리는 이마에 닿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열이 있는 거 같은데. 에이미. 이리로 와줄래?"
선생이 손짓으로 저편에 있는 에이미를 부르자, 그제서야 히마리는 세 명이 함께 움직이고 있던 현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느 학생의 제보를 받고, 조사를 위해 밀레니엄 자치구 외곽으로 나와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선생님?"
"히마리의 몸이 안 좋아보여서 말야. 열도 있는 거 같고."
빠르게 다가온 에이미에게 선생은 걱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손은 여전히 히마리의 이마를 상냥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음……확실히."
턱에 손을 올리고 고민하는 에이미의 모습을 보자, 히마리는 가슴이 조여드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두 사람이 나누는 말은 평범한 대화일텐데, 마치 취조를 당하는 것 같았다. 한낱 자격지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러한 질척한 감정은 쉽게 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 오늘의 일정은 여기서 마치는 건 어떨까."
효율을 중시하는 에이미답게, 그녀는 효율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선생은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오늘 내로 마무리 해야 할 일은 아니지. 아무래도 다시 날짜를 정해서 오는 게 낫겠는데."
선생의 시선이 에이미에게서 다시 히마리로 향했다. 그 때까지도 히마리의 이마에 올려진 손은 그대로였다.
"히마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어?"
선생은 히마리의 의사를 물었다. 만일 그가 히마리의 병세를 알았다면 강제로라도 철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병을 숨긴 건 히마리였으니, 선생은 히마리를 향해 최대한의 선의를 보여주는 셈이다.
"그건……."
히마리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녀의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자칫 병을 들킬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말이지 비겁한 여자이지 않아요?'
우트나피쉬팀의 배에서 그녀는 토키를 버려두고 도망친 리오를 비겁한 여자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정말로 비겁한 쪽은 누구일까.
토키가 시달릴 죄책감과 괴로움을 저버린 리오. 모두가 시달릴 죄책감과 괴로움을 외면하는 자신.
만일 죄의 경중을 잰다면- 천칭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괜찮습니다. 선생님. 밀레니엄 최고의 병약 미소녀에게 이런 면모는, 특별한 이벤트 같은 거니까요? 절벽의 꽃처럼 위태롭고도 가련한 모습에, 선생님마저도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무너지는 얼굴은 미소로 감춘다.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고통은 약으로 잠재운다. 하지만 닥쳐올 미래를 외면할 방법은 있을까?
"다른 이의 발목을 잡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의 몸 상태를 파악하는 건, 병약 속성을 가진 천재 미소녀해커의 기본 소양이랍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지체없이 말씀드릴테니까요."
평온함을 가장하기 위해 쥐어짜낸 목소리가 화살처럼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하지만 히마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건, 다름 아닌 그녀에게 향하는 올곧은 눈동자들이다.
"약속이야."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띄운 선생은 히마리의 이마에서 손을 떼었다. 에이미도 선생도 히마리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히마리의 말을 듣고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건 히마리를 향한 신뢰였다.
'나는 이런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히마리는 내내 떨리는 손을 감췄다. 다행히도 조사를 마칠 때까지 특이사항은 발생하지 않았다.
히마리는 선생과 헤어지고 에이미까지 돌려보낸 뒤, 개인공간에 들어서자마자 급하게 비상약을 꺼냈다.
약을 삼키고, 고통이 가라앉기까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히마리는 몸을 기울인 채로 흐느꼈다. 제각각 명멸하는 모니터들만이 홀로 남은 그녀를 비췄다.
그녀는 그녀가 비판했던 리오와 다른 방식으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었다.
***
"아케보시 씨. 가급적 무리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비밀리에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병원의 병실 침대에 앉아 투석 치료를 받는 히마리에게 로봇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병원의 의료진도 히마리의 이름은 잘 알고 있었고, 그들에게는 학원 안팎에서 그녀가 하는 일들도 전해지고는 했다.
"어머, 전혀 무리하고 있지 않은 걸요."
히마리는 미소를 지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굵은 바늘을 꽂을 때마다 느껴지는 고통에도 제법 무던해진지 오래였다. 복막투석과 달리 혈액투석은 주에 세 번, 몇 시간 씩이나 필요했지만, 차라리 이쪽이 비밀을 유지하는 데에는 유리했다. 특히 초현상특무부의 부장이 된 뒤부터는 에이미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난 이유도 있었다
"이 병실은 창문이 없는게 아쉽네요. 소설의 가련한 주인공처럼 마지막 남은 잎새를 바라보며……처연하게 아름다움을 뽐내야 하는데 말이에요."
히마리는 검지 손가락을 뻗어 텅 빈 벽을 가리켰다. 의사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곤란함을 감추려는 미소를 지었다.
"그, 그렇군요."
그는 언제나처럼 히마리의 차트를 체크했다. 과거에는 히마리의 어법에 당황하기 일쑤였건만, 역시 무엇이든 적응하게 되어있는 법이다.
"얼마나 남은 거 같나요?"
하지만 저런 얼굴로 태연히 자신의 운명을 물어오는 말에 익숙해질 겨를은 없었다.
"그게……."
"제가 직접 확인하는 일은 없었으면 해요. 아시다시피, 초천재 병약미소녀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으니까요."
히마리는 패널을 두드리려는 마냥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러니 편히 말씀해주세요."
머뭇거리던 그는 한숨을 삼키고는 대답했다.
"이번 해를 넘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 라고 밖에는……."
의료진에게 책임은 없다. 당연히 그가 미안해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환자에게 그런 통보를 내리고도 멀쩡할 의사는 없다. 의사가 말을 흐리며 고개를 돌리자, 히마리는 또렷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가인박명, 혹은 미인박명이라는 말에 대해 아시죠?"
자신을 자주 미소녀라 표현하는 히마리다운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을 알고 있는 그는 그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보통은 미인의 기구한 운명을 뜻하는 말이지만. 거기에는 다른 용례도 있다고 해요."
오밀조밀한 입술이 옅은 미소를 띄우며 움직였다.
"단어가 뜻하는 건 아름다움이 아닌 재주. 즉, 평생 쓸 재주를 미리 당겨서 썼기 때문에……일찍 죽어버리고 마는 천재에 대한 이야기라고 해요."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골계스러운 블랙조크였다. 히마리는 입꼬리를 삐죽거리며 웃었다. 반면 의사는 웃지도 못하고 히마리의 눈치만 살폈다.
"그, 그렇습니까."
그가 무거운 입술을 떼고 난 뒤부터는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방금의 말이 심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히마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았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들판 위에 내려앉는 눈처럼, 길다란 속눈썹이 난 눈꺼풀이 지긋이 감기고.
고요한 가운데, 의료기기가 내는 비프음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
봄비가 주륵주륵 쏟아지는 날이었다.
차츰차츰 온도가 높아지던 공기는 비가 내리면서 쌀쌀해졌다. 그러나 밀레니엄 곳곳의 건물 내부는 최첨단 시스템에 의해 적정한 온도를 항시 유지했다.
그런 최첨단 시스템으로 도청과 감청을 원천봉쇄한 방에 히마리, 에이미, 선생, 그리고 베리타스의 부부장이자 히마리의 친구인 카가미 치히로가 회의를 위해 모였다. 회의 주제는 데카그라마톤 조사 과정에서의 보안 문제였다.
"많이 피곤해보이는데. 혹시 어제도 늦게 잔 걸까? 늦잠은 몸에 좋지 않단다."
치히로의 눈가에 선명히 남은 다크서클을 본 선생이 넌지시 말했다.
"조금 피곤하긴 한데……문제는 없어. 새벽에 갑자기 해야 하는 일이 생기는 바람에 일을 처리 하느라 조금 늦게 잤을 뿐이야. 그리고……."
치히로는 짧게 잘라낸 곱슬거리는 머리카락 가닥의 끄트머리를 손가락으로 꼬아대다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야근이라면 오히려 선생님 쪽이 더 걱정되는데 말이지."
치히로는 손에 든 캔커피를 입가에 대고 들이켰다. 자주 즐겨 마시는 익숙한 커피의 맛이 혀를 지나 목구멍 안으로 흘러갔다.
"으흠. 그게 그렇게 되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치히로의 말에 찔린 선생이 헛기침을 하며 눈을 돌리자마자, 맞은 편의 에이미도 치히로에 동참했다. 팔꿈치를 테이블에 올려 깍지 낀 위에 턱을 괸 그녀가 덧붙였다.
"쉬어야 한다면 선생님 쪽이 더. 샬레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치히로도 야근을 자주 하는 편이지만, 선생이 야근을 하는 빈도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선생은 더할 나위 없는 정론에 반론하지 못하고 뒤통수만 긁적거렸다. 그러다가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본다.
"너희들 말대로 나도 쉴 수 있으면 좋겠다."
선생은 쓴웃음을 지었다. 노동시간만 따져도 선생의 근무시간은 흔히 말하는 사축과 다를 게 없었다. 물론 샬레의 선생이 가지는 권한은 여느 회사의 사원은 물론, 대기업의 회장도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그는 그런 권한을 남용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걱정해줘서 고맙단다. 노력은 해볼게. 하지만 너희는 아직 학생이잖니."
그는 언제나와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걱정어린 눈으로 여전히 침묵하는 한 소녀를 바라봤다.
"……."
히마리라면 온갖 화려한 미사여구를 붙여가며 다양한 말을 꺼냈을텐데. 지금 그녀는 고개를 기울인 채로 아무 말도 없이 식은땀만 흘렸다. 누가 봐도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히마리. 정말 괜찮겠어?"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던 히마리가 고개를 들고는 반쯤 감긴 눈으로 선생을 쳐다봤다.
"괜찮, 아요."
그러나 떨리는 입꼬리를 어설프게 끌어올리는 모습은 선생에게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비단 선생에게만 그리 보이는 것은 아니라, 에이미와 치히로도 똑같은 심정이었다.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는데."
치히로가 약간 신경질적인 말투로 나섰다. 잠을 많이 자지 못해서 말을 세게 한 건 아니었다. 소중한 친구가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다.
스스로를 '병약 미소녀' 라고 자주 포장하고는 하지만, 히마리는 실제로 병약한 소녀였다. 특히 예전부터 그녀와 친하게 지낸 치히로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히마리가 무리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히마리. 지금 아픈거 맞지."
안경을 쓴 치히로의 올곧은 시선이 향하자, 히마리는 명치를 꿰뚫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 이유가 아니다. 오늘 그녀는 저번보다 더욱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의사의 말대로 그녀의 상태는 점차 악화했고, 낙차는 서서히 커져갔다.
"치 쨩."
히마리는 필사적으로 웃었다. 이미 그녀의 몸이 좋지 않다는 건 들키고도 남았지만, 그런데도 계속해서 고집을 부린다.
"치 쨩도……병약, 미소녀의 매력에 반한, 건가요……?"
아프지 않은 척,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치히로를 더욱 화나게 했다. 그녀가 히마리의 병세까지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히마리가 아픈 몸으로 고집을 부린다는 건 명확했다. 다만 치히로는 아픈 친구에게 화를 낼 사람은 아니었다.
"고집 부리지 말고. 어린애도 아니고 병원에 가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치히로는 일부러 짜증 섞인 목소리로 히마리를 도발했다. 오래 알고 지냈던 친구 사이답게, 그녀는 히마리가 어떤 말에 반응하는지도 잘 알았다. 에이미나 선생이라면 하지 못 할 말도, 그리고 하지 않았을 말도 치히로는 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히마리를 향한 치히로의 신뢰였다. 이렇게 말해도 자존심을 세우면서 받아들일 거라는 신뢰. 평소였다면, 하다못해 어제였다면 치히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의 히마리는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치히로의 실책은 그것 하나였다.
"가기 싫다고는 안했는데요? 만년설보다도 새하얀 초천재 병약미소녀 해커는, 자신이 언제 녹아내릴지 알고 있답니다."
투정하는 투는 아니었다. 얼핏 듣기에는 독특한 비유를 하네, 수준의 말이다. 그러나 세 사람은 히마리가 화를 내는 걸 알아챘다. 특히 히마리와 오래 알고 지냈던 치히로는 아예 확신이 설 정도였다. 하지만 치히로는 히마리가 화를 낸다는 사실보다 이후에 이어진 말이 더욱 신경 쓰였다.
자신이 언제 녹아내릴지 안다고?
"히마리. 그게 무슨 말이야."
기묘한 불길함을 느낀 치히로는, 히마리를 자극하려던 것도 잊고 되물었다. 터무니 없는 의문일텐데, 그녀는 참을 수 없었다. 녹지 않는다는 만년설을 두고 한 잘못된 비유 탓일까. 치히로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스멀스멀 느껴지는 불안함을 떨치고자 입술을 움직였다.
"너, 혹시……."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니, 착각이었으면 한다. 최악의 상황을 떠올린 치히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그녀가 떠올린 최악은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음? 무슨 말씀인가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목소리다. 손가락을 입술에 올리고 처연한 흉내를 내며 웃는 은회색의 눈동자를 보자마자, 치히로는 안도감이 들었다. 착각일 뿐이다. 뭔가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앙숙인 리오에게 독설을 할 때조차 비속어와 거리가 먼 단어를 골라내는 히마리니까.
"아니, 뭐. 별 일 없다면 다행이야."
치히로는 안심했다.
"그래도 지금 컨디션은 딱히 좋아보이지 않거든. 아무튼 병원에 가는 건 어떨까 하는데 말야."
안심하려 했다.
"윽. 콜록! 콜록! 크흡!"
히마리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쥐고 기침을 하자, 치히로는 역시나 하는 표정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도 걱정스러운 얼굴로 히마리를 보며 일어나려는 찰나, 치히로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그러니까 고집부리지 말라고 했잖아. 회의는 다음에 하면 되니까……."
치히로는 가방 속에서 티슈를 꺼냈다. 그리고 티슈 몇 장을 뽑아 건네는 순간, 히마리의 손가락 사이로 검붉은 액체가 주륵, 흘러내렸다.
"……히마리?"
치히로도 에이미도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꼼짝하지 못했다. 그나마 선생이 빠르게 휴대폰을 품에서 꺼냈다.
"부장?"
어쩌면 장난일지도 모른다. 꽤나 지독한 장난이라고, 치히로와 에이미는 무심코 생각했다. 아니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코피라도 흘린 걸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입에 머금은 토마노 주스를 흘렸다거나.
토마토 주스는 마시지 않았을텐데?
"아, 아니, 이건. 윽. 아……."
얼굴을 감싸쥔 손을 치우자 피투성이가 된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피비린내가 났다. 히마리의 몸이 그대로 옆으로 기울었다.
"히마리! 정신차려! 히마리!"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선생의 목소리를 끝으로, 히마리의 의식은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잠겨들었다.
***
깨어난다는 것은 이상한 감각이다. 수면 아래에서 떠오르는 듯한 그런 감각일까.
히마리는 잠에 들 때마다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대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다면 어떡할까. 영원히 눈뜨지 못한다면. 누구에게도 작별인사를 남기지 못한다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잊기 위해 히마리는 항상 최선을 다했다. 치료와 투약을 꼬박꼬박 빼먹지 않았고, 선생과 다른 학생들을 돕는 등, 여러가지 일에 그녀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자신의 병세를 알릴 용기는 내지 못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 말처럼, 그런 비밀을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다면 모두에게 상처가 될 거라는 걸 히마리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미래가 결정된 것 같아서, 도저히 비밀을 말하지 못했다.
결국 도피의 결과는 이렇다고 자책하던 히마리는 무의식과 의식의 틈새에서 서서히 현실로 빠져나왔다.
"으응……."
무거운 눈꺼풀을 조심스럽게 뜨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고식적인 표현으로 말하자면 '익숙한 천장'. 작은 물결무늬가 규칙적으로 새겨진 흰색 타일 천장이었다.
"여긴……?"
익숙하지 않은 매트리스의 감촉이 느껴진다. 무거운 상체를 일으키던 그녀는 팔뚝에 꽂혀있는 카테터를 뒤늦게 발견했다. 시선으로 관을 따라가보면 수액팩에서 관 안으로 떨어지는 투명한 수액이 보였다.
히마리는 어지러운 머리로 기억을 되짚었다. 그녀는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어디에서? 밀레니엄의 회의실에서.
누구의 앞에서?
"윽……."
머리가 깨지는 듯한 두통은 분명 병 때문만은 아니다. 히마리는 추욱 늘어진 새하얀 머리카락 아래 관자놀이를 감싸쥐었다. 파리해진 입술 사이로 괴로운 신음이 새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거에 감사해야 할까요. 히마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빗겨 넘기려 손을 들자, 품이 넓은 병원복 소매가 팔을 타고 내려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히마리는 기억을 되짚고 또 되짚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눈 앞이 자꾸만 흐려졌다. 스스로의 실책을 돌리기 위해 실수를 찾으려 할수록 코 끝이 찡해졌다.
"결국……숨기지 못한 거겠죠."
선생과 치히로, 에이미는 누군가의 비밀을 여기저기에 알릴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히마리는 그들에게조차 한사코 비밀을 숨기고 싶어했다.
어째서일까.
히마리라고 해서 고통을 숨기고 병세를 감추는 일이 편했을 리는 없다. 누군가에게 위로를 받고 싶지 않을 리도 없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비밀을 밝히지 못했다. 사랑하는 이들을 걱정시킬 것 같아서. 과거 장애를 가진 자신에게 내려지던 동정의 시선을 참을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리고…….
끝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어서.
아니,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히마리는 숨겼다. 차츰차츰 다가오는 끝을 감추고, 스스로를 기만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럴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녀는 시시각각 옥죄어오는 운명에서 도망치지 못했다.
이제는 다가오는 끝을 받아들일 차례였다.
죽음은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고 했죠. 히마리는 나지막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세요."
그리고는 닫혀 있는 문을 향해 말했다.
"치 쨩."
약간의 텀을 두고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바로 치히로였다. 의료기기를 통해서 히마리가 깨어났다는 정보를 받았음에도 병실 안으로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망설이던 참었다.
"괜찮아?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치히로는 횡설수설하며 곱슬머리를 더욱 헝클어트렸다. 이따금 그랬지만, 오늘따라 치히로는 더욱 피로가 역력한 얼굴이다. 히마리는 그 이유를 금방 짐작했다.
"괜찮아요. 전지의 칭호를 가진 초천재미소녀에게도 조금 놀랄만한 일이지만, 아예 상정하지 않았던 일은 아니랍니다."
아무리 정보를 통제한다고 해도, 최소한의 통로는 남겨두어야 했다. 히마리는 유사시를 대비해 긴급 상황에는 병원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의료 정보를 전송받을 수 있도록 해두었다. 빠른 조치가 취해진 것으로 봐서는 그런 조치는 충분히 유효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에게 비밀이 밝혀지는 건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하아……. 그래?"
치히로는 별 다른 말은 없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앉았다. 평소에 비해 짙어진 다크서클을 본 히마리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묻지 않는 건가요?"
"네가 말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치히로는 깊은 숨을 내쉬고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말하고 싶지 않다면 묻지 않을게. 네가 말하고 싶다면 말해도 좋아. 괜찮다면 말야."
치히로는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히마리가 쓰러지는 걸 보고 당혹감을 느꼈고, 구급차를 부르며 초조함을 느꼈다. 그리고 자동으로 전송 된 의료 정보를 보고는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 분노는 히마리를 향한 건 아니었다. 히마리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자신과 히마리에게 닥쳐온 불운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치히로는 억지로 웃었다. 그런 분노를 히마리에게 드러내서는 안되므로.
"네. 치 쨩. 저는 불치의 병에 걸려 있답니다. 즉, 불치병에 걸린 불세출의 초천재병약미소녀인 셈이죠."
"이런 와중에도 정말. 히마리답다니까."
히마리가 입을 가리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자, 치히로는 피식, 하고 작게 웃었다.
"언제나 대담하고,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는 초천재병약미소녀. 그게 히마리니까."
한창 어두웠던 분위기가 조금은 밝아지는 듯 하다. 이대로 없던 일로 돌아간다면 좋을텐데. 치히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에.
"그래서, 언제부터였어?"
치히로의 말에 히마리는 잠깐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치히로를 바라봤다. 투명한 눈빛이 오랜 친구에게로 향했다.
"작년 초부터 알게 되었답니다."
치히로는 허벅지를 감싼 치마 위에 올린 두 손을 꼼지락거렸다. 베리타스에서 히마리와 같은 나이인 3학년이자, 부장인 히마리가 임시로 초현상특무부로 옮겨간 뒤에는 부장의 역할까지 도맡아 하는 그녀에게도 이 정도의 일은 처음이었다.
"정말……불치병인 거야?"
질문 하나하나가 히마리의 가슴을 후벼파지는 않을까, 치히로는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히마리는 여전히 평온한 태도를 보였다.
"네. 불치의 병에 시달리는 가련한 청초계 히로인이에요. 사랑스럽지 않나요? 후후후."
치히로가 재차한 질문에 히마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똑같이 대답했다.
"아- 의사한테서 올해를 못 넘길 가능성이 높다는 말도 들었답니다."
"그, 그렇게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거든?"
터무니 없는 고백을 들은 치히로는 당황스러운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치 쨩.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히마리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러나 눈가에 맺힌 것은 분명 눈물이다. 치히로는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기울여 더욱 가까이로 다가갔다.
"나도 몰라."
손이 손을 잡았다. 치히로는 맞잡은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러니 알아가야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어떻게 해야 할지. 선생님에게도 물어봐야겠고……. 아, 선생님도 이 일에 대해서 알고 계셔."
히마리의 병실로 찾아오기 전에 이런저런 것들을 검색해보기는 했지만, 갑작스레 닥친 일에 갈피를 못 잡는 건 당연했다. 치히로의 솔직한 대답에 히마리는 피식, 웃었다.
"그럴 거 같았어요. 어쩔 수 없죠."
"에이미도 알고 있고."
그러자 히마리의 얼굴 위로 그늘이 졌다.
"……에이미만큼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는데. 아직 1학년이잖아요."
비록 최근 짧은 기간동안이라고 해도, 가장 가까이에 있던 에이미에게 비밀을 유지하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사코 비밀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유는 있었다.
결국 지키지 못했을 뿐이지만.
"에이미한테는 절대……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히마리는 오랫동안 스스로를 이기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만일 오늘 그녀가 갑작스레 죽었더라면, 남겨진 사람들은 어떤 슬픔을 감싸안았을까. 예측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예측 범위 내의 일은 알려야 하지 않을까. 오랜 고민에도 불구하고, 결국 여기까지 와서 비밀을 들키고 말았다.
히마리의 눈동자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저는, 어떻게……해야, 하죠……?"
"괜찮아."
치히로는 그녀의 우려를 부정하듯 히마리를 끌어안았다.
"전부 괜찮아질 거야."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아서,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그러니까 걱정하지마."
히마리는 모든 괴로움을 토해내며 아이처럼 울었다. 치히로의 교복 위로 눈물 흔적이 남았다.
***
얼마 지나지 않아 히마리는 퇴원했다. 하지만 아직 세 사람 외에는 어느 누구에게도 병에 대해 알리지 않았다. 히마리가 그런 결심이 들 때, 비로소 모든 사실을 밝히자는 것이 의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미 병실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눴던 치히로는 말할 것도 없고, 선생 또한 히마리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전해듣고 당황하면서도 침착하게 히마리와 대화를 나눴다. 그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착잡해하면서도, 어른답게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하지만 히마리는 에이미 만은 똑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병세를 숨긴 거라면, 에이미는 말그대로 속인 거니까.
물론 에이미는 히마리에게 눈치를 주거나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에이미로서는 불치병에 걸린 선배에게 화를 낼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히마리를 가까이에서 보살피는 동시에, 히마리가 비밀리에 받았던 치료와 진료를 새로이 스케줄에 추가했다. 다른 말을 하지 않은 건 그녀 나름의 히마리를 위한 배려였다.
그렇게 언뜻 보기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하지만 히마리는 그 날 이후로 계속해서 악몽에 시달렸다.
어딘지도 모를 어둠 속에서 모두는 그녀를 등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홀로 뒤쳐진 히마리는 휠체어를 붙잡고 모두를 쫓아가기 위해 애를 썼지만, 이상하게도 휠체어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다급해진 그녀는 휠체어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발을 뻗자마자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가지말아요. 부디……!"
바닥에 엎어진 채로 허우적거리며 손을 뻗는 그녀의 눈에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에이미?"
에이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이미. 저,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어서. 그러니까 제발……"
그녀의 애처로운 부탁에도 불구하고 에이미는 서서히 멀어졌다.
"에이미! 날 버리지 말아요! 에이미!"
히마리는 손을 뻗으며 애타게 소리쳤다. 그러나 에이미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멀어졌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 히마리 혼자 남겨졌다.
"에이미! 아……! 아아……!"
눈을 뜨면 여전히 어둠 속이다. 밤에 익숙해진 눈은 어둠 속의 침실을 빠르게 인지했지만, 히마리의 심상은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자마자 급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에이미를 호출하는 버튼을 눌렀다.
"에, 에이미!"
한 번만 눌러도 되는 버튼이건만, 계속해서 누르고 또 누른다.
"에이미! 에이미이……!"
히마리에게는 잠깐의 시간도 영원처럼 느껴졌다. 어느 누구도 그녀를 찾지 않을 것이다. 결국 홀로 어둠에 남겨질 거라는, 그런 생각을 뿌리치지 못했다.
아케보시 히마리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겠지. 누구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하고, 모두에게 잊혀지고 말 것이다.
우당탕!
"부장. 불렀어?"
커다란 굉음에 이어 에이미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리고 불이 켜지자마자 방을 집어삼켰던 어둠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침실을 가득 채운 빛의 한가운데에 에이미가 서 있었다.
본래도 효율적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며 여러가지 의미의 터무니 없는 옷을 입었던 에이미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효율성에서도 사뭇 엇나간 모습이었다.
웃옷은 제대로 걸치지도 않아 속옷이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났고, 심지어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않은 셔츠에, 셔츠로 어설프게 가려지기는 하지만, 밑에는 속옷과 신발 외에는 아무 옷도 입지 않았다.
모 영화에 나오는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를 방불케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히마리는 눈을 동그렇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어머나."
회색의 눈동자가 초고속 카메라의 렌즈처럼 이리저리 움직였다. 특이한 걸 넘어 기행에 가까운 에이미의 차림에 이미 익숙했던 그녀지만, 지금 복장은 그런 그녀조차 당황할 정도였다.
"혹시 지금 그런 차림으로……여기까지 달려온 건가요?"
경악을 금치 못한 히마리가 그녀를 부른 이유도 잊고 되물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숨을 조금 가쁘게 내쉴 뿐,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부장의 호출에 신속하게 응했을 뿐이야."
에이미는 태연히 말을 마치고 히마리에게 다가갔다. 히마리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침대 위에서 물러날 곳은 없었다. 이윽고 이마에 올려진 손바닥으로부터 온기가 전해졌다.
"괜찮아? 아픈 곳은? 병원에 연락을 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아니다. 지금 업고 내려갈테니 불편하더라도 참아."
담담한 말투에 어울리지 않게 신속한 발언을 따라가지 못하던 히마리는 에이미가 더욱 가까이 다가오자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아, 아뇨! 괜찮답니다. 밀레니엄 최고의 천재 병약 미소녀 해커에게 이상은 없다, 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고개를 든 히마리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에이미가 말없이 바라보자, 히마리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으흠. 그나저나 땀을 많이 흘렸네요. 갑자기 이런 부탁을 하는 것도 실례지만……. 에이미, 혹시 목욕을 도와줄 수 있나요?"
"그래. 부장."
에이미는 히마리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병원에 연락을 하자마자 히마리를 번쩍 들어올렸다. 번개같이 신속하지만 히마리가 어떠한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세심한 동작이었다.
"에이미?! 내, 내려주세요!"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려진 히마리는 당황해하며 팔을 휘둘렀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모습이 에이미에게는 익숙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얌전히 있어. 날뛰면 위험하니까. 그리고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잖아?"
"전혀 위험하지 않거든요? 에이미라면 초전도체 이상으로 신비한 공전절후의 미소녀를 실수로 떨어트리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답니다."
히마리는 툴툴거리면서도 더 이상 버둥거리지는 않았다. 욕실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잠자코 있던 히마리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고, 너무 성급한 거 아닌가요? 제가 갈아입을 옷도 준비하지 않았잖아요? 아앗, 혹시! 백태천광의 자태를 자랑하는 초절정 미소녀의 나신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위함인가요?"
히마리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멘트를 속사포같이 쏟아부었다. 예전이라면 바로 에이미의 태클이 들어왔을텐데, 에이미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고개를 숙여 히마리를 바라봤다. 넋나간 것처럼 눈을 떼지 않으니, 오히려 히마리가 에이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에이미?"
여전히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당황한 히마리는 눈만 깜빡거렸다. 반면 에이미는 눈도 거의 깜빡이지 않고 계속해서 히마리를 내려다보며 재차 물었다.
"확실히 괜찮은 거지?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속이 메슥거리지는 않고?"
"네. 괜찮답니다."
히마리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전이었다면 히마리는 툴툴거리면서 불평을 하고, 에이미가 아무렇지도 않게 반박하는 식의 대화가 이어졌겠지만. 지금은 그런 흐름을 이어가기에는 어색한 공기가 자리했다.
"그렇다면 믿을 게. 부장."
히마리는 에이미의 목소리 톤이 미세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녀가 모두를 속인 자신에게 실망한 것처럼, 에이미는 히마리의 이상을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에게 분노했다. 미안한 마음에 에이미와 제대로 대화하지 못했던 히마리는 이제서야 에이미의 심정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저는 이기적이네요.'
피의 비릿한 맛보다 쓰고 떫은 맛이 입 안에서 느껴졌다.
"갈아입을 옷은 미리 준비해뒀으니 걱정마."
"정말 준비성이 철저하네요. 그런데……. 제 옷은 언제 준비한 거죠?"
고개를 끄덕이던 히마리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히마리의 진득한 시선을 외면하며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 조작해뒀는지, 욕실 내부는 따뜻하게 달궈져 새하얀 김으로 자욱했고, 욕조에도 온수가 가득했다.
"그런 건 묻지 않는 게 효율적이야."
"……네. 뭐, 초천재 미소녀가 배려를 베풀도록 하죠."
히마리는 혼자 쓰기에는 제법 넓은 욕조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히마리를 먼저 씻겨준 에이미는 목욕 의자에 앉아 자신의 몸을 씻고 있었다. 욕조의 물이 찰박거리는 소리와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한데 섞여들었다.
"미안해요."
찰랑거리는 수면을 바라보던 히마리는 샤워기의 물줄기가 꺼지자마자 나지막히 말했다. 작은 목소리도 욕실에서는 울리기 마련이라, 에이미는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응?"
"저, 에이미를 속였으니까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도 하지 않았고……."
평소와는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어렵게 꺼낸 말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화났으려나. 히마리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사과는 얼굴을 마주보고 하는 것이니까.
"에이미……?"
그러나 에이미는 그저 멀뚱한 표정으로 히마리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그리고는 몸을 가리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부장이 날 속였다고 생각하지 않아. 신체에 이상이 있으면 판단도 흐려지기 마련이지. 그런 상황에서 이성적인 잣대만 들이댈 이유는 없어."
히마리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진지한 발언에 사뭇 놀란 것과는 별개로, 이런 지근거리에서 적나라하게 보이는 나신을 보게 되는 건, 그녀에게도 제법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따라서 히마리의 얼굴이 살짝 상기 된 것은 욕실의 열기 때문만은 아니고, 눈 앞에 보이는 볼륨감 넘치는 여체 때문이었다. 그러나 에이미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욕조로 다가왔다.
"동정의 의도는 없어. 단지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지."
물기에 젖은 살색의 피부가 전등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그러니까, 부장이 사과할 필요는 없어."
분명 진지한 상황인데도 히마리는 물 속에 잠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가만히 있지 못했다. 어쩜 저리도 큰 거람. 그런 감상까지 남기며.
그래도 에이미가 하려는 말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에이미가 그렇다면……그런 거겠죠. 애초에 사과를 할 일도 아니었다는 거네요. 후후."
히마리는 얼굴에 흐르는 땀을 훔쳐냈다.
"역시 초천재-"
"초천재 병약 미소녀."
"초천재 병약 미소녀 해커. 4번째로 중요한 걸 빠트렸잖아요?"
히마리가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에이미는 멀뚱히 바라보다가 말을 툭, 던졌다.
"알겠어. 해커 히마리 부장."
욕조 안에 손을 담근 에이미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곧장 손을 다시 꺼내는 그녀를 보며 히마리가 묘한 얼굴로 말했다.
"중요한 1순위부터 3순위까지 전부 빼먹지 않았나요? 에이미? 그보다 어디 가려고요?"
이미 욕조에서 나와 욕실을 나서려던 에이미가 고개만 빼꼼 돌리며 말했다.
"필요할 때 불러. 난 조금 있다가 들어올게."
느닷없는 행동의 원인은 명확했다. 에이미는 빙해에서조차 수영복 차림으로 다닐 정도로 온 몸에서 열을 내는 체질이다. 멀어지는 에이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히마리는 이마에 손등을 올리고, 눈을 감고서 떠내려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약 미소녀를 혼자 방치하면 안된다구요? 자칫하면 쓰러질지도 모르……."
"들어갈게."
성큼성큼 걸어 돌아온 에이미가 욕조에 몸을 담갔다. 풍덩, 하고 물이 튀어오르자 히마리가 꺄악- 하며 과장된 비명을 질렀다. 온탕의 열기 속에서 에이미는 땀을 흘리면서도
"정말로, 이상은 없는 거지?"
온탕 속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에이미가 히마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이상하게도 히마리는 그녀의 시선이 이전만큼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네. 없답니다."
대답을 들은 에이미가 스르륵, 하고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다. 온수의 열 때문인지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수면이 잠잠해질 즈음, 고민하던 히마리가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에이미. 저, 할 수 있는만큼 해보려고 해요. 치료도, 그리고 하고 싶은 일도 모두."
이미 예전부터 그녀를 도와줬던 후배에게 하기에는, 더없이 이기적인 부탁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히마리는 부탁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치히로나 선생도 그녀가 부탁한다면 성심성의껏 도와줄 것이다. 하지만 치히로는 베리타스의 부장이고, 선생은 샬레는 물론 키보토스의 모든 일에 관여하는 위치였다. 그들에게 부탁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었다.
"혹시 어렵다면 괜찮아요. 다른 방법을 찾아볼테니까요. 부담 갖지 않아도 돼요."
"아냐. 문제없어. 도와줄게. 부장."
고민하는 시늉조차 없는 즉답이라, 오히려 부탁을 한 쪽인 히마리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살짝 벌어진 입이 머뭇거리다 겨우 소리를 냈다.
"……고마워요. 에이미."
짧은 말로는 진심을 전부 전할 수 없는데도, 히마리는 덧붙일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밀레니엄에서 손꼽히는 천재가 망설이는 사이, 에이미가 대답했다.
"천만에."
그보다 긴 말은 필요없었다. 크게 뜨인 눈이 금방 예쁘게 휘었다.
히마리가 해맑게 웃으며 어린 아이처럼 물을 튀기자, 에이미는 손으로 물총을 만들어 긴 물줄기를 쐈다.
<초천재미소녀해커의 죽음으로의 찬란한 여정 -中- 에서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60
히마리 문학은 개추야



고봉밥이노

이게 상이고 중편이 있다는 건 이정도 길이가 2편이 더있단건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