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엄 #M #드라마 #미노리
원본 by 白山胡蘿蔔
====================
<1> ~ <3>
<1>
그날의 나는 분명 밑바닥이었다.
노동과 투쟁으로 일과를 보내고 집으로 향할 때쯤엔 이미 일출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계절은 한겨울, 심야를 지나 거의 아침에 다다른 시간대였다.
쟁취해 낸 근소한 보수를 손에 쥐고,
막대한 피로와 무수한 상처가 쌓인 몸을 외투로 감싼 채 춥다기보다 아프다는 표현이 적절한 레드윈터의 거센 눈보라를 견뎌 내고 있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까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빨리 학생 식당의 보르시로 몸을 녹이고 싶다.
피처럼 빨갛고 데일 정도로 뜨거운 수프가 몸속에 스며드는 상상을 한다.
땀도 눈물도 콧물도 고드름으로 변하는 영하의 기온 속에서 오로지 상상력만으로 몸을 움직였다.
나는 공무부 일을 좋아한다.
도면을 그리고 건물을 짓는다.
누군가가 배우는 곳, 일하는 곳, 노는 곳, 살아가는 곳을 만드는 게 좋다.
수많은 건물이 세포처럼 모여 도시라는 커다란 생명체가 되는 게 좋다.
나는 공무부 모두를 좋아한다.
성실하고 책임감과 향상심이 넘치며, 언제나 즐겁게 일한다.
진지하게 배우고 마음껏 논다.
그런 모두와 힘을 합쳐 커다란 일을 완수하는 게 좋다.
나는 부조리가 싫다.
우리를 부당하게 헐값으로 부려 먹으며 사리사욕을 채우는 놈들이 싫다.
그래서 싸운다.
소중한 일과 소중한 동료들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 오늘도 귀가 시간이 이 모양이다.
하지만 가혹한 추위는 그 자부심마저 앗아 가려 한다.
너는 왜 여기 있는가, 왜 이렇게 고통받는가.
놓아 버리면 편해질 텐데.
노동도 투쟁도 누군가에게 맡기고 안온하게 살면 될 것을.
극한까지 몰린 마음 깊은 곳에서 질문이 솟구친다.
잿빛 같은 눈이 내리고 있다.
신발이 파묻힐 정도로 눈이 쌓인 길을 엉금엉금 기어가듯 걷는다.
아까부터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는 기분이다.
아무리 걸어도 집에 도착하지 못할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교차로에 다다랐다.
눈에 가려 흐릿한 시야 너머로 빨간불이 깜빡이고 있다.
좌우를 살피고 횡단보도를 건넌 곳에 낯익은 선배가 있었다.
차도 반대편, 그 허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선배?”
“오, 공무부 친구네. 기운이…… 있어 보이지는 않네.”
“네, 뭐……. 이 시간에 여기서 무슨 일입니까?”
“어라, 몰랐어? 이 시기의 명물이라고.”
“명물이라고요?”
자세히 보니 주변에는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학생이 여럿 있었다.
시선 끝에는 시계탑이 있었다.
옛 서체의 시계판이 오렌지빛 조명을 받아 떠올라 있었다.
단독 주택이라기엔 크고 공동 주택이라기엔 작은 건물에서 뻗어 나온 그것은, 듣고 보니 거기 있다는 느낌의 수수한 풍취였다.
몇 번이나 지나다녔음에도 낯설었다.
선명한 주홍색 지붕은 눈이 쌓이지 않도록 경사가 져 있었다.
“무슨 행사라도?”
“오늘이 동지잖아. 일출에 맞춰서 종이 울려.”
“헤에…….”
낮이 가장 짧은 날을 지나 봄이 다가온다.
그 기쁨을 함께 나눈다.
레드윈터의 봄은 짧다.
학생들은 그 짧은 봄을 온 힘을 다해 즐긴다.
노점이 늘어선 거리를 지나며 마시고, 먹고, 논다.
추억을 가슴에 채워 넣고 추운 계절을 버텨 낸다.
이 시기만큼은 공무부도 나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물론 일은 일대로 즐겁지만.
“슬슬 시작하려나.”
선배가 손목시계를 살핀다.
주변 학생들이 스마트폰을 치켜든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검은 분침이 걸린 듯이 움직였다.
낮고 묵직한 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놋쇠로 된 심장이 울리는 고동이 몸속 깊이 울려 퍼져 확실한 열기로 변한다.
두근, 두근 맥박이 칠 때마다 얼어붙었던 체온이 돌아온다.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온다.
등 뒤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눈이 흩날리는 하늘에 떠 있는 시계가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그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고 있다.
<2>
“……라는 이야기야.”
“그건 꼭 직접 보고 싶네.”
12월 중순, 샬레의 집무실에서 나는 선생과 약속을 잡았다.
동지 아침, 시계탑의 종소리를 들으러 가기로.
“아로나, 리마인드 부탁해.”
『알겠습니다!
여기서 레드윈터까지의 이동 시간을 포함해서 출발 시간을 안내해 드릴게요.』
“역시 슈퍼 AI네.”
『에헴!』
선생은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눈다.
선생의 눈동자는 태어나서 빛을 포착해 본 적이 없다.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인파에 휩쓸려 이른 아침의 공사 현장까지 흘러 들어온 모양이었다.
뺨 근처에서 가지런히 자른 머리.
추위로 빨개진 코끝.
흰 지팡이를 손에 쥐고 섰지만, 등은 곧게 펴고 있었다.
레드윈터에 어울리는 두툼한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도 둘렀다.
“여기서, ‘봐’도 될까?”
눈을 감은 채 말하기에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상관없지만 안전 수칙은 엄수할 것.
헬멧 착용, 작업장 출입 금지.”
“알았어.”
그 후 선생은 작업장 밖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고 작업 중인 층을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다는 건 정도의 문제고, 무언가는 보이는 걸까.
의뢰인의 폭거를 견디다 못해 그날의 진척 상황을 폭파하고 철수한다는 결말을 맞이한 귀갓길.
역까지 가는 길을 둘이 걷는다.
“선생은, 그…… 뭘 보고 있었던 거야?”
“모두의 목소리, 말소리, 소음. 그리고 공기의 냄새와 흐름일까.”
“……과연?”
“모두의 감각과는 조금 다르겠지만 말이야.
어디에 사람이 있고, 물건이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거든.”
“선생 같은……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감각이 예민해진다는 그런 이야기?”
“예민한 걸까? 글쎄.”
아, 그래도 말이야, 하고 덧붙인다.
“만난 사람의 인상이라든가 성격은 꽤 잘 알지도 몰라.
미노리의 성격, 맞혀 볼까?”
앞을 향한 채 즐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표정은 온화하지만 목소리 톤은 유독 밝다.
“미노리는 말하는 걸 좋아하지? 특히 설명이나 설득.”
“어, 어어…….”
아지테이션은 설명과 설득이 토대다.
공무부 동료들에게도, 지나가는 학생들에게도 중요한 점을 명쾌하게 전달한다.
그리고 행동하게 만든다.
수면에 돌을 던지는 것처럼 말을 전해 사람과 공간을 움직이는 게 좋다.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걸 좋아하고, 언어로 마음을 그리는 걸 좋아하는 아이.
그런 친구 아닐까 생각했어.”
칭찬받는 것 같기도 하고, 꿰뚫어 보는 것 같기도 해서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다음에 현장에서 만난 건 한파로 공사가 중지된 날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던 눈은 그치고 유리처럼 하늘이 투명했다.
현장 상황을 둘러보는 김에 작업 중인 비계 위에서 풍경을 감상하는 것이 이런 날의 남몰래 즐기는 취미다.
“미노리~!”
태평하고 느긋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흰 지팡이를 든 선생이 서 있었다.
내가 건물 안에 있을 거라 짐작했는지 고개를 살짝 위로 향하고 있다.
“누구야, 나를 미노리라고 부르는 놈이.”
일부러 큰 소리로 대답하자 선생이 나를 향한다.
지팡이를 쥐지 않은 반대쪽 손에는 편의점 봉투.
초콜릿에 푸딩, 에클레어에 크레이프.
같이 먹자며 들뜬 목소리와 따뜻한 배려에 보답하고 싶었다.
“선생한테 보여 주고 싶은 풍경이 있어.”
살짝 굽힌 내 팔꿈치를 선생이 잡는다.
선생은 남은 손에 든 지팡이로 바닥을 더듬으며 걷는다.
손을 잡는 것보다 이편이 더 수월하다고 한다.
선생의 발걸음은 확실했고 걷는 속도도 나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층을 지나 계단을 오른다.
“보여 주고 싶은 풍경이라는 게 옥상이야?”
“아니, 비계야.”
“비계?”
선생이 모르는 나라의 단어처럼 말한다.
“아, 그러니까 건물을 지을 때는 먼저 기둥이랑 바닥을 만들고 그다음에 벽을 만드는데, 밖에서 작업을 하거든.
그때 쓰는 발판이야.”
“그런 게 있구나! 발을 딛는 곳이라 이거지?”
“응, 아마 그럴걸.”
“거기에 데려가 주는구나. 꽤 높지 않아? 무섭지는 않고?”
“난 익숙해. 선생이야말로 괜찮겠어?”
“으음, 높은 곳은 잘 안 가니까. 베란다 정도일까.”
층 구석으로 향하자 선생의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바깥쪽이라는 걸 알고 있다.
“바로 거기가 비계야. 천천히 걸어서 걸터앉아 봐.”
선생의 손을 끌어 인도한다.
바닥에서 툭 튀어나온 작은 외벽을 넘어 비계에 착지한다.
“와, 쇠네.”
선생이 소리를 내며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인다.
어깨가 닿을 거리에서 나도 앉는다.
선생의 옆얼굴이 석양에 비쳐 오렌지색 필름을 씌운 것 같았다.
바람이 불어 뺨 근처에서 가지런히 자른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좋은 풍경이네.”
눈을 감은 채 선생이 말한다.
나도 따라 눈을 감아 본다.
그 순간, 바람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몸이 휘청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앉아 있는 외벽과 비계가 미덥지 못하다.
바깥쪽에는 추락 방지용 울타리가 튼튼하게 갖춰져 있는데도 무섭다.
선생은 늘 이런 감각 속에 있는 걸까.
이런 곳에 데려와도 괜찮았던 걸까.
“저기, 미노리.”
“응?”
“미노리는 지금 뭘 보고 있어?”
눈을 뜬다.
선생은 감은 눈꺼풀을 먼 곳으로 향하고 있다.
“전에 미노리가 나한테 뭘 보고 있었냐고 물었잖아. 그래서 나도 묻고 싶어.
나는 눈이 보이지 않아. 그러니까 미노리의 눈을 통해서 보고 싶어.”
숨을 몰아쉬며 선생은 내 무릎 위에 손을 얹는다.
“미노리가 보고 있는 걸 미노리의 언어로 보여 줄래?”
비계 너머 지평선으로 눈을 돌린다.
“……저 멀리서 석양이 지고 있어.
하늘에 구름은 거의 없고 작은 안개가 흩어져 있을 뿐이야.
주변 건물들은 전부 석조 건물이고. 가로수에는 눈이 쌓여 있어.
보이는 모든 게 오렌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어.”
“음…… 오렌지색. 어떤 색이야?”
“글쎄…… 따뜻하고 안심이 되는 색이야.”
“미노리는 오렌지색을 보고, 이 풍경을 보고 어떤 기분이 들어?”
“무척 고요하고 차분해져. 하지만 조금 쓸쓸한 기분도 들어.
레드윈터의 해는 짧아서 이 풍경은 저녁의 짧은 시간 동안밖에 볼 수 없거든.”
“소중한 풍경이구나.”
“응. 사라지는 건 비계도 마찬가지라 건물이 완성되면 철거돼.
이 장소도, 이 광경도 지금뿐이야. 그러니까…….”
선생과 보고 싶었어.
말하려다 가슴이 꽉 죄어 왔다.
말이 끊기고 침묵이 가득 찬다.
“멋진 풍경 보여 줘서 고마워, 미노리.”
“……이걸로 된 거야? 잘 말했는지 자신 없어.”
“잘하고 못하고는 없어. 미노리만의 언어니까.”
순환 버스에 몸을 맡긴 귀갓길.
오른쪽 끝 좌석,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
평소엔 책을 읽느라 지나쳤던 풍경이 신선함을 머금고 시야에 뛰어든다.
헌책방, 밥집, 자동차 대리점, 공구점.
내려진 셔터에 그려진 낙서.
모르는 거리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
저녁에서 밤으로 변하는 풍경을 글로 기록해 본다.
순식간에 거리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윤곽을 잡을 수 없게 된다.
통행인이 적은 보도에 위태롭게 켜진 가로등은 차도를 비추는 것만으로도 벅차 보인다.
선생의 시야는 창밖보다 어두운 걸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감각으로, 아마도 다른 척도로 세상을 재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각과 곁에 있는 누군가의 눈과 언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광경을 공유함으로써 나 자신의 윤곽이 뚜렷해진다.
전하고, 전해 받으며 나의 세계도 변해 간다.
그 감각이 따뜻하고 사랑스럽다.
나에게 깊이 새겨진 광경을 나의 언어로 전하고 싶다.
봄을 고대하는 종소리가 울리고 아침 해가 떠오르는 그 광경을.
<3>
불길한 예감은 들었다.
며칠 전부터 맑은 날씨가 이어졌고, 동짓날 예보도 맑은 뒤 흐림이었다.
기도해도 구름은 얇게 흩어질 뿐 눈을 내리게 하지는 못했다.
그림이 되지 못해 아쉽지만, 반대로 선생이 걷기 편해서 좋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역으로 향하는 어두운 길을 걸었다.
사각형으로 구획된 가도의 한 블록 너머에 시계탑의 빛이 보여야 했다.
서서히 퍼지는 초조함을 억누르며 걷는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건물이 또렷이 보였다.
시계탑의 조명은 꺼져 있고 윤곽이 동트기 전의 어둠 속에 녹아 있었다.
동지는 분명 오늘이다.
몇 번이나 확인했다.
부지에 다가가자 낮은 울타리와 건물 곳곳에 전단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불필요한 야간 근무를 강요하지 마라!』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마라!』
바람에 날려 펄럭이는 전단은 굵은 매직으로 휘갈겨 써서 복사기로 마구 찍어 낸 것이었다.
조잡함이 오히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법이라고 모두에게 가르쳤던 기억이 난다.
“아, 선배!”
낯익은 후배의 목소리.
큼지막한 모자 아래로 득의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다.
“이거 보셨어요? 진짜 못 해 먹겠다니까요, 이런 추운 날에 새벽 근무라니.
전통인지 명물인지 알 바 아니라고요.”
이명이 들렸다.
말소리인지 바깥 공기인지, 어느 한쪽이 울려 퍼졌다.
“불필요한 야간 근무를 강요하지 마라!”
“강요하지 마라!”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지 마라!”
“침해하지 마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확성기 소리에 구호가 응답한다.
“동지가 다 뭐냐!”
“다 뭐냐!”
“애초에 겨울이 추운 건 사무국 탓이다!”
“맞다!”
“그 건방진 꼬맹이 탓이다!”
“옳소, 옳소!”
“좋아, 전원! 사무국으로 돌격이다!”
“돌격이다!”
와아 하는 함성이 터져 나오고 어수선한 발소리가 이어진다.
“오, 돌격이네요! 선배도 가실 거죠?”
“아, 아니, 나는…….”
“안 가세요? 뭐, 춥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니까요.
그럼 나중에 봐요!”
후배는 쾌활하게 말하고는 데모대에 합류해 무리와 함께 멀어져 간다.
목소리가 사라지고 주변은 정적에 휩싸였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시계탑이 어둠 속에 파묻혀 있다.
외투 주머니에서 징- 하고 휴대전화가 떨렸다.
『곧 도착해!』
선생이 보낸 모모톡.
하늘에도 길에도 눈은 없다.
놋쇠로 된 심장이 고동을 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가로등이 띄엄띄엄 켜진 가도를 걷는다.
발걸음이 무겁다.
선생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 거기 없다는 걸 어떻게 사과해야 할까.
내가 뿌린 씨앗이 확실히 자라 싹을 틔웠다는 사실을 어떻게 빌어야 할까.
십 분도 채 안 되어 역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이 눈에 부시다.
발권기도 개찰구도 모두 잠든 것처럼 고요하다.
개찰구 정면, 매점 밖에서 선생을 기다린다.
전광판이 가리키는 시각까지의 몇 분이 더할 나위 없이 길었다.
계단에서 몇 명의 학생이 올라와 개찰구를 빠져나간다.
조금 늦게 선생의 모습이 보였다.
개찰구 직전쯤에서 말을 건다.
“선생.”
“안녕, 미노리.”
선생은 내가 있는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스마트워치로 개찰구를 통과한다.
“기다렸지. 역시 레드윈터는 춥네.”
전에 봤던 외투와 목도리에 털모자까지 쓴 선생이 어깨를 움츠린다.
“미노리는 괜찮아?”
“응. 난 익숙하니까.”
태연한 척 말한다.
안내 부탁해, 하며 선생이 손을 뻗는다.
살짝 굽힌 팔꿈치를 내밀자 부드럽게 붙잡는다.
정적인 빛으로 가득한 역을 나와 가도로 향한다.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목소리도 말소리도 없이 나와 선생의 숨소리만 들린다.
아무리 찾아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조용하네.”
선생이 말한다.
나를 두고 하는 말인지 주변을 두고 하는 말인지.
단순한 질문인지 무언가를 살피는 것인지.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목소리로는 알 수 없었다.
“……일출 전이니까. 주변은 캄캄하고 춥거든. 돌아다니는 학생은 적어.”
“그렇구나. 종소리를 듣고 나면 따뜻한 거라도…… 아, 가게는 열었어?”
“야근을 마친 학생들을 위해 여는 식당이 있으니까 거기서.”
“좋네. 뭐가 맛있어?”
“보르시가 최고야. 피처럼 새빨갛고 데일 정도로 뜨겁거든.”
“최고네! 한여름의 아이스크림 같아.”
“별로 와닿지 않는데. 레드윈터의 여름은 그렇게 덥지 않으니까.”
“그래?”
“응. 여름을 맛보고 싶다는 이유로 여행을 떠나는 학생이 있을 정도야.”
“모처럼 시원한 곳에 있는데?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딱 맞네.”
노래하듯 탄력 있는 선생의 목소리도 내 안을 따뜻하게 하지는 못했다.
시계탑이 있는 구역이 바로 앞이다.
“그러고 보니 눈은 안 내려?”
“어?”
“내리는 감촉이 없어서.”
“아니, 내리고 있어…….
레드윈터의 눈은 아주 가벼워서 다들 우산도 안 쓸 정도야.”
흐응, 하고 선생이 맞장구를 치고 대화는 끊긴다.
‘미노리가 보고 있는 걸 미노리의 언어로 보여 줄래?’
느닷없이 그 말이 뇌리를 스친다.
심장이 빠르게 뛰며 귓속에서 울린다.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커다란 소리로 울리고 있다.
최대한 천천히 발을 내디뎌 드디어 도착했다.
처음 봤던 것과 같은 장소.
다른 점은 하늘에 구름조차 없다는 것과, 그 종이 울리지 않는다는 것과, 나와 선생만이 여기 서 있다는 것.
도착했어, 라고 나는 말한다.
기대된다, 라고 선생이 대답한다.
건물과 담장에 붙은 전단이 바람에 날려 파닥파닥 소리를 낸다.
시계탑은 어둠 속에 숨겨진 채 그대로다.
시간은 무정하게 흘러가 마침내 그 순간을 맞이한다.
하늘이 아주 조금 밝아진다.
저 멀리 등 뒤에서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선생.”
“응?”
“사실은 눈 같은 거 안 내려.”
“어?”
“미안해…… 미안해요. 내가 거짓말을 했어.”
“……그렇구나.”
“선생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서, 내가 봤던 풍경을 보여 주고 싶어서…….”
목소리가 떨리고 코끝이 찡해진다.
눈가가 뜨거워지며 시야가 흐려진다.
“미노리는 상냥하구나.”
노을 속에서 들었던 따뜻한 목소리였다.
그 온기를 받아들여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니야. 난 거짓말쟁이야.”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진실을 말해 줬잖아.
그건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훨씬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그러니까 자신을 탓하지 마.”
용기.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엉망이 된 콧물을 들이켠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용기를 쥐어짜 본다.
“……선생.”
“응?”
“사실은 시계탑 종 같은 거…….”
말을 맺기도 전에 선생님이 손을 놓는다.
내 정면으로 돌아와 두 팔을 벌린다.
그대로 나를 온몸으로 껴안는다.
“들려.”
선생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따뜻하게 스며든다.
두 사람분의 두꺼운 외투 너머로 확실한 고동이 느껴졌다.
새벽을 기다리는 어둠 속에서 오직 그것만을 의지하고 있었다.
Fin.
댓글 3
미노리 소설이라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