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미스터리 #순애 #세리카
원본 by 蜂の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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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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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말이 싫었다.
몸의 중심에서 태어난 감정이 말로 옮겨질 때면 가시로 칭칭 감겨 꾸며지고, 그것이 주변을 상처 입히니까.
겨울, 세계는 고요했다.
어딘가 먼 거리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내뱉은 숨이 하얗다.
그 하얀 숨을 보고서야 잊고 있던 추위가 찾아온다.
그 추위는 폭력적인 것이 아니라, 피부에 잔잔히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다.
추위조차 그저 고요했다.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멍하니 앞을 보고 있었다.
이 종소리는 트리니티 근처에서 울리는 걸까.
대성당이 있을 정도이니 분명 그곳엔 커다란 종이 있을 테고, 매일 정각에 맞춰 종을 울리는 직업이 있겠지.
만약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면 해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며 다리를 까닥거리고 있자니, 규칙적인 종소리에 섞이듯 발소리가 들려온다.
애타게 기다리던 그 소리를 듣고 펜스에서 내려왔다.
스커트의 펜스에 닿았던 부분을 손으로 털어내고,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
“선생님! 또 지각이야?!”
“미안 미안. 좀 늦었네.”
“오늘 아르바이트는 일찍 가야 한다고 했잖아! 정말, 서둘러!”
봐, 또 이렇다.
선생님과 함께 있으면 말을 꾸밀 때 가시가 많아진다.
이것은 보호 수단이라고 최근에야 깨달았다.
사실 이런 격한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도 내가 감정을 전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가시로 래핑할 필요가 있었다.
이건 본심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쑥스럽지 않아요, 라고 자신을 타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그 감정의 원인 또한 사실은 알고 있다.
이 기분이 ‘그저 아르바이트를 같이 해주는 친구’나 ‘눈치 빠른 어른’에게 향하는 열기가 아니라는 것을.
나는 줄곧 말이 싫었다.
몸의 중심에서 태어난 감정이 말로 옮겨질 때면 가시로 칭칭 감겨 꾸며지고, 그것이 주변을 상처 입히니까.
그래서 나는 이 기분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이름을 붙이면 분명 무언가에 상처가 나겠지. 그것이 두렵다.
하지만 무엇에 상처가 나는 것인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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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말이 싫었다.
마음속에서 태어난 감정의 크기에 비해, 말이라는 도구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약하니까.
최근 세리카에 대한 감정이 변해가고 있음을 깨닫고 있다.
그녀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몸짓이나, 한결같이 업무에 몰두할 때의 눈빛.
그 모든 것을 기록해 나의 것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유사한 감정은 없었지만, 그래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이 입에 담는 ‘너밖에 생각나지 않아’라거나 ‘부서질 정도로’라거나,
여러 서적에서 질리도록 보아온 ‘달이 아름답네요’라거나 ‘죽어도 좋아’라거나.
그런 격정의 끝에서야 겨우 자아낼 법한 말들은 어울리지 않았다.
이것은 나의 사랑이 남들에 비해 고상하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내가 걸어온 길에서 결코 본 적 없는 감정에 스스로 놀랐던 것이다.
봄처럼 생명이 피어나길 고대하고, 여름처럼 달려 나가고 싶어지는 그런 종류의 충동적인 마음의 움직임은 없었다.
계절로 치자면 겨울이다.
겨울처럼 고요한 사랑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생』인 이상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버린 담배꽁초의 불을 끄듯, 그 사랑의 열기를 정성껏 짓밟아 껐다.
*****
“오늘도 수고~! 선생님, 고생했어.”
나는 기지개를 켜는 선생님에게 집에서 가져온 수건을 건넨다.
“고마워, 세리카도 고생 많았어.”
선생님은 수건을 받고 플라스틱 벤치에 앉았다.
달이 조금 눈부셨다.
컵라면 자판기를 목적으로 들어온 이 스케이트장의 수많은 가로등을 조연 삼아, 나만 봐달라고 말하는 듯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겨울은 여름보다 달이 더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주역을 바라는 것치고는 밝기가 부족한, 오만하고 어중간한 달이었다.
이런 시간이라 스케이트장에는 사람이 없다.
분명 조금만 더 빨랐다면 저 빙판 위는 사람들로 넘쳐났을 테고, 표면에 반사된 하늘의 푸르름을 알 기회 따윈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면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가 있는 것도 나쁘지 않네, 하며 살며시 미소가 번진다.
자판기에서 산 사과주스를 마시며 문득 옆을 보니, 선생님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추워서일까. 등을 둥글게 말고 먹고 있다.
선생님은 언제 봐도 등을 꼿꼿이 펴고 있으니까,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그 모습에서 애틋함을 느꼈다.
들이켜고, 먹고, 숨을 내뱉는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온다.
우리에게서 나온 숨결이 녹아들어 이 계절의 끝에서 섞여 드는 것만 같았다.
그저 이 시간과 추위가 사랑스러웠다.
그 순간.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마침내 나는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르기로 했다.
이유는 모른다.
평소 보던 것과는 다른 선생님의 모습에 설렌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 옆얼굴 때문일지도.
하지만 이것이 평소와의 갭에 첫눈에 반했을 뿐인, 찰나에 만들어진 감정이라고는 절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첫눈에 반했다는 쪽이 덜 부끄러웠을 것이다.
첫눈에 반한 게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이제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마음을 소중히 키워왔음을 억지로라도 깨닫고 말았으니까.
“선생님.”
내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 무척 떨리고 있었을 것이다.
“무슨 일이니, 세리카.”
“나, 선생님을 좋아하는 것 같아.”
이 봄에 깨닫기에는 너무 늦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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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을 들은 나의 심상은 요동치고 있었다.
그제야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그것을 ‘고요한 사랑’이라 불렀던 것은 오기였을까.
필사적으로 피어나려는 어린 꽃봉오리를 난폭하게 꺾고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 봄은 이미 등 뒤까지 와 있었다.
그럼에도 그 봄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선생』이다.
그것을 의식한 순간, 나의 발이 사슬에 묶여 조금 전까지 바로 거기 있었을 따스한 봄이 정말 멀리 가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신이 꽁꽁 묶이는 숨 가쁨이 서서히 더해간다.
말이라는 도구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약하다.
하지만 『선생』과 『학생』.
이 두 말의 관계성이 만들어내는 힘은 나를 겨울에 묶어두고 홀로 남겨두기엔 충분하고도 남았다.
아아. 역시 말이 싫다.
이 아픔을 전부 내가 감내하고 싶다.
세리카에게 향하게 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녀를 상처 입히고 싶지 않은 일념으로 내뱉으려던 말에 돋아난 가시를 최대한 꺾었다.
그런데도 하나, 굵고 긴 가시가 아직 남아버리고 말았다.
단 하나 남은, 이 가시가 얼마나 날카로울지 나로서는 살필 길이 없었다.
“미안.”
나는 그것을 곧장 그녀에게 찔러 넣었다.
하다못해 깨끗하게 찔러 넣었다.
세리카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그녀가 언제 아래를 보았는지 나는 몰랐다.
그래서 내가 가시를 찌를 때, 그녀의 눈을 보고 있지 않았음을 나는 간접적으로 이해했다.
최악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토록 소중한 순간에 그녀와 마주하지도 않았다.
“그렇, 구나.”
세리카가 중얼거린다.
바람에 휩쓸려 사라질 듯한 목소리다.
꽃봉오리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그것은 지저분하고, 이미 납작하게 짓눌려 있었다.
내가 짓밟은 꽃봉오리다.
나는 무의식중에 벌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를 찔러 죽이려는 듯한 말을 던진 것,
그렇게 했을 때 그녀와 마주하기를 포기한 것.
‘선생이니까’라는 말을 면죄부로 삼아도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하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도 가시를 찔러줘. 제발.
그리고 상처투성이인 소녀가 고개를 든다.
조금 전 끝내 마주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정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얼굴을 보고, 그 가시에 상처 입고 싶다.
내 죄의 크기는 분명 네 표정에 적혀 있을 테니까.
드디어 나도 같은 아픔을 짊어질 수 있다. 나도 가시의 아픔을─
그러나.
놀랍게도 세리카는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선명한 미소였다.
그런가.
너는 모든 가시를 꺾어버린 걸까.
그 미소를 기록해 나의 것으로 삼고 싶다.
겨울이 아직 끝날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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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지. 선생님이니까!”
고개를 들며 최대한 가볍게 말한다.
목소리, 떨리지 않았을까. 괜찮을까.
선생님은 책임감 있는 어른으로서 찔러야 할 가시를 찌른 거야.
그러니 나는 선생님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내 가시가 안쪽으로 향하길 바란다.
언제나 주변을 상처 입히던 이 가시도, 부탁이니까 지금만큼은 제발 선생님을 찌르지 않기를 바란다.
가장 환한 미소로. 웃어라, 나.
“잊어버려! 오늘 일은.”
이어지는 말에 가시는 없었다.
신기할 정도로 구김살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안쪽으로 향한 가시가 계속 아팠다.
부옇게 보이던 선생님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일그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평소 웃어본 적 없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서툰 미소였다.
온 힘을 다해 짓고 있는 그 표정이 아프다.
사실은 그렇게 가시를 보여주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그 가시조차 사랑하고 말았다.
상처받더라도 끌어안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선생님까지 두 걸음 반.
이 어찌할 도리 없이 길어진 가시가 그저 아프다.
한 걸음, 봄으로 다가간다.
가시가 더 깊게 파고든다.
지금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통증이다.
사랑스럽다. 지금만큼은 이 아픔을 아직 더 맛보고 싶어.
“미쳤어!”라며 부감하고 있는 내가 울부짖는 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진다.
시끄러워.
그런 건 알고 있어.
가시가 날카롭고 이렇게나 아픈데, 그 아픔째로 끌어안고 싶다니, 가시째로 사랑하고 싶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짓이야.
나는 지금 사랑에 취해 있는 거야.
미쳐버릴 정도로.
다시 한 걸음 내디딘다.
가시가 날카로워진다.
아프지만 견딜 수 있어.
반걸음 파고들어 팔을 뻗고, 선생님을 그 가시째로 끌어안는다.
나는 줄곧 말이 싫었다.
몸의 중심에서 태어난 감정이 말로 옮겨질 때면 가시로 칭칭 감겨 꾸며지고, 그것이 주변을.
나를 상처 입히니까.
아아, 적어도 이 가시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끌어안았다면.
그래서 엉망진창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가시의 날카로움과 길이를 깨달았다면.
그랬다면 나는 이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 평소 같은 가시 돋친 말로 부를 수 있었을 텐데.
이제 늦었지만.
이미 늦었지만, 만약 되돌아가서 여기에 이름을 붙인다면,
분명 『실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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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
이 두 글자는 갑갑했겠지.
애달픈 추억을 가득 채워 넣었으니까.
갑갑한 것은 이 방도 마찬가지였다.
말로 처리되지 못하고 갈 곳을 찾아 마음을 깨고 나온 감정이 터져 나와, 수은처럼 매끄럽고 무거운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운다.
“윽…세리카.”
무언가 말을 걸어야겠다며 내뱉은 급조된 말은 결국 제대로 소리가 되지 못한 채 뒤집히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말조차 세리카에 의해 가로막힌다.
“사과하지 마, 선생님. 나는 괜찮으니까.”
시선이 똑바로 나를 포착한다.
눈을 피하고 싶다. 외면하고 싶다.
그런데도 조금도 흔들림 없는 그녀의 눈동자가 도망치지 말라고 말하는 듯해서,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무언가 시끄럽다. 점점 커지는 그 소리는 귀 안쪽에서 울리고 있었다.
의심하며 손을 가슴에 댄다.
그러고 비로소, 가련한 남자는 자신의 심장 소리와 호흡 소리만이 방안에 울려 퍼지고 있음을 이해했다.
너는?
너의 심장은 뛰고 있지 않은 걸까.
“뛰고 있어”라고 전하듯이, 그녀는 파르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즉, 나뿐인가.
『실연』을 떠올린 것만으로 이렇게 된 것은 나뿐인 모양이다.
계속 뛰는 심장 앞에서 손가락이 쓸쓸하게 상대를 찾아 허공을 방황한다.
너는─어째서 너는 그렇게 태연한 거니.
그런가.
너의 안에서는 끝나버린 것이구나.
그 사랑을 『실연』이라 불렀으니까.
순식간에 방이 커진 듯한 착각이 든다.
이미 끝나버린 그 사랑을 내가 아직 이토록 끌어안고 있다는 걸 안다면, 대체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사랑은 눈금이 없는 줄자와 닮았다.
잡아당기면 잡아당긴 만큼 늘어나는데, 두 사람의 거리를 잴 수단은 없다.
끝내고 싶다. 끝났으면 좋겠다.
길게 늘어난 줄자의 중간을 억지로 가위로 자르려던 나는 마음 한편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시투성이 구체.
그렇게 부르기에 합당한, 고슴도치 같은 추억이다.
『속죄』라고 라벨링 되어 있던 그 기억을 나는 그저 손가락으로 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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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떨리는 손가락으로 인터폰을 누른다.
머지않아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며칠 만에 들은 그 목소리에, 문 너머이긴 해도 그녀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 먼저 세리카가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세리카, 나야.”
“윽…선생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문 너머의 반응만으로 그녀가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목소리가 선명하게 떨리고 있었다.
“뭐 하러 왔어.”
아픔을 느끼게 하지 않는, 천진난만하게 가시 돋친 말을 두르고 있던 소녀는
내가 거절했던 그날 이후 방치하면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이렇게나 여린 존재였던 것을, 감정의 이면에서 필사적으로 무장해 강한 척 보여왔을 뿐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지금의 세리카에게는 평소의 활기가 없었다.
“최근 학교에 안 와서. 다들 걱정하고 있어.”
“미안하지만 지금은 아무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아.”
“미안해, 잠깐만 이야기할 수 없을까?”
나는 얼굴을 마주하면 다시 원래의 그녀로 돌아올 것이라고 바보같이 믿고 있었다.
“부탁이야, 혼자 있게 해줘.”
“잠깐이면 돼.”
벌컥.
문이 열렸다.
“그렇다면!”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문을 연 세리카가 내 넥타이를 붙잡고 끌어당겼다는 걸 깨달은 것은,
코끝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분노와 수치와 슬픔이 온통 뒤섞인 새빨간 얼굴이 시야에 뛰어든 뒤였다.
“나를…안아줘.”
소녀는 이제 완전히 자신의 무기를 이해하고 있었다.
떨리는 음색, 울어서 퉁퉁 부은 눈.
그녀의 주변에 선명한 가시가 보였다.
그날 끝내 나에게 향하지 않았던 가시다.
그런가.
세리카를 거절했던 그날, 너는 나를 상처 입히지 않으려 자기 가시를 꺾고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말 크나큰 착각이었다.
꺾었다고 생각한 가시는 안쪽을 향해 있었다.
자기 자신을 찌르며 견디고 있었던 건가.
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바보다.
타인의 속마음을 이해한 줄로만 알고 있었다.
사람의 본심을 이해하려 들다니 가당치도 않다.
그런 초보적인 사실을 타인에게 우러러보이는 처지가 되자마자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어찌할 도리 없이 그녀를 사랑하고 말았다.
그녀가 가진 진짜 가시를 알았다.
그 가시의 광채가, 나를 위해 가시를 자신에게 찌르며 버티려 하는 그 마음이 무엇보다 눈부시게 빛나서 그저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이 가시 속으로 뛰어들어 그것이 가진 고통을 온몸으로 느꼈다면.
그렇게 찔려 죽는 결말을 택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세리카.”
하지만 나는 이미 거절하는 길을 택했다.
교사로서, 선생으로서 내가 취해야 할 선택은 그녀의 가시를 꺾는 것이었다.
“나는 너를 더럽히고 싶지 않아.”
정중하게, 세리카를 가장 상처 입히지 않을 말로.
“선생님이 상대라면! 선생님이 상대라면…나는 상관없는데.”
그것은 매달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본심을 꾸미지 않고 그대로 전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말은 부족하다.
어차피 마음을 전부 말에 실을 수는 없다.
이 이상 무슨 말을 덧붙여도 아름답게 끝나지는 않는다.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시간이 멈추고 두 사람은 그저 서로를 바라본다.
이 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무엇이라 부를까.
결국 나는 이 사랑에 취해 있는 걸까. 그렇다면 정말 최악인 남자군.
타인에 대한 감정의 형성은 영원한 명제다.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특별히 말로 옮기기 어렵다.
그것에 대해 집요하게 마음을 적어 내려가는 것은 너무나도 허무하다.
아무리 말을 거듭해도 샘물처럼 솟구치는 기분을 모두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무의미한 것이다.
그렇기에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서 포기한다.
어차피 전해지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형태만이라도 아름답게 간직하고 싶다.
그렇게 아름다운 채로 영원히 부수지 않고 있고 싶다.
부수지 않고 있다면 이 사랑이라는 명제에 답을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영원한 마법을 푼 것은 세리카의 눈에서 넘쳐흐른 빛이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보고서야 시간이 멈춰있던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넥타이를 잡고 있던 세리카의 팔이 힘을 잃고 툭 늘어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무릎을 굽혀 바닥에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인 소녀가 무기를 쥐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선생님은…내가 싫어?”
엉뚱한 말에 허를 찔려,
“그럴 리 없잖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흔해빠진 말밖에는 돌려줄 수 없다.
“거짓말쟁이!”
소녀가 외치며 고개를 든다.
“내가, 내가 진심으로 마음을 전하지 못하니까.”
아니야.
“어떻게 해도 말을 가시로 꾸며버리니까.”
그만해.
“선생님을, 모두를 상처 입혀버리니까.”
제발 그만해줘.
그 뒤는 말하지 마.
“그래서 싫어하는 거잖아?!”
아아, 나는 정말 바보구나.
이제야 비로소 내가 찌른 가시의 날카로움을 이해하다니.
“싫으면 똑바로 그렇게 말해!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담뱃불은 밟으면 끌 수 있지만, 마음에 켜진 불은 아무리 짓밟아도 꺼지지 않는다.
감정의 탁류가 밀려오는 것을 느낀다.
어딘가로 어떻게든 토해내야만 한다.
결국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말뿐이었다.
뭐냐고.
말이 싫다고 하면서도 결국 말에 의지할 수밖에 없구나.
나는 줄곧 말이 싫었다.
마음속에서 태어난 감정의 크기에 비해 말이라는 도구가 가진 힘은 너무나도 약하니까.
너무나 약해.
마음을 말에 실어도 전부는 닿지 않아.
그러나 이 너무나도 약한 도구가 감정을 전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도구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감정을 다 전하지 못하니까 말하기를 포기해?
어처구니없다. 엄청난 바보짓이다.
그렇게 마음을 전하는 일로부터 도망치고 있던 사이,
그녀는 그 가냘픈 몸보다도 그 미숙한 마음보다도 훨씬 거대한 명제와 계속 홀로 마주하고 있었다.
말로 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다.
이 너무나 약한 도구로는 1할밖에 전해지지 않을지도 몰라.
아니, 자만이다. 1할도 전해지지 않을지 몰라.
그래도, 무엇보다도 전하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선택이었다.
“세리카, 지금까지 전하지 못해서 미안해.”
주저앉은 그녀에게 나도 높이를 맞춘다.
“나는 네가 너무 좋아.”
얼마나 시간을 들여야,
얼마나 말을 거듭해야.
처음으로 마주한 겨울처럼 고요한 사랑을.
세리카에 대한 내 모든 진심을.
그러면서도 받아들일 수 없는 선생이라는 존재를.
너에게 다 전할 수 있을까.
진심을 조금씩 말에 담아 내보낸다.
“네가 열정적으로 업무에 마주할 때의 눈빛이 좋아. 사실은 상냥해서 남을 위해 먼저 행동하는 그 자세가 좋아…….”
이제 와서 늦은 걸지도 몰라. 하지만 제발.
부디 전해지기를.
아무쪼록 『좋다』는 감정의 아주 일부분만이라도 전해질 수 있기를.
그리고 바라건대.
부디 이 사랑이 끝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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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줄자의 끝을 잡는다. 나는 그 끝을 계속 잡아당긴다.
영원히 늘어날 것만 같던 그것은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전해지는 느낌으로 끝을 허무하게 알렸다.
나는 이 사랑을 얼마나 길게 늘여버린 걸까.
거리를 읽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애초에 눈금도 없고, 무엇보다 이토록 멀면 네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겠지.
나는 드디어 『속죄』를 떠올렸다.
『속죄』라고 그 기억을 부르며 사랑에 종지부를 찍었던 나를 떠올렸다.
숨을 들이마신다. 공기는 이전만큼 무겁지 않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아무리 후회해도 다 후회할 수 없는 건 당연한 거야.
나중에 얼마든지 후회할 수 있어.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은 선생으로서 책임을 다하자.
“세리카, 메모해줘.”
펜을 힘주어 다시 고쳐 쥔다.
“다른 것들도 떠올리자.”
“당연하지, 그러려고 내가 있는 거니까.”
미소를 가득 머금은 네 얼굴도 드디어 똑바로 볼 수 있게 됐다.
그것에 구원받고 마는 것은 내가 미숙하기 때문이겠지.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며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
젊음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쓴웃음을 짓게 되는 추억.
여전히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찌릿하게 아파져 오는 추억.
그리고 사실은 외면하고 싶은 추억.
그저 멍하니 서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그날의 『후회』를.
소중한 학생을 잃어버렸던 그날의 『절망』을.
용서할 수 없는 존재에게 향했던 그날의 『증오』를.
말과 함께 빼앗겨 잊어버렸던 수많은 추억을, 나는 단 한 번도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다.
석양이 메모지 위의 글자들을 비춘다.
이 반나절 동안 떠올린 말은 고작 수십 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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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카의 숨소리가 들린다.
저녁밥을 짓기 위해 말을 떠올리는 작업을 잠시 중단한 뒤, 피곤했는지 세리카는 그대로 잠들었다.
너무 부담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슬슬 마무리할 참이었는데, 분명 무리를 시켰던 것이리라 생각하며 강하게 후회하고 있다.
그녀에게 더 이상 괴로운 마음을 갖게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되기 전에 원인을 끊으러 간다.
메모지를 한 장 더 뜯어 책상에 붙이고 방을 나섰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말이 흩어져 있다.
『비애』, 『매도』, 『회한』…….
그런 말들 속에서 『고마워』라고 적힌 메모지만이 유독 밝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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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막한 폐허에 있는 콘크리트로 된 직육면체.
그런 인상을 주는 건물로 들어간다.
나를 맞이한 것은 머리에서 연기를 뿜는 이형도 나무 인형도 아닌, 단 한 명.
체구가 작은 소녀였다.
의자에 앉아 무수한 모니터 불빛에 둘러싸인 키보토스의 학생이었다.
“올 줄 알았어, 선생님.”
“너는, 로고스인가.”
“이름 기억해 줬구나!”
밝은 어조로 말하던 소녀는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마치 딴사람인 양 낮은 목소리를 냈다.
“선생님이 찬 상대인데 말이야.”
거절한 것은 세리카뿐만이 아니다.
평등을 계속 역설하는 한 그런 학생이 늘어날 것임을 나는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짊어질 죄는 계속 늘어만 간다.
세리카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소녀에게도 『속죄』를 해야만 한다.
그렇게 다가가는 나의 발은 문득 눈에 들어온 불길한 것에 멈춘다.
소녀의 헤일로는 반이 깨져 있었다.
“너는……!”
“딱 좋네. 『선생』이란 말, 지금 지워버릴까.”
그 말과 동시에 이미 반쯤 깨진 헤일로가 단면부터 더욱 깎여 나간다.
“『 』, 잠깐 자고 있어.”
목덜미에 충격을 느낀 것도 잠시, 힘이 빠지며 다리부터 고꾸라졌다.
털썩 쓰러진 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주변을 날던 드론이 전기를 쏜 걸까.
그보다 저 헤일로는 대체.

To Be Continued : …『고백』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