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이 지나도록 리오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세미나가 총출동하여 C&C 부실로 집결한다.
"리오 회장. 무슨 문제라도 있어?"
"야! 어딜 맘대로 들어오는 거야!"
네루는 세미나의 증원에 심히 불편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유우카와 노아에겐 통하지 않는다.
이 곳 밀레니엄은 다소 기형적인 구조. 학교라기 보단 기업과 비슷하게 돌아간다.
현 회장이 세미나 출신인데다 예산까지 잡고 있는 실정이기에
"네루 선배 안녕하세요."
"인사할 타이밍이냐?"
2학년임에도 세상 무서울 게 없던 것이었다.
"선생님은 어디 계신가요... 어머 이 아인?"
"응! 응! 이 귀여운 남자애가 바로 선생님이셔!"
안 그래도 피부가 얇아 하얗던 노아의 얼굴. 피가 쏠리자 시뻘개졌다.
"츄릅. 이건 완전히 츄릅. 계산에 없던 츄릅. 돌발상황 츄릅."
"유우카씨 침이나 닦고 말하세요..."
"자... 선생님? 언제나처럼 세미나로 모실게요. 일은 안 해도 되니까 자..."
"노아씨 유감이지만 선생님은 아이가 되면서 기억까지 상실했습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는 심리에 좋지 않아요."
아카네는 사람 좋은 것처럼 웃고 있지만, 장갑과 소매 사이로 핏줄이 서릴 정도로 노아의 팔을 붙잡는다.
"어머 아카네씨. 잠깐 놓아주실래요?"
"여긴 엄연히 저희 동아리 부실입니다. 경거망동해주시길."
노아는 손목이 빠질 것만 같았으나 지지 않기 위해 반격한다.
"아카네씨가 터뜨리고 다닌 시설들 생각나실까요? 그거 세미나가 커버 해주지 않았다면 기물파손죄로 빨간 줄 그어졌을텐데 후후... 은혜도 모르고-"
"이런이런. 누가 보면 노아씨 사비로 선심 쓴 줄 알겠어요. 세미나가 내린 임무이니 당연히 요원 보호도 의무적인 거 아닌가요?"
"그 의무도 제대로 안 지키는 사람이 절반이랍니다? 다음부터 제가 안 챙기면 어떻게 될 지 볼까요? 하하..."
"노아씨 그렇게 안 봤는데 소속감이 정말 투철하시네요... 어차피 고교 시절 지나가는 동아리 활동. 호가호위할 정도로 들뜨셨나요? 귀여우셔라"
"하? 하하... 의외의 구석도 있으시네요 아카네씨. 이렇게 재밌으신 분이었다니"
앞에서 보기만 해도 기가 빨린다. 선생은 두려움에 서서히 뒷걸음질 친다.
"저기... 아카네. 싸울 거면 체급에 맞게 노아가 아닌 유우카랑 싸우는 거 어때? 그게 더 합리-"
"회장님은 조용히 하세욧!" "참견하지 마세요! 회장!"
"응......"
반장난으로 시작했던 쟁탈전이 점점 동아리들의 자부심이 충돌하는 신경전으로까지 확전 되어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여어 코타마. 웬 일이래 너가 여길 다 오고"
"네루. 선생님이 어려졌단 소식을 듣고 왔습니다. 만져보고 싶은데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손 잘 씻고"
"잠깐-! 우린 막으면서 왜 코타마 선배는 순순히 보내주는 건데?!"
"너희들은 태도가 문제야! 그냥 보고 싶으면 솔직하게 말하면 되는데. 음흉하게 권위적으로 나오고, 과거 일이나 꺼내고 엉? 마음에 안 든다고!"
"아니 그보다 어려졌단 소식이라니 그게 언제 퍼져? 딱 봐도 코타마 선배 도청이잖아 저거!"
"은근슬쩍 화제 넘기지 마!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유우카 너. 은근슬쩍 지 승질 나면 선배랑 맞먹고. 난 이 세상에서 반존대 화법이 제일 짜증나더라"
"아아아! 그니까...그으... 네루 선배..."
결국 유우카는 끓어오르는 정욕에 세미나로서의 자존심은 전부 버려버렸다.
"죄송합니다. 그 동안 확실히... 예의 없었던 것 같아요. DNA 검사란 것도 사실 명분을 만들기 위한 리오 회장의 억지에요."
"유우카 너!"
"우효~ 좋은 얼굴이잖냐 크큭"
언제나 바가지를 긁는 세미나 학생들이 순한 양이 되었다. 정복감에 네루의 얼굴이 헤실거린다.
"그...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선생님 한 번만 만지게 해주세요."
"시룬데?"
"뭐어! 해달란 대로 해줬잖아!"
"어~ 어~ 또 반말 나온다. 역시 진심이 아니라 가식이었잖아. 어이"
"크윽!..."
유우카는 전황을 살핀다. 노아는 식은 땀을 벌벌 흘리고 있는데다가 리오 회장은 잇따른 하극상에 쭈글쭈글
코유키 고 년은 어디 있는 지도 모르겠고 궁금하지도 않다.
"하아~"
이러고 싶진 않았지만, 유우카는 최후의 협상 카드를 꺼내기로 결정한다.
"그... 네루 선배 이 신발 갖고 싶었지?"
"엉? 뭔데 그게... 헉!"
역시 미끼를 물었다. 네루의 패션 취향에 직격하는 희귀 아이템이다.
조던1 오프화이트 콜라보 시카고 하이(한화 약 8900000 원)
"미친! 이거 내 사이즈는 전부 품절인데 어디서 사는 거야?"
"해외 배송대행 루트야. 중개자 찾는데 얼마나 힘들었다고"
"호오..."
네루는 내적 갈등에 직면한다. 리오가 잠적한 기간 때문에 요근래 수입이 심심하긴 했다.
그래서 가장 만만한 패션부터 절약하고 있던 참인데... 완전히 허를 내주었다.
"선생님 좀 빌려주면 바로 여기로 배송 시켜줄게"
"너 진심이냐... 밀레니엄 공금으로 이런 뇌물을 산다고?"
팩트는 이 정도면 리오가 횡령으로 삥땅친 금액의 발톱때 만도 못하다는 점.
"네루 선배는 우리 학교의 기둥인데 이 정도 특혜는 비리도 아니지 응?"
"콜."
역시 알기 쉬운 성격 답게 조금 빨아주니 금방 좋아한다.
'됐어!'
유우카는 주먹을 꽉 쥐며 싸움을 직관하던 쇼타 선생님을 끈덕지게 바라본다.
"아카네. 그만해. 세미나로 보내주자."
"네? 부장님 어째서-"
"맞아! 우린 주인님을 위한 메이드라고!"
"정신 차려! 그건 위장 신분이잖아. 우린 밀레니엄을 대표하는 특수 부대다. 선생이 오고 기강이 확 해이해져선... 바람직하지 않다 이 말이야"
"딱히 평소에도 군기가 있지 않았다만"
"아앙? 리더 말에 토 달지 마라? 그리고 완전히 주는 게 아니라 빌려주는 거야. 같은 학교니까 보고 싶으면 쉬는 시간에 가면 되지 왜 그리 죽상이야"
"아무리 위장 신분이라 해도, 선생님을 보필할 여건은 되지 않은가 리더. 곧 있을 식사 시간도 우리가 책임지고 싶다."
"카린 말이 맞아 부장! 리오 회장 평소 식습관을 생각해봐."
"나? 왜..."
아스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각조차 없는 거구나.
1+1 상품만 골라 산 뒤 봉투값이 아까워서 조마조마하게 걸어가던 그 뒷모습... 백수 삼촌이 생각나 한숨이 절로 나왔다.
"뭐 됐어! 너희들 딱히 요리 잘 하지도 못하면서. 나보다 잘하는 년 있냐?"
"그럼 리더가 하던가"
"귀찮아."
"제가 하죠."
토키가 당당하게 손을 들었다.
"미리 말하지만 인스턴트 라면은 요리가 아니야."
올렸던 팔이 스르르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간다.
"그리고 간장계란밥 역시 요리가 아니야."
이제야 완전히 내려갔다.
"그렇다면 내가 나설 수 밖에 없군."
카린이 손을 들자 네루는 어깨를 들썩이며 비웃었다.
"보나마나 치킨이나 만들겠지~ 키키킥! 어린이 건강에 안 좋다. 기각!"
"...있잖나 리더. 왜 그리 인종적으로 생각하는가?"
막연한 분위기였던 C&C 사이에서 불안한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다.
"어? 어엉? 왜 그래 갑자기"
"왜냐니. 예전부터 쭉 내 피부색만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가. 피부가 검으면 전부 수박이랑 치킨에 환장하는 줄 아는 건가?"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
"본인의 알량한 선입견이 다른 누군가에겐 큰 상처가 될 거라 인지하지 못하는가? 리더라는 중책까지 짊어진 자가? 난 진심으로 환멸감이 느껴진다."
"야이 씨... 웃기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건... 그...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 미안."
머쓱해진 네루는 머리 뒤를 긁적거린다. 확실히 후배라고 너무 막대했나
"크흠!... 그래서 카린. 무슨 요리를 할 거냐?"
"프라이드 치킨이다."
"야 이 씹년아."
방주인인 C&C가 투닥거릴 동안 코타마는 쇼타 선생을 샅샅이 뒤진다.
"음... 과연 몸과 함께 지능도 유아 퇴행..."
"저기, 코타마."
병풍처럼 가만히 있던 리오가 드디어 행동에 나선다.
"리오 회장 불렀습니까?"
"그... 선생님이 이렇게 된 거 히마리에겐 비밀로 해줘."
"왜죠? 독점욕?"
"그, 그게 아니라! 지금 선생은 성격도 어린 아이니까. 몸이 불편한 히마리는 감당하기 힘들지 않을까 해서. 그 여자 성격 상 무조건 나서다가 제 풀에 꺾일 거야. 난 알아."
"호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사이였다니 의외군요. 뭐 걱정마십쇼. 애초에 히마리 부장은 두집살림 때문에 베리타스로 거의 오지도 않으시니"
"그럼 다행이네"
드디어 세미나는 계획했던 선생님 탈환에 성공하였다.
'세미나라... 평소에도 자주 가서 딱히 재미는 없지만, 유우카랑 노아랑 있으면 편하니까 뭐 그럭저럭'
도착한 그녀들의 부실.
"좋아. 늦은 감이 있지만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어."
"그나저나 회장님. 정말로 확인해야 할까요? 완전히 판박이인데"
머리를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진다. 노아의 고사리 같았던 손이 지금은 크게 느껴진다.
왠지 모르게 어머니의 손길이 생각나 마음이 놓이기도
"수립된 계획을 수정하긴 싫어. 그럼 노아 부탁할게"
"네~"
노아는 평소 들고 다니던 태블릿을 꺼낸다. 옆면에 자성으로 부착되어 있던 펜을 분리하고,
케이스를 열어 머리카락 한 가닥을 건네준다.
"여기. 선생님의 머리카락이에요."
'그게 왜 거기 있는 거니...'
순간 소름이 돋은 선생은 노아의 손을 거부하여 달아난다.
"걱정 마요 선생님. 아픈 건 아니니까."
아아 역시 동물에겐 저마다의 귀소본능이란 게 잠재되어 있는 것일까.
선생은 첫 번째 메모리얼을 개방해준 유우카에게 다가간다. 그녀는 놓치지 않기 위해 품으로 선생을 끌어 당긴다.
"자. 머리카락 좀 실례할게"
'툭'
손톱이 길었던 탓일까. 잘 집히지 않아 그만 주변에 있던 머리카락까지 뜯겨 나간다.
"아얏!"
"리오 선배! 조심하라고요 정말"
"아... 미안..."
"저한테 버려주실래요?"
그렇게 노아의 머리카락 에디션이 늘었다.
"난 검사를 의뢰하러 바이오테크 교실로 갔다 올게."
"천천히 와도 돼요~"
부장이 나가자 둘은 서로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들떠버렸다.
"츄르릅...! 이제 무슨 짓을 해버릴까 노아?"
"후훗. 당연히 어려진 선생님을 마구 예뻐해 줘야 하죠. 유우카쨩"
"싫어요! 안돼요! 하지 마세요!"
가히 살의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음기가 느껴지자 선생은 도주를 시도.
그러나 작아진 몸이라 체력이 부족한 세미나 학생들도 손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정말~ 기억이 없는 건 애달픈 일이군요. 선생님이 저희에게서 도망치다니"
"안타깝지만, 지금이라도 새로운 추억을 만들면 되겠지?"
"유우카쨩이 감성적인 말을 하다니. 후훗. 선생님 덕분이네요?"
선생님을 지정석에 앉힌 다음 둘은 머리와 얼굴을 마구마구 더듬어댔다.
새끼 강아지가 덜덜 떠는 이유를 알겠다. 자기보다 거대한 것들이 귀엽다며 만져대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압박이었다.
"으아아~ 저기. 누나들 부담스러운데..."
"꺄아! 어떻게! 누나라고 했어 노아!"
말한 거 가지고 호들갑이라니. 정말로 펫 취급이구나 싶었다.
"이왕 말이 트였으니. 소개를 해볼까요?"
"그래! 저는... 아, 어린애한테 존댓말은 어색한가. 난 하야세 유우카. 2학년. 세미나의 회계 담당이야."
"저는 우시오 노아랍니다. 똑같은 2학년. 세미나의 서기랍니다."
"어어... 저는 OOO. 11살. 잘 부탁드립니다 누나들"
"으헤헤... 누나...."
유우카는 선생의 말에 집중하느라 입에서 침이 나오는 것까지 조절 못하는 상황이었다.
"엄청난 집중력이군요 유우카쨩."
"츄릅! 저기 혹시 특기나 취미는 있니? 헤헤"
"저 그게... 별 거 아닌데"
"말해봐 말해봐!"
이런이런 아무래도 선생이 숨겨 왔던 비장의 무기를 꺼낼 타이밍인가 보다.
"팔꿈치에 혀가 닿습니다!"
"!"
눈이 휘둥그레지며 둘은 곧바로 핸드폰 카메라를 준비한다.
"시범 보여주세요."
"에베베...!"
사실 혀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 어려서 유연한 관절을 이용해 최대한 힘을 줘 당기는, 별 거 아닌 특기.
하지만 성공하니 다들 화색이 돋았다.
"꺄아~ 잘한다 선생님!"
유우카는 혀 부분을 확대한 뒤 홈화면으로 설정한다.
"감사합니다."
"혹시 누나들에게 궁금한 점이 있나요? 후훗. 전 기억력이 좋으니 뭐든지 말해줄 수 있답니다."
흐음~ 다들 친절해서 고맙긴 하다만, 이래서야 어른일 때와 똑같은 느낌 아닌가.
매너리즘이 느껴진 선생은 살짝 변주를 주고 싶어졌다.
예를 들자면 한 쪽이 질투하는 귀여운 모습이 보고 싶구나.
"나. 원래 모습은 어땠는지 궁금해요. 유우카 누나."
"에에! 처음부터 이름으로 부르다니. 어릴 때부터 습관이었구나. 히히."
실소를 머금으며 핸드폰 앨범에서 선생이 찍힌 사진을 보여준다.
"짠~ 어때 미래 자기 모습은?"
"유우카 누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그야 잘생겼..."
유우카는 말끝을 흐리며 뜨거워진 얼굴을 식히기 위해 부단히 흔들어댄다.
"아하하! 준수한 외모라고 생각해! 하하..."
"그럼 우시오 누나는요?"
"후훗 저는......"
위화감을 느낀 노아는 준비한 말들을 도로 목으로 삼킨다.
"어라. 저는 왜 성으로 부른 걸까요?"
"에? 보통은 그렇게 부르지 않나요?"
"하지만 유우카쨩은..."
"어?! 설마!"
유우카는 완전히 광분하여 의자를 넘어뜨리면서 일어난다.
"혹시! 어른이었을 때 기억이 아주 미약하게 남아 있는 거 아닐까?"
"그, 그런가요?..."
"응! 난 당번도 제일 많이 불려나가고, 또 첫임무도 같이 했으니까. 나만큼은 기억이 나는 걸지도! 그렇지 선생님?"
"어어~ 유우카 누나는 뭔가 익숙한 느낌이야. 분명... 수학을 잘하지 않았어?"
"정말이잖아! 응! 응! 잘한다 선생님! 그렇게 차근차근 기억해내가는 거야!"
"선생님에게 유우카쨩은 특별한 학생이었나 보군요."
"아하하~ 부끄럽잖아."
"저는 아니고요..."
"엣. 저기 노아 그렇게 해석하는 건 비약 아닐까나..."
순식간에 침울해진 노아 때문에 유우카는 애가 타는 듯 어쩔 줄 몰라했다.
"그... 갈증나지 않아? 오늘따라 선생님한테 말을 많이 걸어서 그런가. 흐음... 노아 뭐 마시고 싶어?"
"에에. 저는 물이면 괜찮아요."
"선생님은?"
"커피... 우유."
"커피우유도 카페인이 들어서 어린애들한테 안 좋아요. 요즘엔 커피 우유가 아니라 전부 라떼라고 부르더라고"
이런 상황에서도 똑 부러졌구나.
유우카가 퇴실하자 노아는 물끄러미 선생을 노리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부자연스러운 퇴장은, 유우카가 노아를 위해 둘만의 시간을 마련해둔 걸까?
'스르륵'
낙엽 속에 숨은 뱀처럼 서서히 거리를 좁히다, 자연스럽게 선생을 끌어 안아 자신의 품에 안았다.
"......"
"......"
아무 말도 없이 안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무서운 감정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노아의 품은 따뜻해서 거부하진 않았다.
"죄송해요 누나 기억 못해서..."
그냥 궁금증에 해본 장난인데 생각보다 커져서 당황스러웠다.
"훗. 아니에요. 확실히 전 유우카쨩보다 접점이 없었으니깐요."
그녀는 평소처럼 웃다가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창가와 가까이 위치한 책상으로 선생을 옮긴 다음
창 밖이 잘 보이도록 반대 방향으로 앉혔다.
"봐요. 벌써 해가 지네요."
"응... 오늘은 시간이 빨리 가는 느낌이에요."
저녁 시간. 해와 달이 공존하는 평안한 시간. 노아는 선생님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회상에 잠긴다.
"가르쳐 드릴까요? 저랑 선생님이 처음 만났을 때"
"네. 가르쳐 주세요."
"으음... 저는 사실 어른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뜬금없는 고백에 선생은 입이 떡 벌어진다.
"누나는 기억력이 비상하거든요. 축복 같지만 저주스럽기도 합니다? 사람이 한 말과 행동을 전부 기억하고 있으면, 거의 무조건 모순이 생기거든요."
노아는 어린이가 된 선생이라도 상관 없는지 어깨에 얼굴을 파묻어 잠깐 동안 의지한다.
"제가 본 어른들은 전부. 이중잣대를 들이밀고, 신념이 약해 자가당착에 빠지는 그런 추한 인간들이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처음 부임했을 때도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았어요. 학생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그저 짤릴 걱정 없는 직장이 목표였던... 뻔한 어른으로 생각했으니"
노아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긴장하지 말란 듯이 선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서론이 길었네요. 선생님과 처음 만난 건 황륜대제 준비 때문이었죠. 황륜대제란... 여기서 열리는 가장 큰 체육대회랍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한테 특별한 감정은 없었어요. 그저 대회 준비를 위한 공적인 만남이었을 뿐."
"사실, 선생님보단 선생님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유우카쨩이 귀여워서 같이 있었던 것 뿐이었죠."
"그러다가 어느 날. 밤에 T라인 전철을 타는 일이 있었어요. 우연히 옆 좌석에 선생님이 있었는데 솔직히 인사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죠."
노아는 힘을 주어 선생을 안은 채로 의자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창 밖의 하늘을 가르킨다.
"그 때 봤답니다. 전철이 야외로 나갔을 때, 선생님이 하늘을 바라보며 아이같이 해맑게 웃는 모습을... 그 모습을 보니 제 마음에 있던 불신감들이 깨끗하게 지워진 기분이었어요..."
"에에... 왜 그 때의 나는 웃었던 걸까요"
"훗. 저도 궁금해서 다가가 대뜸 물어봤죠. 인사도 없이. 그러자 선생님은 키보토스의 하늘은 별이 잘 보여서 예쁘다고 말했어요. 원래 살던 곳은 공해 때문에 별이 보이지 않았다고"
"흐음......"
"그렇게 순수해 보였던 어른은 처음이라 엄청 귀여웠답니다? 우린 당연하다 느끼고 지나쳤던 배경일 뿐인데. 거기에 감복하시다니. 색다른 시선이었죠."
"그 계기로 친해지고 싶어서 유우카쨩을 따라가 인사도 나누고... 일도 도와주고..."
언제나 부드러워 보였던 노아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구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려준 보답으로 서비스 하나를 마련한다.
'꾹. 꾹.'
선생은 유리창에 손가락을 대어 무언갈 적으려 한다.
"응? 왜 그러시죠 갑자기?"
"아니... 뭔가. 예전에 이랬던 기억이 나. 노아 누나랑"
"......에?...기억 나셨나요?......"
당혹감에 커진 눈이 점점 감기기 시작한다.
배덕감을 없애기 위해 완전히 눈을 감은 채. 노아는 선생님에게 입을 맞추기 위해 고개를 내린다.
"나 왔어."
"쿠훕!"
유우카의 완벽한 난입 타이밍. 깜짝 놀란 노아는 잡고 있던 선생을 놓칠 뻔했다.
"응? 거기서 뭐 해...?"
"에에... 그게..."
"레슬링 했습니다!"
"으응! 맞아요 유우카쨩. 역시 남자애들은 이런 걸 좋아하네요! 이럇! 먹어라 파워밤!"
"호에엥~!"
"...그래? 정말인지 이 부분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겠어. 선생님하고 키보토스인들의 완력 차이에 대해서"
"그나저나 유우카쨩 벌써 다녀오셨군요?"
"응. 아, 이건 나중에 먹자. C&C에서 저녁을 차렸다고 선생님 좀 데리고 오래."
댓글 8
카린 후라이드 치킨 ㅋㅋㅋㅋㅋㅋㅋ
이시리즈.. 최고야
이거 사실 기억 있었다는 거 들키면 선생을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하겠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