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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구금과 호의호식
“흐응. 근데 왜 사오리 네가 감시원 알바 같은 걸 하고 있었던 거야?”
샤워를 마친 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맡기면서 말했다. 지금은 목욕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감싸고 있다. 이제 그 너덜너덜한 바니걸 옷은 입고 싶지 않다.
갇히게 되기는 했어도 상상했던 만큼 어두운 곳은 아니었다.
창문과 출입구만 외부에서 잠글 수 있도록 해 놓은 넓은 오두막. 그런 느낌이다. 다른 건물과 구조가 같아야 더 저렴하다느니, 아마 그런 이유에서 이렇게 했을 것이다.
에어컨도 있고 냉장고에는 음료수도 있었다. 유리도 방탄이 아닌 것 같으니 도망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다.
“인명구조 경험이 있는 인력을 확보하지 못했던 모양이야. 모집 요강을 보고 발키리와 관련이 있는 줄 알았으면 피했을 테지만.”
사오리는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이 녀석은 계속 수영복 차림이다.
“...뭐 해?”
“네 죄는 확정된 게 아니지만 나는 지명수배 중이야. 그런 상대를 이런 곳에 가둘 리가 없어. 아마 함정일 거다.”
공격당할 가능성을 경계하는 모양이다.
하긴 총이 없는 지금 습격을 당하면 상당히 위험하다. 물에 빠졌을 때 총만은 챙겨뒀지만 아까 키리노한테 압수당했다. 그리고 그 방망이나 나머지 짐들은 배와 함께 가라앉은 모양이다.
하지만 『스즈』가 무사했다면 저렴한 대가겠지.
“발키리밖에 없다면 함정이라 해도 어떻게든 될 거야. 그 녀석들은 거의 별 볼일 없는 애들이고 죄다 리조트에 놀러왔다며 신난 모양이던데. 그래서 날 도와주러 온 사람이 너밖에 없었던 거잖아?”
“? 그래도 치안 유지를 담당하는 자들 아닌가?”
“1년에 한번 있는 친목회라는 게 그런 거지. 여행지까지 와서 범죄자들 뒤치다꺼리를 하고 싶어 할 녀석은 없으니까. SRT도 해체됐으니 불량배 입장에서는 수월해져서 좋은 일이지만.”
“그런가.”
납득했는지 사오리가 경계를 풀고 다가온다.
“키리노가 갈아입을 옷이랑 밥 갖다줄 때까지 너도 샤워하고 오지 그래?”
“그래. 이 정도 시설을 쓰게 됐으니 더러운 건 깨끗하게 씻어내야겠지.”
자신의 그 탄탄한 몸을 보더니 사오리는 방을 나서려 했다.
“아~. 네가 바다에 빠져서 흠뻑 젖은 건 나 때문이잖아? 뭐 일단은 한번 더 고맙다는 말은 해 둘게.”
“? 신경 쓸 거 없어. 그게 내 일이었으니까. 아까 전까지는 말이지.”
그러더니 사오리는 문을 쾅 닫았다.
“...귀여운 구석이라고는 없는 녀석 같으니.”
괜히 친한 척하려는 것보다야 훨씬 낫기야 하지만. 어쨌든 구해줬다는 사실은 틀림없으니 방금 그걸로 쌤쌤이라고 치자.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넓은 방에서 혼자 소파 위에 걸터앉아 천장을 올려다본다. 이름 모를 풍차 같은 물건이 빙글빙글 돌아가고 있다.
‘아이아이 섬’은 아주 오래 전에 버려진 방어 거점이었다고 한다. 무엇으로부터 어디를 방어하기 위해서인지는 관심 없고, 진지에 대포까지 거창한 시설들이 남아있어서 총학생회가 발키리에 관리를 맡겼다나 뭐라나.
“역시 패스해야겠지. 아깝긴 하지만.”
발키리만이라면 몰라도 총학생회를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한탕 하기에는 성가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샬레 같은 데를 괜히 지키지 말았어야 했나.
“...아니, 그 녀석을 이용해서 거래하는 건 어떨까?”
샬레의 선생은 불량배라도 말만 통하면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사람은 아니다. 테러리스트 같은 학생들에게도 친절하다고 들었다. 뭐 불량배답게 납치한다는 수단도 있지만, 그 녀석을 인질로 삼으면 어떻게 되는지 그 전 카이저 이사가 알려줬으니 관두기로 하고. 지난 일의 보답으로 이 섬을 쓰게 해 달라고 하면 통할지도 모르겠다.
“음, 그럼 잘해봐야 헬멧단 위문 여행지 정도려나.”
사이좋게 지낼 수 있겠냐고. 그래도 부하들은 다들 그걸로 기뻐할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던 나에게 졸음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방금 전까지 진짜 노를 젓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라 웃음이 터질 뻔했다.
*일본에서는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노를 젓는다(船を漕ぐ)’라고 표현함
(어라, 뭔가 중요한 걸 잊어버린 느낌이 드는데…)
삐익.
의식이 날아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갑자기 울린 초인종 소리에 다시 정신을 차렸다.
“...키리노인가.”
눈을 비비면서 일어선다. 어차피 현관문은 밖에서 잠기는 문인데 초인종을 누르는 거냐. 겉모습이나 말투가 그렇듯이 규칙에 엄격한 녀석이다.
조금 쌀쌀한 기운을 느끼면서 현관으로 향한다.
삐익.
“예이, 예이. 알았어. 열어도 된다고.”
어색한 느낌으로 철컥철컥 잠금을 푸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린다.
“아, 안녕하세요…!”
띠용.
핑크머리를 한 쪼그만 학생이 나타났다.
하얀색 긴 셔츠가 원피스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 셔츠 사이가 조금 벌어져서 속에 검은색 수영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어라? 너…”
“저기, 부탁을 받아서 제가 밥을 가져왔는데…”
둘 다 굳어버렸다.
나는 뭔가 중요한 게 떠오를 것 같다가도 생각이 나지 않아서.
핑크머리는 내 모습을 보더니 놀란 듯이 눈을 고양이처럼 하더니 크게 뜨고서.
아니. 왜 나를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나는 핑크머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다.
속옷도, 목욕수건도.
““꺄아아아아앗!””
나와 핑크머리는 비슷한 비명소리를 내지른다.
“죄송해요죄송해요 설마 나체족(?)일 줄은 몰랐어요!?”
“아, 아니거든!? 보여주려던 게 아니라고!”
“무슨 일이야! 적습이냐!?”
사오리가 욕실에서 뛰쳐나왔다.
무기로 쓸 생각인지 젖은 수건을 양손으로 쥐고 있지만 어느 곳도 감추지 않았다.
“윽!? 너는 시모에 코하루?”
지금까지 본 표정들 중에 가장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사오리가 말했다.
알몸으로.
“진짜! 야한 건 안 돼애애애!”
5 강습
똑딱 똑딱.
아날로그 시계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진다.
창문을 통해 붉은 노을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나는 다시 소파에 몸을 파묻고 있었다.
핑크머리 여자, 시모에 코하루가 가져다 준 식사를 해치웠다. 닭고기나 생선, 채소가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로 충분히 배를 채운 뒤 코하루와 사오리의 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
코하루는 거실에 있는 큰 테이블에 쪼그려 앉아 있고, 사오리는 창가에 서서 팔짱을 끼고 있다.
조금 문제는 있었지만 갈아입을 옷도 받았다. 나는 무지 흰색 셔츠를 데님 반바지에 쑤셔넣었다. 사오리는 개인 물건인지 딱 맞는 청바지에 배꼽이 드러나는 거의 수영복 같은 옷을 입었다. 짧은 수건을 아직 목에 걸고 있다.
할 얘기가 있어 보이길래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
이 녀석들 아무 말도 안 하네. 어느새 저녁이 됐잖아.
나까지 입 다물고 있을 이유도 없는데 괜히 움직이다 소리를 내면 눈에 띌 것 같다. 이 녀석들이 무슨 관계인지 나는 딱히 관심도 없고, 이왕이면 냉장고에 있는 주스 같은 걸 가져와서 좀 더 느긋하게 시간을 때우고 싶다.
“...저기, 사오리, 씨?”
“사오리라고 불러도 돼.”
조심스럽게 입을 연 코하루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오리가 말했다.
“아으…”
그러더니 다시 조용해졌다. 방금 그건 사오리가 잘못한 것 같다. 하는 짓 하나하나가 너무 위협적이다.
아니, 근데 진짜 귀찮네 이 녀석들. 여기에는 나도 있잖아. 확 끼어들어서 빨리 말하라고 소리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나도 사오리한테 할 말이 있었는데.
“사오리! 그,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코하루가 어색한 목소리를 낸다.
오, 드디어 이야기가 진행되겠는데. 얼핏 보면 사오리가 협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잠시만. 바깥 상태가 이상해.”
“에…?”
사오리가 한 손을 들더니 벽에 몸을 숨기면서 턱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너무 조용해. 아까 전 그 소란스러웠던 게 어디로 갔지…?”
부드러운 소파에서 벗어나기 아쉬웠지만 나는 조용히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섰다. 잊지 않고 슬리퍼를 신는다.
“듣고 보니 그러네… 뭐야, 심심하지 말라고 이러는 거야?”
창문으로 다가간다.
“에? 에?”
“너도 이리로 와. 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너 혼자니까.”
움찔하는 코하루에게 손짓하자 의외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재빠르게 다가왔다. 나와 사오리는 완전 맨손이다.
“창문을 파괴하겠다. 신호에 따라 밖으로 뛰어나가. 정면에 키가 큰 야자나무 한 그루가 있어. 약간 오르막길이야. 거기까지 달려.”
사오리의 낮은 목소리가 작게 울린다. 나와 코하루는 고개를 끄덕인다.
셋, 둘, 하나. 사오리가 손가락을 줄여 나간다. 다른 한 손은 나무 의자를 움켜잡고 있다.
쨍그랑!
사오리가 팔로 휘두른 의자가 유리창을 파괴했다.
그와 동시에 튀어나간다. 슬리퍼 덕분에 발은 무사하다. 이런 것 때문에 발을 다쳤다간 제대로 달릴 수 없다.
“먼저 가!”
사오리는 분명 가장 뒤에서 올 생각일 것이다. 내가 선두에 서고 코하루를 사이에 두고서 사오리가 따라오는 순서로 가는 게 베스트일 것이다.
오두막에서 나온 순간 기척이 느껴졌다.
“우옷!?”
재빠르게 고개를 숙인다. 검은 덩어리 같은 게 스쳐 지나갔다.
온몸을 시커먼 장비로 두른 무장한 병사가 돌격소총을 들고 덤벼든 모양이다.
풀페이스 헬멧에 방탄조끼, 정강이까지 덮는 투박한 부츠. 안에 있는 사람의 얼굴도 체형도 전혀 알 수가 없다.
“뭐 하는, 짓이야!”
자세를 낮추는 동시에 그대로 낮게 뛰어올라 몸통을 양 다리에 끼워넣어 끌어내렸다. 몸무게를 전부 실으면 아무리 상대가 중무장을 했더라도 넘어뜨릴 수는 있다.
“코하루!”
“네, 네엣!”
힘찬 대답이었다. 코하루는 들고 있던 저격소총을 근거리에서 조준하고 쐈다. 방호력이 약한 목 부위에 명중한 덕분인지 기절한 것 같다.
나는 짧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좀 하는데! 침착하잖아!”
“가, 감사합니다…?”
칭찬해서 놀랐는지 코하루는 계속 눈을 깜빡였다.
“서둘러!”
사오리의 지시가 날아든다. 향하려는 곳에 석양이 강하게 내리쬐어 눈이 부셨다. 아까 말했던 큰 야자나무가 보인다.
옆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병사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도 오두막을 포위했다가 한 지점이 뚫리니 다른 녀석들이 모여든 모양이다.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사오리가 순식간에 다가갔다. 목에 두르고 있던 짧은 수건의 양 끝을 상대의 돌격소총 총신에 재빨리 감더니 발사하는 순간 방향을 바꿨다. 총알은 다른 병사에게 명중했다.
“간다!”
적의 장비는 견고하고 무겁다. 이럴 때는 빠르게 달려서 거리를 벌리는 게 정답일 것이다.
석양은 다소 눈이 부시지만 저 풀페이스 헬멧은 선글라스 역할을 한다. 꾸물대다간 저격당할 것이다.
“야자나무에 도착하면 옷을 벗어.”
“!? 왜!? 너도 나체족이야!?”
사오리의 침착한 목소리에 이어 코하루가 소리쳤다.
“나는 나체족 아니라고 했잖아!”
“잘은 모르겠지만 문제가 없다면 말리지는 않아. 최악의 경우에는 인명구조 실적도 있으니까.”
그 말에 나도 이해가 됐다. 사오리가 말하는 방식이 워낙 간결해서 알아듣기가 어렵다.
“수영복만 입으라는 소리야!”
나는 셔츠에서 팔을, 반바지에서 다리를 빼면서 말했다.
속에는 스포츠 타입 수영복을 입었다. 위아래로 나뉘어서 무슨 단거리 경주를 하는 사람이 입을 것 같이 딱 맞는 수영복이다. 색상은 짙은 색 와인 레드다.
“아! 으, 응…!”
코하루도 원피스 같았던 와이셔츠를 벗어 던졌다. 검은색에 흰색 꽃무늬. 근데 목부터 배꼽에 걸쳐서 검은 선 같은 게 있는데 저것도 옷인가?
“뛰어!”
사오리는 저대로 뛸 생각인가 보다.
야자나무 너머로는 수평선이 펼쳐져 있다. 즉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지금은 수영복이라서 차라리 다행일까. 저 녀석들의 장비로는 이렇게 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절벽에서 바다로 다이빙을 했다.
☆
(어, 어쩌죠.)
나카츠카사 키리노, 대위기입니다.
저는 책상 밑에 입을 틀어막고 숨어 있습니다.
감시원들의 탈의실과 휴게소를 겸하는 건물에 있습니다.
코하루 씨에게 두 분이 먹을 식사와 갈아입을 옷을 맡긴 뒤에 이곳이 조금 지저분하길래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요.
이곳은 해변에 인접한 장소입니다. 창밖이 시끄럽다 싶어서 보니 해변에 검은색 장비로 무장한 세력이 나타났습니다.
놀고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붙잡혔고, 얼마 없었던 감시나 경비 중이던 사람들도 머지않아 제압당한 모양입니다.
고요함에 휩싸여 홀로 이곳에 있던 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숨어 있습니다.
(그, 그래요. 후부키한테 연락을…!)
동기인 네무가키 후부키는 이번에 적당한 이유를 대고 불참했습니다. 레크리에이션 같은 게 귀찮다며 평소 같은 말투로 말했는데, 지금은 기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겠어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모모톡을…
(신호 없음?)
핏기가 싹 가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후부키에게 바다 사진을 보냈으니까요.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재밍으로 방해를…?)
무장 세력의 장비는 충실해 보였습니다. 아마도 이 섬 일대에서 휴대폰 같은 것들은 사용할 수 없을 겁니다.
덜컹.
방 안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무장 세력이 여기까지 찾아온 모양입니다.
(결국은…)
다들 쓰러져 가는 와중에 저 혼자 숨어있을 수는 없습니다.
“내 총은 여기 있다.”
“내 것도 있어!”
“저기, 그게. 라브… 씨한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어라. 이 목소리는.
“여, 여러분!?”
쿵.
깜짝 놀라서 그만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어보니 총구 세 개가 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히익!?”
“어라? 키리노!?”
“코하루 씨이! 무사하셨군요! 라브 씨랑 사오리 씨도요! 다행이에요!”
저는 울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러자 세 사람은, 특히 라브 씨는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너 말야, 우리는 지금 탈주한 거나 다름없다고.”
“그건 그렇지만요. 혼자 있으니까 무서웠다구요!”
“장비는 되찾았어. 키리노, 통신이 가능한 곳은 진지가 있는 고지대 너머 산꼭대기에 있는 망루가 맞나?”
잡지를 이리저리 넘기면서 사오리 씨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뭔가 아주 길고 가늘고 섬뜩한 물건을 허리에 차고 있는 것 같은데, 못 본 걸로 치도록 하죠.
“마, 맞아요! 예전 방식대로 통신해서 지원을 요청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거예요.”
“확인했어. 완전히 해가 저문 뒤 벙커를 습격하겠다.”
“그렇게 나와야지. 그대로 이 섬을 접수해 주겠어!”
6 반격
“그렇게 나와야지, 슬슬 그런 말 하고 있으려나?”
의무실에서 쿨쿨 자고 있었던 나, 『스즈』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가서 그대로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렸다. 수많은 무장한 병사들이 이 섬을 제압한 모양이다.
낮에는 더워서 힘들었지만 해가 지고 나니 시원해져서 아주 쾌적하다. 밥도 나오고 디저트로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 파르페까지 먹었다. 숙박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답례로 밥 한 끼 정도는 대접하고 싶은 기분이랄까. 착한 발키리 신입생들은 다들 잡혀간 모양이지만 내가 있다는 건 비밀로 해 준 모양이고.
라브 쨩 쪽도 걱정되기는 하지만 도우러 가기보다는 나 혼자 움직이는 게 더 재밌을 거다.
“자 그럼. 작전 개시~.”
☆
“그럼 저 녀석들이 뭔지 키리노 너도 모른다는 거야?”
밤. 우리는 숲 속에 숨으면서 진지가 있는 망루로 향했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지기는 했어도 적들은 시커먼 장비로 단단히 무장했으니 대부분 수영복만 입고 돌아다니는 우리들이 그다지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
“면목이 없네요. 설마 합숙 중에 습격을 당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
사오리가 말없이 앞서 나간다. 총만큼은 다들 되찾았지만 발포했다가는 바로 포위될 것이다.
“저기, 저쪽에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아.”
코하루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달빛을 받아 하얗고 가느다란 코하루의 팔이 가리키는 쪽에 상야등처럼 보이는 주황색 빛이 보였다.
“오, 진짜네. 무기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잠깐 살펴보고 올까?”
“...그래. 궁금한 것도 있다. 가능하면 정보를 얻었으면 좋겠군.”
사오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쩌면 먼저 봤을지도 모른다.
“저기는…”
키리노가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우리의 시선이 집중됐다는 사실을 깨닫자 어색한 듯이 계속 말했다.
“오리엔테이션 때 사용하는 작은 이벤트 무대가 있었을 거예요. 그쪽 휴식 공간에 단거리용 통신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요. 쓸 수 있을지도 몰라요.”
“호오. 너 그런 걸 잘도 기억하네.”
“아뇨, 저는 아직 부족하니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어서 확인해 봤던 거예요. 음, 사실 이건 반만 진심인데요. 저는 다른 분들만큼 즐겁게 놀지 못했거든요. 시간이 남아돌아서요. 시간 때우기였어요.”
키리노는 아하하, 씁쓸하게 웃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올바른 행동이야. 그걸 가져가도록 하지.”
사오리의 칭찬에 키리노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코하루와 나는 그런 모습을 보고 작게 웃었다.
숲 속에 뻥 뚫린 좁은 광장이 있었다. 많아야 열 명 정도 설 수 있을 만큼 작은 무대가 있다. 지붕은 있어서 비바람을 피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무대 구석에 낡은 CD 카세트가 방치되어 있었다. 그와는 달리 아래로는 긴 전선들이 늘어져 있어서 발에 걸리기 딱 좋았다.
“...누가 있나 보네.”
옆 건물에 불이 켜져 있고 검은색 장비를 입은 녀석이 살짝 보였다. 하지만 사실 밖으로 빼놓은 듯한 커다란 스피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어두우니 아직 눈치채지는 못했을 것이다.
“마침 잘 됐군.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지.”
사오리가 자세를 낮춘다.
“잠깐…! 아무리 그래도 들킬 거야.”
내가 최대한 큰 소리로 말하자 사오리는 고개를 젓더니 CD 카세트를 집어들었다.
“아…”
코하루가 뭔가 깨달았는지 조금씩 다가온다.
“마이크랑 스피커는 같아. 아즈사가 알려줬어.”
“...그렇군.”
사오리의 표정이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근데 코하루가 아즈사랑 친구였구나. 그렇다면 가끔씩 보여주는 예리한 구석도 납득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입력과 출력을 바꾸기만 하면 돼. 차분하게 해 봐.”
사오리가 능숙하게 조용히 CD 플레이어를 분해했고, 떨어져 있던 배선을 잡아당긴 코하루가 떨리는 손으로 내부에 연결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방에 있던 스피커를 마이크로 개조하는 것 같다.
사오리가 신중하게 볼륨을 조절했다.
‘...! 그 5인조를 놓쳤다고? 위에서 알면 뭐라 할 텐데.”
생각보다 더 선명하게 들린다. 병사들이 대화하는 소리 같다.
‘어. 해변에서도 수배자 둘이 달아났대. 성가시게.’
‘그래도 신입생들은 거의 다 붙잡았어. 시간 문제일 거야.’
‘빨리 일 끝내고 우리도 실컷 놀자.’
일이라고? 그러면 계획적으로 이 섬을 습격했다는 말인가?
“...어라?”
키리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뭐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아뇨, 그렇지는 않은데요…”
그러더니 키리노는 움츠러들었다.
그 뒤로 대화는 끊겼고 건물에서 사람이 나가는 듯한 기척이 있었다.
“침입한다. 서두르지 말고 따라와.”
사오리를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불은 켜지 않은 채로 건물 안을 둘러보다 이것저것 재미있는 물건들을 찾았다.
“통신기에, 제복이라… 그렇군.”
사오리는 구형 통신기에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발키리 제복이네요.”
키리노가 중얼거렸다. 사물함에는 낯익은 제복이 있었다.
“누가 잃어버린 걸까요?”
“체육복이 있어! 나 이거 입을래!”
코하루가 기쁜 듯이 폴짝폴짝 뛰었다. 계속 수영복을 입고 다니느라 부끄러웠나 보다.
“너도 그 제복 입지 그래? 그게 더 편할 거 아냐.”
“네! 그럴게요.”
썩 괜찮은 눈빛으로 돌아서더니 둘은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아, 나는 패스할게. 그거보단 수영복이 더 낫거든.”
키리노랑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원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런 라브 쨩에게 선물입니다~!”
“윽!”
어지간히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동시에 사오리가 총을 겨누었다.
“와앗, 깜짝이야! …어, 조마에 사오리? 라브 쨩이 거물 신인을 찾아냈잖아?”
『스즈』는 사오리에게 똑바로 총구를 겨누면서 평소 같은 말투로 말했다.
“아~. 그 녀석은 내 부하야. 야 『스즈』. 보면 대충 알 거 아냐. 싸우지 마.”
“네에.”
왠지 모르게 재미없다는 듯이 스즈는 총을 내렸다. 사오리도 그에 따라 총구를 아래로 향했다.
“그래서. 선물이 뭔데.”
“치... 무사했구나, 뭐 그런 말은 안 해? 나는 더위 먹어서 고생했는데!”
“알았다고, 자.”
가까이 다가가서 바보털이 삐죽 튀어나온 머리에 손을 얹자 『스즈』가 히죽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일단 이걸로 만족한 모양이다.
“헤헷. 그럼 이거 줄게.”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민다.
“! 센스 있는데!”
스즈가 내민 물건은 늘 입는 내 교복과 그 방망이였다. 어떻게 했는지 가라앉아야 했을 짐들을 찾아온 모양이다.
“헬멧은 없지만 이거면 충분해!”
“저기요!”
내가 스즈의 머리를 막 쓰다듬고 있는데 코하루가 목소리를 높였다.
“라브, 씨!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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