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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카이브[소설] 아비도스 최후의 방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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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피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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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보토스에 떠오르는 태양은 아비도스에서는 더없이 뜨겁다.

아비도스 고등학교 3학년, 대책위원회 소속 타카나시 호시노는 텅빈 거리를 소리 없이 걸으며 거리를 확인했다. 아직 해는 중천에 뜨지도 않았건만, 벌써부터 살을 달구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허물어져가는 건물 외벽 그늘에 몸을 숨겼다. 오랫동안 보수하지 못한 시멘트 벽은 군데군데 금이 갔지만, 잠시 몸을 기댈 수는 있었다. 호시노는 건물 벽에 등을 기대고는 그대로 쪼그려 앉았다. 잠깐의 휴식이지만 제대로 수면시간도 가지지 못한 몸에는 도움이 되었다.

반장갑을 낀 손이 지면을 흩는다. 아비도스 전역에 가득한 모래는 언젠가 그녀가 밟았던 백사장의 부드러운 모래와는 다르게 거칠고 까슬까슬했다. 그러나 촉감만이 차이점은 아니다. 이곳의 모래는 호시노의 소중한 것들을 집어삼켰다. 유메도, 세리카도, 노노미도. 아야네와 선생도 결국에는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증오스런 모래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아비도스에 남아있는 두 사람마저 게걸스럽게 집어 삼킬 것이다.

"그렇게 두지는 않을거야."

입술 사이로 씹어 뱉은 말은 어디에도 닿지 않고 허무하게 흩어진다. 호시노는 이를 악물고는 손 안에 들어온 모래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모래는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올 뿐이다. 마치 흘러가는 시간처럼,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절대로."

노란색과 파란색의 눈동자가 낡은 건물들을 담고, 저주스런 모래를 노려봤다. 4차선 도로는 모래에 묻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고, 평범한 차량은 주행 중에 고장날 정도였다. 을씨년스러운 거리를 응시하던 호시노는 거수자를 발견했다. 진압 방패를 들고 일어선 그녀는 몸을 낮추며 거수자를 향해 다가갔다.

거수자의 정체는 거무튀튀한 밀리터리 배색의 오토마타 두 기였다. 호시노의 날카로운 시선이 침입자를 흩었다. 카이저 PMC 로고가 새겨진 오토마타들은 특별한 경계도 없이 로봇 다운 걸음으로 걸었다.

'자기네들 앞마당인 것처럼 구네.'

예전에도 이렇게까지 제멋대로 굴지는 않았는데. 호시노는 속으로 이를 갈며 샷건을 고쳐쥐었다. 여러번의 관측에 따르면 카이저 PMC은 당장은 넓은 포위망을 유지하는 걸 우선시했다. 큰 충돌은 피하는게 상책이지만, 이런 소수의 정찰 병력을 내버려 둘 이유도 없었다.

호시노는 오토마타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손가락을 방아쇠울에 걸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오토마타의 머리가 박살날 것이다. 두번째도 다르지 않겠지. 그러나 호시노는 방아쇠울에서 손가락을 뺐다. 고작 이런 일로 탄약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호시노는 주먹을 쥐었다 펴고는 주변을 살핀 뒤에 기민하게 오토마타에게 접근했다. 곧이어 둔탁한 소리가 몇 번 울리고 금방 조용해졌다.

***

모든 생명은 하나의 세계와 같다.

살아 숨쉬며 자유로이 움직이던 생명도 어떤 방식으로든 죽음이라는 끝에 다다른다. 그 때 세계는 종말을 맞이한다. 시작은 끝을 예견하며, 바라든 바라지 않든 모든 생명은 끝을 향하여 시작된다.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세상의 당연한 이치를, 과거의 호시노는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호시노가 다른 이에게 보여주는 태평하고 느긋한 언행과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모두 누군가를 따라한 모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녀를 지켜주었던 사람. 아비도스의 마지막 학생회장, 유메였다.

유메는 항상 활기차게 웃는 사람이었다. 학생회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을 떠넘겨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비도스 고등학교의 존속을 위해 온 힘을 다했다. 후배인 호시노가 불쑥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며 험한 말을 해도, 유메는 오히려 호시노를 달래주고는 했다. 그래서 호시노는 넘쳐흐르는 감정을 유메에게 쏟아붓고는 했다. 그녀가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호시노는 세계의 종말을 목격했다.

'여기 있었군요……. 정말이지, 하하하……. 한참 찾았잖아요……. 유메 선배.'

유메는 평소와는 달리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호시노는 그녀가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장난이었다고 말하며 웃을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호시노는 유메에게 작별인사는 커녕 마지막 사과도 하지 못했다. 유메가 베푼 무한한 사랑에 무엇 하나 보답하지 못했고, 유메라는 세계의 종말 앞에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호시노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바보 같다고 생각하고, 그녀가 베푸는 사랑을 귀찮게 여겼지만, 어느 쪽이 바보인지는 일목요연했다. 호시노는 2년 전의 자신을 증오해마지 않았다.

호시노는 혼자 남은 뒤에도 아비도스를 떠나지 않았다. 텅 빈 학교를 지키고,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자치구를 순찰하며 그것만이 유일한 속죄의 길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후회만 남길 뿐이다.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었고, 혼자 남겨진 호시노의 세계는 썩어가기 시작했다. 늪지대의 내부가 부패하듯 그녀는 종말을 향해서 걸어갔다.

그런 호시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하나, 둘, 셋, 넷. 그리고 다섯. 그들은 호시노와 함께 했다. 아비도스를 같이 지키고, 아비도스가 진 어마어마한 빚을 갚고, 아비도스를 부흥시킬 계획을 구상했다. 호시노에게 유메가 소중한 사람이었던 마냥, 그들에게 호시노는 소중한 존재였다. 그리고 호시노에게도 그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였다. 분명 그랬었다.

즐거웠던 추억은 호시노를 더욱 비참하게 하고, 지독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호시노는 하루하루 바닥 없는 낭떠러지로 밀려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눴다. 그러나 방아쇠를 당기지는 못했다. 아직 포기하면 안되는 이유가 있었다.

***

호시노가 정찰을 마친 건 늦은 오후가 다 되어서였다. 호시노는 지하창고에 들렀다가 대책위원회 부실로 향했다. 익숙한 부실의 문을 열 때마다 상념이 엄습해온다. 재잘이는 대화에 이어 늦잠을 자느라 지각한 그녀를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은데. 들리는 건 드륵, 문 여는 소리 뿐이다.

"호시노 선배."

의자에 앉아있던 스나오오카미 시로코가 고개를 들었다.

"시로코 쨩. 별 일은 없었어?"

호시노는 예전처럼 행동하려는 반면, 시로코는 예전의 그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둘의 마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썩어 들어갔다.

"……응. 별 일은, 없었어."

샬레의 선생이 사고를 당한 뒤로 시로코는 망가져갔다. 예전의 시로코도 자주 웃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시로코는 망가진 기계 같았다. 그래서, 호시노는 시로코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식사는 했고?"

"……아니."

시로코는 무심히 고개를 저었다.

"혹시 아저씨를 기다려 준 거야? 으헤, 그거 참 기쁜데."

호시노의 농담을 듣고도 시로코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호시노는 테이블 위에 전투식량을 올려둔다.

"자. 같이 식사하자. 시로코 쨩 몫도 챙겨오길 잘했네."

비축해둔 비상식량과 전투식량 덕분에 당장은 굶주리지 않아도 됐다. 아비도스 뿐 아니라 키보토스 전체가 뒤숭숭한 지금으로서는 더욱 불행 중 다행이었다. 포장을 뜯자마자 풍기는 냄새는 제법 자극적이었다. 반나절을 굶으며 자치구를 돌아다녔으니 배가 고픈게 당연했다.

일회용 숟가락으로 식사를 하던 호시노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로코는 전투식량에는 손도 대지 않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깐 고민하던 호시노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시로코 쨩. 밥 먹어야지."

언뜻 보면 어머니가 딸을 타이르는 듯한 광경이다. 하지만 시로코는 두 주먹을 허벅지에 올린 채로 전투식량을 노려볼 뿐이다. 예전처럼 간식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니, 전투식량을 거르는 건 곧 식사를 거르는 셈이었다. 평화로운 시절이라면 사춘기가 되었다느니, 벌써 다 컸다느니 하는 농담으로 웃어 넘겼겠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아니었다.

"식사를 거르면 안돼. 입맛이 없으면 천천히 먹어도 되니까."

잠자코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로코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서로 색이 다른 홍채가, 각기 다른 색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어야 해?"

특유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러나 호시노는 시로코의 말에서 깊고 어두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선생님한테 가야 해. 아야네의 상태도 봐야 하고. 세리카도 찾아야 하고. 노노미도……. 이대로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선생님께 현재 상황을 알리고, 같이 해결 해야 해. 선생님이라면 어떻게든……."

"시로코 쨩."

잠자코 듣고 있던 호시노가 시로코를 불렀다. 그러나 시로코는 벌떡 일어나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대체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데! 이대로는 안돼. 만일 호시노 선배가 반대한다면……나 혼자서 포위망을 돌파할테니까."

그 말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던 호시노도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의자가 뒤로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스나오오카미 시로코!"

빠른 걸음으로 시로코에게 다가간 호시노가 시로코의 멱살을 강하게 붙잡았다.

"잊어버린거야? 통신이 두절 된 뒤 포위망을 뚫으려는 시도를 몇 번이고 했었지. 하지만 저 자식들, 당장 이곳에 전력을 기울이지는 않으면서도, 우리를 철저하게 가둬두고 있어. 어째서인 거 같아?"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문 시로코에게 호시노는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예전에 확보했던 카이저 코퍼레이션의 작전계획은 기억하고 있겠지. 저 놈들의 목표는 아비도스 자치구가 아니라 스나오오카미 시로코, 바로 너라고!"

"……그건."

시로코는 무어라 말하려는 듯이 입술을 움직이다가는, 눈시울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치만, 이대로라면……아무 것도 변하지 않아."

"시로코 쨩."

호시노는 서서히 멱살을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정에 북받친 목소리가 들려온다.

"선생님이 보고 싶어. 아야네도, 세리카도, 노노미도……모두 보고 싶어. 호시노 선배. 우리 예전 그 때처럼, 세리카를 찾고, 노노미와 함께 아야네를 보러가자. 그리고……."

"안돼."

절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호시노는 물러나지 않았다. 시로코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한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생님을 만나야 해……."

시로코는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호시노는 시로코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블라우스가 눈물로 젖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창 밖의 하늘이 노을색으로 물들기 시작할 즈음에, 호시노는 시로코를 소파에 누이고 담요를 덮었다. 곤히 잠든 그녀의 모습이 울다 지쳐 잠든 어린아이 같아 안쓰러웠다.

"화내서 미안해. 시로코 쨩."

부드럽게 시로코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에 푸석해진 머릿결이 느껴진다. 시로코는 무뚝뚝한데다가 엉뚱한 면도 있는 아이지만, 꾸미는 걸 소홀히 하지 않았는데. 그리 생각하던 호시노는 조용히 일어나 부실에서 나섰다. 창 밖으로 붉게 물든 하늘에 서서히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복도를 걷던 호시노는 사물함 앞에 멈춰서고는, 사물함을 열어 구겨진 흔적이 역력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바보 같던 시절의 그녀가 갈기갈기 찢었던 '아비도스 모래축제' 의 포스터였다. 혹여 벌어질지도 모를 사태에 대비해, 농성에 용이한 학교 건물로 숙소를 옮기며 가져온 물품 중 가장 쓸모 없으면서도 가장 소중한 물건이다. 사물함 안에는 작은 액자가 세워져 있었다. 단발머리를 한 과거의 그녀와, 닮고 싶었지만 결국 닮지 못한 선배의 사진이다.

"시로코 쨩. 예전의 저보다 훨씬 낫죠? 저라면 다짜고짜 뛰쳐나갔을텐데."

호시노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애절한 눈으로 사진을 쳐다봤다. 사진 속의 선배가 당장이라도 대답해줄 것 같았다.

"유메 선배. 선배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그러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호시노는 한참 뒤에야 포스터를 사물함에 조심스레 넣고 문을 닫았다.

호시노는 스스로를 어른으로 여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른에 가장 가까운 그녀조차 여러 차례 어른에게 속았고, 그리고 어른에게 구원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체력을 낭비해서는 안 되니까.

***

혼란스러운 세상에도 변하지 않은게 하나 있다면, 바로 학교 옥상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이다. 옥상 한 켠에 쪼그려 앉은 호시노는 멀리서 빛나는 불빛들을 응시했다.

키보토스에 닥쳐온 악재는 아비도스까지 휩쓸었다. 샬레에 발생한 테러에 이어 세리카는 실종되었고, 노노미도 행방불명, 아야네는 뇌사 판정을 받았다. 중앙구의 병원에 아야네의 입원 수속을 밟고 아비도스로 돌아가던 호시노와 시로코를 카이저 PMC가 급습하기까지 했다. 어렵사리 적을 격퇴하기는 했지만, 아비도스의 모든 통신을 차단 당한 탓에 외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조차 없었다. 샬레가 건재하다면 몰라도 선생마저 의식불명이 된 와중에 통신마저 끊긴 아비도스를 도울 곳은 없었다.

물론 아비도스를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있을 때마다 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로코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호시노 혼자라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만, 호시노에게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모든 시도가 실패한 뒤부터 시로코는 나날이 초췌해졌다. 시로코에게도 호시노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 이어졌지만, 호시노는 주저앉으려는 시로코를 몇 번이고 일으켜세웠다. 이제 그녀는 시로코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선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호시노는 머리를 쥐고 헝클어트렸다. 그녀는 유메처럼 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해도 유메가 될 수 없었다. 유메는 호시노를 지켜냈지만 호시노는 후배를 지키는데 실패했다. 타카나시 호시노는 소중한 것을 잃었고, 또 잃었으며 다시 잃기 직전이었다.

'결국……. 이번에도 실패하겠지.'

카이저 PMC의 붉은 빛들이 그에 동의하는 것처럼 일렁거렸다. 탐욕 가득한 짐승의 눈을 증오스럽게 노려보던 호시노는 다시 얼굴을 감싸쥐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열 손가락으로 얼굴을 힘주어 눌러보지만 고뇌는 끊이지 않는다.

손가락 사이로 바닥을 향한 시선에 하늘색 끈이 달린 검은색 스니커즈가 들어온다. 머리 위에서 후배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시노 선배. 미안해."

시무룩한 기운이 역력한 탓에, 호시노는 피식 웃으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시로코 쨩이 미안할게 뭐 있겠어."

호시노가 손짓하며 제 옆자리를 가리키자, 시로코는 그녀의 옆에 주섬주섬 자리 잡았다. 2학년인 시로코는 1년 선배인 호시노를 유독 잘 따랐다. 예전부터 가깝게 지내서 그런지도 모르고, 리더를 따르는 습성 때문일 수도 있다. 머리 위에 달린 귀가 알려주듯, 그녀는 늑대였으니까. 귀 사이를 쓰다듬는 손길에 양쪽 귀가 쫑긋거린다.

"아저씨도 화냈으니까, 서로 미안한 거로 하자구."

시로코는 대답 대신 호시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별이 반짝이는 짙은 어둠 속에서 잔잔한 숨소리만 들려온다. 분위기가 너무 침울해진다는 생각을 한 호시노는 헤실거리며 시로코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으헤, 이런 미소녀랑 붙어있을 수 있다니 행운인걸. 역시 아저씨가 착하게 살아서 복받은 거려나. 아하하."

하지만 시로코는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호시노가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에서 팔을 내릴까 고민하던 찰나, 시로코가 입을 열었다.

"나. 다시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이 기나긴 밤이 언제 끝날까……하고 생각해버려."

아무리 감추려해도 떨리는 목소리는 감추지 못한다. 호시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뒤에 눈을 떴다.

"밤이 와도 그것으로 끝은 아니야."

읊조린 말은 다짐과도 같다. 시로코는 눈을 깜빡이며 호시노의 말을 곱씹는다.

"모든 일이 원래대로 돌아가면, 다같이 바다로 놀러가자. 시로코 쨩. 기억하고 있지?"

"어떤거?"

시로코는 의아한 얼굴이다. 행복을 잊은 표정 같아서, 호시노는 마음이 아팠다.

"무인도 리조트로 갔던 휴가 말야. 낮에는 바다에서 놀고, 밤에는 폭죽도 터트리고. 여러모로 다사다난했지만……그래도 즐거웠지."

세리카가 리조트 이용권을 경품으로 얻었을 때의 일이다. 호시노의 말에 기억이 떠오른 시로코가 짧게 대답했다.

"음……재밌었지."

시로코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추억에 잠겨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이라도 형형색색의 폭죽이 밤하늘을 수놓을 것만 같고, 행복은 머나먼 과거의 것으로 느껴진다. 호시노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듯 하다.

"예전에 까만 녀석에게 속았을 때……난 시로코 쨩과 다른 모두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돌아왔잖아? 돌아와서 다녀왔어, 라고 인사했지."

호시노는 다시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별들은 키보토스에 벌어지는 일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찬란하게 빛난다.

"이번에는 아저씨가 어서 와, 라고 말할 차례야."

언제나의 부드럽게 잠겨드는 목소리지만, 어느 때보다도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아직 청춘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선언이자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다.

"약속할게. 내가 시로코 쨩을 지켜줄테니까. 나만 믿으라고."

호시노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시로코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었다.

"응. 약속."

그들은 서로에게 몸을 기대고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호시노는 손가락을 뻗어 별자리를 헤아린다. 무리지어 빛나는 별들이 눈동자에 비친다. 반짝이는 은하수처럼…….

***

평화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

호시노는 오늘도 자치구 내를 순찰하며 텅 빈 건물들을 지나쳤다. 멀리서 포격과 총성이 울리는데도 으레 있던 위협 사격으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총성은 끊이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호시노는 무언가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총성이 발생한 방향으로 뛰어갔다.

그곳에는 피 흘리는 늑대 하나와, 가증스러운 카이저 PMC의 오토마타들이 있었다.

"시, 로코 쨩."

호시노의 몸이 척수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방패 뒤로 시로코를 감추고 샷건을 난사하며 오토마타 무리를 격퇴했지만, 시로코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았다.

'망할. 왜 지금,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후배에게 긴급조치를 실시하는 호시노의 뇌리에 수많은 장면이 스친다. 그녀가 겪었던 실패가 어른거리고 다시 사라지다, 종국에는 어느 한 장면이 떠오른다. 모래에 파묻힌 방패와, 죽어가는 한 소녀.

유메의 마지막 모습이다.

"안돼, 안돼!"

겁에 질린 호시노는 필사적으로 상처를 눌러 지혈을 실시한다. 하얗게 질려버린 머리 대신 오랫동안 갈고 닦은 본능이 호시노를 이끌었다. 하지만 시로코는 눈을 뜨지 않는다.

"시로코. 대답해. 시로코. 선배가 찾잖아. 시로코. 부탁이야."

간절하게 외치던 목소리는 점차 애원으로 변하고, 그런데도……여전히 그녀가 바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제발, 시로코……."

가능한 구호조치는 모두 마쳤다. 그러나 피투성이가 된 손은 시로코의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호시노는 고개를 들어 두려운 시선으로 시로코의 머리 위를 살핀다.

"선……배."

헤일로는 꺼지지 않았다. 게슴츠레 뜬 눈동자가 호시노를 향한다.

"시로코."

잃었다고 생각했던 희망이 다시 돌아온 것을 깨닫자, 호시노는 힘이 풀려 쓰러질 뻔했다. 그런 그녀를 부축하는 건 익숙한 목소리였다.

"난, 괜찮아."

호시노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곧이어 후속 병력이 도착할 것이다. 거리로 보나 농성에 용이한 조건으로 보나 후퇴할 장소는 학교다. 호시노는 총기와 방패, 그리고 시로코의 총기까지 챙기고 시로코를 안아들고서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일단은 거기서 버티는 수 밖에 없어.'

달리는 내내 비릿한 피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호시노는 개의치 않았다. 만일 시로코마저 잃었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을 터다. 호시노는 잠시나마 세상의 모든 것에 감사해했다. 비록 세상이 그들을 이렇게 만들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코는 살아있었다. 아직 지킬 수 있었다.

학교에 도착한 그녀는 한달음에 지하실로 뛰어 내려갔다. 침대에 시로코를 뉘우고 수면유도제를 투여했다.

"조금만 기다려줄래? 시로코 쨩. ……일이 있어서 말야. "

칭얼거리는 아이를 타이르는 말투다. 호시노는 가능한 모든 의료조치를 마친 뒤에야 겨우 숨을 돌렸다. 작은 부상은 아니었지만, 학생의 강인한 신체는 금방 회복 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급박했다. 갑작스레 시작된 공세의 목표는 뚜렷했고, 얼마 안가서 카이저 PMC의 병력들이 학교에 들이닥칠 터였다.

결국 싸움 뿐이다. 호시노는 전투 준비 태세를 실시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호시노가 지하실에서 나서려는 찰나, 힘없는 목소리가 발목을 붙잡았다.

"돌아올, 거지……?"

호시노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섰다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는 애써 어설픈 미소를 머금고 시로코에게 다가갔다. 꿈에서도 선배를 찾는 후배의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고, 손을 잡았다. 손에 느껴지는 감촉을 잊지 않도록 그녀는 뺨에 손등을 가져갔다.

부드러웠다.

"시로코 쨩. 내일 또 보자."

호시노는 평혼한 얼굴로 후배에게 인사를 남긴다. 최후를 각오한 인사였다.

***

아비도스 고등학교를 향한 카이저 PMC의 대공세는 이미 시작되었다. 많은 적을 격퇴했지만, 호시노는 상황이 여전히 불리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카이저 PMC측이 폭격인 학교에 대한 포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외 모든 사실은 호시노의 패배를 가리켰다.

"전황은 어떻지?"

공세를 지휘하는 이는 카이저 PMC의 제너럴이었다. 제복 코트 차림의 로봇인 그는 부츠에 먼지 하나 묻지 않을 안전한 곳에서 보고를 받았다.

"타카나시 호시노와 조우, 현재 전투 중입니다."

제너럴은 고개를 연거푸 끄덕이더니 부츠 앞 코로 바닥을 두들기며 비아냥거렸다.

"포격도, 폭격도 자제하라……니. 평범한 학생을 제압하는 것도 쉽지 않은 판국에? 하물며 그 타카나시 호시노를 상대로? 어리석은 짓거리가 따로 없군. 그야말로 머저리 같은 일이야."

그는 얼마간 혼자서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제너럴의 불만을 한몸으로 받게 된 불쌍한 병사는 몇 분 뒤에야 제대로 된 명령을 하달 받을 수 있었다.

"빠른 제압은 기대하지도 않는다. 대신 쉬운 명령을 내려주지. 오늘이 지나기 전에 타카나시 호시노를 제압하고, 스나오오카미 시로코를 확보하도록 해라."

제너럴이 위협스럽게 몸을 들이대는 바람에, 오토마타 병사는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능력은 출중하지만 때때로 감정을 야만스럽게 드러내고는 했다.

"프레지던트의 특별 지시다. 알아들었으면 당장 움직여!"

그는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멀어지는 병사를 쳐다보다 의자에 앉았다. 그나마 전차에 의한 포격은 실시되고 있었지만, 학교 자체에 대한 포격이나 폭격이 금지되었다는 점이 그에게는 자못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부의 지시 탓에 모래투성이인 아비도스에서 목표를 앞에 두고 소규모 정찰만 시행하지 않았나. 기껏 돌입한 작전에도 온갖 제약이 걸려있으니, 지휘관으로서 심기가 불편한 것은 당연했다.

"한심한 것들."

그는 과장된 동작으로 오른손을 움직여 손목 시계를 확인한다. 17:23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시간을 일러주었다. 그의 예상으로는 오후 11시까지는 제압을 완료하고 목표를 확보하는 것으로 작전이 마무리 될 터였다.

하지만 예상이 항상 맞지는 않는 법이다.

'끝이 없네.'

탄약은 충분히 보급했건만. 탄이 떨어지는게 눈에 보여 허탈할 지경이다. 그러나 상대해야 할 적은 여전히 많았다. 그간 대규모 군사행동을 하지 않은 대신이라는 듯이, 카이저 PMC 측의 병력이 쏟아져나왔다. 호시노는 학교 건물 내외를 오가며 저들에게 대항했다. 시로코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주제에 시로코를 인질삼은 셈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포위 되고, 학교를 벗어나면 시로코를 빼앗긴다. 호시노는 집단에 맞서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끝은 오기 마련이다.

방아쇠를 당기고, 총성이 울릴 때마다 호시노의 뇌리에는 제압 당한 자신과 끌려가는 시로코가 스쳐 지나갔다. 당연히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저리……꺼져!"

그녀에게 접근한 오토마타 병사는 탄환을 피한 대신 개머리판에 머리가 박살났다. 복도에 파편들이 튀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수류탄이 폭음을 울리며 폭발했다.

"망할 자식들……!"

시로코를 지키려 학교로 돌아온게 올바른 선택일까. 호시노는 머리 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오토마타들은 사람처럼 욕설을 퍼붓거나 소리를 치지 않았다. 그러나 영혼없는 목소리와 함께 다가오는 저것들은 사람처럼 겁을 먹거나 당황하지도 않았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그녀에게 다가오고, 비명도 지르지 않고 부서졌다.

이런 식의 소모전으로 간다면 결말은 뻔했다.

'언제 끝나냐가 다를 뿐이지.'

호시노는 2층 복도 창문에서 뛰어내렸다. 시로코가 잠들어 있을 지하실로 향하는 통로는 쉽게 찾기 힘들고, 그나마도 단단한 철문으로 봉쇄 되어있다. 그렇다고 영원히 안전할 리는 없었다. 산산이 박살난 화단 앞에 앉아 방패로 몸을 지키다 사격이 멈춘 빈틈을 틈타 달려들어 오토마타 수 기를 박살낸다. 그러나 스쳐 지나간 탄환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윽……."

호시노는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를 감싸쥐었다. 다행히 그녀 기준으로 큰 상처는 아니었지만, 오랜 싸움으로 인해 몸에 손상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몸을 숨기고 간단한 조치를 마친 뒤에 다시 달리기 시작한다. 그 뒤로 총성이 울리며 돌파편이 튀어올랐다.

"아저씨는 혼자 싸우는 건, 질색인데!"

과거로 돌아간 기분이다. 다시는 돌아가기 싫었던, 혼자서 끝모를 싸움을 이어가던 때로. 진창 속에서 뒹굴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외롭게 싸우던 그 시절로 말이다.

그렇다면 예전처럼 싸워야겠지.

호시노는 이를 악물고 다리 근육에 힘을 주어 바닥을 걷어찼다. 거대한 대형 오토마타 위에 올라탄 그녀는 영거리 사격을 실시했다. 그리고는 사격을 피해 오토마타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눈 먼 탄환이 서로를 갈기는 동안, 호시노는 능숙하게 오토마타들의 기능을 정지시켰다. 피대신 붉은 조각이 튀었다. 다음 목표물을 찾는 호시노의 눈에 한 오토마타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다른 오토마타와 달리 직접 나서기보다 뒤에서 지휘를 하는 모양새였다.

"찾았다."

호시노는 방패를 세로로 길게 펼쳤다. 그리고는 가로로 눕히고 그 위로 연발 사격을 실시했다. 하나, 둘, 제압당한 오토마타들 사이를 헤치며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

"목표를 확인, 지금 당장-"

그것은 단말마처럼 우득, 하는 소리를 내고는 아무 지시도 하지 못했다.

'일단 또 하나.'

잔해들 속에서 호시노는 숨을 고른다. 수를 헤아리는 동안 땀방울이 떨어졌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조금의 빈틈도 위험하다. 호시노는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골리앗……!'

대형 이족보행병기, 골리앗이 대형 주포를 그녀에게 겨누고 있었다.

***

00시 00분. 아비도스 주둔 카이저 PMC 캠프.

"뭐 하는 거냐! 고작 학생 하나도 제압하지 못하고!"

아직도 작전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보고를 받은 제너럴은 책상을 내리치며 성을 냈다. 그러고도 분을 풀지 못한 그는 벌떡 일어나 애꿎은 통신기에 분노를 퍼부었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보내! 아비도스 자치구에 있는 병력을 전부 동원하란 말이다!"

호시노의 최후는 총성도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이렇게나 하찮은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호시노는 여전히 싸우고 있었다. 탄환이 남지 않은 총을 휘두르고 방패를 무기 삼아 싸우는 모습은 '아비도스 최후의 방패' 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무기가 있는 한 싸운다.

무기가 없다면 방패로 싸운다.

방패가 없다면 두 손으로 싸운다.

그렇게까지 해서, 지켜야 할 것은……있었다.

둔해진 움직임은 사격에 노출되고, 상처는 늘어만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시노는 오토마타를, 골리앗을, 파워로더를, 전차를 무너트리고 부수며 나아갔다.

걸음은 점차 느려진다. 흐려진 눈으로는 눈 앞의 적들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묵묵히 걸었다. 피투성이 몸으로 향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돌아가야지. 시로코 쨩에게…….'

2 / 2

총성이 울리고, 호시노의 헤일로가 부서진다. 흩어지는 조각들이 먼지처럼 사라지며 소녀의 몸이 지면에 닿았다.

"HQ에 보고한다. 타카나시 호시노의 생명반응이 정지했음을 확인했다."

"……젠장. 아무리 키보토스에서 손꼽히는 강자라고 해도 고작 학생 한 명이 아닌가! 대체 얼마나 많은 병력을 소모한 건지……! 쓸모없는 놈들!"

제너럴은 작전완수를 보고 받고도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그럴 만도 했다. 병력 손실을 두고 프레지던트가 뭐라고 말할지 생각만 해도 짜증이 샘솟았다.

책상을 주먹으로 치며 화를 내던 그는 곧바로 화를 삭이고 생각을 정리했다.

'이제 남은 병력이 많지는 않지만……. 어찌됐든 목표를 달성하면 그만이지.'

빠르게 결론을 내린 제너럴은 통신기를 들고 말했다.

"아비도스 고등학교에 잔존해 있는 모든 병력에게 하달하도록. 스나오오카미 시로코를 신속히 확보해라. 일체의 손상 없이! 지금 당장!"

명령을 하달 받은 병력들은 신속히 학교 내부로 돌입한다. 그리고 호시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칠흑 같이 어두컴컴한 공간이다. 주변을 둘러봐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시노는 비로소 체념했다.

죽었구나.

"내가 말했지."

호시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 개인의 빚이 아니라고. 타카나시 호시노, 네게도 마찬가지다. 결국 이렇게 죽지 않았나."

그들을 괴롭혔던 카이서 PMC의 이사였다. 그는 턱을 짚고 호시노를 향해 말했다.

"그런게 너보다 가치가 높았나?"

호시노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주마등이 분명했다. 그녀는 죽었고, 또한 실패했다. 이사는 그 사실을 조롱하는 듯 했다.

"그게 네 목숨보다 소중했냐는 말이다. 타카나시 호시노."

호시노는 대답하는 대신 묵묵히 걸었다. 카이저 이사도 암흑 속으로 멀어졌다. 그녀는 계속 걸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이번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자가 나타났다.

"어리석군요."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운 흰색의 금이 간 얼굴. 예전에 호시노를 속였던 검은 양복이다.

"키보토스 최고급의 신비가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참으로 안타깝지 않습니까."

호시노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연구하고 분석해야 한다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런 신비를 가진 당신이라면 더욱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었겠죠."

그는 일그러진 입으로 조소를 짓는다.

"고작 후배를 위해 이런 방식으로 죽는 건 아깝지 않습니까. 호시노 씨?"

"아니."

호시노는 우뚝 섰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확신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해야 할 일을 했어."

검은 양복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윽고 어둠이 빛으로 빨려 들어가고 머리 위로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호시노는 눈부신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저 앞에 청록색 머리의 소녀가 있었다. 호시노처럼 가슴 아래에 하네스를 두르고, 호시노 같은 장발의 소녀였다.

"호시노 쨩."

그리운 목소리가 호시노를 불렀다.

"유메, 선배……?"

그와 동시에 호시노의 머리는 짧아졌다. 마치 과거의, 1학년 때의 타카나시 호시노로 돌아간 것 같은 모습이다. 호시노는 한달음에 달려가 사랑하는 선배의 품에 안겼다.

"선배. 보고 싶었어요. 저, 정말로 힘들었어요."

유메는 후배를 품에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전에는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도 싫어했건만, 지금은 손길을 피하기는 커녕 기쁘게 받아들였다.

"우웅. 착하다. 호시노 쨩. 정말로 대견해."

호시노는 유메의 품에서 울었다. 3학년이 되고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유메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호시노를 한참동안 토닥여주었다.

호시노는 울음을 그치고도 여전히 유메의 품에 안겨 있었다. 유메가 호시노의 등을 도듬으며 말했다.

"호시노 쨩. 행복한 꿈이었어?"

호시노는 유메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꿈……?"

"꿈은 꿈으로 끝나야 한다는 걸, 호시노 쨩도 잘 알고 있잖니."

상냥한 표정에는 호시노를 향한 배려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호시노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꿈이 아니었어요. 다함께 울고 웃었던 시간들 모두와의 추억……그건 분명 꿈이 아니에요."

유메는 더욱 환하게 웃으며 호시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호시노 쨩. 정말 많이 행복했구나. 다행이야."

호시노는 포근한 온기를 느꼈다. 두 사람은 다시 서로의 온기를 느낀 뒤에 마주섰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야. 호시노 쨩. 혹시 두고 가는 건 있을까? 잊어버린 물건은? 이제는 없으려나?"

유메의 말에 고민하던 호시노가 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저……금방 갔다 올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줄래요?"

호시노의 간절한 목소리를 들은 유메가 싱긋 웃었다. 오아시스에 피어난 들꽃 같은 미소였다.

"응응. 호시노 쨩은 언제나 고집쟁이였지. 잘 다녀와. 호시노 쨩."

호시노의 머리는 다시 길어져 있었다. 그녀는 해맑게 웃으며 유메에게 말했다.

"네. 선배. 고마워요."

호시노는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유메는 호시노를 향해 작게 손을 흔들었다. 입은 웃고 있었지만, 멀어지는 후배를 바라보는 눈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이별에 대한 슬픔이 아닌 다시 돌아올 그녀에게 가지는 슬픔이었다.

***

키보토스의 학생들이 지닌 신체능력은 우월하다. 개개인의 차이는 있으나 대다수 학생은 사소한 충격으로는 치명상도 입지 않았고, 극심한 피해를 받아야 헤일로가 부서지며 비로소 죽음과 만난다.

분명, 호시노의 헤일로는 부숴졌다. 산산조각나서 산산이 흩어지는 헤일로는 그녀의 죽음을 나타냈다. 강인한 그녀에게도 피하지 못하는 결말이 찾아온다. 분명 그녀의 세계는 이렇게 끝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켜야 하는 약속이 있었다.

'……아직.'

아비도스 최고의 신비, 아비도스의 천재, 대책위원회 소속, 시로코의 선배, 타카나시 호시노는 일어섰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여명이 다가오기 직전에, 무너져가는 세상의 끝에서, 그리고 죽음 가까이에서- 호시노는 마지막으로 돌아왔다.

***

밤이 와도 그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영원할 것 같은 밤에도 아침이 밝아온다. 셀 수 없는 세월동안 떠올랐던 해는 어김없이 세상에 내리쬐고, 기나긴 밤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낱낱히 밝혔다.

무수한 잔해의 한복판에 한 소녀가 작디 작은 몸을 방패에 기대어 서 있었다. 감기지 않은 두 눈으로 햇빛이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눈부신 빛을 보지 못하였다. 아비도스를 지키는 방패는 끝끝내 힘을 다하였으며, 영혼이 떠난 육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비도스 고등학교 대책위원회 소속 타카나시 호시노 -「전사」

'아비도스 최고의 신비' 라는 칭호에 걸맞는 장엄한 최후였다.

그것이 그녀의 끝이었지만, 끝나지 않은 것은 있었다.

한때 호시노는 기적 같은 속편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다고 화내며 부정했다. 그러나 호시노는 선생이, 후배들이, 모두가 이뤄내는 기적을 보았다. 분명 기적은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해낼 수 있었다.

아비도스 자치구 내 카이저 PMC 병력 -「궤멸」

강철의 군단도 무한의 군세도 아닌, 한 명의 학생이 이룬 거룩한 기적이었다.

***

타카나시 호시노는 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그녀는 스무해도 되지 않은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 호시노는 그녀가 경멸하던 어른이 아닌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 사실이 그녀를 조금은 달래주었다.

"호시노 쨩. 후회하고 있어?"

유메가 나란히 걷는 호시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귀여워보이던 후배는 여전히 작지만, 어른이 되어 있었다.

"항상 그랬어요. 내가 조금 더 잘하면 되지 않았을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하고요."

호시노의 회한 어린 말을 들은 유메는 고개를 저었다.

"호시노 쨩은 잘못하지 않았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고마워요. 선배."

호시노는 유메의 손을 잡았다. 두 번 다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서.

"이젠 혼자 두고 가지 마세요."

유메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상냥하게 다짐한다.

"응응. 약속할게."

유메와 함께 걷는 도중에, 호시노는 자꾸만 뒤를 돌아봤다. 그런 호시노를 유메는 부드러운 눈길로 내려다본다. 끝이 보이지 않는 빛에 감싸인 그들은 눈부시게 찬란한 빛 너머로 사라진다.

시로코 쨩은 혼자 남아서 힘내겠지. 그런 아이니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같이 있어주지 못해서 미안해.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해.

그러니까 아주 나중에,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흐른 뒤에 만나자.

이번에는 내가 먼저 '어서 와' 라고 인사할테니까.

호시노는 후회와 미련을 뒤로 하고 새로운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따스한 햇빛이 그녀를 비추고 시원한 바람이 살결에 닿았다.

최종장 기념, 쿠로코의 시간선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써봤습니다.

이것으로 블아 소설은 총 20편이 되었습니다. 대충 합산해보니까 13만자 좀 넘던데, 처음 결심했을 때보다는 많이 못 써서 아쉽습니다.

다음은 언제 쓸지 모르겠네요. 여러모로 바쁘기도 하고...아직 산해경과 srt 쪽을 쓰지 않았을 뿐더러, 새로 실장 된 캐릭터들에 관해서도 아이디어가 샘솟지만요.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즐거운 추석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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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블루 아카이브·23.09.29창작

[소설] 아비도스 최후의 방패

#아비도스 고등학교#소설
좋아요 0댓글 27저장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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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DC
붕붕차차작가
게시물 25개
외부 링크디시인사이드
게시일2023.09.29 20:05
조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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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7

나
ㅇDC
ㅇㅇ123.09.29
디시콘
붕DC
붕붕차차작성자23.09.29
디시콘
ㅇDC
ㅇㅇ223.09.29

퍄퍄..

붕DC
붕붕차차작성자23.09.29
ㅇDC
ㅇㅇ223.09.29

더 많이 써줘 늘 재밌게 본더

ㅇDC
ㅇㅇ323.09.29
디시콘
붕DC
붕붕차차작성자23.09.29
디시콘
ㅇDC
ㅇㅇ23.09.29

개추

붕DC
붕붕차차작성자23.09.29
디시콘
ㅇDC
ㅇㅇ423.09.30

피폐...마음아퍼...

붕DC
붕붕차차작성자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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