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EP / 오늘의 로그인 보너스 (2) / 完
"어땠어, 카요코?"
카요코가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아루가 다급하게 물었다.
"아무 일도 없었어."
카요코가 겉옷을 걸면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정말로 아무 말 없었어. 아무래도 불문에 붙이려는 것 같은데."
"정말로? 아니, 정말이지? 잘못 들은 게 아니고?"
"그렇다니까."
아루가 못 믿겠다는 듯이 되물었지만, 카요코의 대답은 변하지 않았다.
"총학생회 간부를 통해 건너 들은 정보야. 밀레니엄에선 에리두 타워 붕괴에 대해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는 것 같대."
"...정말로 무슨 마법을 부린 거지?"
"아, 아루 님. 죄송합니다. 역시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죽을게요제가잘못해서멋대로타워를폭발시켜서"
"하루카, 괜찮아! 그 이야기는 이미 끝났어!"
하루카가 옆에서 연신 고개를 숙이려는 걸 아루가 황급하게 뜯어말렸다.
카요코가 소파에 걸터앉으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손톱 끝을 물어뜯고 있는 아루를 거꾸로 바라봤다.
"뭐,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전' 학생회장인 츠카츠키 리오와 우시오 노아가 책임지는 형식이 됐다고 하던데."
"...아니, 그 둘이 왜?"
아루가 그 말을 듣고 멍해져 버렸다.
"모르지."
카요코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고, 핸드폰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낸 건 거기까지야."
"당장 내일이라도 천만 단위의 숫자가 적힌 청구서가 우리 사무실로 날아올 것 같은데..."
"에~ 아루 쨩 상상력 너무 빈곤하지 않아? 그 더럽게 큰 타워가 천만으로 해결될 리가 없잖아? 뒤에 0을 세네 개 더 붙여야 할걸?"
무츠키가 아루 어깨에 고개를 들이밀며 대화에 끼었다.
"부, 불안한 참에 기름 좀 붓지 마 무츠키!"
"쿠후후. 하지만 돈 떼어먹고 뒷골목으로 튀는 것도 나름 하드보일드하지 않아, 아루 쨩?"
"아. 그런가?"
"그렇다니까~ 여차할 땐 아비도스 애들처럼 은행이라도 털면~"
"다, 당장 준비하겠습니다! 아루 님!"
"됐어. 멈춰, 하루카!"
바보 같은 대화를 듣던 카요코가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여기는 이 정도가 딱 어울리지.'
그녀가 모두에게 보이지 않게 작게 웃었다.
그녀는 린에게 시바사키 라멘의 식권 네 장을 받아 왔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아비도스 분들이 맡겨 놓고 갔습니다. 카요코 씨나 아루 씨를 만나면 전해 드리라더군요.'
그걸 보여 주는 건 조금 후의 즐거움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카요코. 히나 위원장은 어떻게 됐대?"
말씨름을 하던 아루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다른 질문을 했다.
"의외인걸. 그쪽에 관심이 있었어?"
"아, 아니. 그게..."
"과, 과연 아루 님! 선도부장이 경질됐을 때 공권력의 공백을 노려 한탕 하시려는 거군요!"
"아니면 아루 쨩이 직접 선도부장 자리를 쟁취하거나!"
"아니야 하루카! 무츠키 너도 하루카 그만 부추겨!"
"...하아."
카요코가 눈을 가늘게 뜨면서 '뭐 됐나.' 하고 혼잣말을 했다.
"근신 처분으로 끝날 것 같다는데."
"...아니. 그런 일을 저질러 놓고 그 정도로 넘어간다고?"
"탄원서가 엄청나게 많이 도착했었다나 봐. 잠들었던 학생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정말로 기가 막히는 꿈을 꿨었다는데."
"에에에..."
"실은 학생회 입구에서 게헨나 학생들이 시위를 하고 있더라고. '이 반인륜적인 범죄의 댓가로 소라사키 히나는 모든 학생에게 주 2회 선생님 꿈을 보장하라'면서... 뭐 그런 프레이즈였어."
"우와..."
하루카의 망상에 불을 지르던 무츠키도 그 말을 듣고는 조금 질려 버리고 말았다.
"좀 깬다... 아니 그 꿈이 정도였다고...?"
"그, 그러게. 그 정도였다면 나도 그냥 잠이나 잤으면..."
"아루 쨩 방금 뭐라고 했어?"
"아, 아니야!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흥신소를 지키겠다고!"
"다녀왔습니다~"
대책위원회의 문을 기운차게 열고 들어온 노노미였지만, 가장 먼저 마주한 건 네 명의 싸늘한 눈초리였다.
"어, 어라..."
"어서 와 노노미 쨩."
호시노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그녀를 맞이했지만, 분위기는 평소와 뭔가 좀 달랐다.
"응. 어서 와. 노노미."
호시노, 아야네, 세리카 모두 마찬가지였다.
"무, 무슨 일이죠... 다들 이렇게 모여서..."
"으헤~ 난 네가 오늘 낮에 한 일을 알고 있다아아아~"
호시노가 뜬금없이 양 손가락을 꿈틀거리면서 유령 흉내를 냈다.
"...네?"
"노노미. 혼자 선생님 만나고 왔지."
시로코 역시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명백히 화난 것 같았다.
"...아."
"아. 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선배!"
세리카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다 같이 만나러 가기로 했잖아요!"
아야네도 뺨을 부풀리면서 추궁했다.
"아하하... 아, 아닌데요?"
"노노미 선배! 비겁하게 발뺌을!"
"응... 이걸 봐."
시로코가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거긴 한 장의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샬레를 배경으로 수십 수백 명의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누군가를 둘러싼 사진이었다.
숨이 막힐 정도의 인구 밀도와, 저마다 아우성을 치고 있는 것 같은 역동적인 포즈들 때문에 그녀들이 모두 누구를 둘러싸고 있는지는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는 너무 뻔했다.
그리고 포커스가 잡힌 그 사진의 가장 가까이에서 메이드복을 입은 한 금발의 학생이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고 있었다.
'오늘의 샬레는 개판입니다. 피스.'
아래에는 그런 텍스트가 적혀 있었다.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이야. 설명해 보시지."
"이, 이 사진에는 제가 안 나와 있는걸요?"
그렇게 말하지만 그건 명백히 노노미도 조금 전에 보고 왔던 광경이었다.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고 있는 걸 들키지 않길 빌었다.
"쯧쯧쯧. 아직 멀었구만 노노미 쨩은."
호시노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이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사진의 좌측 테두리에 겨우 튀어나온 하얀 돌출부 같은 걸 가리켰다.
"여기 있잖아."
"...이게 뭔데요?"
"노노미 쨩 가슴."
"가ㅅ..."
노노미의 말문이 막혔다.
"이, 이게 제 가슴인 건 어떻게 알았는데요?"
"하지만 이런 무식한 가슴 노노미 쨩 밖에 없고..."
"무, 무식하다뇨!"
"하지만 확실히 누가 봐도 뻔해."
시로코 역시 호시노와 생각이 같아 보였다.
"다른 어디서도 이런 거대한 실루엣 본 적이 없어. 틀림없이 노노미 거야."
"그렇다잖니! 노노미 쨩! 설명해 보렴!"
"이, 이런 게 증거가 될 리가 없어요! 가, 가슴이라니. 고작 그걸로...!"
노노미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녀 부정했지만 이미 실내의 분위기는 일방적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녀가 오기 전에 벌써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린 것이 틀림없었다.
"이 와이셔츠 색깔만 봐도 노노미 쨩 것 같지 않아?"
"실망이야, 노노미 선배! 고작 하루를 못 참아서 먼저 보고 올 줄은 몰랐어!"
"저도 마찬가지에요!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그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었군요!"
"...아야네. 그건 본인 이야기 같은데."
아야네는 시로코의 딴지를 무시했다.
"이야~ 선배가 뒤처리 하느라 바쁜 동안 선생님한테 먼저 눈도장을 찍고 오느라 바빴단 말이지, 우리 당돌한 후배님께선~"
"맞아요! 이런 횡포 용납 못 해요!"
"아...아하하..."
두 발자국. 세 발자국. 노노미는 모두에게 밀려 다시 입구를 등지게 되었다.
"해명해 노노미 쨩!"
"해명해요 선배!"
"설명해 보라구!"
노노미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겨우 말했다.
"...과, 과자 가져왔는데요, 먹을 사람~?"
“에~ 절대로 보고 싶을걸, 나기 쨩도.”
“그러니까 몇 번이고 말하고 있잖아요. 저한테 그런 건…”
“그건 나기 쨩이 제대로 된 꿈을 못 꿔서 그런 거라니까?”
미카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잠깐잠깐 백일몽 꾼 것 말고 제대로 된 걸로 ‘맛본 적’없잖아? 응?”
“무슨 위험한 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나기사가 곁에서 끊임없이 재잘대는 미카의 말에 억지로 보고 있던 서류 뭉치를 다시 뒤집었다.
종이 조각에는 ‘고서관에서의 발키리 소속 인원 출입 통제 요청서’라고 적혀 있었다.
나기사는 거기에 ‘반려됨’ 도장을 찍은 다음 테이블 한쪽으로 치워 놓았다.
“선생님이랑 레스토랑에 갔다 왔다구! 대단하지 않아? 나기 쨩도 자주 갔던 그 레스토랑에 가는 꿈이었어! 거기서 내가 선생님한테 음식 설명도 해 줬구, 음, 선생님이 나한테 떠먹여 주기도 하구, 와오, 정말로 그림 같은 꿈이었다구. 나기 쨩도 보고 싶지? 겪고 싶지?”
“미카, 그 꿈 이야기만 오늘 다섯 번은 들은 것 같아요.”
“좋은 이야기는 몇 번을 들어도 괜찮아! 한 번 더 들어!”
“그걸 뻔뻔하게도 당신이 말하는 게 문제라는 거에요!”
“그렇게 말하지만 내심 부러운 거 아니야?”
미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기의 옆구리를 찌르는 시늉을 했다.
“에~ 부럽지? 부럽잖아! 응? 나기 쨩 선생님이랑 다과회 할때는 언제나 잘 안 됐던 것 같구. 선생님이 친절하게 대해 주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으응? 정말이지, 선생님 다른 학생한테는 그런 모습도 보여 주는구나, 싶었다구. 궁금하지?”
“괘, 괜찮아요. 전 그런 거 조금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나기사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말했다.
“언제나 다음 기회란 게 있으니까요. 그래요. 다음에 한번 더 초대를 드리면 되는 일이잖아요.”
“초대라고 하니 나기 쨩도 이번엔 꽤 수고했었다고 생색 정도는 내도 되지 않아?”
“전 당신과 달리 그런 속보이는 짓은 안 하기로 했어요.”
미카가 이번엔 양손으로 턱을 괴고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그래도 적당히 티내면 분명히 시간 내 줄걸 선생님? 그런 사람이니까. 틀림없어. 아. 어쩌면 이번엔 샬레에서 차 한 잔 하자고 할지도 모르겠네!”
“샤, 샬레에서요?”
나기사가 자기도 모르게 마시던 찻잔을 달그락 소리가 나게 내려놨다.
“아! 관심 있다! 관심 있었잖아!”
아하하하. 미카가 웃었다.
“나기 쨩 완전 웃겨. 역시 의식하고 있었잖아!”
“미, 미카! 숙녀답게 행동해요!”
삐질한 나기사가 그런 걸 지적했지만 미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새, 생색이라고 하니 말인데, 당신은 왜 지금 여기 있는 건가요?”
나기사가 애써 화제를 돌리며 찻잔을 다시 집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데 큰 공을 세운 당신인데, 당신 성격대로라면 선생님과 하루 정도는 그…”
으흠. 나기사가 헛기침을 했다.
“데, 데이트를 하자고 졸라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요.”
“아~ 그거 말이구나.”
미카가 웃음이 갑자기 잦아들었다.
“으응… 뭐라고 할까. 지금은 양보할 때라고 할까. 나도 이게 무슨 기분인지 잘 안다고 할까…”
“...네에?”
“역시, 나중이라도 괜찮아.”
뭔가 어색한, 그러면서도 후련한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그러니까, 지금은 이게 맞아.”
“그런가요…”
“응. 여기엔 공주님이 참 많이도 있거든.”
테라스 바깥을 아련하게 쳐다보며 미카가 말했다.
“왕자님은 꽤 바쁜 법인가봐.”
“아니, 아코는 또 왜 사라진 건데?”
“...어디겠어요.”
치나츠가 종이에 뭔가를 바쁘게 적어내려가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부장님 뒤를 밟으러 나간 거죠.”
“그러니까 왜?”
“왜냐니… 바보 같은 질문 하지 말아요. 이오리.”
“바보 같…?”
“그런 사람이잖아요.”
치나츠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덧붙였다.
“아마 스스로에게 근신 처분을 내렸을 거에요.”
“무슨 근거로?”
“부장님의 옥체에 공격 명령을 내린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무겁다나.”
“자기 할 일이 이만큼 남았잖아!”
이오리가 서류로 된 산을 가리켜 보이며 소리쳤다.
“나는 현장직이라고! 이런 것들을 처리하는 방법 따위를 알 리가 없잖아!”
“그럼 이번이 그걸 배울 기회라고 생각하세요. 중요해 보이는건 내버려두고, 적당한 것들, 아무래도 좋은 것들 위주로 처리하면 되잖아요.”
치나츠가 예시 삼아 종이 문서 하나를 내밀자, 이오리가 그것의 제목을 천천히 읽었다.
“그러니까… ‘선도부가 압류 중인 샬레 고문의 개인물품 반환 요청서’…”
어처구니가 없어진 이오리가 그걸 받아들고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 이게?”
“보이는 대로에요.”
이오리가 얼떨결에 문서를 넘겨 물품 목록을 훑어봤다.
어째서인지 거기엔 목줄 같은 어디다 쓰는 건지 짐작할 수도 없는 물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니, 진짜 뭔데 이거?”
“말했잖아요. 아무래도 좋은 것들이 많다고.”
치나츠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작업을 계속했다.
“...넌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그야, 전 보고서 처리에는 익숙하기에.”
벌써 달관한 것 같은 치나츠의 모습에 이오리는 좀 질리고 말았다.
“진짜냐고… 아니, 뭐, 아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불평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아무리 너라도…”
“...”
이오리가 문득 수상하다는 듯이 눈을 찡그렸다.
“너 뭔가 아코한테 받기로 한 거 있지.”
“...!”
치나츠가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이오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맞지! 그렇잖아! 뭔가 거래가 있었구나!”
확신을 가진 이오리가 치나츠의 어깨를 흔들었다.
“왜 그런 데서 예리한 거에요!”
“아니, 현장직이니까 이 정도는 당연하잖아! 치사하다고! 뭘 받기로 했는지 말해 줘!”
“다른 데선 둔해 빠진 주제에!”
“넌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지 마! 댓가가 뭐냐니까?”
“시, 싫어요! 왜 그런 걸 이오리한테 말해야 해요?”
“불공평하니까!! 왜 너만 뭔가 받는 거냐고!”
치나츠와 투닥거리던 이오리가 으름장을 놓았다.
“말해 주기 전까진 하나도 안 도와줄 테니까!”
“으으읏…!”
뭔가 정말 내키지 않는 표정을 한 치나츠가, 이윽고 졌다는 듯이 쥐꼬리만한 목소리로 뭔가 중얼거렸다.
“...진요.”
“뭐?”
“...사진…”
“그러니까 무슨 사진인데?”
치나츠는 한참 동안이나 거기서 더 웅얼거렸다.
“ㄷ, 데이트…하는… 선생님의 사진요.”
“...”
할 말을 잃은 이오리가 치나츠의 어깨를 놓았다.
“...”
“...뭐, 뭔가요.”
“...에, 에에…”
“하, 할 말이 있으면 어서 하라구요.”
“...아니… 그건 왜?”
맥없는 이오리의 물음만이 선도부 건물에 울려퍼졌다.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의 해가 화창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쉴새없이 사람들이 오가는 공원의 벤치에서, 히나는 불안하게 발끝을 꼼지락거렸다.
약속 시간이 되려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틈만 나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면서, 자기가 너무 늦거나 빠르게 온 게 아닌지 고민했다.
뭔가 진정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다른 이유도 있었지만 이런 시간에 한가하게 공원 같은 곳에 나올 일이 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지금 자기가 입고 있는 옷 때문이기도 했다.
“이런 걸 입어도 정말 괜찮은 걸까…”
확신 없는 목소리로 입고 있는 하얀 원피스의 여기저기를 잡아당기며 히나가 혼잣말을 했다.
이건 자기 취향이라기보단 전적으로 아코의 취향이었다.
히나는 게헨나 교문을 나서기 전에 아코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분명히 잘 어울린다니까요!”
“그래…?”
“왜 이렇게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건가요! 답답하게! 정말 동화 속 공주님 같다니까요!”
“으으음…”
“잘 들어요 부장님. 이럴 땐 순백색 원피스가 정석이라고요! 부장님 머리색이랑 잘 어울리기도 하고, 소녀 같고 귀여운 부장님의 매력을 가장 잘 어필해 줄 수 있는 복장이에요! 저만 믿어요. 여신 같은 자태에 분명 놀라서 나가떨어질 거라구요!”
“그, 그런 걸까.”
“그렇다니까요!”
“그냥 평소에 입던 옷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굳이 이런 걸…”
히나가 자신 없게 말했다.
“데, 데이트라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업무의 일환 같은 거라고나 할까, 사후 보고라고나 할까… 그분에게 사과할 일도 많고…”
“하아??”
못 들을 말을 들었다는 듯이 아코의 얼굴이 대번에 오만상을 쓰며 찌그러졌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거에요, 부장님은! 자! 거울을 한번 봐요!”
“아읏.”
“거울을 한번 보시라구요! 아름답죠? 예쁘죠? 가녀리죠? 청초하죠? 꼭 안아 주고 싶죠?”
“아코. 진정해.”
중증 나르시스트처럼 들릴까봐 ‘그래’라고 말할 수 없는 애매한 히나의 입장을 두고 아코는 제멋대로 계속 지껄여 댔다.
“이렇게 완.벽.한. 모습으로 그 사람의 기를 완전히 죽여 놔야 한다구요! 관계의 주도권을 부장님이 완전히 가져가야 한다구요! 보자마자 눈이 부셔서 쓰러질 정도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에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여신과 데이트를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가요! 이 모습을 보자마자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자리에 엎어져 절을 해야 할 정도라고요! 강림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이죠! 맞아요! 고마워해야 해요! 왜 사과를 해야 한다는 건가요, 사과를!”
“그 정도는 아닌 것 같…”
전신 거울 안에 히나의 모습이 담기자 아코가 이 사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으그그극 으극!!! 그 호색한 바람둥이 상습 탈주범에게 이런 부장님을 맡기는 건 정말로 가슴이 미어지는 일이지만, 부장님이 선택하신 거니까요! 으그극!!”
“아코, 나 이제 그만 나가게 해 주면 안 될까.”
주변이 뭔가 소란스러워 진 것을 느낀 히나는 회상을 멈췄다.
공원의 저편에서 작은 인파가 생겼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너무 짧지 않은 걸까. 하고 무릎까지 오는 원피스 스커트 끝자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던 히나는,
오히려 이게 평소 유니폼보다 기장이 더 길다는 것을 깨닫고 조금 웃고 말았다.
“뭘 하고 있는 건지…”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십오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까. 인사를 해야 할까. 미안하다고 해야 할까.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날씨 이야기로 시작할까.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모모톡을 다시 받은 순간부터 어젯밤까지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며 수백 수천 번을 그려 온 대화였지만,
여전히 어떤 식으로 대화를 시작해야 할지는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한 번도 이렇게 막연해 본 적은 없었는데.
‘처음 만날 때는 그렇게 쉽게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고민한다니…’
선생님과 나눴던 수많은 기억,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 중 어느 것도 오랫동안 잡아둘 수 없었다.
어떤 것은 바로 어제의 일 같았고, 어떤 것은 태어나기도 전 일처럼 머나먼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강하지도, 그렇다고 흐리지도 않은 햇살이 딱 좋은 날씨. 바람은 기분 좋고 선선하게 불고 있었고,
원피스 하나만 걸치고 있었음에도 공기는 방금 말린 이불을 덮은 듯 푹신했다.
활기찬 공원의 배경 소음들이 어느 순간부터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긴장을 너무 한 탓인지, 공원 저편을 아득하게 바라보고 있던 히나의 눈꺼풀이 서서히 감겼다.
‘약속까지 아직 좀 남았으니까…’
너무 기분 좋은 날씨였고, 히나는 이번엔 굳이 거기에 저항하지 않았다.
…또 얼마나 지났을까.
잠결에 히나는 문득 자기 머리맡에 그늘이 진 기분이 들어 눈을 살짝 떴다.
어깨에 붙어 있는 따뜻한 체온.
"으응..."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녀가 모를 리가 없는 바로 그 느낌이었다.
안심되고 포근한 향기.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든든한 존재감.
잠기운이 순식간에 물러간 히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아..."
거기엔 있었다. 뻔뻔하고 유들하고 자상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꼴보기 싫고 그리웠던 그 사람이.
시간이 멎었다 다시 흐른 것 같았다.
동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몽롱하고 초점 흐리고 세상의 빛이 번진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이 그리고 또 그리던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뗐다.
『잘 잤어, 우리 공주님?』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그 한 마디가 있었다.
그 많던 고민, 후회도, 상처도 다 바보 같아졌다. 아무래도 좋은 것만 같았다.
“...응.”
이거면 돼. 난 이걸로 다 괜찮아.
그걸로 끝이었다.
"어서 와. 선생님."
소라사키 히나는 행복했다.
완결까지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마도 다른 중편에서 다시 만나요
마지막 접속: 방금 전 完
댓글 57
벌써 마지막화라니
고생 많았다 한동안 재밌게 읽었음
감사합니다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