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시스템을 한 번 경험해본 이상, 사용하지 않았던 과거로 돌아가기 힘들겁니다. 락인효과라고 하죠. 대체불가결한 서비스에 전환 리스크까지 발생한다면 본능적으로 꺼려집니다."
"프라나쨩. 내가 졌으니까 제발 살려줘!"
베리타스 부실엔 훌쩍거리는 마키의 콧소리만이 존재한다.
숨 쉬는 것도 허락을 맡아야 할 것 같은 살풍경 속에서, 프라나는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누적된 정보로 베틀을 짜기 시작한다.
"아직 베타 테스트 단계이지만, 예외적으로 우선 도입하겠습니다."
치히로의 관자놀이 쪽으로 짤막한 그래프가 생성되었다.
+전자 제품 쇼핑 +테크 리뷰 +인텔리
지리멸렬한 단어들이 치히로 주변을 부유한다. 아직 시험중인 시스템인만큼 아직 무르익지 않았나 보다.
"가시성이 좋지 않겠지만 집중해주세요. 현재 카가미 치히로양에게 생성된 키워드들은 그녀의 성향, 기호, 좋아하는 것들은 뜻합니다."
"유용하구나... 그치만 현 상황에 도움이 될만한 실마리는 보이지 않는 걸"
"대기. 딥러닝이 진행중 입니다."
정리된 도표에 블러 현상이 일어나더니 이미지가 바뀐다.
탐색 범위를 좁혀 더 예리하게 파고든 것이다.
+성숙함 +침착 +능동적
"QED. 치히로양이 선호하는 인간상을 도출해냈습니다. 결과를 토대로 대응책을 설정합니다."
일 하는 척 하기 위해 했던 쓸모없는 타이핑은 그만두고, 치히로를 확인했다.
피곤에 절여진 눈꺼풀은 지금이라도 감길 듯 하다. 이럴 땐 괜히 부르지 말고 냅두는게 상책 같은데...
1. 침묵을 지킨다. -
2. 고개 들어라 마키. 넌 죄인이 아니다. ↓
3. 미안해 치쨩. ↑
'치, 치쨩~?'
속으로 경악했지만 용케도 프라나는 이성의 균열을 감지했다.
"해버리세요."
"아니, 어른 답게 바로 사과하는 게 좋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그 호칭은 좀 아니지 않니? 장난 치는 거 같아서"
"이이제이. 오랑캐는 오랑캐로 물리치듯. 불은 폭발을 이용해 끌 수 있습니다."
"이해가 잘..."
"치히로양이 처한 현실을 보면 답이 나옵니다. 부장은 공석에 학교에서 부비를 지원해주지 않아 학업과 함께 겸업을 하는 중."
그렇게 말하니 치히로의 어깨가 축 늘어난 것처럼 보이는 착시 효과가 일어났다.
"부원들은 허구한 날 크래킹을 저지르는 문제아들. 유일하게 의지할 만한 곳은 아마... 선생님을 제외하면 없겠죠? 그러니 여기서 확실히 각인하는 겁니다. 사소한 실수 정도는 눈 감아줘도 되는, 친근한 관계라고"
과연 이미 잘못을 저지른 상황. 전화위복을 위해선 강수 밖에 남아있지 않은 듯 하다.
지금까지 프라나의 선택지를 골라 손해본 적은 없으니. 홧김에 그 호칭을 불러본다.
"저기, 그... 미안해."
"뭐가? 아, 혹시 규동집 이야기 때문에? 됐어. 신경 쓰지 마."
"절대 아줌마 같단 뉘앙스가 아니라... 치쨩은 쿨뷰티계니까 그런 시선에 얽매이지 않을 줄 알고 하하..."
"쿨뷰티라니... 히마리 같은 말을... 응?"
머리라도 한 대 맞은 듯 졸려 보이던 인상이 확 날라갔다.
"방금 뭐라고?"
무던하던 치히로에게서 이 정도 반응이라니. 프라나가 말한 대로 충격이 간 듯 하다.
"치쨩이라고 했는데... 귀여워 보여서."
"그,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정말인지... 이상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핀잔을 먹었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치히로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기 때문일까.
"후우~"
어지럽던 머릿속이 정리되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난다. 치히로는 그대로 씻기 위해 세면 도구들을 챙긴다.
"난 이만 자러 갈테니깐. 다들 늦게까지 지새지마."
"네~"
퇴실한다. 뭐랄까 보스를 잡은 성취감이 머리를 뜨겁게 만들었다.
"이야~ 살았다... 그치 마키?"
"......"
"마키? 같이 게임하자며?"
"......"
하지만 마키는 묵묵부답이다. 굳게 닫혀서 아랫입술이 윗입술을 숨겨버린 모습은, 무언가 열기 위한 주문이 필요해보인다.
여자에 익숙해진 선생은 무엇이 필요한지 단박에 느껴버렸다.
"...마키쨩?~"
"응! 응! 불렀어?"
하레와 코타마까지 무언갈 원하는 야릇한 눈빛으로 선생을 보고 있다
당장 치히로의 기분은 좋게 만들었지만, 이런 후폭풍까지 계산하지 못하였다.
아무래도 한 사람만을 위해 답변하는 게 능사는 아닌가 보다.
***
'하여간 요즘 애들은 게임에도 접대가 있단 걸 모른단 말이야. 쯧쯧'
마키와의 게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시간이 남는 학생과 직장을 병행하는 어른에게 게임이란 그 무게감부터 달랐다.
'스륵... 스륵...'
자판기 앞에서 음료를 뽑던 도중. 인기척을 느꼈다.
금방 샤워한 듯한 뽀송뽀송한 파자마. 유우카다. 편의점에서 야식을 사오는 참으로 보인다.
"흐음~"
봉투 안에서 응축된 향에 눈길이 팔린 나머지. 구부정한 자세로 슬리퍼를 끌고 다닌다.
세미나의 냉혹한 회계란 칭호가 무색할 정도로 흘러 빠진 모습...
요점만 말하자면, 굉장히 놀려주고 싶단 뜻이다.
"유우카~"
"앗! 선생님?!"
선생을 인식하자 헤일로에 숫자가 드리운다. 67.
역시 인연이 긴 만큼 낮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어... 크흠! 시간이 늦었다구요 선생님? 맨날 피곤하다고 노래를 부르시면서..."
이런이런... 당황했다고 어쭙잖게 잔소리를 하는 꼴이라니.
역시 똘똘하다고 해도 결국엔 학생. 본인은 완전 약점을 드러내고 있지 아니한가.
"유우카야말로 밤에 편의점 치킨이라니. 아침에 얼굴이 부울걸~"
"저, 저도 생각 없이 먹진 않거든요? 원래는 샌드위치를 먹으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치킨이 할인 중이라 그... 기회비용을 고려해서 효율을 택했을 뿐이에요!"
"하하. 괜찮아. 괜찮아."
미리 하려던 말이 있었으나, 곧바로 선택지가 등장하여 그대로 삼켜버렸다.
1. 원래 부었으니까. ↓
2. 안 뺏어 먹는다 ↘
3. 부어도 귀여우니까. ↗
원래 뱉기로 했던 말은 흔적도 없이 잊혀지고, 반사적으로 3번을 택한다.
"유우카는 좀 부어도 귀엽기만 할 거야."
"에?!... 으으~ 정말~ 이번엔 제가 졌으니까 그만 좀 놀려주세요 선생니임..."
"놀리는 게 아니야."
다 마신 캔을 분리수거함에 넣고 돌아가려 한다.
유우카는 헤어짐의 여운 때문인지. 괜히 할 말이 없는데도 말을 거는 소녀 같은 감성을 보여준다.
"선생님."
"응?"
"...일찍 주무셔야 해요. 늦게 자면 건강에 안 좋으니까."
"그래. 고맙구나."
유우카 67→70
점수가 오른다. 기쁘다. 하지만 동시에 뭐랄까... 머리가 굳어가는 찝찝한 편안함이 느껴진다.
"끄흠!"
헛기침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다.
옅은 조명들마저 반사 시키는 새하얀 초상.
히마리는 작은 달처럼, 고즈넉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 히마리."
미미한 기운이 사물보단 배경에 가까웠지만, 이름을 불러주자 금방 생기를 찾는다.
"밤산책이신가요? 후후. 생각을 정리하기에 이만한 활동이 없죠."
누구보다 여성스러운 심성, 신체의 결손, 전지라고 불릴 정도의 정보력.
어쩌면 선생 입장에선 자신과 가장 동떨어진 존재처럼 느껴질 터.
평소엔 가볍게 대화하곤 하지만 혹시 그건 히마리의 일방적 배려가 아닐까 의심이 든 적도 있다.
때문에 지금은 CA시스템의 존재가 조금은 두렵다...
히마리의 우스운 허풍들은, 실은 내면의 어둠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 아닐까 하고...
히마리 65
+칭찬 +경외 +공주님 안기 +리오 기습 비난
아 그냥 투명했던 아이였구나. 다행이다.
마침 칭찬을 좋아한다니 조금 오글거리는 대화도 시도 해볼까.
"히마리가 깨어 있을 줄은 몰랐네. 미녀는 잠이 많다는 말도 있잖아."
"네엣?!... 화, 확실히 여유 있는 수면 시간은 피부의 회복을 돕긴 하지만!... 근거 없는 낭설이랍니다 호호. 그야 여기 산증인으로 초천재병약미미에윽-"
그녀 답지 않게 혀가 꼬여 발음이 샌다. 생각이 폭발하지만 입이 하나 뿐이라 병목이 생긴 듯하다.
65→68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자뻑을 하는 주제에 막상 칭찬에 약하다니. 천재와 괴짜는 실로 한 끗 차이.
"뭐, 속설이라해도 일찍 자서 나쁜 건 없어."
"저도 잠자리에 들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공교롭게도 제 휠체어는 인체공학적으로 안락한 디자인이기에... 부끄럽지만 저도 모르게 졸 때가 있어서 말이죠. 훗."
마치 동행을 권하듯 오묘한 시선을 보내온다. 아마 히마리가 다리를 쓸 수 있었다면 옆에 나란히 서있었겠지.
"그럼 해볼까. 밤산책."
뒤로 돌아가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히마리의 몸이 감전 당한 듯 쭉 펴졌다.
"어멋!... 끄흠! 그럼 염치를 무릅쓰고... 선생님의 시간을 좀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대답 대신 손아귀에 힘을 주어 그녀의 발이 되어준다.
타인에게 몸을 의탁하는 건 밀레니엄의 기술로도 대체할 수 없는 경험인지
히마리는 수시로 몸을 베베 꼬며 자세를 고쳐 앉아 봤지만 금방 또 눈치를 본다.
"이 시간까지 뭐하고 있었니?"
"아아. 실은 말이죠... 이런 질척이는 여름밤엔 괴담을 감상하곤 한답니다? 제 은밀한 취미죠."
뒤늦게 히마리의 관자놀이로 추가 정보가 뜬다. +오컬트 전반
생각해보니 이런 취미도 있었지. 오컬트 쪽으로 더 유명한 아이들 때문에 잊어버렸다.
"호오~ 흥미로운 괴담이라도?"
"네... 정 궁금하시다면 알려드리죠. 이 학교에 암약하고 있는 추악한 원혼을......"
"두근거리네"
"혹시 선생님은 밀레니엄 기숙사의 규칙에 대해 알고 있나요?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밤 11시 소등 이후론 샤워가 금지되어 있단 겁니다."
"음... 시끄러우니까 금지 아닐까? 아닌가... 밀레니엄은 방음 설계도 최첨단이던데"
"역시 날카로우시군요. 사실, 대외적으로 밝히기 힘든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학생이 규칙을 어기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 샤워를 했었는데... 누군가가 화장실 밖에서 말을-"
'쿵쿵'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순간적으로 말이 끊겨 아래를 확인해보았다.
"풉!"
손을 무용 자세처럼 치켜든 히마리가 그대로 얼어있던 것이다.
"히마리? 그냥 바람 소리야."
"아... 아... 그렇군요. 후우......"
"뭐야~ 취미라면서 무서워하는 거야?"
"그, 그야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흥미가 생길 리 없잖아요?! 무서워해야 비로소 취미로 완성되는 거랍니다!"
자신 있게 분위기를 잡았지만 실패하자 변명하기 급급한 모습.
어쩌면 프라나가 맞을 지도 모르겠다. CA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이런 귀여운 면모 못 보고 지나쳤을 지도.
다음 편에 계속
댓글 6
뭔가 시스템에 점점 의존할거 같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