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비 #VL #미스터리 #순애 #세리카
원본 by 蜂の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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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홀로 눈을 뜬다.
자기 방에서 깨어났을 때 혼자인 것은 당연한 일인데, 최근 계속 누군가와 함께 있었기에 무척 오랜만에 마주하는 풍경이었다.
무언가 빠진 듯한 감각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그 원인을 찾아 주위를 둘러본다.
벽으로 눈을 돌리니 코르크 보드에 사진이 붙어 있다.
저건 분명 아비도스 대책위원회 모두와 바다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이 더 있었던 기분이 든다.
이 사진을 찍어준 사람. 누구였더라.
두 개의 머그잔.
자신은 마시지 않는 커피 향기.
친구가 집에 올 때는 내놓지 않는, 조금 큼직한 의자.
방금까지 이 방에 누군가 있었던 것은 알겠는데, 그게 누구였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뭐, 하지만.
분명 잊어버릴 만한 존재였다면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은 아니었을 거다.
그러니까 괜찮아.
아르바이트가 있었으니까 그 일정을 확인하고…….
휴대폰 액정 위로 커다란 물방울이 튀었다.
놀라서 전원을 끄니 어두워진 화면에 내 얼굴이 비친다.
힐끗 보인 일그러진 얼굴은 금세 불투명 유리 너머를 보는 듯 뿌옇게 흐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괜찮아’라는 말은 평소처럼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했던 거짓말.
정말로 괜찮은 거라면 이 눈물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도 기억해 내려고 안달이 난 나는 어떻게 설명할 거냐고!
연락처를 봐도 메시지 앱을 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화면을 아무리 스크롤 해도, 분명 수없이 말을 주고받았을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을 그 사람은 없었다.
휴대폰을 내팽개치고 방 안을 뒤진다.
서랍장을 위에서부터 전부 열어 무언가 없는지 찾는다.
이런 곳에 단서가 있을 리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지만,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안에 든 것들을 이게 아냐, 이것도 아냐, 하며 끄집어내다 보니 전부 텅 비어 버렸다.
서랍을 열어둔 채 다시 단서를 찾아 방 안을 둘러본다.
숨을 고르고 있자니 책상 위에 붙어 있는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노란 메모지에 여러 단어가 적혀 있다.
『후회』, 『증오』, 『고통』.
『고마워』.
조금 둥글면서도 오른쪽이 올라가게 적힌 글씨.
나는 이 버릇의 필체를 알고 있다.
시험지 빨간 펜 채점, 언제나 오른쪽 아래 여백에 적혀 있던 “고생했어”, “참 잘했어요”와 같은 글씨다.
『실연』.
이것은 내가 적은 메모.
알고 있다.
이것은, 이 말은 내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기억과 함께 있는 감정이다.
내가 실연한 상대는 그다. 그 사람에게 고백하고, 실연했다.
선생님, 선생님.
그래. 내가 잊어버렸던 말은 『선생』이다.
갑자기 찾아온 어른.
하지만 참견쟁이에, 그런데도 서툴러서 미덥지 못해.
언제나 바빠 보이지만 아르바이트에 부르면 왜인지 오고.
함께 있으면 페이스가 휘말려.
내 푸념도 웃으며 들어주는 사람.
어느샌가 곤란할 때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르고 싶어지게 되었다.
“선생님.”
하지만 부끄러우니까 말하지 않았다.
말했더니 상처받았다.
그렇지만.
그날 새긴 마음의 상처를 잊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자는 동안에도 계속 말이 사라지고 있다.
지워진 말 속에 『선생님』이 있었다.
들린다.
상실된 말들이 들린다.
말 너머에서 아픔이 들린다.
아픔 너머에서 도와달라는 소리가 들린다.
기억해 내.
충동에 몸을 맡긴 채 달려 나갔다.
현관문을 열고 앞에 세워둔 자전거를 세워 내달린다.
방해되는 벽을 걷어차 부수듯 페달을 짓누르며 밟았다.
온몸이 뜨겁다.
핸들을 쥐고 있는 손가락 끝도, 울어서 퉁퉁 부은 붉은 눈가도, 바람이 불어와 따가운 귀 끝까지 전부가 뜨겁다.
시로코 선배라면 훨씬 더 빨리 밟을 수 있다.
호시노 선배였다면 그때 잠들지 않고 선생님이 없어진 것을 일찍 눈치챘을 거다.
아야네는 분명 가장 최적의 루트를 계산할 수 있고,
노노미 선배는 자전거가 아니라 더 좋은 탈것으로 달려가겠지.
나는 그저 자전거를 밟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힘이 다해도 좋으니까, 이게 끝나고 쓰러져도 좋으니까 무아지경으로, 필사적으로 달렸다.
분명 지금 내 얼굴은 엉망진창이라 누군가에게 보인다면 부끄러워 죽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부끄러움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건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자전거는 대충 내팽개치고, 균형을 잃은 그것이 넘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입구의 자동문이 열리길 기다리지 않고 손으로 억지로 비집어 열었다.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 무언가 더 커다란 힘에 이끌리듯, 처음 와본 아무것도 모르는 건물의 목적지인 방까지 도착했다.
"ON AIR"라고 붉게 빛나는 표시가 있는 문을 연다.
문 너머에서 스테이지를 발견했다.
활짝 열린 소리를 듣고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앞으로 나아가는 나를 『경악』이라든가 『초조』라든가, 그런 단어가 붙여진 얼빠진 얼굴들이 기다린다.
“누구십니까! 지금은 방송 중이라…….”
“시끄러워!”
마차의 말처럼 스테이지를 향해 돌진하는 내 팔을 누군가 붙잡았다.
팔을 난폭하게 뿌리치자 다른 누군가가 다리에 매달려 온다.
무거운 몸을 이끌 듯, 커다란 덩어리 하나를 통째로 굴리 듯, 파도를 헤치며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이라면 전부 기억해 낼 수 있다.
최근 다크서클이 늘어난 눈도,
이상한 대목에서 웃어버리는 성격도,
듣는 사람까지 웃게 만드는 웃음소리도,
키보토스에서는 드문 검지보다 긴 약지조차.
소중한 기억이 전부 선생님과 연결되어 이제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스테이지 계단을 다 올랐을 무렵엔 크로노스 관할 구역에 대한 대담한 습격자에게 공포를 느꼈는지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얼굴을 닦고 카메라를 향한다.
혼자였다.
혼자인데도 무수한 적을 보는 듯한 시선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십자가에 매달려 형벌을 기다리는 마왕은 이런 기분이겠지.
크게 숨을 들이마신다.
기억해 내.
이건 가시를 다 버리지 못한 나의, 단 한 사람을 위한 『독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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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백』
줄곧 말이 싫었다.
몸의 중심에서 태어난 감정이 말로 옮겨질 때면 가시로 칭칭 감겨 꾸며지고, 그것이 주변을 상처 입히니까.
내가 생각한 것은 말로밖에 전할 수 없으니까.
전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을 말로 내뱉는 순간 갑자기 형태가 바뀌어 버리니까.
결국 그것이 어느 정도 전해졌는지는 나조차 알 수 없으니까.
줄곧 말이 무서웠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보내도, 기껏 준비한 그 포장지가 상대에게는 휴지 조각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억지로 떠맡긴 휴지 조각이 벌써 몇 장이나 되었는지 알 수 없으니까.
줄곧 말이 아팠다.
상대에게 그런 의도가 없어도, 그것이 아름다운 말이라도 내가 그것을 가시라 부르면 가시가 되고 독이라 부르면 독이 된다.
너무나도 쉽게 바뀌어 버리니까.
그리고 내가 상처받는 것으로밖에는 말을 자아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말이 싫었다.
전해지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전해지지 않을 때마다 화가 났다.
그래서 말을 전부 문 너머에 가둬두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다.
도망치는 건 간단하다. 말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입을 열지 않으면 말과 마주하지 않아도 되었다.
구하는 바가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그래 봤자 헛수고가 될 테니까.
시간이 흐르고 동료가 생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렇게 다시 한번 말을 내뱉고 싶다고 소망했다.
서툴러도 좋다.
전해지지 않아도 좋다.
말이라는 형태의 소통이 하고 싶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전해지지 않아도 나는 나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다.
닫혔던 문을 다시 열려고 했을 때, 그것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두가 당연하게 말한다.
고마워 라든가, 축하해 라든가, 맛있다든가, 대단하다든가, 귀엽다든가.
나는 그것을 말할 수 없다.
말하려고 할 때마다 목이 꽉 죄어오고 눈가가 뜨거워지며, 그렇게 가열된 감정이 내 안에서 날뛰어서 말로 옮기려 해도 손쓸 도리가 없다.
갈 곳을 잃은 그 기분은 얼굴을 붉히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사라져 갔다.
사라져 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말로 내뱉지 못하고 지워버린 셈 쳤던 감정들이 눈처럼 고요히 마음 깊은 곳에 쌓여 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전해지지 않는 것이 답답했어.”, 이건 진심이다.
“전해지지 않을 때마다 화가 났어.”, 이것도 진심이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진실한 속내는 전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두려웠던 것이었다고 그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열리지 않는다면 이제 됐어.
나라고 딱히 부러워하지 않았으니까.
상처받지 않는 편이 행복하니까.
굳게 닫힌 문 너머에서 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날려 온 무언가가 부딪혔을 뿐이다.
다시 소리가 들린다.
몰라. 열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 어차피 금방 포기하겠지.
소리 너머에서 열기가 전해진다.
이 눈은 절대 녹지 않아. 나로서는 무리였어.
열기 너머에서 충격이 느껴진다.
안 된다니까. 안 열리는 건 안 열려.
충격 너머에서 말이 들린다. 말 너머에 서 있는 누군가가 보인다.
이제 됐다고!
손에 잡히는 대로 곁에 있던 말들을 던졌다.
“바보!” “시끄러워!” “그만해!”
내뱉은 말들이 문에 맞고 튕겨 나간다. 발밑으로 굴러온 그것을 다시 집어 던졌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정신을 차려보니 소리도 열기도, 충격도 누군가의 모습도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고요해진 문과 발밑에 흩어진 말들을 바라본다.
단념한 걸까. 분명 포기했겠지.
뭐, 나라도 그만두겠다. 구하러 왔는데 이런 말이나 들으면.
하지만 그럴 거면 애초부터 희망을 갖게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바보.”
“뭐야, 말할 수 있잖아.”
고개를 들자 그 사람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열린 문 사이로 빛이 비치고 있다.
그 사람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어째서.”
“곤란해하는 학생을 돕는 것이 선생이니까.”
“나, ‘바보’라고 했는데.”
“말은 라벨이야. 상징이지. 하지만 그뿐이야.
네가 바보라는 말을 붙인 그 감정이 나에게는 도움 요청으로 들렸어.
말이란 건 그런 거야.”
아무 생각 없이 마주 잡은 그 손은 서늘하게 차가웠다.
내가 내가 된 것은 분명 거기서부터.
그저 무턱대고 말을 외친다.
이 카메라 너머에서 나를 보고 있을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기억해 내기를 바라며.
『불안』, 『굴욕』.
목이 따끔따끔 아파온다. 목소리가 쉰다.
사라져 버린 말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멈춰있을 수 없다.
『애수』, 『혐오』.
계속 외쳤다. 기억해 내, 기억해 내라고.
『겁쟁이』, 『회한』─
돌연 머리에 강한 충격이 덮쳐왔다.
맞았나? 모르겠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것을 오른발을 내디뎌 겨우 버틴다.
『우울』, 『오열』.
이대로 끝낼 수 없어.
기억해 내. 잊어버린 말들을.
검게 칠해졌다면 칠해진 그 위로 하얗게 다시 써라.
『질투』, 『실연』.
다시 한번 머리를 얻어맞는다. 이번엔 더 강하게.
시간이 다 됐다는 듯 갑자기 전원이 꺼진다. 그런 기분.
기다려. 아직 끝이 아냐. 끝낼 수 없어─
『선생님』.
그런 바람도 허망하게, 스테이지 위에서 계속 외치던 소녀는 줄이 끊긴 마리오네트처럼 마침내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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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결국 『사랑』이란 무엇일까.
내가 살아온 인생은 짧다. 이 짧은 인생 속에서도 사랑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은 수없이 많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다.
심심했기에 생각을 넓히기 위해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을 여러 권 읽었다.
이야기 속 주인공은 자신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아주 비싼 물건을 선물하거나 “내 평생을 바치겠습니다”라고 맹세하고, 급기야는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방해되는 존재를 해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종이 너머에서 일어난 일이며 누군가가 지어낸 것.
평범한 사랑은 이런 것으론 체험할 수 없다.
초등학생 때의 나도 연애 소설을 몇 번 읽었던 것 같지만, 분
명 그때 누군가가 제멋대로 생각한 사랑의 우상을 소중히 껴안으며 “아 사랑은 좋은 거구나, 사랑하고 싶다” 같은 생각을 했을 터다.
지금 생각하면 좀 우스꽝스럽다.
그런 어린 시절의 나에게 “『사랑』을 위해 내 평생을 바쳤습니다”라고 전한다면 로맨틱하다고 동경해 줄까.
아니면 바보 같아, 그럴 리가 없잖아 하며 웃어버릴까.
뭐 실제로는 후자겠지.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내 힐끗 보았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싫어도 알 수 있다.
움직여서 체력을 소모하면 지장이 생긴다는 말을 하며 그 녀석이 안내해 준 방.
수많은 모니터가 있고 그 화면은 실시간으로 키보토스의 여러 장소를 비추고 있다.
자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것을 나는 이 장소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다.
“말을 지워버리고 싶다.”는 내 소망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정체불명의 움직이는 나무 인형이었다.
신비가 어쩌니, 예술이 어쩌니 하며 뭐라는데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 신비력과 생명력을 동력원으로 삼아 기억·인식 장애를 일으킨 모양이다.
속아서 죽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부탁했는데 실제 효과는 훌륭했다.
내가 그렸던 대로 아름다운 말들만 남겨진 그 몇 시간 동안, 비난하는 말도 누군가를 상처 입히는 생각도 사라진 세계는 정말 평화로웠다.
그 후에 찾아온 선생님의 얼굴은 정말 걸작이었다.
“설마 자기가 찬 학생이 말을 지운 범인일 줄은 몰랐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계속 누군가와 함께 있었기에 『선생』을 지울 타이밍을 잡지 못했는데, 제 발로 혼자 오다니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났다.
착착 계획은 진행되고 있었다.
진행되고 있는 듯 보였다.
모니터 중 하나가 지워버렸을 터인 말을 계속 외치는 여자아이를 비추기 전까지는.
원래 나는 병약했다.
책을 많이 읽은 것도 괴롭힘당해 집에 박혀 있곤 하던 나에게 오락거리로 엄마가 그것을 주셨기 때문.
병약하다는 건 체력이 없다는 뜻이고, 내 몸에 있는 정도의 힘으로는 완벽한 기억 장애를 일으킬 수 없었나 보다.
이럴 거면 평소에 근력 운동이라도 좀 할 걸 그랬다며 게을렀던 나를 원망했다.
서둘러 드론에 명령을 내려 그 아이도 잡아 왔지만, 이미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뒤였다.
인터넷에선 이미 “자유를 빼앗는 행위다~”라며 주장하는 단체가 결성되거나, “『숙제』도 지워줘!”라거나,
선생님에게 모모톡으로 스탬프를 연타하고 있는데 읽음 표시가 안 뜬다는 게시글 등이 화제가 되고 있다.
말이 사라졌는데도 기를 쓰고 있는 건 의외로 소수파였다.
『……리카!』
모니터의 가장 한가운데.
랜덤하게 풍경을 비추는 다른 화면들과 달리 단 하나만 우려되는 대상으로 계속 같은 사람을 비추고 있는 모니터.
거기서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이름을 불리는 상대는 오늘 하루 만에 얼굴도 이름도 외워버린 흑발의 소녀.
『세리카!』
이렇게 보니 그때 몇 번이나 다시 읽었던 그림책에 나오는 왕자님과 공주님 같다.
그렇다면 나는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마녀쯤 되려나.
찾아온 왕자님을 모두의 기억에서 지운 뒤 가둬버리고, 기껏 지워둔 말을 텔레비전에서 계속 외치는 공주님을 낚아챘다.
응응, 나는 지금 아주 훌륭한 『마녀』 노릇을 하고 있다.
아무래도 좋아져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해버렸지만. 정말 동경했던 건 공주님이었는데.
가장 되기 싫었던 마녀가 되어버렸네.
뭐 하지만 기왕 마녀인 거 마지막 정도는 악역으로서 무대에서 사라지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좋아해』와 『사랑해』를 세상에서 지웠다.
“세리카”라고 불리는 여자아이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드디어 쓰러져 있던 공주님이 깨어난 모양이다.
『세리카, 세리카! 다행이야, 무사해서.』
천천히 일어난 공주님은 주위를 둘러본 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저기. 누구, 였더라?』
그 말을 듣고 왕자님의 얼굴이 얼어붙는다. 『절망』이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듯한 표정.
마녀인 나를 거절했을 때조차 짓지 않았던 표정.
당신, 그런 얼굴도 하는구나.
『거짓말 거짓말! 농담 농담! 그런 얼굴 하지 마,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폴짝 일어나 손을 툭툭 털어낸 뒤, 아직 주저앉아 있는 왕자님에게 손을 내밀었다.
『『선생님』, 이잖아.』
그림책이라면 이 뒤에 두 사람은 이어져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겠지.
하지만 이제 세상에는 『좋아해』도 『사랑해』도 없으니까.
이걸로 전할 수 없게 되어, 잃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깨달으면 된다.
줄곧 굳어 있던 왕자님은 입가가 일그러지더니 엉망진창인 얼굴로 울기 시작했다.
형편없는 얼굴이다.
『무서웠어, 잊어버린 줄 알고.』
『정말, 어른이면서 울지 좀 마.』
『미안, 세리카,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혼자.』
『바보─ 선생님이 도와달라고 했잖아.』
『시끄러워.』
『시끄러워?! 이제 몰라!』
흥, 하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돌린 세리카는 한 박자 쉬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 이끌려 선생님도 울면서 웃는다.
아─아, 정말 싫어진다.
그야 어떻게 봐도 이건 그 그림책에 나온 두 사람이고, 당신들이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을 뿐 이토록이나 『사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걸.
그림책에 나오는 마녀는 언제나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코가 높고 눈매도 기분 나쁘며 입은 날카롭게 열린다.
나쁜 짓을 저지르면서 약한 소리는 일절 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밉살스럽고 추한 모습으로 무대를 떠난다.
그래서 나는 울면 안 됐다.
마녀가 아니게 되어 왕자님이 있는 그림책 밖으로 쫓겨나 버리니까, 울면 절대 안 됐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공주님을 동경하던 때의 순수했던 나를 떠올리며 어찌할 도리 없을 정도로 실연하고 있었다.
세상에서는 『 』도, 『 』도 없어졌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아마 그런 말이 필요 없겠지.
『바보』라든가 『이제 몰라』라든가.
그런 말로 전해지는 『 』이 있는 모양이다.
결국 책으로밖에 말을 배우지 못한 내가 몰랐을 뿐,
책 이외로는 『 』를 깨닫지 못했던 내가 몰랐을 뿐, 말이란 건 분명, 『 』이란 건 분명 사실은 그런 것이겠지.
멀리서 문 여는 소리가 들린다. 가버린 걸까.
이제 됐어.
마녀가 아니라 사랑의 큐피드 쪽이 더 어울릴지도.
저 두 사람에겐 이미 늦었고 소용없겠지만 내 이름도 세상에서 지워두자.
내가 마지막 말을 지우자마자 돌연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마치 소등을 알리듯 수명이 꺼져간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내가 선생님을 『 』하게 된 계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분명 손이었을 거다.
“『로고스』! 세리카, 도움을 청해!”
내 이름이 불리는 기분이 든다.
이 환각이 주마등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방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이제 안개 낀 것처럼 어렴풋하게밖에 그릴 수 없다.
하지만 그 손의 감촉을 무엇보다 『 』했다.
그 손의 온도를, 달아오른 내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그 손을 『 』했는데.
그때 내 손가락 끝이 무언가에 닿았다.
윤곽을 천천히 훑자 사라져가던 기억이 갑자기 선명해진다.
정말 오랜만인, 그리운 감촉.
알고 있다. 이건 선생님의 손이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하며 무엇보다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주는 듯한 그런 손.
“『 』! 나를 알아보겠니?”
거짓말도 환각도 아니었다. 왕자님이 구하러 와준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늦었어.
“안 돼. 왕자님은 공주님만 보고 있어야지.”
그 목소리에 응하듯 내 손이 강하게 쥐어진다.
아아, 그래. 이 손이다. 이 손이 계기였다. 전부, 모든 것의 계기.
그럴 터인데 어째서일까.
이 온도를 뭐라고 하는지 이제 잊어버리고 말았다.
큐피드는 연인이 기도하는 거였던가. 모처럼이니 나도 기도해 두자.
비록 가시로밖에 진심을 자아낼 수 없더라도.
불꽃처럼 화려하게 터진 감정을.
말이라는, 가늘고 약한 찰나의 섬광에 실어.
부디 전해지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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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후아─ 세리카 짱 이제 집에 가나 보네?”
하교 준비를 하고 있자니 자고 있던 호시노 선배가 하품을 하며 말을 걸어왔다.
“어라, 세리카 짱 그 꽃은 뭐야?”
“혹시 누군가에게 주는 선물인가요~?”
모두가 소란스럽다. 아아, 일상이 돌아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나도 평소의 말투로 받아친다. 이제는 말이 목에 걸리거나 하지 않는다.
봄볕 속을 나는 자전거를 타고 달려 나간다. 이번에는 천천히, 되새기듯이.
그날 키보토스에서 일어난 ‘말의 소멸’은 어느 학교에서 발신한 최면 전파의 영향이었다는 것으로 비밀리에 처리되었다.
그러니 그날의 진실을 아는 사람도, 이 언덕을 올라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도 나와 또 한 사람뿐이다.
언덕을 다 오른 곳에 위치한 작은 숲.
안으로 들어서자, 태양 빛이 단번에 차단되고 아주 미세한 나뭇잎 사이의 햇살만이 길을 가늘게 비춘다.
그 안쪽, 아이들의 비밀 기지처럼 숨겨진 장소에 내가 꽃을 전할 상대가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는 듯했다.
“선생님, 와 있었네.”
두 손을 모아 기도하던 선생님이 자세를 풀 때 말을 걸었다.
“아, 세리카. 오늘도 고생했어.”
선생님은 뒤를 돌아본 뒤 반걸음 옆으로 물러나 내 자리를 비워주었다.
아무도 타지 않은 자전거 바퀴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자전거를 밀고 선생님은 그 곁을 걷는다.
참배를 마치고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는 것은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지만 곁에 선생님이 있는 것은 처음이다.
“선생님, 결국 말이야.”
이렇게 대화할 계기가 생긴 것은 분명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지금이 아니면 물을 수 없는 것을 물어두어야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말이라는 게 필요하긴 한 걸까?”
내가 내뱉은 이 말조차 마침 불어온 바람에 휩쓸려 선생님에게는 닿지 않았을지도 만든다.
이 내리막길은 하늘이 어디까지나 멀다.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뻗으니, 나로부터 도망치듯 더욱 멀어진 기분이 들었다.
바람이나 하늘 같은, 아무래도 좋았던 풍경들이 특별한 의미가 되어간다.
바람도, 하늘도, 그 실연조차 지금까지는 모르는 누군가의 것에 불과했다.
분명 마음이 흔들렸다는 것만이 사실일 텐데 필사적으로 이유가 될 말을 찾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것을 찾아내지 못했다.
말을 내뱉는 것은 두렵다.
결국 어떻게 해도 오해투성이고 말에 실리지 못한 진심이 송곳니를 드러내는 것도 보았다.
“말을 지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어.”
선생님은 엄숙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이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관둘래! 세리카 앞에서는 더 이상 강한 척 못 하겠어.”
그렇게 말하는 선생님은 어딘가 아이 같았고,
하지만 아이라기엔 그가 품은 수많은 꿈조차 포기하고 내던져버린 듯한 지독히 쓸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실은 말이야, 지울 수만 있다면 지워버리고 싶어.
말은 라벨에 불과하다, 줄곧 그렇게 생각해 왔어.
하지만 단 한 글자의 라벨이 사람을 죽이기도 하니까 그런 건 없어져 버리는 게 낫다고 나도 생각해.”
한 소녀의 얼굴이 떠오른다.
대사건을 일으킨 범인인데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사람.
홀로 말을 지우려 했던 그 여자아이.
“하지만 말밖에 없으니까 적어도 나는 기도했어.
어떻게 전달될지 따윈 몰라.
애초에 닿았는지조차 알 수 없지.
그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적어도 나만은 보일 수 있도록, 길을 잃지 않도록 그저 비는 거야.
닿기를, 전해지기를 기도하고 그 기도에 말이 굴복하여 무너졌을 때 비로소 전해지는 것이라면.”
전해지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치졸한 나의 기도가 그녀를 죽였어.”
죽였다. 선생님이 그 아이를.
“감정과 감정, 그것을 나타내는 말 사이에 있던 공백.
글로 옮긴다면 분명 1밀리미터 정도겠지.
그런 1밀리미터 속에 아무리 해도 메울 수 없는 틈새가 있고 눈을 가리고 싶을 만큼 깊어.
그 공백이야말로 내가 짊어져야 할 죄의 크기야.”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죽인 것은 나였을지도 만든다.
언젠가 나의 말이 홀로 걸어 나가 누군가를 죽여버릴지도 만든다.
너무나도 잔인하다.
그런 잔인한 말은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어져 있다.
잔인한데도 그 가느다란 빛에 누구나 매달려 그저 기도를 이어가는 모습은 볼품없고, 형편없고, 서툴렀지만 동시에 아름다웠다.
선생님은 조금 앞서 걷는다.
뛰어가며 뒤쫓자, 선생님은 서둘러 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얼굴을 감추기 전 아주 찰나의 순간 보였던 그 표정을 아는 것은 분명 나뿐이리라.
나 역시 추악하다. 결국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그런 인간의 가시 돋친 추악함을, 그 어리석음을.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내포한 채 자신의 죄로서 껴안고 있는 선생님을 나는 그럼에도 『 』하고 있었다.
드디어 나 자신조차 『 』할 수 있게 되었다.
“울지 마, 선생님.”
“안 울어.”
“거짓말, 귀가 새빨갛잖아.”
“세리카야말로 목소리 떨리고 있거든.”
“시끄러워, 지금만큼은 좀 솔직해지면 안 돼?”
“너야말로.”
말을 적고, 마음을 할퀴고.
그 끝에 막연히 보이는 당신을 껴안는다.
나는 오늘도 선생님을 써 내려간다.
전해지기를, 전해지기를 소망하며.
나는 오늘도 말을 새겨둔다.
닿기를 기도하며.
1 / 2
2 / 2Fin.
댓글 7
혹시 vl이 무슨 뜻임? 찾아봐도 안 보이네
그리고 잘 읽었어 ㄹㅇ
글자수욤 ㅎㅎ

세리카가 이렇게 고차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니
순애잖아
명작 애니 한편 본것같다